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10

‘개혁’과 ‘진보’에게

[판]‘개혁’과 ‘진보’에게 부탁드린다

어느 쪽으로 머리를 두고도 숨을 쉴 수가 없다. 온 대기 중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그리고 중간 반환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2009년, 턱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서울시 용산구에서 장사를 하던 세입자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의 목숨이 화마에 휩싸였다. 건당 수임료 30원을 올려달라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대한통운 사측은 철저히 무시했다. 해고를 통지하는 똑같은 문자 메시지 78통이 전송되었을 때, 휴대폰에서는 서로 다른 통곡처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 도착 알람이 울려퍼졌을 것이다. 박종태씨의 생명이 스러졌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노무현 정권 5년을 지나면서, 이른바 ‘개혁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깊어만 갔다. 개혁은 진보를 일컬어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라고 칭했다. 진보는 개혁을 두고 그런 식이면 영원히 보수 정치의 맥락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고 다그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빛바랜 개혁에 실망하고 진보로 발길을 돌렸지만, 진보진영에서는 그들을 온전히 품어낼 수 없었다.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가 행정부의 수반일 때 해악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반감뿐이었으리라.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이미 부관참시가 벌어지고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언론이 ‘서거’가 아닌 ‘자살’로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일 00시 현재, 한나라당 홈페이지 게시물에는 한 가족이 웃고 있는 해맑은 화면을 배경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덕수궁 앞에서 시민들이 차린 분향소는 경찰에 의해 수 차례 철거·압수되고 말았다. 마치 용산에서도 그러했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듯이, 화물연대 박종태 지부장의 자살 또한 사회적 타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경찰은, 용산 참사 철거민들의 사체를 유족의 동의도 없이 부검하고, 분향소를 엎으며 영정을 짓밟은 바로 그 경찰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능멸하는 현 정부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야만의 왕국,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삶과 동등하게 존엄하다. 그래야만 한다. 그 지엄한 균형이 허물어질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고 김선일씨 사건 이후로 노무현 정부를 버렸다. 나는 진실로, ‘사람 하나 죽으면 파병 안 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인간의 삶이, 생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평등하게 존중받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개혁’과 ‘진보’ 모두에 너무도 가혹하다. 우리에게는 심지어 애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단 말인가?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만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가? 시위로 변질될까 우려되는 추모 행사는 아예 하지도 말아야 한단 말인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언어폭력에 시달린다. 외람된 말이지만 ‘개혁’과 ‘진보’ 모두에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 모든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애도할 수는 없을까. 브레히트의 시구를 보자. “아 우리는/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후손들에게’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그런 세상을 맞거든/관용하는 마음으로/우리를 생각해 다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6월 8일 경향신문 칼럼입니다. 원래 5월 25일에에 실렸어야 했는데 워낙 기사가 넘쳐서 아예 두 주 뒤로 밀려났네요. 그때 발표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뭐 별 수 없죠.

시청 앞 광장에서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