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30

간단한 설문 조사

"구경꾼의 구성"에서 몇 분의 방문자들이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리플을 달고 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적극적 참여자인 A와, '민주 시민'으로서 경찰의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많은 C가 주를 이루는 구경꾼 집단은, '오지라퍼'인 B보다 훨씬 철거민 문제에 적극적이며 또한 피해자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해보자. 메모장같은 간단한 프로그램을 띄우거나, 메모를 할 수 있는 종이를 준비하면 좋다. 어제 그린 표를 다시 인용한다.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이 표를 1분간 잘 살펴본 후, 자신이 어느 사분면에 속하는지 적어두자. 나 같은 경우, 말하는 건 C에 가깝지만 실상은 A에 속한다. 철거민들이 받았던 보상금이 턱없이 부족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물론 난 이 블로그에서 그것을 '입증'할 생각도 없고, '반증'하겠다는 사람에게 대응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아래 계좌 번호를 그 메모장에 적는다.

농협 067-02-302163 예금주 이종회

용산 철거민 문제 대책위원회의 후원계좌 주소가 바로 이거다. 다 적었으면, 이 계좌에 후원금을 입금한다. 적어도 1만원은 되어야 하겠다. 대개의 경우 결혼식이나 장례식의 축의금/부의금처럼, 3만원에서 5만원 정도가 적정선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입금을 해보자.

그리고 자신이 입금한 시간을 (액수는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굳이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까 그 메모장에 적는다. 그러면 이런 정보가 나올 것이다.

이름 | 구경꾼 유형 | 후원금 입금 일시

가령 나 같은 경우, 이름은 노정태고, 구경꾼 유형은 A이며, 후원금은 2009년 1월 28일에 입금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후원금을 이미 입금하였거나 앞으로 그럴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A나 C에 속할 것이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는 철거민들이 받는 보상금이 너무 적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을 후원한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내 가설에 대해 살아있는 반례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금을 보낼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사분면 B에 속하는 구경꾼보다는 C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주네 마네 하는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언술을 보며 나는 정말 화가 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연대이지, 값싼 동정과 적선이 아니다.


* 이미 입금하신 분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입금하신 분들, 모두 리플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구경꾼의 구성

"구경꾼의 역할"(sonnet)에 트랙백


sonnet 님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세웠던 전략을 '구경꾼 끼워들이기'라는 큰 틀에서 설명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모든 갈등의 결과는 이에 관여하는 구경꾼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위 두 가지 명제는 모두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강한 경쟁자는 자신이 상대방을 구경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할 수 있다"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은 매우 타당하다. 용산 철거민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농성전을 시작한 것은 '구경꾼'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반면 경찰은 구경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새벽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해산 작전에 돌입했다.

이 지점까지는 sonnet님의 분석에 나 또한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sonnet님은 "사적인 갈등에서 경쟁자들 간 힘의 관계는 언제나 불평등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가장 강력한 특수이익은 사적인 해결을 원한다" 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상금의 액수와 보상 방식 등은, 개발 조합과 세입자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어야 할 사항"이라는 내 주장을 검토한다.

내가 말한 대로 보상금 문제를 당사자간의 문제로 취급한다면, '용산구청의 수수방관'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며, 구경꾼을 더 확보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했던 철거민들의 전략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문단을 길게 인용해보자.

이 문제가 개발조합과 세입자들의 사적 협상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용산구청에 저런 강력한 비난과 책임을 묻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대로 구청이 세입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적 협상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 사실 사적 협상에서 한 쪽의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쪽만 잘 정의된 재산권을 갖고 있는데, 양 쪽의 협상력이 대등하다면 그게 신기한 일이 아닐까?


여기서 sonnet님은 두 가지 요소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구경꾼'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용산 철거민의 보상금 문제 중 실질적인 부분, 즉 권리금과 기타등등 금전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용산구청 또는 전철연처럼 협상 당사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실제 협상 과정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법정 객석에 앉아있는 방청객과도 같고, 후자는 원고나 피고의 옆에 앉아있는 변호사와 마찬가지이다. 내 글 "당신들의 인민재판" 의 취지는 '거기, 방청석 좀 조용히 합시다'였지, '변호사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가 아닌 것이다. 가령 "철거 문제 자체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나, "정작 문제가 터지고 나면 이런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신문 몇 줄 찾아 읽은 고시생들이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인민재판을 주도하기에 바쁜 듯하다"는 비아냥을 통해 의도한 바도 그런 것이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팩트'를 운운하는 인민재판을 멈추어라'는 주장은, '용산구청은 세입자들의 편에서 개입했어야 한다'는 주장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는 구경꾼들의 입장과 관련된 정치적 발화인 반면, 다른 하나는 공권력의 작동에 대한 시민적 발화에 더욱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지점에서 이상적인 '구경꾼 만들기'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샤츠슈나이더의 말처럼,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가장 이상적인 구경꾼을 구성할 수 있을까?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위 표를 통해 1월 20일 화재 발생 이후 이 사건의 구경꾼들을 분류해보도록 하자. 경찰의 공권력 남용, 또는 공공의 선, 넓게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 표현 등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가로축에 놓는다. 철거민들이 받은 보상액의 크기, 전철연의 폭력성, 용산구청 공무원들의 짜증 등에 대한 관심 여부를 세로축에 놓는다. 이 경우 우리는 2*2짜리 표를 하나 얻을 수 있다.

두 가지 사항에 모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A에 해당한다. 우리는 그들을 '적극 참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열성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한편 경찰이 컨테이너로 망루를 흔들어서 불이 났건 말건,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3000만원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권리금이란 무엇인가?' '적절한 보상 액수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등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B에 속한다. 나는 그들을 편의상 '오지라퍼'라고 부르겠다.

반면 철거 대상 지역의 세입자들이 받았어야 할 보상금의 액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고, 경찰이 사람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좌파'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능하다. 철거 문제는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며, 이명박 정부만 사람 잡은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 말이다. 그 모든 의미를 종합하여, C에 속하는 사람들을 '민주 시민'이라고 해보자.

마지막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에 용산역 부근 지나갈 때 차가 막혀서 짜증이 났을 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D라고 하고, 그냥 '방관자'라고 이름을 붙여 놓는다.

이 경우 조선일보를 포함하여 '팩트'를 유포하는 신문들이 구성하고자 하는 구경꾼은 B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신문들은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론되지 않거나, 거론되더라도 철거민의 보상금이 애초부터 넉넉했는데 더 달라고 지랄하다가 죽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sonnet 님의 표현대로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구경꾼의 수를 그냥 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구경꾼인 B를 형성하는데 주력할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당신들이 '팩트'에 집착하는 것은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다,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주목하라'는 주장은,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A에 속하는 구경꾼과 B에 속하는 구경꾼 사이에서 벌어지던 논쟁, 이른바 '진실 게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구경꾼에 속하지 않고 있었던 이들을 추가적으로 C로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내 포스트가 올라온 후, 기존에는 다소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던 블로거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들이 C의 구경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의 축이 계속 A-B에 머물러 있다면,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 B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꾸 다른 '팩트'를 들이대며 '진실 게임'을 하자고 나서기 때문이다.

