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11

입대합니다

2010년 10월 11일부터 2012년 7월 18일(예정)까지, 카추사로 군복무할 예정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기간동안 이 블로그에 정치·사회·시사적인 내용의 글은 올라오지 않습니다. 훈련소 주소 등 신상과 관련된, 외부에 공개해야 할 정보는 꾸준히 업데이트됩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무운까지는 바라지 않고, 군복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안녕히.

2010-10-01

죽은 시민의 사회

죽은 시민의 사회

이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우리는 슈퍼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비교를 불허하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그것을 곧장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트위터나 페이스북 따위로 자신의 생각을 떠벌릴 수 있으며, 서 있는 위치에서 반경 5백 미터 안에 숨은 맛집을 찾아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다. 이 편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한없이 똑똑해지고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현실은 정 반대다.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자신,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볼록해지면서 점점 스파이더맨이 되어가는 모습. 온갖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며 “당신 자신이 되세요, 화이팅”이라고 떠벌리지만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다. 한 시간짜리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 은행 또는 증권사 매장에 앉아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면서,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살고 있을까 한숨을 내쉴 즈음, ‘딩동’하고 벨이 울리며 한 여성이 당신을 부른다. “275번고객님!”

이 세상의 정체, 그 속에서 당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싶다면, 남들이 당신을 부르는 호칭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아침에 눈을 떠 휴대전화에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 적어도 한 통 이상의 스팸 문자가 와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판매자는 당신을 ‘고객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에 눈뜨기 전부터 고객님이고, 잠들 때까지 고객님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고객님, 스마트폰을 2년 약정으로 노예 계약한 고객님, 특급배송 서비스로 이것저것 결제하신 고객님, 실시간 스파이웨어 감시 프로그램이 꼭 필요하신 고객님. 이 무기력한 세상은, 당신을 ‘고객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기력해진 이유는 MB 때문이 아니다. 7월에출시되었어야 할 아이폰 4가 9월에 출시되어서도 아니고, 아이폰 대항마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모 국내 전자업체가 집요한 언론 플레이를 펼치기 때문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통째로 ‘고객님’의 삶이 되어버렸다는 것, 주체적인 삶의 양식 없이 그저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선택을 하든, 당신은 그저 고객님이다. 손님이 그냥 왕이라면 고객님은 ‘킹왕짱’이어야 하겠으나, 실상을 놓고 보면 우리는 결국 다른 고객님을 상대하면서 번 돈 몇 푼을 주머니에 넣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선택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그런 하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약정하는 사람과 개통해주는 사람만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질서정연하게 무기력해지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상품이 쏟아지고, 앱스토어에는 수십만 개의 어플이 다운로드를 기다리며, 맞춤형 서비스가 속속 생겨나는 이 세상에서 왜 정작 ‘고객님’은 무기력해질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선택은 객관식이다. 시장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받는 우리로서는, 그 시장에서 공급해주는 것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기 전까지 선택의 자유라는 말은, 적어도 스마트폰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자유는 시장에서 공급하는 물건의 종류만큼, 딱 그 수준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시장에서 무언가를 공급해주지 않을 경우, 고객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역시 아이폰을 예로 들어보자. 스티브 잡스가 프리젠테이션을 하던 올해 7월, 아이폰 4가 출시되는 국가 목록에 대한민국이 빠지자 수많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다. 인터넷 공간은 순식간에 이런 저런 음모론으로 뒤덮였고 비명과 절망과 탄식이 와이파이망을 타고 날아다녔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한국 애플 본사 앞에서 시위라도 할 것인가? 단식투쟁을 벌이면 스티브 잡스의 마음이 바뀔까?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론상 우리는 국가가 우리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우리에게 뭔가를 마땅히 제공해야 할 의무가 없을뿐더러, 그것을 요구 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횡포에 대해서는 촛불시위를 하고 서명운동을 하고 칼럼을 쓰고 투표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전횡에 대해 일개 고객님인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기껏 다른 기업의 고객님이 되는 게 저항의 전부다. 그런데 이용하는 주유소를 A사에서 B사로 바꾼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긴 한가? 민주주의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원리에 잠식되어 갈수록, 즉 우리가 시민에서 고객님으로 변해갈수록, 우리는 무력해진다. 번호표를 뽑고 얌전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국내에 아이폰 4가 출시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하고, 예약 판매를 받는 서버가 다운된 것이 풀릴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한다. 할 일이 없다. 약정기간이 덜 끝난 휴대 전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아보고, 쉴 새 없이 클릭하며 최저가 탐색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면, 불현듯 허탈해진다. 이것이 삶에 무슨 의미일까. 결국 수많은 불량품 중에 개중 나은 것을 찾으려 방황하고 있을 뿐 아닐까.

촛불시위 이후 정치적으로 맥이 빠져버린 한국 사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촛불시위는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컷 MB를 욕하고 나서, 결국 투표 잘하자며 집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가 정치인들 앞에서 고객님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선거는 너무 멀리 있었고, 경찰은 컨테이너를 쌓고 버텼다. 촛불시위의 실패 이면에는 이미 고객님으로 길들여진 시민들의 무기력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의 정치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자식 고환 애무하듯, 선거 때 간신히 정치에 대한 관심이 솟고, 이후 곧 죽어버린다. 우리는 정치적 의제를 생산하고 실천하는 시민이 아니라, 정치인을 쇼핑하는 고객님으로 전락했다.

어떻게 하면 ‘죽은 시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정도의 해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돈을 벌되, 벌어서 ‘시간’을 사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평화를 얻으라는 것이다. 똑똑한 소비자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바보가 된다. 소비자는 어차피 기업이 짜놓은 판 위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시간을 이용해서 고객님이 아닌 누군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당신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부모님, 학생이라고 부르는 선생님, 동지라 부르는 당원, 아저씨라고 부르는 옆집 소녀 등, 눈을 돌려보면 생각 외로 우리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많다. 바로 그 세계, 진짜 우리의 삶이 촘촘히 얽혀 들어간 세계에 충실하는 것, 그것만이 죽은 시민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10년 10월호 

2010-09-30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

현재까지 한국 보수정치는 줄기차게 '중도주의'를 표방해왔다. 누가 봐도 대충 '옳으신 말씀'을 하면서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전략이 즐겨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현 정부도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고 말하는데, 강남에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도 곧죽어도 자신들을 '중산층'이라고 칭한다는 것을 놓고 보면, 이건 그냥 '다들 행복하게 잘 살자'는 수준의 표어밖에 안 된다. 한국의 정치는 가장 넓게 그물을 펼치는 전략을 선호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넓은 정치'가 '힘의 정치'와 곧바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쌍끌이 어선끼리 어장 경쟁을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그 민주당을 비판하는 외곽 세력들이나, 이념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뿐더러 애초에 어떤 '이념성'을 지니려고 하지도 않는다. 특정한 핵심 지지층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들에게 단번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하려다보니, 결국 정치는 한낱 쪽수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선거에서 단일화 국면을 떠올려보자. 만약 각 정당들이 특색에 따라 확고한 지지층을 지니고 있고 그 충성도가 높다면 애초에 단일화 논의가 잘 거론되지도 않을 뿐더러 명확한 '거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사에는 계급정당이 제대로 출현한 바 없었고, 그나마 유권자들을 묶어놓는 끈은 지역주의 뿐이었다. DJP 연합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충청도 표를 주면 너는 나에게 총리직을 주고 내각제 개헌을 한다, 이건 '거래'가 된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진보정당의 확실한 표밭으로 구성된 비율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 진보정당들과 민주당 및 민주당 계열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거래가 성사되기 어렵다. 서로 주고 받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한데, 민주당과 그 계파들은 애초에 대중추수에 급급했고, 진보정당들의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민주당 계열들은 진보정당과 정당한 거래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힘으로 빼앗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테니까. 쪽수로 밀어붙이고 여론조사 결과로 압박하면, 사표 방지 심리로 진보정당의 핵심 지지층도 상당수 끌려간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들, 특히 보수양당이 지니고 있는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와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은 이렇듯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다수결-쪽수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좋은 소리'만 한다. 그렇게 막연한 수사로 다수를 동원한 후, 스스로의 이념과 지향성을 지닌 정치집단들을 다수결에 의해 굴복시킨다.

전직 배우, 현직 정치인 문성근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은 이와 같은 경향성이 극대화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합쳐라, 모여라'만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령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않았다. 실천에서의 다수결을 맹신하므로 백만 명을 모아서 야당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발상을 이마에 써붙이고 다닌다. 구체적 강령이나 지향성 따위 없는, 함성을 위한 함성.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은 껍데기로서의 정치. 한국의 정치를 허깨비로 만드는 두 개의 큰 경향성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이와 같은 기괴한 대중정치운동이 출현한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경향성에 맞서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는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와 더불어 계급정당이 출현하고 그들이 핵심 지지층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 성립하였지만, 한국에서는 해방 후 보통선거권이 그냥 주어졌고 갓 시작된 계급정당이 철저하게 와해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진보정당이 10%대의 득표율을 올린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북한의 3대 세습을 외부에서는 비판할 수 없다는 개또라이들이 당을 집어삼키면서 그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있는 중이다.

진보정당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치들은 대부분 '대중성 강화'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대중성이란 이와 같이 이념적 탈색과 더불어 힘의 정치에 대한 숭배를 동시에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노선을 택할 때 진보정당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할 뿐더러 다수결이 민주주의라고 믿는 자들의 공세 앞에 더욱 무력해진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의 지지자는 와해되고 있는 계급에 호소하거나,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새로운 대중성에 호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2010-09-19

김규항 - 진중권 논쟁 (3) : '자유주의자'라는 욕설

김규항은 자신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 행동이 말 그대로 '사실적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김규항 본인 혹은 김규항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발언 속에서 이와 같은 입장은 수없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라는 단어 자체가 어떤 도덕적 평가를 담고 있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때, 그것이 비난이나 평가 절하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맥락에 따라, 그 어떤 단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욕설 비슷한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누군가에게 '이런 세종대왕 같은 새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발화의 상대방이 고기와 여색을 밝히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야 이 이순신 같은 놈아'라는 표현은 그 발화의 상대방이 대단히 꽁하는 성격이며 자신과 불화하는 자를 매일 일기장에서 씹고 심지어 섹스 파트너와의 성관계 횟수를 일기에 적기도 하는 편집증적 성향을 지닌 것임을 지적하는 문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너는 자유주의자'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화자와 그 상대방 모두 진보정당의 가치에 동의하고 그것의 성장을 바라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결국 진보정당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강요했다는 역사를 함께 고려해볼 때, 그와 같은 딱지붙이기는 당연히 욕설 혹은 심한 비판 내지는 비하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김규항이나 김규항의 옹호자들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이 그저 사실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화술을 지닌 사람 혹은 집단이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대중들은 어떠한 정치 집단 속에서 그와 같은 '배제'의 화법이 자연스럽게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면 조용히 발걸음을 돌릴 뿐이니 말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과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욕설로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후자를 피하면서도 전자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자신이 전자를 수행한다고 착각하면서 후자에 지나지 않는 행태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진보정당의 구성원, 혹은 그러한 정치적 결사체를 위해 발언하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를 희망한다.

2010-09-13

김규항 - 진중권 논쟁 (2)

김규항과 진중권 사이에서 오간 '논쟁'이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진중권은 트위터에 폭풍과 같이 쏘아붙였고, 김규항은 오늘 "논쟁을 끝내며"라는 블로그 게시물을 올려 "이 논쟁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

진중권은 실컷 짜증을 내고 있고, 김규항은 최후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부적절한 시점에서 발을 뺐지만, 나는 이 '논쟁'이 사람들의 평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신당 자체 뿐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집단의 행동 방식에 대한 하나의 거울상을 그려내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고, 진중권이 대중들을 향해 벌이는 활동들을 낮게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진중권보다 더 왼쪽에 있는 그룹들을 존중하지 않고 되려 '닭짓'이나 한다고 폄하한다. 둘째, 그 과정에서 왜 진보신당과 민주당이 다른지, 왜 한나라당에 반대하기 위해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을 찍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우선 첫 번째 논점에 대해 살펴보자. 김규항은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4에 서 자신은 '사회주의'를, 진중권은 '사민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민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이야기"라는 전제 하에, "사민주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주의 체제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체제"라고 단정짓는다. 따라서 사민주의는 그 태생 및 속성상 자본주의와의 타협주의이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갈등하는 사회주의가 성장해야만 커나갈 수 있는 종속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와 같은 사민주의 이해는 대단히 편협할 뿐더러, 사민주의에 대한 현대적인 연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견해는 구 소련측에서 만들어낸 서구 좌파들의 역사에 대한 기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실상을 놓고 보면, 사민주의와 레닌주의 모두 기존의 사회주의가 각국의 특수한 현황과 맞물려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정치체계다운 정치체계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는 전제정을 몰아낸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근대적 체계를 일거에, 폭력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독일이나 스웨덴 등 민주주의 체제가 발전하고 있는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위해 민주주의적 원리, 혹은 현실정치의 방법론을 사회주의 운동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그 어떤 경우에도 김규항이 말하는 '다짜고짜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보편적 원리는 특수한 상황에 맞도록 재해석된 수정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김규항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사민주의가 아니다'라는 것 말고, 그 어떤 적극적(positive)인 자기규정을 지니고 있는가? 현대 사회주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사민주의 외에 현실적으로 구현된 사회주의의 형태는 구 소련의 그것이며, 그 외에는 중국의 독특한 국가주도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와의 타협의 결과물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적 원리를 도입한 결과물이다. 민주주의가 곧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면 김규항의 단순한 언명에 동의할 수 있겠지만 사태의 전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근원적 갈등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은 보편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를 보자. 영국 노동당 내에서도 '왼쪽'에 속하는 노인, 토니 벤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내가 아는 한 가장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이론은 1인 1표제다. 우리는 그 위에서 NHS 같은 것들을 만들어냈다."

진중권더러 사민주의자라고 칭하는 명제 자체의 진리값과는 별개로, 누군가를 '사민주의자'라고 칭함으로써 본인의 급진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발상은 대단히 촌스러울 뿐 아니라 사민주의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민주의는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다. 하지만 김규항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그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공허한 담론, 혹은 본인이 좌파 혹은 양심적 우파라고 생각하지만 이놈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믿고 싶은 이들을 위한 정신적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 도달할 수 없는 샹그릴라로서의 사회주의를 상정해버리면, 그 외의 여타 활동에 대해서 냉소하는 일이 한결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점을 살펴보자. 김규항은 진중권이 이번 지방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과의 대립각을 더 세우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 비판을 위해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7에 서 한 고등학생의 편지를 인용한다. 김규항이 인용하는 그 똘똘한 학생에 따르면 노회찬 후보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 토론회는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가 안 되고 있었고, 그 결과 노회찬과 심상정은 "‘왜 이명박을 반대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이명박의 대안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인지’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러한 시각 하에 김규항은 진중권이 출현한, 선거 직전 서울시장 토론회를 비판한다. 그가 "오류와 희망에서 지적하고 이 고등학생이 언급한 노회찬 씨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의 인터넷 토론회는 ‘프레임 오류’의 극치"였다. "물론, 토론회 자체는 진중권 씨의 독설과 재담으로 매우 ‘대중적’(!)이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렇게 안타까워할 거라면, 왜 김규항은 그 토론회에 본인이 참석해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하지 않았는가? 김규항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주최측이 기꺼이 패널 자리를 내어줬을 게 아닌가. 그는 선거 국면에 개입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노회찬이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적 행태로 인해 TV 토론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가 바라는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적의 기회 아닌가?

요컨대 이런 것이다. 왜 김규항은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는가?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할 기회는 많고도 많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번 선거 과정에서 그가 '더 왼쪽'에 있는 사회당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했는가? 진보신당 당적은 없되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진보신당에 채찍질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면, 왜 선거 다 끝난 다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사후평가와 비판이 불필요하고 무용하다는 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을 더 값지게 쓸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진중권이라는 한 사람의 셀리브리티를 쫓아 진보신당에 들어왔지만, 정작 투표할 때가 되면 자신이 속한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을 찍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진중권이 진보신당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비판'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공허한 사후론에 지나지 않는다.

진중권 때문에 들어온 사람들,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라면, '더 왼쪽'에 있는 김규항이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다. 그 자유주의자들을 (본인과 같은)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설득하고, 그 설득의 방법론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현실 속에서의 정당은 어쨌건 외연을 넓혀야만 하는 조직이다. 그 역할을 하는 것과, 정당 내에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흔들리지 않는 입장을 만드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김규항은 전자를 비판하는 것으로 후자의 몫이 수행된다고 믿는 것인가? 돛잡이가 돛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해서, 기울어진 배의 키가 올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키잡이 노릇을 하고 싶다면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 나는 김규항이 진보운동 내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어떻게 부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김규항이 그 '자유주의자'들을 설득해 사회주의적인 원리에 동참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진중권이 전진을 '닭짓'한다고 욕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가 될까? 물론 진중권은 대중적 스타다. 하지만 진중권의 영향력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수주의-자유주의-사민주의-사회주의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이 복잡한 현대 정치를 설명하고 이해해낼 수 있을까? 모든 보편은 특수하게 구현된다. 김규항이 지향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사회주의는 사민주의가 아닌 그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는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

진중권에게는 진중권의 일이 있고, 김규항에게는 김규항의 일이 있다. 대중들 속에서 진보신당의 존재를 알리고 각인시키는 진중권의 일, 혹은 '삐끼질'을 진중권은 훌륭하게 수행해왔다. 그렇다면 김규항은? 김규항의 일은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왔는가? 진보신당이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간다는 비판에서 출발했으므로 그 지점으로 논의를 한정시켜보자. 그는 진중권이 불러들인 '자유주의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슨 일을 했을까? 그들에게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것 외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나는 도저히 기억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결코 해법이 아니다.


