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8

매체로서의 책,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책

지난번에 작성한 포스트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에 달린 많은 수의 리플에 답변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강유원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링크를 타고 넘어오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한 분들과 강유원 본인의 반응을 종합하여 보면 내 글에 대한 반박 논지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강유원은 출판사의 양해 하에 홈페이지에 원고를 게재하고 있으므로 내 글이 전제로 하고 있는 팩트는 잘못되었다. 둘째,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행위가 반드시 책의 판매를 저해한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그러한 이유로 강유원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셋째, 설령 그러한 행위를 통해 책이 잘 팔리지 않게 된다고 해도 출판 노동자들의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강유원에 대한 윤리적 비난은 옳지 않다.

첫째 반론에 대한 답변을 해보자. 나는 이론과실천을 포함한 여러 인문서 출판사에서 강유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원고를 올려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달인》의 원고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출판사에서 올리지 말라고 요청을 했거나, 올렸더라도 곧 내렸음을 시사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출판 관계자들이 그 게시판을 검토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내가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 사실 자체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두 번째 반론과 세 번째 반론에 대한 답변을 검토해야 한다.

'출판사의 양해를 구했다'라는 말이, 너무도 손쉽게 '그러므로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책의 판매에 영향을 주지 않거나, 주더라도 미비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비약하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책의 판매에 당연히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내 블로그에서 답변을 달아 주신 분들, 혹은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사례를 예시로 드신 분들과는 달리, 나는 파일로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글을 굳이 책의 형태로 구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독자군의 일원이다. 내가 문제의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원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사려고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홈페이지에 원고가 올라와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도서구입비로 적어도 십만 원은 쓰지만, PDF 파일을 가지고 있는 책 값으로 7천 원을 지불하는 것은 적어도 내 입장에서 볼 때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다.

문제는 나와 같은 입장에 서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는 데 있다. 물론 텍스트 파일을 구해도 책을 사는 사람이 있고, MP3를 실컷 다운받은 다음 CD를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카피레프트'로 인해 장르를 불문하고 컨텐츠 시장이 초토화된 현실을 놓고 볼 때, '물건으로서의 책이 갖는 매력'만을 놓고 '그러므로 책을 살 사람은 파일이 있어도 산다'는 말로 원고 공개를 옹호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입장이다. 책은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구입하는 조제약이 아니다. 원고가 인터넷에 떠돌건 말건 반드시 사 보는 사람들만이 간신히 남아 있기 때문에 한국의 출판계가 매년 단군 이후 최후의 불황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원고 공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면, 책을 구입하는 것은 책이라는 물건에 대한 자신의 각별한 애정과 그 책의 저자들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일을 대체로 수반하며, 결과적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일종의 기념품으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게 된다.

물론 원고를 공개하고 있음에도 《책과 세계》라던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은 알라딘 기준으로 볼 때 비교적 잘 팔린 것 같다. 그것은 저자의 이름이 강유원이기 때문이다. 원고를 인터넷에 공개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출판사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렇듯 강유원이 어느 정도의 판매량은 보증할 수 있으며 잘 될 경우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저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분들이 리플에서 지적하신 정민 교수나 신영복 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출판사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에게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용납하지 않아 저자와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 발생할 불이익을 회피하기 위해 저자들의 원고 공개를 승낙한다. 한마디로 그러한 경우 저자가 갑이고 출판사가 을인 것이다.

반대로 저자가 무명이거나 이름값이 미약한 경우, 그가 원고의 아주 일부분만을 요약·발췌해서 공개하더라도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포스트를 작성한 후 주변 지인들에게 수소문해본 결과, 자신이 옮긴 원고에서 몇 단락을 발췌해서 블로그에 올렸을 뿐임에도 포스트를 삭제하라는 요청을 받은 번역자의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그렇다. 자신들이 저자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강유원, 신영복, 정민 등 이름난 저자들은 그들의 원고가 인터넷에 떠돌건 말건 책을 사보는 일종의 '사수대', 혹은 고정 판매량이 있기 때문에, 딱 그만큼의 판매량만이라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들의 행동을 용납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언급된 이들 중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그 이상의 판매를 거의 보증하는 저자들이다. 출판사에서는 이들이 달라고 한다면 간이라도 빼 주어야 할지에 대해 기획회의를 하게 된다.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한다고 해서 책의 판매량이 반드시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두번째 반론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의 사례, 또한 전반적인 컨텐츠 시장의 황폐화를 근거로 하여,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책의 판매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내 견해에 반대하시는 분들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산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강유원 등 이름난 저자들의 경우 이미 원고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보다 많은 판매량을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내 블로그에 와서 리플을 달아주시는 분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는 열혈 독자들이 그러한 저자들의 곁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일부 유명 독자들이 출판사의 이익과 상반되는 행위를 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승낙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특히 인문서적의 출판시장 자체가 그러한 열혈 독자층에 기대지 않고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도 없을 만큼 척박해져 있기 때문이다. 원고 공개를 허락하는 출판사는 울며 겨자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판사에서 허락했으니 문제 없다'는 첫 번째 반론과, '출판사에서 허락하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원고 공개는 판매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두 번째 반론은 모두 논거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원고 공개는 그 원고를 공개하는 저자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 동시에 인터넷에 원고를 무료로 공개하거나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스캔 혹은 타자로 옮겨 퍼뜨리는 행위는 출판 시장을 포함한 컨텐츠 업계를 휘청거리게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 나는 이 사회에 후자의 분위기가 너무도 만연해있는 것을 비판하며, 강유원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잘못된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그 덕에 강유원의 팬덤은 유지되고 있고, 그리하여 그를 섭외한 출판사는 최소한의 판매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낙엽 줍기'에 출판사가 의존해야 하는 상황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원고를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는 강유원 홈페이지의 방문객들께는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책의 물건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책을 사는 자신을 특별한 누군가로 생각하는 그러한 소비자들의 속성이야말로, 현재 출판 시장을 이 모양 이 꼴로 몰아가는 주범 중 하나임을 강조하고 싶다. '젊은 여자들이 지적인 척 하려고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책으로 유명했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같은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단 한 권을 사도 뽀대나는 하드커버가 아니면 지갑을 열지 않고, 사 온 다음에는 굳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그러한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자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강유원 선생님의 책이라면 원고를 파일로 가지고 있어도 삽니다. 이 종이의 향기, 하악~'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자. 책을 정보를 담는 매체가 아닌 그 무언가로 소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종류의 소비자가 가지고 있는 간극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나는 그러한 두 종류의 경향이 지니고 있는 유사성을 지적하고 싶다.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의식 없이는 출판시장의 불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내가 굳이 강유원의 '카피레프트'를 문제 삼는 이유를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차원에서, 내 블로그에 달린 리플 중 손병권 님이 달아주신 것에 대해 차근차근 검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이 리플에 다른 리플들에 제기된 논점들이 모두 담겨있다.

