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2-28

블로그와 인터넷 언론의 가능성

물론 한국적 상황에서 '블로고스피어는 언론의 대안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아우성이 기존 저널리즘을 전부 대체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청맹과니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로그라는 형식과 그것을 통한 기사 생산이 기존 언론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간단하게 사실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미국의 경우, 다수의 언론사가 블로그 형식을 활용하여 독특한 컨텐츠를 대중들에게 공개하고 있고, 또 몇몇 유명 블로그는 기존 저널리즘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던 영역의 컨텐츠를 생산하며 뉴 미디어로 부상하고 있다.

가령 내가 매일 들어가보는 폴 크루그먼의 블로그는, TimeSelect를 무료화함과 동시에 뉴욕타임즈에서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들에게 일괄적으로 블로그를 제공한 경우에 속한다. 폴 크루그먼은 그 블로그를, 자신이 쓴 칼럼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칼럼에 사용된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물론 부시와 오바마를 씹는 용도로도 매우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미국 빈곤층에 대한 그의 칼럼인 Poverty Is Poison을 본 후, 거기서 언급된 통계 자료를 직접 읽었을 때 느꼈던 재미의 쏠쏠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뉴욕타임즈는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들에게 블로그를 제공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블로그에서 출발하여 기존 미디어에서도 인정받는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Lifehacker.com을 꼽는다. 라이프해커는 지나 스테파니가 만든 블로그인데, 특히 컴퓨터와 관련하여 일상 생활과 업무에 도움이 되는, 다소 geeky한 프로그램이나 해킹 방법 등을 매일 스무개 남짓 정리해서 올리는 사이트이다. 라이프해커에 들락거리고 있으면 미국인들이 얼마나 '생산성'에 환장하는지, 인간의 행동과 생산성을 기계처럼 묘사하는 일에 얼마나 친숙한지, 뭐 이런 것마저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블로그에서 출발하여 언론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사이트가 미국에는 없지 않다. 비록 지금은 IT 분야에 주로 한정되고 있지만, 그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올블로그나 다음 블로거 뉴스와 같은 '블로고스피어'가 언론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확실하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캐내는 대신, 기존에 밝혀진 사실에 대한 블로거들의 의견을 집산하는 역할만을 겨우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곳에서 메인 화면에 편집되고 덩달아 조회수를 높이려는 블로거들이 넘쳐나는 만큼, 한국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사실이 아닌 의견만이 넘실거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블로거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없고, 또한 그 차원에서의 '블로그'는 언론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형식이 결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웹에 게시물을 시계열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블로그의 가장 원초적인 개념 정의라고 할 때, 그러한 형태는 개인이나 작은 규모의 집단이 매체 혹은 유사 매체를 꾸리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기도 하다. 태터툴즈에 기반하여 하루 2만명 정도의 조회수를 올리고 있는 익스트림무비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 강유원 홈페이지의 부속물인 그의 서평란 또한, 일종의 서평 매체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다. 블로그라는 형식이 개발되기 전,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들이 다들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었을 당시에는 이런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듀나처럼 매일 웹페이지를 손으로 뜯어고쳐가며 업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블로그가 제공하는 RSS 기능이 없으니 방문자가 매번 찾아오게 만들지 않는 한 조회수를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정보가 시계열적으로 1열 정렬된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언론과 네티즌들의 지나친 설레발이 불러일으키는 반감을 꾹 누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블로그는 개인이 소규모의 언론 활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웹 표현 방식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으로 기능하는 블로그가 턱없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그 이유를 블로그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맥락을 놓고 볼 때 라이프해커나 kk.org/cooltools 따위는 전부 블로그가 아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식의 마케팅을 타고 블로그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네티즌들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고는 못 견디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지난번에 얼핏 언급하였지만, 오늘은 서평을 쓰고 내일은 영화평을 쓴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잠수를 하다가 자신의 일상 잡사를 늘어놓거나 생활 속의 사소한 '깨달음'을 마치 엄청난 발견이라도 되는 양 떠벌이는 그런 공간이 우리가 아는 '블로그'가 아닌가.

블로그는 언론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블로그를 통해 언론의 대안적인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인적 요건이 우선 충족되어야 한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리플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모든 리플이 자기 블로그 하나에 집중되기를 바라지,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만큼은 내 글을 이 사이트에 몰아 넣어야지 같은 생각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 평론을 쓰고 싶다면 영화 평론만을 올리는 블로그를 개설하는 편이 낫고, 서평을 꾸준히 쓰고 싶다면 알라딘 서재를 활용하는 편이 제일 낫다. 하지만 그러면 조회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를 파악한 알라딘에서는 태터툴즈와 이글루스 등의 블로그에서 직접 서평을 작성하고 알라딘에 링크를 걸 수 있도록 하는 플러그인을 제공함으로써 네티즌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한국 네티즌들의 관심사는 언론 형성이 아니라 리플 섭취인 것이다.

