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31

5월 30일 가디언에 올라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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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outh Korea: A demonstrator sticks a sign on a police bus during a protest rally against the recent South Korea-US agreement on the expansion of US beef imports

Photograph: Jeon Heon-Kyun /EPA



The Guardian, 30.03.08. 24 hours in pictures



30일자 가디언에 올라온 사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2008-05-29

왜 외신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까

100여명이 강제 연행된 지난 화요일, 하지만 외신은 잠잠했다. '닭장차 탑승 시위'의 재기발랄함은 여중생이 연행되는 황망함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주요 언론들은 이명박의 중국 방문을 톱 기사로 다뤘고, 한겨레와 경향 등 일부 언론만이 경찰의 과격 진압을 문제삼았다. 네티즌들은 '우리 편'이 되어줄 언론을 바다 건너에서도 찾았지만, 외신은 침묵하고 있다. 나는 하루에 수십번씩 BBC 뉴스를 체크한다. 가디언과 NYT등도 빠지지 않고 훑는 편이다. AP는 통신사니까 제외한다고 치면, 한국의 현 정국을 전면적으로 다루어주는 외신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외신 기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주 말부터 이번주 수요일까지 벌어진 게릴라성 촛불시위는 '깜'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재미있고 놀랍고 또한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하지만 '고작' 100여명이 잡혀들어갔을 뿐이라면, 사망자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외신의 지면이 그 시위에 할애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제' 뉴스가 되기 위해서는 그정도 스케일로는 충분하지 않다. 뉴욕타임즈와 가디언의 목요일자 국제면을 살펴보자.



5월 29일 뉴욕타임즈 국제면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5월 29일 가디언 국제면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뉴욕타임즈의 경우, 영국이 집적탄 제거 조약에 가입했다는 것, 중국 댐의 범람 가능성이 생존자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 뭐 이런 등등의 기사가 눈에 띈다. 이쯤은 되어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일간지의 지면을 차지할 수 있다. 가디언을 보자. 팔레스타인과 대화하고 있는 이스라엘 대통령, 신간 서적을 통해 폭로된 이라크전 관련한 부시의 거짓말, 이런 것들이 주요 기사로 다루어진다. '일반 시민' 100여명으로 구성된 '일반 시민'들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 따위는 없다. 이건 그들의 국적이 한국인이어서도 아니다. 미국에서 같은 시위가 미국인에 의해 벌어졌다 해도 마찬가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촛불시위는 국제 뉴스 꺼리가 되지 못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강조하는데, 나는 오늘 저녁 광화문이나 시청 앞으로 향할 계획이다. 4시 발표되는 고시를 KBS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솔직히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글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하는 촛불시위를 외신에서 다루어줄 가능성은 앞으로도 거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외신 기자들이 보기에, 무역 장벽 완화에 반대하는 소규모 시위는 언제나 있어온 것에 불과하며, 특히 광우병의 공포를 내세워 쇠고기 수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입장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촛불시위대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건 간에, 외신 기자들의 눈에는 '반 세계화 시위대'의 일부 정도로 취급되고 있을 터이다.

이 문제를 진정 세계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싶다면, '시민'들은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비단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한미 FTA의 전면적인 재검토와 철폐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야 하고, 치솟아오르는 원자재 가격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조직해나가야 한다. 민주노총은 룰라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노동자중앙조합(CUT)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노동단체이기 때문에, 민주노총이 시위를 하면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있다.

통합민주당이 오늘에서야 반대 성명을 내고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태까지 이 문제가 국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야당이 적극적으로 비호해주고 있지 않는 한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소비자운동에 불과하지 정치적인 이슈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이후로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어제까지 민주당이 우왕좌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정치적인 쟁점으로 외신 기자들에게 인식되지 못했고 그 결과 100여명이 연행되면서도 국제 사회의 이목을 끌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최근 과격 시위의 진정한 배후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를 거리로 내몬 장본인은 다름아닌 노무현이다. 그가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난 '한미 FTA 타결'은 그만큼 야권의 움직임을 제한했고, 그에 따라 야당은 적극적인 반발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이 문제는 인터넷에서만 떠돌 수밖에 없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는 반대하지만 한미 FTA에는 찬성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앞뒤가 안 맞는다. 이번 이슈는 한미 FTA에 대한 전적인 재검토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슈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더 이상 '깃발 내려'같은 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촛불 옆에 깃발이 함께 설 때도 되었다. 각계 각층에서 반발하고 있다는 말이 시위를 통해 표현되기 위해선, '당신들은 일반 시민이 아니잖아'라는 목소리가 잦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수의 '일반 시민'만이 반대하는 이슈에 대해 외신은 절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언제나 존재하는 단편적인 불만 세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위를 통해 이명박 정부에 진정으로 타격을 주고 싶다면, '폭력 시위'라는 딱지를 진작부터 달고 살았던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미 FTA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시민의식의 성장일 것이다. 나는 오늘 현장에 가서, 과연 우리의 시민의식이 어디까지 성숙하고 있는지 관찰해야겠다.