김규항의 이러한 논법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라고 칭하는 것이 얼마나 미망한 일로 전락해버렸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배제된 채, '사민주의'를 내려다보며 논평할 수 있는 상위의 심급을 임의로 마련함으로써, 몇몇 이들에게 턱없는 정신적 우월감을 안겨줄 뿐인 하나의 정신적 기제 혹은 도피처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혹은 '좌파'라면, 나 역시 단호히 거부하겠다.

나는 진보신당이 더욱 대중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대중들 역시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진중권은 전자의 역할을 지금까지 훌륭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김규항이 후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 사람이 진보신당 전체, 한국의 진보진영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결국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가 관건인데,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대중성 강박'을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김규항이 그나마 '삐끼질'도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논쟁을 바라보며 나는 진중권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0-09-10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죽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많았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담론들의 구체적 형태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문학은 늘 위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의 경우로 한정짓고 이야기해본다면, 플라톤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것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왔다. 그리고 그들은 늘 실패해왔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지금도 위기에 빠져 있다. 전통적인 철학의 연구 주제였던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은, '인간 무리'의 행동에 대한 경제학적 관측, 혹은 '뇌-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관측에 밀려난지 오래다. 훗설의 책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핵심 내용은 결국 심리학에 대항하여 어떻게 인식론적 지평을 확보할 수 있을까인데, 나는 내가 그 책을 올바로 이해했거나, 그 책이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제시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 이유가 전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철학의 위기는 외부적으로도 진행중이다. 전후 자본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급증했던 대학들, 그 대학에서의 인력 수요에 맞춰 생산된 고학력자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철학과 자체가 줄어들고 있고, 그 경향은 세계적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철학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과로, 기존의 철학이 다루던 진지한 주제들은 온갖 학제간 연구 혹은 심리학과로 이양해가고 있다. '철학과'는 사라지고 있다. 다른 인문학 분야들의 경우도, 학과 자체가 소멸하거나 대폭 예산이 줄어드는 경향이 관찰된다.

인문학은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 인류가 원시적인 형태로 세계를 관찰하고 기술하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입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다. 특히 '인문학은 이제 대중들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거나, '여태까지는 상아탑 안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었지만 이제 인문학도 무한경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본디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제 새벽 뒤늦게 접한 부고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7월 4일, 대표적인 하이데거 연구자인 신상희 건국대 연구교수가 만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사인은 심장마비였고,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오랜 세월동안 안정된 자리를 얻지 못하는 과정에서 쌓인 심적 고통이 발병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는 외대 이기상 교수와 더불어 하이데거의 주저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지금 내 책꽂이에도 그가 옮긴 책이 두 권 있다.

신상희 교수는 '교수'라고 불리웠지만 교수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강사 생활은 그를 소진시켰고, 그나마도 2007년 느닷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이후 그는 건국대에서 명저번역 사업의 학술연구교수로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후기 하이데거의 핵심 저서를 번역한 사람에게, 대학들은 정교수 자리를 끝내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인문학, 철학은 그 출발부터 위기였고 늘 위기 상황 속에서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이 '인문학자의 죽음'은 구체적이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처한 객관적인 삶의 현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헌신하면, 당신은 대학의 문턱의 바깥에서 떠돌다가 지쳐 쓰러져버릴 것이다. 이 죽음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대중들과 함께하는 인문학'을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대체 그 '대중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속에서, 신상희 교수와 같은 연구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철학을 소비하는 한국의 대중들 중 스스로를 좌파라고 여기는 이들은 New Left Review 같은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핫'한 이론가들을 따라가는데 바쁘다. 별 생각 없이 철학 오오 철학자 오오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철학자가 하버드 명강의를 하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나치에 부역한 하이데거, 혁명과도 아무 상관 없는 포스트모던의 '기원'일 분인 하이데거를 묵묵히 연구하고 번역하는 사람은, 대체 이 '새로운 인문학'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연암 박지원은 노마드였지, 킬킬! 니체는 너무도 불온해! 이렇게 철학자들의 이름을 '쿨'하고 '핫'한 것으로 포장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인문학의 소임인가? 대중들의 그러한 욕망, 즉 뭔가 으리으리하고 굉장한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반성적 고찰도 요구하지 않는 책을 읽음으로써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것은, 굳이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고야 말겠다는 이건희의 허영심에 부응한 고려대학교의 행태와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돈 안 되는 연구, 그 책이나 논문을 읽을 연구자가 열 명도 안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연구는, 대체 이 '새로운 인문학' 속에서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자야 한단 말인가?

인문학의 위기 그 자체는 인문학적으로 돌파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그러하였듯이, 철학의 위기는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과 결과물의 제시로 해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헌대 그 하이데거 역시 대학교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였고, 안정된 신분을 얻는 순간 크게 안도하여 스승인 훗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그보다 더 가혹하다. 자신들이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이제는 철학자들이 아카데미 속에서 연구하는 것을 고깝게 여긴다. 더 쉽게, 더 쉽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진정한 인문학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는 내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은 다르다. 인문학을 연구한다는 명찰을 달고 살아남고 싶다면, 바로 그 인문학을 얄팍하게 만드는 일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협박이 들려오는 것 같다. '빙고, 당신은 지금 헤겔의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물론 그 헤겔도, 또 칸트도 사강사 생활을 하며 삶을 부지해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학생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은? 대중들은 '칸트'라는 이름의 고색창연한 무게감만을 쏙 빼간 채, 그의 문제의식과 이론에 대한 진지한 접근 따위 앞에서는 귀를 닫아버린다. 귀를 막고 소리지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첨언: 나는 바로 이와 같은 시각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2010-08-19

통일세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이명박의 대통령으로서의 단점 중 하나는 본인이 대단한 아이디어 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생각나는대로 저지르고, 아랫사람들 혹은 국민들에게 그 뒷수습을 떠맡긴다. 그런데 이명박이 가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장점 중 하나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는 뭐가 됐건 본인이 스스로 의제를 생산한다. 좋게 말하면 의제 선점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실수인데, 어쨌건 그 결과 국정의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통일세’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개념이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의 여론을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 4천만 국민의 소원이 통일이던 시절은 지나간지 오래다. 지금 대부분의 국민들은 통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그 통일 대비를 위해 세금을 내라고?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기존 정부에서 쌓아왔던 대북관계를 모두 망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이명박이, 그게 할 소리인가? 이른바 ‘진보 개혁 진영’의 반응을 요약하면 대략 이와 같은 형태가 될 듯하다.

그런데 어딘가 맥이 빠져 있다. 미디어오늘의 이정환 기자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재의 부가가치세 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낮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은 역시 OECD 평균과 비교했을 때 전체 세수 중 직접세 비율이 밑에서부터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멕시코와 터키, 한국인들이 평소에는 결코 자존심 때문에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그 나라들 말이다. 그 외의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소득세나 법인세 등을 더 내면 더 냈지 덜 내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보면 대응법은 간단하다. 어차피 통일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 정권의 붕괴, 혹은 그에 준하는 대격변은 대한민국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 준비라는 것은 결국 재원을 확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최소한의 현실주의만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결국 통일세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북한의 격변에 대비한 재원 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현실을 어설프게 부인하는 순간 발화자는 책임 있는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요점은 그 재원을 간접세로 충당하느냐 직접세로 충당하느냐에 달려 있다. 직접세 비율을 더 끌어올려서 통일에 대비하는 것은 결국 부자들의 돈으로 통일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고, 어차피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경제적 강자들에게 부담시키는 것이므로, 큰 틀에서 볼 때 부의 재분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간접세로 통일 비용을 댄다면 그것은 밑돌 빼어 윗돌 괴는 형국밖에 되지 않는다. 책임 있는 진보 정치세력을 자청하는 집단이라면 ‘이명박이 하니까 헛소리다, 표리부동하다’는 식의 단편적 비판을 넘어, ‘부자들이 통일 비용을 내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이런 ‘적극적 반MB’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경제 정책의 큰 틀에서는 전반적으로 합의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합의의 내용 중 하나가 법인세 인하, 소득세 인하이며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종합부동산세법 개정안을 내고 통과시키는 일을 사실상 수수방관했다. 민주당이 직접세 비율을 높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김정일이 핵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비단 이번 통일세 논란 뿐 아니라 적잖은 사회·경제적 사안에서 민주당의 ‘반MB’가 공허한 수사에 머무는 이유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북한 정권은 언젠가 변할 것이고, 그 변화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에 다가올 것이다. 정부 뿐 아니라 시민사회와 야당 역시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반MB’에 묶여서 적극적인 통일 담론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쓰라린 정치적 손실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틀 안에서는 안 된다. 일각에서 종북주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민주노동당과, 그 민주노동당을 의식하는 가운데 북한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할 뿐인 진보신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민들은 바로 이런 사안에서 책임감 있게,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을 공정하게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정치 세력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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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http://hook.hani.co.kr)에 올린 글입니다. 8월 17일에 게재되었으며,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글루스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가 등장하였기에 전문을 게재합니다.

2010-08-17

2010년 8월 17일

대학원 졸업과 함께, 공식적으로 철학 석사 학위 소지자가 되었다.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출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위해 학교에 가야만 했다. 지난주 만나뵌 자리에서 지도교수님이 읽어보라고 권해주신 책은 1970년대에 나온 것으로 아마존에서 구할 수 없었다. 텅 빈 가방에 제본된 책 한 권을 넣고 걸어 내려오면서 인문관 고양이를 만나 쓰다듬어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2010-08-11

진보와 콧대

개인적 편견일 수 있겠지만, 품성 좋은 놈 치고 알맹이가 꽉 찬 놈을 본 적이 없다. 여기서 품성 좋다 함은 오옹 님이 "친서민정당 진보신당이라..." 에서 말한 것과 같은 바로 그런 덕목이다. 괜히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인사 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말 절대 하지 않고, 친목질에 능하고,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뚜렷한 자기 주관이 없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세를 잘 따른다.

알맹이가 꽉 찬 놈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방금 다 말했다. 자기 주관과 신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재오도 김문수도 민중당 할 때에는 콧대 높았다. 그들의 콧대가 낮아진 것은 그들이 한나라당에 투신한 다음부터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접어둔 채, 그저 권력을 얻겠다는 목적 의식이 그들의 삶을 지배할 때, 비로소 그들의 콧대는 낮아졌다.

즉 콧대와 권력 의지는 반비례하는 것이다. 정치집단이 권력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권력욕만 남은 정치집단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진보신당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전자가 문제겠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 전체를 놓고 본다면 후자가 더 문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과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대부분의 보수정당들은, 오옹 님 같은 영세상인들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뒷구멍으로는 그들의 생존권을 말려죽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일종의 '소비자'라는 의식 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한 소비자로서의 요구가 과연 바람직한 결과를 낳고 있느냐이다. 가령 한국 소비자들은 '손님은 왕'이기 때문에 왕처럼 대접받고 싶어한다. 대형 마트에 가보면 그렇다. 1+1 행사가 난무하고, 마트 입구부터 출구까지 굽신거리는 점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저렴하고 안전한, 믿을 수 있는 쇼핑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들을 왕처럼 대접하는 그 비용은 결국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게 앞에서 데모 같은 것은 안 하고, 대신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부주 팍팍 꽂아넣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오겠는가? 당신이 낸 세금, 당신이 누려야 할 복지가 정치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대접' 받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하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따위 대접 받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한 사람들이 '유권자=소비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소비자를 우롱하듯 한국의 정치판은 유권자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 자체만 놓고 본다면 좀 더 정치적으로 변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판이 더 '정치적'으로 닳고 닳아야 할 필요는 없다. 즉, 진보신당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방식 역시, 오옹 님이 갈구하는 그런 방향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국민과 정치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정직하게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방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서로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욕하는, 그런 '친서민'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010-08-02

2010 지산 락 페스티벌 회고(1)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서는 '나는 내가 루저라고 생각해'이다. 일종의 '루저-되기'인데,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음악의 생산자 및 수요자가 사전적 의미에서의 루저, 즉 사회적 낙오자는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장기하의 중얼거림과 칭얼거림의 경계는 한없이 좁아진다. 중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락 페스티벌에서 꼭 빠른 템포로만 노래 부르라는 법 있나요 어쩌구 저쩌구 칭얼거리는 멘트를 날리고, 숨이 턱까지 받쳐 헉헉거리며 돌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의 대변인. 하지만 정작 관객들은 '미미 안 나왔어? 미미 안 나와? 그 춤 안 춰?'라고 투덜거리고 있었으며, 그걸 짐작한 장기하도 '스페셜 게스트는 없습니다'라고 못을 박았지. 장기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모니터로 본 동영상 속의 그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은 밥 딜런이 일렉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이런 음악'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 '저런 음악'을 들려주는 것과 '이런 동영상'을 '직관'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그냥 내 음악입니다'를 들려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일 수밖에 없다. 해상도도 다르고 화질도 다르고 음색도 다른 각자의 스크린을 머리 속에 넣고, 그 원본과 비교하여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관람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워 죽을 것 같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10-07-25

그냥 몇 가지 의문

군대가 사람 죽이는 곳 아니면 대체 뭐 하는 곳이란 말인가? 특히 전략 전술의 결정에 참여하지 않는 사병들이 군대에서 배우는 것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타인의 무력 집단을 살해하는 법 아닌가? '대한민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결국 시험 보는 기술일 뿐이다'라는 말과 논리적으로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2010-07-17

김규항 - 진중권 논쟁

김규항은 진중권이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자유주의자로 지칭하고 있다. 애초에 이 '논쟁'이 시작되게 된 배경을 보면 그렇다. 문제가 된 칼럼 "오류와 희망"의 단락을 읽어보도록 하자.

그 에피소드는 대중성 강박에 빠진 진보신당이 보여 온 무수한 프레임 오류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①심지어 진보신당은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②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③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원문자 강조는 인용자.


굳이 원문자 강조를 해가면서까지 이 문단을 적시하는 이유는, 이 속에 등장하는 논리적 비약을 정확하게 잡아내기 위해서이다. 하나씩 따져보기로 한다.

김규항이 말하는 '자유주의자'의 개념 정의가 '전진'이라는 진보신당 내 정파와 입장을 달리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면, 진보신당은 촛불 이전에도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당내 정치에는 과문하지만, 적어도 전진이 촛불 이전부터 다수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①에 등장하는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같은 그룹"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진보신당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애매했고, 그 약점은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공식 명칭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①과 같은 이유로 자유주의자로 규정된 진중권은 ②와 같이 촛불 현장에서 활약하여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 결과 정당의 인지도를 높이고 신규 당원들을 끌어모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유입된 당원들 중 상당수가, 굳이 말하자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실험이 실패한 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던 구 여당의 지지층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현재 진보신당의 당내 여론은 당내 과격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놓고 본다면 ③과 같은 비판은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문장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진보신당 내에서도 진보신당이 이른바 '빅 텐트'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심상정의 경기도지사 탈퇴를 그러한 차원에서의 사전 포석으로 해석할 여지가 존재하므로, 김규항의 비판은 그 말 자체로서는 충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③에 등장하는 '자유주의 정당'이라는 어구의 '자유주의'와, ①과 ②에서 진중권을 지칭할 때 쓰인 '자유주의자'의 '자유주의'가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냐이다. 그 지점에서 이 칼럼이 내재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비약을 관찰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중권이 자유주의자라고 비판받은 이유는 전진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전진과 나는 생각이 비슷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지 않아서이다. 그러한 수준의 자유주의를 편의상 '자유주의 A'라고 부르기로 하자. 한편 진보신당의 정체성과 어긋난 정책 및 선거 전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심상정 뿐 아니라 노회찬도 선거 후보 때려치우고 '반 MB 전선'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는 그런 소리 말이다. 김규항이 ③에서 비판하는 신규 유입 당원들 중 적잖은 수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자유주의 B'라고 해보자.

자유주의 A와 자유주의 B사이의 간극은 대단히 크다. 전자는 진보신당의 정체성 내에서 그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이견을 놓고 생기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진보신당의 존립 이유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규항은 '자유주의자' 진중권의 활약으로 인해 진보신당이 숫제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슬쩍 모른채 뒤섞어버린다.

문제는 김규항 식으로 정의된 자유주의 A에 나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다. 전진의 이념적 정체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진보신당에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규항이 자유주의 A를 지칭할 때처럼 말한다면 진보신당 내에 자유주의자가 아닐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게에서 심상정 자진탈당하라고 목소리 드높이는 그 20여 명?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심상정 노회찬 두 사람 모두 전진 소속이 아니니까 그 둘도 자유주의자일 테고, 흐음….

말하자면 김규항은 '자유주의'라는 테마에 대한 논쟁의 수준을 대단히 유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회주의 만세, 라고 선언하지 않으면 자유주의라는 식이다. 그런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김규항과 같은 식의 잣대를 누군가 들이밀 때, 울컥 하는 심정에 '그래, 나 자유주의자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에 휩싸이지 않을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 사회주의, 결국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걸까?