"책은 프린트물이나 파일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내용과 상관없이 '책이 예뻐서, 또는 종이 냄새가 너무 좋아서' 책을 사기도 하니까요. 또 프린트물로 읽었어도 책의 내용이 맘에 들면 나중에 들춰보기 위해서나 아님 '가오'를 잡기 위해서 책을 사기도 하는 것이죠."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길게 설명하며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본다. 물론 책은 물건으로서 아름다운 것이고 소유할만한 가치를 지니지만, 매체로서의 성격을 도외시하면서까지 '소장'하게 되는 사치재는 아니라고 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점점 그러한 성격으로 책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의 서적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지만, 나는 그러한 시장의 변화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운로드 받고 그것으로 만족할 독자라면 그는 이미 인문학 시장과는 상관없는 소비자입니다. 관심은 가지되 돈을 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다운로드 서비스가 없다면 도서관이나 옆집 친구에게 빌려 있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이니 출판 노동자의 밥벌이와는 크게 상관 없는 경우라고 봐야겠지요."

이 반론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본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경우를 살펴보면, 나는 한 달에 인문서적 구입비로 근 십만 원을 쓰고, 그래서 그 예산 중 일부를 문제의 그 책에 할애할 생각이었지만, 인터넷에 원고가 공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그럼 나는 "인문학 시장과는 상관없는 소비자"인가? 공개된 원고를 굳이 구입하는 이들만을 '인문학의 소비자'로 이해하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인문학의 시장적 저변을 축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강유원의 팬이어서가 아니라, 엥겔스가 쓴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사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터넷에 공개된 원고만으로 만족할 것이다. 강유원의 원고 공개가 그러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을까?

"저는 인문학 시장이 커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80년대식 출판운동의 방식일 수도 있겠고, 아님 강유원님과 같이 자기 방식으로 '참호'를 굳건히 지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500~1500부 정도의 책을 팔아 서로 나눠 가질 몫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듣던 '성장론'의 재탕인 듯 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인문학 출판 시장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인식이 유효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우리는 책이 갖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보를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전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는 매체로서의 책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기껏 몇 백 명의 팬을 믿고 마케팅을 해야 하는 비굴한 출판업이 아닌, 책의 내용으로 놓고 보건대 어느 정도의 판매량이 떨어지겠다는 계산을 하는, 미디어로서의 출판업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강유원도 1만 부 2만 부씩 팔아치워서 책만 써서 먹고 살 수 있고, 그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도 도전적인 저작을 낸 후 최소한의 용돈 벌이를 하며 다음 책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강유원의 원고 공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된 일련의 소동이, 책이 매체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성격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혹은 자신들이 책을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며 어디에 포진하고 있는가를 되짚어보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짐으로써, 한국의 출판 시장과 인문학적 기반에 대한 재고찰을 요구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강유원의 지지자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강유원은 당신들의 '선생님'이 아니어도 책의 판매 수익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야 할 사람이다. 강유원도 그렇다. '철학공부 하려면 무슨 책 봐야 하나여 ㅋㅋㅋ' 따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 것이 지겹다면, 인터넷을 통한 정보 공개를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매체 시장이 올바르게 형성되어야 할 필요성에 눈을 떠야 한다.

출판 노동자의 수익과 관련된 반론에 대해 답변하며 이 글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단 하나의 출판사만을 놓고 본다면, 또한 지금과 같은 문란한 출판 시장을 움직이지 않는 전제로 놓고 본다면, 강유원은 계속 원고를 공개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그리하여 출판사에 최소한의 판매고라도 안겨주는 편이 그나마 그 회사의 출판 노동자들에게는 이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어가 제 발 끊어먹는 근시안적인 처방일 뿐이다. 출판 노동자라는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원고를 공개하고 있는 강유원의 홈페이지 운영 방침은, 저자의 이름값에 의존하여 계약을 맺고 책을 내야 하는 작금의 경향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러한 움직임이 책을 매체가 아닌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부정적인 시선을 고착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인터넷의 등장 이후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한들, 그것은 옳지 않다.

2008-01-23

외국의 맥락과 창작물의 독창성

지난 포스트를 통해 나는, 이미 존재하는 명작과 주제의식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창작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이후에도 인간의 죄의식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하며, 제인 오스틴의 명작들이 아무리 영상물로 재생산되고 있다 한들 누군가는 꾸준히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물은, 성의 있게 만들어졌을 경우, 아무리 진부한 소재와 주제를 반복하고 있더라도 창작자가 속해 있는 세계의 모습을 충실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마지막 결론 속에 한윤형에게 했던 이야기에 대한 내용도 이미 포함되어 있다. 외국에서 장르 문학을 포함한 창작의 영역이 어느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외국에서 이러저러한 창작품이 나오고 있는 그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맥락을 적어도 대강이라도 알고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한국 문화의 현재성에 충실할 수조차 없다.