2008-05-28

[블로그 속으로] 폭력·불법 시위는 없었다

[블로그 속으로] 폭력·불법 시위는 없었다 (경향신문, 2008년 5월 29일자, 2008년 5월 28일 오후 5시 55분 인터넷 게시)

"폭력 시위를 찾아서"의 축약판입니다.

2008-05-27

폭력 시위를 찾아서

어제 저녁 친구와 함께 광화문에 다녀왔다. 동화면세점 앞 광장과 청계광장 양쪽으로 촛불시위가 형성되어 있었다. 동화면세점 앞은 집회신고가 되지 않은 상태로 사람들이 그냥 모이기 시작한 곳이고, 반면 청계광장은 진보신당과 그 외 단체들이 주도하는 촛불문화제였다. 우선 동화면세점으로 갔다. 닭장차가 그 모퉁이를 빼곡하게 가로막고 있었고, 그 속으로 촛불시위하는 사람들이 들어앉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전경들이 빽빽하게 가로막고 있어서 광화문 사거리 방향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표현의 자유라는 거창한 말이,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차단되고 있었다.

그들은 10시 넘어서 집회가 야간집회로 규정될 때까지 아마도 그 자리에서 계속 대치할 것이므로, 나와 동행인은 청계광장 쪽으로 넘어갔다. 그때가 이미 9시 20분이 막 지나던 시점일 것이다. 촛불문화제는 막판으로 치닫고 있었다. 청계광장에는 그을린 파라핀 냄새가 그득했다. 여고생들이 서명을 받고 있었다. 나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과 관련된 이 논의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협상 무효화를 선언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내 친구는 이름, 전화번호, 주소와 함께 서명을 남겼다.

곧 촛불문화제가 끝났다. 10시 정각에서 10분 모자란 시각이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배후세력이 정말 있다면 이 많은 인원이 그냥 흐지부지 집에 가게 냅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졌고, 그들 중 일부가 방금 내가 보고 왔던 동화면세점 앞으로 향했다. 그들은 촛불을 손에 들고 전경들의 뒷통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10시 정각이 되자, 야간이 되었다는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어제 몸이 좋지 않았던 동행인은 앉을 자리를 찾았다. 면세점 앞 동상 위에 걸터앉았다가, 내려와 화단에 앉았다.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같이 찾아주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10시 20분 무렵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동화면세점 앞에 모였던 사람들은 한줄로 전경 라인을 뚫고 해산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속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진 해산하고 있었거나, 적어도 그런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적어도 1000명은 될 것 같았던 인원은 2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경찰의 포위망은 더욱 촘촘하게 얽혀들었다. 동화면세점 앞 광화문 버스정류장까지 전경들이 점거했다. 고개를 좌우로 아무리 넓게 돌려도 닭장차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그들이 200명 가량의 시위대를 완전히 포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차를 보았다.


(정체불명의 차량: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아까까지 없던 차가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경찰에게 물었다. "이 차, 뭐에 쓰는 건가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이 많은 경찰이, 직업적인 미소를 얼굴에 띄고 대답했다. "최루탄인가요?" "아닙니다." "최루탄 아니면, 살수차인가요?" "대외비라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운운하며 따져볼까 했지만 피곤한 하루였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차를 본 순간부터 목구멍이 무겁고 따끔거리기 시작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도 그렇고 내 동행인도 그랬다. 공기가 갑자기 안 좋아졌다. 중국에서 황사가 몰려온 탓일 수도 있겠지만, 기체 분자가 확산되는 속도 등을 염두에 둘 때 내 목이 갑자기 아파온 원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집회 참가 경력이 없기 때문에 저 차의 정체를 식별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최루탄 발사 차량이 떴다고 단정짓지는 않겠다. 하지만 듀나의 영화낙서판에 가보니, 게시판 주인인 듀나도 "최근에 시내에서 최루탄 터진 일 없죠? 있었다면 뉴스에 났을 테니. 근데 왜 제 코가 계속 가렵고 재채기가 났던 걸까요? 눈도 아리고요. 딱 최루탄 현상인데. 제 코가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을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여러 가지...", 듀나의 영화낙서판, 2008년 5월 27일).

