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온갖 논쟁을 보거나 참여해온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PC 통신 시절까지 합치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최근 『괴짜경제학』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과 뉴욕타임즈 출신의 저널리스트 스티븐 더브너(Stephan J. Dubner)의 신간 SuperFreakonomics가 출간되면서, 바야흐로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보다 큰 규모의 키보드 대전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정식화된 학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듯이, 몇몇의 블로거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공적이지 않은 경로를 이용해 서로 은근히 심기를 긁어가며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해볼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키보드 배틀’ 중 가히 최대 규모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무언가가 최근 한창 진행되었다. 무대는 미국. 참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학문적 업적과 수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과 정치적 입장을 자주 함께하는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J. Bradford DeLong), ClimateProges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환경학자 조셉 롬(Joseph J. Romm), 기후 변화에 대하여 온라인 대중들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 RealClimate 등이 한쪽에서 전선을 짜고 SuperFreakonomics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더브너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항변하였고, 스티븐 레빗 또한 (그의 동의 하에) 공개된 이메일을 통해 ‘오해’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노벨상 수상 확률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는 간략한 코멘트와 링크 게시를 통해 이 사건에 슬그머니 개입하려다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된 문서들의 대략이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으나(http://en.wikipedia.org/wiki/Superfreakonomics), 결코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마치 평범한 블로거들처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문제는 SuperFreakonomics의 5장에 등장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내용이, 적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부당할 정도로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그것을 사소한 오류처럼 만들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나 이단은 있는 법. 지구 온난화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저자들이 말할 때 이미 그 갈등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레빗과 데브너는 말한다.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난화 재앙을 믿는 것,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만으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이다.”

요컨대 온난화 회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레빗과 데브너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이 그러하였듯이, SuperFreakonomics도 ‘기존의 통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 대해 경제학적 시선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반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적어도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통념’이라는 것이 지구와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주제이며, 수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데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4도 상승하면 현재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멸종한다. 환경의 파괴, 종 다양성의 파괴는 많은 경우 해당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 온난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그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레빗과 더브너는 ‘지오 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평균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들은 환경학자 켄 칼데이라(Ken Caldeira)의 말을 인용하여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인용된 당사자 켄 칼데이라는, 환경 블로그 ClimateProgress의 운영자 조 롬과의 이메일 대화를 통해, SuperFreakonomics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인용했으며 자신의 학문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웃자고 그러는 건지, 10월 21일 현재 켄 칼데이라의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다.” 켄 칼데이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8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에 빠질 리가 없다. 레빗과 데브너는 경제학자 마틴 와이츠먼(Martin Weitzman)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논문의 논지와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SuperFreakonomics의 5장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크루그먼 본인이 해당 논문을 읽어봤을 뿐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와이츠먼과 함께 작업한 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 배틀’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참여자들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논쟁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할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고, 그만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신 이 논쟁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준다. 인터넷 문서의 기본 포멧인 HTML은 학문적 텍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하는 것은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바로 그 행동을 전자화한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생활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학문 연구의 도구였고 인터넷 또한 그러했다. 가장 난폭하고 거친 언어가 오가는 그곳은 사실 가장 정제된 지적 담론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또한 진중권의 표현대로 ‘문자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술문화가 인터넷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치 인터넷이 반지성주의의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기존의 출판 매체를 통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별도의 편집자가 없기 때문에 저자의 감정적 판단과 기준이 여지 없이 노출되며, 한 번 공개된 텍스트는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모든 곳에서 접속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의 담론이 오가느냐는 전적으로 이용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SuperFreakonomics를 둘러싼 이 논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레빗과 더브너의 인용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논외로 한다면, 이 논쟁은 ‘지오 엔지니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과연 비효율적인 행동인가, 그래서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하나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다. 데브너가 현재(10월 21일 오후 9시 50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올린 글에서 ‘나의 목표는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존중한다면, 그와 레빗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뢰가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한 지식인, 학계의 이름 높은 학자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를 알아보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홀대당하고 저평가당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그 공간을 지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당연하기만 하던 세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어 온라인 공간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고하고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요원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어지러운 관계망 속에 얽혀들어 있는 지식인들은 서로에 대해 공정한,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패거리 놀음에 열중한다. 현재 인터넷이 지적 담론의 토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인터넷 자체의 속성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폴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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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
벌써 5일 전에 올라간 기사이므로 전문을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그래도 가급적 위 링크를 찍어서 조회수를 높여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이 기사를 올리면서 몇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1. 이미 당연히 번역이 되어가고 있거나 원고는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어쨌건 한국어판이 나온다. 저자들이 수정판을 내지 않는 한 곧 나온다.