가령 한국의 영화지망생 갑돌이가 '나는 삐까번쩍한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부유층 여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각색한 영화를 찍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장 '클루리스나 보고 말하자'는 답변을 들을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중세 유럽풍의, 마법을 최소화 한 세계관을 전제로 한 대규모의 정치 로망을 쓰겠다고 하는 청년의 용기를 북돋워줄 필요는 없다. 우선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를 손에 쥐어주고 나서 이야기를 해보던가 말던가 할 일이니 말이다. 이런 굵직한 작품들의 예를 드는 것이 반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지하게 창작을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자신이 쓰려고 하는 무언가가 남들이 이미 해놓은 것과 겹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그렇지 않고서야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의 중복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퍼붓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 일단 그게 먼저고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어'라고 한국의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이 이런 소리를 많이 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것만큼 순진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작가들은 어디까지나 독창적이고 또 독창적인 존재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혼쾌히 인정할만한 대인배를 찾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한 거장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작가들은 그만큼의 자의식을 구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난 나야, 리바이스' 같은 광고 카피를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 휩쓸려 '외국의 맥락을 검토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윤형이 다소 맥락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외국의 시시콜콜한 작품까지 죄다 검토한 다음에야 창작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고, 또 어느 정도 무지를 전제하고 들어간 작품들이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가 인용하고 내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류 보편적인 주제의식은 다양한 각도에서 꾸준한 탐색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천착이 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외국의 맥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간파한다'는 것이 빠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작가'들이 매우 많다. 판타스틱 편집부에 매일 같이 날아오는 독자 투고만 보더라도, 그러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 90% 이상은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는 자의식에 함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러한 마인드를, 부정적인 뉘앙스를 한껏 담아 '지망생 마인드'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지망생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에 함몰된 나머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또한 자신이 창작하려 하는 장르의 발전을, 전혀 연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윤형이 말하는 작가라는 것이, 이러한 '지망생'중 운이 좋고 재주가 좋은 일부를 칭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대한민국에 작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한윤형의 블로그에 달린 수동 트랙백)

2008년 1월 22일

서울북인스티튜트에서 진행하는 '편집, 디자인, 마케터를 위한 출판 제작 과정'의 제2강을 들었다. FP 한국어판은 단행본 출간을 기획하고 있는데, 어차피 인력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이므로 나는 그 업무도 총괄하게 된다. 편집장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자면 출판 제작 과정을 익히는 것은 필수적이다. (주)포린폴리시코리아의 최환서 사장은 내가 이러저러한 매체의 제작에도 관여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러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 나름대로는 완곡하게 전달했다. 나는 제작 과정을 꿰고 있는 편집장이고 싶지 편집 일을 도맡아 하는 제작자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험생활을 잠시 접고 직업의 세계에 몸담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 다음으로 느끼는 것은 출판과 인쇄라는 두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상호 소통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집단의 지적·문화적 괴리는 가히 놀랍다. 인쇄소 사장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필자였고 편집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떠올리고 있던 나의 관념이 최근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책을 물리적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일화는, 그 당시의 신화 중 하나일 뿐이었을까.

원고를 주는 이와 원고를 받는 이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또한 눈에 띈다. 구체적인 사건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건대 일부 상식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수의 저자들은 출판 노동자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또한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의 원고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오류를 근거로 그들의 지적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이 되도 않는 자존심이나 세운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고, 반면 저자들은 출판사에서 걸핏하면 인세를 떼어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의 일면이 쉽게 드러난다. 저자들은 '출판사', 즉 자본에게 해야 할 화풀이를 노동자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 저자의 원고의 내용을 폄하하거나 그의 인격적인 부분을 걸고 넘어진다. 약한 개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도 우선 한쪽 편을 들고 보자면,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글쟁이들은 자신이 어떤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서 자본론을 다시 쓰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그의 사상이야 어떻건, 그의 노동은 출판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는 저술 작업일 뿐이다. 마감은 지켜져야 하고, 문법과 맞춤법 또한 편집자가 다시 써야 하는 수준으로 엉망진창이어서는 안 된다. 출판 노동자, 혹은 잡지 편집자들이 원고를 다듬는데 괜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필자들은 아무튼 자기 개발을 하면서 그들보다 앞선 정보를 취합하며 필자로서의 입지를 지킨다.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완벽한 원고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편집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일단 잡지로 범위를 좁혀보자. 외국의 경우, 유력 매체의 에디터들은 대부분 두 개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인맥'을 통해 자신이 속한 매체에 원고를 끌어오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유는 곧 그들이 쓰는 글 자체의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사회에 유통되는 언어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은 덜 지우고 대신 각자의 글 수준을 높이는,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그렇지 않다.

매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지적이고 우아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한국의 잡지계의 질적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잡지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절감하면서, 한국인 필자에게 글을 받을 필요가 없는 《Foreign Policy》니까 내가 기꺼이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년 하반기부터 20대 필자들을 모아 매체를 굴려보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조금씩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 그런 것 같다. 매체를 운용함으로써 한국어의 흐름에 인상적인 영향을 남기고 싶다는 이상이, 스스로의 에고를 굳이 억누를만큼 내게 강하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택광 선배의 추천으로 알게 된 《London Review of Books》는, 아직 실물을 만져보지 않아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매체인 것 같다. 특히 커버가 아주 아름다운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낮에 한윤형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던졌는데, 결국 결론은 테리 이글턴 같은 필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맺어졌다. 하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미래의 테리 이글턴'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소년 소녀들의 보모 노릇을 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정중하게 사양하련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 테리 이글턴은 됐고, 일단 나는 한 주에 한 편 이상의 서평을 쓰겠다. FP 마감에 임박해있다면, 하다못해 그 매체의 기사 내용을 토대로 한 매체 비평이라도 반드시 올리도록 하겠다. 필자를 구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원고를 편집할 궁리를 하고 있느니 그냥 내가 쓰고 말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꼬박꼬박 알라딘 서재에 올릴 생각인데,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블로그에 공지를 올릴 터이니 방문자분들의 환호성 섞인 리플을 부탁한다. '왜 업데이트가 없느냐'라는 질책도 감사히 받겠다(물론 공지에 써놓은 바와 같이, '별도로 명시되지 않는 삭제 기준'에 어긋나면 지울 수도 있다).

