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19

'안티조선'은 끝났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는 그 단어에 너무도 많은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지금은 그저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을 비아냥거리는 것 외의 어떤 정치적인 함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안티조선'이라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키워드의 생명력은 이 시점에서 다 한 것이다. 광우병 파동을 둘러싼 언론들의 보도 태도와,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자세를 동시에 관찰해 본다면, 분명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안티조선은 끝났다.

잠시 기억을 돌이켜, 안티조선 운동이 한창 뜨겁던 당시 가장 후끈했던 이슈 중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때 안티조선에 참가하던 이들은, '조선일보는 나쁜 신문이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를 놓고 일종의 철학적 논쟁을 펼쳤다. 홍세화씨는 '지식인'의 특수한 지위를 암암리에 전제하고(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을 터이다) 조선일보를 볼 수도 있다고 한 반면, 고종석씨의 경우 조선일보를 아예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안티조선의 이념에 충실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논쟁에서 전자의 입장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천적으로 더 큰 성과를 거둔 것은 후자의 입장이다. 안티조선 논쟁을 통해 특히 조선일보는 대중들로부터 언론의 공신력을 상실하였다. 동시에 사람들은 신문, 더 나아가 활자 매체 자체를 경원시하고 있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안티조선을 슬그머니 이끌어가려던 시도가 눈에 띄던 당시의 '안티조선'이 일종의 정치 과잉, 혹은 의미 과잉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애초에 신문 따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책이나 잡지 또한 절대 제 돈 주고 사보지 않는 이들이 '나는 조선일보, 아니 좃선 찌라시를 보지 않습니다'라고 떠벌이는 현재의 '안티조선'은 정치의 부재와 의미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 터이다. 조선일보를 보면서 조선일보를 비판하고, 그 외의 다른 시각을 얻기 위해 여타의 언론 매체에 촉각을 기울이던 최초의 열정은, 그 내용이 옳건 그르건 일단 조선일보의 기사라면 비웃고 보는, 사회적 관심의 나태를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선일보 보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이제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 현재 네티즌들이 표명하고 있는 안티조선이란, 사실 '나는 조선일보 보지 않습니다'라고 기술되어야 마땅한 현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네티즌이라 불리는 인터넷 사용층의 이른바 '난독증'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혹자는 네티즌들이 '어렵고 딱딱한' 글이 아닌 '쉽고 재미있는' 웹툰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고 칭송하지만, 굽시니스트의 블로그에서 발생한 리플 파동을 보고 있노라면 난독증의 대상은 단지 텍스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시위에 참석한 여고생에게 과외 선생이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는 "민희에게"(Homa Comics, 2008년 5월 13일)라는 웹툰에 달린 리플들을 보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내용의 만화에 '이명박 앞잡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안티조선'이라는 의제가 기존 매체, 혹은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정당화하는 테제로 이해된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문맹률은 낮지만 읽고 쓰는 능력(literacy)은 형편 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든다.

나는 긍정적인 사회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차원으로 흡수된 언론 운동이 지니고 있던 한계가, '정치성'에 언어가 휩쓸려 들어가는 형태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어의 현주소일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한 움직임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자신이 하나의 언론을 운영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처럼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는 훌륭한 언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블로그에 쓰는 한 편의 글에서도 정확한 사실관계와 치밀한 논리 구조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작은 실천의 일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지 않은 언론'에 대한 냉소만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점이 이미 지났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댓글 10개:

  1. 처음 뵙겠습니다. 평범한 사회과학도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민희에게"라는 웹툰에 달린 리플들을 보면서 노정태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가끔 여러 글을 보다보면 호탕하게 웃을 때가 많은데, 노정태님의 이 글을 보고 한참 웃어 재꼈습니다. 요즈음의 시국에서 이런 웃음은 진실과 맞닿았을때 느껴지는 자조와 냉소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 힘이 빠집니다.

    건필하세요.

    답글삭제
  2. 자조와 냉소의 웃음보다는, 더 많은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치지 않기 위해 서로 격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하는데, 동시에 지쳐있기 때문에 서로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해요. 열정적으로 서로 비판하는 문화가 인터넷에서 꽃피기를 바라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구체화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말을 하기가 어렵죠.