김규항 식 기준을 놓고 볼 때, 심지어 그 비난을 무릅쓰고 선거를 완주한 노회찬조차도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실천이 아니라 선언에서 제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선거와 투표는 후보자와 유권자가 임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체성 시험의 장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실질적 정치적 지향성을 명확하게 판가름해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보신당 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 B'의 문제점이다. 그런데 김규항이 비판하는 '자유주의자' 진중권 및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려"운 노회찬만 해도, 그 '자유주의 B'와의 갈등을 뼈가 시리도록 겪어왔고 또 이번 선거에서도 겪지 않았던가.

선언의 대상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닌 정치적 목표로서의 사회주의를 상정한다면, 그것이 '자유주의 A'가 되어버리는 것은 현실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며 정치 세력 및 정치인으로서는 그것을 감내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그 어떤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존립 이유를 포기하는 결정과 혼동될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김규항의 '자유주의자'라는 비난은, 한 칼럼니스트로서 택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하고 게으른 선택일 뿐 아니라, 진보신당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화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심지어 최장집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재평가 흐름과도 무관한, 한낱 사변적 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010-07-16

군대등급제

대체 이런 발상을 어떻게 떠올렸고 왜 추진하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도입된다면 사병 인권 문제는 이전에 비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군대는 군인들의 부모 입장에서 '무사히 갔다 오기만 하면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훈련소에서 똥을 먹이는 것 같은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어지간한 군대 내부의 문제 등에 대해 굳이 부모들이 날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모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낼 경우 자녀들이 보복적 조치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에서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가 자녀의 취업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보자. 부모들은 자녀의 군생활 그 자체에 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물론 아주 힘있고 돈있는 집에서는 군대에 자녀를 아예 보내지 않겠지만, 핵심은 어중간한 중산층 자녀들과 그들의 장래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부모들이다. 그런 부모들이 자녀들의 군생활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군대등급제 자체를 찬성한다는 말은 아니다. 애초에 저런 발상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국민에게 왜 국가가 등급을 매기고 그것을 사기업에 제공하기까지 하는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정책적 결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낳을 또 다른 효과에 대해 고려해볼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군대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사병들의 현실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군대등급제는 본의 아니게 바로 그 지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0-07-01

중국과 인도의 육식 문제

나야스님이 지적해주신 글에서 얻은 자료를 통해 중국과 인도의 육식 상승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세계식량농업기구의 2009년 보고서(PDF)를 인용한 나야스님은 "중국인들은 2005년 기준으로 1인당 59.5kg의 육류와 23.2kg의 우유, 20.2kg의 계란을 섭취하였다. 같은 통계에서 한국은 세 품목 각각 48.9kg/26.8kg/9.9kg을 소비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PDF 파일의 135-139페이지에 등장하는 표에 바로 그 내용이 적혀 있다.

문제는 "같은 통계에서 한국은 세 품목 각각 48.9kg/26.8kg/9.9kg을 소비하였"다는 것을 확인한 나야스님이 중국인들은 "이미 더 많이 먹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한국인만큼" 고기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 소비량만을 놓고 보면 2005년 현재만 놓고 보더라도 중국인들이 한국인보다 약간의 육류를 더 소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안의 본질과는 큰 관련이 없다.

중국의 육류 소비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본토'와 그 외의 다른 지역을 우선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중국요리는 한국과 달리 동물성 지방, 특히 돼지기름을 많이 사용하며 그 외에도 다양한 육류 첨가가 많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볼 때 중국 본토에서는 1인당 고기를 59.5킬로그램, 우유를 23.2킬로그램, 달걀을 20.2킬로그램 소비하였다. 반면 홍콩에서는 각각을 무려 134.2킬로그램, 58.2킬로그램, 11.6킬로그램 소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 다른 중화권과 비교해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달걀을 제외한 다른 육류의 소비에서 중국 본토는 대만, 마카오, 홍콩의 소비량에 미치지 못한다.

동시에 중국 본토의 육류 소비량이 1995년 기준 1인당 38.2 킬로그램에서 2005년 기준 59.5킬로그램으로 성장한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매년 4.5퍼센트씩 성장하여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육류 섭취 증가를 이루어낸 것이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경제성장을 충분히 이룬 다른 중화권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들의 육류 섭취는 (비록 그것이 현재의 한국보다 많다고 해도) 아직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고기만 놓고 보면 38.1 킬로그램에서 48.9 킬로그램으로 그리 큰 변화가 없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육류 섭취량이 어느 정도 안정세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유와 달걀의 섭취량 증가 역시 그리 괄목할만한 수준이 아니며, 이것은 한국이 양적 경제성장을 달성한 후 이른바 '웰빙'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자료만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한국과 중국의 경제 성장 및 식생활의 패턴이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표에서 인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138페이지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 표에서, 인도의 육류 소비는 인상적인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인도인들은 고기와 달걀 모두를 거의 먹지 않으며, 다만 우유만을 집중적으로 마신다. 1995년 기준으로 1인당 우유 소비량은 57.7킬로그램인데, 2005년에는 그것이 69.5킬로그램으로 증가하였다. 아무튼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고 있다.

대신 인도에서는 닭과 오리 종류의 육류 소비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물론 닭은 대단히 효율적인 단백질 공급원이며 오리 역시 그와 비슷하겠지만, 인도인들이라고 해서 '모든 육류'를 안 먹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인도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5년 연간 닭고기 소비량은 47만 8천 톤이었지만 2001년이 되면 그 수치는 140만 톤으로 늘었다. 나머지 육류 소비가 제자리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매년 20퍼센트씩 상승하는 닭고기 소비 증가에 힘입어 인도의 육류 소비는 1995년 이후 매년 4.8퍼센트 가량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출처: "Indian Meat Consumption", Free wheeling

1995 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에서 매년 4% 가량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결과 10년만에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육류 소비를 보이게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소를 키우지만 숭배하기 때문에 잡아먹지 않는 인도라고 해서 사정이 그렇게 밝지는 않다고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식용으로 소를 키우는 과정이 가장 많이 비판받고 있으며 닭고기는 쇠고기에 비해 훨씬 '효율적'인 단백질 공급원이지만, 17억 인구가 먹기 시작한다면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를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는 중국에 비해 지금도 훨씬 덜 육류를 섭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계 인구순위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두 나라에서 이토록 빠른 속도로 육류 섭취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긴장할만한 일이다.

2010-06-23

한편 안희정과 이광재는

김두관과 달리 좌희정 우광재는 이번 선거를 통해 '부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의 포스트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 '정통 친노'들은 정작 선거 과정에서 그리고 그 뒷풀이 과정에서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일을 상당히 꺼리는 편이다. 대신 그들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세대론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려고 시도한다.

- 친노 세력의 부활이란 분석도 있는데요.

이번 선거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을 맺었던 분들만이 아니라 (반대로) 오세훈 시장도 당선됐습니다. 저는 (선거 결과를) 세대 에너지의 표출로 봅니다. 1971년에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지 꼭 40년 만에 오세훈 시장을 비롯해 40대가 정치의 전면에 부상했죠.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8·15와 6·25를 겪었습니다. 시련이 잠재력을 만듭니다. 대학 시절 광주항쟁과 군부독재의 탄압을 겪으면서 치열한 삶을 산 386세대도 이와 같다고 봅니다.”

"[광역단체장에 듣는다]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자"(경향신문, 2010년 6월 19일)


안희정의 경우는 좀 더 감성적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세대론을 강조한다. 그가 썼던 강렬한 어휘인 '폐족'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온 후 다음과 같이 이번 선거의 의의를 정리한다.

-젊은 광역단체장들이 당선되면서 40대 기수론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켰던 세대, 보릿고개를 넘겼던 세대가 바로 우리 부모님 세대입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리더십이 ‘박정희식 리더십’이었습니다. 이제 40대 중후반, 50대 초반에 진입한 산업화 세대의 후예들이 대한민국 전면에 나서서 새로운 21세기 대한민국 리더십을 형성해야 하고, 그게 바로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국민들께서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으로 봅니다.”

-40대 지도자들의 특징이 이른바 ‘박정희 리더십’과 다르다면.

“부 끄러움을 아는 세대라고 할까요. 우리 부모님 세대는 산업화와 전쟁을 겪으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생존의 세대였잖아요. 총알이 빗발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겪은 그런 세대에게 예의염치와 시민의식을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들은 그런 부모님 세대가 형성시켜준 물질적인 기반 위에서 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 자기가 한 말을 뒤집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세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바탕 위에 룰을 만들고 그 룰을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광역단체장에 듣는다]안희정 충남지사 당선자(경향신문, 2010년 6월 10일)


지난 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안희정은 그 주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가 이번 선거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나요.

민주정치 10년 동안 해왔던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세종시 건설, 지방재정의 확충, 수도권 과밀화 해소를 위한 수도권 규제정책 추진, 양극화 시대와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대비한 복지재정 확충 등 민주정부의 정책이 이명박 대통령 들어서는 모두 다 거꾸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민주정부 10년에 대해, 민주정부 10년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그들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비교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같은 인터뷰


노무현 김대중 시대를 묶어서 '민주정부 10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유의할 것. 게다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심판을 받았으되, 이명박과 비교해서 조금씩 용서를 받았다는 식의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유독 인터넷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던 '친노 장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친노 장사'라고 불릴만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던 정치인과 정치세력은 단 하나다. 나머지 민주당 계열은 그 세력이 불러일으키는 노풍의 이익을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역풍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나서지는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그렇다. 내가 굳이 '친노 장사'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이유는 실제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오른팔과 왼팔조차도 '노 전 대통령의 억울한 죽음, 검찰에 의한 정치 타살, 민주주의 압살' 같은 극단적인 수사를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 좌희정과 우광재는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큰 인물'이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지난 정부의 과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정치자금법 관련하여 전과가 있거나 당장 도지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 정치인들이긴 하지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인터넷에서 난리치는 '유빠+노빠'들보다 이 정치인들의 태도가 훨씬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다. 미련을 못 버린 당신들이 노 전 대통령의 유해를 들고 저주와 분노의 정치를 계속하고자 할 때, 그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두 보좌관은 다 털어버리고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 좀 하자는 말이다.

2010-06-18

친노 장사와 보수 결집

내가 지난번에 쓴 칼럼인 "이제 그를 보내드리자"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정치적 상징'으로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계속 논하는 것이 정치공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내 블로그에 리플을 다는 어떤 분은 계속 그 주장을 "노무현이 지역구도의 버팀목이 되니 이제 노무현은 금칙어"라고 요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노무현 그 자체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무현을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세력과 전략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의견을 펴는 '개혁적 네티즌'들의 독해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협하며,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할 사안을 단순한 감정 싸움으로 몰고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왜 정치 세력들이 노무현 타령을 하면 할수록 정치 구도는 노무현이 바라고 있던 바와 다르게 흘러가는가? 이것은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 입증의 문제이므로, 6·2 지방선거 이후 여권 혹은 보수층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친박의 좌장 노릇을 하다가 박근혜를 버리고 이명박에게 붙어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 및 원내대표 자리를 꿰찼지만, 정작 선거가 망해버려서 난감한 처지에 이르게 된 김무성의 말을 들어보자.


패인은 뭐라고 보시나요.

“제일 큰 건 야권은 후보 단일화를 했고 여권은 정체성을 같이하고 당을 같이하면서도 분열됐다는 겁니다. 공천 잘못으로 한나라당 후보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요. 친이·친박의 당내 갈등 양상에 대해 국민이 큰 실망도 했고….”

6·2 이후 정치를 말한다 ② 김무성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중앙일보, 2010년 6월 14일)


한나라당과 범 보수진영의 내부 분열이 지방 선거 패인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결을 회복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가령 '범 보수'에 속하지만 한나라당에 투항하지 않고 독자 세력을 견지하고 있는 이회창 같은 경우, 이런 '분열에 따른 패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이회창은 이번 선거 결과를 보며 앞으로 어떤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져선 안 될 선거에서 졌다고 하셨는데요.

“저나 당이 ‘지지는 않겠지’란 안이한 태도를 가졌던 게 제일 잘못이죠. 근본적으론 현 정권에 대한 응징 심리가 친노 세력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중략)…

수도권에선 보수도 진보 진영처럼 선거 연대를 할 수 있었을 텐데요.

“보수 쪽은 그런 필요를 덜 느꼈죠. (진보 진영의) 정당 간 연합이나 연대가 쉽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좀 예상 밖이었다고 인정합니다.”

6·2 이후 정치를 말한다 ③ 당무 복귀하는 이회창 선진당 대표(중앙일보, 2010년 6월 17일)


이회창의 선거 이해는 간단하다. 이쪽도 저쪽도 분열되어 있으므로 선거 연합이 안 될 줄 알았고, 그래서 더 힘이 강한 쪽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저쪽은 뭉쳤고 이쪽은 안 뭉쳐서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회창은 그 키워드로 '친노'를 꼽고 있다.

정치세력이 표상하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권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이익 연합의 결성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 18로군이 각자 노리는 이익은 달랐어도 '동탁을 잡고 한나라를 지키자'라는 대의명분을 세워서 모일 수 있었듯, 각기 다른 이익집단을 포괄시킬 수 있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 패배 원인을 '친노의 결집'으로 보고 있는 이회창 같은 보수세력에게, 자신의 진영도 결집해야 한다는 당위가 주어질 때, 그가 택할 수 있는 레토릭은 무엇이겠는가?

실제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친노'의 깃발을 적극적으로 휘두르는 세력은 사실 많지 않다. 유시민과 국참당의 선거 전략이 그것이었고, 다른 '범 개혁 진영'에서는 그런 대립구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교조를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으로 교육감 선거를 치르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친노'가 한나라당과 범 보수가 아닌 다른 모든 세력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딱지를 붙여서 상대방을 하나의 괴물로 등장시키고 아군의 결집을 도모할 수 있다면 이회창이나 다른 파란색 진영에게는 그러한 사실 관계가 문제될 리 없다. 따라서 '친노'라는 레토릭은 현재로서는 정치적 이익을 전혀 가져다주지 못하며, 다만 갈라진 범 여권에 필요한 접착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나는 '정치에 저도 관심 많고요, 그러니까 한나라당은 없어져야 하는 거고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관심'의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노동의 정치까지 포함하는 '넓은 정치'에 대해 무지한 것은 넘어가더라도, 의회에 진출한 보수정치 세력들 사이에서의 움직임과 갈등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친노 세력'이라는 말은 당연히 '반노 세력'에게 결집해야 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왜 이것을 설명까지 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정치에 관심은 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인터넷 세상에서 말이다.

나는 노무현이라는 개인에 대해 지금 당장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적' 감정을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세력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런 자들의 정치적 기동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반대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같은 편인데 서로 팀킬하지 말자'느니, '순망치한'이라느니, '어차피 중간까지는 가는 길이 비슷하다'느니 하는 어설픈 레토릭으로 정치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세력과 집단 사이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중심에 놓고 보면,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단지 사람들에게는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0-06-16

참여연대 서한 논란

'정부'와 '국가'는 다르다. 정부는 국가에서 필요한 공적인 업무, 즉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 결성된 여러 집단의 합집합일 뿐이다. 행정부만으로 축소시켜놓고 보자면 더욱 그렇다. 정부의 입장은 한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 나라에서 모든 의견이 정부의 것과 일치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부의 이익에 반하거나, 정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국가의 무언가를 침해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보고 새삼 놀라고 있다. 극우 신문들이 그런 레토릭을 구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나름 합리적이고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비슷한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정부가 곧 국가인 것은 왕조나 일당독재 국가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합법적으로 교체할 수 있는가 없는가이고, 그 개념은 근본적으로 국가와 정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성립한다.

참여연대의 행동으로 인해 이명박 정부가 실제로 망신을 당했는지도 미지수이지만(유엔에는 지금도 수많은 NGO들이 자국 정부의 입장과 반대되는 로비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런 미비한 사건에 '전 세계의 이목' 따위가 쏠리는 일 따위 전혀 없으니 안심하시길),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을 시민사회에서 문제삼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떠들지만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체득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부는 국가가 아니다. 오직 국가만이 한 영토국가의 범위 내에서 공공선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가, 라는 문제를 젖혀두고 생각해보자. 설령 저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다 해도, 말 그대로 '비정부단체'인 NGO에서 정부의 공식 입장과 다른 견해를 UN에 제출하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인가? 그것이 대한민국의 국격과 국익에 해가 된다는 발언이야말로 한국의 민주주의 이해 수준을 적나라하게 폭로함으로써 한국의 국격을 손상시키고 있다.

2010-06-14

이제 그를 보내드리자

나는 이제 우리 모두가 그를 진정으로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적대시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지는 보수 진영도 그렇거니와, 노 전 대통령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동정심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자 하는 일부 ‘개혁·친노 세력’도 그렇다. 노무현에 대한 추모와는 별개로, 이제 더는 그가 정치적 소재로 이용되지 않았으면 싶다. 그것은 떠난 사람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예의가 아닐 뿐더러, 정치적으로도 또 정치공학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가장 즉물적인 차원부터 시작해보자. 노 전 대통령을 ‘정치적 상징’으로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반노(反盧)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한나라당과 그 지지세력을 결집시킨다. 현재 가시화되고 있는 한나라당의 내부 분열을 매꿔주는 ‘외부의 적’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진정 변화하거나 한국 정치에서 차지하는 지분을 크게 잃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나라당이 분열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노무현은 그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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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에 보낸 원고입니다. 한겨레를 읽는 친노 성향의 '시민'들을 예상 독자로 삼아서 쓴 글입니다. 리플은 한겨레 사이트에 남겨주셔도 되고 여기에 달아주셔도 괜찮습니다.