사실 이 포스트처럼 '2008년 모월 모일'이라는 식의 일기를 적어도 사흘에 한 편 정도 올리면서 스쳐 지나가는 기사와 책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생각해보니 웹에서 읽은 것들에 대한 코멘트에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평을 쓰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일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책과 서평에 대한 감식안이 쌓이고 그것들을 온당하게 비평하기 위한 지적인 토대를 마련한다면, 먼 훗날 언젠가 LRB 같은 매체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내일은 정말 지각하면 안 되는 날이다. 자야지.

2008-01-21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나름의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그 댓가로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르주아'적인 우아함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더 큰 죄악이다. 그나마도 진짜 부유한 사람이 그러고 있다면 모를까, 가진거라고는 자존심밖에 없는 사람의 경우라면, 자신의 그 알량한 체면을 위해 다른 노동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야 할 노동의 댓가를 손상시키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강유원이 그러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의 maunscript라는 메뉴에서 말 그대로 '손으로 쓴 다음 컴퓨터로 옮긴' 원고들을 게재하는데, 문제는 그 중 일부가 이미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다운로드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최신 번역작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인데, 링크가 걸려있다고 해도 굳이 알라딘이나 다른 인터넷 서점에 가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마시라. 강유원 홈페이지에 가면 원고역자 후기가 모두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받아서 아크로뱃 리더로 읽은 다음 프린트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7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었으면 한다. '나는 책 팔아서 돈 벌 생각 없다'는 관점으로 그러고 있는 거라면 그따위 발상은 기둥에 묶어서 불로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책은, 저자에게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과 꿈과 희망의 표현이지만, 출판 노동자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노동의 결과물이다. 번역자로서 인세를 포기하고 싶거든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입맛에 맞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빌딩 위에서 흩날리거나, 경찰의 눈을 피해 불태워버리거나 할 것이지, 대체 무슨 근거로 책의 판매에 해가 될 짓을 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책이 안 팔리면 번역자의 수당만 줄어드는가? 그렇지 않다. '저자'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은 기고나 다른 책의 원고료 등으로 구멍난 수익을 벌충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낸 책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본, 타인의 소득을 짓밟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에 속한다. 태안에서 기름 쏟은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심하다. 그건 그나마, 과실이건 중과실이건 '과실'이지만, 이건 의도가 있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은 기껏해야 1500부 미만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원고가 실려있는 게시물의 조회수가 1000이 넘는다. 1월 21일 오후 8시 8분 현재 다운로드 수는 810회이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문어 제 발 끊어먹기도 이런 경우는 없다. '나는 내 지식을 무료로 공개하는 사람이오'라는 '가오'를 유지하기 위해, 수 명의 출판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위해를 가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강의를 녹음해서 파일로 올리는 것, 그와 관련된 강의 자료까지도 정성스럽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 등에 대해서 나는 강유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한국에서 포드캐스팅을 이렇게 철저하게 추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해서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의 주어캄프'의 번역자가 번역 원고를,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보 공유 정신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약'이라는 것이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를 우선 지키자는 말을 하고 있다.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인문 출판계의 목줄을 이런 식으로 조르는 필자가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가오'를 잡는 이러한 행태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2008-01-13

2007년 독서 목록




직관수학 : 수학 영재들의 수학 사고법

畑村洋太郞

2007.01.05

스트라디바리우스

Faber, Toby

2007.01.08

통계를 알면 인생이 달라진다

大村平

2007.01.08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 변화를 포용하라 / 2판

Beck, Kent

2007.01.10

사용자 스토리 : 고객 중심의 요구사항 기법

Cohn, Mike

2007.01.10

대체 뭐가 문제야? : 문제해결에 관한 창의적 사고를 길러주는 6가지 질문

Gause, Donald C

2007.01.12

컨설팅의 비밀

Weinberg, Gerald M

2007.01.12

(컬트 브랜드의 탄생)아이팟 : 소비자가 만들어 낸 새로운 문화코드 iPOD

Kahney, Leander

2007.01.22

(벤저민 프랭클린)인생의 발견

Isaacson, Walter

2007.01.22

거짓말쟁이, 연인, 그리고 영웅

Quartz, Steven

2007.01.26

제국 :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는가

Ferguson, Niall

2007.01.31

위기의 노동 :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최장집

2007.02.05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파일

한학수

2007.02.05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Granin, Daniil Alexandrovich

2007.02.06

사생활의 역사

Aries, Philippe

2007.02.09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 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

