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31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 2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미디어행동, 야당 등은 헌재 판결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곽상아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뜻’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대표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민주주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개별적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승인을 받은 헌법 기관이지만, 국회의원은 기껏해야 지역구 주민 수십만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이정희 의원보다 곱절로, 아니 따따블로 ‘대표성’을 지니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의 말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낼 것이며, 정당하다.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단일한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즉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분열성으로 인해, 한 사람이므로 단일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뜻’을 덜 반영하게 된다. ‘대표성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연히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모든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 그것이 나다’라는 식의 단순한 주장만을 반복하며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듯, 민주주의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통치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일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헌법의 수호자였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칭하곤 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지만, 판사는 임명되고 승진하는 별개의 직급 구조를 가진 집단이다. 반면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왔다. 헌법재판소가 의회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는 것은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법에 대해 절차는 위법하지만 무효로 선언할 수 없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고전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가 갓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을 지배했던 헌법관이었다. 당시에는 행정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왕이 뽑은 상원은 귀족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집단은 하원 뿐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해보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이상 헌법 이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부 내의 특별한 대행 기관인 하원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이제 정부 전반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지, 그 한 부분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조는 인용자. 189쪽, 『절반의 인민주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당할 때 ‘아,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가 권력자인 대통령을 끌어내었구나, 나의 일반 의지가 실현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내가 뽑은 대통령한테 네깐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는 분노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한 헌법적 인식이 타당하냐 그르냐를 떠나서, 국회나 대통령이 그들이 지닌 대표성만으로 모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헌재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대리투표를 했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며 입법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특히 대리투표의 경우,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명백한 대리투표 현장이 발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므로 그들이 만든 법은 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국회 격투기를 더 봐야만 하게 생겼다. 문을 뜯어 부수고 야당 의원들을 패대기치는 것도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니만큼,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무효화할 수 없는 입법 행위의 일부가 된다고 추인해버렸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어떤 헌법기관이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로 작동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도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헌법 수호 기관으로 활동해야 하며 그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나는 칼 슈미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의 헌재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온갖 논쟁을 보거나 참여해온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PC 통신 시절까지 합치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최근 『괴짜경제학』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과 뉴욕타임즈 출신의 저널리스트 스티븐 더브너(Stephan J. Dubner)의 신간 SuperFreakonomics가 출간되면서, 바야흐로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보다 큰 규모의 키보드 대전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정식화된 학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듯이, 몇몇의 블로거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공적이지 않은 경로를 이용해 서로 은근히 심기를 긁어가며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해볼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키보드 배틀’ 중 가히 최대 규모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무언가가 최근 한창 진행되었다. 무대는 미국. 참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학문적 업적과 수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과 정치적 입장을 자주 함께하는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J. Bradford DeLong), ClimateProges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환경학자 조셉 롬(Joseph J. Romm), 기후 변화에 대하여 온라인 대중들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 RealClimate 등이 한쪽에서 전선을 짜고 SuperFreakonomics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더브너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항변하였고, 스티븐 레빗 또한 (그의 동의 하에) 공개된 이메일을 통해 ‘오해’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노벨상 수상 확률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는 간략한 코멘트와 링크 게시를 통해 이 사건에 슬그머니 개입하려다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된 문서들의 대략이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으나(http://en.wikipedia.org/wiki/Superfreakonomics), 결코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마치 평범한 블로거들처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문제는 SuperFreakonomics의 5장에 등장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내용이, 적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부당할 정도로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그것을 사소한 오류처럼 만들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나 이단은 있는 법. 지구 온난화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저자들이 말할 때 이미 그 갈등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레빗과 데브너는 말한다.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난화 재앙을 믿는 것,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만으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이다.”