그 시점에서 우리는 자리를 떠났다. 마음같아서는 새벽까지 동참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이미 그저께에도 광화문에 왔었고, 한참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저께 그와 내가 겪은 일은, 본디 한 편의 다른 글로 작성되었어야 할 성격의 것이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하나의 큰 그림으로 짜맞추어지고 있기에 이 속에 넣도록 한다. 그제 우리는 광화문을 쏘다녔다. '폭력 시위'를 구경하기 위해, 혹은 동참하기 위해 밤 10시 무렵 광화문 역에서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전경은 무지하게 많았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청계광장을 지나, 다시 동화면세점 쪽으로 올라간 다음,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을 통해 독립문 방면을, 그야말로 경찰과 함께 들쑤시고 다녔다. 무전기를 하도 시끄렵게 켜놔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다 들렸기 때문이다.

나와 그는 우리가 한 편의 부조리극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범인을 잡겠다고 이 많은 경찰이 돌아다니는데, 정작 불법 시위대는 보이지도 않는다. 광화문 쪽으로! 광화문! 이런 무전을 듣고 따라가보면 그 곳에는 전경만 있다. 독립문 방면, 독립문 방면! 이래도 마찬가지다. 워커 신은 전경들이 뛰기 시작하면 우리는 길 곁으로 비켜서야 했다. 나와 내 친구와 전경 모두가 폭력 시위를 찾아 밤 늦은 서울 거리를 헤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오고서야 그 도둑맞은 편지가 어디에 꽂혀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신촌에서 벌어진 대량 폭력 검거 사태가 일종의 토끼몰이라는 추정에 나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은 전경들을 공허하게 발굴림하면서 그들의 부아를 자극했고, 필요 이상의 병력을 동원함으로써 서울 중심가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했다. 신촌으로 몰려간 이들은 맞을 만큼 맞고 나서 닭장차에 실렸다. 진중권이 생중계를 한 것은 그 다음 날의 일이다. 어젯밤에는 진중권도 맞았다. 경찰이 사람을 괜히 때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누군가가 전의경들이 사람을 때리게 한다. 폭력 시위의 배후 세력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폭력 시위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내가 어제 목격한 것이 최루탄 발사 차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경찰은 계속 강경 진압 노선을 고수할 것이다. 분노에 사로잡히고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행여 돌맹이라도 치켜든다면, 경찰은 때가 왔다는 듯이 더욱 강경한 진압 전술을 펼칠 터이다.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매우 양가적이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혹여라도 사망자가 발생하거나, 그에 준하는 큰 부상이 생긴다면, 몇 명의 노동자가 분신을 하건 두들겨 맞건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던 한국의 '시민'들도 뭔가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찰이 그런 방향으로 집회를 몰아가고 있다. 운동권이라면 학을 떼는 '시민'들의 '리좀'은 경찰의 폭력 앞에 더 없이 취약하다.

하지만 이 집회의 결말이 그러한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렇게까지 뜨거워진 시위가 흐지부지 식어버린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적 역량의 부족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이 발생한 후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시민'들이 입 싹 씻어버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집회에서 맞아죽는 순간 그는 운동권이 되고, 시민들은 등을 돌리는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능성 중 그 무엇도 실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밤이 지난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광화문에 갈 계획이다. 오늘 밤에는 황사 섞인 비가 내린다고 한다. 사람들이 숨고르기를 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앞서도 말했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정책적인 문제에 대해 반대 구호를 외치는 것은, 아직 나 스스로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연행자를 석방하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단지 길거리에 서서 팔뚝질 몇 번을 했을 뿐인 사람들을 44시간씩 경찰서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은 중대한 인권 침해이다.

물론 경찰은 시위가 사그러든 후에도 폭력 시위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나와 내 동행인 또한 얼결에 그들의 뒤를 따라다닌 경험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공개된 공간에서 '연행자를 석방하라'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폭력 시위 가담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아다니던 파랑새처럼, 폭력 시위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두 개의 과제가 각각 수요일과 금요일 마감으로 있다. 가능한 한 빨리, 폭력 시위를 찾아서, 새장을 열러 가야겠다.