알라딘 서재가 흐지부지 망해버린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추적 가능하다. 알라딘 서재는 서평이나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올리기에 최적화되어 있고, 반대로 일반 블로그로서의 기능은 상당히 미흡한 편이다. 그래서 그 곳에 터를 잡은 최초의 '알라디너'들은, 서평도 올리고 자기 개인사도 올리고 하다가, 그게 뭔가 영 어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금슬금 다른 블로그 환경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아까도 말했듯이 한국 네티즌들이 절대 두 개 이상의 블로그를 유지하려 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알라딘 서재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결국 태터와 이글루스 등에 플러그인을 제공하며 중간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블로그를 통한 언론 형성이 난망한 이유는 기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문제에 좀 더 가깝다. 타인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 또한, 그곳에서 정련된 정보와 세심한 고찰을 읽으면서, 동시에 '주인장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느끼고 싶어하고 그런 것이 없으면 낯설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사실과 의견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핵심이지만, 그 이전에 우선 사실은 사실대로 의견은 의견대로 명확하게 분리가 되는 것이 논리적 선행 요건이다. 이렇게까지 실컷 씹어놓고 보니 나름대로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블로그의 이름이 머리에 스쳐지나가지만, 그것들이 온전하게 수용되어 그 블로그의 저자들이 매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할만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인터넷 언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네티즌 자신들이다. 블로그 사용자의 노출증과 자기 중심성이 극복되고,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목적성을 확고하게 갖추지 못하는 한, 인터넷에서 생산되는 글이 기존 저널리즘을 위협하는 일은 그저 요원할 뿐이다.

2008-02-27

취향 테스트 결과

한윤형의 블로그에서 보고 나도 한 번 해봤다. 일단 결과는...












창의적, 예술적인 아방가르드 취향


당신은 여기 분류된 8개 취향 가운데 가장 예술적 감각이 뛰어납니다.


'전위적'이라는 단어가 당신에겐 어색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경험이나 교육이 아닌, 선천적으로 예술적 오감을 타고 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선천적인 예술 에너지는 당신을 수준 높은 문화/예술 소비자로 만들어 줍니다. 

자신감과 솔직함은 당신 취향에 중요한 기준입니다. 대중을 의식하면서 쓴 시,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그린 그림, 카메라 의식하며 하는 연기, 겉멋든 음악... 이런 것들은 경멸의 대상입니다. 서툴고 즉흥적이라도 자신만의 진실함이 있다면 아름답습니다.

이런 취향은 전세계 모든 평론가들이 공유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비록 '평론'을 쓰기엔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최소한 당신은, 전문 평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우수한 심미안과 감별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고흐는 평생 참으로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모델을 살 돈이 없던 그는 평생 거울 속의 자신을 모델로 삼았죠.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았던, 오직 거울 속의 자신만이 바라보던 자화상.
당신의 취향은 이 자화상을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것
당신은 어쩌면 괴짜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당신 취향은 지금까지 주류에 속한 적이 드물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속적인 대중을 떠나 고답적인 예술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당신은 영락없는 메인스트림입니다. 당신은 격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것들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일탈적인 것들이 진실되길 바랍니다. 다음 시에는 바로 그런 진실이 있습니다.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괘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저주하는 것
당신은 (아마도) 훈계하거나 훈계받는걸 제일 싫어할 겁니다. 규율, 법, 질서, 사회 정화, 국민 정서 어쩌고 들먹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취향을 제한하고 옭아 매려는 검열주의자, 엄숙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작품과 인생을 함부로 가치 판단하고 평가하고 거기에서 억지로 교훈을 찾으려는 행위에 역겨움을 느낄 겁니다.



인용된 황지우의 시가 마음에 든다. 아무튼, 다른 결과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것 저것 다 찍어봤는데,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너무 많다. 가령 키치 예술 취향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딱 어울린다고 하거나, 하이퍼리얼리즘을 "심오하고 추상적인 미술 작품"의 대척점에 놓이는 조류로 언급한다거나,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절제력에 의해 품격을 갖춘 시"라고 평하는 것 등이 전부 그렇다. 이 테스트를 만든 사람들의 취향과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을, 이런 식이니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다. 난 그렇게 '아방'하지 않다.

