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01

2008년 1월 1일

맨큐 블로그의 인용을 보고 데이비드 브룩스의 칼럼을 읽은 다음, 거기서 언급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베니티 페어 11월호 기사를 정독했다. 녹색당을 지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청년이 자신의 글에 큰 영향을 받아 이라크전에 참전하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그 유가족을 찾아가 죽은 아들을 보내는 마지막 가족 행사에 참석하는 내용인데, 읽어볼 가치가 있다. 자신의 임무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평범하고 건실하지만 천상 군인으로서 어울리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던 한 미국 청년이 남겨놓은 글의 파편들을 읽고 있노라면, 다짜고짜 미군들은 다들 저질이고 꼴통이며 저학력자들이라는 식의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경향신문은 연초부터 최장집 인터뷰를 거하게 했다. 나는 1월 1일자를 가판에서 구입하였는데, 1면 하단에 최장집과 이명박 두 사람의 사진을 대칭되게 배치한 그 편집 센스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지난 블로그에서 추천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글을 권하고 싶다. 민주화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할 가치로 놓는 그의 정치관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으며, 특히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을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분할하여 점유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볼 때 그것이 실천적으로 반드시 옳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최장집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가장 명료한 발언을 내놓는 사람이므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최장집도 민주노동당 분당에 대해 유보적이거나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괄호 치고 아주 작게 껄껄껄 이라고 쓰는 기능이 내 블로그에 있다면 좋겠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의 단편 중 하나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었다. 새해 첫날 아침 겪은 개인적인 일로 매우 심기가 불편하던 참에, 좋은 위로를 받으며 감동적인 소설을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두 가지 모두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사도행전을 읽었다. 16장에서 주목할만한 부분들을 발견했다. 내용이 옳더라도 이런 식으로 떠벌이는 것은 타인을 언짢게 한다.

16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17 그 여자가 바오로와 우리를 쫓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8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


또한 27절에서 31절 사이의 내용에 주목해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당마다 걸려있는 저 문구는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여기서 간수가 말하는 바는 체포당하여 처형되지 않고 가족의 안전과 생계를 지켜낼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구원'에 더욱 가깝다. 적어도 내게는 이 대목이 당시의 초대 교회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도망자의 위치에 처하게 될 이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어차피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항변하면 탈옥 소동을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35 날이 밝자 행정관들은 시종들을 보내어, "그 사람들을 풀어 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36 그래서 간수가 바오로에게 그 말을 전하였다. "행정관들이 여러분을 풀어 드리라고 시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
37 그때에 바오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은 채 공공연히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슬그머니 내보내겠다는 말입니까? 안 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38 그 시종들이 이 말을 전하자,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 불안해하며,
39 그들에게 가서 사과하고는, 그들을 데리고 나가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다.

40 이렇게 그들은 감옥에서 나와, 리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 격려해 주고 떠났다.

댓글 4개:

  1. 음 덕분에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 무척 재밌게 읽었어요. (못마땅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지성' 앞에서 쉽게 버로우을 타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통사적으로 단숨에 어떤 변화상을 엮어낼 수 있는 그 통찰력 앞에 엎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최교수의 발언 중 많은 부분이 그렇더라구요. 앞으로도 서로가 맘에 들고 옳다고 동의하는 글들을 더 자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사도행전 16장 내용 말인데, 나도 어릴 때 성경공부하면서 늘 이상하게 생각했어. 모름지기 귀신들린(악령, 혹은 하나님의 곁에서 내쫓긴 사탄과 그의 일당들에 씌였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자가 선한 자들을 보고 비방하고 험담하지 못할 지언정 오히려 '홍보'를 해준다는 아이러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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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plath/ 사도행전의 저 귀신들린 여자는, 악의가 있어서 저런 행동을 하는 거라면, 아까 우리가 얘기했던 '남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용하는' 경우에 속할 거에요. 점 귀신 들린 하녀가 며칠째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이 사람이 진짜에요'라고 하고 있으면, 상식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그 대상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겠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이거 재미있다'고 하면 진실로 그 책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마저도 의심스러워지는 그런 현상이 발생하듯 말이죠.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건 별로지만, 동의할 수는 없고 좋긴 한 것도 이것저것 많으니까(내 성격상 그런 거지) 그런 것도 같이 보는 걸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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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미군들과 같이 군생활하고 있는데요... 뭐. 이것도 제 개인적인 편견일수 있는데... 말씀하신대로 다들 무식하고 저질이고 꼴통인건 확실히 아닌 것 같아요. 참 멋지고 좋은 애들도 있고. 너무 당연한 소리하고 있군요.^^;

    그래도 확실히 개중에는 좀처럼 교육받을 환경이 아닌데도 스스로 뭔가를 배우려는 젊은 청년들도 많더라고요.
    군대 안에서 스스로 계급적 의식을 자각하는 애들도 꽤 있구요.

    이것도 편견일 수 있지만 주로 그런 청년들은 선하고 세상 물정 모르게 생겼고 주로 도시가 아니라 진짜 시골중의 시골에서 많이들 오더군요.

    갓 군사훈련 다 마치고 한국에 처음으로 온 미군애들 보면... 다들 그냥 선량해 보여요. 이런 애들이 참 몇개월 지나가면서 참 때가 타는 걸 보는 건 참... 기분이 묘하지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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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jihwan/ 이윤기가 자신이 '장미의 이름'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자랑할 때에도,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미군 병사가 '대체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봐서 가르쳐줬다는 그런 일화를 풀어놓죠. 경제적으로 몰려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 청년들이 모인 집단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요, 아무튼 쉽게 논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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