2008-05-22

아이언 맨과 테러, 그리고 국가의 성립

나는 '영화 평론가'와 '씨네 설레발리스트'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어만 봐도 바로 감을 잡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두 개념의 차이를 좀 더 설명해보자.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비평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산문을 쓰는 사람을 영화 평론가라고 한다면, 영상 매체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자신이 아는 몇 가지의 개념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영화를 놓고 이런 저런 소리를 마구 씨부리는 인간들을 씨네 설레발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왜 '설레발리스트'인가. 그들은 자신이 아는 주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를 보고도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그 반대로 뭔가 이건 좀 알겠다 싶으면 입에서 마구 침을 튀며 열변을 토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려는 글은 안타깝지만 후자에 속한다. 오늘 밤 10시 20분, 동대문 MMC에서 아이언 맨을 보던 나는, MMC 1관이 필름의 윗대가리를 잘라먹고 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급 분노했다. 이것은 '그럼 나는 영화를 6850원 어치만 보게 된 건가? 허허'라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인식하지 못하면 계속 모를 일이지만 한 번 눈에 띄면 또 계속 신경쓰이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 아닌가. 덕분에 나는 아이언 맨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쾌감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는 일에,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지만 100%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에서 테러범을 묘사하는 방식과 그 외 여러 장면에서 설레발을 칠 수 있는 여지가 눈에 띄고 말았다.

토니 스타크를 납치한 후 괴롭히는 테러 조직의 만행에 대해 생각해보자. 물론 테러 조직은 지역 주민들에게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농민들이 아편을 기르는 이유는, 그것을 팔아서 무기를 구입하고자 하는 테러 집단의 압력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멋대로 세금을 걷고 인력을 징발하는 무장 단체라고 보면 된다. 적어도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스타크가 출동을 결심하게 하는 사건을 돌이켜보면, 테러범들이 마을을 황폐화하고 괜히 사람들을 죽인다는 식으로 '악행'을 묘사하는데, 이건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 드라마에서 '조폭'들이 포장마차를 때려부수는 그런 수준의 저급한 표현일 뿐이다. 이 영화의 테러 조직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딱 한 놈 살려두고 그 사람을 지역 주민들의 손에 맡긴 후 떠나는 장면에서, 나는 '법의 기원이 되는 시원적 폭력' 따위 개념을 얼른 떠올렸다. 제3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인 문제가 정치적 자결체의 성립과 존속 차원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장집단이 정부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 일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국가의 형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언 맨이 쳐들어가서 나쁜 놈들 아무리 죽여준다고 해도, 그들이 스스로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를, 혹은 그에 준하는 정치적 단위를 구성해내지 못하는 한 외부로부터의 침략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런데 벤야민과 그 벤야민의 글을 비평하는 척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데리다, 그 외 여러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형성, 즉 폭력을 독점하는 정치적 집단의 형성에 있어서 그 주춧돌에 피가 뿌려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아이언 맨이 떠나간 그 자리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도, 찍어놓은 감독도 사실 모를 것이다. 아무튼 그 장면을 보니 국가의 건설과 시원적 폭력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테러 조직에 대한 이해도 문제로 돌아가보자. 진작부터 스포일러는 시작되어 있었으니 그냥 쭉 서술하자면, 나는 그 이름 길고 복잡한 대 테러 요원이 오히려 테러 집단의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했다. 인터뷰를 한다는 핑계로 집에 찾아와 스타크의 구형 심장을 훔쳐가고, 그래서 어찌어찌 테러 집단이 수트를 소유하게 되는 그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잘 생각해보니 그런 상상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FP에서는 '백인 남성'도 인터넷 등의 경로를 통해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지난 두 호에 걸쳐서 펼쳐오고 있다. 2008년 3/4월호의 "신세대 테러리스트", 5/6월호의 "차세대 테러리스트, 어떻게 찾아내나" 등을 몇 번씩 읽고 나니, 자신을 대 테러 요원이라 소개하는 백인 남성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지점까지 문제를 복잡하게 끌고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였고 그 아들의 사업 파트너로 살아온 '2인자 인생'의 분노가 결국 그 모든 소동을 낳게 된 원인이라는 식으로 스토리 라인이 전개된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리 신선한 선택도 아니다. '씨네 설레발리스트'로서의 한계를 또 한 번 드러내며 솔직하게 기술하자면, 달랑 스파이더맨 2 하나 보고 하는 소리인데, 마블 코믹스 원작의 침공은 헐리우드의 캐릭터 형성에 나름대로 신선한 조류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대중적으로 접근이 쉬워지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아무튼 마감을 끝내고 책을 찍어낸 다음 훌훌 터는 기분으로 보기에 딱 알맞은 영화였던 것은 분명하다. 동대문 MMC의 도움으로 프레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으니 일석이조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씨네 설레발은 여기까지.