2010-06-03

진보는 분열로 망했고, 보수도 분열로 망한다

강남3구에서 몰표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한명숙 후보의 패색이 서서히 짙어가고 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선거인 수가 많은 세 구에서 밀집된 표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좋은 징조가 아니다. 하지만 이 글은 서울시장 투표의 결과와 상관 없기 때문에, 나는 지금부터 이번 선거의 갈무리를 시작하려 한다.


한나라당: 친박 없는 친이의 몰락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이변은 지난 지방선거와 비교했을 때 민주당,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 한나라당'의 색이 칠해지는 영역이 훨씬 넓어졌다는 것이다. 아주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전통적인 한나라당 텃밭인 경상북도 구미에서, 이번에는 23명의 시의원 중 한나라당은 9석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14명 중 2명은 진보 의원이며, 그 중 하나는 28세의 초선 무소속 김수민 의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이렇게까지 극적인 변화를 '민주당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의석 배분을 살펴보자. 진보 성향 무소속 1석, 민주노동당 1석, 한나라당 9석, 한나라당 공천탈락한 무소속 7석, 친박연합 4석, 민주당 1석이다(이 자료는 김수민 의원의 트위터 @sumin_k 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한나라당 공천탈락한 무소속과 한나라당을 더하면 15석 아니냐는 말을 누군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천에 탈락했으면 선거에 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무소속을 다 더하면 8석이고, 그것은 전체 한나라당 9석과 거의 대등하다. 한나라당 깃발 꽂으면 당선되는 시대가, 구미에서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한나라당'이라는 단어에 속아넘어가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은 단일한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그 속에는 적어도 두 개의 커다란 정치 세력이 상호간의 이질성을 억지로 봉합한 채 묶여 있다. 일반적으로 그 세력들은 '친이'와 '친박'이라고 통칭된다.

'친이'는 이명박 쪽에 줄을 선, 서울 특히 강남3구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부동산 소유 계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는 정치세력이다. 반면 '친박'은 박근혜에게 줄을 대고 있으며 경남 경북의 각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뿌리를 찾는 일종의 토호 세력의 정치적 구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친박과 친이는 원래부터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세력이었지만 정치적 이익을 위해 아직까지는 하나의 정당을 이루고 뭉쳐 있다. 하지만 친박과 친이가 서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종시 문제이다. 수도권에 기반을 둔 친이와 경상도에 기반을 둔 친박은 세종시 이전을 두고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복당한 박근혜가 천안함 침몰 전까지 이명박을 몰아붙인 레파토리가 무엇인지 떠올려보면 금방 그 싸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선거가 막 시작될 당시, 이대로 가면 서울 외 지역에서 판세가 만만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여당의 선거 지도부는 박근혜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냈으나, 이미 세종시 문제로 '비 맞으면서 죽은 애인 기다리는 미친 여자' 취급이나 당한 박근혜가 세종시 수정안을 내려보내겠다는 친이쪽에 힘을 보태줄 리 만무한 것이었다.

그 반대로 생각해보면, 앞서 우리가 예로 든 구미 사람들은, 박근혜가 직접 와서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겠다고 약속해주지 않는 한, 한나라당 따위 찍어야 할 이유가 없다. 구미 사람들이라고 파란 색 보면 헉헉거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구미 사람들도 나름의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지금까지 한나라당을 선택해 왔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박근혜가 없는 한나라당, 세종시 원안 대신 알맹이 빠진 수정안을 내려보내는 한나라당은 더 이상 지방 유권자들에게 한나라당이 아닌 것이다.

앞으로 한나라당의 내분이 어떻게 수습될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확실하다. 이미 한나라당의 내분은 지방선거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박근혜는 수도권의 지지 없이 어떻게 대선을 치를 것인가, 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한나라당의 선거를 완전히 주저앉힐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달성군에서 붙박이로 박근혜가 선거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소속 군수후보가 당선되는 파란이 빚어졌지만, 그 패배는 박근혜만의 손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한나라당'이라는 형식 안에서는 세종시 문제에 대해 지역 주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그러한 민심의 흐름은 설령 박근혜라고 해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거세다. 세종시 원안 플러스 알파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논리적 기반을 다져놓은 박근혜라 하더라도 '한나라당', 즉 이명박 정부의 형식 속에 있는 한 예전과 같은 지지를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박근혜의 실패이기 이전에 한나라당의 실패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동시에, 결국 강남3구라는 하나의 괴물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친이계의 빈약한 정치적 생명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번 서울시장 선거까지는 강남3구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 3시까지만 해도 한명숙이 우세했다는 사실이 드러내 보여주듯이, 이미 서울 내에서도 강남과 비 강남 사이의 갈등은 커져가고 있고, 강남은 점차 포위되고 있는 형국이다. 친이계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오세훈의 당선으로 가까스로 체면치레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두 세력을 동시에 품고 있는 한나라당의 갈등, 친이와 친박이 안고 있는 내재적 문제들, 모두 지금부터 시작이다.


민주당: '국참의 난'은 끝났지만

민주당은 크게 세 가지의 정치 세력이 경합을 벌이는 지역이었다. 우선 외곽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기존의 정당을 흔드는 일에 익숙한 유시민과 그의 수하들, 즉 국참당. 한편 노무현 정권과 진짜로 명운을 함께했던 직계세력들, 즉 폐족들. 마지막으로 대충 목숨은 부지했지만 지금까지 지지부진하게 살아숨쉬고 있었던, 많은 분들이 못마땅해하는 구 민주당파.

심상정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이 이론의 여지 없는 2위로 자리매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유시민이 상주 노릇한다고 언론에 나오고 대선 주자니 뭐니 실컷 재미보고 있을 때 아무 말도 못하던 노무현의 측근들이 화려하게 부활해버리면서, 이번 지방선거는 민주당의 내부 갈등의 진행에서 한 기점이 되었다.

안희정은 충남에서, 이광재는 강원도에서 도지사가 되었다. 리틀 노무현 김두관은 아예 무소속으로 나와 경남에 회색 깃발을 꽂았다. 반면 유시민은 대구가 아니라 경기도를 택했는데, 본인의 뜻 같아서는 그냥 서울에 나오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튼 경기도에 나와 김문수에게 패배하고 나서 영 모양새가 이생해졌다. 노풍(盧風)이 불긴 불었는데, 그게 유시민에게 유리하게 되지는 않은 것이다.

유시민의 계획은 수도권에서 자신의 전국구적 득표력을 한껏 과시한 다음, 그것을 통해 민주당의 당권을 쟁취하고, 민주당의 깃발과 조직력을 이용하여 대선에 나오는 것이었을 터이다(그게 아니라면 대구에서 나왔거나 정치를 그만뒀겠지). 하지만 본인이 당선되지 않았고, 민망하게도 친노 직계들이 각자 지역에서 한 자리씩 차지해버림으로써, '상주 노릇' 하던 외삼촌은 뻘쭘하게 됐다. 인정받지 못한 양아들과 가장 아끼던 두 동생들이 떡하니 살아서 돌아왔으니까.

한명숙의 경우는 다소 애매하다. 강남3구의 벽에 가로막혀 대단히 안타까운 패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그는, '노무현의 남자들'과 달리 서울시장에 나왔고 수도권이 아닌 지역을 자신의 기반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한명숙과 그를 지지한 민주당 중앙 세력들이 결집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지역을 기반으로 삼아버린 친노 적자들과 쉽사리 연합하기 어렵다. 앞서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세종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노무현'이라는 기표의 단일성, 그 순수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민주당의 구성 세력들은 서로간의 갈등을 최대한 봉합하고 드러내지 않는 쪽을 택해왔다. 앞으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유시민은 나름 선전했지만 결국 도지사가 되지 못했다. 한명숙은 서울시장 후보였고 대권을 노리고 있다면 세종시 원안에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고너길, 리건, 코딜리아는 각자 지역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종시 원안 찬성 쪽으로 기울어진다. 게다가 그 편이 '노무현의 뜻'을 표방할 때에도 훨씬 유리하다.

강원도의 세종시에 대한 입장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희정과 김두관은 세종시 수정안에 찬성할 수 없고, 민주당이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려 한다면 반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한명숙이 뭔가 큰 뜻을 품고 있다면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는 것은, 그가 이 선거에서 확인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배반하는 일이 될 것이므로, 어렵다. 민주당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승리하고 그 승리의 수혜자가 친노 적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지기반 없는 진보정당의 미래

그리고 진보신당으로 돌아와보면 상황은 매우 암울하다. 유시민 지지자들은 심상정이 사퇴까지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무효표가 얼마니 그 중에서 심상정 찍은 표가 얼마니 이러고 있다. 머리로는 노회찬을 찍었지만 가슴으로 한명숙 찍었다는 신앙 간증은 또 왜 이렇게 많은가. 전국 비례대표 3%를 가까스로 넘겼고, 노회찬이 14만 표 이상을 얻었지만, 진보신당의 미래는 암울하다. 과연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난 진보신당의 약점은 확실한 지지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당으로서 회복하기 힘든 약점이다. 민주노동당은 인천에서 두 명, 울산에서 한 명의 구청장을 배출했다. 단일화 문제를 염두에 두더라도 훌륭한 성과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일부 기초의원을 제외하고는 자체적으로 그 어떤 당선도 낳지 못했다. 남은 것은 숫자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지지율과 득표 뿐이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가 전통적인 진보정당의 지지기반을 잃어버린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민주노총, 각 지역 노조, 지역 단체 등 다양한 집단들이 아직 두 정당 사이에서 민주노동당을 택한다. 그리고 그것은 후원금과 득표와 기타 여러 가지 요소들의 실질적 차이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심상정을 비난하지 못하겠다. 심상정이 사퇴를 선언한 이유 중 하나는 민주노총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상정이 사퇴하자 민주노총은 다시 심상정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유시민을 진정 싫어하고 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진보신당의 대표였던 사람이 지지 유세까지 했다는 것이 너무도 짜증스럽지만, 민주노총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진보신당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진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노회찬은 열심히 트위터도 하고 쌍권총도 차고 다니면서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젊은 사무직 노동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 자체는 유의미하고 매우 바람직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 젊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이미 다양한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면 그러한 시도는 더욱 큰 결실을 낳았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노회찬이 부딪친 '현실'은 바로 그런 현실이다.

14만 표.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노회찬의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를 감안하면 턱없이 낮다. 왜일까? 뚜렷한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 채 노회찬의 개인적 인기에만 의존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회찬에게는 '누가 되건 말건 노회찬'이라고, '누가 되건 말건 노회찬이 되는 것이 내게 이익'이라고 믿고 있는 그런 극렬한 지지층이 없었다. 그가 노리고 있던 지지층은 '그냥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믿는, 유시민과 한명숙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범 야권 연대'면 다 좋다고 보는 조직되지 않은 사무직 노동자들이었다.

노회찬의 문제는 한명숙과 단일화를 하지 않은 것 따위가 아니다. 한명숙과 단일화를 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지지층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노회찬의 문제다. 나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은 선거 국면에서 한 줌도 안 되고, 실제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아니다. 민주노총처럼 확실하게 돈과 표를 가져다 주는 어떤 조직이 필요하고, 그것을 진보정당의 토대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진보신당은 향후 대선까지 생존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한 지지기반은 반드시 지역 단위일 필요는 없고, 직능별 단체일 수도 있다. 가령 인디밴드 조합이라거나, 출판 노동자 조합이라거나, 자유기고가 연맹 같은 것들. 실제 존재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것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또 저런 집단들이 없고(있어도 도드라지는 활동과 조직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그래서 조직되지 않은 지식노동자들은 '반 MB 연대'나 '정권 심판론' 같은 공허한 레토릭에 휩쓸려 비판적 지지론의 피해자가 되거나 도리어 가장 큰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분열은 그래서 사실상 '분열'이 아니다. 하지만 그 분열을 통해 진보신당은 지지 기반을 잃어버렸고 민주노동당은 파괴력 있는 대형 정치인을 상실했다. 진보신당의 두 에이스가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개별적인 행보는, 진보신당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진정한 갈등: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진보신당의 경우를 논외로 한다면 두 거대 보수정당은 공통적으로 세종시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친박과 친이의 갈등도 그렇고, (앞으로 벌어질 것이라 예상되는) 한명숙 편에 선 구 민주당계와 정통 친노 세력간의 갈등도 그렇다. 결국 그 모든 갈등은 수도권과 비 수도권의 격차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며, 세종시 문제는 그 갈등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박이 등을 돌리면서 한나라당은 세종시 문제를 놓고 서울 경기 외 지역을 설득할 수 있는 화법과 창구를 상실했다. 그 빈틈을 타고 노무현의 직계 후손들 뿐 아니라 대다수의 무소속 기초단체의원 및 지자체장이 탄생했다. 그 결과 탄생한 민주당의 부활한 친노들은 역시 같은 갈등을 민주당 내에서 재현할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예측한다. 그들 모두 각자의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대권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시 문제로 대변되는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문제에서 그들은 단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진보정치는 혼미에 빠져 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을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했던 진보신당은 지지층의 이탈과 지역 기반의 부실함을 넘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반 MB 연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주노동당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신당과 비교하면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 반대로, 전통적인 지지 기반 외의 영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로만 한국 사회의 갈등의 축이 집약되면, 결국 어느 지역에 어떤 공사를 하느냐가 선거의 쟁점이 되어버린다. 지방에서 토건질을 하느냐 서울에서 토건질을 하느냐를 놓고 유권자들이 싸우는 꼴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진보정치가 진정 진보정치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와 다른 제2의 좌표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진보 양당의 선거 결과를 놓고 볼 때, 아직 그 가능성은 묘연하기만 하다.

이 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요약해보겠다. 첫째, 한나라당 이겼다고 좋아하지 말자. 한나라당도 하나의 한나라당이 아니고, 민주당 역시 하나의 민주당이 아니다. 둘째, 진보신당의 성적표가 실망스럽다고 울지 말자. 그 정도 나온 것도 현실을 놓고 볼 때 감지덕지하다. 셋째, 경기도에서 졌다고 진보신당 지지자들에게 화 내지 말자. 유시민은 애초에 민주당의 반란자였고, 그래서 조직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결정적으로 노무현의 유지 승계 때문에 경기도민들이 원하는 '세종시 원안 반대'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지도 못했다. 심상정을 탓하지 말고, 유시민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포지션을 탓하라는 말이다.

개표 방송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벌써 해가 떴다. 앞으로 불어닥칠 폭풍이 예상되는 가운데, 나는 정말 이것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 사회의 주요한 갈등의 축은 이미 수도권과 지방의 대립으로 바뀌었고, 진보정당은 그것을 넘어서는 제2의 축을 발견해서 그것을 스스로의 지지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허접한 정세 분석 및 예측이 아니라, 바로 저것이며 그게 전부다.

2010-06-01

다시, 용산과 노회찬

영화 <더 리더>의 원작 소설을 나는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옛 번역본으로 읽었다. 새로 나온 판본과 다를 게 없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그 책의 뒷부분을 보면 역자 소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역사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끊이지 않는 논쟁이 이어지는 역사학과 달리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는 법학에 매력을 느껴 법학으로 진로를 정했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의아했다. 독일에서는 그렇단 말인가? 법학에 명쾌한 결론이 있다고?

5월 31일, 용산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법원은 1심 판결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죄를 선고하였다. 검찰의 공소 내용이 화염병으로 인한 발화를 특정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발화의 이유를 찾을 수 없으므로, 화염병으로 인해 망루에 불이 났다는 사실오인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in dubio pro reo, 불리할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한다는 형사 재판의 제1원칙은 온데간데없고, 발화 원인을 특정하지도 못한 검찰의 공소장을 따라 아들이 아비를 죽였다는 내용의 유죄가 선고된다. 발화 원인이 다른 것일 수 있다는 피고인측의 주장은 '합리적 의심'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악의 정치 재판이다. 한나라당이건 구 민주당 계열이건, 그들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 있는 건설자본의 입김을 거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오세훈도 아니고 한명숙도 아니다. 건설사들이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무죄를 선고받는 것은 그 건설사들의 돈벌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므로, 법원은 '합리적 의심'을 비합리적으로 줄여버린다. 다시 한 번 묻자. 검찰은 발화 원인이 화염병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피고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가?

나는 이성의 보편성을 믿는다. 그러나 구체적 상황에서 작용하는 '이성들'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일 것이라고 지레 가정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이성이 정치적, 역사적 구성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의 주체임을 자임하는 자들은 정치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이성적 판단의 이름 하에 포장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법학에서 그 어떤 명확한 결론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법정의 논리가 아니다. 정치의 논리로 그들은 용산 참사의 당사자들을 감옥으로 몰아가고 있다.

노회찬을 찍는 한 표는 그래서 사표가 아니다. 죽은 후에도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사람들, 살아서도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을 법의 폭력 앞에 떠안게 된 사람들을 살리는 생표[生票]다. 용산 참사의 해결은 정치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의 첫걸음은 노회찬의 지지율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오세훈에게 다섯 명의 희생자와 한 명의 경찰 대원의 이름을 묻는 바로 그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을 법원에게 또 토건족들에게 보란듯이 과시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또한 당신이 최소한의 여유가 된다면, 노회찬 선본에 지금이라도 후원금을 보내주시기를 희망한다. 벌써 오후 5시 30분이지만, 내일 선거가 끝난 이후라도 치루어야 할 여타 잔금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부끄러움 없는 돈이 모여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들을 부끄럽게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 링크를 클릭해서 많은 분들이 지금이라도, 작은 쌈짓돈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좋겠다. 나도 없는 살림에 또 5만원을 보탰다.