'전철연, 과연 6000만원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따위 질문이 날아오면 '6, 70먹은 노인들이 골프공 좀 던진다고 그렇게 나와야 하냐?'라는 대답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아마 B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철연이 투석전 훈련도 시켰다'느니 운운할테고, 논쟁은 바로 이 수준에서 벌어진다. 이건 참 피곤한 일이다.

sonnet님이 인용하는 맥락을 보면, 샤츠슈나이더는 '구경꾼이 더 많이 참여할수록 사회적 약자의 협상력 강화에는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비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A-B의 갈등 구조, 즉 '진실 게임'은 본질상 쉽사리 식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B에 속하는 구경꾼들은 잠깐 머릿수를 불려주는 것 같지만 금방 분위기를 깨뜨리고 판을 망가뜨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식의 '사회적 관심'이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린 사례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반면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하고 C에 새로운 구경꾼을 집어넣는다면, A-C에서 갈등의 축이 형성될 수 있다. A에 속하는 이들은 C에 속하는 '민주 시민'들을 바라보며, '너희들은 이명박을 까기 위해 철거민 문제에 관심있는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반면 C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 싫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라고 말하다가, '민노당 진보신당 이래서 안 돼, 쯧쯧'하고 혀를 찰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없이 접해온 '진짜 진보', 또는 '개혁세력'에 대한 논쟁의 틀과 일치한다.

재미삼아 우리는 C-D의 갈등축, 그리고 B-D의 갈등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C에 속하는 '민주 시민'은 D에 속하는 '방관자'에게 '그러니까 다음번 선거는 잘 하자, 그런데 당신은 XXX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운을 띄울 것이다. 노골적으로 한 후보만 지지하면 너무 속이 뻔히 보이니까 '꼭 투표하자 씨발' 이러면서 문장을 마무리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B-D의 갈등축은, 과연 그게 생기긴 할지 잘 모르겠다. D에 속하는 사람이 B를 보고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돈이나 벌어'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미 용산 철거민 문제가 사회화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볼 때, A-B의 갈등 구조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해산하고, 대신 A-C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철거 피해자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A나 C에 속하는 사람들이 '철거민 편'에 속할 가능성은, B나 D에 속하는 사람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게다가 공권력과 공공성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내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점에서, 이후 구경꾼을 더 끌어들이는데에도 훨씬 유리하다.

내가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그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층위를 구성한다. A-C의 갈등 라인으로 구경꾼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후자의 가능성을 모든 이에게 개방함으로써 한층 폭넓은 구경꾼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길게 표를 그리면서 설명하였지만, 이것은 간단하게 보자면 한없이 간단한 문제이다. 철거 문제에 대한 '본질적 해결'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단 이 사건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라면, 경찰의 폭력에 분노하고 용산구청의 '생떼거리' 간판에 치를 떠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더 확고한 구경꾼으로 붙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B에 속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과연 손실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 갈등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구경꾼을 끌어들이거나 배제하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방향으로 논점을 정리하는 것을 "갈등을 사회화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던 세입자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닌 것 같다. 시위 참가자들이 구속, 연행되는 지금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더 많은 보상금의 확보'에 머물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한 구경꾼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더욱 사회화해야 하고, 또 그 갈등의 축은 공권력의 집행을 중심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

2009-01-29

어떤 일

25일 밤부터 가을이가 화장실에 너무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26일, 27일 이틀동안 엄청난 양의 모래를 방바닥에 흩뿌리며, 5분에 한 번 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찔끔 소변을 보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혹시나 싶어서 수요일 오전에 병원에 데려갔다. 역시나 방광에 결석이 생겨 있었다.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팔 수 있는 사료를 먹이고 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없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개에 비해 현격하게 좁기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낑낑거리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만 하기 일쑤다. 가을이도 그랬다. 방광이 쓰라렸을 텐데, 칭얼거리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

병원에 갔다 오고 나니 사태가 호전되고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어제 아침에 비해 훨씬 화장실에 덜 들락거렸고, 편안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행이다.

2009-01-23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경향신문, 2009년 1월 22일)


1월 20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인해 용산구 철거민 여섯 명이 사망했다. 이런 세상이다. 20대가 '왜' 보수화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참사를 겪고 난 다음에도,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현판을 떼지 않고 있다.[1] 돈 없으면 구청에서 민원을 해도 '생떼거리' 취급을 당하고,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한겨울에 철거당하고 빈 건물로 내몰린 다음 목숨을 잃게 된다. 순우리말 '생떼거리'의 어감이 이토록 징그러울 수가 없다.

20대 문제에 대해 올바른 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고쳐 물어야 한다.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고 있는가? 지금의 20대는 투쟁의 주역에서 '투정'의 주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용한 것이 바로 현 정부의 대선 캠프였다. 부산 사는 청년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영민씨. 그는 이명박 후보 지지 연설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잃었고,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반찬을 파는 것으로 가정의 생계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며 울먹였다.[2]

이명박 후보에 대한 이영민씨의 지지 연설은, 청년 실업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포괄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는 "어서 정권이 바뀌어서, 누가 어머니께 '당신 아들 어디 다니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3]는 소망을 피력했다.

대기업 또는 공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지 않는 한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컨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소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반면 '삼성전자'나 '조선일보'에 다닌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당하고 말고는 개인의 태도 문제겠지만, 사회적인 대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연봉으로 환산해보면 1125만원이 나온다. 종업원 300인 미만의 536개 중소기업에 들어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초봉 평균은 1977만원이지만, 500대 기업에 들어갈 경우 평균 연봉은 3102만원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1125만원으로 시작하지만 소득 격차는 연차가 쌓일수록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주상복합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기 싫어서 '생떼거리'를 부리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의 차이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사람을 뽑는 방식이다. 공직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역사는 고려 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왕조 600년을 거쳐 일제시대를 통해 현대 한국에까지 고스란히 승계되고 있다. 사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중소기업에서 유능한 경력사원을 선발하는 것보다는,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뽑는 것을 선호한다. 이 시험들의 공통점은 응시자의 이력서를 꼼꼼하게 본다는 것과, 최후의 관문인 면접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20대는 바로 그 면접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사법시험의 경우 올해는 10명, 작년에는 11명이 심층 면접에서 떨어졌다.[5]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경찰 기록이 남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불이익이 돌아올 테니까. 대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하고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재벌 그룹들은 나름의 인성 평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질문 앞에서, 젊은이는 소신대로 답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회사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통박'을 굴려야만 한다.[6]

20대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지 않다. 20대는 비굴해지고 있다. 한 손에는 월급 통장을, 한 손에는 물대포와 곤봉을 들고, 우리 사회는 20대를 '꺼삐딴 리'로 만들어가고 있다.