요컨대 온난화 회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레빗과 데브너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이 그러하였듯이, SuperFreakonomics도 ‘기존의 통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 대해 경제학적 시선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반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적어도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통념’이라는 것이 지구와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주제이며, 수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데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4도 상승하면 현재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멸종한다. 환경의 파괴, 종 다양성의 파괴는 많은 경우 해당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 온난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그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레빗과 더브너는 ‘지오 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평균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들은 환경학자 켄 칼데이라(Ken Caldeira)의 말을 인용하여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인용된 당사자 켄 칼데이라는, 환경 블로그 ClimateProgress의 운영자 조 롬과의 이메일 대화를 통해, SuperFreakonomics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인용했으며 자신의 학문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웃자고 그러는 건지, 10월 21일 현재 켄 칼데이라의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다.” 켄 칼데이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8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에 빠질 리가 없다. 레빗과 데브너는 경제학자 마틴 와이츠먼(Martin Weitzman)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논문의 논지와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SuperFreakonomics의 5장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크루그먼 본인이 해당 논문을 읽어봤을 뿐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와이츠먼과 함께 작업한 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 배틀’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참여자들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논쟁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할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고, 그만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신 이 논쟁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준다. 인터넷 문서의 기본 포멧인 HTML은 학문적 텍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하는 것은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바로 그 행동을 전자화한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생활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학문 연구의 도구였고 인터넷 또한 그러했다. 가장 난폭하고 거친 언어가 오가는 그곳은 사실 가장 정제된 지적 담론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또한 진중권의 표현대로 ‘문자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술문화가 인터넷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치 인터넷이 반지성주의의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기존의 출판 매체를 통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별도의 편집자가 없기 때문에 저자의 감정적 판단과 기준이 여지 없이 노출되며, 한 번 공개된 텍스트는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모든 곳에서 접속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의 담론이 오가느냐는 전적으로 이용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SuperFreakonomics를 둘러싼 이 논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레빗과 더브너의 인용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논외로 한다면, 이 논쟁은 ‘지오 엔지니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과연 비효율적인 행동인가, 그래서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하나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다. 데브너가 현재(10월 21일 오후 9시 50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올린 글에서 ‘나의 목표는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존중한다면, 그와 레빗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뢰가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한 지식인, 학계의 이름 높은 학자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를 알아보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홀대당하고 저평가당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그 공간을 지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당연하기만 하던 세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어 온라인 공간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고하고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요원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어지러운 관계망 속에 얽혀들어 있는 지식인들은 서로에 대해 공정한,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패거리 놀음에 열중한다. 현재 인터넷이 지적 담론의 토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인터넷 자체의 속성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폴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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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
벌써 5일 전에 올라간 기사이므로 전문을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그래도 가급적 위 링크를 찍어서 조회수를 높여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이 기사를 올리면서 몇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1. 이미 당연히 번역이 되어가고 있거나 원고는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어쨌건 한국어판이 나온다. 저자들이 수정판을 내지 않는 한 곧 나온다.

2. 한국어판이 나오면 이런 논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국내 일간지들은 서평란에서 온난화 회의주의 내지는 지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거나 슬쩍 다루거나 한다.

3. 대중들은 '와우, 정말?!' 이러면서 다 낚인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세요. 이미 SuperFreakonomics는 나노 단위가 되도록 까였답니다. 본문에 언급된 환경 블로거 조 롬이 오늘 또 하나 올렸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기상학자 Caldeira가 자기 입으로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생생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인터넷 칼럼을 통해 '이렇게 단순한 지오 엔지니어링이 대안인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언급할 지경입니다.

http://climateprogress.org/2009/10/26/caldeira-interview-superfreakonomics-geoengineering/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PrinterFriendly.cfm?story_id=14738383&fsrc=rss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이 논쟁이 궁금하신 분은 밑에서 두 번째 주소를 클릭해서 관련 링크를 훑어주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먼저 봐주세요.

2009-10-21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독일 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 불리어 왔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 『이성과 혁명』의 서론에서 서슴없이 단언한다. 선진국 프랑스의 발전된 정치경제적 상황을 동경하던 독일의 지식인들이 그 혁명을 정신 속에서 구현해낸 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은 칸트의 1784년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이미 하나의 싹으로 심어져 있다.

칸트는 자신과 독자들이 "계몽된 시대"(aufgeklärten Zeitalter)에 살고 있지 않지만,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 "일반적 계몽을, 다시 말해 마땅히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미성년에서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가 차츰 감소해가는 명백한 징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은 사실의 보고라기보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칸트가 "이 시대는 바로 계몽의 시대이며, 환언하면 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명확해진다.

이 짧은 텍스트 안에서 칸트는 끝없이 외줄타기를 벌인다. 그는 결코 프리드리히 왕, 계몽군주의 통치가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삭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고, 칸트 본인도 결국 그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는 프리드리히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당시의 낙관주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자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이룬다.