아직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여러 악재가 겹쳤고 예상치 못한 충격까지 받았지만, 남은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부디 모두 힘을 모아주시길.

주가가 떨어지니까 전쟁에 반대한다면

맹자 양혜왕 상편의 첫 문답. 먼 길을 온 맹자에게 양혜왕이 묻는다. “어르신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이익이 되겠군요.”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시면 대부大夫[관직자]들도 ‘어떻게 하면 우리 가家에 이익이 될까?’하고, 사士와 서민들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게 됩니다.”(맹가, 안외순 옮김, 『맹자』(서울: 책세상, 2002), 15쪽.)

천안함의 침몰 이후 북풍 몰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스페인에서 발생한 은행 국유화 사태와 맞물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환율은 크게 치솟았다. 지방선거에서 줄곧 ‘정권 심판론’을 밀어붙이던 ‘범 야권’은 호기를 잡은 듯 바로 그 지점을 문제삼고 있다. 한나라당은 전쟁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세력이며, 심지어 그것은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명숙 후보는 직접적으로 한나라당을 ‘전쟁’으로, 스스로를 ‘평화’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5월 28일 내걸린 새로운 플래카드에는 “전쟁을 막는 현명한 선택, 한명숙”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것이다.

그럼 전쟁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한나라당과 정부가 주도한 북풍 몰이가 한반도에 긴장 상태를 유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덕분에 주가는 급락했고 환율과 금값은 엄청나게 뛰어올랐다가 정부의 강경 태도가 다소 누그러들자 그에 맞추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풍을 통해 보수적인 표심을 결집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경제 지표가 흔들리는 것은 여당의 선거 전략에 전혀 이롭지 않은 현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북풍에 대한 ‘경제적’ 비판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선거용 북풍 장사질 때문에 환율이 치솟고 주가가 폭락하는 이 손해를 대체 대통령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고 말이다.

주요 경제지표만을 놓고 볼 때 그 말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환율이 오르고 주가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의 경제적 이익을 해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전쟁에 대해서는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요구되는 평화는 과연 진정한 평화일까, 아니면 일종의 님비(NIMBY) 현상처럼 ‘피 튀기는 일은 내 앞마당에서 하지 말라’는 집단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계속 읽기(한겨레 훅 링크)



* 한겨레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에 보낸 칼럼입니다. 저작권 관계상 전문을 블로그에 올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무역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한 독일 대통령이 어제 사임했습니다. 관련 기사는 여기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이라크 전쟁 당시 고위직에 있던 정치인이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안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이라크 전쟁 참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적극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주가 떨어지고 환율 높아지니까 아이패드를 지를 수가 없잖아!'라는 유치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투정 뿐 아닐까요.

2010-05-29

투표합시다?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투표합시다'라고 외치는 온갖 캠페인의 제작자들은, 그것을 본 누군가가 한나라당을 찍으러 간다고 말해도 좋은가? '예'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정치운동이 아니라 한낱 공익광고를 하고 있을 뿐이니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공익광고를 빙자한 특정한 정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운동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공익광고의 탈을 쓴 정치운동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선관위가 '선거 관리'의 탈을 쓰고 벌이는 온갖 편향적 행동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공정한 선거 관리를 위해 4대강 홍보는 그냥 두고 4대강 반대는 제지한다. 투표하자고 말하면서 한나라당 찍는 것은 안 된다는 복선을 까는 것은 원론적으로 볼 때 선관위의 그러한 행태와 다를 게 없다.

왜 '우리편'에게 항의하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런 비판을 굳이 하는 이유는, 공익광고를 빙지한 특정한 편향적 정치행위 자체가 갖는 해악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관위의 편향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공성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투표합시다'라고 쓰고 '민주당·국참당 찍읍시다'라고 읽는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들은 선관위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선관위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은 어떻게 보일까?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양극단의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는 '공정함'이라는 기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찍으면 된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찍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재 잘못된 선거 제도 및 정치 구도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한 일이 될테니 말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설득하라. 담백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번 선거와 관련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들 중 하나다.



첨언: 설령 '진보신당 찍자'는 복선을 깔고 '투표합시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비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 논지는 '공익광고가 진정 공익광고가 될 수 있는 영역을 내버려두자'는 것이다. 진보신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운동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것 역시 비판할 것이다.

2010-05-28

용산을 위해 노회찬을 지지한다

5월 27일,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트위터에 실망스러운 속보가 떴다. 5월 28일로 예정된 선관위 주최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세훈 현 서울시장이 발목을 잡았다. 직전 전국선거 득표율 10% '이상', 또는 5석 이상 원내정당의 후보, 그도 아니면 언론사 여론조사 평균 지지율 5% '이상'이어야 선관위 주최 TV 토론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규정 때문에 노회찬은 다른 후보들의 동의가 있어야 TV 토론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 자유선진당의 지상욱 후보가 모두 동의하였지만, 오세훈 현 시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TV 토론이라는 것이 생긴 후 가장 많이 초대받은 정치인인 노회찬이, 정작 본인의 선거를 위한 TV 토론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다. 대체 왜 오세훈은 노회찬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것일까? 노회찬의 지지율은 앞서 말했듯 현재 5%가 되지 않는다. 노회찬의 지자자 분포는 오세훈의 지지자 분포와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지지율, 당선 가능성, 지지자 분포 등 모든 요소를 다 따져봐도 노회찬은 오세훈의 당선을 방해할만한 요인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정한 토론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세훈은 노회찬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5월 18일 백분토론에 출연한 노회찬은 늘 하던대로 능숙한 화술과 현란한 비유를 구사하며 오세훈을 몰아붙였다. 복지 예산 증가율이 도로 건설비 증가율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사실, 무상급식이 비현실적이라고 오세훈이 말하지만 이미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드문드문 폭소가 터졌고, 오세훈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갔다. 노회찬이 다섯 사람, 아니 여섯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오세훈에게 "서울 시장으로서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할 용의는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오세훈은 대답했다. "용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오세훈이 노회찬과의 TV 토론을 회피하는 정확한 이유를 우리가 알아낼 수는 없다. 소수 정당의 후보자를 괄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TV 앞에서 자신의 정책과 공약의 허점이 드러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토론에 약한 한명숙 후보와 1:1로 대결하는 구도가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노회찬이 TV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는 작년 1월 20일 우리의 양심을 뒤흔들었던 한 사건에 대해, 서울 시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회찬이 없는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는 용산 참사도 없다. 그는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현직 시장에게 사과를 요구한 유일한 야당 후보인 것이다.

나는 선거가 이기고 지는 것을 판가름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누군가를 투표로 심판하고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파악해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오세훈을 이기기 위해 노회찬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선거를 전략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서울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용산 참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대할 수밖에 없다.

오직 노회찬만이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TV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런 노회찬이 아닌 다른 그 누구를 찍는다면, 우리는 용산 참사를 흘러가는 세월 속에 흐려져가는 기억 속에 묻어버리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삶보다 건설 자본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자본의 힘에 짓눌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은 후 차가운 시신보관소에서 영겁처럼 긴 시간 갇혀있었던 약자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그것이 서울 시장으로 대표되는 이 도시 자체의 문제임을 굳이 상기시키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노회찬을 지지하는 것은,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실존의 문제다. 나 역시 용산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용산 참사의 유가족, 제2의 제3의 새로운 용산 참사의 현장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철거민들과 연대하는 방법은,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발언 기회를 빼앗은 오세훈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며, 한 사람의 서울 시민으로서 노회찬을 지지한다.

2010-05-25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조선일보는 때로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보인다. 우스꽝스러운 운율, 싸구려 감수성, 너무도 명백한 정치적 의도. 벤야민이 말한 '정치의 예술화'를 실현하고 있는데, 그 정치와 예술 모두 저질스럽게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일보가 딴 건 몰라도 미다시는 잘 뽑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미적으로 허름한 헤드라인을 '잘 뽑는 것'으로 보는 미적 판단 수준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의식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역으로 따져 묻고 싶어진다.

2010-05-17

스타리그 승부조작 사건을 보며 한 가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일단 사건에 대해 보도된 내용부터 살펴보자.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을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게 하고 배당금 이익을 챙긴 사람은 두 명이다. 구속당한 박모(25)씨와 불구속기소된 정모(28)씨. 누군지 모를 수가 없는 프로게이머 마모(23)씨는 원모(23)씨와 함께 이 매수자들과 프로게이머들을 연결시켜준 혐의를 받고 있다. 참고기사

문제는 이 박모 씨의 직업이 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서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인 박씨는 조직폭력배 김모씨(지명수배)와 함께 작년 9월부터 올 2월까지 원씨 등을 통해 경기에 출전하는 게이머들에게 건당 200만~650만원을 주고 경기에서 고의로 지도록 사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 그게 승부조작에 관여한 주범의 직업이다.

저런 게 다 있나 싶어서 검색해보았더니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인용된 기사에 따르면 "`키주 아카데미'(kizoo.co.kr)로 알려진 이 학원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희망하는 학생 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게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부터 경기 분석과 같은 다양한 코스를 이수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고 한다. 박모 씨가 운영하던 학원이 과연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학원과 동일한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쨌건 이런 종류의 학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누군가가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돈을 내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일상화되어 있다. 일하면서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학원에서 대충 배워온 다음 직장에서 단물 빨리는 구조로 몇몇 직업군이 유지된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직업군의 반열에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요점 정리의 왕국, 사교육의 본고장, 이곳은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죽어서도 심판받기 전에 기출문제집 찾을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징그럽다.

나는 한때 누군가와의 술자리 혹은 전화통화에서 '스타리그만큼은 한국 최강자가 세계 최강자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종목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은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종주국이며,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최강국이다. 따라서 '외부'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스타크래프트의 팬들은 자생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본토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먹히지 않을 텐데'라고 힐끔거린다면 과연 락의 종주국이 될 수 있었을까?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이런 노래는 리얼 간지가 아니야'라면서 재즈의 '원본'을 수입해 듣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주어진 바로 그런 종목 하나가 스타크래프트 리그였다. 스타리그만큼은 우리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원본'이고 '진짜'였다. 그런데 그것이 왜,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뭐든지 붙잡고 쓸데 없는 수준까지 열심히 하는 한국, 혹은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가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몇 명의 용병들은 한국 선수들처럼 죽어라 연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타리그의 성립은 지극히 한국적인 풍토 때문에 가능했다. 미시적으로 파고들고, 뭐든지 기술적으로 끝까지 연마하는 풍토. 그리고 지금 '스타크래프트 학원'의 원장에 의한 승부조작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의 치명적인 약점 역시 한국적인 무언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학원에서 돈을 주고 배운 선수들은, '박은 돈'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말이다. 착잡한 마음에 단상을 한 구절 적어 보았다.

2010-05-09

이명박 경례 논란

국군통수권자가 될 수 있는 자격 여부와 군필 여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은 모병제 국가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베트남전과 관련해 징집 영장을 받은 경험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미국이어서 옳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군대를 갔다 왔냐 아니냐로만 따지는 것은 유치한 소리라는 것이다.

요점은 누군가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느냐, 그 책임 의식이 적절한 실천으로 뒷받침되고 있느냐 여부이다. 군대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 회피를 나타내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물론 고의적인 병역 회피는 나쁘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을 놓고 이명박을 비판한다면, 이명박 비판자들의 논리는 금새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에 갔다 왔냐 아니냐 같은 말초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한, 여성 대통령도 장애인 대통령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를 놓고 한 사람의 공적 인생을 평가해야 하며, 오직 하나의 징표인 '군필 여부'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현명한 담론 전략이 되지 못한다.

이명박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혐오로 문제를 끌고 들어갈 경우, 적지 않은 수의 고연령층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비아냥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이 그리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겪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이명박의 추한 외모와 그 위에 뒤덮인 명품들은, 언벨런스가 아니라 차라리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이명박을 비판하는 당신보다는 차라리 이명박에게 더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그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명박이 경례를 AM으로 한다'며 비판하는 것과, '이명박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굳이 어떤 가치를 표방하고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저 새끼는 미필'이라고 말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말하는 군필자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대한민국의 군대 혹은 그 군대에서 보낸 자신의 지난 몇 년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을 인권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부의 여러 행태는 반인권적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재수 없는 인권단체 나부랭이'의 일부로 내가 되려 비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무릅써야 한다. 하지만 군대 문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수의 남성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군대를 사랑하고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군대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욕한다. 그것은 자가당착이며, 듣는 이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화법이다.

이명박을 미워하고 싶다면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라.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명박이 그렇게 온갖 부정적인 가치를 현현하고 있는 존재라면,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사랑하고 있는 한 당신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미움은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비판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명박을 미워하기 위해 이명박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치와 지향을 지니고 사는 삶, 그러한 가치 하에 이루어지는 비판,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다.

2010-04-26

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4월 9일에 프레시안에 실린 기고문입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블로그에 올린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게재된 후 시간이 한참 되었으니, 전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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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기고] 대학생 문제인가, 20대 문제인가


기사입력 2010-04-09 오전 10:00:49

나는 현재 이른바 '20대 담론'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명목상으로는 '20대 문제'지만 전체적인 프레임은 '대학생' 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학생이 아닌 20대가 소외되고 있다. 둘째, 그 과정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받는 대학생이 20대를 위한 일종의 '시혜적' 정책을 요구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가고 있다. 셋째, 앞서 말한 두 가지 문제가 종합되어, '20대 담론'이 사회 보편의 문제로 인정받고 자리 잡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례 비교를 통해 이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3월 10일, 고려대학교 3학년 김예슬 씨가 학교 안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여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다. 대학생이 뭔가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회적 수요와 맞물려 이 선언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향신문>은 바로 다음날 1면의 일부를 할애하여 이 소식을 보도했고, 여러 사회적 명사가 지지와 격려의 뜻을 표했다. 서울대학교 08학번 채상원 씨는 김예슬 씨의 선언에 동참해 자신도 대학과 싸우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 역시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타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한편, 지난달 31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반도체 검수 업무를 맡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뒤 2년간 투병 중이었던 박지연 씨가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의 눈치를 보는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넘어갔지만, <프레시안>을 비롯한 이른바 '비판 언론'은 사태의 추이를 비교적 면밀하게 추적·보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박지연 씨의 문제를 '20대의 문제'로 바라보고 다룬 기사는 없는 듯하다. 박지연 씨의 투쟁과 사망을 다룰 때, 그가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동정의 소재가 될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비윤리적 기업의 희생자'로 묘사될 따름이었다.

그는 '노동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젊은 노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20대에 대한 과도한 예찬과 기대와 비판에 사용되는 온갖 수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는 삼성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대한 보도 등이 주를 이루었을 따름이다.

언론이 고 박지연 씨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조차 그 '젊은 노동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거대한 악당 삼성이 주인공이고, 박지연 씨는 순결한 희생자일 뿐이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외친 김예슬 씨가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다보면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가, 우리 언론이 기대하는 '실천하는 20대', '사회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젊은이'는 절대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무조건 '대학생', 그것도 명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어야 한다. 사실 박지연 씨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다른 산업 재해 피해자와 함께 법원에 자신의 질병을 산업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걸고 있었다.

박지연 씨는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지연 씨를 '투쟁하는 20대'로 보지 않는다. 김예슬 씨의 자발적 퇴교는 '대학'이 아닌 '20대'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만, 박지연 씨의 싸움과 죽음은 '20대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그에게 우호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오로지 '삼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4월 5일자 <한겨레>의 '왜냐면'에 실린 한 독자 의견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박지연 씨의 죽음은 삼성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건강권의 문제와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삼성'은 원래 그랬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드러내고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4월 1일 발표된 민주노동당의 논평 역시 삼성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스물세 해를 살다 떠난 젊은이의 못다 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검색해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20대 담론'이 철저하게 대학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자퇴만 해도 화제가 되고 저항하는 20대로 승격된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젊은이는 죽어서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산업 재해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김예슬 씨의 용감한 결의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현재, 세상의 시선은 대단히 불공평하다. '세상을 바꾸자'고 떠드는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 불공평하다.

이렇듯 현재 논의되고 통용되는 '20대 담론'은 사실상 '대학생 담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20대 담론'의 의제가 '청년 실업 해소'와 '대학 등록금 인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각각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고, 두 측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의 삶과 인권이 피폐해지는 이유는 비싼 등록금과 대기업 사무직 취업난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대의 수많은 문제를 과연 '20대 담론'이 포용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박지연 씨의 죽음도 그렇거니와, 가령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 사건을 되짚어보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대에 간다. 그 군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사각지대이며 누군가가 애꿎은 생명을 잃어도 속 시원한 해명 한마디 내주지 않는다.

도리어 생존한 장교들(그 중에는 다수의 20대 사관들이 속해 있다)에게 병원복을 입고 목발을 짚고 나오는 '쇼'를 강요한다. 20대 남성의 대부분이 저런 군대에서 2년간 청춘을 바치는 것이, 20대가 아파트가 없어서 모텔에 가야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20대 담론'은 저런 지점을 수용할 수 없다. 세대론의 덫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가 20대의 몫을 가져간다'는 식의 괴담이 횡횡한 가운데, 정작 20대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운동의 과정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실상 실종되어버렸다.