2008-02-22

타자의 언어와 한글의 덫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륀지' 발언이 이후 온 인터넷이 시끌시끌했지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한글 표기법을 이렇게 저렇게 뜯어 고치겠노라는 설레발이 판치는 것은, 정착 단계에 접어든지 고작 5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언어'인 한국어가 감당해야 할 일종의 숙명(여대 전 총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 표기를 뜯어고쳐서 '조국 근대화'에 일조하겠다는 발상의 역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은 것이다. 일제의 강점 당시 서구의 학문 체계를 흡수한 지식인들이 연구할 수 있고 또 연구해야 하는 제1의 대상은 당연히 한국어였다. 한국어를 연구하지 않으면 한국어로 문학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한 기본적인 정서였던 것이다. 충남의 천재 홍명희는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그 아들 홍기문은 국어 연구를 하다가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해낸다. 이것은 비단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의 유입을 겪는 사회의 지식인은 그 충격을 자국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선 흡수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독일 시절부터 스와힐리어 복권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한글 표기법을 영어 발음에 맞게 뜯어고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으며, 그에 대한 이러저러한 반론들이 덜컹덜컹 생산되었다. 그 내용들은 대체로 '외국어와 외래어는 다르다' 내지는, '오륀지라고 써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다' 정도로 형성되었고, 급기야는 '영어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국가 경쟁력과 무관하다'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영어 교육에 대한 논의가 외국어와 자국어 사이의 갈등에 대한 문화적 고찰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그 내용들은 대체로 옳다. 하지만 그것은 이 상황과는 무관하게 원래 옳은 내용이기 때문에, 영어 교육을 위해 한글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 되지도 못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경숙은 과연 '오륀지'를 발음한 것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되물어질 수 있다. 이경숙이 발음한 그것을 '오륀지'라고 표기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표기를 통해 이경숙이 한 발음을 복원해낼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의의 90% 이상이 그 영상을 직접 보지 않았거나, 봤더라도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선 밑에 링크된 참고 영상을 보고 이후의 내용을 전개하도록 해보자.

"혼선의 주역?", MBC 뉴스투데이, 2008. 02. 01

나는 이경숙이 '오륀지'를 발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경숙이 발음한 것은 [ˈorӕndʒ]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전에 orange의 발음이 [ˈorindʒ]로 표기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이경숙의 발음은 표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아무튼 발화하는 내용을 유심히 들어보면, 모음의 변화가 아닌 강세의 부여가 영어 화자의 발음 이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다. 굳이 한글로 표기하자면 ['오린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어퍼스트로피에 유의하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경숙이 말하는 발음의 문제는 우리가 orange라는 단어를 읽을 때 각각의 모음을 어떤 음가로 소화하느냐가 아니라, 첫 번째 음절에 강세를 찍느냐 찍지 않느냐에 따라서 갈라지는 언어적 문제이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가 한글 표기가 아닌 영어 발음에서의 강세에 대한 인식과 적응이라는 것을, 심지어는 그 말을 하는 이경숙 본인도 철저하게 몰랐다는 데 있다.

오랜지를 '오린지' 혹은 '오륀지'로 써놓는다고 해서 이경숙이 말하는 바 '미국인이 알아듣는 발음'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 뉴스 영상 38초에서 40초 사이에 기자가 그 표기를 한국어 식으로 읽으면서 즉각 폭로된다. [ˈorindʒ]와 '오린지'의 간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모음 하나를 발음하기 위해 주둥이를 어떻게 옴쭉거리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다. 언어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에는 강세가 있다. 그것은 영어 화자들이 단어의 정확성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척도이기도 하다. 이경숙이 [ˈorindʒ]를 '어랭재'로 읽었다 하더라도, 첫 음절에 강세만 정확히 찍혀 있었다면, 눈 앞에 오랜지가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음 [r], [n], [dʒ]과 모음 [o], [i]의 발음이 완벽하다 해도 강세가 없다면 영어 화자가 그 단어를 이해하는데에는 곱절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 오랜 기간 체류하면서 '한국인이 하는 영어 발음'에 숙달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대체 왜 신문과 방송에서는 '오린지'가 판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아까도 말했듯이 이경숙 본인부터가 자신이 무슨 발음을 했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차원으로까지 한글 표기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되지도 않을 것을 다짜고짜 '오랜지라고 써 있으면 외국인이 못 알아듣는다'라고 넘겨버린 탓이 크다는 것이다. 둘째, 언어의 음성적인 차원과 문자적인 차원을 혼동하고 있는 발언을, 정말 곧이곧대로 '한글 표기법을 바꾸자'라는 내용으로 보도해버린 언론의 편의주의가 이 논의의 혼탁함에 한 몫을 더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이경숙 위원장이 자신의 그 애틋한 사연을 말하는 과정에서, 그가 발음한 내용이 어떻게 지지고 볶아도 한글로는 표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인수위원장은 영어 발음에 맞도록 한글 표기를 고치고 싶어하는구나'라고 곧이곧대로 이해한 다음, 영어 사전에서 [ˈorindʒ]를 찾아보고는 그것을 '오린지'라고 적었다. 말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받아 적는 사람에게도 교양이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ˈorӕndʒ]는 '오린지'로 다시 태어났다. 그 어디에도 [ˈorindʒ]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적 경향과 맞닥뜨릴 수 있다. [ˈorindʒ]를 발음하기 위해 '오랜지'라는 외래어 표기를 뜯어고치자는 이경숙이나, 그걸 또 사전 뒤져서 '오린지'라고 적어놓는 언론이나, 모두 영어를 한국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로서 영어가 갖는 기본적인 성격, 즉 한글로는 절대 표기할 수 없는 강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 것은 양자가 똑같다. 언론에서 써 놓은 신문 기사만 읽고 설레발치며 세월을 보낸 네티즌들도 마찬가지다. 이경숙의 '오린지' 사건의 본질은, 우리가 영어를 한국어와 완전히 별개의 것인 외국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 공교육이 실패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불어를 처음 가르칠 때 교사들이 악상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것과 달리, 영어 교육 현장에서는 [θ], [ð], [r] 처럼 개별적인 음소의 발음을 다듬는 것에만 집중한다. 정작 중요한 개별 단어의 강세 표시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단어 사이의 연음, 즉 혀 굴리기를 연습하느라 혀 뿌리의 근육을 자르는데, 단어의 강세를 발음하지 않으면서 연음을 굴리는 것은 앉은뱅이가 달려가겠다고 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미련한 짓이다.