Gawande, Atul

2007.02.14

청갈색책

Wittgenstein, Ludwig

2007.02.21

인간 폐지

Lewis, Clive Staples

2007.02.26

문화와 가치

Wittgenstein, Ludwig

2007.03.08

(한국은행의)알기쉬운 경제이야기 . [4] , 일반인을 위한

한국은행 . 경제교육센터 . 경제교재편찬위원회

2007.03.08

제2의 성서 : 아포크리파 : 신약시대

이동진

2007.03.14

니코마코스 윤리학

Aristotle

2007.03.15

요한복음강해

김용옥

2007.03.21

소품집

Wittgenstein, Ludwig

2007.03.21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

Conrad, Barnaby

2007.04.04

연필

Petroski, Henry

2007.04.04

Old school : a novel / 1st ed

Wolff, Tobias

2007.04.12

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단편선

Mann, Thomas

2007.04.13

우리 시대의 비극론

Eagleton, Terry

2007.04.13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 1st ed

Snicket, Lemony

2007.05.23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근대 기생의 탄생과 표상공간

이경민

2007.06.05

마피아의 계보

안혁

2007.06.05

범죄의 현장 : 세계를 놀라게 한 범죄사건을 통해 본 법과학과 과학수사의 모든 것

Platt, Richard

2007.06.05

연애의 시대 : 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권보드래

2007.06.20

황금광시대: 식민지 시대 한반도를 뒤흔든 투기와 욕망의 인간사

전봉관

2007.06.20

(기생이 쓰는 기생이야기)평양기생 왕수복 : 10대가수 여왕되다

신현규

2007.06.20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김태수

2007.06.20

말들의 풍경 :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고종석

2007.09.06

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풍경

고종석

2007.09.13

푸코의 맑스: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Foucault, Michel

2007.10.02

아픈 아이들의 세대

우석훈

2007.10.08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2007.10.08

음식국부론 : 도마 위에 오른 밥상

우석훈

2007.10.08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Eco, Umberto

2007.10.11

천유로 세대

Incorvaia, Antonio

2007.10.11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 비틀어 보기

Eco, Umberto

2007.10.11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Eco, Umberto

2007.10.12

작은 일기

Eco, Umberto

2007.10.15

미네르바 성냥갑 . 1-2

Eco, Umberto

2007.10.17

내몸 사용설명서

Roizen, Michael

2007.10.18

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Gelezeau, Valerie

2007.10.22

미네르바 성냥갑 . 1-2

Eco, Umberto

2007.10.24

직관과 구성

승계호

2007.11.05

비밀요원

Conrad, Joseph

2007.11.05

달인 : 천 가지 성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

Leonard, George Burr

2007.11.14

철학의 개념과 주요문제

백종현

2007.11.14

나는 철학자다: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Bourdieu, Pierre

2007.11.19

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Sokal, Alan

2007.11.21

역사론

Hobsbawm, Eric J.

2007.11.28

블랙 다알리아

제임스 엘로이


퀴즈쇼

김영하


88만원 세대

우석훈


멋진 징조들

테리 프레쳇, 닐 게이먼


화차

미야베 미유키


용의 이

듀나


성자와 학자

테리 이글턴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슬픔의 냄새

이충걸


정상적인 바보가 되지 마라

크리스토퍼 시


경성기담

전봉관


스나크 사냥

미야베 미유키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김상환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우석훈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우리 까페나 할까?

김영혁, 김의식, 임태병, 장민호


5대에 이어진 철 이야기

토마스 로터


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로버트 D. 헤어


한국의 연쇄살인: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범죄수사와 심리분석

표창원


화차

미야베 미유키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은 작년과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구입하여 읽은 책들이다. 독서 목록이므로 순수한 도서만을 범주에 포함시켰고, 따라서 잡지나 신문 기사, 성서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서 읽은 책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지 다소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총 72권이며 두 번 읽은 책은 목록에서 제외하였는데, 그러한 원칙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다.

확실히 작년에 비해 목록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 이유는 대략 4월 무렵부터 페이퍼하우스에 출근하며 이런저런 업무를 전전하였기 때문이다. 학교와 회사를 오가다보니 책을 빌리고 읽을 시간적 여유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버는 돈을 책 사는 일에 더욱 할당했어야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허락한 자료구입비의 상당 부분을, 작년 말까지 대체로 잡지 구입을 위해 썼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보문고로 달려가 《The Economist》를 구입한 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것이, 외무고시 수험생으로서 확고한 자각을 지니고 있던 시절 내가 누리던 허영이며 호사였다.

하지만 잡지는, 내가 잡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생하는 정보값의 손실이 상당히 큰 매체이다. 평범한 언어로 말하자면 철 지난 잡지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 그걸 다시 꼼꼼하게 읽고 어쩌고 하는 건 그리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한 주에 책 한 권을 사는 습관을 들였어야 한다. 이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다. 말 꺼내놓고 보니 대단히 그럴싸하게 느껴지는데, 현재 예산 구조를 확인해본 후 새해 목표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하면 될 것이다(대뜸 '하겠다'고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서 얻는 할인 효과가 은근히 크기 때문이다. 특히 가격이 2만원을 넘는 물건이라면 더더욱).

책을 사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는 말과도 같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학부를 졸업하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비록 지금 당장이야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대학 도서관'을 또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졸업하고 나면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전부 적어놓지 않는 한 내 머리 속에는 그저 '책에 대한 추억'만이 남아있게 된다. 대학교 저학년 시절 읽었던 책들이 다 그런 식이다. 흥미롭게 바라보았던,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팩트들은 대체로 기억에 남았지만, 그 책에서 정말 곱씹어야 할 부분들은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나 그거 읽었소'라고 자랑할 때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 올해 도서구입비의 절반은 한 번도 안 읽은 책에, 나머지 절반은 이미 읽었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구입하는 데에 쓰겠다.

표의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책들이 바로 사서 읽은 것들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 읽은 것들이 적지 않으니, 도서관에서 대출받지 않은 것들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저것들 중 일부는 언제 읽었는지 그 날짜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일을 사적인 차원에서 하고 싶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은 그것을 그대로 첨부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가령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88만원 세대》는 우석훈의 다른 책을 뭉터기로 보던 시절에 읽은 것이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이 있지만 그건 개별적인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007년의 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88만원 세대》였다. 그 책은 지금껏 문제작이었으며 앞으로 적어도 5년간은 문제작일 수밖에 없다. 목록을 다시 확인하다보니 도서관에서 빌려읽기도 했다는 사실이, 즉 중복기재되어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것을 굳이 정정하지는 않기로 한다. 이미 읽은 책을 번역하는데 예산의 반을 할당하겠다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올해부터는 두 번 이상 반복해서 읽은 경우라도 독서 리스트에 포함시킬 계획이기 때문이다(그러고보니 가지고 있는 책의 목록과 책을 읽은 기록 자체는 별도로 관리해야 하는군).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에 대한 트뤼포의 말은 무엇보다 책에 대해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튼, 매우 늦었지만, 이렇게 2007년의 독서 목록을 결산한다.

추가) 누락된 책 세 권을 목록에 추가한다. 특히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다. 이택광 선배에 따르면 이글턴은 퇴임한 후 한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고 있다고 한다.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루어낼 지적 성취를 기대하게 된다.

추가2) 또 누락된 책 세 권이 있었다. 《진단명: 사이코패스》를 다시 꺼내서 만져봤는데, '윤리적 절대 자유'가 낳는 귀결은 결국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한다. 그들은 모든 규율로부터 '탈주'한다. 소유하기 위해 훔치는 도둑은 바로 그 훔치는 행위를 통해 다이아몬드에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라고 체스터튼이 말했다. 사이코패스들에게는 그러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 없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천성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약탈하는 군인들'처럼 살아갈 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할 수도 있다.

