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22

아이언 맨과 테러, 그리고 국가의 성립

나는 '영화 평론가'와 '씨네 설레발리스트'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어만 봐도 바로 감을 잡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두 개념의 차이를 좀 더 설명해보자.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비평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산문을 쓰는 사람을 영화 평론가라고 한다면, 영상 매체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자신이 아는 몇 가지의 개념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영화를 놓고 이런 저런 소리를 마구 씨부리는 인간들을 씨네 설레발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왜 '설레발리스트'인가. 그들은 자신이 아는 주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를 보고도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그 반대로 뭔가 이건 좀 알겠다 싶으면 입에서 마구 침을 튀며 열변을 토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려는 글은 안타깝지만 후자에 속한다. 오늘 밤 10시 20분, 동대문 MMC에서 아이언 맨을 보던 나는, MMC 1관이 필름의 윗대가리를 잘라먹고 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급 분노했다. 이것은 '그럼 나는 영화를 6850원 어치만 보게 된 건가? 허허'라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인식하지 못하면 계속 모를 일이지만 한 번 눈에 띄면 또 계속 신경쓰이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 아닌가. 덕분에 나는 아이언 맨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쾌감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는 일에,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지만 100%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에서 테러범을 묘사하는 방식과 그 외 여러 장면에서 설레발을 칠 수 있는 여지가 눈에 띄고 말았다.

토니 스타크를 납치한 후 괴롭히는 테러 조직의 만행에 대해 생각해보자. 물론 테러 조직은 지역 주민들에게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농민들이 아편을 기르는 이유는, 그것을 팔아서 무기를 구입하고자 하는 테러 집단의 압력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멋대로 세금을 걷고 인력을 징발하는 무장 단체라고 보면 된다. 적어도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스타크가 출동을 결심하게 하는 사건을 돌이켜보면, 테러범들이 마을을 황폐화하고 괜히 사람들을 죽인다는 식으로 '악행'을 묘사하는데, 이건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 드라마에서 '조폭'들이 포장마차를 때려부수는 그런 수준의 저급한 표현일 뿐이다. 이 영화의 테러 조직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딱 한 놈 살려두고 그 사람을 지역 주민들의 손에 맡긴 후 떠나는 장면에서, 나는 '법의 기원이 되는 시원적 폭력' 따위 개념을 얼른 떠올렸다. 제3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인 문제가 정치적 자결체의 성립과 존속 차원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장집단이 정부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 일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국가의 형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언 맨이 쳐들어가서 나쁜 놈들 아무리 죽여준다고 해도, 그들이 스스로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를, 혹은 그에 준하는 정치적 단위를 구성해내지 못하는 한 외부로부터의 침략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런데 벤야민과 그 벤야민의 글을 비평하는 척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데리다, 그 외 여러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형성, 즉 폭력을 독점하는 정치적 집단의 형성에 있어서 그 주춧돌에 피가 뿌려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아이언 맨이 떠나간 그 자리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도, 찍어놓은 감독도 사실 모를 것이다. 아무튼 그 장면을 보니 국가의 건설과 시원적 폭력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테러 조직에 대한 이해도 문제로 돌아가보자. 진작부터 스포일러는 시작되어 있었으니 그냥 쭉 서술하자면, 나는 그 이름 길고 복잡한 대 테러 요원이 오히려 테러 집단의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했다. 인터뷰를 한다는 핑계로 집에 찾아와 스타크의 구형 심장을 훔쳐가고, 그래서 어찌어찌 테러 집단이 수트를 소유하게 되는 그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잘 생각해보니 그런 상상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FP에서는 '백인 남성'도 인터넷 등의 경로를 통해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지난 두 호에 걸쳐서 펼쳐오고 있다. 2008년 3/4월호의 "신세대 테러리스트", 5/6월호의 "차세대 테러리스트, 어떻게 찾아내나" 등을 몇 번씩 읽고 나니, 자신을 대 테러 요원이라 소개하는 백인 남성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지점까지 문제를 복잡하게 끌고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였고 그 아들의 사업 파트너로 살아온 '2인자 인생'의 분노가 결국 그 모든 소동을 낳게 된 원인이라는 식으로 스토리 라인이 전개된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리 신선한 선택도 아니다. '씨네 설레발리스트'로서의 한계를 또 한 번 드러내며 솔직하게 기술하자면, 달랑 스파이더맨 2 하나 보고 하는 소리인데, 마블 코믹스 원작의 침공은 헐리우드의 캐릭터 형성에 나름대로 신선한 조류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대중적으로 접근이 쉬워지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아무튼 마감을 끝내고 책을 찍어낸 다음 훌훌 터는 기분으로 보기에 딱 알맞은 영화였던 것은 분명하다. 동대문 MMC의 도움으로 프레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으니 일석이조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씨네 설레발은 여기까지.

댓글 2개:

  1. -_-;;;

    1. '텐링'은 테러조직이 아님. 이들은 '용병집단'으로 표현되지만 미국과 싸우는 것은 아님. 오히려 치안 공백 상태를 이용해 그 지역의 정복자가 되려고 하지. 그리고 토니가 출동했던 건 자기가 탈출하는 와중에 희생됐던 잉센의 고향이 굴미라였기 때문임.

    2. 911 이전에는 도메스틱 테러가 주로 백인 남성에 의해 발생했지. 티모시 맥베이가 95년이었지 아마. 백인 남성 테러리스트란 오히려 더 흔한 것 아닌가..

    3. 오비디아는 2인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오너지. 경영의 주체이고, 스타크 가문은 그저 기술자 집안일 뿐.. 그리고 오비디아가 토니를 죽이려고 텐링에 의뢰했을 때, 별 분노는 없었지. 그냥 더이상 쓸모가 없어져서 버린다- 정도였음. 이후의 싸움은 오히려 1인자 2인자 소동보다 대량생산이냐 장인정신이냐의 대립이 더 그럴 듯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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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 '텐링'이 테러조직이 아니라는 지적은 적절한 것 같아. 근데 그런 형태의 '용병집단' 또한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지. 굴미라가 잉센의 고향인 건 기억 못 하고 있었는데, 님 좀 대단한 듯.

    2. 백인 남성 테러리스트와, 아랍계 테러 집단에서 백인 남성들을 포섭하려 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야. 티모시 맥베이 같은 사람들은 이슬람과 무관했지. 반면 현재는 이슬람 테러 집단들도 인종적 장벽을 넘어서려 하고 있는거고.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언급된 FP 한국어판을 참조하세요.

    3. 천만에. 오비디아가 가지고 있는 지분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토니가 가진 것과 같거나 더 작아. '우리가 대주주잖아요, 이사회 결정 따위 무슨 상관?'이라는 토니의 질문이 함의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지. 그리고 오비디아는 처음에는 쿨하게 죽이는 척 하지만, 수트 입고 싸우면서 바닥을 다 드러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어. 니네 아빠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이지. 핵폭탄을 만들었던 토니의 아버지와, 제리코 미사일을 만들고 이후 수트까지 만든 토니의 경우를 '장인정신'에 곧장 대입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고. 이 영화의 갈등 포인트는 거의 클리셰에 가깝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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