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13

복학기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2001년에서 2004년 초까지, 나는 '대학생'들의 반들반들한 얼굴을 바라보며, 과연 이들을 어떻게 '계몽'할 수 있을지를 수도 없이 고민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이지 않은 근심에 휩싸여, 겁을 집어먹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모습을 스스로 귀엽게 묘사하는 이들이 바로 내가 대학에서 마주치는 또래들이었다. '마린블루스' 같은 웹만화 보지 말고 인간의 내면을 진지하게 다루는 출판만화를 읽으라고,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도서관에 가서 그 사람의 다른 책을 다 읽으라고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이 없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문화적 결핍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 이상 탐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지방 출신들은 자신들의 촌스러움을, 1학년 1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소득의 문제라고 도매금으로 넘겨버린 후, 2학기에 술을 퍼마시며 뒹굴다가 2학년이 되는 즉시 일찌감치 고시 공부를 시작하며 주변과의 연락을 끊었다. 자신만은 남들과 다르다는 듯 돌아다니던 운동권 끝물들의 얼굴에는 겸양이 잘 안 먹은 화장품처럼 덧칠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사회과학'이라는 어휘를 견딜 수 없었다. '야, 그건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야. 그저 그런 대중교양서일 뿐이지.' 그런 지점까지 알아버린 자신에 대한 우쭐한 기분은, 그래봐야 그걸 써먹을 곳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으로 늘 돌아오곤 했다. 도서관 책꽂이 모서리에 머리를 들이받아 죽고 싶었다. 두 개의 서가가 양쪽에서 밀려와 나를 압살하여 주기를 바랬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말 그대로 죽어라고 술을 마셨다.

오래 방황했고 많은 일을 겪은 후, 졸업을 위해 학교에 돌아왔다. 드라마틱에 출근하여 에디터로 활동하면서, 또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을 인계하여 찍어내는 과정을 총괄하면서, 나는 매체를 통한 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느끼고 다소 달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그 내용을 담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줏어들은 후, 하겠다는 공부는 안 하고 잡지 일을 하는 자신을 그렇게 위무했다. 지금 나는 세상과,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우고 있는 거다-게다가 돈도 벌면서. 넉달간 일을 하면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그것을 먹는 걸로 풀다보니 몸이 많이 불어났지만, 세계와의 접점을 찾은 후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늘어가는 허리 사이즈를 압도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대학의 강의실에서, 반들반들한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대학생들의 손에 대체 무슨 매체를 쥐어줄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말하자면 지금 나는 절망의 기시감을 느끼는 중이다.

법학관 신관 102호에 앉아 연필 한 자루를 들고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드라마틱이 누구에게 얼마나 팔리고 있는지, FP의 광고 수주가 얼마나 용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런 구체적인 자료와 함께 디테일한 절망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졸업을 고작 한 학기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이들에게 이미 나는 떠난 몸이다. 부대끼며 슬퍼하는 대신, 하나의 유령이 되어 부유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터이다. 수업 종료를 3분 앞둔 시점, 다들 술렁이고 있다. (07.09.1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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