1. 안수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민원인은 생떼쟁이?." 한겨레21, November 28, 2008.
2. 3. 변진경. "'청년 백수' MB맨 어디서 뭐하나 ." 시사IN, January 12, 2009.
4. "대졸자 초임 양극화 심화…대기업이 중소기업 1.5배 |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5115453§ion=02.
5. 서동욱. "사법시험 3차 심층면접, 10명 탈락." 머니투데이, November 25, 2008.
6. 송형석. "[취업! 길은 있다] 인성·적성검사‥회사와 궁합맞는 인재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한국경제, September 16, 2008.

2009-01-20

서울 속 팔레스타인


1월 20일 새벽, 용산 현장 (서울=연합뉴스)


이스라엘은 탱크와 헬리콥터와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발사하는 로켓을 단순한 '폭력'으로 치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경찰은 방패와 물대포와 최루탄과 몽둥이를 가지고 있으며, 최후의 경우 총을 쏠 수도 있다. 경찰은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는 집단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듯이, 경찰도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가 없다.

화염병을 썼으니까 죽어도 싸다는 사람들, 정말 역겹다. 이스라엘 쪽으로 로켓을 쏘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어도 좋다는 말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습격은 미국의 정권 교체와 맞물려 책임 추궁이 늦어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경찰청장 교체기에 벌어진 이 사건의 책임 추궁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폭력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이 현존하는 폭력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의 비폭력에 반대한다.

2009-01-18

소액금융,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든 이유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에 트랙백

그라민 은행의 성공 사례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국내에서도 소액금융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 각각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소액대출은 그 성질상 신용대출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신체포기각서라도 받지 않는 한) 채무액에 상당하는 담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대출로 향할 수밖에 없는데, 그라민 은행이 취한 것 같은 구조는 현재 한국 및 기존 개발국가에서 성립하기 어렵다.

그라민 은행의 신용대출 방식은, 굳이 말하자면 '오가작통법'에 의거하고 있다. 다섯 명의 대출자가 서로 연대보증을 서주는 방식이다. sonnet님이 요약한 내용에 따르면,

그라민은행은 기본적으로 대출 희망자가 나타나면 다섯 명의 대출희망자를 모아 그룹을 조직할 것을 요구한다. 일단 그룹이 결성되면 이들에게 그라민 은행과 그들이 받는 대출에 대해 교육시킨다. 그리고 그룹원 다섯 명을 개별적으로 면접하고 구두 시험을 통해 이들이 내용을 숙지했는지를 평가하여 합격했을 경우에만 대출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은행 측은 개개인의 가난 극복과 자립에 대한 의지를 면밀히 관찰한다. 대출 과정 또한 독특하다. 그라민 은행은 일단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어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6주 동안 원리금 상환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되면 마지막 두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 그룹 멤버 전원에 대해 대출이 중단된다.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a quarantine station, 2009년 1월 18일)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그룹은 십중팔구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척이거나, 두 집합의 교집합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혈족의 유대감, 지역 공동체 거주민들끼리의 유대감이 모두 사라져버린 현대 한국에서 위와 같은 구조는 성립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친척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까운 거리에 살거나 하지 않는다. '친척에게 연대보증 서주었다가 쫄딱 망하는' 괴담이 횡횡하고 있는 사회가 현대 한국 사회인 것도 사실이다. 친척이란 한 해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만나는 사람들이지, 경제적인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가 아니다.

덧붙여 한국의 산업 구조가 이미 고도화되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유누스가 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가 지금 내 손에 없어서 정확한 인용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책에 등장하는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한 마리의 암소를 사서 잘 기르거나, 몇 마리의 암탉을 사서 알을 뽑아내거나, 또띠아 포장마차를 열어서 장사를 하는 등, 소농을 포함한 소액 사업들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이미 발전한 산업사회의 경우, 그런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굳이 친척들의 도움과 감시를 필요로 할만한 일이 아니다. 가령 붕어빵틀을 빌리는 것. 수십만원이면 가능하고 그것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인보증을 요하지 않는 신용대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미 '마이크로 크레딧'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해서 그 돈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사업의 수익성은 날로 약화되고 있다. 그것은 자본 투입으로부터 회수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동네 구멍가게라도 하나 차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은 소액금융에서 염두에 두는 그런 작은 빚의 범주를 넘어선다. 사업을 할만한 돈을 빌리는 것은 이미 소액금융의 범주를 넘어서는 액수에 해당한다.

최근 시작된 '인터넷 대안금융'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것은 확실해진다. 이 기사("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금융'이 떴다", 한겨레)에서 인용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소액금융은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외면하는 이들에게 급한 돈을 빌려주는 ‘현대판 품앗이’"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 인용된 사례는 이런 것이다. 오빠의 수술비를 대야 하는데,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있어서 사채를 빌렸다. 그 사람이 사채빚을 갚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신이 올린 사연을 보고 평가할 다수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린다.
김씨는 이런 사연과 함께 가계 수입·지출 내역, 자신이 부담할 이자율과 몇 달에 나누어 갚을 것인지를 올렸다.

글을 본 회원들은 김씨가 돈을 제대로 갚을지를 두고 사이버 투표를 벌이고, 게시판을 통해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회원 38명이 2만~4만원씩 모아 100만원을 빌려줬다. 이 사이트에선 한 사람이 보통 100만~200만원을 빌리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30~50명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나 의지가 의심돼 대출자들을 못 모으면 빌릴 수 없다. 김씨가 다달이 내는 원리금은 사이트를 통해 대출자들에게 분배된다.
"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대출’ 떴다",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된 것 같은 사례에서, 대출자가 그 돈을 갚을 수 있을만한 여력이 있는 경우, 혹은 고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라민 은행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사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금융은 '급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의 첫 단계를 시작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한국에서 방글라데시와 같은 그런 소액금융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국 뿐 아니라 여타 산업적으로 이미 발전한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친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한 소액금융인데, 그것 또한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성공적인 소액금융의 구조는,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009-01-16

누가 타인의 비극을 평가하는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간인 피해와 그 참상에 대해서는, 이 한 장의 그래프면 충분할 것 같다.


출처: “Is Israel guilty of war crimes in Gaza?: But is it a crime?,” The Economist, January 2009, http://www.economist.com/world/mideast-africa/displaystory.cfm?story_id=12957301&fsrc=rss.