특히 영어에 환장하는 한국어 화자들은, 영어가 타자의 언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영어를 구성하는 방식은, 자음과 모음의 발음부터 단어마다 찍히는 강세, 그리고 문법에 이르기까지 한국어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영어에 대한 '정확한 한글 표기법'이라는 성배를 찾아 헤맨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대신, 그들은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표시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숭고한 대상(이 표현 쓰는데 재미 들렸다)에 몰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를 하는 도중에 영어 단어를 정확한 발음과 함께 섞어서 쓴다면, 그것은 한국어 문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애초에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 단어를 섞어 쓸 때마다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강세, 장-단 모음의 구분 등을 무시하고, 그것은 결국 그 단어를 한국어의 일종이 되게끔 한다. 영어로 말하다가 한국어 단어를 섞는 경우도 그와 유사하다.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던 와중에 한국어 단어 한 두 개를 매끄럽게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체계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할 수 있었던, 바꿔 말하자면 일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훨씬 영어를 잘 배웠고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사례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미국에서 의사로 잘 먹고 잘 산 서재필, 미국인들에게 하도 전화질을 해서 부아를 돋굴 정도였다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영어로 일기를 쓰다 한국말로 쓰다 한자로 쓰다 할 수 있었던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 등이 모두 그렇다. 그들은 모두 한학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책에 써 있는 내용을 입으로 옮겨 발음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고, 가령 '치킨나라' 같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사전에 표시된 발음 기호 그대로 그 책의 내용들을 읽었다. 세 사람 모두 엄청난 속도로 영어를 배웠고 그 실력은 평생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개별적인 인자가 우수해서일 수도 있지만, 영어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지금 우리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해방 이후 맹꽁이 배처럼 부풀어오른 '한글에 대한 자부심'에 충만해 있다.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언어인지 떠벌이는 떡밥은 요즘도 잊을만 하면 인터넷에 올라온다. 하지만 한글은 세종대왕에 의해 만들어지던 순간부터 불완전했다. 최세진이《훈몽자회》에서 한자의 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며 절감했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자음과 모음이 사용되었던 그 당시에도, 외국어인 중국어는 한글로 온전히 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언어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한문 고전과 함께 들어온 유교 계통의, 혹은 불교 계통의 한자 어휘들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섞어 쓰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외국어로 쓰여진 외국의 고전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고전 한문을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은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다닐지언정 중국어로 대화를 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지금이야 고전 한문과 만다린의 격차가 넘을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한자를 '외국어'로 받아들여 중국어의 4성조와 발음을 익히지 않았을 뿐이다. 한자 문화권의 커뮤니케이션은 그 덕분에 주로 필담에 의지하게 된다.

자신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언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과 현재의 대한민국은 나름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글이라는 '숭고한 언어'(한글이 언어가 아닌 문자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도외시하고 있으니 그냥 이렇게 써놓도록 하자)가 끼어들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한글은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넋을 지켜낸 그릇이요, 우리가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영어를 표기해서 읽는다면 그 발음은 미국인의 귀에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불완전한 외래어 표기법을 뜯어 고쳐야 한다. 한글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극도로 심각한 분열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은 한글을 숭배하면서 멸시하고, 칭송하면서 폄하한다. 그 이면에는 '영어'라는 언어가 타자의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혹은 영어를 쓰는 힘 센 미군 샘 아저씨와 똑같아지고 싶다는 달성 불가능한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글은 '완전한 문자 체제'가 되는데,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가 영어 학습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글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너무도 우습게 아는 일본어도 한글로 완벽하게 표기될 수 없다. 한글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분하는 음가 표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로 한국어를 완전하게 표기하는 것조차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숭고한 한글'에 대한 숭배에, 앞서 언급한 '국어를 통한 민족 개조'라는 전통적인 맥락이 더해지면서, 나라 걱정하는 애국지사 이경숙은 '영어 단어의 강세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을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로 치환하여 온 나라를 들쑤셔놓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한 기자들은, 앞서 말했듯이 사전에 등장하는 발음 기호를 강세 표시만 쏙 빼놓고 한글로 옮겨 지면에 표시하였고, 그러자 마치 이경숙이 [오린지]라는 발음이 미국에서 통용되는 것처럼 말했다는 듯 이야기가 와전되어버렸다. 그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여 우리의 네티즌들은 벌떼같이 일어났는데, 문제가 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한 바라봄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두루뭉수리하게 '옳은 소리'나 하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되었다.