2008-05-20

한국, 한국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번 호 FP 한국어판은 "세계 100대 지성"을 커버스토리로 앞에 올렸습니다. 영어판의 커버스토리는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입니다만, 한국어판 편집부는 장시간의 토론 끝에 "세계 100대 지성"을 커버스토리로 선택했습니다. "세계 100대 지성"은 원래 FP Index용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의 원문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저희 편집부원들은 FP가 선정한 세계 100대 지성인으로 한국인 중에서는 누가 뽑혔을까 궁금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눈에 불을 켜고 한국인 이름을 뒤져보았습니다. 한국 사람 이름은 없었습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사실입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이 100대 지성인의 명단 속에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여럿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00대 지성 명단이 절대적인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한국인은 단 한 사람도 이 명단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 한국이 세계적 지성을 배출시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의미 있게 다루어지는 지식인 가운데 처음 그 이름을 대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고 맙니다.

이번 호에는 "중국의 아프리카 ‘대공습’"이 실렸습니다. 필자 세르쥬 미쉘은 1년 반이 넘는 취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한 중국의 성공담, 아프리카 현지에서 겪는 어려움과 그 까닭에 대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랜 세월 세계 강대국의 착취 대상이었던 아프리카, 세계의 공장으로 탈바꿈하며 막대한 외화를 손에 거머쥐었지만 국제 사회로부터 존중받지는 못하고 있는 중국,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을 바라보며 아프리카 재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유럽, 이 삼각축의 각축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저널리즘의 수작을 꼭 한번 일독하시길 권합니다. 국제 문제에 단지 ‘관심’을 갖는 차원을 넘어, 국제 문제를 ‘국제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한국의 ‘롤 모델’로 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 다음으로 한국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는 식의 말들이 숱하게 떠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한 우리는 어렴풋한 기대의 ‘막’을 한꺼풀 씌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신화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은 이 지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은 우리가 아는 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게르솜 고렌버그는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이스라엘을 현실 속의 이스라엘로 대체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그러한 시각 전환에 동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펀드 시대’가 개막하면서 해외 주식에 투자하시는 분들이 늘었고, 따라서 국제 정세 관련 정보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늘 어렵고, 어쩌면 정확한 예측이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도도한 물결에 휩쓸리게 되면 국제 정세에 대한 제대로 된 시각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호 "독자 편지"를 정독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지난 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던 미국의 경제 위기에 대해, 각국의 석학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 깊은 토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FP 한국어판을 읽는 맛이 어떤 것인지 새삼 느끼시리라 확신합니다.

-한국어판 편집부



* Foreign Policy 5/6월호 한국어판 편집자 서문. 오늘 서점 배본 들어갔습니다.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개별판매나 정기구독 문의는 02-713-0143. 담당자 김신영씨에게 문의하세요. 내가 만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좋은 매체입니다.

* 매체 홍보를 위해 올려놓는 것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

2008-05-19

오바마와 한미 FTA의 미래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에 따르면, 어떤 헛간에서 한 무리의 농부들을 향해 연설하면서, 오바마는 일본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아무리 높은 수준의 고기를 수출하려 한다 해도 일본에서 수입하지 않는 바와 같이, 자유무역으로 인해 미국 내 일자리가 잠식될 가능성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우병 정국을 통해 모든 한국인이 알게 된 사실이 있으니, 일본은 20개월 미만의 뼈없는 살코기를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수입 제제 처분으로 인해 미국산 쇠고기의 값이 비싸진 덕에, 호주산 쇠고기가 시장에서 더욱 잘 팔리게 되었다는 것이다(물론 호주산이 더 비싸긴 하다). "미국산 쇠고기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호주산 쇠고기가 채웠다"고 일본 통상부의 육류 통상 담당자 시로우 이누카이는 말한다. 게다가 일본 내에서 수요가 전체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의 판매량이 예전, 즉 2003년에 비해 신통치 않다는 것이 WSJ의 기사 내용이다.

문제는 오바마가 지독한 보호무역주의자, 혹은 포퓰리스트라는 데 있다. '외국과 무역을 터서 좋을 것 없다'는 사례 중 하나로 한국과 미국의 자동차 교역을 짚어낸 것만 봐도 그렇다. 원문을 인용해보자. "Obama also cited the small number of American cars sold in Korea versus the booming sales of Korean models in America." 한국에서는 미국차가 많이 안 팔리는데, 미국에서는 한국차가 판을 친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한미 FTA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이라 하겠다. 미국에 현대차를 팔기 위해 이것도 내주고 저것도 내준다던 한국 정부의 협상 방침이 얼마나 투박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쯤 되면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서 FTA 체결에 지장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어차피 미국 내 분위기가 보호주의로 급선회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바락 오바마의 '경제 공약'은 바로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안티조선'은 끝났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는 그 단어에 너무도 많은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지금은 그저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을 비아냥거리는 것 외의 어떤 정치적인 함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안티조선'이라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키워드의 생명력은 이 시점에서 다 한 것이다. 광우병 파동을 둘러싼 언론들의 보도 태도와,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자세를 동시에 관찰해 본다면, 분명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안티조선은 끝났다.