UN 학교에 민간인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몰랐을 리가 없고, 또 그곳을 '실수로' 공격했을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 이스라엘을 ICC로 끌고갈 수도 없고 설령 기소한다 해도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정말이지, 끔찍한 범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가 과연 그렇게까지 엄청난 비극인가?'라는 식의 비아냥 내지는 회의주의가 없잖아 있는 듯하다. 나는 그런 시각에 절대 찬성할 수 없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과, 그들이 국가 건설 이전에 당했던 비극을 폄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가령 허지웅님의 이 의견을 살펴보자.

또 2차 세계대전 이야기다. 또 유태인 학살 이야기다. 또 유태인을 지켜낸 영웅 이야기다. 어휴 지겨워. 유태인 학살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기억되어야만 할 기록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세계사의 그 숱하게 많은 학살을 다 외면하고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은 볼수록 지루하고 의도가 짜증스럽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분쟁, 그리고 미국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다.
"디파이언스, 살아남는다는 사실의 숭고함", ozzyz review, 2009년 1월 16일.


'중요한 사건', '기억되어야만 할 일' 정도의 수식어를 붙여줬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설하고자 했던 시온주의자들은, 본디 800만명 정도의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최대치로 추산해볼 때) 600만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일은 예상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생긴 나라가 아니라, '홀로코스트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나라인 것이다(참고: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Foreign Policy》, 2008년 5/6월호). 유태인 자본이 영화계에 손을 뻗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지겹게 홀로코스트니 유태인이니 나치의 잔혹함이니 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설명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비극을 논함에 있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인간적인 품위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이라는 표현의 이면에 담긴 정서를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너만 슬퍼? 세상에 당한 사람이 너만 있는 줄 알아?'라고 핏대를 세우는 그런 광경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해자 정서'라는 것이 있고, 한국인들의 징그러운 질투심은 그 피해자 정서에마저도 적용된다. 나도 피해자인데, 나도 당했는데, 누가 나보다 더 큰 소리로 '힘들다, 괴롭다, 당했다'라고 토로하는 광경을 보면 곱게 넘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너만 괴로운 거 아니야. 유난 떨지 마.'

홀로코스트를 보며 미국 이주민들의 인디언 학살이라거나, 한국전쟁 당시에 자행된 양민 학살, 또는 그 외 세계사의 숱한 학살 사례들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불편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으로 인류사에 만연한 학살을 보며 괴로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즐겨 보는 헐리우드 영화에, 유태인'만' 피해자인양 묘사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고 있을 따름인 것 같다. 게다가 그 유태인들이 세운 인공국가 이스라엘은 세계 최고의 학살 주범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은 좌파적, 진보적, 도덕적이며 심지어 쿨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을 비판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평가'하려고 들고, 다른 비극과의 경중을 논하려 드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벌어진 학살들은 각각의 이유와 전개와 논리와 수수께끼를 포함하고 있다. 일부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에 대해 지대하다 해서, 하나의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저평가당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인 관심과 학문적, 또는 예술적인 관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가자 지구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 사망자 수의 그래프를 인용했다. 나는 현대 국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희생자 정서'를 드러내며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다른 것에 비해 과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둥, 유태인이라서 그렇게 관심받는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이스라엘의 만행을 비판하고 싶거든, 스스로 먼저 인간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 가해자로 돌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서 또한 결국은 '피해자 정서'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 이유는,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범죄 단체를 소탕하다가 민간인의 피해가 생기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했지만, 하필이면 자신들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게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논리를 구사한다.

유태인이라서 홀로코스트가 더 주목받는다는 논리나, 유태인이라서 가자 지구 폭격이 더 비난받는다는 논리나, 둘 다 인종주의이면서 동시에 발화 주체 각각의 피해자 정서를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인들은 (사실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상의 학살을 빌미로 유태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저울질한다. 한편 유태인들은 (다소 극화되어 있는) 유태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토대로,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가자 지구의 비극을 가볍게 넘기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누가 감히 타인의 비극을 그런 식으로 저울질한단 말인가?

2009-01-15

하이데거, 스티븐 킹, 앙드레 고르

스티븐 킹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실은 등장한다고들 하는), 외딴 길에서 어두운 밤 자동차가 고장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는 그 순간 문명으로부터 고립되면서, '초자연'의 힘 앞에 노출된다. 그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죽을 만큼의 공포를 느끼면서 죽거나 그냥 죽거나 죽도록 고생하고 간신히 살아나거나 하게 된다.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는 '내가 타고 있는 한 대의 차'가 멈추면서 공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든 차'가 멈췄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수리하고 타이어를 갈아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오가며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동차는 '도구' 중 하나다. 우리가 이동을 위해 사용하는 운송 수단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즉 우리는 자동차를 이동"하기 위해" 도구로 이용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둘러봄'이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도구를, 곤충학자가 나비를 관찰하듯 '바라보지' 않는다. 도구 그 자체, 그리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우리의 생활환경을 '둘러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리 손안에 들어와 있는 도구, 그 존재를 의심해본 적도 없는 도구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화기는 발명되어 있었고, 자동차도 발명되어 있었다. 그것이 전파된 시점은 각기 다르겠지만, 아무튼 '신기한' 물건은 아니다. 자동차튼 타고 다니는 도구, 전화기는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도구, 기타등등.

문제는 그 도구가 사용 불가능해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가령 망치를 들었는데 못이 없는 경우, 우리는 비로소 손 안에 들어있는 망치의 존재를 살펴보게 된다. 망치는 '있다', 하지만 못은 '없다'. "이러한 사용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눈에 띄게 된다."(106쪽) 자동차를 뽑긴 했는데 같이 타고 다니면서 으스댈 여자친구가 없다고 해보자. 자동차라는 도구는 아주 눈에 잘 띄게 된다.

그렇다면 도구가 고장나서 원래의 사용관계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 때, 비로소 '망치로 못을 박아야 했던 집', 즉 세계를 인식한다.

하 나의 도구가 사용 불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하기 위한'이 '그것을 위한'을 가리키는 그 구성적 지시가 방해를 받고 있음이 놓여 있다. 그런데 지시의 방해 속에서--어디에 사용할 수 없음에서--지시가 명백해진다. . . . 지시가 그때마다의 '그것을 위한'을 가리킴을 일깨워주는 이러한 둘러봄과 더불어 이 '그것을 위한' 자체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작업연관이, 전체 "작업장"이, 그것도 그 안에서 배려함이 언제나 이미 체류하고 있는 그곳으로서 시야에 들어온다. 도구연관이 그전에 한번도 보아진 적 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둘러봄에서 항시 애초부터 이미 보아진 전체로서 빛나게 된다. 이러한 전체와 더불어 세계가 자신을 알려온다.(108-109쪽)


자동차에 대한 애초의 논의로 돌아와보자. 자동차가 고장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막대한 산업의 복합체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의 3장에서 인용해보자.

