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31

2009년 독서 목록

  1. 20090105 - 움베르토 에코, 김운찬 옮김,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1)
  2. 20090110 - 강영안,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서울: 소나무, 2000)
  3. 20090114 - 앙드레 고르, 임희근, 정혜용 옮김, 『에콜로지카』(서울: 생각의나무, 2008)
  4. 20090114 - 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서울: 한마당, 1999)
  5. 20090120 - 존 에이거, 이정 옮김, 『수학 천재 튜링과 컴퓨터 혁명』(서울: 몸과마음, 2003)
  6. 20090122 - 게르트 기거랜처, 안의정 옮김, 『생각이 직관에 묻다』(서울: 추수밭, 2008)
  7. 20090127 - 페터 제발트, 이희숙 옮김, 최현식 감수,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서울: 보누스, 2008)
  8. 20090203 - 한국18세기학회, 『위대한 백년 18세기 - 동서 문화 비교 살롱토크』(서울: 태학사, 2007)
  9. 20090204 - 요하임 슐테, 김현정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10. 20090205 -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11. 20090207 - 에드워드 사이드, 김정하 옮김, 『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서울: 마티, 2008)
  12. 20090326 -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윤미경 옮김, 『혁명을 팝니다』(서울: 마티, 2006)
  13. 20090327 - 데를레프 포이케르트, 김학이 옮김, 『나치 시대의 일상사』(서울: 개마고원, 2003)
  14. 20090328 - 리처드 예이츠, 유정화 옮김, 『레볼루셔너리 로드』(서울: 노블마인, 2009)
  15. 20090329 - 오트프리트 회페, 박종대 옮김, 『정의-인류의 가장 소중한 유산』(서울: 이제이북스, 2004)
  16. 20090330 - 이영록, 『우리 헌법의 역사』(서울: 서해문집, 2006)
  17. 20090330 - 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서울: 민음사, 1998)
  18. 20090402 - 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얻은 성찰』(경기도 파주: 길, 2005)
  19. 20090403 - 강영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서울: 소나무, 2002)
  20. 20090407 - 박해천, 『인터페이스 연대기』(서울: 디자인플럭스, 2009)
  21. 20090411 - 노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1999)
  22. 20090416 - 얀 크노프, 이원양 옮김, 『베르톨트 브레히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23. 20090416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1』(서울: 아카넷, 2006)
  24. 20090418 - 고종석, 『경계긋기의 어려움』(서울: 개마고원, 2009)
  25. 20090421 - 고바야시 다키지, 양희진 옮김, 『게공선』(서울: 문파랑, 2008)
  26. 20090421 - 베르톨트 브레히트, 임한순 옮김, 『브레히트 희곡선집 1 - 서푼짜리 오페라 외』(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27. 20090424 - 토르스타인 베블런, 김성균 옮김, 『유한계급론』(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05)
  28. 20090428 - 아마미야 카린, 송태욱 옮김, 『성난 서울』(서울: 꾸리에, 2009)
  29. 20090428 - 마스모토 하지메,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서울: 이루, 2009)
  30. 20090503 - 게리 윌스, 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6)
  31. 20090505 - 게리 윌스, 김창락 옮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32. 20090509 - 마루야마 마사오 외, 고재석 옮김,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서울: 소화, 1997)
  33. 20090510 - 이매뉴얼 더만, 권루시안 옮김, 『퀀트, 물리와 금융에 관한 회고』(서울: 승산, 2007)
  34. 20090517 - 도글라스 호프스태터, 데니얼 데닛, 김동광 옮김,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서울: 사이언스북스, 2001)
  35. 20090521 - 게리 윌스, 안인희 옮김, 『성 아우구스티누스』(서울: 푸른숲, 2005)
  36. 20090524 - 김욱, 『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서울: 개마고원, 2009)
  37. 20090525 - 플라톤, 강철중, 김우일, 이정호 옮김, 『편지들』(서울: 이제이북스, 2009)
  38. 20090605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2』(서울: 아카넷, 2006)
  39. 20090612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서울: 아카넷, 2005)
  40. 20090615 - 조지프 히스, 노시내 옮김,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서울: 마티, 2009)
  41. 20090620 - 강준만, 『대한민국 소통법』(서울: 개마고원, 2009)
  42. 20090717 -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경기도 파주: 창비, 2009)
  43. 20090721 - 데이비드 퍼피뉴, 신상규 옮김, 『의식』(서울: 김영사, 2007)
  44. 20090721 - 리누스 토발즈, 팀 오라일리 외, 이만용 외 옮김, 『오픈 소스』(서울: 한빛미디어, 2000)
  45. 20090721 - 죠지 레이코프, 로크리지연구소, 나익주 옮김, 『프레임 전쟁 -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경기도 파주: 창비, 2007)
  46. 20090806 - 나오미 울프, 김민웅 옮김, 『미국의 종말』(서울: 프레시안북, 2008)
  47. 20090806 - 김국현, 『웹 이후의 세계』(서울: 성안당, 2009)
  48. 20090812 - 딜런 에번스, 이충호 옮김, 『진화심리학』(서울: 김영사, 2001)
  49. 20090828 - 앨런 와이즈먼, 이한증 옮김, 『인간 없는 세상』(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50. 20090831 - 슈테판 람슈토르프, 한스 요하임 셸른후버, 한윤진 옮김, 오재호 감수, 『미친 기후를 이해하는 짧지만 충분한 보고서』(서울: 도솔, 2007)
  51. 20090901 - 제임스 듀이 왓슨, 김명남 옮김,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서울: 이레, 2009)
  52. 20090902 - 딜런 에반스, 안소연 옮김, 『진화론』(서울: 김영사, 2007)
  53. 20090906 - A. L. 바라바시, 강병남 김기훈 옮김,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서울: 동아시아, 2002)
  54. 20090908 - E. 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55. 20090911 - F. 코플스톤, 김보현 옮김, 『그리스 로마 철학사』(서울: 철학과현실사, 1998)
  56. 20090921 - F. 코플스톤, 박영도 옮김, 『중세철학사』(서울: 서광사, 1998)
  57. 20090922 - M.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58. 20090925 - 레이첼 카슨, 김은령 옮김, 『침묵의 봄』(서울: 에코리브르, 2002)
  59. 20090928 - 루트 모단, 김정태 옮김, 『엑시트 운즈』(서울: 휴머니스트, 2009)
  60. 20090929 - F. 코플스톤, 김성호 옮김, 『합리론』(서울: 서광사, 1998)
  61. 20091003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상)』(서울: 아르테, 2008)
  62. 20091004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하)』(서울: 아르테, 2008)
  63. 20091006 - 질 들뢰즈, 박찬국 옮김, 『들뢰즈의 니체』(서울: 철학과현실사, 2007)
  64. 20091006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상)』(서울: 아르테, 2008)
  65. 20091007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하)』(서울: 아르테, 2008)
  66. 20091008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 세대 새판짜기』(서울: 레디앙, 2009)
  67. 20091009 - 피터 싱어, 함규진 옮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서울: 산책자, 2009)
  68. 20091010 - 제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 『문명의 붕괴』(서울: 김영사, 2005)
  69. 20091014 - 존 히든, 이두 글방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이두, 2001)
  70. 20091015 - 피터 퓨, 정회석 옮김, 『케인즈』(서울: 이두, 1999)
  71. 20091015 - 우석훈, 『생태요괴전』(서울: 개마고원, 2009)
  72. 20091015 - 우석훈, 『생태페다고지』(서울: 개마고원, 2009)
  73. 20091015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영구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서울: 서광사, 2008)
  74. 20091016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칸트의 역사철학』(서울: 서광사, 1992)
  75. 20091018 - 임철규, 『귀환』(경기도 파주: 한길사, 2009)
  76. 20091019 -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김경희 옮김, 『군주론』(서울: 까치글방, 2008)
  77. 20091022 - 가와노 히로시, 진중권 편역, 『컴퓨터 예술의 탄생』(서울: 휴머니스트, 2008)
  78. 20091027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1)』(서울: 나남, 2008)
  79. 20091028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2)』(서울: 나남, 2008)
  80. 20091029 - 조지 레이코프, 나익주 옮김, 『자유 전쟁 - '자유' 개념을 두고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서울: 프레시안북, 2009)
  81.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서울: 시공사, 2009)
  82.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2)』(서울: 시공사, 2009)
  83. 20091101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3)』(서울: 시공사, 2009)
  84.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4)』(서울: 시공사, 2009)
  85.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5)』(서울: 시공사, 2009)
  86.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6)』(서울: 시공사, 2009)
  87. 20091103 - 위르겐 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서울: 나남출판, 2004)
  88.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7)』(서울: 시공사, 2009)
  89.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8)』(서울: 시공사, 2009)
  90.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9)』(서울: 시공사, 2009)
  91.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0)』(서울: 시공사, 2009)
  92. 20091108 - 에드문드 후설, 이종훈 옮김,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서울: 지만지, 2008)
  93. 20091110 - 진중권 엮음, 『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서울: 휴머니스트, 2009)
  94. 20091117 - 노르베리트 힌스케, 이엽, 김수배 옮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서울: 이학사, 2004)
  95. 20091119 - 무함마드 유누스, 김태훈 옮김, 『가난 없는 세상을 위하여』(서울: 물푸레, 2008)
  96. 20091123 - 제프리 영, 윌리엄 사이먼, 임재서 옮김, 『iCon: 스티브 잡스』(서울: 민음사, 2005)
  97. 20091123 - 김기창, 『한국 웹의 불편한 진실』(서울: 디지털미디어리서치, 2009)
  98. 20091125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부시는 전쟁중』(서울: 따뜻한손, 2003)
  99. 20091201 - 아우구스트 몬테로소, 김창민 옮김, 『검은 양과 또 다른 우화들』(서울: 지만지, 2008)
  100. 20091204 - 김태권, 우석훈 해제, 『어린왕자의 귀환』(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9)
  101. 20091206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공격 시나리오』(서울: 따뜻한손, 2004)
  102. 20091208 - 조지 몬비오, 정주연 옮김, 『CO2와의 위험한 동거』(서울: 홍익출판사, 2008)
  103. 20091212 - 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서울: 휴머니트스, 2009)
  104. 20091218 - 폴 크루그먼, 예상한 외 옮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서울: 한국경제연구원Books, 2009)
  105. 20091221 - E. 캇시러, 유철 옮김, 『루소, 칸트, 괴테』(서울: 서광사, 1996)
  106. 20091223 - 임석재, 『계단, 문명을 오르다: 고대 ~ 르네상스』(서울: 휴머니스트, 2009)
  107. 20091224 - 움베르토 에코, 김광현 옮김, 『기호: 개념과 역사』(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9)

2009-12-30

세대론 메모

아까 모 편집자님과 만나서 식사하던 중 나온 이야기.

'대학생 말하기 강의'라는 책이 있다고 하자. '20대 말하기 강의'라는 책을 또 누군가 낸다고 하자. 두 책을 사서 볼 독자층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목은 다르다. 나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대 문제'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대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있고,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어쩌면 객관적으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20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당장 검색해서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를 정독할 것).

특히 조선일보. '386세대'라는 단어를 띄움으로써,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을 화이트칼라 사무직 직원 및 인근 엘리트들 사이의 세대 다툼으로 치환해버렸다. IMF 당시 30대였던, 80년대 학번을 단, 60년생들. 이른바 '58년 개띠'들에게 밀리는 세대들. 이 구조가 지금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386에게 밀리는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세대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꺼내면서도 왜 노동문제에 무관심한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세대론이 유의미한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화적 담론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특정한 문화 컨텐츠를 함께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위로서의 세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구학적으로 유의미한 지표를 만들어낼 수준이 아니라면, 보편성을 지니는 세대론이라는 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나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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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세대론은 '작은 칼'이다. 작은 단위에서는 잘 들어맞는다. 가령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학생들의 세대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학부제의 전면적 도입 및 실시였다. 그것이 기존의 학생 조직의 재편을 강요하면서 와해시키지 않았다면 현재 대학가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 법조인들에게는 곧 들이닥칠 로스쿨 세대가 기점이 될 터이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세대들도 영상원이라는 하나의 교육기관이 생긴 것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세대론은 작은 단위를 분석할 때 유효하다. 문제는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대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첨언2: 세대론에 한국의 식자층이 우르르 쏠려간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담론 지형이 얼마나 협소하고 위축되어 있으면, 하나의 섹트를 분석할 때에나 맞아떨어질 이야기에 글 읽는 자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세대론을 유지하고 싶다면 세대론을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젊은이들의 빈곤 문제를 다루고 싶다면 '88만원 세대'라는 히트상품을 버릴 각오를 하고 논의를 구성해야 한다. 담론적 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9-12-29

이건희 사면 문제

이건희 사면 문제의 핵심은 '사면법' 그 자체이다. 제왕적 사법부 운운하는 것은 한국 실정에서 개소리다. 사법부에서 아무리 잡아넣어봐야 뭐하나, 어차피 '사법적 제왕', 즉 대통령이 사면해주면 그만인 것을.

사면법은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후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권력의 칼을 쥔 이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절대반지와도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위주의 탈피'를 부르짖은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노 정권 당시 '탈권위주의'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한계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 블로그에 쓴 이 글을 참조할 것.

2009-12-26

사진들

잊을만 하면 올라오는 사진들입니다.

다량의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1. 크리스마스 특별 감자 셀러드.



당근과 빨간 파프리카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 보았음.



2. 가을이와 입동이




무릎고양이 입동이...


의 앞발.


부엌 매트에 턱을 괸 입동이


책장 정리하던 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가을이


둘이 별로 안 친한 분위기


책상을 정복한 가을이


생체 레그워머 입동이



3. 저는 장남입니다


된장남...


악플을 상대하다가 지친 된장남...


이런 분위기의 까페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된장남인 것입니다.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천박하다고 말할 때 나는 차라리 비애감이 든다. 인문학은 필요하지만 인문학 하는 사람이 많을 필요는 없다는 말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좋지만 숲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대한 문학의 시대를 뒷받침하고 있던 것은 위대한 작가들이 아니다. 그 작가들처럼 되고 싶어서 그들의 책을 사고 문체를 흉내내며 문예지를 탐독하던 지망생들이야말로 시대의 버팀목이다. 평지의 거봉은 없다. 모든 높은 봉우리는 비슷한 높이의 산들과 함께 산맥을 이루고, 산맥은 가장 야트막한 언덕까지 쭉 이어진다. 한 마리 호랑이의 포효를 위해서는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

2009-12-23

싸움을 멈추고 열린 마음으로

그 누군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지겹지 않겠는가. 지난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이 상대편의 주장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정당의 지지자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나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보자. 과연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도 경청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왔던가? 무조건 귀를 막고 반대되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매진해온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우리 당은 의석이 둘 뿐인 작은 정당입니다. 독자적으로 총선을 치를 경우 잃을 것은 없습니다. 의석도 늘어날 것이요 당의 존재도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 백여 개의 의석을 보유한 민주당은 '파멸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수도권 선거는 보통 2천표 안팎의 차이로 승패가 갈립니다. 약 10만 명이 투표하는 선거구라면 유효투표의 2% 안팎의 차이가 승부를 결정합니다. 우리당 후보들은 지역구의 성격과 후보의 경쟁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도권에서 그보다는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할 것이며, 한나라당보다는 잠재적 민주당 지지표를 훨씬 많이 빼앗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준다는 비난이 일겠지만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민주당이 리모델링 신당으로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음을 분명하게 경고했고 민주당 의원들이 정당개혁의 흐름에 합류할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와, 정말 구구절절 옳은 말이구남.