칸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왕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이며,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이다. 이러한 칭송은 두 세기 전의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찬사를 보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의 힘을 칭송한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나마 말해줄 것을 칸트가 희망한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른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부권적 명령을 전제로 해야 이해 가능하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왕이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무엇인가? 왕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왕은 검열하고, 삭제하고, 저자를 고문하고 심판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이 '허용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전적으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사람의 학자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아메리카의 용맹한 시민들보다 한참 소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반면 칸트는 어떠한 세금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학자로서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시민은 그에게 부과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성의 사적 사용의 제한]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기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설명일 뿐 적극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 시민적인 차원에서, 시민의 목소리로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칸트의 귓가에는 여전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복종하라!"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이라는 구분을, 어떤 적극적인 재해석을 가하지 않는 한, 사실상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을 비판할 자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아직 학자와 시민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헌법상의 권리들은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칸트처럼 비굴한 강화 협상을 계몽군주에게 제안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칸트는 그가 누리고 싶은 정치적 자유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는 표현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자유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계몽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계몽의 시대'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룬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칸트는 대중들이 계몽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계몽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절망은 20세기의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며, "이런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에 대한 자유를, 그 반쪽짜리 원웨이 티켓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자가 자유롭게 비판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칸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함성 앞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앞서 말했듯 매우 적극적이고 치열한 재해석을 가하여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 칸트적 의미에서 '학자'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자신의 책을 검열당하지 않고 써서 시장에 출판한 다음이라면, 대중들이 스스로의 이성을 감히 사용하여 자신을 계몽할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칸트에 대한 온갖 재해석이 담론계에 떠돌고 있지만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칸트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믿음은,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삶과 학문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내가 읽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극심한 정신적 굴곡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나누고 분석하는 그의 해박한 지성은, 권력 앞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주저하는 일개 대학 교수의 그것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는 『정신현상학』보다 앞서서 독일 지식인들의 내면을 그려내어 보여준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저작 중 드물게 '뜨거운' 글이다. 그 열기는 분출될 수 없는 억압된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시대부터 이미 독일 관념론의 그것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난삽하고 어지러운 문장을 읽다 지친 검열관의 시선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마지막 문단의 중간 부분부터 칸트의 어조는 급변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진행된다." ... "이러한 일의 진행 속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이하 진행되는 내용은, 앞서 말했듯 너무도 '뜨겁기' 때문에, 나의 요약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는 직접 길게 인용하여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적게 하는 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때 이런 딱딱한 껍질 밑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싹을, 곧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을 계발하게 되면, 이것은 점차 국민의 성격에 반작용하게 되고(이에 의해 국민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는 이 반작용이 통치의 원리에까지 미치게 되어 정부는 이제야 기계 이상인 인간을 그의 품위에 어울리게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민적 자유의 제약이 정신적 자유의 확장을 가져오고, 확장된 정신적 자유가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으로 이어지며, 결국 행동의 자유를 거쳐 통치의 원리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는 것, 그러한 강렬한 역사적 발전에의 소망이 조심스럽게 쇳물을 부어 거푸집에 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대미에 이르러 칸트의 이 텍스트는 한없이 '인간'의 텍스트에 가까워진다. 매우 용감하게, 과감하게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이미 헤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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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언급된 글 중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편역, 서광사)을 참조하였습니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의 다른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이 생각이 (혹시라도)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텍스트를 곡해하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확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2009-10-09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조두순, 장자연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 엄격한 잣대가 과연 평등했는가?

‘대체 왜 지금에서야 폴란스키를 체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피아노>, <차이나 타운>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13세 소녀에게 약물과 술을 먹인 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항문성교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77년의 일이다. 46일간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은 끝에 ‘사회에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고 잠시 가석방된 틈을 타, 그를 다시 구치소에 구금한 후 재판을 진행하려 했던 판사의 결정에 불복하고 미국에서 빠져나간 것은 1978년 2월 1일. 아직 미국으로 송환되지는 않았지만, 31년만에 미 사법 당국은 폴란스키를 다시 붙잡았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  
 
적지 않은 수의 헐리우드 영화 감독과 스타들, 프랑스 대통령 샤르코지와 대중적 철학 저술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구명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예술가, 철학자 등에게 관대한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도 그렇거니와, 싸움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언론의 경향성이 맞물려 폴란스키의 체포는 일종의 ‘문화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마저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국내의 언론 및 예술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무관심이 다행스러운 이유는 안그래도 ‘공인’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국내의 여론이, 폴란스키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예술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메다꽂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무관심은 불행한 일이다. 아동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논쟁의 씨앗을 머금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법 현실과 성범죄