자동차의 역설은 이렇다. 겉보기에 자동차는 그 주인에게 무한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자동차 덕분에 차 주인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으로, 기차와 같거나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자율성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의존이 도사리고 있다. 말이나 수레나 자전거를 탄 사람과 달리 자동차를 탄 사람은 에너지 공급을 위해, 그리고 조금만 파손이 되어도 수리를 위해 카뷰레터(기화기), 윤활장치, 조명, 표준 부속품의 교환, 이런 분야들의 전문가와 상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옛날 주인들과는 달리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제3자만이 공급할 수 있는 수많은 유료 서비스와 산업제품들을 소비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차 주인의 자율성은 실상 이렇게 근본적인 의존을 내포하는 것이다.
80쪽,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


말이 죽거나 자전거 바퀴가 완전히 휘어버리면 마찬가지 아니냐, 이런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기서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자전거나 동물과 달리 자동차는 그 뒤에 엄청난 양의 '산업'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가 고장나버리면, 자연 혹은 초자연속에 버려진 스티븐 킹의 주인공은 불현듯 '인간 문명' 자체를 실감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진, 동시에 스스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법칙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의 시작이다.

문제는 그러한 공포가, 앞서 말한 것처럼,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데 있다.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미리 대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우리는 사라져버린 '운송 수단'으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 환경' 자체의 존재를 뼈저리게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급작스레 '삶'이 파괴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이데거의 전체적인 철학적 구도 안에서 '환경 보호'는 아예 성립할 수도 없다. 앞 포스트를 쓰다가 앙드레 고르의 자동차에 대한 논의를 인용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이데거의 도구성 논의가 떠올라서 짤막하게 남겨 보았다. 이것은 거친 스케치에 가까운 논의이므로, 혹시라도 '하이데거가 환경운동 했다'는 말로 이해하시진 마시길.


존재와 시간 - 10점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까치글방

추운 겨울,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1. 흔히들 '환경'에 대한 논의라고 한다면, 당장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 혹은 정치 경제적으로 어설픈 지식 하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환경'문제의 범주를 조금 더 넓혀서,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와 그 대체 에너지에 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면(그러면 이미 환경에만 국한될 것은 아니겠지만), 대단히 실감나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파이프라인이 막혀서 나무를 떼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의 사진 중 하나를 골라봤다. 크로아티아, 2009년 1월 중순. 이미지 소유권은 Getty에 있고, 원본 주소는 여기.

그 래서 예상 외로 중국은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수단 같은 나라의 민주주의를 다 망가뜨려가며 석유를 독점 수입하고자 하는 것과 별개로, 에너지 문제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주도적으로 펼치는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다.


2.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를 다 읽었다. 좋은 책이다. 특히 3장, 「자동차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착착 와닿는다. 마르크시즘 이론에 대해 논하는 2장은 별로 재미가 없는데, 이건 내가 그런 '이론'적 토론에 큰 흥미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3장은 정말 최고다.

자동차의 역설은 이렇다. 겉보기에 자동차는 그 주인에게 무한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자동차 덕분에 차 주인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으로, 기차와 같거나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자율성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의존이 도사리고 있다. 말이나 수레나 자전거를 탄 사람과 달리 자동차를 탄 사람은 에너지 공급을 위해, 그리고 조금만 파손이 되어도 수리를 위해 카뷰레터(기화기), 윤활장치, 조명, 표준 부속품의 교환, 이런 분야들의 전문가와 상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옛날 주인들과는 달리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제3자만이 공급할 수 있는 수많은 유료 서비스와 산업제품들을 소비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차 주인의 자율성은 실상 이렇게 근본적인 의존을 내포하는 것이다. (80쪽)

문명 속에서가 아니라, 문명의 요소가 '없음'을 실감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그 '산업문명'의 본질이 떠오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아무튼 이 책은 3장만으로도 구입할만한 가치가 있다.


3. 생태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 둔감하고, 특히 실물경제에 어둡다는 식의 비판이 있어 왔다. 나는 생태주의자를 자처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을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 생태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드레 고르는, 오랜 세월 다양한 매체의 국제면과 경제면을 담당해온 전문 저널리스트로, 대단히 명민한 현실 인식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는 2005년에 세계가 부동산 거품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거품이 다른 거품으로 채워지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올 것임을 예상했다.

로버트 브레너의 「새로운 붐인가, 새로운 거품인가」에서 인용된 로베르트 쿠르츠의 말이다. 쿠르츠는 자본주의의 변모와 자본주의의 현재 위기에 대한 최고의 비판이론가로서, 최근 저서 『세계자본』의 상당부분을 금융거품이 자본주의 존속을 위해 담당하고 있는 역할에 바치고 있다. 금융거품은 금융자산을 부풀려 형성된다. 쿠르츠의 표현을 따르자면, 금융거품은 "신기한 화폐제조기"이다. 새로운, 보다 커다란 거품이 형성되지 않는 한, 거품은 가라앉으면서 종국에는 연쇄파산을 불러오고야 만다. 이리하여 주식시장의 거품을 인터넷 거품이 이어갔다. 인터넷 거품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역사상 최대의 거품"인 부동산 거품이 이어가고 있다. 3년 동안, 이러한 거품으로 부동산 주가는 20조에서 60조 달러가 상승했다. 그 누구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거품이 클수록, 거품이 가라앉을 경우 발생할 금융시스템과 화폐시스템의 붕괴가 더욱 무시무시해질 것이다. 각주 43. 157-158쪽.

이 내용은 에콜로지카 5장에 수록되어 있다. 2007년 아내와 함께 자살한 그가, 살아서 오늘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반드시 환경 문제나 생태주의가 아니어도,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다면 『에콜로지카』를 권하고 싶다.


에콜로지카 Ecologica - 10점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생각의나무

2009-01-11

어떤 마감 하나

대학원 수업 기말 레포트를 6시 30분쯤 다 써서 보냈다. 1월 10일 마감이었는데 11일 새벽에 완성을 했다. 나는 갑자기 조금 센티멘탈한 기분이 들어서, 연애시대 OST중 '보내지 못한 마음'을 찾아서 듣고, 너저분하게 필기된 노란 종이들을 정리한 다음, 바닥에 누워있는 가을이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지금도 가을이는 칸트의 철학적 신학 강의를 베고 누워 있다. 나도 이제 자야지.

2009-01-09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비교 및 평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에 대해 말이 많지만, '팩트'를 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나 또한 그런 자료를 직접 접해보지는 못했는데, 마침 다음과 같은 요청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런 답변이 달렸다.