2009-12-10

오바마 노벨상 수상 연설

* 우리는 새로운 아메리카나로 들어갔음. 제 머리에 왕관을 얹은 나폴레옹처럼, 오바마의 입을 빌어 미국은 이제 대놓고 세계 경찰이 되는 듯.

* 부시가 시작한 'war on terror'가 오바마에 의해 추인된 것도 기록 포인트.

* '제국의 몰락'을 말하는 분들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제국의 몰락'으로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제국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전후 관계를 거꾸로 보면 안 됨.

* 연설 졸라 잘 함. 우크라이나 총리 율리아 티모센코의 얼굴에 밀려오는 감동의 쓰나미. 애는 자는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윌 스미스. 기타등등.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소유권의 핵심은 처분권이다. 내가 내 연필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남에게 팔 수 있다. 아무 의미 없이 그것을 부러뜨리거나, 크로마티 고교에 나온 것처럼 괜히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자유다. 반면 가을이가 내 연필을 빌려서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다면, 내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그 연필을 사용해야 한다. 주인인 나의 허락 없이 그것을 남에게 양도하거나 매매하거나 처분해버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오공감의 44 사이즈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턱없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유명한 말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소유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피오줌을 싸건 말건 당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는 그러나, 여성의 소유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대체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 즉 가부장 혹은 혈족의 소유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여성들이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없다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캠페인으로 현재의 출산율 저하 경향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의 기저에는 바로 이런 전근대적 여성관이 깔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평소에 그토록 이명박 정부의 여성정책, 혹은 인구정책에 대해 가볍게 비아냥거리던 이글루스의 여론 또한 거의 비슷한 프레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혈뇨가 나오도록 밥을 굶는 사람이 왜 '건강하라'는 명령을 들어야 하는가?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것이라는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명제에 동의한다면 애초에 그런 값산 '충고'를 함부로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상식'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극심한 다이어트를 통해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성매매나 장기매매와 같지 않다. 성매매나 장기매매의 경우 그것을 합법화하면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으로 궁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의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마저도 법으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암스테르담의 합법적 성매매로 인해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동구권 여성들이 몰려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자발성'의 허구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이어트를 통한 건강의 저하는 그런 외부효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남성들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호르몬 성분이 함유된 약물을 주사하고 먹으며 인공적으로 추출된 단백질을 과다 섭취하는 경우와 비교해보자. 문제의 여성은 혈뇨를 누었지만 단백질 보충제를 과다하게 섭취할 경우 소변에 단백질 성분이 섞여 나오고 그 과정에서 신장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보디빌더 앞에서 '지금, 스스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라고 느끼한 충고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남성'의 몸은 남성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소유권 행사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닌 몇몇 미덕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의 폐단에 항거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태초부터 겪어야 했던 딜레마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특정한 미의 형태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에게 '너는 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한다'고 외치는 전근대적 함성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제발 기초적인 것들부터 지키면서 살자.

2009-12-03

철도파업과 한국식 공감법

철도파업이 실패로 끝났다. 투쟁대오를 가다듬어 다시 싸우자고 발표했지만, 파업을 푸는 순간 구속 행렬이 이어질 것이고, 실제로 파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축들은 모두 막대한 민사소송을 당한 채 감옥으로 향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용산 참사 1심을 보고도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이 남아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드물게도 이번 철도파업에서는 인터넷의 여론이 파업에 동정적인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노회찬의 표현대로 법치주의가 아닌 '박치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네티즌들의 알량한 손가락 놀림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여론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저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가장 의아한 것중 하나가 바로 저 '공감'이라는 단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단어가 쓰이는 화법이 놀랍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공감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블로그에 '잘 읽었습니다^^'라는 리플을 다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즉 자신의 의사에 의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 혹은 윤리학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공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감은 재채기처럼 조건반사적인 것이지,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호주 출신의 윤리철학자 피터 싱어의 최근작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 등장하는 논증들은 대부분 이 공감의 무조건성에 기대고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가령 지금 당신의 앞에 어떤 아이가 물에 빠져서 죽어간다고 해보자. 당신의 주머니에는 십만 원이 들어있고, 어떤 수영선수가 '나는 누군가 내게 십만 원을 준다면 저 아이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 수영선수에게 십만 원을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Y자로 갈라지는 철로가 있고, 당신이 가장 아끼는 자동차가 철로의 왼쪽 가지 위에 놓여 있다. 엔진이 고장나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오른쪽 가지에는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선로 위에 꽁꽁 묶여 있고, 당신은 그를 풀어줄 수 없다. 밑에서부터 열차가 올라오고, 당신은 분기점에서 그 기차를 왼쪽으로 보낼지 오른쪽으로 보낼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승용차를 건지기 위해 그 기차를 오른쪽으로 보낼 수 있는가?

경찰과 검찰, 대통령과 사측은 손에 박달나무 몽둥이를 움켜쥐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매일같이 표명하고 있다. 파업을 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게 된다. 파업 노동자들이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위험에 빠짐으로써 사람들의 동정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은 물에 빠졌고 철로에 묶였다. 그러한 사고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피터 싱어가 물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서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보고 무턱대고, 주체할 수 없이 드는 동정심 따위는 사람들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만 같다. 내 연봉보다 많이 받는지, 한글날에 쉬는지 안 쉬는지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물에 빠진 어린이의 앞에서 '너 강남 살아 강북 살아? 강남 살면 안 구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인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이쯤 되면 '파업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거고...' 운운하겠지만, 두 번째 예를 상기할 것.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의 승용차를 지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 나의 작은 불편과 타인의 엄청난 고통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도 약 5년간 1호선을 타고 부천에서 신도림 혹은 신길까지 갔다. 안암역 혹은 고대역까지 총 1시간 40분씩 시달려본 사람이다. 철도 파업을 하면 정말 죽을 맛이다. 하지만 나의 그 고통을 덜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구속당하고 감옥에 처박히고 손해배상 폭탄을 맞아가며 가정이 파탄나고 절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인의 체취가 진동하는 국철에서 덜컹거리는 게 재미있고 흥겹고 신나서가 아니라, 내가 이 고통을 묵묵히 참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엄청난 시련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랍게도 '선택적 공감'을 하는 기술을 익혀버렸다. 예전에 '팩트골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삶의 디테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 문제는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 아닌가? '공감이 안 가네요'라고 한 마디 찍 내뱉는 그들을 보면, 내가 인간의 도덕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이 신인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파업은 패배로 돌아갔고, 공공부문의 가장 크고 강력한 노동조합이 패배한 만큼,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분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귀족노조가 사라지면 모두 부자가 되려나? 모두 노예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정부의 악랄한 선전질과 국민들의 '한국식 공감법'이 맞물려, 우리는 아주 비참하게 일하고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덜컥 잘려도 불만 한마디 표하지 못하는, 그런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책상에서 일하는 당신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2009-11-21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

"루저"(김규항, 한겨레)의 한 구절.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은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 여대생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내용이 바람직하든 않든, 매우 중요한 사회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같은 이야기도 미국의 마돈나가 하면 사회적 도발이 되고 한국의 여대생이 하면 골빈 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여대생의 사회적 도발은 그뿐이 아니다. 그 여대생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생생히 알게 해주었다.


대단히 교묘하게 여성주의를 엿먹이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여성주의가 '개념 없는' 소리를 '사회적 도발'인 것처럼 찍찍 해대는 짓거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의문스럽다. 마돈나는 여성이 성적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을 퍼포먼스로 즐겨 보여줬을 뿐이다. 언제 마돈나가 전 남편 숀 펜의 키가 작다고 루저라고 한 적 있었나? 마돈나가 여성에 대해 말할 때에는, 자신이 여성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인터넷의 확대 재생산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발언'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와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발언'이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마돈나의 '발언'에는 '서명'이 존재한다. 반면 '루저녀'라고 불리며 마녀사냥을 당한 홍익대 학생은 그 발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다.

말하자면 그 학생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몇 가지의 그릇된 통념을 되는대로 주워섬겼다가 된서리를 맞았을 뿐이다. 김규항은 두 가지를 혼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주의를 '개념 없는 소리'와 등치시킨다. '그 계급주의', 참으로 한심하고 짜증스럽다. 결국 자신에게 불편한 무언가에 여성주의의 딱지를 붙이는 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오직 자신과 같은 남성들, 혹은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계급'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런 식이라면 '씨발 나라고 정주영처럼 계집질 못할 게 뭐야, 부자들은 다 뒤져야 돼'라고 궁시렁거리는 시정잡배의 르상티망과 계급운동에 헌신하는 활동가의 사회적 재분배에 대한 지성적 요청을 구분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쩌면 김규항은 시정잡배의 날강도와 같은 사유재산 부정 발언 또한 현재의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불온'한 B급 좌파의 속내를 누가 알겠나.

이 칼럼은 참으로 독특한 텍스트이다. 남자들이 발끈하게 된 상황을 그럭저럭 적절하게 묘사하다가, 그 남성들을 발끈하게 만든 발언을 여성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치환하고, 갑자기 이명박을 까는 너희들이 과연 뭐가 다르냐는 식으로 말을 돌리더니, 결국 고래가 그랬어 정기구독을 하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마무리를 짓는다. 모든 주제를 건드리는 것 같지만 그 무엇에 대해서도 진실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너무 인상적인 나머지 이 촌평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다.

2009-11-20

오바마·이명박 공동기자회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미디어스] 한미 FTA, 자동차 재협상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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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미디어스에 올라온 제 칼럼입니다. 아무도 이 지점을 문제삼지 않는 것 같아 짜증이 나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무리 입으로는 부인해도, 국정의 많은 부분을 결국 조중동이 주장하는 바로 그 프레임에 따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지금 국민참여당은 '친노 이익은 얻고 싶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오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는 식이고, 민주당은 재보선 세 석 얻고 좋다고 정신 놓고 있는 판입니다. 민주노동당은 북한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안 하려고 들지, 진보신당은 NL이 싫다고 대북정책을 아예 포기해버렸지. 어휴... 한숨만 나오는군요. 이러니까 한나라당이 헤게모니를 좌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2009-11-16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경향신문]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세종시 문제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13일, 정부는 세종시의 성격을 ‘행정도시’에서 ‘기업도시’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시에 행정기관이 들어서지 않는 것부터가 난센스라는 것은 아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 또 하나의 기업도시를 짓는 것은 극단적으로 반 환경적인 선택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경제적 이유를 접어두더라도 행정도시는 건설돼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수도를 옮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서울이라는 리바이어던의 스프롤(sprawl) 현상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현재 암세포처럼 커져가고 있다. 이름을 다 기억하기조차 힘들 만큼 수많은 베드타운이 서울 인근에 건설됐고, 그도 모자란다는 듯 정부는 수도권 그린벨트를 해제해 추가적으로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이처럼 대도시가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현상을 ‘스프롤’이라고 하며, 이것은 인간이 환경에 끼칠 수 있는 해악 중 가장 심각한 것에 속한다.

서울 주변 신도시에 살면서 하루에 한 시간 반씩 자동차를 몰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원의 비효율적 사용은 증가하고 지구는 병들어간다. 출퇴근 시간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나 강남 일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통 지체를 감수해야 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서 있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며 화석 연료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 주변 도시를 잇는 거대한 도로는 이미 그 자체로 해당 지역에 사는 생물들에게 재앙이나 다를 바 없다. 대체로 동물들은 널찍한 영역을 갖게 마련이며, 십중팔구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그 영역을 가로지르게 된다. 야생동물을 치어 죽인 운전자들은 대체 왜 동물이 차도 위에서 얼쩡거리느냐고 분통을 터뜨리지만, 사람이 길을 놓기 전부터 동물들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동물이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서울 주변의 신도시들은 자동차를 이용해야만 생활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널찍한 도로가 닦여 있고, 넉넉한 주차장이 딸린 아파트가 건설된다.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애초에 도시 자체가 보행자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간단한 먹을거리라도 구입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끌고 마트에 가야만 한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스프롤 현상이 단독주택들로 구성된 주택지역의 무분별한 확장과 관련되어 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난립하는 신도시가 스프롤 현상의 주범인 것이다.

게다가 기업도시라니. 이미 2005년부터 지역마다 기업도시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제대로 완공돼 자립한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에서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 때문이다. 조선 왕조 500년, 일제 강점 36년을 거쳐 해방 후 지금까지 600년간 우리는 단 한 번도 중앙집권 체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자원이 600년간 ‘관습헌법적으로’ 수도였던 서울로만 집중되어 왔다. 한국에서 기업을 한다는 것은 최대한 ‘중앙’과 밀착해 정부 주도의 온갖 사업을 낙찰받아 수익을 챙기는 것을 뜻한다. 제 아무리 ‘기업도시’를 개발한다 한들 기업들이 자진해서 그곳으로 가야 할 ‘경제적’ 이유가 전무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아예 수도를 옮겨야 한다.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를 변경하고, 입법부와 행정부 및 사법부 전부가 서울에서 떠나는 ‘사건’이 벌어져야 이 오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환경을 위해서도 그러한 변화가 절실하다. 서울 주변의 난개발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실패한 기업도시는 결국 골프장 부지로 재활용되며 인근의 환경 부담을 가중시킨다. 정부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기업들은 절대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국토의 균형발전과 정경유착 해소 및 한반도 생태의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권한다.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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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지지난주 월요일자에 칼럼이 올라왔어야 하는데, 부득이한 지면 사정으로 두 번 연기되었습니다. 다시 쓰고 또 다시 써서 만든 글인데 썩 만족스럽지는 않군요. 저는 영화 친구의 대사를 인용해서 '니가 가라, 세종시'라고 했는데 여론독자부는 그것을 '당신들이 가라, 세종시로'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전문을 다시 읽어보니 경향의 판단이 옳은 것 같군요. 그 외에는 제가 쓴 내용 그대로입니다.

스프롤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이 이루어져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수도 변경이 있어야 한다는 제 주장은, 당연히 그로 인해 한국이 1극 중심 체제의 국가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부분에 대해 어떤 실증적인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지는 못했으므로, 다른 자료를 접하신 분이 계시다면 정보를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11-11

평가당하는 자의 괴로움

내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균선에서 머물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여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지만, 남자들의 90퍼센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 농담은 절반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양심적으로 말하건대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나도 'luser'다).

'거울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우선 평가의 대상과 주체가 모두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의 외모를 평가할만한 '객관적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나는 나보다 키가 더 크거나 작을 수 없다. 나는 나보다 눈이 더 크거나 작을 수 없고, 코가 더 높거나 낮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잘생겼거나, 적어도 평균은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여자들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를 비관한다.

