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1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독일 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 불리어 왔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 『이성과 혁명』의 서론에서 서슴없이 단언한다. 선진국 프랑스의 발전된 정치경제적 상황을 동경하던 독일의 지식인들이 그 혁명을 정신 속에서 구현해낸 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은 칸트의 1784년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이미 하나의 싹으로 심어져 있다.

칸트는 자신과 독자들이 "계몽된 시대"(aufgeklärten Zeitalter)에 살고 있지 않지만,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 "일반적 계몽을, 다시 말해 마땅히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미성년에서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가 차츰 감소해가는 명백한 징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은 사실의 보고라기보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칸트가 "이 시대는 바로 계몽의 시대이며, 환언하면 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명확해진다.

이 짧은 텍스트 안에서 칸트는 끝없이 외줄타기를 벌인다. 그는 결코 프리드리히 왕, 계몽군주의 통치가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삭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고, 칸트 본인도 결국 그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는 프리드리히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당시의 낙관주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자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이룬다.

칸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왕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이며,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이다. 이러한 칭송은 두 세기 전의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찬사를 보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의 힘을 칭송한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나마 말해줄 것을 칸트가 희망한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른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부권적 명령을 전제로 해야 이해 가능하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왕이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무엇인가? 왕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왕은 검열하고, 삭제하고, 저자를 고문하고 심판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이 '허용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전적으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사람의 학자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아메리카의 용맹한 시민들보다 한참 소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반면 칸트는 어떠한 세금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학자로서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시민은 그에게 부과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성의 사적 사용의 제한]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기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설명일 뿐 적극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 시민적인 차원에서, 시민의 목소리로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칸트의 귓가에는 여전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복종하라!"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이라는 구분을, 어떤 적극적인 재해석을 가하지 않는 한, 사실상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을 비판할 자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아직 학자와 시민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헌법상의 권리들은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칸트처럼 비굴한 강화 협상을 계몽군주에게 제안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칸트는 그가 누리고 싶은 정치적 자유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는 표현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자유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계몽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계몽의 시대'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룬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칸트는 대중들이 계몽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계몽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절망은 20세기의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며, "이런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에 대한 자유를, 그 반쪽짜리 원웨이 티켓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자가 자유롭게 비판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칸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함성 앞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앞서 말했듯 매우 적극적이고 치열한 재해석을 가하여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 칸트적 의미에서 '학자'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자신의 책을 검열당하지 않고 써서 시장에 출판한 다음이라면, 대중들이 스스로의 이성을 감히 사용하여 자신을 계몽할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칸트에 대한 온갖 재해석이 담론계에 떠돌고 있지만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칸트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믿음은,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삶과 학문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내가 읽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극심한 정신적 굴곡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나누고 분석하는 그의 해박한 지성은, 권력 앞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주저하는 일개 대학 교수의 그것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는 『정신현상학』보다 앞서서 독일 지식인들의 내면을 그려내어 보여준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저작 중 드물게 '뜨거운' 글이다. 그 열기는 분출될 수 없는 억압된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시대부터 이미 독일 관념론의 그것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난삽하고 어지러운 문장을 읽다 지친 검열관의 시선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마지막 문단의 중간 부분부터 칸트의 어조는 급변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진행된다." ... "이러한 일의 진행 속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이하 진행되는 내용은, 앞서 말했듯 너무도 '뜨겁기' 때문에, 나의 요약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는 직접 길게 인용하여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적게 하는 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때 이런 딱딱한 껍질 밑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싹을, 곧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을 계발하게 되면, 이것은 점차 국민의 성격에 반작용하게 되고(이에 의해 국민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는 이 반작용이 통치의 원리에까지 미치게 되어 정부는 이제야 기계 이상인 인간을 그의 품위에 어울리게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민적 자유의 제약이 정신적 자유의 확장을 가져오고, 확장된 정신적 자유가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으로 이어지며, 결국 행동의 자유를 거쳐 통치의 원리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는 것, 그러한 강렬한 역사적 발전에의 소망이 조심스럽게 쇳물을 부어 거푸집에 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대미에 이르러 칸트의 이 텍스트는 한없이 '인간'의 텍스트에 가까워진다. 매우 용감하게, 과감하게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이미 헤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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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언급된 글 중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편역, 서광사)을 참조하였습니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의 다른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이 생각이 (혹시라도)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텍스트를 곡해하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확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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