잠시 기억을 돌이켜, 안티조선 운동이 한창 뜨겁던 당시 가장 후끈했던 이슈 중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때 안티조선에 참가하던 이들은, '조선일보는 나쁜 신문이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를 놓고 일종의 철학적 논쟁을 펼쳤다. 홍세화씨는 '지식인'의 특수한 지위를 암암리에 전제하고(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을 터이다) 조선일보를 볼 수도 있다고 한 반면, 고종석씨의 경우 조선일보를 아예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안티조선의 이념에 충실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논쟁에서 전자의 입장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천적으로 더 큰 성과를 거둔 것은 후자의 입장이다. 안티조선 논쟁을 통해 특히 조선일보는 대중들로부터 언론의 공신력을 상실하였다. 동시에 사람들은 신문, 더 나아가 활자 매체 자체를 경원시하고 있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안티조선을 슬그머니 이끌어가려던 시도가 눈에 띄던 당시의 '안티조선'이 일종의 정치 과잉, 혹은 의미 과잉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애초에 신문 따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책이나 잡지 또한 절대 제 돈 주고 사보지 않는 이들이 '나는 조선일보, 아니 좃선 찌라시를 보지 않습니다'라고 떠벌이는 현재의 '안티조선'은 정치의 부재와 의미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 터이다. 조선일보를 보면서 조선일보를 비판하고, 그 외의 다른 시각을 얻기 위해 여타의 언론 매체에 촉각을 기울이던 최초의 열정은, 그 내용이 옳건 그르건 일단 조선일보의 기사라면 비웃고 보는, 사회적 관심의 나태를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선일보 보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이제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 현재 네티즌들이 표명하고 있는 안티조선이란, 사실 '나는 조선일보 보지 않습니다'라고 기술되어야 마땅한 현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네티즌이라 불리는 인터넷 사용층의 이른바 '난독증'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혹자는 네티즌들이 '어렵고 딱딱한' 글이 아닌 '쉽고 재미있는' 웹툰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고 칭송하지만, 굽시니스트의 블로그에서 발생한 리플 파동을 보고 있노라면 난독증의 대상은 단지 텍스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시위에 참석한 여고생에게 과외 선생이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는 "민희에게"(Homa Comics, 2008년 5월 13일)라는 웹툰에 달린 리플들을 보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내용의 만화에 '이명박 앞잡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안티조선'이라는 의제가 기존 매체, 혹은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정당화하는 테제로 이해된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문맹률은 낮지만 읽고 쓰는 능력(literacy)은 형편 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든다.

나는 긍정적인 사회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차원으로 흡수된 언론 운동이 지니고 있던 한계가, '정치성'에 언어가 휩쓸려 들어가는 형태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어의 현주소일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한 움직임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자신이 하나의 언론을 운영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처럼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는 훌륭한 언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블로그에 쓰는 한 편의 글에서도 정확한 사실관계와 치밀한 논리 구조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작은 실천의 일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지 않은 언론'에 대한 냉소만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점이 이미 지났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2008-05-13

1968년 5월에 대한 회고들

그 많던 '신좌파'들은 다들 어디 갔을까? 한국의 '좌파'들은 놀라울 정도로 잠잠하기만 하다. 광우병 정국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나보다. 아무튼 올해는 68혁명 40주년이다. 그에 따라 다양한 기사들이 외신에 올라왔는데, 기록을 남기는 겸 해서 적어놓을까 한다.

뉴욕타임즈에서는 폴 오스터가 68년 5월 1일에 발생했던 대학가 점령을 회고한 기사가 올라왔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반발 혹은 호응이 이어졌다. 폴 오스터는 다소 후일담 소설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그 당시 '우리는 미쳐 있었다'고 읊조리지만, 독자 중 일부는 '우리'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까지 한다. 두 기사 모두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The Accidental Rebel", Paul Auster, The New York Times, 2008년 4월 23일.
""In '68, Our Protest Made a Difference", LETTERS, The New York Times, 2008년 4월 30일.

이번주 New Stateman의 주제 또한 1968년이다. 노암 촘스키, 에릭 홉스봄 등의 기고문과 함께 노동당의 노장 정치인 토니 벤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기사 목록을 보고 싶으면 여기로.

BBC World Service에서는 지젝과 바디우 등을 불러놓고 당시 부흥한 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지젝의 지독한 동유럽식 영어 발음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면서 귀에 꽂아놓고 있어서 별로 집중하지 않았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참여자들은 대체로 68 혁명과 정치, 철학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마땅한 논거를 충실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러한 해석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다. 직접 들을 수도 있고, mp3 파일을 다운받을 수도 있으니 꼭 한 번씩 방문해보는 것을 권한다.
"Philosophy in the Streets", BBC World Service, 2008년 5월 13일.