남자들이 이런 식의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잘생겼다'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들의 미를 논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은 이미 차고 넘친다. CD 한 장으로 다 가려지는 조그만 얼굴, 34-24-34, 패션 모델들은 그런 외적 기준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이기에 선망의 대상이 된다. 마치 소나 돼지의 고기 부위를 평가하듯 여성의 신체의 일부만을 떼어내어 '꿀벅지'라고 부른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타인의 평가의 대상으로 살아가도록 강제당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가 '예쁘다'는 말을 이제 우리는 얼굴이 작다느니, 가슴이 크다느니, 콧날이 오똑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개별화·파편화하여 어떤 수직선 위에 올려놓고 언술한다. 대체 얼굴이 작은 것과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가슴이 큰 여자는 무조건 미인인가? 하나씩 떼어서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얼굴이 조막만하다, 열라 예쁘다' 같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남자들의 외모가 전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처한 상황과는 분명히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사회에 넘쳐나는 외모에 대한 객관적, 수치적 평가 기준을 여자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고, 그래서 거울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 괜히 다이어트에 목숨 걸고 500그램 줄어들었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정밀한 기준이 개발되지 않았다. 남자들끼리 서로 호빗이니 오크니 찧고 까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아까 꿀벅지가 언급되었으니 그걸 예로 들어보자. 많은 남자들은 '너희들은 초콜릿 복근 어쩌고 하더니'라고 난리를 쳤는데, 애초에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와 남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의 언어는 사용되는 방식이 다르다. 여자들은 꿀벅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남들이 나를 핥는 듯이 쳐다볼까봐 신경이 쓰이고, 동시에 예쁘지 않은 내 다리가 너무 싫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반면 남자들은 초콜릿 복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헬스 두 달 해서 배에 王자 새긴 다음 해변에서 여자 존나 꼬시는 상상을 하다가, 귀찮아서 운동 안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웹서핑이나 하면 그만이다. 아니라고 하지 말자. 남자들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느끼는 최악의 자괴감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일상 속에서 늘 느끼며 살고 있다는 말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가 평가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모른다. 어차피 외모는 주관적인 거고,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며, 이 드넓은 지구 어딘가에는 나를 나 자신으로 사랑해줄 천사같은 소녀가 한 명쯤은 있을 거라능... 이라는 판타지를 심어주는 문화 컨텐츠 또한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남들이 내게 못생겼다고 해도, 어차피 지들도 장동건처럼 안 생긴 주제에 그런 소리 한다고 비웃으면 그만이다.

'얼굴 큰 남자는 루저'라고 말했더라면 이렇게 파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180이라는 똑 떨어지는 숫자가 나와버렸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숫자가 180인데, 이건 뭐 거울을 아무리 쳐다보면서 화이팅을 외쳐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보다 키가 크면 대체로 나보다 싸움도 잘 할 것 같고, 여러 모로 꿀리는 기분이 든다.

모든 남자의 키는 180보다 크거나 작다. 그 기준은 다른 기준과 달리 그 어떤 심미적인 판단을 통한 유도리 있는 해석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건 마치 모든 남자가 10억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평가를 당하면 구석에 몰리는 기분이 들고, 두 배 세 배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오공감에는 자기 어머니가 방송을 보다가 울었다는 실화인지 소설인지가 올라와 있는데, 그것은 설령 픽션이라고 해도 진실이다. 키가 작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것 만큼이나 '숫자'로 표현되는 진실이다. 그 앞에서 남자들의 열등감은 비로소 진정으로 드러난다.

평가를 당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평가를 여자들은 언제나 당하면서 살고 있다. 인간의 외모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눈이 크다는 둥 가슴이 작다는 둥 양화(量化)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한국사회에서, 드디어 그 칼날이 남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평가의 희생양이 된 것처럼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글을 끝내면 '그래서 지금 막나가자는 거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다. 정 그렇게 폭력적인 평가가 싫다면, '나에 대한 폭력적인 평가'에만 반대하지 말고, 애초에 인간의 외모를 사물처럼 만들어서 함부로 논하는 이 한국 사회의 더러운 화법에 대해서까지 문제의식을 느껴보라는 말이다. 꿀벅지가 어쩌고 슴가 사이즈가 저쩌고 얼굴 존나 큰 돼쌍년이 이러쿵 저러쿵 떠들던 자들이 난리를 치면 정말 'luser'밖에 더 되나. 당신에게 들이대진 그 잣대가 가혹하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인간을 그렇게 평가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경제야'가 문제야,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문제야, 바보야!


[당비의생각] 2009/11/11 12:26

노정태 | 칼럼니스트

정의되지 않은 정의(正義)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강자와 약자 모두 동의하고 승복할 수 있는 공통의 규칙이 제공되지 않는 한, 정의란 한낱 강자의 횡포를 치장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말하는 ‘정의사회구현’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표방하는 ‘정의’는 지옥과 천국의 차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비단 정의뿐만이 아니다. 모든 ‘좋은 개념’들은 그것이 갖는 영향력만큼이나 위험성을 지닌다. 특히 최근에는 모든 이념들을 밀쳐내고 이데올로기의 왕좌에 군림하게 된 ‘경제’가 문제가 된다.

47세의 젊은 대통령 후보, 아칸소 출신 촌놈이지만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폭발적인 대중 친화력을 지녔던 빌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터뜨렸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어 90%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던 아버지 부시(H. W. Bush)를 꺾는 기염을 토한다.

문제는 이 ‘경제’가 대체 어떤 경제냐 하는 것이다. 당시 클린턴 후보 측 선거 전략가였던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은 미국 경제가 불경기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측이 경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아군은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카빌은 리틀록에 위치한 클린턴 선거운동본부에 세 가지 사항이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1. 변화 vs.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2.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3. 의료보험을 잊지 말자

이것은 엄연히 ‘내부용’ 구호였지만, 어느새 선거운동본부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고, 결국 빌 클린턴을 미합중국의 42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3번 구호에 주목해야 한다. 오바마 또한 의료보험 문제를 놓고 정치적 자산을 건 큰 싸움을 진행 중이다. 단지 불황에서 벗어나는 것, 경기 부양책을 써서 실업률을 낮추고 GDP를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그들의 사명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와 함께 리틀록의 선거운동 본부에 내걸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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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당대비평에 기고한 글입니다. 당대비평의 지면이기 때문에 이렇게 담론적인 논의를 할 수 있었던 것 같군요. 이 게시물에 리플을 달아주셔도 되고, 링크된 온라인 당대비평에 소감을 남겨주셔도 괜찮습니다.

2009-11-04

윤계상, 박재범, 공론장으로서의 인터넷

윤계상의 '좌파' 발언이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수그러들었다. 변영주 감독 등 진짜 '좌파'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주었기 때문이 기도 하고, 본인이 모종의 울분의 표현으로 그 단어를 꺼내들었을 뿐 애초에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윤계상의 그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첫째, '영화판은 원래 좌파다. 그래서 나는 소외당하고 있다'는 말을 본 사람들이 '좌파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만 말할 뿐, 그 언어의 화용이 대단히 일상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우리는 '말 많으면 빨갱이'로 간주하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좌파는 곧 먹물이요, 유식하다는 먹물놈들은 무식한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지금도 인터넷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은가. 본인이 아는 좌파의 개념은 잠시 접어두고 윤계상의 발언을 살펴보자. 그건 전혀 특별할 게 없는 표현이다. 나보다 많이 배운 먹물은 다 좌파고, 좌파는 재수없는 엘리트고, 그래서 다 싫다는 그런 수준의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둘째, 변영주 감독이 인터넷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까지 이 사건은 또 '윤계상 발언'으로만 다루어지고 있었다. GQ는 원래부터 인터뷰를 잘 하기로 유명한 매체였고, GQ 인터뷰가 다른 매체에 의해 재보도된 것도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터넷 언론들이 끼어들었고, 역시나 '네티즌 술렁거려' 같은 표현을 들먹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GQ를 보고 흥분한 사람은 별로 없다. 포털 사이트 대문에 떠 있는 '네티즌들이 흥분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제를 발견하여 군중에 가담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종합해보면 윤계상의 발언을 둘러싼 촌극은 결국 박재범 사건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재범이 한 말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든 한국인은 입만 열면 '빌어먹을 이 나라, 빨랑 돈 벌고 튀어야지'라고 궁시렁거린다. 모든 남자 고등학생들은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를 '따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박재범은 그것을 친구와 이야기했을 뿐이다. 윤계상의 경우도 그렇다. 내가 겪어본 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유식한 존재라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특히 어설프게 배웠거나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식이 죄냐?'라고 물을 때 이미 그는 무식한 자신에 대한 죄의식의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뻔한 소리를 한 청년들이 왜 갑자기 공공의 적이 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인터넷 언론, 혹은 그냥 언론의 문제가 등장한다. 대중들은 이른바 공인, 그 중에서도 제일 만만한 연예인들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 연예인과 자신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를, 그래서 그도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연예인이 정말 나같은 새끼일 리는 없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기도 한다. 내가 쇼프로를 보면서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사람 냄새'를 풍겨야 하지만, 대중들은 동시에 그 연예인이 정말 나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면 가루가 되도록 깔 준비를 하고 있다.

따라서 연예인은 대중과 같으면서도 달라야 하고, 다르면서도 같아야 한다. 그 미묘한 줄타기가 무너질 때 대중들의 공격적 성향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섹시 컨셉의 아이비가 섹스를 했다는 놀라운 사실로 인해 무너진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대중들의 성향은 그렇고 연예인들은 그 속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아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한 스타가 구설수에 휩싸이는 것은 그 자체가 보는 이에게 재미 혹은 묘한 쾌감을 안겨주고, 어쨌건 신문 판매 부수 내지는 클릭수 증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존 매체 혹은 새로 판에 뛰어든 인터넷 매체들은 바로 그런 '껀수'를 찾아내고자 안달이 나게 마련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인터넷 매체들은 더 이상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다. 대신 네티즌들의 몇몇 반응을 기사화하여 보도를 사건한다. '보도를 사건한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풀어서 설명하자면, 별 것 아닌 일을 터뜨려서 사건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박재범은 고삐리였고, 윤계상은 평범한 한국 남자 수준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윤계상은 박재범보다 좀 더 문제적이긴 한 것 같지만, 그거야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혈기만 넘치는 나이여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보도가 그렇게 나가기 시작한 이상, 별 거 아닌 일이었던 것이 바로 대형 사건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기자들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을까?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이렇다. 인터넷이 사생활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연예인에 대한 온갖 '소스'가 인터넷으로 모이게 되었고, 현장 취재 다니느라 바쁜 기자들보다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이들이 그런 요소들을 더 잘 찾아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네티즌들이 찾아낸 연예인의 사생활을 기자가 새삼스럽게 '폭로'해서 기사 하나를 날로 먹는다. 그러면서 '네티즌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순간 몇몇 사람들이 보고 시시덕거리던 것이 포털 사이트 뉴스를 타고 모든 이에게 중요한 사안처럼 돌변해버린다.

윤계상 사건의 경우에는 전문적인 잡지 에디터가 인터뷰를 한 경우지만, 그 외의 기본적인 형식은 동일하다. 어딘가에서 발견해낸 평범한 사실을 '네티즌 술렁' 같은 표현을 덧붙여 인터넷 매체에서 재가공하면, 비로소 그게 진짜 사건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박재범 사건의 경우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삼지선다형으로 풀어보자. 단, 복수정답은 허용하지 않는다.

① 엄한 거 까발려서 젊은이 인생 망친 디씨 코갤. ② 그걸 뉴스랍시고 보도해서 일을 부풀린 언론, 특히 동아일보. ③ 이유야 어찌 되었건 광기의 춤사위에 끼어들어서 함께 모닥불에 땔감을 넣고 북치고 장구치며 빙빙 돌고 춤을 춘 '네티즌' 전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②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디씨의 잉여들이나 이른바 '네티즌'들은 원래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고 반드시 그러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어떤 당위적 의무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대중들이 연예인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거나 그에 대해 나름의 탐색을 하는 것 등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연예인이라는 집단 자체가 사실상 그러한 욕망 위에 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대한 미국인들의 광기어린 집착과 멸시, 동시에 쏟아지는 동경 따위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중들은 원래 그렇다.

하지만 언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특히 한국의 주류언론은 원래 저질이었고 지금도 저질이며, 거기에 인터넷 매체들까지 끼어드니 완전히 개판이 되어버렸지만, 언론은 대중과 달리 공공의 선을 지향해야 한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가 왔다고 한들 '공론장'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공식화된 언론 매체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시민사회는 공론장에 대한 장악력을 꾸준히 잃어갔고, 대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체계'들이 의회 민주주의의 일부로서 작동하는 공론장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18세기에는 부르주아들이 살롱이나 커피숍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소식지를 만들어서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론'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그런 영역은 생활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금은 사적인 공간에서의 토론이 공적인 의사 형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대신 '체계'는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 언론들이 '네티즌 반응'을 채집하여 보도를 사건하는 현상을 나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씨인들이 개인의 사생활을 캐내 시덥잖게 시시덕거리다가 흥미를 잃으면 내팽개치는 현상은 개가 땅에 묻힌 뼈다귀를 캐낸 후 씹다가 내뱉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잡지 에디터가 심도 깊은 질문을 해서 의외의 답변을 얻어내는 것 역시, 바로 그러라고 잡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다. 문제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굳이 보도함으로써 공론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언론들이 있다는 것이다.

GQ 인터뷰 전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윤계상의 발언 중 골때리던 것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다. 인터뷰의 분위기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 매체들은 오직 그 '좌파 발언'에만 집중해서 '네티즌 술렁' 기사를 만들어냈다. 요컨대 '네티즌 술렁'은 인터넷이라는 '생활세계'로부터 '체계'가 지속적으로 약탈해가는 상아나 금, 노예같은 것이다.

물론 대중들은 잔인하다. 너무도 잔인한 나머지 그 말을 하는 것은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다. 사생활을 파해치고 잔인하게 조롱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데 루머를 퍼뜨리는 것은 인류가 구석기시대부터,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를 근절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절도를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소리이다. 소유권이 있는 한 도둑질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생활이 있는 한 폭로가 있고, 진실이 있는 한 루머가 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말 그대로 근대에 생겨난 것이고, 그것이 유지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공론장 또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그 각각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주체 및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형성되며 또한 그로 인해 단단해질 수 있다. 따라서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생활을 까발리는 저열한 네티즌'이라는 식의 수사를 남발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건, 바로 그런 대중들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대중사회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들이 공론장에 '사적인 것을 개입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터넷질을 하다가 남의 사생활을 깠다고 해서 그게 공론장을 더럽히는 행동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행위는 개별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공론장과는 무관하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토론의 경우,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론장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다.