대신 20대'를 위해' 등록금도 내려야 하고 아파트도 지어줘야 하고 낮은 학점을 받아도 대기업과 안정된 사무직 직장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들이 떠돌아다닌다. 전체 사회와의 접점을 찾지 못한 세대론은 결국 정부 혹은 권력자들이 배푸는 '시혜적 정책'에 대한 요구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형태의 20대 담론은 점점 범사회적인 공감대를 잃어가고, '너희만 힘드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불러온다. 심지어 20대, 혹은 대학생 사이에서도 그러한 상호 불신과 냉소가 그득하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운동으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있는 한 그러한 상호 불신과 전망의 결여는 필연적이다.

가령 우석훈 박사는 20대 미디어 <이빨을 드러낸 20대>와의 대담에서 "교수를 비롯한 교직원의 급여가 너무 과다하다는 것과 제2캠퍼스나 건물 신축에 투자되는 비용이 절약 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연간 등록금 100만 원 이하 책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주장을 통해 대학을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까? 교수와 교직원의 월급을 깎아서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달라는 주장을 하면서 대학 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과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내 또래의 누군가는 아직 차디찬 서해 바다 속에 갇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속에서 청년 실업의 불안을 이야기하고 스펙 쌓기의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20대 노동자가 죽어가고, 20대 군인이 학대당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20대 대학생이 '20대 문제'를 '등록금 인하'와 '청년 실업 해소'로 한정짓고 있다면, 부끄럽고 비도덕적인 일이다. 대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대학생이 20대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20대 담론'은 사회적 효용을 다해가고 있다.

김예슬 씨와 고 박지연 씨 모두를 위해, 이제는 그 폭을 좀 더 넓히고, 더 많은 주제를 함께 다루며 싸워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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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4월 9일 내 기고문이 나가고, 4월 10일 경향신문 만평 장도리에는 이런 내용이 올라왔다.

2010-04-21

검찰 문제, 몇 가지 빠진 지점

PD수첩의 방영 이후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 검찰에서도 외부 인사가 대거 포함된 특위를 꾸려 내부 감찰을 실시하겠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고, 좋은 반응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논의하는 지점에서 몇 가지 빠진 구석이 보인다.


1. 성매매와 여성 문제

검찰들은 어디서 접대를 받는가? 그 접대의 양식이 성매매를 포함한 음주가무라는 점을 들어 사람들은 '떡찰이 떡친다'는 식의 조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대량 성매매'가 아무렇지 않게 벌어질 수 있는 문화가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미국에서도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 성매매 업체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양상은 한국과 달랐다. 우리는 남자들이 떼로 한 건물에 몰려가서 술을 마시고 삼삼오오 모텔로 흩어진다. 미국에서는 은밀하게 연락을 받은 고급 콜걸들이 고위 공직자가 있는 호텔에 찾아가 성매매를 했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요컨대 한국에서는 '남자'라면 당연히 끼어야 하는 어떤 추접한 아랫도리 업무가 따로 존재한다. 그 사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TV에서 본 것과 같은 향응 접대가 가능한 것이다. 성매매 자체를 근절하는 것은 절도나 강도를 근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다들 쉬쉬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는' 형태로 대규모 성매매가 시행되는 사회 구조를 방치하고 있는 한, 돈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권력자들에게 술과 성을 접대할 것이다.

고위공직자 사회 내의 성비를 깨뜨리는 문제가 그래서 중요하다. 자료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성비가 골고루 나누어지면 나누어질수록 비리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집단적 로비'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모든 검사들이 다리 사이에 좆을 달고 있다면, 그 숫자만큼 아가씨를 붙여주면 된다. 하지만 일부 검사들이 여성이고 그들이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와 있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이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풍토가 바로 이와 같은 집단 성매매를 통한 향응 접대를 낳는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려 들면 곤란하다. 검찰에 대한 비난과 더불어 이 문제를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도 비판할 수 있고, 그 비판이야말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많은 분들이 상기해 주었으면 싶다. 성매매를 옹호하는 당신은 떡찰을 옹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비리와 노동 문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잘 말하고 있듯이, 기업의 내부 비리를 척결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그 기업에 강경한 노동조합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삼성도 그렇거니와 이번에 PD수첩에 나온 그 기업도 그렇다. 사장님이 검사 영감님들게 술 사드리고 여자 바치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사장의 개인 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다 회사 공금이다.

노동조합이 생기면 그런 일이 완전히 근절될 수 없더라도,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이다. 회사돈으로 사장이 친분 쌓고 다니면서 '공적 활동'이라고 우기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기업과 권력간의 유착을 상당 부분 제거해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점점 노동조합에 대해 비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고, 그것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고 외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이다. 유시민은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분열'이라고 말하더라.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 말에 한치의 동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성장'이다. 노동운동이 온전히 자리를 잡고 정치적으로도 제 몫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한국 사회의 자정능력 신장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을 매도하면서 한국 사회의 개선을 바란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소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ㄴ자만 나와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이런 인식도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3. 검찰 수사비 현실화

한 차례 사정의 폭풍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결국 검사들은 다시 스폰서에게 돈을 받을 것이다. 그래야 할 핑계가 그대로 남아있다면 말이다. 검사들은 늘 수사비가 모자란다. 혹은 그렇다고들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자금이 모자라면, 공적으로 신청해서 받아내면 되는 일이 아닐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현실을 뜯어고쳐서 검사들이 돈 받아먹을 핑계를 대지 못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도덕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 옳다. 수사비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어디 어디 사장님들 만나서 접대 받는 것이 문제라면, 일단 수사비도 제대로 지급하고, 수사비를 유용하거나 접대를 받을 경우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게 해야 앞뒤가 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개혁안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고, 나온다고 해도 시민사회에서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백리를 요구하기만 하면 나오는 것은 탐관오리 뿐이다. 관직에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인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면서 인간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지 않는 한, 구조적인 비리와 부패의 사슬은 끊기 어렵다.


검찰에 대한 이번 비판을 통해 검찰이 진실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앞서 말한 요소들도 조금씩 진전되어 나간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2010-04-15

학문으로서의 철학

철학에 대해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학계의 철학자들이 하는 논의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것은 철학 연구자들이고, 진정한 철학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라고 외치겠지.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교양서 수준의 지식을 반복해서 읊어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떤 물리학자가 대중들에게 물리학의 초보적인 내용에 대해 소개해주었다고 해도 대중들은 그게 물리학의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건 물리 연구자들이나 하는 소리고, 진정한 물리학자는 우리의 표피적 관찰(가령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 같은 것)과 어긋나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라고 누군가 외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철학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적어도 내가 겪은 바로는, 자신들이 표피적으로 생각한 초보적인 논증 수준 이상을 벗어날 경우 '현학적'이라느니 '궤변'이라느니 하는 항의가 따라온다. 그러나 철학은 학문이고, 대중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 이상의 논의들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자신들의 이런 저런 생각에 덧붙이는 훈장과도 같은 기호로서의 '철학'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진지하게 추구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전자를 위해 후자의 활동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강단철학은 틀렸다, 우리가 간다!'라고 외치는 '인문 상업주의'는 바로 그런 대중적 경향성에 편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

2010-04-05

천안함 문제를 보며, 단상 하나

천안함 침몰 사태와 관련해서, MBC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군(軍)이 청와대에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이미 노무현 시대부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관료 집단은 통제가 되지 않기 시작한 것 아닌가. 가령 이런 경우.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하며 이 과정을 지켜 본 김종대 씨의 최근 책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지음. 나무와숲 펴냄)를 보면 노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고도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5월 20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 전부가 나에게는 진실로 들리지 않아요. 이게 대책회의 맞습니까?"

참고 링크


가히 폭력적인 인사 개혁을 통해 하나회를 물갈이한 김영삼의 군에 대한 카리스마와 통제력이, 김대중 시절을 거쳐 조금씩 약화되다가,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본다면,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은 '희망의 군국주의자'로 떠받들고 이명박은 '미필 씹새끼'로 몰아붙이는 그런 도식화를 통하지 않고도.

요컨대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인간으로 구성된 기계, 즉 관료 집단과의 알력싸움에서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외교에서 무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이미 노무현 시절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권력은 관료 집단의 정보 독점과 의사 결정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연속성을 지니는 정책들, 특히 외교부가 관할하는 분야는 한결같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민주주의'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명박은 반민주주의고 노무현은 민주주의고 이런 차원이 아니라, '선출된 권력'이 '기존의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부재한 것. 노무현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대통령과 지지자들 모두 '조선일보 때문이다'라는 편리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그 변명을 스스로에게까지 남발했다는 것 아닐까.

2010-04-01

이성은 정념의 노예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 and can never pretend to any other office than to serve and obey them.

- Hume, David. A Treatise of Human Nature


너무도 유명한 인용구. 흄이 '이성은 정념(passion은 철학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열정'이 아니라 '정념'으로 번역됨)의 노예'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나 판단을 낳지 못하며, 그것들을 억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 혹은 지성과 판단이 인간의 같은 사고 기능이 아니라는 인식은 칸트에게도 이어져, 말년의 그가 『판단력 비판』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판단력의 결여는 사람들이 본디 천치[天痴]라고 일컫는 것으로, 이러한 결함은 전혀 구제할 수가 없다. 둔한 머리나 편협한 머리는 다름아니라 보통 정도의 지성과 지성 고유의 개념들을 결여한 것으로, 이러한 머리는 배움을 통해 충분히 보강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보통은 (페트루스의 제2부의) 저것을 결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대단한 학자들이 그들의 학식을 사용할 때 결코 개선될 수 없는 판단력의 결함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A134=B173, 375쪽.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판단 자체가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파악된 현실 속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자꾸 이런 것들을 혼동할까. 왜 자신들의 판단이 '이성적'이고, 다른 사람들은 '정념'에 의해 판단하고 있다고 성급한 단정짓기를 서슴치 않을까. 그런 판단은 대체 어떤 정념에 의존하고 있는지, 관찰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0-03-31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

세상에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이 '차가운 이성'을 유지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종종 그것을 상실하곤 한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차가운 머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가운 것은 그들의 가슴이며, 본인들이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냉혈한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의 머리는 곧잘 뜨거워지곤 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사실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인 것이다. 심장이 뛰는 순간 두뇌가 멈춘다고? 현실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심장이 멈추는 순간 두뇌도 멈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

2010-03-24

계층 이동 없는 한국

한 가지 기본적인 질문. 계급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사회,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1950년대부터 1990년대 무렵의 대한민국처럼 사회 내 계층 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사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20세기 중반 이후 대한민국이 겪은 급격한 경제 발전은 세계적으로 드문 현상이며(경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유일한 경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바로 그 '비정상적'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질문. 대학 교수 자식들이 대학 교수가 되고, 노동자의 자식들은 노동자가 되는 나라. 필리핀과 동남아시아만 그럴까? 영국을 포함한 서구 선진국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동자의 아들 테리 이글턴이 영문학 교수가 되었을 때 그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와 계층이 전부 파괴된 채 혼돈 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같은 나라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어느 정도 분화되어 있고 그것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지금과 같은 식의 계층 이동과 신분 변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한국도 이제 필리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계층에 따라 주거지가 나누어져 있고 입는 옷이 다르고 생활하는 문화가 다른 것은 필리핀만 그런 게 아니다. 영국도 그렇고 독일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물론 '현재'의 한국인들은 그런 사회가 도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계급의 차이가 생긴다고 해서 사회가 바로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로 치닫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이 글(에서 퍼온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하고 있다. 한국이 그런 식으로 망하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묵시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 대답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계층간 이동이 원활하지 않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결국 노동운동과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출현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의 글은 '경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동 없는 정치' 말이다. 지금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조직적으로 '기존 정치권'이 노동운동과 노동정치를 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한심스럽게 진행되어오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덧말) 여담인데, '사회를 지배하는 1%'라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 않나 싶다. 현재 인구를 5천만으로 잡으면, 그것의 1%는 50만이다. 수능 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수능 1%로는 SKY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기도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SKY 나와도 대한민국 1% 안에 못 낀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한 해 SKY 졸업생들의 숫자는 같은 연령대에 속하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보다 당연히 더 적다. 사소한 레토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 1%'라는 헐거운 표현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네티즌과 대중들의 진지하지 못한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2010-03-21

법정 스님의 유언에 대하여

다음 두 문장은 완전히 다르다.

① 나는 내 제자들 중 그 누구도 내가 남긴 책의 저작권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② 나는 내 이름을 단 출판물이 더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법정 스님의 유언은 분명히 ②를 의미하고 있다. 워낙 돈에 미쳐 있는 세상이라 그런지, 저작권자에게는 인세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외에도 '저작물에 대한 인격권'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 책을 절판시켜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자신의 책을 더 찍어내지 말고, 어떤 식으로건 공개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 저자가 자신의 책을 절판시키고 싶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제자들이 추가적인 이권을 놓고 큰 다툼을 벌이거나 그에 준하는 추문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은 것도 그중 일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본인의 이름을 단 책이 더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말 그대로 무(無)와 공(空)으로 사라지고 싶어서 그런 유언을 남겼을 수도 있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 등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나는 법정 스님이 애초부터 '완전한 소멸'을 원해서 본인의 저서를 절판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에 미쳐있는지, '절판시키라고 유언을 남겼어? 그렇다면 인터넷에 공짜로 뿌리면 되겠네?'라며 눈을 희번덕거릴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책은 상품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사상과 인격의 표현이기도 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내 책을 전부 태워버려라'고 유언을 남기시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추측한다.) 평생 '무소유'를 설파한 한 스님이 자신의 인격을 위해 더 이상의 출간을 멈추라고 유언을 남겼을 때, 그것을 '공짜로 만들어라'고 해석할 만큼 우리 사회가 돈에 미쳐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명하신 노알 백작님께

고명하신 노알 백작님께

고명하신 노알 백작님께
성스러운 교회의 고문관,
성신의 기사,
육군 통수권자,
루에르그의 통치사,
폐하의 오베르뉴 총독,
저의 주군이자 존경하는 후원자.

고명하신 백작님께.

당신께서 저의 이 책을 갖고 계시고 그것을 기꺼워하시니 당신의 위대하심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제가 다른 책들을 써냈을 때 생긴 불행한 일들과 그에 따라 제가 실망하고 좌절을 겪은 일들은 당신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일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손으로 쓴 것이나마 어딘가에 남겨서 제가 연구한 것들을 논리적으로 따지려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제가 쓴 글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존하기에 그보다 더 소중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제게 배풀어주신 호의를 보면 당신께서 저의 연구와 노력의 결과를 받아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저는 당신께 편지를 통해 여러 번 제 존경심을 바쳤습니다. 당신께서 로마에서 돌아오실 때 저는 직접 찾아뵙고 그때 제가 준비하고 있던 이 두 개의 글들을 바쳤습니다. 제가 바친 것들을 당신께서 기꺼이 받아주셨으니 저는 그것들이 잘 보존되리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그것들을 프랑스로 갖고 가셔서 이 분야에 밝은 당신의 친구분들께 보여 주셨으니 제가 이렇게 조용히 지내지만 제가 실제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이것들을 독일, 플랑드르,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엘제빌이 제 책을 찍어 냈으며 저에게 이 책을 누구에게 헌정할 것인가 즉시 응답을 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도 뜻밖의 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당신께서 저의 글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셨는데 그것들이 출판사 사람들 손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전에 제 책을 찍어 낸 적이 있기 때문에 저를 위해서 그 글들을 책으로 꾸며 낸 것 같습니다. 당신과 같이 고명하시고 저명하시고 존경스러운 분의 비판을 거친 것이기에 이 글은 더욱 값어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글들을 널리 전하려 하시니 당신의 관대하심과 당신께서 이것을 통해 만민의 복리를 증진하려 하시는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건대 저는 당신의 관대하심과 당신께서 저의 이름과 일들을 사방으로 저로서는 엄두도 못 낼 지역으로 널리 전하여 주신 데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는 제 노력의 결과인 이 책을 기꺼이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꼐서 제게 베푸신 은의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제가 당신의 보호 아래에 있을 때에 적들이 저의 명예를 공격하더라도 당신께서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당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당신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 당신께서 최고의 행복과 위대한 성취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
갈릴레오 갈릴레이



9-10쪽,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무현 옮김, 『새로운 두 과학 - 고체의 강도와 낙하 법칙에 관한 대화』(서울: 민음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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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6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미디어스에 올라온 제 칼럼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업데이트되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블로그에 게시하지 못했네요. 전문을 올려둡니다.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지난해 10월, 영국. 한 소녀가 실종됐다.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고 하루종일 채팅하고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 17세의 소녀 애쉴리 미쉘 홀(Ashleigh Michelle Hall)은 한창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소년과 데이트 약속을 잡은 차였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고,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1996년 두 명의 성매매 여성을 흉기로 위협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은 피터 채프먼(Peter Chapman)은 2001년 가석방되었다. 그는 범행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접속했고, 어떤 잘생긴 젊은 소년의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피터 카트라이트(Peter Cartwright)라는 가명으로 접속한 그는 여러 차례 채팅을 통해 홀 양의 환심을 샀고, 결국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33세지만 그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자신의 추한 외모를 역으로 이용해, 피터의 아버지 행세를 함으로써 피해자를 안심시켜 차에 타도록 했다. 홀 양은 차에 탄 후 곧바로 습격당하고 성폭행당한 후 살해되었다.

