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15

취향을 위한 투쟁 - 단상들

* 자유라는 것이 결국은 아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부권으로 응축될 수 있다면, 취향은 전적으로 자유의 문제이며 그것은 투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그 무언가가 된다. 왜냐하면 취향은 수묵화의 달처럼,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내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대중적인 취향'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취향은 그러므로 투쟁을 통해 지켜져야 할 그 무언가가 된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입고 먹을 수 있는지를 강제함으로써 자신이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몰취향한 자들로부터, 그들이 '당신과 나는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있군요'라고 선뜻 내미는 미소에 대하여.

* 아퀴나스의 체계 속에서 진리는 곧 선한 것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진리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집착을 보인 자들은 당대에 의해 선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으며, 아름다움을 위해 벌여지는 온갖 시도들은 오늘날까지도 마녀사냥을 당한다.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을 취향으로 유지해야 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나는 동성애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는 자들을 혐오한다. 이것도 취향이라면, 내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가장 저질스러운 교만에 속할 것이다. 당연한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당연한 것을 취향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어깨 위에 여우목도리처럼 걸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인터넷의 군중들이 느끼는 생래적인 반감은, 옳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어떤 심리 테스트가 있다고 해보자. 일본풍의 일러스트를 클릭하고, 심리학적으로 볼 때 다수의 여성에게 포위되는 공포에서 쾌락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를 선택하며, 정서적으로 고등학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남성인 피시험자에게 '당신이 좋아할만한 게임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결과가 나왔다. 두근두근 메모리얼, 동급생, 투하트.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외치는 것이 습관화된 자들이 과연 이 조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을 다 해봤고 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취향을 추출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 취향은 대체 무슨 취향인가? 대체 어떻게 존중해줘야 하는가?

* '나 취향 좀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요'라는 뉘앙스로 말하는 사람들의 뻔한 취향. 미국 대중문화의 몇몇 코드, 심슨, 스타워즈, 뱀파이어(드라큘라가 아니다), etc. 특히 영국식 블랙 유모어가 좋아요. 미쉘 공드리는 좀 아닌 것 같지만, 영상은 훌륭하죠.

*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그래픽 노블이 훌륭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출판도 비즈니스고, 팔릴만 한 것을 떼와서 파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작품들이 만들어낸 풍성한 대중문화적 결실을 바라보면서 원작을 음미한다. 그런 것들을 보는 스스로의 취향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7년근 인삼은 몸에 좋다는 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 알랭 드 보통과 보르헤스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딱 하나다. 읽으면서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기 좋다는 것. 지금 내가 지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고 남들이 생각할 것이라는 가상의 서사 속에 스스로를 배치할 수 있게 해주는 작가라는 것. 움베르토 에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수자 취향이라고 생각하건 말건, 한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심지어 이탈리아보다 먼저, 에코 전집이 출간되었다. 전집을 사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출판계의 소수자들. 그들의 지름에 영광 있을지어다.

* 나는 내게 어떤 취향다운 취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을만큼 나는 충분히 무언가를 음미하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와 서로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취향을 가진 우리'에 속하는 일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당신은 나의 취향을 위해 투쟁할 수 없고, 나도 당신의 취향을 위해 대신 싸워줄 수 없다. 취향을 갖는다는 것은 취향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취향은 자유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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