나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오공감의 떡밥을 물어서 끼어든다면, 이것은 공론장에의 참여가 아니다. 이글루스 사용자들, 혹은 '네티즌'이라 할 수 있는 일부만을 염두에 두고 그 글을 쓴다면 분명히 그렇다. 반면 보편적인 사회 대중들을 염두에 두고 매체에 기고를 한다면 그것은 공론장에의 참여가 될 수 있다. 구경꾼의 숫자가 아니라, 발화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경꾼의 속성이 핵심이다.

숫자만 많다고 해서 그 청중들이 공론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숫자가 적어도 공적인 사안을 합당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으면 공론장이 된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인사청문회를 실시간으로 보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선덕여왕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하지만 전자는 공론장에서의 토론이고 후자는 그냥 문화적인 컨텐츠일 뿐이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비슷한 차원에서 나누어볼 수 있다. '신상 까기'는 야만적이기는 해도 공론장의 기능 내지는 속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대중들이 공론장에 사적인 요소를 뒤섞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선후관계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사태는 정 반대로, 공론장을 구성하는 체계가 대중들의 '사적 폭로'를 공적인 사안으로 무리하게 격상시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익명의 네티즌들은 누군가의 실명과 인적사항 따위를 폭로하면 '복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현상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질문을 해보자. 왜 그게 복수가 될까? 가면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이라는 가상무도회에서 쫓겨나 현실 속에 존재하는 피와 살을 가진 개인으로 격하되는 것, 인터넷 마을에서 쫓겨나는 것 등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이다. '털린 자'들은 버로우를 타고 네티즌들은 그것으로 응징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박재범의 사례에서도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마이스페이스를 뒤져서 지난 이야기를 찾아내고 폭로하는 것은 디씨에서 누군가의 신상을 털때 하는 짓과 다를 바 없다. 이름이나 전화번호, 학교 등을 통해 일단 싸이 주소부터 알아내고 거기서 사진첩을 샅샅이 뒤지는 게 신상 털기의 일반적인 행태라고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문제는 개인들의 이러한 사적인 난장판에, 공공의 것으로 기능해야 할 언론이 클릭수 장사를 하기 위해 빨대를 꽂아넣고 있다는 것이다(그로 인해 이제 인터넷의 개인들은 언론이 바로 그렇게 보도할 것임을 염두에 두고 연예인의 사생활을 추적하기도 한다. 박재범 사건에서도 적어도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것 같다).

전자와 후자 모두 비판의 대상이지만 전자를 비판할 경우 '내 탓이오, 우리 모두의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는 보장 또한 사실 없다. 하지만 후자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네이버 메인에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내 매체들의 기사 수준은 정말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한국의 공론장이 엉망인 이유로 네티즌들을 꼽는 것은 손쉬운 답변이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언론이 원래 저질이었고,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저질이 되고 있을 뿐이다.

언론 산업의 구조를 도외시한 채 네티즌만을 비난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본말전도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윤리적' 잣대야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교묘하게 은폐함으로써 공론장을 현재의 수준으로 고착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는 지금 할 만한 것이 아니므로 다음 기회를 기약하도록 하자.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계속 읽기)



10월 31일 미디어스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급하게 써서 논의 전개가 엄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이유로 사법부가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손을 떼고, 그로 인해 더 큰 맥락에서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적어도 정치적 개입을 피할 수는 없는데, 그 순간마다 판단의 기준이 모호하다면 그게 제일 곤란한 일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읽어주신 분들의 소감과 지적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온갖 논쟁을 보거나 참여해온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PC 통신 시절까지 합치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최근 『괴짜경제학』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과 뉴욕타임즈 출신의 저널리스트 스티븐 더브너(Stephan J. Dubner)의 신간 SuperFreakonomics가 출간되면서, 바야흐로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보다 큰 규모의 키보드 대전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정식화된 학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듯이, 몇몇의 블로거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공적이지 않은 경로를 이용해 서로 은근히 심기를 긁어가며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해볼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키보드 배틀’ 중 가히 최대 규모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무언가가 최근 한창 진행되었다. 무대는 미국. 참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학문적 업적과 수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과 정치적 입장을 자주 함께하는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J. Bradford DeLong), ClimateProges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환경학자 조셉 롬(Joseph J. Romm), 기후 변화에 대하여 온라인 대중들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 RealClimate 등이 한쪽에서 전선을 짜고 SuperFreakonomics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더브너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항변하였고, 스티븐 레빗 또한 (그의 동의 하에) 공개된 이메일을 통해 ‘오해’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노벨상 수상 확률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는 간략한 코멘트와 링크 게시를 통해 이 사건에 슬그머니 개입하려다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된 문서들의 대략이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으나(http://en.wikipedia.org/wiki/Superfreakonomics), 결코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마치 평범한 블로거들처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문제는 SuperFreakonomics의 5장에 등장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내용이, 적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부당할 정도로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그것을 사소한 오류처럼 만들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나 이단은 있는 법. 지구 온난화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저자들이 말할 때 이미 그 갈등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레빗과 데브너는 말한다.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난화 재앙을 믿는 것,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만으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이다.”

요컨대 온난화 회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레빗과 데브너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이 그러하였듯이, SuperFreakonomics도 ‘기존의 통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 대해 경제학적 시선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반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적어도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통념’이라는 것이 지구와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주제이며, 수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데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4도 상승하면 현재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멸종한다. 환경의 파괴, 종 다양성의 파괴는 많은 경우 해당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 온난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그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레빗과 더브너는 ‘지오 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평균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들은 환경학자 켄 칼데이라(Ken Caldeira)의 말을 인용하여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인용된 당사자 켄 칼데이라는, 환경 블로그 ClimateProgress의 운영자 조 롬과의 이메일 대화를 통해, SuperFreakonomics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인용했으며 자신의 학문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웃자고 그러는 건지, 10월 21일 현재 켄 칼데이라의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다.” 켄 칼데이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8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에 빠질 리가 없다. 레빗과 데브너는 경제학자 마틴 와이츠먼(Martin Weitzman)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논문의 논지와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SuperFreakonomics의 5장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크루그먼 본인이 해당 논문을 읽어봤을 뿐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와이츠먼과 함께 작업한 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 배틀’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참여자들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논쟁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할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고, 그만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신 이 논쟁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준다. 인터넷 문서의 기본 포멧인 HTML은 학문적 텍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하는 것은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바로 그 행동을 전자화한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생활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학문 연구의 도구였고 인터넷 또한 그러했다. 가장 난폭하고 거친 언어가 오가는 그곳은 사실 가장 정제된 지적 담론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또한 진중권의 표현대로 ‘문자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술문화가 인터넷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치 인터넷이 반지성주의의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기존의 출판 매체를 통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별도의 편집자가 없기 때문에 저자의 감정적 판단과 기준이 여지 없이 노출되며, 한 번 공개된 텍스트는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모든 곳에서 접속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의 담론이 오가느냐는 전적으로 이용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SuperFreakonomics를 둘러싼 이 논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레빗과 더브너의 인용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논외로 한다면, 이 논쟁은 ‘지오 엔지니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과연 비효율적인 행동인가, 그래서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하나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다. 데브너가 현재(10월 21일 오후 9시 50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올린 글에서 ‘나의 목표는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존중한다면, 그와 레빗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뢰가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한 지식인, 학계의 이름 높은 학자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를 알아보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홀대당하고 저평가당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그 공간을 지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당연하기만 하던 세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어 온라인 공간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고하고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요원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어지러운 관계망 속에 얽혀들어 있는 지식인들은 서로에 대해 공정한,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패거리 놀음에 열중한다. 현재 인터넷이 지적 담론의 토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인터넷 자체의 속성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폴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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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
벌써 5일 전에 올라간 기사이므로 전문을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그래도 가급적 위 링크를 찍어서 조회수를 높여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이 기사를 올리면서 몇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1. 이미 당연히 번역이 되어가고 있거나 원고는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어쨌건 한국어판이 나온다. 저자들이 수정판을 내지 않는 한 곧 나온다.

2. 한국어판이 나오면 이런 논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국내 일간지들은 서평란에서 온난화 회의주의 내지는 지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거나 슬쩍 다루거나 한다.

3. 대중들은 '와우, 정말?!' 이러면서 다 낚인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세요. 이미 SuperFreakonomics는 나노 단위가 되도록 까였답니다. 본문에 언급된 환경 블로거 조 롬이 오늘 또 하나 올렸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기상학자 Caldeira가 자기 입으로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생생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인터넷 칼럼을 통해 '이렇게 단순한 지오 엔지니어링이 대안인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언급할 지경입니다.

http://climateprogress.org/2009/10/26/caldeira-interview-superfreakonomics-geoengineering/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PrinterFriendly.cfm?story_id=14738383&fsrc=rss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이 논쟁이 궁금하신 분은 밑에서 두 번째 주소를 클릭해서 관련 링크를 훑어주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먼저 봐주세요.

2009-10-21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독일 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 불리어 왔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 『이성과 혁명』의 서론에서 서슴없이 단언한다. 선진국 프랑스의 발전된 정치경제적 상황을 동경하던 독일의 지식인들이 그 혁명을 정신 속에서 구현해낸 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은 칸트의 1784년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이미 하나의 싹으로 심어져 있다.

칸트는 자신과 독자들이 "계몽된 시대"(aufgeklärten Zeitalter)에 살고 있지 않지만,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 "일반적 계몽을, 다시 말해 마땅히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미성년에서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가 차츰 감소해가는 명백한 징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은 사실의 보고라기보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칸트가 "이 시대는 바로 계몽의 시대이며, 환언하면 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명확해진다.

이 짧은 텍스트 안에서 칸트는 끝없이 외줄타기를 벌인다. 그는 결코 프리드리히 왕, 계몽군주의 통치가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삭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고, 칸트 본인도 결국 그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는 프리드리히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당시의 낙관주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자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이룬다.

칸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왕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이며,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이다. 이러한 칭송은 두 세기 전의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찬사를 보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의 힘을 칭송한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나마 말해줄 것을 칸트가 희망한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른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부권적 명령을 전제로 해야 이해 가능하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왕이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무엇인가? 왕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왕은 검열하고, 삭제하고, 저자를 고문하고 심판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이 '허용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전적으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사람의 학자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아메리카의 용맹한 시민들보다 한참 소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반면 칸트는 어떠한 세금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학자로서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시민은 그에게 부과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성의 사적 사용의 제한]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기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설명일 뿐 적극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 시민적인 차원에서, 시민의 목소리로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칸트의 귓가에는 여전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복종하라!"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이라는 구분을, 어떤 적극적인 재해석을 가하지 않는 한, 사실상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을 비판할 자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아직 학자와 시민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헌법상의 권리들은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칸트처럼 비굴한 강화 협상을 계몽군주에게 제안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칸트는 그가 누리고 싶은 정치적 자유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는 표현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자유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계몽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계몽의 시대'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룬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칸트는 대중들이 계몽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계몽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절망은 20세기의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며, "이런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에 대한 자유를, 그 반쪽짜리 원웨이 티켓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자가 자유롭게 비판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칸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함성 앞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앞서 말했듯 매우 적극적이고 치열한 재해석을 가하여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 칸트적 의미에서 '학자'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자신의 책을 검열당하지 않고 써서 시장에 출판한 다음이라면, 대중들이 스스로의 이성을 감히 사용하여 자신을 계몽할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칸트에 대한 온갖 재해석이 담론계에 떠돌고 있지만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칸트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믿음은,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삶과 학문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내가 읽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극심한 정신적 굴곡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나누고 분석하는 그의 해박한 지성은, 권력 앞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주저하는 일개 대학 교수의 그것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는 『정신현상학』보다 앞서서 독일 지식인들의 내면을 그려내어 보여준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저작 중 드물게 '뜨거운' 글이다. 그 열기는 분출될 수 없는 억압된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시대부터 이미 독일 관념론의 그것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난삽하고 어지러운 문장을 읽다 지친 검열관의 시선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마지막 문단의 중간 부분부터 칸트의 어조는 급변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진행된다." ... "이러한 일의 진행 속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이하 진행되는 내용은, 앞서 말했듯 너무도 '뜨겁기' 때문에, 나의 요약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는 직접 길게 인용하여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적게 하는 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때 이런 딱딱한 껍질 밑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싹을, 곧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을 계발하게 되면, 이것은 점차 국민의 성격에 반작용하게 되고(이에 의해 국민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는 이 반작용이 통치의 원리에까지 미치게 되어 정부는 이제야 기계 이상인 인간을 그의 품위에 어울리게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민적 자유의 제약이 정신적 자유의 확장을 가져오고, 확장된 정신적 자유가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으로 이어지며, 결국 행동의 자유를 거쳐 통치의 원리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는 것, 그러한 강렬한 역사적 발전에의 소망이 조심스럽게 쇳물을 부어 거푸집에 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대미에 이르러 칸트의 이 텍스트는 한없이 '인간'의 텍스트에 가까워진다. 매우 용감하게, 과감하게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이미 헤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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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언급된 글 중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편역, 서광사)을 참조하였습니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의 다른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이 생각이 (혹시라도)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텍스트를 곡해하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확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2009-10-05

'흑싸리 총리' 정운찬

[판] '흑싸리 총리' 정운찬

한국을 대표하는 케인시언 경제학자 정운찬 교수. 총리가 되기 위해 청문회장에 앉았다. “감세의 70%가 서민의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정부의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이정희 의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그 경제학자는, 여론의 반발과 야당 의원들의 투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을 등에 업고 ‘무사히’ 총리가 되었다. 이른바 ‘식물 총리’가 될 것임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식물이 되었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현 정부 내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식충식물 역할이라도 해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은 훨씬 절망적이다.

[온 가족이 모여앉아 차례를 지내고 서로 안부를 묻고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 추석을 맞이하여 용산참사 유가족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정운찬 총리는 흑싸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흑싸리껍다구’라는 관용어구 그대로, 마땅히 내놓을 패가 없을 때 버리는 그런 패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정부 당국자 중 최초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는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읽은 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확답도 내놓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고, 수사자료 공개 문제는 검찰 소관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중앙 정부에서 오긴 왔습니다’라며 얼굴도장만 찍고 돌아갔다. 원론적으로 중앙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말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한 채 총총히 떠나간 것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지만, 서울시에서 무리하게 뉴타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전체적인 주택 정책 자체가 신규 주택 건설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자료 공개는 검찰 소관이지만 예로부터 검찰은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받아왔고, 법무부장관은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각료회의의 일원이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용산참사 재판은 정부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증인석에 선 경찰특공대 제1대대 대장은 “망루 내부를 파악하고 작전에 진입한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경찰특공대는 당시 망루 안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시너가 몇 통 있는지 등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망루가 건설되기도 전에 진압작전을 시작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진압이 참사를 불렀다”는 유족 측의 주장이 점점 신빙성을 얻고 있다. 명절을 전후하여 정부 측에서도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운찬 총리가 나왔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다. 용산참사는 서민경제를 표방하며 서민들의 주거지를 초고층 주상복합으로 재개발하는 정책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다.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마저 무시하는 안하무인 검찰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모르쇠 할 수가 없다. 차례가 돌아왔으니 뭐라도 내긴 내야 한다. 그러니까 에라, 흑싸리껍다구나 하나 버리지 뭐.