덕분에 나도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접속해 보았다. 통신비밀보호법과 관련하여 네 가지 개정안이 눈에 띄는데, 그 각각의 내용을 짚어보고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일단 문제가 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작년 10월 30일 이한성의원등 12인에 의해 제안된 통신비밀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의안번호는 1801650이며, 클릭해보면 누구나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포스트에는 PDF 파일을 첨부하도록 한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한성의원등 12인 발의, 2008년 10월 30일)1801650.pdf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15조 2항이다. 일단 현재의 법안을 살펴보자.

제15조의2(전기통신사업자의 협조의무) ①전기통신사업자는 검사·사법경찰관 또는 정보수사기관의 장이 이 법에 따라 집행하는 통신제한조치 및 통신사실 확인자료제공의 요청에 협조하여야 한다.

②제1항의 규정에 따라 통신제한조치의 집행을 위하여 전기통신사업자가 협조할 사항, 통신사실확인자료의 보관기간 그 밖에 전기통신사업자의 협조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개정안은 이렇게 생겼다.

제 15조의2(전기통신사업자등의 협조의무) ①전기통신사업자등은 ---------------------------------------------------------------------------------------------------------.

② 전화서비스를 제공하는 전기통신사업자,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기통신사업자는 이 법에 따른 검사·사법경찰관 또는 정보수사기관의 장의 통신제한조치 집행에 필요한 장비·시설·기술 및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


말하자면 KTF와 SKT에 통진제한조치 집행에 필요한 장비 시설 기술 기능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법에서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도청장치를 모두의 귀에 꽂아놔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필요에 의해 수사기관이 개입하여 그것을 설치하기 전에, 이미 개별 사업자가 그런 장비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법으로 정하겠다는 것인데, 이건 뭐...

이한성 의원등이 제안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과는 달리, 박영선의원등 7인이 제안한 개정안은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제안일자는 11월 11일이며, 제안번호는 1801881이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박영선의원 등 7인 발의, 2008년 11월 11일)1801881.pdf

박영선의원의 개정 제안은, 전기통신 내용의 압수, 수색, 검증이 형사소송법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는 그러한 법적 보호조치 없이 우리의 통신 내역이 수사기관에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第3條(通信 및 對話秘密의 보호) ① ~ ③ (현행과 같음)
④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의 내용을 지득·채록하기 위한 압수·수색·검증은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한다.

제 9조의3(압수·수색·검증의 집행에 관한 통지) ① 검사는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하여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경우 그 사건에 관하여 공소를 제기하거나 공소의 제기 또는 입건을 하지 아니하는 처분(기소중지결정을 제외한다)을 한 때에는 그 처분을 한 날부터 30일 이내에 그 대상이 된 전기통신의 송신자 및 수신자에게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사실을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② 사법경찰관은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하여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경우 그 사건에 관하여 검사로부터 공소를 제기하거나 제기하지 아니하는 처분의 통보를 받거나 내사사건에 관하여 입건하지 아니하는 처분을 한 때에는 그 날부터 30일 이내에 그 대상이 된 전기통신의 송신자 및 수신자에게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사실을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이한성의원의 개정안에 반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영선의원의 개정안의 취지에 호응하고 그것에 힘을 실어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최문순의원 등이 제안한 세 번째 개정안의 내용은, 말하자면 어떤 수사기관이 우리의 ID 정보 등을 열람했을 때 그 사실이 우리에게 1달 내에 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그에 대한 규정은 현재 전기통신사업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통신비밀보호법으로 옮겨 법적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는 취지가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작년 마지막날 발의된 박민식의원 외 11인의 통신비밀보호법 일부개정안은, 불법감청설비탐지업의 등록 취소에 대한 규정 사항을 대통령령이 아닌 법률에 규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적용 대상이 넓은 법 개정안은 아니다.

이 비교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인 것 같다. 첫째, 언론에서 문제로 삼는 법 개정안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국회 의안정보시스템(http://likms.assembly.go.kr/bill/jsp/main.jsp)에 접속하면 된다. 둘째, 현재 상정된 네 개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중 크게 문제가 될만한 것은 첫 번째 것이고, 거기에는 통신사업자가 통신제한조치 집행에 필요한 장비를 선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셋째,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작은 법 개정안들이 국회 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특히 세 번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민주당의 '중립적'인, '중도적'인 태도를 대단히 경멸한다. 하지만 그들 또한 유의미한 원내 입법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번 경우에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통신비밀보호법이 개정되는 것을 막으면서, 수사기관이 통신사업자에게서 얻은 정보를 사용할 때 형사소송법의 제약을 받도록 법조문으로 못박아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박영선의원과 그 외 7인을 지지한다.

Think Again: 미네르바 현상

'미네르바'로 추정되는 네티즌이 1월 8일 긴급체포되었다. 그의 정체를 놓고 대한민국 1% 상류층, 은퇴한 50대 증권사 애널리스트, 심지어는 'C급 경제학자' 우석훈까지 거론되었지만, 검찰은 그가 갓 서른살이 되었으며 직업을 가지지 못한 청년이라고 발표했다. 그를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 스승'이라고 추켜세우던 경제학 교수가 있는가 하면, 자신은 진작부터 미네르바의 빈약한 지식을 간파했다고 우쭐거리는 네티즌도 있다. '다중지성'의 부작용을 중화시킬 수 있는 지성계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미네르바의 발생과 긴급체포에서 공안정국의 기운을 감지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저지하는 것이다.



* 미네르바의 체포는 불법이다

아니다. 적어도 '허위사실유포'에 대해서만큼은 합법적이다.
미네르바는 자신이 정부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알고 있다고 적시했고, 그것을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올려 놓았다. 허위 내용을 인터넷에 유포한 혐의로 긴급체포했다는 김수남 서울중앙지검 3차장의 말을 통해 유추해볼 때, 검찰은 형법 제314조(업무방해)의 2를 적용하여 그를 기소할 예정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조문에 따르면 "[컴퓨터등] 정보처리장치에 허위의 정보 또는 부정한 명령을 입력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정보처리에 장애를 발생하게 하여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자도 제1항의 형[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과 같다"고 규정되어 있다.

미 네르바가 12월 29일에 게시판에 올린 "(정부가) 주요 7대 금융 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게 오늘 오후 2시30분 이후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라는 취지의 글은, 안타깝게도 위 법에서 규정한 '허위의 정보를 입력'하는 요건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긴급체포는 지나치다는 평가와는 별개로, 그가 명백히 범법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추가: 검찰은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을 적용하여 미네르바를 기소했다하 겠다고 발표했다. 그 법에 따르면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公然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업무방해를 적용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틀렸다. 하지만 전기통신기본법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이후의 논지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지적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 미네르바가 허위사실유포죄라면 이명박도 체포해야 한다.