한편 2010년 2월 24일 한국, 밤 9시 무렵.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주택에서 이모(13)양이 실종되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을 발견한 경찰은 비공개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사흘 후 피해자의 집에 남아있던 족적을 토대로 김길태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공개 수배에 나섰다. 김길태는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결백을 주장하였고 그 사실은 뒤늦게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 3월 3일, 경찰은 김길태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하고 추적하였지만 체포에 실패하였고, 결국 3월 6일 사건 현장 인근 주택의 물탱크에서 이모 양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이후 10일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부터 사건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비상근무에 돌입했고 피의자로 김길태를 특정했다. 결국 3월 10일, 시신 발견 후 5일만에 김길태는 부산 덕포시장 인근에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범행 동기, 과정, 이후 도주 경로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3월 11일 새벽 3시 현재까지 김길태는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범인을 살해하고 은신하고 검거되기까지, 그의 동선은 현장에서 반경 300미터를 넘어서지 않았다.

전자의 사건은 후자의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국내 언론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사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단순한 형사사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 피터 채프먼에 대한 수사가 끝나고 그의 유죄가 확정된 후, 영국 경찰은 성범죄자에 대한 온라인 감시를 강화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법정은 범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고, 사건을 담당한 피터 폭스(Peter Fox)판사는 범인이 “젊은 여성들에게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이며, 가석방될 것을 예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앨런 존슨(Alan Johnson) 영국 내무부 장관은 “우리는 이 사건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며 “우리는 성범죄자들이 온라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바로 그 내용이 연합뉴스에 의해 인용(기사보기)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정을 내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 코너, 『우물 밖 개구리』의 첫 꼭지에서 바로 이 사건을 다루겠다고. 이 인용은 영국에서 사건이 벌어진 맥락과 거의 무관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사건의 약탈’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내막을 들춰보도록 하자.

홀 사건의 범인 채프먼은 피해자를 차에 태워 성폭행하고 살해한 후 곧장 유기했다. 그는 범행을 저지른 후 하루도 되지 않아 검거됐다. 피의자의 시신을 버린 후 도주하다가 교통경찰에게 붙잡혔는데, 그 교통경찰은 채프먼이 제대로 면허 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또한 채프먼의 언행 등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한 경찰은 곧장 그를 경찰서로 연행하여 심문한 끝에, 바로 당일에 범인의 인도를 받아 피해자 홀 양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은 매우 짧고 간결했다. 경찰은 범인이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사건을 수사했고 정의의 실현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딸을 잃은 분노에 ‘범인을 죽여야 한다. 사형제를 부활시켜라’고 외치던 홀 양의 어머니도 차츰 평정을 되찾았다. 채프먼에게 종신형이 선고되던 날 그는 ‘저런 사람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피해자의 가족,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도 결국은 사형제가 아닌 종신형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국 언론에서 인용된 것처럼, BBC와의 인터뷰에서 앨런 존슨 내무부 장관은 성범죄자의 온라인 활동을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민주당의 쉐도우 캐비넷 중 한 사람인 크리스 헌(Chris Huhne)은 성범죄자 등록•관리에 인터넷 사용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미국에서 일반화된 것처럼 성범죄자들의 IP나 이메일 주소까지 등록할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정책은 경찰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검열하도록 할 것”이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치권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혹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한국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다르다. 경찰은 사건이 벌어진지 10여 일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이모 양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이 발견된 위치와 범인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 모두 한 동네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국적으로 수배망을 넓히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고 ‘사후적’으로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의자 김길태 씨가 진범이라는 것은 법원에 의해 확정된 사실이 아님에도, 경찰과 언론은 이미 그를 진짜 범인으로 가정한 채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정작 그 과정에서 완전히 어긋나버린 경찰의 초동수사 과정에 대한 책임은 사라져버렸다.

정치권과 경찰의 향후 대책 역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현재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전자발찌의 ‘소급 입법’만이 해답인 양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전자발찌 착용이 시행되기 전에 석방된 성범죄자들에게도 그것을 소급해야 한다는 것을 ‘해법’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범죄 발생에 대한 사전적 예방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이렇게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았던 것의 상당부분은 경찰의 책임이다. 그 지점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채 전자발찌에만 매몰된, 그것도 여야를 막론하고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공포스럽다.

에밀 뒤르켐은 범죄를 사회에 발생하는 질병과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예방할 수는 있으되 온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모 양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와는 별개로, 그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올바른 사회적 에너지로 승화시킬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전자발찌, 전자발찌, 전자발찌! 이것은 결코 답이 아니다.

2010-03-07

안티조선의 세 가지 층위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안티조선'이라고 통칭될 수 있는 운동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었다. ① 이한우가 강준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에 반발하여 홍세화가 한겨레에 「나를 고소하라」는 글을 기고한 사건. 그에 호응한 수많은 사람들이 한겨레에 전면광고 지면을 빌려 덩달아 '나를 고소하라'고 서명한 것. ② 지식인이라면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지를 펼친 강준만 이후 몇몇 지식인들이 그와 행동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일. 그로 인해 고종석, 김정란, 김규항, 진중권 등 이른바 '안티조선 지식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군의 집단이 인지되었다. ③ 조선일보를 만악의 근원으로 상정하고 친일·매국·독재·수구꼴통 언론인 조선일보와 싸우는 노무현을 무조건 지지하고 밀어주기로 결의한 선거운동·시민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오직 세 번째의 안티조선 뿐이다.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조선일보가 직접 억압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 것이므로 첫 번째 경우는 그다지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경향 사이의 갈등이다. 조선일보를 일종의 마니교적 이분법 하에서 '악'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지식인이 그 언론과 협조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다양한 폭풍 속에서, 마땅히 있어야 했던 섬세한 구분은 사라져버리고 결국 남은 것은 조선일보에 대한 증오심 뿐이다. 문제는 그 신문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그저 '조선일보는 친일매국독재수구꼴통이야'라는 선언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단히 놀랍게도 세 번째 조류를 기꺼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수완을 보였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 떼라"고 외쳤을 때 나도 그 중계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이후에도 노무현은 끝없는 대외 발언을 통해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구 언론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면서 지지층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며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이 '노무현 대 조선일보'의 구도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그 와중에 유시민은 아예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개마고원)라는 책까지 썼는데),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대단히 큰 착시현상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악을 대변하는 조선일보가 있고, 그 악과 싸우는 노무현이 있다면, 노무현은 무조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이분법적 착오 말이다.

한국 사회를 좀먹는 거대한 기득권의 카르텔이 있고, 그 속에서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거대 언론들이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오직 조선일보만이 한국 사회를 망치는 원인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언론과 재벌 및 정치권의 관계는 대단히 미묘하고 복잡하다. 이른바 '안티조선' 하시는 분들은 조선일보가 언제나 청와대를 쥐락펴락하고, 동아일보는 주정뱅이 사주 때문에 쩔쩔 매고 있으며, 중앙일보는 삼성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수족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페이지를 펴보자.

그러나 중앙일보가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양심고백 이후, 중앙일보의 보도 태도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삼성, 특히 이건희 일가가 기분 나빠할 내용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왜곡 보도하는 중앙일보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중앙일보가 계열 분리를 선언한 뒤에도, 중앙일보 편집국 내부 정보보고 내용이 하루 두 번씩 삼성 구조본으로 전달됐다. 이걸 보며, '중앙일보는 언론이라기보다, 삼성을 위해 일하는 사설 정보기관이구나' 싶었다.

이처럼 중앙일보가 삼성에 종속돼 있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걸핏하면 삼성에 돈을 요구했다. 1999년, 재미교포 박인회(윌리엄 박)가 전직 안기부 직원인 공운영에게 넘겨받은 도청파일을 중앙일보가 사려고 한 적이 있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이다. 박인회가 중앙일보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다기보다는, 중앙일보가 도청파일 속 정보를 탐내서 구매하려고 했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193쪽,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서울: 사회평론, 2010)


여기서 김용철도 '종속'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을 보면 사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김용철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삼성과 중앙일보는 주종관계라기보다 필요할 때만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는 질 나쁜 친척에 더 가깝다.

당시 박인회가 부른 가격이 10~20억 정도였는데, 중앙일보는 이 돈도 삼성더러 내달라고 했다. 이학수가 이런 요구를 거절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중앙일보쯤 되는 회사가 고작 10~20억 원 때문에 손을 벌리나'라고 여긴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중앙일보는 수시로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구조본 재무팀에 있는 중앙일보 담당자가 몹시 힘들어 했다. 김인주는 사무실 창밖에 내다보이는 중앙일보 건물 끝에 있는 "J"자를 가리키면서 '도둑놈'이라고했다. 그러나 이렇게 욕하면서도 중앙일보가 손을 벌릴 때마다 대개는 돈을 쥐어줬다.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194쪽, 같은 책.


아직 『삼성을 생각한다』와 같은 수준까지 정치권 내부와 조선일보의 결탁을 보여주는 책이 없어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정치권과 조선일보의 관계도 대략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거래하는 것이지, 한 신문이 나라 전체를 쥐었다 폈다 하는 게 아니다. 조중동이 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한 신문과 언론을 '친일수구꼴통'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태를 올바로 해석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세종시 문제를 둘러싸고 박근혜와 조선일보는 대립했다. 만약 '안티조선' 하시는 분들 생각처럼 조선일보가 친일매국수구꼴통신문이라면, 그리고 그 '친일'의 대표주자가 박정희라는 사실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면, 당연히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도왔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조선일보는 끝없이 간을 보면서 줄타기를 하는 듯 했지만 결국 박근혜가 아닌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안티조선'을 외치는 사람들의 단순한 선악 이분법적 모델로는 이런 복잡한 정치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조선일보를 절대악으로 놓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반대로 노무현과 그의 재임기간에 대한 과도한 찬양과 미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은 '표면적'으로 조선일보와 대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미 FTA를 포함한 숱한 정책적 과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신하면서까지 조중동이 바라는 바로 그 방향대로 대한민국을 움직여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조선일보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신념윤리'뿐 아니라 '책임윤리'에 의해서도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론이 설 입지는 매우 좁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차이는 막스 베버의 마지막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전성우 옮김, 나남출판)에서 정식화된 것으로, 지금도 그 차이에 대해 그보다 더 좋은 설명을 찾기란 어렵다. 해당 부분을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행위결과의 무시, 바로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상세히 살펴봅시다.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윤리적으로 지향된 모든 행위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서로 전혀 다른, 화합할 수 없이 대립적인 원칙 가운데 어느 하나에 따라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는 <신념윤리적>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윤리적> 원칙입니다. 물론 이 말이, 신념윤리는 무책임과, 책임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념윤리적 원칙하에서 행동하는가 --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도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 -- 아니면 책임윤리적 원칙하에서 -- 우리는 우리 행동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 행동하는가 사이에는 심연과 같이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확신에 찬 신념윤리적 생디칼리스트에게 극히 설득력 있게 아래와 같은 설명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그의 행동의 결과는 반동세력의 기회를 증대시키고, 그의 계급의 억압상황을 악화시키고, 이 계급의 상승을 방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은 그에게 아무런 효과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수한 신념에서 나오는 행위의 결과가 나쁜 것이라면, 신념윤리가가 보기에 이것은 행위자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의 책임이 며, 타인들의 어리석음의 책임이거나 또는 인간을 어리석도록 창조한 신의 의지의 책임입니다. 그에 반해 책임윤리가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평균적 결함들을 고려합니다. 그는 피히테가 올바로 지적했듯이, 인간의 선의와 완전성을 전제할 어떠한 권리도 자신에게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는 그가 예측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내 행동에 책임이 있다." 그에 반해 신념윤리가는 오로지 순수한 신념의 불꽃, 예컨대 사회적 질서의 불공정성에 대한 저항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 불곷을 지속적으로 되살리는 것, 이것이 그의 행동들, 성공가능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그의 행동들의 목적이며, 이 행동들은 단지 모범의 제시라는 가치를 지닐 수 있을 뿐이며 또 이런 가치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21-122쪽,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서울: 나남출판, 2007)


노무현 본인의 신념이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투쟁하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신념을 아무리 열심히 말로 표현하고 조중동과 갈등을 빚었다 해도, 그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책임윤리'의 대상이 되며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본인과 그의 지지자들은 임기 말년에 들어서, 임기가 끝난 이후까지 '조선일보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를, 돌리지 않았던가?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다. 조중동을 무턱대고 욕하는 것은 결국 '국개론'을 떠들기 위한 기본적인 포석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조선일보 대 노무현, 거대한 악 대 외롭고 선량한 정치가, 이런 식의 이분법은 정작 우리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해치고 약한 고리부터 끊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방해물이 될 뿐이다. 그 결과 '안티조선'을 표방하는 지식인들 중 상당수 역시 자신들이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지, 왜 대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망각해버리는 현상이 벌어진 것 같다. 안티조선의 세 번째 층위가 과도하게 범람하면서, 정작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지켜졌어야 할 두 번째 층위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비협조, 비타협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이 노무현 현상에 휩쓸려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그 결과 우리는 '올바른 언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지도 못한 채 21세기의 초입을 허비해버렸다.

지식인은 책임윤리보다 신념윤리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안티조선을 표방하는 지식인은 당연히 조선일보와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지만 올바른 결과를 도출해내고 책임을 지는 것이 그의 과제인 정치인의 경우는 어떨까? 노무현은 책임윤리와 신념윤리가 동일한 이상적 정치인상을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막스 베버가 말했다시피, 또 우리가 경험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그러한 이상은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인의 행동을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거악 조선일보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노회찬을 악으로 몰아붙인다면, 우리는 바로 그 '심사숙고'의 기회를 허공에 던져버리게 된다. 노회찬을 깔때 까더라도 그렇게 어설프고 조잡한 논리로 까면, 까는 사람들만 더 손해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듬어내지 못하게 되니 말이다. '좃선'이니 '조쭝똥'이니 하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딱지붙이기 대신, 언론과 권력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서 출발한 정치전략·담론 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노회찬의 조선일보 생파 출석을 '잘' 비판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 지금처럼 '조선일보는 개새끼, 그러니까 너도 개새끼? ㅋㅋㅋ'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안티조선, 그래 계속 하자. 하지만 이제는 좀 섬세하게, 잘 좀 하자.

2010-03-06

'진보신당은 정치할 생각 없나?'라는 비판에 대하여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모순된 요구를 할 경우, 우리는 그 요구를 하는 사람이야말로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가령 '100원 줄테니까 곰보빵이랑 우유 사오고 500원 거슬러와' 같은 소리를 학생 A가 학생 B에게 하고 있다고 해보자. A는 B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삥을 뜯고 있다.

진보정당의 '정치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사태가 관찰된다. 인터넷에서 진보정당과 그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이래라 저래라 시리즈를 연재하는 사람들은 곧잘 '너희들은 너무 유연하지 못해, 너희들은 정치적인 행동을 할 줄 몰라'라고 훈수를 두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유연성이란 한미 FTA를 토론다운 토론 없이 통과시키거나, 이라크에 파병을 하거나 하는 그런 것이다. 지난 정부의 그러한 행동들, 말하자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행동을 놓고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이 비판할 때, 지난 정부의 옹호자들은 말한다. '너희들은 정치를 몰라. 유연함을 배워야 해.'

그리고 노회찬이 조선일보 9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아예 안 갔다면 모르겠으되, 초청받아서 갔다면 덕담 한 마디 안 해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정치적 유연함'을 요구하던 자들이, 갑자기 노회찬에게 안티조선의 불굴의 투사가 되라고 요구한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에 대해서 나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매우 반대한다.) 다만 그의 '정치적 행동'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들의 모순된 태도에 대해서는 지적해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대체 그들은 왜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실책에 대해서만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한 사람의 정치인이 있고, 그가 진정 정치적인 (혹은 현실정치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하고자 한다면, 죽은 노무현의 과오를 억지로 옹호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선일보 90주년 행사에 참석해서 덕담 한 마디를 해주는 편이 낫다. 앞서 말했듯 나는 노회찬의 저 결정에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노무현 정부의 과오를 문제삼지 말라고 말해왔던 자들이, 진짜 '정치적'인 행동 앞에서 비아냥거리는 것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의 판단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조중동과 말로 다투던 노무현은 결국 조중동이 바라던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노회찬은 참여정부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던 삼성과 전면전을 펼쳤고, 그 싸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정치인이 겉으로는 웃되 속으로는 싸우는 것이 나는 더 옳다고 생각한다. 말로만 대립각을 펼치고 안티조선하면서, 결국 조중동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어버린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않을까? 남에게 일관성이 없다고 욕하지 말고, 그 말을 하는 스스로가 과연 일관된 기준을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싶다.

2010-03-03

위악적 솔직함 - 김훈의 경우

엮인글: "위악(僞惡)에 관해"(a quarantine station, 2010년 3월 2일)

sonnet 님은 '위악적'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악은 사전적으로 볼 때 '짐짓 악한 척 하는 행위'로 정의되므로, 그 경우 '왜 짐짓 악한 척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sonnet님은 그 질문의 선후관계가 바뀌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내가 볼 때 그 질문은 출발점이 잘못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관찰하기로는 위악이라고 지칭되는 사람 중 상당수는 그게 위악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 않다. 그건 그냥 부르는 쪽이 임의로 딱지를 붙여서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왜 누군가를 짐짓 악한 체 한다고 부르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바꾼 후 그는, 누군가를 위악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과 다른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다. 누군가에게 '위악적'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때에 따라서 정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히 '위악적'이라는 말에는 어떤 암묵적인 선의 기준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 선의 기준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선의 기준이 어디에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이다.

'위악적 포즈'를 유행시킨 장본인 중 하나인 김훈의 인터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일하던 당시, 경쟁지인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 '여자들은 화초와 같다', '조선일보가 최고다', '내가 전두환 찬양 기사 다 썼다'는 등의 '소신 발언'을 날린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내고 지금 우리가 아는 전업 소설가 김훈이 되었다. 이후 김훈은 지금까지 산문과 소설 등에서 줄곧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무엇이 선하다, 무엇이 악하다고 외치는 거대담론은 무의미하며, 인종 간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등.

