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09

지난 일주일

《Foreign Policy》 마감이 몰아쳐서만은 아니다.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줄글로 만들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이다. 허지웅의 블로그에 올라온 "디 워, 진중권"이라는 글이 "디 워, 진중권, 노정태"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시점에 나는 이미 그것을 보았다. 특별히 허지웅을 비판하는 것은 내 목적이 아니었고, 비평과 저널리즘과 블로그, 대중과 인터넷과 평론가에 대한 생각들이 RTF 형식의 파일로 조각 조각 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마침 한윤형이 '디 워'와 관련된 주변부에 대한 논점 정리를 하였으니 이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싶어서 허지웅에 대한 비판으로 말문을 열었을 뿐이다. 나는 그 주제에 대해 정작 하려던 말을 아직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저술가는 거칠고 올바르지 못한 표현을 너무 빨리 올바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대체함으로써 그는 그나마 아직 살아있는 작은 식물이었던 최초의 착상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시들고, 더 이상 전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제 우리들은 그것을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버릴 수 있다. 반면에, 그 하잖은 작은 식물은 여전히 어떤 유용함을 지니고 있었다.
16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덜컥 대학원에 들어간 후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화요일부터 수업에 들어가면서부터 내가 벌여놓은 일의 무게를 깨닫고 있다. 잘 했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 강의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은 정말 호학(好學)하는 학자구나 싶은 중견 교수와, 서양철학사에 이어 현대철학사까지 강의하겠노라고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은 후 학생들에게 길고 긴 참고문헌 목록을 조금씩 던지고 있는 젊은 교수가 함께, 첫 시간부터 애누리 없이 수업을 몰아치고 있다. 알라딘에서 내가 쓴 《Q&A》리뷰를 '금주의 마이리뷰'로 선정해준 덕분에 몇 푼 안 들이고 교재와 그 외 책들을 구입하였다. 말이 나온 김에 구입한 책들의 이름을 나열해보자. 《형이상학》(아리스토텔레스, 이제이북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드문드 후설, 한길사), 《존재와 시간》(마르틴 하이데거, 까치),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H. D. F. 키토, 갈라파고스), 《문인기자 김기림과 1930년대 '활자-도서관'의 꿈》(조영복, 살림),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월터 J. 옹, 문예출판사). 당장 수업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급히 읽어야 할 책도 있고, 개인적인 탐구를 위해 다시 음미해봐야 할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이 《임꺽정》의 9, 10권과 함께 회사 책상에 놓여 있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어떤 집단 속에서건 최연소였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리다고 하대하는 것에 대해 그리 민감하게 굴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엄연히 업무와 관련된 사항에서까지 그런 대우를 받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하게 될 일을 두어 번 겪고 나니 다소 속이 부대꼈다. 철학과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 그럴 때 위안이 되었다. 수업에서 듣는 내용도 그렇지만, 아무리 정신적으로 지치게 된다 해도 나는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더욱 큰 애착을 느낀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성큼걸이로 사무실에 돌아와 막혀 있던 일들을 해결하곤 했다는 것이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나는 지금 공부와 일을 대립시키고 있지 않다. '일함'과 '놀고 있음'을 대립시키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글을 읽을 때에도 그렇다. 나는 개념들이 '놀고 있는' 꼴을 참지 못한다. 비평과 인터넷에서의 담론 형성에 대해 말을 꺼내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지함에 대한 경박한 주장과 진지한 주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곳이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일하는 글을 쓰고자 하기에 도리어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몇 년 묵은 고뇌가 순간적으로나마 되살아난 것도 그래서이다. 하지만 적절한 시점에 위안을 얻은 덕분에 오늘도 명랑하게 산다.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다면 실로 그렇다. 정작 문제는 매 순간마다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떠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해결해야 하며,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손 닿는 곳에 넘실거린다. 지금 당장 그 모든 것들을 해낼 수야 없겠지만, 언젠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건 해결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낙관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낙관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데에 생각이 늘 미치면, 나는 모든 것에 손을 대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세계는 병들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철학이 치료라면, 나는 우선 내 팔뚝에 진정제를 주사해야 할 것이다. 《문화와 가치》를 펼쳤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철학자들끼리의 인사는 이래야 할 것이다: "서둘지 말아요!""(이영철 옮김,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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