애초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자들이, 경찰로 치자면 초동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태의 논점을 명확하게 잡고 있었더라면, 논의가 불필요한 방향에서 불타오름으로써 정치적인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글로 영어를 표기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네티즌 중 상당수는 '오뤤지'니 '오뢘지'니 하며, 마땅한 별명을 짓기가 곤란할 때 가령 '노정태'를 '노줭퇘'라고 발음하며 시시덕거리는 고등학교 1학년 유소년들처럼, 극도로 유치하게 자신들의 '반 MB 감정'을 표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영어가 타자의 언어임을 깨닫지 못한 채, 숭고한 글자인 한글의 덫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8-02-21

자기 아니면 우주

요컨대 민족국가의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해석돼온 친일이란 문제는 생활사라는 큰 틀 속으로 흡수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각적인 사고와 조명이 가능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동시에 국가 민족 표준어 등 근대의 큰 틀이 깨지면서 소설 역시 그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상상력을 보십시오. 그리고 일본 만화를 보세요. 자기, 아니면 우주입니다. 소설이 담당해왔던 중간항인 역사나 사회는 빠져있지요. ‘창공의 별’은 사라지고 아주 유치한 동물적 단계와 아주 높은 우주적 단계만 남아있습니다.”

김윤식, “향후 100년 문학의 화두는 ‘우포늪에서 우주 상상하기’”, 경향신문, 2008년 2월 21일, W2면


‘이 작가’란에는 젊은 소설가 김애란을 초대했다. 김애란은 첫 창작집『달려라, 아비』를 통해 한국 소설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두번째 창작집 『침이 고인다』 역시 이 작가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의 소설이 새로운 서사적 밀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규 사회의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동시대 젊은이들의 궁핍한 실존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면서, 특유의 ‘우주지리학’을 펼쳐 보이는 이 작가의 문학적 기량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으로서의 김애란의 뜨거운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문학과사회』겨울호를 엮으며, 『문학과사회』80호


"일본 만화를 보라"는 김윤식의 지적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모닝구무스메의 "Love Revolution" 가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지구' 타령이 나오는 것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일이 문득 기억난다. "The stars, my destination."이라고 선언하는 걸리버 포일은 현존하는 사회적 인간 관계를 손수 파괴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질서를 나름의 방식으로 존중한 반면,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 먼지에 불과해'라고 쉽게 나불거리는 일본 만화 속의 캐릭터들은 결국, 자신의 유아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냉소해버린다. 글이 잘 풀리지 않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2008-02-15

한국판 CSI

채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좁혀진데는 방화 현장에서 발견된 일회용 라이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경찰은 전했다.

일회용 라이터는 춘천의 한 노래방 홍보용으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채씨의 거처가 있는 강화도 장정리 마을 주민들이 지난해 말 춘천에 단체로 놀러가 그 노래방에서 유흥을 즐긴 것으로 확인됐다. 노래방 주인은 강화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경험이 있어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복원하면 되잖나” 태연한 범행 재연…숭례문 현장검증", 경향신문, 2008년 2월 16일.

완전범죄란 없다.

2008-02-14

메신저와 이메일

메신저 소리 때문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다. 드라마몹 시절인데, 한창 녹취를 풀기 위해 볼륨을 크게 해놓았던 때문이다. 몇 초가 멀다 하고 '띠링'하고 울려대는 메신저의 소음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설정에서 소리를 끄면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메신저의 알림 기능에서 소리는 끈다. 사무실에 있으면 부득이하게 이어폰을 껴야 하는데, 그 와중에 '띠링' 같은 소리가 들려오면 정말 짜증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메신저를 활용하는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뭔가 재미있는 것을 읽을 때 그 링크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기능을 활용하고자 할 때 더욱 유용한 것은 메신저가 아니라 이메일이다. 이메일은 당장 그 순간에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지메일 같은 경우 매우 빠르게 검색이 가능하기도 하며, 명확한 기록이 남는다. 메신저 대화도 잘 찾아보면 대화 기록이 자동으로 저장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간적으로 흘러가는 대화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이메일은 남는다.

물론 메신저로 링크를 찍어줄 때 그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당장 그것을 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뭐 그러자는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끼리, 지금 당장 반응을 듣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그런 것들만 보낸다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이메일

2008-02-13

칭얼칭얼의 왕국

흥인지문 감지기 꺼놨었다…"너무 자주 울려서"
[SBS 2008-02-13 21:19:55]

<8뉴스>

<앵커>

더 기가 막히는 일도 있습니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도 KT 텔레캅에서 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야간 적외선 감지기를 꺼 놓았던 것으로 SBS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너무 자주 울려 귀찮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박세용 기자입니다.

