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30

구경꾼의 구성

"구경꾼의 역할"(sonnet)에 트랙백


sonnet 님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세웠던 전략을 '구경꾼 끼워들이기'라는 큰 틀에서 설명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모든 갈등의 결과는 이에 관여하는 구경꾼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위 두 가지 명제는 모두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강한 경쟁자는 자신이 상대방을 구경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할 수 있다"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은 매우 타당하다. 용산 철거민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농성전을 시작한 것은 '구경꾼'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반면 경찰은 구경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새벽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해산 작전에 돌입했다.

이 지점까지는 sonnet님의 분석에 나 또한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sonnet님은 "사적인 갈등에서 경쟁자들 간 힘의 관계는 언제나 불평등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가장 강력한 특수이익은 사적인 해결을 원한다" 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상금의 액수와 보상 방식 등은, 개발 조합과 세입자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어야 할 사항"이라는 내 주장을 검토한다.

내가 말한 대로 보상금 문제를 당사자간의 문제로 취급한다면, '용산구청의 수수방관'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며, 구경꾼을 더 확보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했던 철거민들의 전략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문단을 길게 인용해보자.

이 문제가 개발조합과 세입자들의 사적 협상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용산구청에 저런 강력한 비난과 책임을 묻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대로 구청이 세입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적 협상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 사실 사적 협상에서 한 쪽의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쪽만 잘 정의된 재산권을 갖고 있는데, 양 쪽의 협상력이 대등하다면 그게 신기한 일이 아닐까?


여기서 sonnet님은 두 가지 요소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구경꾼'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용산 철거민의 보상금 문제 중 실질적인 부분, 즉 권리금과 기타등등 금전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용산구청 또는 전철연처럼 협상 당사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실제 협상 과정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법정 객석에 앉아있는 방청객과도 같고, 후자는 원고나 피고의 옆에 앉아있는 변호사와 마찬가지이다. 내 글 "당신들의 인민재판" 의 취지는 '거기, 방청석 좀 조용히 합시다'였지, '변호사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가 아닌 것이다. 가령 "철거 문제 자체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나, "정작 문제가 터지고 나면 이런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신문 몇 줄 찾아 읽은 고시생들이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인민재판을 주도하기에 바쁜 듯하다"는 비아냥을 통해 의도한 바도 그런 것이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팩트'를 운운하는 인민재판을 멈추어라'는 주장은, '용산구청은 세입자들의 편에서 개입했어야 한다'는 주장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는 구경꾼들의 입장과 관련된 정치적 발화인 반면, 다른 하나는 공권력의 작동에 대한 시민적 발화에 더욱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지점에서 이상적인 '구경꾼 만들기'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샤츠슈나이더의 말처럼,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가장 이상적인 구경꾼을 구성할 수 있을까?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위 표를 통해 1월 20일 화재 발생 이후 이 사건의 구경꾼들을 분류해보도록 하자. 경찰의 공권력 남용, 또는 공공의 선, 넓게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 표현 등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가로축에 놓는다. 철거민들이 받은 보상액의 크기, 전철연의 폭력성, 용산구청 공무원들의 짜증 등에 대한 관심 여부를 세로축에 놓는다. 이 경우 우리는 2*2짜리 표를 하나 얻을 수 있다.

두 가지 사항에 모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A에 해당한다. 우리는 그들을 '적극 참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열성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한편 경찰이 컨테이너로 망루를 흔들어서 불이 났건 말건,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3000만원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권리금이란 무엇인가?' '적절한 보상 액수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등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B에 속한다. 나는 그들을 편의상 '오지라퍼'라고 부르겠다.

반면 철거 대상 지역의 세입자들이 받았어야 할 보상금의 액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고, 경찰이 사람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좌파'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능하다. 철거 문제는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며, 이명박 정부만 사람 잡은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 말이다. 그 모든 의미를 종합하여, C에 속하는 사람들을 '민주 시민'이라고 해보자.

마지막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에 용산역 부근 지나갈 때 차가 막혀서 짜증이 났을 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D라고 하고, 그냥 '방관자'라고 이름을 붙여 놓는다.

