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6

'20대 개새끼론'에 한 마디 덧붙임

판] 20대,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에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였던 시절의 일이다. ‘한국논단’의 이도형 발행인은 김 전 대통령에게 ‘당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납득시켜 봐라. 내가 납득하면 온 대한민국이 다 납득한다’고 말했다. 대단히 고약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주장을 입증할 책임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해야 할 책임이 이도형에게 있다면, ‘20대는 멍청하다’는 명제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아마도 김용민 교수에게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그는 충남대학교 신문에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면서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 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5월30일 서울광장이 무기력하게 ‘털렸다’는 사실을 통탄하며 “2009년에도 선발됐고, 재학 중이고, 취업 될 때까지 졸업하려고 버티는 선배까지 합치면 학생들이 제법 있을 텐데, 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20대는 촛불시위의 현장에 없다’는 것을 김용민 교수 본인이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6월 10일에도 서울광장은 ‘털렸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이 밤샘 시위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서울광장에서 6·10 추모 행사를 하게 되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권해효씨가 사회를 보면서 “저 솔직히 여러분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라고 할 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극도의 착잡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실은 반갑고 좋았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 11시가 갓 넘었을 무렵 갑자기 밀어닥친 전경들 때문에 대열이 깨지고 우왕좌왕하고, 그 와중에 나는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렸는데, 그것도 한 달쯤 지나고 보니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뭐,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울광장이 또 ‘털릴’ 때, 20대가 그 현장에서 보이지도 않았다는 그런 식의 말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까지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한예종 사태,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거리에 섰다. 아무래도 실기를 이론과 함께 배워서 그런 것 같다. 깃발과 피켓 및 유인물 등의 디자인과 품질이 기존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Art is our Power’, 예술은 우리의 힘. 그 학생들은 20대가 아닌가?

20대의 목소리와 활동은 촛불시위 현장 밖에서도 발견된다. 두 달쯤 전부터 서강대학교에는 쇼핑몰에서 쓰는 카트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축 건물에 홈플러스가 입점하는 문제를 놓고 학생회와 재단의 입장이 대립한 가운데, 전체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등장한 이색 홍보 수단이었다. 반대 서명을 받는 학생들은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마치 영수증처럼 생긴 전단을 나눠주며 즐겁고 발랄하게 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20대가 아닌가?

‘한국논단’의 이도형에게는 김대중이 빨갱이로만 보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굳건하게 다져놓지 못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한 패배감이 밀려올 때, 그것을 20대라는 희생양을 붙잡고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20대는 당연히 바보 멍청이 천치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 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일부 똑똑한 애들도 있겠지.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도 안 보인다니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현장’에 오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성실하게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셈 치다니. 내 또래, 나 자신의 단점으로부터 눈을 돌릴 생각은 없지만, 그런 식의 비판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선배님’들 덕분에 황폐해진 정신을 달래기 위해 종종 가네코 미스즈의 시집을 펼친다. 나는 특히 ‘별과 민들레’라는 시를 좋아한다. 후반부만 인용해보자. “지느라 시든 민들레는/ 기왓장 틈에서 말이 없어도,/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강한 저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 거예요.”

<노정태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경향신문, 2009년 7월 6일.

떡밥도 복수처럼 식었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 이기 때문은 아니다. 현재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쳐온 것은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대충 만들어놓기만 하고 사후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20대를 탓하고 87년 헌법을 탓하고 하는 식의 '남탓'으로 점철된 수사가 횡횡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큰 경향성이라고 보이며, 어찌 되었건 옳지 않다.

내가 만나본 바, 또 나 스스로 느끼는 바에 따르면, 지금의 20대는 민주화가 이미 실현된 대한민국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386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과 그 속에서의 삶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다. 가령 서울시청 구 청사를 때려부순다거나, 청계천 양쪽의 낡은 상가가 허물어진다거나 하는 일들에 대해, 예전에 386이라고 불렸던 현재의 4~50대는 그리 큰 정서적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세상은 언제라도 허물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가건물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만나본 몇몇의) 20대들에게는 1950-70년대 사이의 것들이 '낡아빠진 것들'이 아니라 '빈티지'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미 산업화가 완성된 세상에서 태어난 세대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얼마나 빈약한 문화적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어학연수, 해외여행 등을 통해 특히) 각별하게 느끼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앞선 세대들의 눈에는 왜 이 젊은이들이 세상을 통째로 뒤집어엎자고 날뛰지 않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서적인 차원만을 언급해보자. 지금의 20대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대한민국은 무슨 컴퓨터 하드 포멧하듯이 밀어버릴 수 있는 그런 알량한 가건물이 아니다. 초라하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태어났고 이 문화 속에서 자랐다는 말이다.

386세대, 혹은 자신이 386세대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이 당선된 것도 20대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이명박을 당선시킨 것은 서울을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로 도배해서 집값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부응한 4~50대 남성들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대한민국',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그들 말이다. 그들이 20대를 실패작으로 여기는 것, 그래서 ('이끼'의 대사처럼) '시마이 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렇게 볼 때, 구역질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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