《화차》의 결말은 말 그대로 '쩐다'. 영화 판권이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일본 대중문학에서 애용하는 '한 줄로 평가하기'가 싫어서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빠져들어 끝까지 읽게 되었다. 하층민인 주인공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망자 명단에서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대까지 사랑으로 버텨오던 부잣집 도련님은 이별을 통보하고 만다. 잠시 딴소리를 하자면, 일본을 중산층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부당한 일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2007년에 두 권의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읽었는데, 인물에 대한 화자의 '한 줄 평가'가 드물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는 《스나크 사냥》이 좋았지만, 스토리텔링과 주제의 흡입력 등에서는 아무래도 《화차》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두 권 모두 한 번쯤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2008-01-10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대한 예전 노트

한윤형의 블로그이러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진보누리 누리카페에 올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플라톤의 《국가》를 열심히 읽던 시절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런저런 '사유'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던 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글에서 등장하는 '빛의 비유'의 근원을 알고 싶으신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니 그냥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쓴 기록을 왠지 공개해보고 싶어서, 관련된 노트를 옮겨 적어 게재한다. 자신이 몇 페이지에서 글을 인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고, 자기 생각과 저자의 생각을 마구 뒤섞에서 독서 노트를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실했던 것 같긴 하지만 좌충우돌하던 시절이었다. 해당 게시물은 내 블로그로 옮겨졌다.

법철학 강요

2002. 12.12. 18:38

* 헤겔에게 '개념'은 자기발광체이다.

* 헤겔과 칸트에게 '이성'이라는 것은 빛의 이미지를 진하게 지닌다. 헤겔만 놓고 보면, 즉자적인 것은 스스로를 이성의 빛으로 비춘다는 뜻이고, 대자적인 것은 다른 이성의 빛이 반사되어 비춰진다는 뜻이다. 하긴 계몽 자체가 enlighten 이니.

"현존재와 개념, 육체와 영혼 - 이 일치성이 이념이다."

"의지는 어떤 특수한 방법의 사유이다. 즉, 사유가 자기를 현존재로 번역하는 방법, 자기에게 현존재를 주려고 하는 충동으로서의 사유인 것이다."

"(α) 의지는 자아의 전혀 무엇이라고도 정해져 있지 않은 순수한 무규정성, 즉 오로지 자기의 속에 반절하는 순수한 자기반성이라는 요소를 내포한다.
"(β) 자아는 또한 구별이 없는 무규정성으로부터 구별 세우기에의 이행이고 규정하는 것에의, 그리하여 어떤 규정된 자세를 내용과 대상으로서 정립하는 것에의 이행이다. - 그리고 이 내용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이든 정신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서이든 상관없다.
"(γ) 의지는 이 (α)와 (β)의 양 계기의 일체성이다. 말하자면 특수성이 그 속에 절반(折返)되고 이 일에 의해 보편성으로 환원된 자세, 즉 개별성인 것이다."

* "자아는 이렇듯 자기 자신을 어떠한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하는 것에 의해 현존재 일반 속에 들어간다. - 이것이 자아의 유한성 혹은 특수화라는 절대적 계기이다."

* "개념의 운동원리는 보편적인 것이 특수화된 온갖 자세를 단지 해소할 뿐만 아니라 산출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나는 이를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 즉, 지금 한창 논의되고 있는 심물논변의 문제가 여기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맑스는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에서, 헤겔이 잠정적으로 개념의 손을 들어준 것에 반발한 것 같다.

* 자신을 비추는 개념 - 거울 두 장을 마주보게 하여 그 안에서 빛이 무한반사하는 장면을 상상할 것.

* 개념도 서사의 지배를 받고, 현존재로서의 육체도 서사의 지배를 받는다.

* 이성과 서사의 차이 - 이성은 인간의 도구인데 [반해] 서사는 인간의 환경(nature)이다. 인간이 서사대로 행한다고 할 때, 본성을 따라 들판을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분방함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이성의 손전등을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태양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떠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자유롭다.

2008-01-07

2008년 1월 7일

FP의 편집 마감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내일 밤까지 2차 교정을 마무리짓고 미국에 파일을 보내서 토요일까지 출판 승낙이 오게 하고 싶다. 일하기는 싫고 월급은 받고 싶은 이 모순된 심리상태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사무실에서 나와 잠시 친구와 차를 마신 후 그를 집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겪은 일에 대하여. 아파트 주민이 '너희들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치 아파트 앞뜰이 자신의 정원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이 아닌가(1층에 사니까 자신이 그런 소리 할 수 있다고 우겼지만, 8층에 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목소리를 높이면 동네 사람들이 깨니까, 나름대로 조용하게 아주머니 집에 들어가시라고 권유를 했는데, 남편이라는 자가 나와서 시위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가 막혔다. 그 치들을 곱게 들여보내고, 분노하고 있던 그를 달랜 후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잠시 통화를 한 후, 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의 내용을 곱씹었다. 이 책이 애초의 기대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한국인들이 왜 아파트를 이렇게까지 선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다소 무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 불어닥치고 있는 아파트 열풍이 가지고 있는 사회심리적인 성격에 대한 고찰이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겪은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아파트 한 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희망이요 빛이며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사다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현관 밖으로, 심지어는 단지 전부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렇기에 '더 넓은 평수' 혹은 '더 높은 층수'에 사는 누군가에게 야코가 죽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심리를 좀 더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모든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 단지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아파트 단지는, 주민의 숫자를 n이라고 할 때 n만큼의 행위자가 동시에 영역으로 삼고 있는 전쟁터인데, 이는 최악의 경우 (n+1)!/2, 즉 {(n+1)*n*(n-1)*(n-2)* . . . 1}/2 만큼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아파트 단지에서 싸움이 괜히 많이 나는 게 아니다. 이렇듯 수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하지 않은가).