<기자>

숭례문에 앞서 지난해 9월 흥인지문의 야간 무인경비 업무를 맡은 KT 텔레캅은 흥인지문 주변에 적외선 동작 감지기 15개 조를 설치했습니다.

순찰이 없는 저녁 6시부터 아침 9시까지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설치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적외선 감지기를 고의로 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흥인지문에 자꾸 드나들어 수시로 경보가 울렸고 관리주체인 종로구청과 경비업체에서 매번 출동하다 보니 짜증이 났다는 것입니다.

[KT텔레캅 직원 : 거기(흥인지문) 하도 사진을 많이 찍는데 이용객들이 그래서 (감지기에)자꾸 걸리는 건데. 우리는 매일 (출동) 가다시피, 하루에도 몇 차례 가야 되고.]

그러다가 숭례문이 불타 무너지는 걸 보고 나서야 꺼놨던 적외선 감지기를 부랴부랴 살렸습니다.

[ KT텔레캅 직원 : (감지기) 신호가 많이 발생돼서 해당 구청에서도 너무 많이 (출동을) 오니까. 센서를 정지시켜 놨다가 어제(11일) 또다시 요청해가지고 다시 센서를 살려 놨다고.]

대문 정면의 감지기들만 꺼놨다며 별일 아닌 듯이 대답하는 종로구청.

[종로구청 직원 : (측면 계단으로 가지 않고 정면으로 들어갔을 때는 감지기가 안 울리는 상태죠?) 그렇죠. 정면 부분에서는 저희가 안 울리게 해 놓았었죠.]

아무나 보물 제1호에 침입해 불을 지를 수 있는 무방비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보안 책임자들이었습니다.


인용된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 신경 쓰지 말고,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의 뉘앙스를 느껴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칭얼칭얼로 망할 것이다.

2008-02-12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택광 선배의 블로그에 방문했다가, 숭례문 화재에서 9/11 테러의 심정을 느낀다는 내용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이 글을 쓴다.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숭례문 화재는 9/11 테러여서는 안 된다. 바로 그러한 시선들이 모여 이 사건을 한국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남대문에 불 싸지르겠다고 노숙자가 궁시렁' 같은 언어들이, 바로 방금 전까지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 악플을 싸지르고 다니던, 하지만 남대문이 불길에 휩싸임과 동시에 졸지에 선량한 '시민'이 되어버린 네티즌 님들의 주둥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나밖에 없단 말인가?

물론 사태가 일대일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한나라당이 200석 이상의 득표를 할 가능성보다는, 이회창이 몰고 올 신당과 국회를 분점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노숙자들에 대한 명료하지 않은 공분은 결국 전반적인 사회적 약자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회창의 신당은, 대선 당시 내걸었던 '따뜻한 보수' 같은 구호 대신, '질서를 바로잡자'는 식으로 한 술 더 뜨는 극우파적 행보를 시작할 것이고, 한나라당 또한 서울을 깨끗하게 '청소'하자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갈 것임에 분명하다. 인수위의 '꼴통스러움'을 욕하던 '네티즌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노숙자를 '청소'해내는 일에 과연 찬성할까, 반대할까?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판국 속에서 좌파 신당은, 설령 총선 전에 완벽하게 창당된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서세영은 한 때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쟁이와 빨갱이가 없으면 노숙자들 밥은 누가 주니?' 자, 이제 예수쟁이들은 속세의 권세로 넘어갔고, 빨갱이들은 사분오열하여 바지에 똥을 싸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 서울의 노숙자들은 죽거나 혹은 죽는 것보다 나쁘거나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을 보며 9/11을 연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잠재적인 범인으로 지목될 것임에 분명한 서울역의 속죄양들을 쓸어내는 인수위 혹은 이명박 정부의 행보를 못 이기는 척 찬성할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과연 '네티즌 시민'들의 알량한 반MB 감정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상식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속죄양을 잡으면 이제부터 진짜 카니발이 시작된다.

