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3

강남, 간지, 패션

강남좌파, 간지좌파, 패션좌파 따위의 어휘들은 명료한 개념적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대중들이 '좌파'라는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만약 가지고 있다면, 통상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들이다.

사유재산에 반대하고 계급차별 철폐만을 부르짖는 기존의 좌파와 달리, '강남좌파'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 주는 풍요로움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운동권들은 옷도 거지같이 입고 다니는 주제에 맨날 술이나 처마시면서 여자 후배들한테 '너는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니?' 같은 소리 하다가 빈축이나 사고 있으니, 그러지 말고 여자 후배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간지가이'로 좌파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 간지라는 것이 패션으로 소화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을 것이니, 패션좌파라는 논의까지 고구마 줄기, 혹은 리좀처럼 따라나온다.

'진보'라고 통칭될 수 있거나 그렇게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세력들이 현재 처한 교착상태를 해소하겠다는 시도는 언제나 바람직하고 옳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① 현재 실재로 존재하는 진보운동의 모습을 왜곡하는데 일조하거나, ② 대체 왜 좌파 어쩌구 하는 논의가 필요한지조차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런 시도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강남좌파건, 간지좌파건, 패션좌파건, 모두 잘못된 인식 하에서 출발한 헛된 노력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우선 간지좌파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의 진보운동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간지좌파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된 논거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할 때 '패션좌파'라는, '운동권도 옷을 잘 입고 다니자'라는 식의 단선적인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허지웅은 '패션좌파'론을 비난하였지만, 논리의 흐름상 '간지좌파'론은 '패션좌파'론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정치인 혹은 정치적 결사체가 내뿜는 '매력'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차원에서의 매력 내지 간지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노무현을 보자.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노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무현의 '간지'가 과연 옷을 잘 입는 것에서 나오는가? 실제 벌어지는 일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노무현은 딱 동네 아저씨같이 보이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간지'를 획득하였다.

통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노무현은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는 정몽준의 간지를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멋지다', '잘생겼다', '외모가 끌린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르만족의 건강한 육체를 운운하는 히틀러의 펑퍼짐한 엉덩이와 2:8 가르마를 떠올려보면, 정치의 영역 내에서 '매력' 혹은 '카리스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 깨닫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막스 베버의 논의를 참조해도 좋다).

'간지좌파'론이 과연 이런 차원에서의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는 것인가? 지금까지 논의된 뉘앙스는 그런 고차원적인 논의와는 큰 관련이 없었고, 그저 '여태까지 좌파들은 너무 후졌다'는 식의 성토에서 나오는 안티테제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렇다,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라고 말해도 그것은 올바른 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정치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그런 '매력'은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운동권들은 왜 매력적이었는가? 그들의 패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억압을 느끼는 대신 편안함을 느끼며 별 일 없이 산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독재'라는 명백한 악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악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질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당시 운동권들의 '간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운동권들의 말투가 갑자기 후져져서도 아니고, 그들의 패션 감각이 언제는 좋았다가 망가져서도 아니다. 운동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운동권은 후져보이는 것이다.

'간지좌파'가 되자는 말은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표현이다. 혼자만의 패션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만의 간지는 성립할 수 없다. 매력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할 때 쓰는 용어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술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매력적인 남자'라고 말하고 다녀보라.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집단이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바라봐야만 한다. 지금 좌파가, 운동권이 매력을 상실한 것은 사람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탈각한 채 그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따라가고 싶은 진보운동'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패션좌파' 같은 기형적 변태를 도출하게 되는데, 앞서 말했듯 두 논의는 모두 지나칠 정도로 피상적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자는 것이 '강남좌파'론의 대전제이기 때문에, '간지좌파'론과 '강남좌파'론의 거리 역시 그리 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소설가 백영옥은 『스타일』의 출간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패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품만 입고,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며 "좋은 집안에서 혜택 받고 자란 소위 '강남 좌파'의 상반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재열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강남좌파란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진보 성향의, 보보스적인 부유층"이라고 한다. 애초에 동아일보에 의해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때에는 '좌파'라는 단어가 으르렁말로, 즉 '강남에 살면서 골프에 미친 빨갱이 이해찬'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하나, 현재 인터넷에서 논의되는 것은 그와 정 반대로, 강북스러운 촌티를 내지 않고도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쪽으로 더 많이 이해되고 있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어떤 금욕주의나 반세속주의를 택하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좌파는 태초부터 반종교적이었고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가치와 쾌락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는 것, 그 칠층탑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강남'이라는 기표를 굳이 차용함으로써 진보진영과 '세상'과의 거리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미심쩍은 기동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남'에 대한 욕망은 결국 '집값 상승'에 대한 욕망이며,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좌파처럼 우아해지자고? 차라리 '양심적인 지방토호'가 되자고 하는 건 어떨까?

본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거주지가 어디인지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긍정하는 것은, '강남'이라는 단어가 한국어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정한 고압적 지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결국 선거일에도 투표하지 못하는 50%의 무주택자를 도외시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정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면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바뀌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바꾼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림으로써 단지 '여당이냐 야당이냐'를 떠나서 더 폭넓은 정치적 선택 앞에 사람들을 마주서게 하는 것, 노동조합의 폭과 교섭력을 늘림으로써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조직된 생산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기본적인 정보 통신 접근권을 보장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없게끔 하는 것 등이 모두 그에 해당될 것이다.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가 말하는 바도 그것이다. 우리는 절반의 국민들만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택할 때, 우리는 이미 나머지 절반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치적 담론의 영역은 전적으로 경험주의적 접근에 의해 다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드러난 진실만큼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강남에 사는 부유한, 우아하게 살지만 세상 문제를 걱정하는 대학생과 교수들은 한 줌도 안 된다. 그런 이들을 머리 속에 하나의 이상으로 놓고 '강남좌파'를 운운할 때, 정작 그곳에 사는 도시빈민들은 정치적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보정당을 '내 집값 떨어뜨리겠다는 놈들'로 바라보는 그런 '강남스러운' 시선을 긍정한 채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람들이 알아서 쫓아오는 진보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공허하고 유치한 발상일 뿐이다. 좌파가 간지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현재 진보 계열의 담론을 긍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옷을 잘 입겠다고 고민할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한 힘있는 담론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손낙구의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강남타령, 간지놀음, 패션쇼, 모두 이제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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