따라서 자신이 어떤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정서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자랑인 사람은 그것 외에는 별다른 자랑거리나 즐길거리가 없는 사람이므로,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 아파트 한 채 사놓고 버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사회는 정서적으로 각박해지고 문화적으로 천박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아파트 가격이 올라 더 높은 평수와 층수로 올라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나 말고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같은 이득을 누리게 되므로, 자신의 상대적인 지위가 적어도 그 단지 내에서 올라갈 수는 없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물론 다른 듣보잡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 비하면야 떼돈을 번 것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평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이익을 보는 사람과 스스로를 견주어본다면 배고픔보다 더욱 지독한 배아픔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주택만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것의 가격 상승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이겨낸다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역시 다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론과 논리의 바깥에 설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FP로 돌아와보자. 교정을 위해 원고를 읽고 또 읽는다. 번역도 하는데, 하면서 나의 한국어 어휘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양놈들이라고 다들 잘나서 그러는 건 아니고 유의어사전, 말하자면 Thesaurus가 있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는데, 한국어에서 그러한 종류의 것은 오직 《비슷한말 반대말 사전》뿐이다. 그나마 어휘가 한자어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표제어가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알라딘 보관함에 넣었는데 언제 구입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전과 관련해서는 이 마이리스트가 괜찮은 것 같다.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고 또 교정지를 훑어야겠다. 돈이 너무 없던 시절 늘 염원하던 그 물건, 캐틀벨을 드디어 집에 들여놓았다. 오늘 오전에는 트레이너 레벨 캡악력기도 왔는데, 다섯 번을 넘기면 그때부터 힘이 달린다. 한 손에 스무 개씩 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 겸 좀 더 하다가 자야겠다.

2008-01-04

2008년 1월 3일

1월 3일에 읽은 것들에 대해 적어놓을 것들이 있었는데, 밤에 딴짓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하루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올려놓는다.

회사로 오가는 지하철에서 로마서를 7장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율법과 죄와 죽음"이라는 소제목으로 편집되어 있는 7장 7절 이하가 로마서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사도 바오로가 보여주는 내적인 반성, 철저하고도 치밀한 고찰, 광기어린 죄의식에의 몰입과 그것을 신앙심으로 극복하며 육체에 죄를 떠넘기기까지의 과정은, 몇 권의 책으로 주석을 붙여도 모자랄만큼 문제적이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로마서의 독해에서 출발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7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에서 “탐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8 이 계명을 빌미로 죄가 내 안에 온갖 탐욕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사실 율법과 상관이 없을 경우 죄는 죽은 것입니다.
9 전에는 내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1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13 그렇다면 그 선한 것이 나에게는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그 선한 것을 통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16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FP 편집 마감이 끝나지 않았지만, 《드라마틱》에서 맡긴 포커스 원고가 더 급했다. 〈이 바보야, 진짜 경제가 문제야? - 서울 아빠들의 경제 인질극과 신 지역주의〉라는 제목으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서울 유권자들의 '경제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제목이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면 그대로 통과될 모양이다. 전문을 공개할 수는 없고, 주요 단락과 문장을 인용한 후, 기사에서 못다한 내용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 . . 요컨대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발독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대중들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이명박에게 몰표를 주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아니 그 전에 게으른 생각이다. 선거결과를 논하고 그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별 득표율과 그 현황을 짚어보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번 선거에서 그에게 몰표를 몰아준 집단은 경상도에 사는 6~70대 노인들이 아닌, 서울에 사는 4~50대 남성들이다. . .

. . . 전국에 꾸준히 아파트를 짓고 분양가를 높이는 정책은, 사실상 서울시민 중 집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또 하나의 지역주의이다. . .

. . . 앞으로도 인구가 늘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강원도 태백시에도 십층이 넘는 아파트가 여러 단지 건설되고 있다. 대체 거기 누가 들어가서 살 것인가? 분양되지 않아 결국 버려지게 되는 폐건물들은 그 자체로서 범죄의 온상이 되며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은찬이 아빠에게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우리 아들 학원비 내느라 허리가 휘는 와중이니, 일단 내 집값부터 확실하게 올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 . .

. . . 문제는 이들의 지역주의가, 기존의 그것과는 다르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그 속에서 주식이나 펀드나 아파트로 크게 한탕 친 다음 해외로 이민을 가겠다는 투전꾼 같은 발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잠시 등장한 서울 사는 은찬이 아빠의 경우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기러기아빠’니 뭐니 하는 미사여구로 자신들의 행위를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대한민국 내에서 상위 계층에 올라갈 수 있도록, 혹은 대한민국을 떠나버릴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삐뚤어진 교육열을 올리고 있다. . .

. . . 지역주의의 시대가 끝났다고 함부로 단언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경제’를 테마로 놓고 움직이는 거의 모든 담론들은, 단언하건대 서울 시민들의 이기적 지역주의를 포장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서울의 중산층들이 자신들의 이기적 지역주의를 둘러댈 때, ‘그것은 경제가 아니야’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는 영남과 호남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구 지역주의가 아예 종식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현재처럼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유권자가 자신들의 특수한 계급적 이익을 위해 일치단결한 서울 중산층들에게 휘말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표방하는 '경제'라는 구호가 그다지 경제적이지도 않으며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층위에서 지역주의를 재편성하고 있을 뿐이라는 전선을 그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구 지역주의를, 서울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엘리트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그들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 되는 지역으로 확장되어 벌어진 현상이었다고 정의해보자. 노무현의 민주당 분당과 대연정 제안 등은 모두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사건이었는데, 그것을 그런 식으로 까발리고 나자 아직까지 계급정치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한 대한민국의 정치적 균형추가 모두 엉클어졌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이명박은 국민의 3분의 1의 지지만을 얻고도 정동영을 민주화 이후 최대 득표차로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계급정치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또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해야 할 당이 북한의 정치적 엘리트의 논조를 따르는 일파에게 점거당한 시점에서, 서울과 그 외 지역간의 격차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개념틀은 결국 지역주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급적이면 25일 이후 《드라마틱》 2월호가 나온 후 그것을 사 보시고 심도 깊은 비판을 해주시면 참 좋겠다.