불가능하다. 이명박은 희망사항을 말했을 뿐이다.
미네르바를 체포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던 검찰이 그를 잡아넣지 못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경제에 대한 예측이나 희망사항의 표현 등은 허위사실유포죄에서 말하는 '사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미네르바는 경제를 예측했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요 금융 기관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라는 허위사실을 유포했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다.

'주가 3000 간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은 허위사실유포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식이었다면 '주가가 반의 반토막 난다'고 말한 그 순간 미네르바를 체포했어야 한다. 실제로 그의 신병을 파악하고 체포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허위사실을 유포하지 않았다면 검찰은 미네르바를 체포할 수도 없었다.

국가의 경제 정책에 관한 한, 이명박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가가 3000 간다고 했다가 못 갔다고 해서 그것을 '허위사실'의 유포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는 허황된 욕심을 국민들에게 불어넣기 위해 되는대로 숫자를 불렀을 뿐이다. 예측이나 정책 목표 설정 등은 그 죄의 구성요건에 포함되지 않는다.



* 미네르바의 체포는 형평성에 위배된다.

맞다. 하지만 '공평한 긴급체포'는 더 나쁘다.
미네르바의 체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긴급체포'라는 점에 있다. 12월 29일에서 1월 8일까지 고작 열흘이 흘렀다. 그의 신병을 확보하고 수사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체포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포함된 수사권의 남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형법 제314조의 2는 컴퓨터 해킹을 통한 전산망 침공 등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조문이다. 만약 미네르바가 해킹을 통해 국가의 기반 시설을 망가뜨리고 있었다면 긴급체포는 합당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고작 다음 아고라에 글을 써서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일단 용의자를 잡아넣은 다음 수사하면서 여죄를 밝히는 수사 관행이 이 지점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체포가 불법은 아니지만, '긴급체포'를 통해 사회적 이슈를 들쑤시고 밤샘수사를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 검찰이 이 긴급체포를 통해 노리는 효과도 바로 그것이다. 네티즌들은 자신 또한 불현듯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체포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사실 그정도 허위사실유포를 놓고 긴급체포에 강제수사를 하는 것은 과도한 수사이며, 다른 허위사실유포자들과 비교해볼 때에도 형평성에 어긋날 소지가 크다. 하지만 노동부는 '정규직 해고를 쉽게 해서 비정규직과의 격차를 줄이겠다'고 방침을 세운 상태다. 미네르바에 대한 긴급체포에서 '형평성'을 요구하면, 검찰은 그 형평성을 위해 다른 네티즌들도 줄줄이 긴급체포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미 네르바가 체포된 이유인 '허위사실유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미네르바와 같이 온갖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았던 인터넷 논객들, 가령 SDE 같은 사람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체포되지 않을 것이다. 있지도 않은 공문을 꾸며낼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네티즌들도 마찬가지다. 공공연히 드러날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긴급체포될 일도 없다.



* 미네르바를 위해 촛불이 타오를 것이다.

어쩌면. 하지만 그리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12월 31일 종각 시위에 나가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한겨울의 시위는 매우 춥고 힘들다. 촛불을 들고 서 있어도 얼어붙은 손가락이 저려오는 추위를 이겨내고, 시민들이 미네르바를 위해 나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애초 에 미네르바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를 고려해보면 이 비관적인 예측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네티즌들은 미네르바가 주가와 환율을 예측했기 때문에 추앙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의 예측은 '돈'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 예언을 믿었더라면 지금처럼 큰 손해를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그 경제적 이기심이 네티즌들의 숭배 뒤에 숨겨진 원동력이었다.

미네르바가 '대한민국 1%'가 아닌 '30대 무직'이라고 선언되어버린 지금, 그 네티즌들이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말보다 미네르바의 예측을 믿어야 할 이유 또한 사라져버렸다. 현재 인터넷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미네르바와 미네르바 현상의 의의를 폄하하고 새삼스레 침을 뱉는 모습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패배자'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열한 모습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시민사회가 미네르바를 위해 싸우기 위한, 제대로 된 명분을 찾아내는 일 또한 쉽지만은 않다. 미네르바의 긴급체포가 과도한 수사권의 남용이라는 것 말고는 논점이 없기 때문이다. 미네르바가 '반 이명박'의 아이콘이긴 하다. 그러나 검찰은 충분한 언론 플레이를 펼치고 있고, 그것은 '무직'이라는 두 글자와 함께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다.

12월 31일의 시위에도 사람들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이 겨울에 '30대 무직 남성'을 위해 촛불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천여 명 정도가 모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했던 것처럼 '미네르바를 체포하면 민란이 발생하는' 일 따위를 기대할 수는 없다.

특히 '그래서 어떤 주식을 사야 할지' 궁금해서 미네르바의 글을 읽고 그를 숭배하던 네티즌들 중 상당수는 이미 미네르바를 버렸거나 버리고 있다. 그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미네르바를 위해 싸워줄 사람들은, '형사소송법 개정'이나 '수사관행 개선' 같은 인기 없는 주제를 붙들고 묵묵히 늘어졌던 시민단체와 '운동권', 혹은 골수 촛불시민들 뿐이다.



* 미네르바는 이명박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명박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명박 정부가 미네르바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인 사례들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공식선상에서 일개 네티즌의 이름을 거론했고, 그가 부정적이며 부정확한 예언을 내뱉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미네르바를 여러 네티즌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미네르바는 이명박 정부의 과민반응에 의해 이명박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미네르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내용들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고 엄청나지도 않았다. 몇 개의 패가 잘 맞아들어갔고, 그 앞에는 강만수 경제팀의 실책이 언제나 놓여 있었기 때문에 후광효과가 두드러져 보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미네르바에게 쏟아진 찬사들은 대체로 이명박에 대한, 혹은 제도권 경제학과 애널리스트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성균관대 김태동 교수가 미네르바를 자신이 "아는 한 가장 뛰어난 국민의 경제스승"이라고 칭송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으로 재직하던 4년 동안, 뛰어난 엘리트들도 경제 지표를 예측하지 못하는 현상을 목격해왔고, 미네르바의 예측력에 감탄했다.

다음 아고라의 네티즌들이 미네르바를 찬양하게 된 맥락도 마찬가지다. 가령 미래에셋의 박현주 사장이 턱없이 낙관적인 경제 전망만을 내놓고 있을 때, 그는 정 반대방향의 예측을 내놓았고 적중시켰다. 지금도 네티즌들 중 미네르바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과 비교한다.

하지만 미네르바가 상징하고 있던 '반 주류 경제학', '반 애널리스트', '반 이명박'은 하나의 구심점을 형성하기 어려운 주제들이었다. 그러한 정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폭발력을 갖기 어려웠다. 미네르바에게 강의석같은 이슈메이커 자질이 있었더라면 그가 반 이명박의 상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 미네르바의 예언은 소 뒷걸음으로 쥐 잡기에 불과하다.