목숨 걸고 먹는 음식

아까 GQ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기사 한 편을 보냈다. "미친 소와 감기 걸린 닭에 대한 전 지구적 고찰"이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편집부에서 더 좋은 것을 붙여준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GQ 6월호에 실릴 예정인데, 그 기사에서 다소 논의가 미흡했던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 포스트를 쓴다.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과 관련해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지점 중 하나는, '우리가 100만 분의 1 확률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의 전제가 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가정인데, 안타깝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일본에서 설날마다 먹는 끈적끈적한 떡국 오죠니(お雑煮)를 예로 들어보자.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는 매년 몇 분의 어르신들이 이것을 드시다가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이미 2006년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이는 총 인구중 65세 이상인 사람이 20% 이상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일본의 노년 인구수는 전체 인구를 1억 4000만으로 잡았을 때 대략 2800만 정도가 될 것이다.

이들 중 계산의 편의를 위해, 매년 7명 정도가 매년 설날에 오죠니를 드시다가 돌아가신다고 해보자. 그러면 사망률은 0.5/100만이 되므로, 200만 분의 1이다. 전체적인 사망 원인과의 비교 등을 하지 않고 그냥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더라도, 일본의 노인 200만명 중 한 사람은 오죠니를 먹다가 목에 걸려 죽는다. 이것은, 정부에서 말하는 바를 네티즌들이 요약하는대로, 미국산 쇠고기를 먹다 사망할 확률이 100만분의 1이라고 할 때, 그것의 절반 정도 되는 수치이다. 결코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각심을 잃을 수도 없는 숫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이런 살인적인 풍습을 대체 왜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걸까?

이 풍습이 살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들 알 수 있다시피 넌센스이다. 떡을 먹다가 목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 음식이 살인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인간 광우병으로 사망한 환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미국산 쇠고기의 위생 상태를 붙잡고 논란을 벌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위험'한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광우병 논란의 쟁점은 광우병 자체가 아니다. 그런 논점을 잡고 있을 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측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정부가 국민을 기망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다. 거리로 뛰쳐나온 10대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간만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젊은 새댁들의 지속적인 호응을 얻기 위해 대중적 패닉을 계속 이용하려 드는 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나도 불쾌하다. 하지만 그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리고 현재 촛불집회 등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바로 그 지점을 혼동하고 있다.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는 진작에 설날에 오죠니 먹는 것을 금지했어야 한다.

광우병 정국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미국산 쇠고기가 악마의 음식이어서가 아니다. 설날에 떡국을 먹으려고 하는데, 모든 국민들이 일본산 오죠니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대중적인 반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의 인식은 이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호도된 진실에 편승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며, 그에 기반하여 정치적인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뿐 아니라, 찾아보면 목숨 걸고 음식을 먹는 사례는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고기 한 점을 먹기 위해 극미한 위험을 감소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했던 적이 없다. 바로 그것이 쟁점이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는 순간 한국이 좀비의 왕국이 된다는 식의 선동을 함부로 구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2008-05-09

식량 위기의 정치적 효과

이코노미스트의 뉴스 해설에 따르면, 식량 위기는 예상보다 심각한 정치적 효과를 불러오지 못했다고 한다. 30여개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고작 아이티 수상 한 명이 사임했다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물론 그 대가는 비싸다. 현재 식량 수입국들이 대처하는 방식은 이집트나 파키스탄처럼 배급표를 발급하거나, 자국의 식량 수출을 제한하는 것 등인데, 후자는 태국과 같은 대규모 수출국이 카르텔을 형성하게끔 하는 유인 동기가 된다. 식량 수입국이건 식량 수출국이건 상관 없이, 누군가 자유무역 원칙을 깨기 시작한다면 그 파급 효과는 모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추세가 이어질 때 더 많은 정치적 저항이 다수의 국가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예측한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나서서 '52개 생필품'의 가격을 통제하겠다고 나섰다. 동시에 미국산 쇠고기를, 거의 무조건적이라고 봐도 되는 조건으로 수입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기껏 꺼내든 항변이 '싸고 맛좋은 미국산 쇠고기'였기 때문에 현재의 정치적 저항이 더욱 거세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식량 생산량을 증대할 수 없다면 수출국과의 자유무역을 통해 시장 가격을 낮추는 것은 하나의 유용한 전략이 될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규모의 정치적 저항은 국제적인 식량 위기로 인하여 촉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총체적인 불신이 광우병에 대한 대중적 패닉과 맞물려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더욱 가깝다. 하지만 식량 위기라는 '조용한 쓰나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미리 수립하고 있지 않다면 앞으로 닥쳐올 정치적 위기는 더욱 거센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식량 가격이 예전에 비해 너무도 오르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수요나 바이오디젤에 대한 선호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론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결론을 국민들에게 들이미는 한국 정부의 ('정치 과학'이라는 단어를 상정하자) 비과학적인 자세를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008-05-08