2. 한국어판이 나오면 이런 논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국내 일간지들은 서평란에서 온난화 회의주의 내지는 지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거나 슬쩍 다루거나 한다.

3. 대중들은 '와우, 정말?!' 이러면서 다 낚인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세요. 이미 SuperFreakonomics는 나노 단위가 되도록 까였답니다. 본문에 언급된 환경 블로거 조 롬이 오늘 또 하나 올렸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기상학자 Caldeira가 자기 입으로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생생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인터넷 칼럼을 통해 '이렇게 단순한 지오 엔지니어링이 대안인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언급할 지경입니다.

http://climateprogress.org/2009/10/26/caldeira-interview-superfreakonomics-geoengineering/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PrinterFriendly.cfm?story_id=14738383&fsrc=rss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이 논쟁이 궁금하신 분은 밑에서 두 번째 주소를 클릭해서 관련 링크를 훑어주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먼저 봐주세요.

2009-10-21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독일 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 불리어 왔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 『이성과 혁명』의 서론에서 서슴없이 단언한다. 선진국 프랑스의 발전된 정치경제적 상황을 동경하던 독일의 지식인들이 그 혁명을 정신 속에서 구현해낸 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은 칸트의 1784년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이미 하나의 싹으로 심어져 있다.

칸트는 자신과 독자들이 "계몽된 시대"(aufgeklärten Zeitalter)에 살고 있지 않지만,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 "일반적 계몽을, 다시 말해 마땅히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미성년에서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가 차츰 감소해가는 명백한 징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은 사실의 보고라기보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칸트가 "이 시대는 바로 계몽의 시대이며, 환언하면 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명확해진다.

이 짧은 텍스트 안에서 칸트는 끝없이 외줄타기를 벌인다. 그는 결코 프리드리히 왕, 계몽군주의 통치가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삭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고, 칸트 본인도 결국 그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는 프리드리히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당시의 낙관주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자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이룬다.

칸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왕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이며,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이다. 이러한 칭송은 두 세기 전의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찬사를 보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의 힘을 칭송한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나마 말해줄 것을 칸트가 희망한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른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부권적 명령을 전제로 해야 이해 가능하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왕이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무엇인가? 왕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왕은 검열하고, 삭제하고, 저자를 고문하고 심판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이 '허용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전적으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사람의 학자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아메리카의 용맹한 시민들보다 한참 소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반면 칸트는 어떠한 세금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학자로서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시민은 그에게 부과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성의 사적 사용의 제한]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기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설명일 뿐 적극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 시민적인 차원에서, 시민의 목소리로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칸트의 귓가에는 여전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복종하라!"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이라는 구분을, 어떤 적극적인 재해석을 가하지 않는 한, 사실상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을 비판할 자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아직 학자와 시민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헌법상의 권리들은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칸트처럼 비굴한 강화 협상을 계몽군주에게 제안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칸트는 그가 누리고 싶은 정치적 자유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는 표현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자유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계몽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계몽의 시대'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룬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칸트는 대중들이 계몽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계몽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절망은 20세기의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며, "이런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에 대한 자유를, 그 반쪽짜리 원웨이 티켓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자가 자유롭게 비판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칸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함성 앞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앞서 말했듯 매우 적극적이고 치열한 재해석을 가하여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 칸트적 의미에서 '학자'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자신의 책을 검열당하지 않고 써서 시장에 출판한 다음이라면, 대중들이 스스로의 이성을 감히 사용하여 자신을 계몽할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칸트에 대한 온갖 재해석이 담론계에 떠돌고 있지만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칸트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믿음은,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삶과 학문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내가 읽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극심한 정신적 굴곡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나누고 분석하는 그의 해박한 지성은, 권력 앞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주저하는 일개 대학 교수의 그것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는 『정신현상학』보다 앞서서 독일 지식인들의 내면을 그려내어 보여준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저작 중 드물게 '뜨거운' 글이다. 그 열기는 분출될 수 없는 억압된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시대부터 이미 독일 관념론의 그것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난삽하고 어지러운 문장을 읽다 지친 검열관의 시선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마지막 문단의 중간 부분부터 칸트의 어조는 급변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진행된다." ... "이러한 일의 진행 속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이하 진행되는 내용은, 앞서 말했듯 너무도 '뜨겁기' 때문에, 나의 요약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는 직접 길게 인용하여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적게 하는 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때 이런 딱딱한 껍질 밑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싹을, 곧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을 계발하게 되면, 이것은 점차 국민의 성격에 반작용하게 되고(이에 의해 국민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는 이 반작용이 통치의 원리에까지 미치게 되어 정부는 이제야 기계 이상인 인간을 그의 품위에 어울리게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민적 자유의 제약이 정신적 자유의 확장을 가져오고, 확장된 정신적 자유가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으로 이어지며, 결국 행동의 자유를 거쳐 통치의 원리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는 것, 그러한 강렬한 역사적 발전에의 소망이 조심스럽게 쇳물을 부어 거푸집에 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대미에 이르러 칸트의 이 텍스트는 한없이 '인간'의 텍스트에 가까워진다. 매우 용감하게, 과감하게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이미 헤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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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언급된 글 중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편역, 서광사)을 참조하였습니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의 다른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이 생각이 (혹시라도)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텍스트를 곡해하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확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2009-10-05