연예인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마이스페이스, 기타 등등 사적인 공간을 뒤져 몇 장의 사진이나 ‘발언’을 얻어낸 후 ‘어떻게 공인으로서 이럴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인터넷의 여론과 달리, 한국의 사법 현실은 (폴란스키의 체포 및 압류를 끝까지 요구하는) 미국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에 더 가깝다. 몇몇 유명한 뺑소니 사건이나 도박 사건 등을 놓고 일반적인 경우와 형량을 비교해본다면 분명 그렇다. 그 대상이 연예인이 아닌 정치인, 혹은 기업가라면 솜방망이 처벌의 사례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쉽고, 통상적인 형량이 선고되거나 집행된 경우를 찾는 게 어려워질 지경이다.

반대로 인터넷의 열화와 같은 분노가 곧장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50대 남성이 안산에서 9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평생 회복될 수 없는 상해를 입힌 사건, 이른바 ‘조두순 사건’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 경애하는 지도자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천인공노할 사건에 크게 진노하시어 ‘그가 받은 형기를 모두 살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성범죄에 대한 공포에 떠는 민중들의 마음을 크게 헤아리신 것이다. 그 뜻을 이어받아 법무부와 정치권은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고 공소시효를 연장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법 시스템은 대중들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으면 즉각 반응하지만, ‘사회적 강자’를 향하고 있으면 귀를 막는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다섯 글자를 타자로 치는 것이 참으로 메스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변변한 소득도 직업도 없었고, 성범죄를 포함한 온갖 범죄를 저질러 전과 10범이 넘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사회 시스템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오직 ‘조두순’이라는 한 개인에게로, 혹은 언제 다가와서 내 아이에게 혹은 나에게 성폭행을 가할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만 향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지금 조두순을 동정하는 게 아니다. 조두순이 아닌 사람들,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성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을 따름이다.

과연 한국 사회가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를 요구할 수 있을만큼 성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지니고 있는가? ‘설령 상대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 ‘설령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가해자가 누가 되었건 성범죄만큼은 확실히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서울신문 10월5일자 1면  
 

‘성범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이런 논의를 할 때 가장 곤란한 것 중 하나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체 ‘성범죄’가 무엇일까? ‘조두순 사건’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수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미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국 남성들 중 상당수는 성매매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성매매는 성범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두순이 저지른 범죄에 진노하신 그 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못생긴 마사지걸 발언’이 터졌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스포츠 마사지에 대한 것이라고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공식석상에서조차 성매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 등장했으나 그것이 이미 ‘성범죄’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남자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돈이 있는 남자가 성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 서비스를 받는 성매매가 대체 왜 성폭력이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리 베커와 리처드 포스너를 필두로 한 법경제학자들이라면 ‘성이라는 재화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매매는 엄연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성폭력이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은 성매매를 강요한 자, 성매매를 한 자 모두 처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포주도 나쁘지만 그 포주에게 돈을 주고 성을 구매하는 ‘평범한 남자’도 그 범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강압에 의해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성매매피해자’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미 이 지점에서부터 뭔가 크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성매매는 누구나 다 하는 거고, 그냥 쉬쉬하고 넘어갈 일이지 그것을 괜히 단속하겠다고 하면 ‘풍선효과’가 발생해서 성매매가 음성화되고, 그래서 차라리 공창제를 시행하는 게 나을 것이고, 등등 운운하는 이들을 상대로 성범죄에 대한 전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에서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작 ‘남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면

‘조두순 사건’에 대한 여론과 함께 폴란스키의 체포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두순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곱씹으며 ‘미국처럼 200년, 300년씩 콩밥 먹여야 한다’고 이를 갈았다. 그렇게 외치는 남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성매매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설령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성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프랑스 대통령이 헛기침을 해도 사법 당국은 꿈쩍하지 않는다. 성범죄는 성범죄일 뿐이며, 누가 저질렀더라도 처벌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오래 된 것일지라도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슈피겔』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LA 주 검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다루는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신부가 20년전 어떤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건이다. 왜 이런 경우는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고, 폴란스키를 체포한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폴란스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절대적인 원칙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혹자는 폴란스키를 고발한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조사 결과 피해자는 폴란스키와 단 둘이 남아있을 때 성관계를 거절했다. ‘무섭다, 집에 가겠다’는 의사를 수 차례에 걸쳐 분명히 표현했다. 이미 가해자가 먹인 술과 약물로 인해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

피해자는 두려웠기 때문에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면 ‘적극적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빌미삼아 ‘화간’이라고 몰아붙이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고, 가해자는 어렵잖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 장자연씨 사건’을 떠올려보면 된다. 성접대를 받은 사람들이 과연 법에 규정된 처벌을 받았던가?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나 했던가? 한국 검찰은 미국 검찰이 그러하듯이 성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한 것인가?