최근 찍힌 사진 한 장


2008 앰네스티 한국지부 정기총회에서 부지부장에 출마한 후, 경쟁 후보 임태훈씨와 함께 질문에 응답하고 있는 모습. 2008년 4월 26일. 안타깝게도 실제 선거에서는 제3의 후보에게 둘 다 패배하고 말았지만, 총회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아냈다는 것에서 의의를 찾기로 했다. 1:1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비하면, 다수를 앞에 놓고 연설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의사소통과 설득의 논법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

광우병 논란과 한국의 농업

광우병 논란을 가만히 짚어보면 가장 중요한 논점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국내 축산 농가가 망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 차이를 보이지만, 축산 농가를 살리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있는 듯하다. 여론의 관심은 주로 광우병의 공포로 인해 거리에 선 10대들에 맞춰져 있다. 요컨대 문제는 국민 건강과 식품 안전이며, 그 다음은 이명박 정부의 통상 주권과 협상력의 부재라는 식이다.

이러한 종류의 찬성과 반대는 모두,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면, 지금처럼 농가의 붕괴 현상에 대한 대책 없이 수입 장벽을 열어도 좋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인식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적인 흐름을 거스르고 있으며, 국가 경제를 놓고 볼 때에도 타당하지 않고, 결국 국가 경쟁력 재고에도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이 진정 21세기형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핸드폰을 팔기 위해 농촌을 죽이는' 박정희식 개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난해 국제 곡물 시장에서 밀의 가격은 287퍼센트, 옥수수는 149퍼센트 상승하였고, 그 외 커피, 완두콩, 콩, 쌀 등 기본적인 곡물들 또한 그러한 추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식량 가격이 이처럼 천정부지로 오르는 이유에는, 확실한 것 하나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 하나가 있다. 중국 내 육류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가축을 기르기 위한 사료 소비가 대규모로 늘어났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서구 선진국에서 바이오디젤용으로 옥수수를 대량 소비함으로써 식량 가격 폭등에 일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현재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중이다. 아무튼 식량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덕분에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인 태국은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다. 더구나 WSJ에서 운영하는 Marketwatch의 보도에 따르면 태국은 OPEC과 유사한 형태의 농업 카르텔을 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라오스, 버마,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이 그 구성원인데, 태국과 베트남은 세계 1, 2위의 쌀 수출국인 만큼 실제로 구성된다면 그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한국에서 먹는 자포니카와 동남아에서 기르는 안남미가 다르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식량 가격이 오른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미국에서 최근 가장 큰 주가 상승률을 보여주는 기업들이 농업 기업이라는 사실 또한 많은 것을 시사한다. theStar.com의 보도에 따르면, 모사익은 319퍼센트, 포타쉬는 140퍼센트, 몬산토는 105퍼센트씩 지난해 주가 상승을 기록하며 전례 없는 호황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원인이 뭐가 되었든지간에, 세계 경제의 기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애플의 상품과 마케팅이 방증하는 바와 같이, IT는 첨단 산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 산업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2008년을 넘어서는 이 시점에서 세계 각국이 가장 주목하는 산업은 다름아닌 농업인 것이다.

광우병과 관련한 사회적 논란이 '미국 소의 안전성'과 '통상 주권'에만 머물러있는 현실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안타깝다. 현재 돌아가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농촌을 이런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먹고 싶다면 한국의 축산 유통 구조를 개편해야지, 무턱대고 미국산 쇠고기의 문호를 열어젖힐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국제적으로 사료값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의 값 또한 앞으로는 결코 싸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농업 정책, 더 나아가 경제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백하지 않은가.

광우병 논란의 양쪽 방향을 두루 살펴봐도, 우리의 '국민 감정'은 어디까지나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도 '소수가 희생해서 온 국민이 값싸게 먹을 수 있다면'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볼 때, 이미 공업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닥쳐올 농업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농촌을 죽이고 도시를 살리는' 박정희식 근대화의 2000년대 버전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작고 강한 농업'이 필요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내의 실정과 지역적 상황에 최적화된 무언가일 수밖에 없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느냐 마느냐 여부를 떠나서, 한국의 농업을 이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