    아무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3. 하아~ 저놈의 난독증은 디워때도 꽤 문제가 되었었는데, 도무지 글이라고는 읽어버릇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만화라도 보면 다행이겠지만, 그 만화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참 어째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답글삭제
  4. 웹툰이라는 형식과 그것에 참여하는 작가들에 대해서 별도로 할 말이 있는데, 언제 기회가 될지 모르겠군요. 전 특히 강풀이 내놓는 선동적인 만화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해력의 저하를 문제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맞춤'으로 수준을 낮춰서 컨텐츠를 생산하는 창작자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이건 나중에 지적해야 할 부분입니다.

    답글삭제
  5. 저는 몇년전에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느정도 편향된 시각을 가졌었는데,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고 다른 책들을 보면서 어느정도 균형(?)을 찾았습니다.
    편향적인 시각을 가질때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2년때였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하는 세대도 이와 비슷하겠지요. 지금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공교육이 난독증 치료와 객관적인 비판능력을 갖게 해주는데 실패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글삭제
  6. 공교육의 실패가 가져오고 있는 정치적인 효과가 매우 크죠. 한 두 마디로 간단하게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공교육이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해왔다고 말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
  7.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다움의 "조중동폐간 국민캠페인" 카페로 퍼가도 괜찮을까요?
    이미 누가 올려두었는지 모르지만..

    답글삭제
  8. 네, 괜찮습니다. '안티조선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예전처럼 '조선일보 반대'라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사회적인 의식화(라는 말이 허용된다면)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행히도 이번 촛불집회 과정에서, 많은 구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9. 글을 가볍게 읽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오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좀 걱정입니다. 하지만 '조중동 폐간'과 같은 조금은 과격한(?) 이름을 가진 카페일 수록 이런 글을 더 많이 읽고 고민해야 할 것 같아서, 오해의 위험이 있겠지만 게재해 보려고 합니다. 괜한 부담을 드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요즘 소식들을 보면 이 글에서 주장하시고 있는 논지가 부분적으로는 실천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언론에 대한 비판이 대안적인 언론에 대한 적극적 지지로 제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단지 적이 아니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판단 기준을 갖고, 비판적인 독해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에서 난독증을 언급하신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해 능력과 비판적 사고 능력은 가장 중요하지만, 또한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리는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제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당장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위의 카페에서 광고주 압박 운동과 병행하여, 신문법과 같은 제도적인 장치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데, 카페를 꼼꼼히 뒤져보지는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아직은 그런 부분은 조금 부족한 듯 합니다.

    예전에 [신문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래전이라 요즘은 어떤 책들이 나와 있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추천해주실 만한 책이 있다면, 저도 참고하고, 카페에 글을 올리면서 함께 이야기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한 번 더 덧글을 부탁드려야겠네요. ^^;

    비록 카페 게시판에 올라오는 다른 많은 글들에 묻힐지도 모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정도인 것 같습니다.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관찰만하기에는 잠재력이 큰 모임인 것 같아, 비슷한 주제를 가진 잘 쓰여진 글들을 모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답글삭제
  10. 부담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의사소통에 장애가 발생할만한 부분을 미리 언급해두는 것 뿐이지요.

    최근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의 구독자가 늘어난 것은 분명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신문 문제를 놓고 본다면 신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유통과 판매를 둘러싼 산업적인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단지 조선일보가 왜곡보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되풀이해 주장하는 차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파악해야 하겠지요.

    법학과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강준만 교수의 《대중매체 법과 윤리》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두껍고 비싸니까 도서관에서 빌려읽는 편이 좋겠죠. 일반적인 교양 차원에서 책을 권해야 한다면,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을 추천합니다. 출판 매체 자료를 통해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이 어디에 있나를 추적하는 책인데, 일단 재미있고, 동시에 '출판 매체'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대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합니다. 지금 당장은 이 정도가 떠오르네요.

    특정한 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입니다.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