나도 제발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

2008-02-11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지젝을 추종하는 사람도, 그 추종하는 이들을 논박하는 사람도,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포스트모던'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그 누구도 지젝이 정말 하고 있는 그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젝은 영화를 비평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현란하게 풀어내지만, 그 모든 지적 활동에 앞서서 순수하게 영화를 즐길 줄 아는 영화광이다. 영화 《300》에 대한 지젝의 평을 우선 읽어보도록 하자. 지젝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 혹은 그에게 반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뒷부분의 이론적인 해설에 관심을 갖겠지만,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낄낄낄'로 일관되어 있는 두 번째 문단이다. 일반적인 비평가들과는 달리 그는 페르시아에서 미 제국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파르타의 결사대를 탈레반으로 간주한다. CG의 발전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현실의 배경 속에 가상의 인물이나 캐릭터를 삽입하는 대신, 실제의 인물을 찍어 가상의 배경 속에 배치하는 기법을 보여주었다며, 그것을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지젝의 '통찰'이 아니라 '안목'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랜 세월동안 즐기며 영화를 봐 온 사람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요소들이 이 짧은 글의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적인 논의에 동의하고 말고는 그 다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젝의 이론들이 '옳은 이야기를 괜히 빙빙 돌려서 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그의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다는 말에 반만 동의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지젝에 반대하는 '좌파'들은 대부분 완전히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과 대립하는 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것 만큼이나 간단하다). 하지만 《300》에 대한 그의 지적은 흥미롭다.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인 통찰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적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영화광이 내놓을 수 있는 신선한 시각을 한껏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내용은 그 다음이다.

또한 지젝은 소설광이기도 하다. '하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단정적일 수 있겠다. 내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무언가 매우 탁월한 지점이 있다고도 한다. 자꾸 소문의 벽 너머로 후퇴하게 되는 것 같으니, 다소 비슷한 뉘앙스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읽어본 에코를 예로 들어보자. 에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학 노년이다. 본인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그랬다. 수 개 국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이 할 줄 아는 언어로 소설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 잘난 척을 하기도 했다. 루카치 같은 철학자는 애초에 문학평론가니까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미국의 법경제학자 리차드 포스너도,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어떤 소설의 발문을 써주기 위해 그 작품을 읽다가 필을 받고 《성과 이성》이라는 두텁고 무게감 있는 이론서를 써냈다. 이런 사례들을 아무리 들어봐야 '지젝은 소설광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거 잘 아는데, 아무튼 지젝은 소설광이다.

지젝이 영화와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설명하면서 보여주는 빛나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이렇듯 그가 실제로 그것들을 즐기며 살아가는 데 기인하고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나는 이걸로 논문을 써야지'라고 작심하고 붙잡고 본 영화에 대해 그토록 발랄한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는 도착증 환자일 것이다. 지젝은 문화연구가이기에 앞서 대중문화를 즐기는 한 사람이고, 바로 그 점이 지젝의 대중적 인기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서도 머리 좋은 놈이 열심히 하는 놈 못 이기고, 열심히 하는 놈이 즐기는 놈 못 이긴다고 하였듯이, 대중들은 즐기면서 글을 쓰는 지젝의 진가를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어 화자인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게 된다. 지젝을 섬기는 사람도 많고, 그러한 '지젝빠'들을 까는 사람도 적잖게 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인문돌이'들이 차려놓은 블로그나, 혹은 그들이 흔적을 남기는 게시판 등을 들여다보면, 과연 지젝만큼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맥락을 향유하고 있는 이가 존재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소설 따위 읽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 놓고 자랑스레 떠벌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영화 볼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완장을 차고 좋아라 하는 이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특히나 '소설 볼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기도 차지 않는다. 적어도 지젝에게는 인터넷 할 시간이 없으면 없지 소설 볼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시사회에 참석하거나 개봉관을 서둘러 찾는 일도 잊지 않을 것이다. 문화비평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화 향유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문화 컨텐츠를 논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자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그것'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짓고, '대중'이나 '광기', '문화적 흐름'이나 '도치', '향락', '재발견'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글에서 다루는 부분은 전체 분량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다루는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어 결정적인 한 지점을 콕 하고 찔러내고 있다. 그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통찰이 아니라 안목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그의 이론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려운 문화적 소양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 워》를, 《칼의 노래》를, 혹은 2002 월드컵을 논할 때 과연 우리는 그 대상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었을까.

이러한 문화적 소양의 결여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였는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혹자의 말처럼 사람들이 매일 야근을 하는 통에 '즐길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인구가 1억 명이 되지 못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소설책 한 권을 사서 볼 돈도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종합되어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문학을 한다고 하는, 혹은 비평의 언어를 생산한다고 하는 이들 사이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일종의 엄숙주의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이, 혹은 한 번 읽고 더 안 볼 책 사보기는 아깝다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즐기는' 것이 '금지된 쾌락'에 속하는 것일까? 흠, 이런 가설은 한 번쯤 세워봄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의 9페이지에 실린 한 어구의 내용을 적절하게 차용해보는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자.

한국에서 지적 엔터테인먼트는 오랫동안 금지된 쾌락에 속했다. 한국인에게 이 금지된 쾌락은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대상으로 현신한다. 불가능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열망은 쾌락은 쾌락이되 고통스러운 향락을 반복하게 만든다. 이 대상이 채우고 있는 빈자리, 그 결여의 지점에 완전무결한 지젝은 숭고 대상으로 존재한다.