최보은: 대학원 졸업한 딸을 두신 걸로 아는데 페미니즘 기질은 없나요?

김훈: 우리 딸?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들지 않았어요.

최보은: 어쩌다 김훈 선배는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드셨어요. 마초…. <시사저널>엔 여기자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세요? 페미니즘 같은 것에 물들지 말라?

김훈: 걔들은 가부장적인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 같더라고.

최보은: 네? (웃음) 이런 말 기사화해도 상관없으세요?

김훈: 괜찮아. 아무 상관없어. (웃음)

김규항: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훈: 여자들한테는 가부장적인 것이 가장 편안한 거야. 여자를 사랑하고 편하게 해주고. (웃음)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남자가 다 책임지고. 그게 가부장의 자존심이거든.

김규항: 최 선배 열받네.

최보은: 지금 반어법이에요? 진심이에요?

김훈: 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 안 해.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압도적으로 유능하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여자를 위하고 보호하고 예뻐하고 그러지.

최보은: 그런 이야기하면 <시사저널> 부수 떨어져요.

김훈: 괜찮아. 이제 떨어질 것도 없어. (웃음)

김규항: 후천적인 노력이 아닌 선천적인 요인으로 사람을 나누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는 얘기는 백인이 흑인보다, 독일인이 유대인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인종차별하고 다를 게 없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보는 게 근대적 사고방식의 기본 아닌가요?

김훈: 인종 사이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가 없는 거지.

김규항: 혐오는 단지 서로간에 다르다는 건데. 이건 “어떤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치가 아리안족이 가장 우수하다고 말하는… 근데 선생님께서 여성에 대해 말씀하는 건 그거와 결국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김훈: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든.

김규항: 선생님 말씀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더라도 경우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낫다는 얘기가 가능하더라도 남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여자도 있을 수 있고, 여자보다 못한 남자도 많고….

김훈: 그건 그렇지.

참고: http://blog.aladdin.co.kr/tomek/tag/%EA%B9%80%EA%B7%9C%ED%95%AD (원문을 찾지 못해 기사가 인용된 블로그를 링크함)


이 경우 김훈의 행동을 '짐짓 악한 척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그것이 '위악'의 사전적 정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김훈은 분명히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양성간의 평등 문제나 인종간의 혐오 등 현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대체로 수긍하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표한다. 이 경우에 '짐짓 그런 척' 한다고 말하는 것은 sonnet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 드러나는 김훈의 발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표현을 넘어선다. 그는 이러한 '위악적' 표현을 통해 대략 두 가지를 목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진보적 언론'이라는 것들이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헛소리만 하는 얼간이들이라고 선언하고 폭로한다. 둘째, 마찬가지 맥락에서, 상대방을 일종의 '위선자'나 '지사(지사정신 할 때의 그 지사)'로 몰아간다. 이 본문에 인용된 것 외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그 부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두 번째 기능이 중요하다. 김훈의 거침없는 '취존중 요구'로 인해, 한겨레나 시사저널 같은 당시의 진보적 매체들은 졸지에 남의 취향도 존중할 줄 모르고, 인종 사이의 자연스러운 혐오도 무시하며,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청맹과니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는 '현실'이라는 거대담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상 대 현실', '거대담론 대 인간의 삶' 같은 공허한 이분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 방향으로 논의를 끌고 갈 경우,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이렇듯 '본질적'인 문제, '가치'와 관련된 문제에서 어느 정도 옳다고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가치를 둘러싸고 '위악적'인 제스처는 힘을 발휘한다. 짐짓 악한 척까지 할 필요도 없다. 다들 당장은 불편하지만 옳기 때문에 참는 가치들에 대해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해버리면 그만이 기 때문이다. 가령 장애인을 위한 대중교통의 비효율 감수라던가(솔직히 다리가 안 좋으면 집에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시각장애인을 위해 웹사이트에 플래시 도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보기도 좋고, 개발 현실이라는 게 있지...), 등등. 우리는 비슷한 예를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지만 아직 공고한 상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한 도덕적 명제들을 개인적 취향을 명목삼아 부정하는 것, 그것이 가장 대표적인 '위악'의 행태이다. 일부러 싸가지 없는 척하는 신해철 같은 연예인, 저 소녀가 나를 좋아할까봐 괜히 가래침 뱉는 대학교 2학년 오빠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위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과되고 있는 것 같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10-02-25

사형제 위헌 판결 실패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형제가 폐지되었으면 광화문 광장에서 만세삼창을 하려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하겠다.

잠시 이글루스를 돌아다녀보니 위헌심판을 청구한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지른 70대 어부라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분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바로 그런 반응을 우려하여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선 단체들은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가장 최악의 인간이 받는 대우가 바로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라는 상식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작년 가을 무렵, 이 재판의 공판이 시작되기 전 나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부탁을 받아 변호인에게 참고자료로 제공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형제 폐지 판결문 중 일부를 번역하였다. Ackermann이라는 이름의 판사는 사형제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판결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남아공은 영미 보통법(Common Law) 계열의 국가이므로 그는 미국의 판결을 줄곧 인용한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어떤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사형당할 확률이 높지만 (가령 텍사스), 어떤 주에서 체포되면 사형당해도 계속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메사추세츠). 이 경우 법의 집행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왜 동일한 처벌이 동일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말인가? 이것이 법적 평등성에 부합하는가?

Ackermann 판사는 Callins v. Collins, cert. denied, 114 S. Ct. 1127, 127 L.Ed 435 (1994) 판결에서 Blackmun 판사가 제기한 소수의견을 인용한다. 여기서 재인용해보기로 한다.

“경험에 따라 우리는, Furman V. Georgia 사건에서 보았듯이, 사형 행정에서 자의성과 불평등성을 없애고자 하는 헌법적 노력이, 근본적인 평등의 필수적 구성 요소의 함축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행의 개별성이 그것이다. Lockett v. Ohio, 438 U.S. 586 (1978)판결을 보라.”


“형사소송법과 실질적 규제의 조합으로는 사형 처벌을 헌법적 결핍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체제가 정확하고 신뢰할만하게 어떤 피고가 ‘죽을만 하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이기 어렵다.”


“공공 여론의 대부분이 원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헌법이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벌로서의 사형은 당연히 사형제 자체가 일관되게 이성적으로 집행될 수 없는 한, 그것은 전체적으로 집행되지 말아야 한다. (강조는 저자)”


정권 바뀔 때 무렵 사형수를 '일괄처리' 해버리는 한국의 기존 법 집행 관습 역시 '비일관적'이고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중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정권이 바뀌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고려와는 아무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은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을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잔인하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죽음 앞에 노출시킨 채 오랜 시간을 강제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도 비인도적이다. (현재 언론에 의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형수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다른 처벌에 비해 자살 기도자들의 숫자가 훨씬 높다는 것은 사형제도가 가진 '대기 기간'의 비인도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인도주의적, 상식적 관점을 견지하는 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당신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한꺼번에 사형 집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기도 하고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등), 어떤 사람은 죽고 싶을 만큼 오래도록 국가에 의한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수 년, 혹은 수십 년을 보낸다. 설령 그가 뱃놀이 하러 온 청춘 남녀를 살해 강간한 흉악범이라 해도, 당신은 그에게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2010-02-21

단상

한국의 중산층들은 양심을 놓고 벌이는 가학-피학 놀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강남 3구에 도시 빈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당연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만으로도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신 그들은 국개론에 빠져들고, 노무현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팽창한 '올바른 정치 의식'을 위무하는 듯하다. 요컨대 아직까지는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성립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 역시 그렇다. 이른바 '교양'이 아닌, 내면의 부재가 문제다.

2010-02-13

강남, 간지, 패션

강남좌파, 간지좌파, 패션좌파 따위의 어휘들은 명료한 개념적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대중들이 '좌파'라는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만약 가지고 있다면, 통상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들이다.

사유재산에 반대하고 계급차별 철폐만을 부르짖는 기존의 좌파와 달리, '강남좌파'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 주는 풍요로움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운동권들은 옷도 거지같이 입고 다니는 주제에 맨날 술이나 처마시면서 여자 후배들한테 '너는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니?' 같은 소리 하다가 빈축이나 사고 있으니, 그러지 말고 여자 후배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간지가이'로 좌파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 간지라는 것이 패션으로 소화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을 것이니, 패션좌파라는 논의까지 고구마 줄기, 혹은 리좀처럼 따라나온다.

'진보'라고 통칭될 수 있거나 그렇게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세력들이 현재 처한 교착상태를 해소하겠다는 시도는 언제나 바람직하고 옳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① 현재 실재로 존재하는 진보운동의 모습을 왜곡하는데 일조하거나, ② 대체 왜 좌파 어쩌구 하는 논의가 필요한지조차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런 시도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강남좌파건, 간지좌파건, 패션좌파건, 모두 잘못된 인식 하에서 출발한 헛된 노력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우선 간지좌파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의 진보운동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간지좌파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된 논거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할 때 '패션좌파'라는, '운동권도 옷을 잘 입고 다니자'라는 식의 단선적인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허지웅은 '패션좌파'론을 비난하였지만, 논리의 흐름상 '간지좌파'론은 '패션좌파'론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정치인 혹은 정치적 결사체가 내뿜는 '매력'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차원에서의 매력 내지 간지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노무현을 보자.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노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무현의 '간지'가 과연 옷을 잘 입는 것에서 나오는가? 실제 벌어지는 일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노무현은 딱 동네 아저씨같이 보이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간지'를 획득하였다.

통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노무현은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는 정몽준의 간지를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멋지다', '잘생겼다', '외모가 끌린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르만족의 건강한 육체를 운운하는 히틀러의 펑퍼짐한 엉덩이와 2:8 가르마를 떠올려보면, 정치의 영역 내에서 '매력' 혹은 '카리스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 깨닫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막스 베버의 논의를 참조해도 좋다).

'간지좌파'론이 과연 이런 차원에서의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는 것인가? 지금까지 논의된 뉘앙스는 그런 고차원적인 논의와는 큰 관련이 없었고, 그저 '여태까지 좌파들은 너무 후졌다'는 식의 성토에서 나오는 안티테제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렇다,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라고 말해도 그것은 올바른 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정치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그런 '매력'은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운동권들은 왜 매력적이었는가? 그들의 패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억압을 느끼는 대신 편안함을 느끼며 별 일 없이 산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독재'라는 명백한 악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악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질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당시 운동권들의 '간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운동권들의 말투가 갑자기 후져져서도 아니고, 그들의 패션 감각이 언제는 좋았다가 망가져서도 아니다. 운동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운동권은 후져보이는 것이다.

'간지좌파'가 되자는 말은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표현이다. 혼자만의 패션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만의 간지는 성립할 수 없다. 매력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할 때 쓰는 용어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술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매력적인 남자'라고 말하고 다녀보라.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집단이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바라봐야만 한다. 지금 좌파가, 운동권이 매력을 상실한 것은 사람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탈각한 채 그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따라가고 싶은 진보운동'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패션좌파' 같은 기형적 변태를 도출하게 되는데, 앞서 말했듯 두 논의는 모두 지나칠 정도로 피상적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자는 것이 '강남좌파'론의 대전제이기 때문에, '간지좌파'론과 '강남좌파'론의 거리 역시 그리 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소설가 백영옥은 『스타일』의 출간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패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품만 입고,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며 "좋은 집안에서 혜택 받고 자란 소위 '강남 좌파'의 상반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재열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강남좌파란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진보 성향의, 보보스적인 부유층"이라고 한다. 애초에 동아일보에 의해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때에는 '좌파'라는 단어가 으르렁말로, 즉 '강남에 살면서 골프에 미친 빨갱이 이해찬'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하나, 현재 인터넷에서 논의되는 것은 그와 정 반대로, 강북스러운 촌티를 내지 않고도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쪽으로 더 많이 이해되고 있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어떤 금욕주의나 반세속주의를 택하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좌파는 태초부터 반종교적이었고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가치와 쾌락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는 것, 그 칠층탑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강남'이라는 기표를 굳이 차용함으로써 진보진영과 '세상'과의 거리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미심쩍은 기동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남'에 대한 욕망은 결국 '집값 상승'에 대한 욕망이며,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좌파처럼 우아해지자고? 차라리 '양심적인 지방토호'가 되자고 하는 건 어떨까?

본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거주지가 어디인지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긍정하는 것은, '강남'이라는 단어가 한국어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정한 고압적 지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결국 선거일에도 투표하지 못하는 50%의 무주택자를 도외시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정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면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바뀌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바꾼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림으로써 단지 '여당이냐 야당이냐'를 떠나서 더 폭넓은 정치적 선택 앞에 사람들을 마주서게 하는 것, 노동조합의 폭과 교섭력을 늘림으로써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조직된 생산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기본적인 정보 통신 접근권을 보장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없게끔 하는 것 등이 모두 그에 해당될 것이다.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가 말하는 바도 그것이다. 우리는 절반의 국민들만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택할 때, 우리는 이미 나머지 절반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치적 담론의 영역은 전적으로 경험주의적 접근에 의해 다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드러난 진실만큼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강남에 사는 부유한, 우아하게 살지만 세상 문제를 걱정하는 대학생과 교수들은 한 줌도 안 된다. 그런 이들을 머리 속에 하나의 이상으로 놓고 '강남좌파'를 운운할 때, 정작 그곳에 사는 도시빈민들은 정치적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보정당을 '내 집값 떨어뜨리겠다는 놈들'로 바라보는 그런 '강남스러운' 시선을 긍정한 채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람들이 알아서 쫓아오는 진보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공허하고 유치한 발상일 뿐이다. 좌파가 간지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현재 진보 계열의 담론을 긍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옷을 잘 입겠다고 고민할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한 힘있는 담론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손낙구의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강남타령, 간지놀음, 패션쇼, 모두 이제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가자.

2010-02-12

프리즈비의 발명자 월터 프레드릭 모리슨 사망

"Frisbee inventor Walter Frederick Morrison dies aged 90"

via BBC

전 세계의 개 주인과 개들을 행복하게 해준 분. 명복을.

한국어를 어떻게 형성해나갈 것인가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Null Model, 2010년 2월 11일)
'시'의 비밀(Null Model, 2010년 2월 12일)

아 이추판다님이 쓴 이 두 글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어는 '주어'가 아니라 '주제(topic)' 중심의 언어이기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얻은 문법적 상식에 어긋나는 듯 보이는 표현도 실은 단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고 단정한 한국어의 '용례'를 생산"하자는 나의 취지에 대해 반대의 뜻을 표한 후, 스티븐 핑커의 책을 인용하며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를 끝맺는다.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만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문장들이 문법적이었고, 특히 일상 언어의 절대다수가 문법적이었다. 또 중간계층의 대화보다는 노동계층의 대화에서 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더 높았다. 비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뜻밖에도 학식 있는 학자들의 학술회의였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에서 재인용.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문미선, 신효신 옮김, "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동녘사이언스, 44쪽.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인 듯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문법적 타당성'이라는 것의 속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기대고 있는 언어학적 해설은 '현존하는 언어'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어 학술적으로 정리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늘은 파랗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찰 방법으로 하늘을 보면 당연히 대부분의 경우 파란 하늘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가 주제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는 관찰된 사실로부터,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라는 표현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마찬가지 원리로 당연히 너무도 쉽다.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현상에 맞게 짜여진 이론을 들이대고 있는 한, 언제나 결론은 동일하다.

문제는 이러한 반박이 나의 논지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데 있다. '비문'이라는 단어를 엄밀하게 사용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겠으나, 나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주제 중심적'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볼 때 거부감을 느낀다. 물론 통계적으로 따지면 언제나 그 숫자는 미비할 것이며, 전체 한국어 화자 중 그런 언어 생활에 반감을 느끼고 그러한 경향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추판다님은 그에 대해 "이미 있는 걸 또 다시 '생산'하는건 삽질이고, 그저 아무도 쓰지 않을 한국어 닮은 인공언어를 하나 만드는 것 뿐"이라고 대응한다. 여기서 그는 내 주장을 다소 과장하여 논박하고 있다. 인공언어의 창조까지는 바라지 않고, 다만 한국어 사용자들 중 일부라도 현존하는 방향과 다른 쪽을 일부러 지향함으로써 좀 더 정확하고 명료한 표현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수준의 주장을 나는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화이트칼라'와 '윤리'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개인적으로 바빠서 적절한 시점에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댓글들은 흘러 흘러 결국 '가게 점원들의 이상한 높임말'이라는 고전적 떡밥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나는 바로 이런 모습에서 한국어 화자들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를 다루고 작성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앞서서 '올바른'(그것이 어떤 방향이 되었건)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은,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적어도 내게는 그리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과 상관 없는 '타자'인 가게 점원들의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쌍심지를 켜고 사례를 외워둔 다음 기회가 날 때마다 되새기고 곱씹는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 체계 하에서도 이런 행동은 용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나브로' '우리말글'을 '바투어' 나가자는 식의 손쉬운 대응은 이제 그만두고, 혼동의 가능성이 최소화된 한국어 문장을 사용하며, 미적인 완결성을 지니는 문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있다.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 거스름돈 있으시고요'를 탓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며, 윤리적이다.

내게 한국어는 많은 사람들이 쓰는 한국어의 통계적 합산치로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다. 이 결심은 지극히 사적인 차원에서 머무를 수 있으되, 다른 이들에게도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