그럴지도. 하지만 댁보단 낫다.
현재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박 모씨가 진짜 미네르바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미네르바의 예언은 '30대 무직 남성'이 독학으로 배운 경제학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미네르바의 일부 예측들의 정확도를 폄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예측의 목표는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김태동 교수의 발언이 말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다가올 경제 위기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능력만으로는 이론적인 경제학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폴 크루그먼이 현재의 경제학을 빅토리아 시대의 의학과 비교했던 것처럼, 경제학은 대단히 실용적인 학문이기도 하다. 그가 적중시킨 몇몇 예측의 가치는 그리 쉽사리 폄하될 수 없다.

미네르바같은 아마추어 경제학도가 아니라, 누리엘 루비니같은 경제학자가 국내 경기에 대한 예측을 내놓고 그것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장이 필요했다(내가 알기로 국내 언론 중 누리엘 루비니의 예언을 10월 이전에 진지하게 다룬 매체는 《Foreign Policy》 한국어판 뿐이다). 그것을 지성계라고 칭한다면, 국내의 지성계는 실종된 상황이다.

국내 에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자유롭게 교환하고 서로 비판하는 지성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 현황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연구 또한 대단히 미비한 수준이었다. 미네르바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경제학의, 저널리즘의, 학계 전체의 빈곤을 깨달아야 한다. 뒷걸음질로 여러 마리의 쥐를 잡은 미네르바라는 소는, 그런 의미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하나의 증상이다.

이른바 '집단지성'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이번에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인터넷이 옳으냐 애널리스트가 옳으냐 하는 이분법적 논쟁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국내의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 자체가 드물었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들의 연구 성과를 대중적 여론으로 이끌어내어줄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단지성'의 과도한 열정과 어리석음을 식혀줄 '지성계'가 탄생하지 않는 한, 미네르바 현상은 다른 형태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다.



* 미네르바의 체포는 네티즌 공안정국의 시작이다.

뒷감당이 더 중요하다.
미네르바의 체포가 아니라, 현재 한나라당이 추진하고 있는 법 개정이 더 중요한 문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행법상에서는 미네르바처럼 명백히 드러나버릴 거짓말을 하거나, 특정 연예인에 대한 악플을 주구장창 달아서 고소를 당하지 않는 한, 인터넷에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긴급체포되거나 할 일은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추진하는 미디어법 개정안 중 '사이버모독죄'가 신설되고 친고죄 조항이 빠진다거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모든 휴대전화 통화 내역과 통화자 위치정보등이 1년 이상 보존되며, 통신사업자들은 감청장비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고, 인터넷 이용자들의 접속 기록도 보관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수사를 위한 법이다.

미네르바의 체포를 통해 정부와 한나라당은 위 두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논점이 되어야 한다. '제2의 미네르바'를 막기 위해 사이버모욕죄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드높일 그들에게 맞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미네르바의 체포가 아니라 그 뒤에 불어닥칠 후폭풍에 대비해야 한다.



- 이 글은 《Foreign Policy》의 코너 "Think Again"의 포멧을 빌어 작성되었습니다.

2009-01-08

아마추어 법이론가

누가 어디서 어떤 사이비(似而非) 합의를 보았건 간에 결단코 침해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기본적 인권이며 사적 소유권이다. 이것에 대한 침해는 어떤 합의든 원천무효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법치주의의 접점이 있는 것이다.
정규재, "법은 사회적 합의라는 오해" (한국경제, 2008년 12월 29일)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에 따르면,
제119조

1.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2.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경제에 대한 규제와 조정"에는 당연히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제한이 들어간다.


또는, 토지수용법 제1조를 보자.
제1조 목적
이 법은 공익사업에 필요한 토지의 수용과 사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공공복리의 증진과 사유재산권과의 조절을 도모함으로써 국토의 합리적인 이용, 개발과 산업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 71·1·19]


법에 대한 사이비(似而非) 논의들이 참 많다.

2009-01-04

번역 한 권, 저술 두 권, 그리고 석사논문

작년부터 큼지막한 일거리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총 네 개. 그 중 하나는 이미 거의 다 끝냈고, 세 개가 남았다. 번역할 책이 한 권, 써야할 책이 두 권 있다.

처음 번역한 책은 《아웃라이어》인데, 곧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말 잘 썼다. 저자가 워낙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터라, 여러 가지 일과 겹쳐서 진행하는 가운데 힘들긴 했어도 지루하거나 고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두 번째 번역은 훨씬 어려운 책이다. 내용 파악이 힘든 것은 아니지만, 복문이 많고 어려운 단어가 줄곧 사용되고 있다. 제목을 공개하기엔 다소 이르다.

번역을 하고 있다 보면 자기 책을 쓰고 싶어진다. 번역자는 한국어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기왕 책임을 질 거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의 정확성이나 매끄러움이 아니라 내용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20대와 문화에 대한 책 한 권이 계약되어 있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단행본 작업을 논의중이다. 전자의 경우 가제까지 붙여놓은 상태지만, 역시 공개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철 들면서부터 나는 산문가, 영어로 말하자면 에세이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은 내 성향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단정지어버린 다음이었다. 몇 편의 시를 써 보았지만, 다들 좋다는 기형도를 읽으며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로부터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지금도 종종 해방 이후의 시들을 읽곤 한다. 이 평가의 정확한 의미를 나도 설명해줄 수 없지만, 십중팔구 한국어로 쓰여진 시들은 '너무 작다'.

글을 읽고 쓰는 것과 관련하여 올해 해야 할 일은 크게 네 가지 정도이다. 한 권의 번역과 두 권의 저술, 그리고 석사논문. 그리고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내년 1학기와 2학기에도 휴학 없이 대학원 수업을 들어야 함은 물론이다. 짧은 분량의 원고 청탁이 정기적으로 있고, 비정기적으로도 들어온다. 오늘도 주말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있다.

일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최선을 다하되 무리하지 말자, 8할만 하자'는 생활 신조로 살아왔고, 그래서 시험 전날에도 밤을 새는 일 따위 전혀 없었지만, 올해는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달아올랐을 때 두들겨서 꼴을 잡아놓아야 한다. 책꽂이에는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가고 있지만, '아무 일 없이 그저 책을 읽는 행복'은 불완전한 이상에 불과하다. 그렇게 살고 있을 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써먹을 수 없는 지식을 잔뜩 축적해나가는 것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아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파악해내기 위해서는 구성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매주 쓰는 칼럼은 폴 크루그먼의 정신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몇 편 쓰지도 않고 바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너무 많지만, 그것은 그들이 팔을 휘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를 건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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