흑싸리라는 이름의 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흑싸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등나무인데, 화투에 그려진 모양이 비슷하여 싸리와 혼동하게 된 것이다. 등나무는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장미목 콩과의 낙엽 덩굴식물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심는 경우가 많으며 학명은 Wisteria floribunda이다. 정운찬 총리가 흑싸리가 아닌 등나무가 되어 지친 서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게임의 세계는 냉정한 법.

정부는 그를 흑싸리껍다구로 내놓았고, 낙장은 불입이다. 정 총리의 관운을 빈다.

경향신문, 2009년 10월 5일


편집 과정에서 빠진 문구를 첨가하여 올립니다. 하긴 신문 지면에 대놓고 '고스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불만을 리플로 달아주세요.

2009-09-23

기후 변화와 과학적 태도, 확실성의 문제

17세기 철학자들의 주된 과제 중 하나는 '지식의 토대'를 찾는 것이었다. 과학을 철학이 '정당화'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은 철학자들의 이런 저런 정당화 따위가 그다지 쓸모도 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지금은 과학적 지식이 왜 참인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 결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확실성'을 갖고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온난화 회의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대부분의 기상학자들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 변화가 촉진되고 있으며, 그 방향은 평균 기온 상승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문제는 '그게 정말 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같은 수준 낮은 질문에 대답하기가, 적어도 그 분야의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양의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는 비전문가가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것일 뿐더러, 훈련된 전문가라 해도 잘못된 해석의 함정에 빠지기 일쑤다. 아이추판다님의 블로그에 올라왔던 연어 영혼 발견 사건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내가 해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두 개 이상의 독립된 자료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일은 '이게 있고 저게 있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은 관련되어 있다'는 수준의 판단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고 한다).

같은 교훈이 기후 온난화와 관련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이 기상 정보를 정밀하게 수집하기 시작한 역사 자체가 매우 짧거니와, 지금도 새로운 방법론이 속속 개발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존의 데이터에 대한 재해석이 끝없이 가해진다. 따라서 그 분야의 정보를 꾸준히 다뤄봤거나 다른 분야의 연구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감식안을 갖추지 않은 다음에야, 대체로 '학계 주류'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실피드님의 리플에 대해 답변으로 인용한 기상학 블로그 RealClimate의 한 구절 또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Scientifically, this argument holds no water: it is simply not possible to draw conclusions about the causes of climate variations by just looking at one time series. Only considering the time series of Arctic temperature, it is impossible to tell what the cause of the 1930s warming was, what the cause of the recent warming is, and whether both have the same cause or not. Milloy’s specious argument is a characteristic example for a method frequently employed by “climate skeptics”: from a host of scientific data, they cherry-pick one result out of context and present unwarranted conclusions, knowing that a lay audience will not easily recognise their fallacy.
(강조는 모두 인용자)

http://www.realclimate.org/index.php/archives/2004/12/the-arctic-climate-impact-assessment/


가령 많은 온난화 회의론자들이 '자연스러운 기후 변화의 주기'의 사례로 인용하는 태양 흑점 변화의 경우, 그것이 '이유'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라는 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태양 흑점의 변화 주기 그래프 등을 제시한 후, 그 밑에 평균 기온 그래프를 가져다 놓고, '자 어때요, 놀랍죠? 온난화는 자연의 섭리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인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정보가 옳다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실피드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나 스스로 자료를 해석하려 들지 않고, 다수의 견해라고 인정되는 것을 따른다'고 나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반면 실피드님은 스스로 논문을 검색하고 자료를 찾은 후 기후 변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편이다. 각자의 방식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나는 내 방식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영역의 자료를 해석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렇다.

실피드님은 "북극의 얼음 면적 변화 추세" 라는 글에서 본인이 확보한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북극 위성 사진 및 분석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난 10년 간의 [면적] 자료는 추이라고 할만한 일관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후, 지난 40년간 측정한 얼음의 두께에 대해 언급하고, "내 생각에도 북극의 얼음은 백 년 이상이 걸려 제법 많이 녹아 없어지거나, 유럽까지 덮을 정도로 커지거나 하는 것 같긴 하다. 요점은, 이 마저도 고기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기적'일 거라는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실피드님은 인공위성 자료에 대한 크나큰 신뢰를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이전의 북극 현황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거나 찾더라도 신뢰할만하지 않으므로 장기적인 추세를 계산할만한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적어도 링크된 포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그러하다.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시리즈로 내고 있는 문고본 입문서 A Very Short Introduction중 하나인 Global Warming의 저자 Mark Maslin에 따르면, 그러나, 인공위성 자료가 지금까지 확보된 것들보다 정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4. Satelite data casts doubt on the models.

Again, before the satellite data was clearly understood it did suggest that [65p] over the last 20 years there had been a slight cooling. The interative process of science, i.e. the re-examination of data and the assumption concerning the data, clearly showed that there were some major inconsistencies within the satellite data; first, as a result of trying to compare the data from different instruments on different satellites and, second, because of the need to adjust the altitude of the satellite as its orbit shrinks as a result of friction with the atmosphere. The final problem withe the satellite data is that 20 years is just too short a time period to find a temperature trend with any confidence. This is because climatic circles or events will have a major influence on the record and will not be averaged out; for example, the sunspot cycle is 11 years, El Niño-Southern Oscillation is 3-7 years, and the North Atlantic Oscillation is ten years. So which of these cycles is picked up by the 20-year satellite data will strongly influence the direction of the temperature trend. [65-66p.] (강조는 인용자)


아무튼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난 20여년간 얻을 수 없었던 값진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 자료들을 통해 기후 변화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태양 흑점으로 인해 기온이 내려가는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관측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자연적인 요소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요소를 종합하면, 지난 130여년간 평균 기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왔으며 그것은 모델을 통해 예측한 결과와 일치한다.

3. Solar output and sunspot activity control the past temperatures.

This is something both the sceptics and non-sceptics agree on. Of course sunspots and also volcanic activity influence past temperatures. For example, the cooling of the 1960s and 1970s is clearly linked to changes in the sunspot cycl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camps is that the sceptics put more weight on the importance of these natural variations. Though great care has been taken to understand how the minor variations in solar output affect global climate, this is still one of the areas which contain many unknowns and uncertainties. However, climate models combining our current state-of-the-art knowledge concerning all radiative forcing, including grennhouse gases (see Table 1 on pages 16, and 17) and sounspots, are able to simulate the global temperature curve for the last 130 years. Figure 19 shows the separate natural and anthropogenic forcing on global climate for the last 130 years and the combiantion of the two. This provides confidence in both models and also an understanding of the relative influence of natural versus anthropogenic forcing. [62p.] (강조는 인용자)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에서 언급한 도표를 첨부한다. 이것을 보면 자연적 요소와 인위적 요소를 결합하여 만든 모델이 지난 130여년간의 평균 기온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과, 현재의 평균 기온이 지난 130년 중 그 어느때보다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분야에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평범한 입문서'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 . Global warming is caused by the massive increase of greenhouse gases, such as carbon dioxide, in the atmosphere, resulting from the burning of fossil fuels and deforestation. There is clear evidence that we have already elevated concentrations of atmospheric carbon dioxide to their highest level for the last half million years and maybe even longer. Sceintiests believe that this is causing the Earth to warm faster than any other times during, at the very least, the past one thousand years. [1p.]


여기서 다시 지식의 확실성 문제로 돌아가보자. 만약 누군가가 '저 과학자들 다 돈 타먹으려고 그러는 거다. IPCC는 악의 소굴이다. 넌 왜 직접 자료를 찾아볼 생각도 않고 넙죽넙죽 믿기만 하냐'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그가 바라는 수준의 '확실성'을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지식, 혹은 지식 일반에 대한 토대론이 무너진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의 지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자승자박에 빠지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대중적 차원에서 접할 수 있는 온난화 회의주의에 대한 책 중에는, 내가 인용한 것과 같은 '포괄적인 개론서'가 없다. 다만 특정한 자료의 해석을 놓고 기존의 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주안점이 맞춰져 있을 따름이다. 이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온난화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그들은 학계의 소수자 혹은 이단아일 뿐 주류적인 견해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나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온난화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시간적 단위는 150년이다. 2009년은 인류가 땅에서 석유를 채굴하여 쓰기 시작한지 딱 150년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석유가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면서부터, (이것은 『인간 없는 세상』의 엘런 와이즈먼이 쓴 표현인데) 지구는 쉴 새 없이 화산이 폭발하고 있는 행성이 되어버렸다.

내가 인용한 책에서 130년간의 데이터를 논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현재의 인공위성 데이터처럼 심층적이거나 정밀하지는 않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그런 경우에도 모델을 만들어서 현실을 예측하고 자료를 해석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지난 130년간 가장 뜨거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대체로) 통합된 견해를 신뢰하는 편이, 나 스스로 자료를 찾고 결론을 내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북극 빙하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실피드님의 리플에 내가 달아놓은 반박에 이미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1900년과 비교했을 때 현재 남아 있는 [북극해] 빙하의 양은 예전의 77퍼센트이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지난 30년간 여름에 팽창했던 빙하의 부피가 무려 20퍼센트 감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측정한 인공위성 기록을 살펴보면 2005년 9월 북극의 빙하 부피는 최저치(550만 제곱미터)를 가리켰다. 이 데이터는 현재 진행되는 빙하의 감소가 20세기에 와서 발생한 유일한 현상임을 조언하고 있다.(110쪽, 강조는 인용자)

『기후 변화를 이해하는 짧지만 충분한 보고서』, 슈테판 람슈토르프, 한스 요하임 셸른후버 지음. 오재호 옮김, 도솔.


그러나 실피드님은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위성 사진 자료(지난 '10년간'의 위성 사진 자료)를 찾아낸 후, 그것으로부터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지 못하고(자료가 부족하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 결과 '북극해의 변화에 대해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그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한 표를 훈련된 다수의 연구자들의 일관된 견해에 던질 수밖에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 또한 전혀 기후 변화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내가 제시한 '사실'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해도 내게서 답변을 듣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저 또 다른 전문가들의 '보편적' 견해를 들이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결코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 채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 수준의 확실성을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지는 이제 철학의 문제가 되어버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이다.

2009-09-18

김어준 총수, 파티는 끝났다

딴지일보에 기사로 실을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해 보았다가 거절당한 글입니다.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짧은 호흡으로 거칠게 썼는데, 거절당해서 안타깝군요. 이런 글도 올라갈 수 있어야 딴지일보가 새로운 활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급적이면 링크된 김어준 총수의 글을 먼저 읽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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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사건에 대한 길고 긴 변명일 뿐인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김어준 총수가 최근 한겨레 ESC에 쓴 "박재범은, 돌아온다" 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박재범은 돌아올 수도 있다. 비록 그가 가지고 있던 '짐승돌'로서의 상품성은 이미 반토막이 난 다음이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오묘한 속성이 그의 귀환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총수는, 못 돌아올 것 같다.

문제는 2002년 월드컵이었다. 당시 그가 쓴 기사들을 살펴보면, 애국심이 발현되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총수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나보다. 여기서 관건은 애국심 자체에 대한 칭찬과 비난이 아니다.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적 열기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느냐이다.

비유를 들어보자. 남자라면 누구나 발기한다. 따라서 발기하는 것, 성욕을 느끼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짓이 못 된다. 하지만 아무데서나 발기하고, 자기가 흥분했다는 이유로 아무나 붙잡고 성폭행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자를 처벌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성추행범들이 자연스러운 욕구가 어쩌고 저쩌고 운운한다. 모든 남자들이 그 '자연스러운'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강간범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그런 행위가 허용될 수는 없다.

국가주의도 그렇다. 축구는 일종의 형식화된 전쟁과도 같다. 축구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특히 축구는 국가주의적인 열기와 쉽사리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월드컵이라면, 축구장에서 국기를 흔들면서 응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의된 섹스와도 같다. 혹은 엄격한 규칙을 세워놓고 벌이는 정교한 SM플레이와도 같은 것이다. 오직 '그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국가주의적 열기. 문제는 김어준 총수가 이 열기에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발기했다고 그걸 꺼내들고 만지작거려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적 자존심' 따위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걸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애국 완장질',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되는 건가? 총수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두 번째[박재범에게 '암컷'들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하던 한국의 '수컷'들]가 세 번째['순수하게' 국가적인 관점에서 박재범을 비판한 사람들]의 언어를 구사하며 첫 번째처럼 행동하면서다. 나를 주눅 들게 만들던 알파 수컷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애국의 완장까지 채워진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자 그 완장을 애국주의의 집단발호로 해석하고 만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가 등장한다. 그것은 파시즘이다! 이에 첫 번째['우리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한다'고 반발한 '소비자'들]가 먼저 반발한다. 아니 소비자로서 내가 내 맘대로 섭섭해하지도 못한다는 건가. 어디서 훈장질이야. 이 반발은 대체로 합당하다. 첫 번째는 그런 구호를 외친 적 없었으므로. 두 번째는 실제 애국엔 관심이 없었으므로. 하여 그 질타는 세 번째에게나 적합한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세 번째는 워낙 소수라 그 판에 거의 참여도 않았으므로.

"박재범은, 돌아온다"(김어준, 『한겨레』, 「매거진 esc」, 2009년 9월 17일)


이 시점에서 예의 '먹물' 비난이 등장한다. 먹물들은 그냥 완장만 차고 있는 애들한테도 '국가주의자'라고 비난하니까 잘못되었다는 거다. 이건 아무리 봐도 웃기는 소리다. 나치 완장을 차고 나치 뺏지를 달고 다니면서 유대인을 구타하면 그게 나치인 거지, 가슴 속 깊은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아리안 민족에 대한 사랑과 총통에 대한 충성이 있어야만 나치인 건가?

이런 논리대로라면 '생계형 친일파'들은 친일파도 아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입사시험 볼려고 창씨개명하고 동양척식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서류 정리 좀 했을 뿐인데. 천황에 대한 가슴 속 깊은 충성심 따위 전혀 없었는데. 안 그래?

더군다나 '우리 나라에서 돈 벌어먹으면서 우리 나라 욕한다'고 불쾌해하는 게 국가주의가 아니라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거의 박살이 난 상태다.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진 그 지역주의 말고, 자기가 사는 동네를 가꾸고 지켜나가고, 자신이 '한국인'이기 이전에 '이 동네 사람'이라고 느끼며 자부심을 갖는 그런 지역주의 말이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물어보라. '너 이탈리아 사람이야?'라고 물어보면 '아니, 난 나폴리'라고 대답한다. 이런 지역주의가 과연 한국에 존재하는가? 설령 영남 호남 싸움에 목숨을 거는 누군가라 할지라도, '당신은 한국인입니까, 아니면 경상도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한국인이라고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 질문에서 자기 고향을 먼저 대는 이들은 극히 일부의 부산 출신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외국의 진짜 지역주의, 나라고 뭐고 다 필요없고 내가 사는 이 동네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지역주의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김어준이 전제하고 있는 그런 민족주의는, 한국에 없다.