지난달 월급을 받자마자 알라딘에서 책들을 주문하였는데, 그 중에는 토마스 프리드먼의 《The World Is Flat: Further Updated and Expended | Release 3.0》이 포함되어 있다. 어제 저녁에 회사에서 나가기 전, 자신이 페이퍼백 에디션을 왜 또 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Introduction을 읽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인간은 2005년 4월에 초판을 내고, 다음해 4월에는 재판을 내고, 그 이듬해 4월에 또 재판을 냈다. 그것을 시치미 뚝 떼고 Release 3.0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세상이 워낙 빨리 바뀌고 있고 출판업계의 속도도 그에 발맞추어 빨라졌기 때문에, 즉 해야 하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한다. 매해마다 새로운 판을 내면 판매 수익을 더 높일 수 있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법대 교수들이 괜히 교과서 판갈이를 하면서, '변화하는 우리 법의 속도에 발맞추어'라고 둘러대는 것을 연상케 한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최근 칼럼을 보면 신선한 발상과 내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아무튼 그는 정말 쉽고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가 두 가지인데 그 중 전자도 바로 그 문장 때문이다. 후자는 이 책이, 아무리 여기저기서 까이고 있다고 한들 세계화 시대의 아젠다를 설정한 몇 개의 주요 도서임에 분명하기 때문인데, 아직 본격적으로 내용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므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언급하기로 한다.

2008-01-03

르네상스맨이 되지 말자

다양한 분야에 대해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는 '르네상스맨'이라는 단어는, 그리하여 결국 생활에 여유가 있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지 않을만한 교수들이 이 분야 저 분야에 잡다한 도서를 내면서 스스로에게 붙이는 훈장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가령 알라딘에서 저자 이름을 클릭하면 총 60권의 다종다양한 도서가 뜨는 영남대 법학과의 박홍규 교수는 자신을 '르네상스맨'이라 칭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유명한 라드부르흐주의자인 서울대 법학과의 최종고 교수는 법상징학 등에 관한 연구를 하고, 《괴테와 다산, 통하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유독 법대 교수들만이 지적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외에도 많은 저자들이 다양한 방면으로 외도를 하며 르네상스적인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다.

'르네상스맨'들의 열의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수만권의 책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고, 특히 한국은 OECD 국가 중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만큼, 한국어로 직접 글을 쓰는 필자의 수는 늘어날수록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맨'이라는 단어가 유한계급의 지적유희를 치장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를 특징짓는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는 지금의 문화 풍토를 나는 지적하고 싶다. 자신을 '르네상스맨'이라 칭하는 그 이면에는 바로 그렇게, 다재다능한 천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진정한 가치는, 그동안 묻혀있었던 그리스 철학의 원전을 직접 탐색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 전까지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도 아랍어 중역본을 보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이 간직하고 있던 그리스어 원전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는 근대 철학이 고대 철학을 극복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도 본질적인 바탕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근대의 예비 단계이자, 동시에 인류 문명 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시대가 되게끔 한 원동력은 바로 그러한 원전을 향한 탐구에 있었다. 물론,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천재가 되고 싶은 기분에 취해있는 저자들을 굳이 뭐라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들의 욕망이 한국 지성계의 어떤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동시에 그들의 그러한 다방면적인 저술 행위가, '너 전공이 뭐야?'라는 질문으로 대변될 수 있는 한국 학계의 '박사학위주의'를 깨뜨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문제삼을만 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르네상스맨들이 결국 부유한 가문에 고용되어 있는 기능인일 뿐이었듯이, 현대 한국의 '르네상스맨'들은 학계의 관성을 타파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선에서 그냥 이런 저런 책들을 내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2008-01-01

2008년 1월 1일

맨큐 블로그의 인용을 보고 데이비드 브룩스의 칼럼을 읽은 다음, 거기서 언급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베니티 페어 11월호 기사를 정독했다. 녹색당을 지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청년이 자신의 글에 큰 영향을 받아 이라크전에 참전하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그 유가족을 찾아가 죽은 아들을 보내는 마지막 가족 행사에 참석하는 내용인데, 읽어볼 가치가 있다. 자신의 임무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평범하고 건실하지만 천상 군인으로서 어울리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던 한 미국 청년이 남겨놓은 글의 파편들을 읽고 있노라면, 다짜고짜 미군들은 다들 저질이고 꼴통이며 저학력자들이라는 식의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경향신문은 연초부터 최장집 인터뷰를 거하게 했다. 나는 1월 1일자를 가판에서 구입하였는데, 1면 하단에 최장집과 이명박 두 사람의 사진을 대칭되게 배치한 그 편집 센스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지난 블로그에서 추천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글을 권하고 싶다. 민주화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할 가치로 놓는 그의 정치관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으며, 특히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을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분할하여 점유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볼 때 그것이 실천적으로 반드시 옳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최장집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가장 명료한 발언을 내놓는 사람이므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최장집도 민주노동당 분당에 대해 유보적이거나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괄호 치고 아주 작게 껄껄껄 이라고 쓰는 기능이 내 블로그에 있다면 좋겠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의 단편 중 하나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었다. 새해 첫날 아침 겪은 개인적인 일로 매우 심기가 불편하던 참에, 좋은 위로를 받으며 감동적인 소설을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두 가지 모두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사도행전을 읽었다. 16장에서 주목할만한 부분들을 발견했다. 내용이 옳더라도 이런 식으로 떠벌이는 것은 타인을 언짢게 한다.

16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17 그 여자가 바오로와 우리를 쫓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8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


또한 27절에서 31절 사이의 내용에 주목해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당마다 걸려있는 저 문구는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여기서 간수가 말하는 바는 체포당하여 처형되지 않고 가족의 안전과 생계를 지켜낼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구원'에 더욱 가깝다. 적어도 내게는 이 대목이 당시의 초대 교회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도망자의 위치에 처하게 될 이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어차피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항변하면 탈옥 소동을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35 날이 밝자 행정관들은 시종들을 보내어, "그 사람들을 풀어 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36 그래서 간수가 바오로에게 그 말을 전하였다. "행정관들이 여러분을 풀어 드리라고 시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
37 그때에 바오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은 채 공공연히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슬그머니 내보내겠다는 말입니까? 안 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38 그 시종들이 이 말을 전하자,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 불안해하며,
39 그들에게 가서 사과하고는, 그들을 데리고 나가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다.

40 이렇게 그들은 감옥에서 나와, 리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 격려해 주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