2015-07-13

말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가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문화일보, 2015년 7월 12일)을 텍스트 에디터에 퍼놓은 후, Ctrl-F를 눌렀다. 제목까지 포함해, 이 글에는 "엄마"가 총 30회 등장한다. "엄마"는 두 글자로 된 단어니, 총 60글자가 '엄마'를 표현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 이름을 빼고, 제목을 포함하여, 본문 전체가 띄어쓰기 포함 2664자라고 나오니, 문제의 칼럼에는 "엄마"가 약 2.25퍼센트 함유되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신문 지면에 오른 칼럼 중 '엄마 함유율'로는 최고 수준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어떨까?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아버지", "파파", "부친" 등을 검색해봐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에는 "엄마"가 30번 나올 때, "아빠"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텍스트에 대한 수량적 분석까지 하는 이유는, 7월 12일 밤 10시 51분에 올라온 이 블로그 게시물 때문이다. 황교익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 내용은 내 칼럼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 대한 비판인데, 심지어 내가 기사를 읽기도 전에 읽고 비판 게시물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내용이다.

황교익의 말이다.

'맞벌이를 했다, 그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부추긴다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때의 그 상황을 누구든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맞벌이는 언급하면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인가.

짐작을 넘어 나더러 무심하고 잔인하다는 억측의 말까지 붙인다.

그런데 정작 그의 칼럼을 좀 더 읽어보면, 맞벌이하느라 자녀들에게 밥을 해먹이지 못한 엄마들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황교익은 자신이 쓴 칼럼을 끝까지 읽어보긴 한 것인가?

‘백종원 엄마’의 음식을 두고 내가 “맛없다”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할 것이다. 이럴 바에야, 진짜 엄마한테 진짜 엄마 손맛을 배우면 어떨까. 엄마도 그때에 맞벌이하느라 사랑을 듬뿍 주지 못한 것에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할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마지막 문장이 '죄책감 찌르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앞서 우리가 꼼꼼하게 세어보았다시피 황교익의 7월 10일 칼럼에는 '아빠'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집밥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중대한 삶의 기회를 빼앗긴 것처럼 묘사된다. 게다가, 거의 모든 칼럼니스트들이 가장 힘을 주는 마지막 문장에서, "엄마"는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할 것"이라고까지 한다. 다시 한 번 묻자. 이게 죄책감 강요가 아니면 뭔가?

왜 황교익은, 자신이 한 말을 두고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가?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엄마'에게, 또 '여성'에게, 나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이 맞벌이 여성에게 "무심하고 잔인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사실인 것을.

그는 블로그 본문에 "이 정도면 기레기이다"라고 내뱉은 것으로도 성이 안 풀렸는지, "#자유기레기인가"라는 태그까지 붙였다. 물론 음식에 대한 전문성에서 내가 황교익과 비교할 대상이 못 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거나, 우기면서 타인에게 인신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사실 진짜 문제는 황교익이 덧붙인 내용에 담겨 있다.

참고로 육아 관련 정책에 대해 내 의견을 밝히겠다.

이 내용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강연과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어 아는 이들이 많다.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이다.

이 정책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아이들의 권리'까지 감안하여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정책을 현실 속에서 실행한다면, 그는 차우세스크와 맞먹는 독재자로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이다. 황교익의 '어머니즘'이 얼마나 현실 정합성이 없을 뿐 아니라 전근대적인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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