'흑싸리 총리' 정운찬

[판] '흑싸리 총리' 정운찬

한국을 대표하는 케인시언 경제학자 정운찬 교수. 총리가 되기 위해 청문회장에 앉았다. “감세의 70%가 서민의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정부의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이정희 의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그 경제학자는, 여론의 반발과 야당 의원들의 투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을 등에 업고 ‘무사히’ 총리가 되었다. 이른바 ‘식물 총리’가 될 것임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식물이 되었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현 정부 내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식충식물 역할이라도 해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은 훨씬 절망적이다.

[온 가족이 모여앉아 차례를 지내고 서로 안부를 묻고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 추석을 맞이하여 용산참사 유가족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정운찬 총리는 흑싸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흑싸리껍다구’라는 관용어구 그대로, 마땅히 내놓을 패가 없을 때 버리는 그런 패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정부 당국자 중 최초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는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읽은 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확답도 내놓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고, 수사자료 공개 문제는 검찰 소관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중앙 정부에서 오긴 왔습니다’라며 얼굴도장만 찍고 돌아갔다. 원론적으로 중앙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말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한 채 총총히 떠나간 것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지만, 서울시에서 무리하게 뉴타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전체적인 주택 정책 자체가 신규 주택 건설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자료 공개는 검찰 소관이지만 예로부터 검찰은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받아왔고, 법무부장관은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각료회의의 일원이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용산참사 재판은 정부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증인석에 선 경찰특공대 제1대대 대장은 “망루 내부를 파악하고 작전에 진입한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경찰특공대는 당시 망루 안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시너가 몇 통 있는지 등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망루가 건설되기도 전에 진압작전을 시작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진압이 참사를 불렀다”는 유족 측의 주장이 점점 신빙성을 얻고 있다. 명절을 전후하여 정부 측에서도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운찬 총리가 나왔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다. 용산참사는 서민경제를 표방하며 서민들의 주거지를 초고층 주상복합으로 재개발하는 정책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다.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마저 무시하는 안하무인 검찰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모르쇠 할 수가 없다. 차례가 돌아왔으니 뭐라도 내긴 내야 한다. 그러니까 에라, 흑싸리껍다구나 하나 버리지 뭐.

흑싸리라는 이름의 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흑싸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등나무인데, 화투에 그려진 모양이 비슷하여 싸리와 혼동하게 된 것이다. 등나무는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장미목 콩과의 낙엽 덩굴식물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심는 경우가 많으며 학명은 Wisteria floribunda이다. 정운찬 총리가 흑싸리가 아닌 등나무가 되어 지친 서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게임의 세계는 냉정한 법.

정부는 그를 흑싸리껍다구로 내놓았고, 낙장은 불입이다. 정 총리의 관운을 빈다.

경향신문, 2009년 10월 5일


편집 과정에서 빠진 문구를 첨가하여 올립니다. 하긴 신문 지면에 대놓고 '고스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불만을 리플로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