말을 하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다. 지젝을 즐기기 위해 지젝이 즐기는 것들을 즐기는 것은 지젝의 광신도들에게, 심지어는 그들을 논박하는 이들에게도 '금지된 쾌락'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젝이 봤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씨네마테크를 향하거나 DVD를 구입하거나,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는 대신, 지젝이라는 숭고한 대상의 진실을 놓고 하염 없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오,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정녕 알지 못하나이다.

상스러운 조짐들

나라 앞바다에서 기름 실은 배가 나자빠지고, 때 맞춰 국가의 보물이 화마에 휩싸여 무너지니, 이 어찌 상스러운 징조가 아닐런가.

2008-02-08

지구를 뒤덮은 슬럼에서 퀴즈쇼에 참여하다

알라딘 서재에 《Q & A》에 대한 리뷰를 올렸다.

. . . 《Q & A》는 현대 인도 사회에 대한 일종의 파노라마를 제공한다. 그것이 주마간산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 사는 독자인 우리는 그저, 점점 평평해지면서 작아지는 세계의 가장자리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정도를 기억하면 된다. 나 자신도 아차하는 순간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굳이 떠올리지는 말기로 하자. 그런 '통찰'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퀴즈쇼》를 펼쳐보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말이다.

리뷰 전문을 읽으실 분은 여기로.

2008-02-05

왕도정치의 실용성과 그 방법론

도를 이룬 자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많고 도를 잃은 자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적다. 도와주는 이가 극단적으로 적은 경우에는 친척조차 배반하고, 도와주는 이가 지극히 많은 경우에는 천하 사람들이 따른다. 그러면 천하 사람들이 따르는 나라를 가지고 친척이 배반하는 나라를 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싸우지 않지만 싸우게 되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다.
73쪽, 《맹자》 (서울: 책세상 2002)


. . . 필자들은 연구 대상을 확대해, 1816년 이래 벌어진 전쟁 80개를 추가해 조사해 보았다. 해당 국가의 사회 계층화 정도는 당시 문헌을 조사해 판단했다. 분석 결과, 전쟁 당사국 중에서 사회적으로 더 평등한 구조를 가진 국가가 전쟁을 이긴 경우는 80%인 것으로 나타났다.
용감무쌍한 전투력과 사회 평등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둘 사이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할 수 있다. 국민개병제 체제로 구성된 군대의 내부 결집 정도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 불평등한 사회의 군대는 종종 국내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동원된다는 점, 이런 사회에서는 적에게 심정적으로 이끌리는 가난한 병사들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13쪽, "평등한 나라가 이긴다", 《Foreign Policy》 한국어판, 2007년 11/12월호, 통권 163호


문제는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론"이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통한 '사회 통합'일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가령 그 유명한 양혜왕 상권의 1장을 살펴보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다툰다면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15쪽, 같은 책)이라는 이유로 맹자는 이익을 말하는 양혜왕을 꾸짖는다. 임금이 인仁을 보여주면 신하와 백성들도 그것을 따라할 것이므로 임금은 이익 대신 인의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 구상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단순한 행동 모형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국민국가의 구성원이 충실한 애국심을 느끼고 있을수록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굳이 위에 인용한 FP의 기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먼저 본을 보여야'처럼 한국어 화자들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나오는 표현들은, 이렇듯 의외로 단단한 사상적 연혁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좀 더 정밀한 분석 및 역사적 고찰을 요한다.

김규항에 대한 벤야민의 코멘트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김규항, "교회", 《씨네 21》, 1998년 12월.


매춘부에 대한 사랑은 상품에 대한 감정 이입의 신격화이다.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 옮김 (서울: 새물결 2005), 1154쪽.

2008-02-04

[낮은 목소리로]“군대 가면 영어 잘하게”

'국민들이 영어를 잘 하게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사고방식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칼럼 하나를 소개한다.

지난 번 글에서 필자는 군대를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곳, 지식사회의 최고 공헌집단으로 변화시킬 기회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방안으로 국방부의 공식 언어를 영어로 지정하고 지식 중심의 군대로 재편할 것을 제안했다. 군 복무기간 동안 모든 군인은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즉 국방부의 시계를 영어로 돌리는 것이다.

군대가 가진 최대의 장점과 최고의 강점은 격리된 집단생활이다. 시간을 통제하고, 언어를 통제하고, 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정확하게 알아들었는지를 복창으로 확인하는 유일한 조직이다.

일반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조직,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절박한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이런 강제력을 가진 조직이 군대 외에는 없다. 어느 사단을 정해서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고 차차 확대해 나가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2년 동안 영어만 쓰는 군대생활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조직이 될 것이다. . .

이강백, [낮은 목소리로]“군대 가면 영어 잘하게” 경향신문, 2008년 2월 2일, 34면.

너무 골때려서 지금은 코멘트 불가.


추가) 이 칼럼의 저자 이강백 씨는 아름다운가게의 집행위원이라고 한다. '뒤집어 쓰면 영어로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철모' 같은 아이템도 거기서 파는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