김어준은 앙증맞게도 한국에 있지도 않은 '지역주의'가 바로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지역'이라는 게 바로 '대한민국'이고, 그래서 그 지역주의는 국가주의와 다를 바 없다. 단지 적극적인 공격심을 드러내는 대신 그냥 흥핏쳇 하면서 툴툴거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뿐이지, 그것도 국가주의라는 말이다. 왜냐,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공동의 정체성이 바로 '대한민국'이니까.

다양한 회피 기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놓고 보건 국가주의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국가주의를 국가주의라고 비판하면, 예의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같은 비난이 돌아온다. 마치 제 다리를 잘라먹는 문어처럼, 어차피 같은 먹물을 뿜고 사는 주제에 누구는 관습적 훈시를 내뱉는 먹물이고 누구는 아니라는 이 발상, 이게 진짜 문제다.

앞서 말했지만 어떤 형식을 띄고 있건, '너네 나라로 꺼져'라는 함성은 결국 국가주의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하게 소비될 수 있는 지점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아직도 김어준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2002년 월드컵 같은 특정한 때와 장소가 그 예에 속한다. 일상의 영역, 혹은 음악 듣고 아이돌 팬질하면서 꺅꺅거리는 그 순간은 국가주의와 무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대체 4년 전에 마이스페이스에 투덜거린 게 뭐가 대수인데?

스포츠의 현장이 아니면 국가주의적 함성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아닌 자들, 그저 박재범을 씹기 위해 대한민국을 거들먹거리는 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일종의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국가주의적 함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일종의 스포츠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악플을 달고, '그 새끼가 우리 나라 욕한 증거'를 퍼다 나르고, 오역이네 아니네 운운하면서 흥분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놀이'이다. 인간 사냥도 놀이에 속할 테니 말이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수렵을 했다. 무언가를 추적하고, 몰아붙이고, 숨통을 끊어놓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짜릿한 쾌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람'이 되는 게 정당한가? 우리는 네티즌들의 인간 사냥을 비판하지도 말아야 하는가?

'먹물'을 비난하기에 바쁜 총수에게 묻고 싶다. 이 상황에서 그럼, 당신은 이 인간 사냥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그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며 홍위병처럼 자아비판을 시켜야 속이 시원하겠노라고 외치는 저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완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너희들이 대한민국 어쩌고 운운하는데, 대한민국 어쩌고 하면서 어린 가수의 사소한 잘못을 놓고 쫓아내는 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국가주의'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체 왜 대중들이 '먹물'을 싫어할까? '국가주의'같은, '파시즘' 같은 단어들을 계속 사용해서? 그런 "지적 태만"에 분노해서? 본질은 그보다 훨씬 간단하고 유치하다.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다. 국가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아무리 떠들어도, 비판만 하지 않는다면 무사통과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해도 흥분한 대중들의 흐름을 거스르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이건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사람들에게 스스로 생각해야만 할 숙제를 안겨주느냐, 아니면 '너희들은 머리 쓰지 마, 내가 한큐에 정리해주마'라고 나서서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우겨넣은 다음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박재범에게 소비자로서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데 국가주의라고 비난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먹물이 개새끼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똥꼬 깊숙히' 똥침을 찌르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똥구멍을 핥아주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은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대체 왜 당신은 배신감을 느끼는가? 그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감정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총수는 그저 속편하게 예의 '암컷'과 '수컷'의 문제로 도피한다. 그런데 그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박재범에 대한 인터넷의 대중적 분노는 오히려 '미국인'에 대한 열폭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인에게 열폭하는 데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총수는 '건강보험료 한 달치 내고 비싼 치료 받는 재미교포들의 염치 없음'을 비난하는 여성 네티즌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나보다. 수컷으로서의 불안감?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핀트가 안 맞는단 말이다.

총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지금은 2009년이다. 월드컵 끝난지 7년 됐다. 파아티는 끝났다.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대~ 한민국~' 외치고 다녀도 되는 시기는 이제 끝났단 말이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간판 아래에서 벌어지는 비극들을 직시해야 하고,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는 얼간이들이 더 큰 해악을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국가주의' 비판이 단지 "강박적인 호들갑"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김어준 총수 본인의 "지적 태만"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달력부터 보자는 말이다. 파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2009-09-17

힐러리 퍼트남과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

몇 살 때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기억하는 한, 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없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해 반대해왔다. 이것은 사실 철학적 회의주의의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무언가가 옳은지 그른지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동시에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척도로부터 벗어난 초월적 진리가 있다면,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어찌 알겠는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을까? 많은 철학자들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 철학자 콰인은 인식론 전체를 자연화하겠다는 기획을 내놓으며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선험적인 지식, 선험적인 인식, 선험적인 그 무언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파악해낼 따름이다. 따라서 인식론은 인지과학의 발전에 기대야 마땅하고, 인식론 자체가 '자연과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1969년작 "Epistemology Naturalized"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철학자들이 반발했는데, 오늘은 그 중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이 내놓은 희한한 논증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퍼트남은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라는 독특한 논문을 통해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반대했다가, 출간 전에 덧붙인 노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뒤집었다가,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래도 이런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묘한 논의를 전개했다.

최초의 논증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그는 모순률을 이렇게 저렇게 잘 다듬어 그가 '모순의 최소 법칙'(Minimal Principle of Contradi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모든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not every statement is both true and false)"는 것이 그 내용이다.

헤겔식의 단순한 모순률 대신 이렇게 복잡하게 최소화된 요건을 적용해야 하는 이유는 빌어먹을 양자역학 때문이다.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죽은 것이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빛은 파동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 될 수 있다. 퍼트남은 논리적 트릭을 통해 이 함정을 피한다. 양자역학적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 대한 명제들, 뭐 그 외에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는 명제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적어도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험적 대상과 맞닥뜨리더라도, 다시 말해 선험적으로 참이다.

여기까지 초고를 써놓고 좋아하던 퍼트남은,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논문에 써 있는 바에 따르면) 수학적 직관주의(mathematical intuitionism)가 있기 때문에 '모순의 최소 법칙'이 절대적으로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그 경우에도 "그 어떤 명제도 증명되면서 동시에 증명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새로운 '모순의 최소 법칙'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최초에 제시된 '모순의 최소 법칙(1)'이 모든 경우에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라는 것은 이제 틀린 말이 되어버렸다.

그 노트에 대한 새로운 노트에서 퍼트남은 자신이 순순히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변명을 늘어놓는다. 콰인주의에는 온건한 입장도 있는데, 대체로 추종자들이 본래의 사상가보다 더 목소리를 드높이는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콰인주의자들 중에서는 콰인이 제일 과격하다. 콰인은 그 어떤 명제도 선험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선험적으로 어떤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런 과격한 콰인의 입장에 대해서라면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참'과 '거짓'이라는 개념들의 사용과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인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경험적 차원으로 치환될 수 없는 명제를 하나 만들 수 있다. "고전적인 참과 거짓 개념이 포기될 필요가 없다면, 모든 명제들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지는 않다."

퍼트남은 이 지점부터 슬그머니 논쟁에서 이탈한다. 자신의 논증은 콰인이 논박하고자 한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이성 규칙의 이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어떤 명제가 절대적으로 선험적이라는 주장이나, 그 어떤 명제도 절대적으로 선험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나, 모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시했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실컷 잘 싸우다가 이게 무슨 소리냐 싶지만, 이 논문 자체가 초고에 스스로 반박을 하고 또 반박을 해서 나온 것이니만큼 이 이상의 논의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론의 자연화에 맞서는 하나의 논증 방식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그 스스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퍼트남의 논증 방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내놓은 논증과 구조적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안타깝게도 학교 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코플스턴 철학사에 등장하는 내용을 통해 그 논증을 짐작해보는 수준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그[아우구스티누 스]는 또, 회의주의자일지라도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 예컨대 상반하는 두 개의 명제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허위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여럿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만약 여럿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세계의 수가 유한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무한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세계에는 시작도 끝도 없든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든가, 시작은 없으나 끝은 있든가, 시작도 있고 끝도 있든가 그 중 어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언제나 모순률을 확신하고 있다.


퍼트남이 두 번의 퇴행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어떤 층위에서건 모순률을 발견해낼 수 있고, 그 모순률의 존재만큼은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과 '거짓'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증명된다'와 '증명되지 않는다'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내가 아는 바가 없으므로 일단 여기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참고문헌

Willard Van Orman Quine, “Epistemology Naturalized,” in 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9), 69-90., Reprinted in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ey-Blackwell, 2008), pp.528-537

Hilary Putnam,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 Erkenntnis 13 (1978): 153-170. Reprinted in ed.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ley-Blackwell, 2008)

82p. 프레드릭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trans. 박영도, 코플스톤 서양철학사 2권 (서울: 서광사, 1988)

2009-09-04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

최장집 학파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갈등은 정치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다. 특히 그 갈등의 크기가 중요하다. 일전에 sonnet님과의 논쟁에서도 잠시 언급된 바 있듯이, 하나의 정치적 투쟁 속에서 약자는 대체로 갈등의 범위를 넓히려고 하고, 강자는 그 범위를 좁히려고 한다.

그 갈등의 범위를 단지 '숫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츠슈나이더가 보기에 기득권층은 갈등을 사사화(私事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약자들은 문제를 사회화(社會化)함으로써 갈등 내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한다. 샤츠슈나이더는 우리가 흔히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기동들을 한데 묶어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매우 중요한 문단이므로 길게 인용해보자.

정치에 관한 문헌들을 훑어보면, 정말이지 갈등의 사사화와 갈등의 사회화를 지향하는 상반된 경향들 간의 오랜 투쟁을 목격할 수 있다. 한편으로, 갈등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공적 영역에서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이념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주의, 기업 활동의 자유, 지방주의, 사생활 보호, 재정 지출의 축소와 관련된 이념들의 긴 목록은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 혹은 공적 권위를 사용해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를 막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당수의 갈등은 사적인 영역 내에 묶어 두는 방식으로 통제되었고, 그래서 갈등이 가시화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치를 다룬 문헌에서 이런 전략에 대한 언급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적 설명도 이런 이념들과 갈등의 범위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 적이 없다. 갈등의 사사화는 이와는 다른 근거에서 정당화되었다.[48-49쪽](굵은 글씨는 원저자, 밑줄은 인용자 강조)
E.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반면 우리가 '진보적'이라고 알고 있는 정치적 주제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뒤이어지는 문단을 살펴보자.

다른 한편, 갈등의 사회화에 기여하는 일련의 이념들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이념들뿐만 아니라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들 이념은 갈등을 전염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외부자들을 갈등에 참여시킴으로써 그 이전까지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적 권위에 호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49쪽](밑줄은 인용자)


이슈가 터질 때마다 우르르 달려드는 이른바 '팩트 골룸'들에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로 설명된다. 팩트 골룸들은 당장 '구경꾼'의 숫자를 늘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엄연히 '사회적'으로 소화되어야 할 이슈를 '사사화'하는 것이다.

가령 쌍용자동차 공장 농성자들이 며칠 더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과 음용수를 비축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팩트'를 좋아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이슈에 반응하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알고 보면 먹을 거 많았대요~!' '노조 지도부는 먹을 것을 안 나눠주고 있었대요~!' 이런 떡밥에 반응하는 '구경꾼'들은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쇄말한 팩트의 차원으로 끌어내려버리기 때문이다. 샤츠슈나이더는 그런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먹고사니즘'은 갈등을 사회화하는데 기여할까, 아니면 사사화하는데 기여할까? (나는 그것을 '매 사안마다 '먹고 산다'는 말로 지칭되는 막연한 생계 혹은 소득의 문제를 들먹이는 담론 구조'로 이해하고 있지만) 아직 '먹고사니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 사안에 한정지어서 물어보자. 진중권의 중앙대 해임 사건을 놓고 '그래도 먹고 살만 하대요...'라고 말하는 것은 진중권과 중앙대의 갈등, 혹은 진중권과 정부의 갈등이 사회화되는데 과연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될까?

다들 짐작하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를 사회화하고 싶다면, 샤츠슈나이더의 말마따나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을 언급해야 한다. 설령 진중권이 겸임교수 및 시간강사 자리에서 모두 잘려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해도, 이 이슈를 사회화함으로써 '해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면 '진중권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같은 식으로 가닥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중앙대는 '대학(=기업) 활동의 자유'를 근거로 들어 그를 해임했을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갈등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중권 본인이 겸임교수로 버는 돈이 얼마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어차피 먹고 사는 문제에 지장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 오히려 진중권의 그 발언을 통해 이 사건을 '경제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게 된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순수하게 '부당한 해임', '정치적 외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침 진중권의 당당한 수입 공개를 통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 인터넷 논자들은 도리어 그 발언을 토대로 이 사건을 사사로운 일로 언급하기에 급급했다.

이명박을 싫어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해석' 대신 '진중권은 먹고사는 일에 문제 없다 오바' 같은 소리가 난무한 이유 또한 역시 '사사화'에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저는 진중권에 대한 정보를 당신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에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사마 끄떡 없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이 이 갈등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당위와 충돌하였는데, 적지 않은 인터넷의 논자들은 그 욕망에 굴복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덕분에 진중권이라는 거물이 정말 시덥잖은 일을 당하는 지경에 몰렸지만 아무도 그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 좆같은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정작 총대를 매고 나선 것은 그의 수업을 듣던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비겁하다고 나약하다고 손가락질이나 당하던 20대가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중앙대는 문자메시지로 학생들에게 징계 사실을 통보했다. 학부생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엄연한 대학의 일원이다. '돈줄'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고 '애새끼들'도 아니란 말이다. 이 문제 역시 일종의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습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여기서 혹자는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더라' 같은 소리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떤 별로 재미 없는 농담이 떠오른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그를 보고 의사가 물었다. "Oh, my god. It's serious. How are you?" 그러자 한국인은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I'm fine. Thank you. And you?"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진중권이 다른 누구처럼 아이고 데이고 나 죽네 생계가 어려워서 미치겠지만 웃음으로 참아야겠네 동네 사람들 나 좀 보소~ 이러고 있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모든 갈등이 사사화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그 결과 가장 오버스럽게 고통을 호소하고 난리를 쳐야만 슬쩍 관심을 보이는 식으로 길들여져 있다. 그럼 '유쾌한 미학자 CJK'가 블로그에서 오열하고 삭발식이라도 하리? 본인이 괜찮다고 하면 그냥 괜찮은 거야? 당신들 바보인가?

밖에서 큰아들이 맞고 돌아왔다. 그 큰아들은 속내가 깊어서 웃는 얼굴로 '괜찮아요. 병신같은 애들이 병신짓 하는 건데요 뭐. 삥도 별로 안 뜯겼어요'라고 말했다. 세상에 그 어떤 미친 부모가 '아, 우리 애가 정말 생각보다 괜찮나 보다. 과자 사먹을 돈 아직 남았다니까 다행이다'라고 생각할까? 더군다나 그 큰아들을 때린 깡패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닐 것이 불보듯 훤한 시점에, '우리 애는 문제 없어요. 자기가 괜찮다는데 뭐'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먹고사니즘'이 정말 무섭긴 무서운가보다. 사람들이 뭐에 홀린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진중권은 먹고살만하다고 한다'는 말을 옮기고 있고,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같은 단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잠시 염두에 두었더라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하등의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우석훈의 주도 하에 두 번째 서명판이 돌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먹고사니즘'은 이 갈등을 진중권의 '밥줄'에 대한 것으로 전락시켜버렸다.