이 경우 조선일보를 포함하여 '팩트'를 유포하는 신문들이 구성하고자 하는 구경꾼은 B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신문들은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론되지 않거나, 거론되더라도 철거민의 보상금이 애초부터 넉넉했는데 더 달라고 지랄하다가 죽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sonnet 님의 표현대로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구경꾼의 수를 그냥 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구경꾼인 B를 형성하는데 주력할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당신들이 '팩트'에 집착하는 것은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다,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주목하라'는 주장은,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A에 속하는 구경꾼과 B에 속하는 구경꾼 사이에서 벌어지던 논쟁, 이른바 '진실 게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구경꾼에 속하지 않고 있었던 이들을 추가적으로 C로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내 포스트가 올라온 후, 기존에는 다소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던 블로거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들이 C의 구경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의 축이 계속 A-B에 머물러 있다면,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 B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꾸 다른 '팩트'를 들이대며 '진실 게임'을 하자고 나서기 때문이다.

'전철연, 과연 6000만원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따위 질문이 날아오면 '6, 70먹은 노인들이 골프공 좀 던진다고 그렇게 나와야 하냐?'라는 대답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아마 B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철연이 투석전 훈련도 시켰다'느니 운운할테고, 논쟁은 바로 이 수준에서 벌어진다. 이건 참 피곤한 일이다.

sonnet님이 인용하는 맥락을 보면, 샤츠슈나이더는 '구경꾼이 더 많이 참여할수록 사회적 약자의 협상력 강화에는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비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A-B의 갈등 구조, 즉 '진실 게임'은 본질상 쉽사리 식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B에 속하는 구경꾼들은 잠깐 머릿수를 불려주는 것 같지만 금방 분위기를 깨뜨리고 판을 망가뜨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식의 '사회적 관심'이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린 사례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반면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하고 C에 새로운 구경꾼을 집어넣는다면, A-C에서 갈등의 축이 형성될 수 있다. A에 속하는 이들은 C에 속하는 '민주 시민'들을 바라보며, '너희들은 이명박을 까기 위해 철거민 문제에 관심있는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반면 C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 싫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라고 말하다가, '민노당 진보신당 이래서 안 돼, 쯧쯧'하고 혀를 찰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없이 접해온 '진짜 진보', 또는 '개혁세력'에 대한 논쟁의 틀과 일치한다.

재미삼아 우리는 C-D의 갈등축, 그리고 B-D의 갈등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C에 속하는 '민주 시민'은 D에 속하는 '방관자'에게 '그러니까 다음번 선거는 잘 하자, 그런데 당신은 XXX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운을 띄울 것이다. 노골적으로 한 후보만 지지하면 너무 속이 뻔히 보이니까 '꼭 투표하자 씨발' 이러면서 문장을 마무리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B-D의 갈등축은, 과연 그게 생기긴 할지 잘 모르겠다. D에 속하는 사람이 B를 보고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돈이나 벌어'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미 용산 철거민 문제가 사회화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볼 때, A-B의 갈등 구조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해산하고, 대신 A-C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철거 피해자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A나 C에 속하는 사람들이 '철거민 편'에 속할 가능성은, B나 D에 속하는 사람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게다가 공권력과 공공성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내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점에서, 이후 구경꾼을 더 끌어들이는데에도 훨씬 유리하다.

내가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그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층위를 구성한다. A-C의 갈등 라인으로 구경꾼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후자의 가능성을 모든 이에게 개방함으로써 한층 폭넓은 구경꾼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길게 표를 그리면서 설명하였지만, 이것은 간단하게 보자면 한없이 간단한 문제이다. 철거 문제에 대한 '본질적 해결'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단 이 사건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라면, 경찰의 폭력에 분노하고 용산구청의 '생떼거리' 간판에 치를 떠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더 확고한 구경꾼으로 붙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B에 속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과연 손실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 갈등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구경꾼을 끌어들이거나 배제하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방향으로 논점을 정리하는 것을 "갈등을 사회화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던 세입자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닌 것 같다. 시위 참가자들이 구속, 연행되는 지금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더 많은 보상금의 확보'에 머물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한 구경꾼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더욱 사회화해야 하고, 또 그 갈등의 축은 공권력의 집행을 중심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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