‘그 XX를 죽여라’, ‘거세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미국의 제도와 형량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런 엄격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범죄 자체에 대한 단호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을 보라.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연예계에는 감독과 배우들간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폴란스키 감독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사건 발생 이전에 부인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는 충격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법 체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가 13세 소녀에게 약을 먹이고 술을 먹인 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힘과 협박으로 제압하고 피해자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여 수 개월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만이 관건일 뿐이다. 성폭력은 성폭력일 뿐이다. 다른 변명은 필요 없다. 사건이 벌어진지 31년이 지났지만 검찰은 끝까지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것은 바로 이럴 때에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미국식으로 하자고? 그 엄격한 잣대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면, 나는 찬성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 사회는 고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그런 사회이다. 형량을 높이고 전자발찌를 평생 채우자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법무부 관계자들 중, ‘미국식 윤리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적어도 ‘각하’께서는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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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5

'흑싸리 총리' 정운찬

[판] '흑싸리 총리' 정운찬

한국을 대표하는 케인시언 경제학자 정운찬 교수. 총리가 되기 위해 청문회장에 앉았다. “감세의 70%가 서민의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정부의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이정희 의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그 경제학자는, 여론의 반발과 야당 의원들의 투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을 등에 업고 ‘무사히’ 총리가 되었다. 이른바 ‘식물 총리’가 될 것임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식물이 되었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현 정부 내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식충식물 역할이라도 해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은 훨씬 절망적이다.

[온 가족이 모여앉아 차례를 지내고 서로 안부를 묻고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 추석을 맞이하여 용산참사 유가족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정운찬 총리는 흑싸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흑싸리껍다구’라는 관용어구 그대로, 마땅히 내놓을 패가 없을 때 버리는 그런 패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정부 당국자 중 최초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는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읽은 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확답도 내놓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고, 수사자료 공개 문제는 검찰 소관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중앙 정부에서 오긴 왔습니다’라며 얼굴도장만 찍고 돌아갔다. 원론적으로 중앙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말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한 채 총총히 떠나간 것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지만, 서울시에서 무리하게 뉴타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전체적인 주택 정책 자체가 신규 주택 건설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자료 공개는 검찰 소관이지만 예로부터 검찰은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받아왔고, 법무부장관은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각료회의의 일원이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용산참사 재판은 정부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증인석에 선 경찰특공대 제1대대 대장은 “망루 내부를 파악하고 작전에 진입한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경찰특공대는 당시 망루 안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시너가 몇 통 있는지 등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망루가 건설되기도 전에 진압작전을 시작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진압이 참사를 불렀다”는 유족 측의 주장이 점점 신빙성을 얻고 있다. 명절을 전후하여 정부 측에서도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운찬 총리가 나왔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다. 용산참사는 서민경제를 표방하며 서민들의 주거지를 초고층 주상복합으로 재개발하는 정책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다.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마저 무시하는 안하무인 검찰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모르쇠 할 수가 없다. 차례가 돌아왔으니 뭐라도 내긴 내야 한다. 그러니까 에라, 흑싸리껍다구나 하나 버리지 뭐.

흑싸리라는 이름의 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흑싸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등나무인데, 화투에 그려진 모양이 비슷하여 싸리와 혼동하게 된 것이다. 등나무는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장미목 콩과의 낙엽 덩굴식물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심는 경우가 많으며 학명은 Wisteria floribunda이다. 정운찬 총리가 흑싸리가 아닌 등나무가 되어 지친 서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게임의 세계는 냉정한 법.

정부는 그를 흑싸리껍다구로 내놓았고, 낙장은 불입이다. 정 총리의 관운을 빈다.

경향신문, 2009년 10월 5일


편집 과정에서 빠진 문구를 첨가하여 올립니다. 하긴 신문 지면에 대놓고 '고스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불만을 리플로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