그 결과 가장 피해를 보게 된 것은 결국, 20대들이다. 진중권을 위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가 징계를 당한 그 학생들 말이다. 참을 수 없이 부조리한 상황이다. 사태를 파악해보기 위해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실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용기를 낸 의로운 학생들이 결국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의 희생자로 전락하게 될 위험에 놓인 것이다.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는 진중권과 달리, 나는 이 일에 정말 화가 난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와 안식을 이루게 하소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08-03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

2008년 6월 10일. 100만이 넘는 인파가 서울 시내 중심가에 모였다. 그들의 요구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결같았다. 정부는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하여 세종로 사거리의 북쪽을 틀어막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것은 이른바 '명박산성'이라고 불리웠고, 집회 현장에 나온 사람들은 분노와 허탈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명박산성을 어찌해야 하는가를 놓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견이 갈렸다. 당시에는 자신들이 그 스티로폼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지만, 사실 그때 명박산성 앞에 쌓였던 스티로폼은 이른바 '연석회의'에서 마련한 것이었다(고 나는 알고 있는데, 확인된 정보는 절대 아니다). 문제는 컨테이너 박스 앞에 스티로폼을 쌓아놓고 올라가자는 그 단순한 발상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 등을 이유로 '비폭력'을 외치며 오래도록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6월 10일은 지나갔고, 우리는 지금까지 왔다.

당시 나는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거의 매일 촛불시위 현장에 나갔다. 촛불시위에 대한 그 모든 비판은 대체로 타당하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비전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민주주의와 비폭력 같은 선한 가치들이 고삐 풀린 채 돌아다니며 독재와 폭력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놈의 '비폭력'에 대한 억압을 떨쳐버리고 진작에 명박산성 위를 점거했더라면, 어찌어찌 방법을 찾아 광화문 사거리 너머까지 진출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바더 마인호프>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각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다. 1968년 부활절 휴가 무렵, 독일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두치케는 극우 청년단체 회원의 총에 맞아 의식을 잃는다. 그에 항의하기 위해 학생들은 <빌트>를 찍어내는 독일의 미디어 재벌 슈프링어 그룹의 사옥으로 쳐들어간다. 신문 수송 차량을 습격해서 갓 나온 신문을 불태우고, 자동차를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른다.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 마인호프는 체포될 뻔하지만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경찰 덕분에 유치장 신세를 면하고 더욱 급진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조선일보 사옥 근처에 앉아서 신문 수송 차량의 진행을 방해하던 수십 명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다가 결국 그 차를 보내줬다. 우리도 독일처럼 그렇게 '선진국형 시위'를 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는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독일을 방문하던 당시의 풍경에서 출발한다. 경찰은 이란 청년들이 피켓을 뜯어 만든 각목으로 학생 시위대를 구타하는 모습을 뒷짐 지고 바라보고만 있다. 기마경찰과 전투경찰이 투입되어 오직 학생 시위대만을 두들겨 패고 진압한다. 이 오프닝을 통해 '지금 여기'는 곧장 '그때 그곳'이 되어버리고 만다. 조선일보 신문 운송 트럭에 불을 질러야 했을까? 더욱 과격한 행동만이 새로운 정국을 이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까? 문제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질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나는 철이 들기 전부터 나 자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고, 한 가지를 저지르기 전에 열 가지를 고민한다. 스스로의 행동성에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돌이켜보지 않으면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고, 그로 인해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산다.

적군파 1세대를 도와준 변호사에게 리더인 바더는 '저 할머니의 지갑을 훔쳐오라'고 지시한다. '순전히 말 뿐이군'이라는 비아냥을 덧붙이면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변호사는 미국인 관광객인 척하면서 슬쩍 지갑을 훔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킬킬거리는 '급진주의자'들은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소유권에 대해 급진적으로 저항하는 아나키스트가 결코 아니다. 비록 변호사 자신은 바로 그런 '원칙'을 떠올리며 할머니의 지갑을 훔쳤겠지만, 그 도둑질을 지시한 바더는 누군가 자신의 차를 훔쳐가자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저주를 하며 욕을 퍼붓는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혁명가였고, 단지 잘못된 시대에 잘못된 공간에 살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기본적으로 철부지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철부지들의 우발적 폭력에 이른바 '인텔리'들이 끼어들면서 적군파 운동은 지능화되고 또 심화된다. 마인호프가 가담하기 전까지 바더와 그 일당들은 조잡한 시한폭탄으로 텅 빈 백화점에 불이나 지르는 잡범들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경험이 많고 선동적인 글을 쓰는 재주를 지녔던 마인호프가 가담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테러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게 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다. 재판을 기다리며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적군파 1세대들은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한 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쏟던 변호사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적군파 2세대에게 기관단총으로 가득 찬 가방을 건넨다.

이 영화는 그 누구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고, 동시에 그 누구의 행동도 미화하지 않는다. '일관성'을 지키고자 마인호프는 자신의 두 딸을 팔레스타인의 고아원으로 보내버리려고 하고, 바더와 그의 여자친구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선택을 부추기면서 즐거워한다. 독일의 조선일보사라 할 수 있는 슈프링어 그룹에 폭탄을 설치한 바더 마인호프 일당은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직장에서 직원들을 대피시키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전혀 설득력 있는 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 작전의 책임은 내부 정치 투쟁 끝에 결국 마인호프가 전부 걸머지게 되며,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서서히 미쳐가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마인호프에게 더 감정이입을 한 채로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적군파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국 '무언가 해야 하는데...'라는 불안과 초조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잘난 칼럼을 쓰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쌍용자동차 현장에서 고립된 노동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고, 정부와 사측은 여론몰이를 통해 그들을 해고하거나 진압할 궁리에 골몰하고 있다. 철학과 대학원생 연구실에 앉아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나를 조여오지만, <바더 마인호프>는 바로 그런 죄책감에서 비롯한 '참여'가 낳는 비극적 파국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참여와 실천과 투쟁을 권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처해야 했던 상황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갈 따름이다.

이 영화의 원제가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바더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 즉 되는대로 저지르고 자신이 낳은 결과에 대해 그리 큰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으며, 다만 느끼는대로 저항할 뿐인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저항의 길로 이끄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터이다. 그 모든 동기와 불만과 폭발을 수렴할 수 있는 어휘는 오직 '컴플렉스' 뿐이다. 우리는 그 컴플렉스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유효한 말도 할 수 없다.

오늘 밤까지 재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찰은 평택 공장에 대한 진압작전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을 위해 조선일보에 처들어가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의 '컴플렉스'가 그때의 '컴플렉스'보다 더욱 거대하고 끔찍해진 것은 바로 이렇게 확인된다. 이제 우리는 '연대를 위한 폭력'이라는 개념을 상상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적군파는 제3세계를 위해 테러를 벌였다. 용산에서 경찰은 그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해 대테러부대를 투입하였다. 이 사실을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용솟음치지만, 그것은 어떤 유의미한 지점으로 향하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만다. 컴플렉스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독일어 단어 komplex는 '단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Baader-Meinhof Komplex'는 '바더 마인호프 조직'이라는 뜻에 더욱 가깝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 단어가 갖는 다른 의미에 주목하였음을 밝힌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철학'이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아무나 내키는대로 만들어서 인생사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입하는 세계관 철학. 말하자면 개똥철학. 둘째, 이미 철학사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텍스트와 그에 대한 연구. 이럴 경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를 연구하거나 특정 철학자의 텍스트에 몰입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셋째, 그 누구도 다다른 적 없는 진정한 '철학'.

유독 철학에 대해서만큼은 두 번째 층위, 즉 전문적인 연구의 성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층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에도 엉터리 과학이 있으며 과학적 연구를 통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지식이 궁극적 목표로 존재하지만, 그러한 엉터리 과학 그 자체를 자신의 신조나 인생관으로 삼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개똥과학'의 문제는 비교적 손쉽게 반박될 수 있는 편이다.

철학의 경우에는 문제가 훨씬 복잡해진다. 가령 누군가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기원전 300년부터 제기되었고 반박되고 있는 회의주의일 뿐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이라고 반박하기 시작하면 '너는 훈고학, 나는 진정한 철학, 너는 상아탑의 노예, 나는 거리의 철학자~ I say 철, you say 학~'같은 병맛나는 대응의 퍼포먼스가 즉각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같은 원시적인 명제를 들먹거리며 자신이 적당히 대충 쓰는 블로그 게시물 따위를 옹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지적'으로 다져진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일종의 인생관의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개똥철학이 가지는 이중적인 태도에 있다. 그들은 강단철학의 성과와 가치를 무시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권위에 기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몇 권의 책을 체계 없이 읽고 대강 두들겨 만든 엉성한 사고의 구조물이 인류적 가치를 지니는 텍스트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는 것을 자기 주변의 전공자들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 가령 칸트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도 정작 그 칸트의 텍스트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본 누군가가 해석상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을 제시하면 '철학이라는 것에 정답이 있는 걸까' 같은 싸구려 회의주의로 도피하는 모습을 나는 최근에 모처에서 보았다. 그런데 만약 철학적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존재할 수 없다면, '칸트는 ...하게 생각했다'는 식의 서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관 철학자들은 그런 초보적인 내적 모순 따위에 결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crank'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 수준은 대단히 미비하다. 그러나 그 사실로부터 우리가 개똥철학에서 곧장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 또한, 과학처럼 엄격한 수준은 아니어도, 역사상 앞서 나간 누군가에 대한 연구와 반박을 통해 형성되어왔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라는 어구는 철학에도 마찬가지로 통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국내의 연구 수준은 개별적인 학자의 종아리나 허벅지까지 기어오르는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우리도 거인의 어깨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등장은 독일 강단철학의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을 예로 들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대한 독해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매일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의 접점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아직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철학의 거장이다. 하이데거의 현란한 그리스어 분석과 해석은 독일어권에서 행해진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의 성과가 없다면 성립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철학'은 바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2009-07-20

예수전: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

예수전 - 8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이 서평을 쓰기에 앞서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김규항의 신작 『예수전』에 대해 몇 가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가 말하는 신학적 사항들에서 오류가 있다면 누구라도 주저없이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예수전』은 입문서이지만 그리 좋은 입문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 개의 복음서 중 마르코복음을 강독하는 방식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예수의 말과 행적을 담은 네 개의 복음서,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첨가도 적"(12쪽)기 때문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르코복음이 작성되기 시작한 시점을 아무리 멀리 잡아도 기원후 60년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이 기원후 33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 그의 말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고, 심지어 때로는 상충되는 인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직접 성경을 '책으로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가령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말하는 예수의 탄생 설화는 서로 다르다. 반면 마르코복음은 다짜고짜 '복음 시작'이라고 선언하면서 출발할 뿐, 그의 탄생에 대한 신비화를 수행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김규항이 이런 점들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마르코복음을 일종의 '정전' 혹은 '원전'으로 간주하고, 마태오와 루카에는 '종교적 첨가'가 지나치게 많다는 성경 해석관을 견지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전제가 정당한 것일까? 마르코복음이야말로 예수의 말을 듣기 위한 가장 좋은 경로이며, 그 외의 복음서와 여타 신약성경의 내용은 '종교적 첨가물'일 뿐인가?

그러나 복음서들이 단순한 전기적 바탕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허물어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은 교묘하게 다듬어진 신학적 구성물이 며, 어느 하나도 세칭 그 저자들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지은 것이 없다. 모든 복음서에는 둘째, 또는 셋째, 또는 넷째, 손을 거친 이야기들이 자료로 사용되었다. 모든 복음서는 바울 서신이 나온 이후 사반세기에서 반세기 동안에 저술되었다.

우리가 원래의 예수 공동체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좋은 증인은 바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훗날 신약성서가 될 문서들을 가장 먼저 쓴 저자이다. 실제로 신약성서 문서들 중에서 그의 진정 서신들만이 그 저자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20쪽, 게리 윌스, 김창락 옮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이 마르코를 주요 참고 자료로 삼아 기술되었다고 해서, 마르코복음은 '종교적 문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복음서는 당대에 떠돌던 '모든 구전'을 담아낸 책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 이후 유대교 공동체 등에서는 온갖 형태의 구전 설화들이 오가고 있었다. 루카나 마태오(라고 불리는 무명의 필자)가 기록한 탄생 설화들도 그 중 일부분이다. 이것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떤 종교적 의도, 혹은 의도까지는 아니어도 배경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종교적인 복음서/ 비종교적인 복음서'를 나누는 것은 타당한 시각이라 보기 어렵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규항은 이 책에서 일관되게 '비종교적인 예수'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다음 구절이다.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 그 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325년 최초의 기독교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 있는 제 별장에 세계의 주요한 주교들을 모아 놓고 회유와 협박으로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당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대체로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의견보다는 예수가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라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엔 그런 신학 논쟁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내 예수가 하느님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격상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교리의 통일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을 한껏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그런 정치적 의도로 내려진 결정은 더 이상 다른 견해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정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다. 그후 오늘까지 거의 모든 지식과 신앙에서 예수는 교리 속의 주인공으로 출발한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헀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24-25쪽)


문제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의 깊이와 폭이 이렇게 '정치적 선택'이라는 단어 하나로 결정될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김규항이 말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가 아리우스파, 즉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의 견해를 배척한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만약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한 위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유대교의 한 예언자와 다를 바 없는 누군가가 되어버린다.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는 예언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예언자'에 대한 사랑만으로 예수를 기억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비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예수가 유대교의 예언자와 마찬가지인 위격을 갖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거의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정립은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엄연한 신학 논쟁이며 그 차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가 아닐 수 있을까? 한 자연인으로서 살고 죽었던 예수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그를 거론하는 역사적 기록이 대단히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막대한 당혹감을 불러온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본이 존재하는 고대 문헌이다. 그런데 성경 외의 다른 문헌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와는 정 반대로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는 '요제푸스'를 비롯한 당대의 역사적 문헌에서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에게 세례를 배풀어놓고도 쩔쩔 매는 것으로 묘사되는 '겸허한 스승'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 속의 예수라는 청년이 당대의 큰 물의를 일으킨 누군가가 아니었을 가능성,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듣보잡'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예수의 운동은 그의 생전 당시만 해도 변변찮은 촌놈 한 무리의 난동에 가까웠고, 궐기다운 궐기도 해보지 못한 채 진압당했다. 그 부하라는 자들 또한 스승이 죽자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는 자신이 우두머리 제자였다는 사실마저도 세 번씩 부인한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건'이 터졌고, 갈릴리 촌놈들은 머리에 후광을 뒤집어쓴 채 사도로 돌변한다. 대체 그게 무슨 일인가?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부활'을 결정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김규항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독교도들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굳세게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261쪽) 문제는 기독교가 없었다면 우리가 대체 어떻게 예수에 대해 알고 말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실재하였던 한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진정 의도했던 바를 추구하고자 하는 김규항의 시도는 바로 그 점에서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네 복음서중 오직 하나만을 '특별'한 것으로 삼고(부활한 예수가 승천하는 이야기를 담은 마태오복음의 결말을 그는 배격한다. "어쨌거나 이 부분은 '가장 먼저 쓰인, 그래서 예수의 모습을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복음서'라는 「마르코복음」의 특별한 의미와는 무관하며, 따라서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마르코복음」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와도 무관하다."(266쪽, 강조는 인용자)), 그 속에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예수의 진짜 의도'를 찾아내어, 그것이 김규항 자신이 말하는 '불온'한, 진정한 진보 담론과 합치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 작업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다.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이단 마르키온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및 바울서신만을 남기고 다른 신약성서를 지워버렸다.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복음서에서 스토아 철학자를 발굴하고자 했다. 김규항 자신이 치열하게 비판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도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예수는 베버주의의 가장 속물화된 버전을 몸으로 구현해낸 누군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가 복음서 중 어떤 것은 털어내고 어떤 것에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나의 예수전'을 쓰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역사 속의 예수'는 내게 유리한 말을 했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게리 윌스의 다른 책을 인용해보자.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성서 밖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성서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단 한 가지의 이유는 바로 부활에 대한 성서 집필자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를 확인하기 위해 구문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은 퇴비 더미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태평양 바닥에서 뉴욕 시를 찾아내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논리가 뒤엉켜 혼재되어 있는 전혀 엉뚱한 담론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예수는 바로 믿음의 예수다. 그러한 믿음을 거부한다면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 성서 속의 예수는 말씀을 전하고 부활했던 바로 그 예수다. 그가 이끈 신비로운 무리의 구성원들이 품고 있던, 그의 영속적인 활동에 대한 믿음이 성서에 대한 기독교적인 믿음의 기반이다.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예수에 대해 왈가왈부 성가시게 할 필요도 없다.
25쪽, 게리 윌스, 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면 유대교의 전통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는 실패한 듣보잡 '불온'분자일 뿐이며, 유대교 전통에 익숙하다 해도 죽었다가 살아난 예언자 중 하나일 뿐이다. 예수에 대한 네 편의 장대한 전승을 보존해온 집단의 믿음은,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교리에 기반하고 있다. 하필이면 그 한 사람만이 하느님과 동일한 위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기도 했다는 그 억지 논리 말이다. 심지어 그것이 공식 교리가 되는 과정에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고, 반대파들은 폭력적으로 탄압당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이 실로 예수의 '부활'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대체 '부활'이 무엇이었을까? 어떤 제자들은 몸으로 살아난 예수를 만났다. 바오로와 같은 이방인들은 주로 환영이나 환시를 통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을 것이다. 혹은 성령의 역사함 속에서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을 수도 있다. 성삼위가 하나가 아니라면 예수의 부활은 집단 히스테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다. 2천 년의 역사를 통해 다져진 교리는 그 기간동안 빚어진 신앙의 역사적 증거이자, 동시에 신앙 그 자체이기도 하다.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상이 갖는 또 다른 문제점은, 과연 그렇게 구성해낸 '역사적 예수'가 실재의 증거와 어느 정도 합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김규항은 예수가 태어나고 자란 갈릴래아를 오늘날의 팔레스타인과 서슴없이 등치시킨다.

가 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의 저항의식은 늘어만 갔다. 끊임없이 소요와 봉기가 일어났고 대개의 갈릴래아 청년들은 과격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또 죽어 갔다. 예수는 바로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성장했다. 예수는 마치 오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소년처럼, 동네 형들과 삼촌들이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다 줄줄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22-23쪽)

예수는 오히려 폭력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갈릴래아에선 크고 작은 봉기가 셀 수 없이 일어났다. 예수는 그런 현장을 외면할 수 있는 특권계급이 아니었다. 예수가 형 혹은 삼촌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갔고 나중엔 친구와 동생들이 죽어 갔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로부터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과 같다.(237쪽)


김규항이 묘사하는 예수는 완벽한 운동권 청년인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예수의 내면에서 이른바 NL과 PD가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이라면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에 먼저 눈을 뜨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계급적 인식이 반드시 그들에게 수반한다고 볼 수는 없단 말이다. 그런데 김규항이 말하는 예수는, 심지어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은 시점인데,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층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랬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는 요즘 말로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137쪽)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계급적 관점'을 이런 식으로 규정한다면, 김규항 자신이 이 책에서 역시나 신랄하게 비난하는 자들, 바리새인에 비견된다고 말하는 '명망가'들도 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은 예수만의 일도 아니다. 팔복(八福)에 대한 해설을 하며 테리 이글턴은 "예수의 격언은, 부패한 지배계층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던 구약 예언자의 전통을 따른 것"(31쪽, 대한성서공회·김율희 옮김 『예수-가스펠』(서울: 프레시안북, 2008))이라고 설명한다. 김규항이 말하는 계급적 의식은 역사상 훌륭한 '스승'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허한 개념의 놀음'에 지나지 않을테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 '팔래스타인 예수'로 돌아가보자. 앞서 인용한 책에서 테리 이글턴은 예수가 그렇게 가혹한 탄압을 어려서 경험해보지 못했으리라는 쪽에 한 표를 던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의 고향 갈릴리에는 로마군이 공식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원한에 사무친 반제국주의자 부모의 품에서 자랐을 리는 없다. 예수가 어렸을 때 로마 군인들을 봤다면 그건 아마 휴가를 즐기러 나온 군인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죽은 유대에 주둔한 로마군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11쪽, 서문, 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서문, 대한성서공회·김율희 옮김 『예수-가스펠』(서울: 프레시안북, 2008)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나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갈릴리에 로마군이 공식으로 주둔했다는 이글턴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로마의 대외 지배 방식을 고려해볼 때 이글턴의 설명이 더욱 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극소수의 미군이 주둔하는 대한민국에서 극소수만이 원한에 사무친 반제국주의자가 되는 것을 연상해볼 수도 있다. 특히 그 청년이 엄격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예수의 구약 인용은 자주 틀리기로 유명한 반면, 랍비로 훈련받은 바오로의 인용은 완벽에 가깝다), 본래 민족주의란 그 민족 내에서 많이 배운 자들이 외세에 대해 품는 감정이므로, 그가 팔레스타인 청년의 마음으로 로마와 싸웠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교리'에 따른 가필이 적다는 전제 하에 마르코복음을 선택하고, 그중에서도 어떤 내용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어떤 내용은 우의적으로 해석하며, 그래서 결국 결연한 민족주의자면서 동시에 계급적 문제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불온분자로 예수를 재탄생시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한국의 교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고 쳤을 때, 과연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불온한 예수'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김규항의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48쪽) 김규항이 제시한 예수가 얼마나 '불온'한지도 결국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될 것이다. 과연 주류교회는 이 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까지는 (훌륭한 판매량과 달리)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혼자만 불온하면 무슨 재민겨...


참고문헌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10점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돋을새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 10점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돋을새김


예수 : 가스펠 - 10점
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엮음, 김율희 옮김/프레시안북

2009-07-06

'20대 개새끼론'에 한 마디 덧붙임

판] 20대,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에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였던 시절의 일이다. ‘한국논단’의 이도형 발행인은 김 전 대통령에게 ‘당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납득시켜 봐라. 내가 납득하면 온 대한민국이 다 납득한다’고 말했다. 대단히 고약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주장을 입증할 책임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해야 할 책임이 이도형에게 있다면, ‘20대는 멍청하다’는 명제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아마도 김용민 교수에게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그는 충남대학교 신문에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면서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 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5월30일 서울광장이 무기력하게 ‘털렸다’는 사실을 통탄하며 “2009년에도 선발됐고, 재학 중이고, 취업 될 때까지 졸업하려고 버티는 선배까지 합치면 학생들이 제법 있을 텐데, 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20대는 촛불시위의 현장에 없다’는 것을 김용민 교수 본인이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6월 10일에도 서울광장은 ‘털렸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이 밤샘 시위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서울광장에서 6·10 추모 행사를 하게 되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권해효씨가 사회를 보면서 “저 솔직히 여러분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라고 할 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극도의 착잡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실은 반갑고 좋았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 11시가 갓 넘었을 무렵 갑자기 밀어닥친 전경들 때문에 대열이 깨지고 우왕좌왕하고, 그 와중에 나는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렸는데, 그것도 한 달쯤 지나고 보니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뭐,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울광장이 또 ‘털릴’ 때, 20대가 그 현장에서 보이지도 않았다는 그런 식의 말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까지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한예종 사태,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거리에 섰다. 아무래도 실기를 이론과 함께 배워서 그런 것 같다. 깃발과 피켓 및 유인물 등의 디자인과 품질이 기존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Art is our Power’, 예술은 우리의 힘. 그 학생들은 20대가 아닌가?

20대의 목소리와 활동은 촛불시위 현장 밖에서도 발견된다. 두 달쯤 전부터 서강대학교에는 쇼핑몰에서 쓰는 카트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축 건물에 홈플러스가 입점하는 문제를 놓고 학생회와 재단의 입장이 대립한 가운데, 전체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등장한 이색 홍보 수단이었다. 반대 서명을 받는 학생들은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마치 영수증처럼 생긴 전단을 나눠주며 즐겁고 발랄하게 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20대가 아닌가?

‘한국논단’의 이도형에게는 김대중이 빨갱이로만 보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굳건하게 다져놓지 못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한 패배감이 밀려올 때, 그것을 20대라는 희생양을 붙잡고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20대는 당연히 바보 멍청이 천치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 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일부 똑똑한 애들도 있겠지.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도 안 보인다니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현장’에 오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성실하게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셈 치다니. 내 또래, 나 자신의 단점으로부터 눈을 돌릴 생각은 없지만, 그런 식의 비판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선배님’들 덕분에 황폐해진 정신을 달래기 위해 종종 가네코 미스즈의 시집을 펼친다. 나는 특히 ‘별과 민들레’라는 시를 좋아한다. 후반부만 인용해보자. “지느라 시든 민들레는/ 기왓장 틈에서 말이 없어도,/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강한 저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 거예요.”

<노정태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경향신문, 2009년 7월 6일.

떡밥도 복수처럼 식었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 이기 때문은 아니다. 현재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쳐온 것은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대충 만들어놓기만 하고 사후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20대를 탓하고 87년 헌법을 탓하고 하는 식의 '남탓'으로 점철된 수사가 횡횡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큰 경향성이라고 보이며, 어찌 되었건 옳지 않다.

내가 만나본 바, 또 나 스스로 느끼는 바에 따르면, 지금의 20대는 민주화가 이미 실현된 대한민국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386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과 그 속에서의 삶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다. 가령 서울시청 구 청사를 때려부순다거나, 청계천 양쪽의 낡은 상가가 허물어진다거나 하는 일들에 대해, 예전에 386이라고 불렸던 현재의 4~50대는 그리 큰 정서적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세상은 언제라도 허물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가건물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만나본 몇몇의) 20대들에게는 1950-70년대 사이의 것들이 '낡아빠진 것들'이 아니라 '빈티지'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미 산업화가 완성된 세상에서 태어난 세대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얼마나 빈약한 문화적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어학연수, 해외여행 등을 통해 특히) 각별하게 느끼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앞선 세대들의 눈에는 왜 이 젊은이들이 세상을 통째로 뒤집어엎자고 날뛰지 않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서적인 차원만을 언급해보자. 지금의 20대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대한민국은 무슨 컴퓨터 하드 포멧하듯이 밀어버릴 수 있는 그런 알량한 가건물이 아니다. 초라하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태어났고 이 문화 속에서 자랐다는 말이다.

386세대, 혹은 자신이 386세대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이 당선된 것도 20대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이명박을 당선시킨 것은 서울을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로 도배해서 집값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부응한 4~50대 남성들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대한민국',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그들 말이다. 그들이 20대를 실패작으로 여기는 것, 그래서 ('이끼'의 대사처럼) '시마이 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렇게 볼 때, 구역질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9-06-10

‘개혁’과 ‘진보’에게

[판]‘개혁’과 ‘진보’에게 부탁드린다

어느 쪽으로 머리를 두고도 숨을 쉴 수가 없다. 온 대기 중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그리고 중간 반환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2009년, 턱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서울시 용산구에서 장사를 하던 세입자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의 목숨이 화마에 휩싸였다. 건당 수임료 30원을 올려달라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대한통운 사측은 철저히 무시했다. 해고를 통지하는 똑같은 문자 메시지 78통이 전송되었을 때, 휴대폰에서는 서로 다른 통곡처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 도착 알람이 울려퍼졌을 것이다. 박종태씨의 생명이 스러졌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노무현 정권 5년을 지나면서, 이른바 ‘개혁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깊어만 갔다. 개혁은 진보를 일컬어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라고 칭했다. 진보는 개혁을 두고 그런 식이면 영원히 보수 정치의 맥락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고 다그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빛바랜 개혁에 실망하고 진보로 발길을 돌렸지만, 진보진영에서는 그들을 온전히 품어낼 수 없었다.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가 행정부의 수반일 때 해악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반감뿐이었으리라.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이미 부관참시가 벌어지고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언론이 ‘서거’가 아닌 ‘자살’로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일 00시 현재, 한나라당 홈페이지 게시물에는 한 가족이 웃고 있는 해맑은 화면을 배경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덕수궁 앞에서 시민들이 차린 분향소는 경찰에 의해 수 차례 철거·압수되고 말았다. 마치 용산에서도 그러했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듯이, 화물연대 박종태 지부장의 자살 또한 사회적 타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경찰은, 용산 참사 철거민들의 사체를 유족의 동의도 없이 부검하고, 분향소를 엎으며 영정을 짓밟은 바로 그 경찰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능멸하는 현 정부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야만의 왕국,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삶과 동등하게 존엄하다. 그래야만 한다. 그 지엄한 균형이 허물어질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고 김선일씨 사건 이후로 노무현 정부를 버렸다. 나는 진실로, ‘사람 하나 죽으면 파병 안 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인간의 삶이, 생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평등하게 존중받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개혁’과 ‘진보’ 모두에 너무도 가혹하다. 우리에게는 심지어 애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단 말인가?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만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가? 시위로 변질될까 우려되는 추모 행사는 아예 하지도 말아야 한단 말인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언어폭력에 시달린다. 외람된 말이지만 ‘개혁’과 ‘진보’ 모두에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 모든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애도할 수는 없을까. 브레히트의 시구를 보자. “아 우리는/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후손들에게’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그런 세상을 맞거든/관용하는 마음으로/우리를 생각해 다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6월 8일 경향신문 칼럼입니다. 원래 5월 25일에에 실렸어야 했는데 워낙 기사가 넘쳐서 아예 두 주 뒤로 밀려났네요. 그때 발표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뭐 별 수 없죠.

시청 앞 광장에서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