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2

한국어를 어떻게 형성해나갈 것인가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Null Model, 2010년 2월 11일)
'시'의 비밀(Null Model, 2010년 2월 12일)

아 이추판다님이 쓴 이 두 글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어는 '주어'가 아니라 '주제(topic)' 중심의 언어이기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얻은 문법적 상식에 어긋나는 듯 보이는 표현도 실은 단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고 단정한 한국어의 '용례'를 생산"하자는 나의 취지에 대해 반대의 뜻을 표한 후, 스티븐 핑커의 책을 인용하며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를 끝맺는다.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만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문장들이 문법적이었고, 특히 일상 언어의 절대다수가 문법적이었다. 또 중간계층의 대화보다는 노동계층의 대화에서 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더 높았다. 비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뜻밖에도 학식 있는 학자들의 학술회의였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에서 재인용.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문미선, 신효신 옮김, "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동녘사이언스, 44쪽.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인 듯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문법적 타당성'이라는 것의 속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기대고 있는 언어학적 해설은 '현존하는 언어'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어 학술적으로 정리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늘은 파랗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찰 방법으로 하늘을 보면 당연히 대부분의 경우 파란 하늘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가 주제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는 관찰된 사실로부터,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라는 표현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마찬가지 원리로 당연히 너무도 쉽다.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현상에 맞게 짜여진 이론을 들이대고 있는 한, 언제나 결론은 동일하다.

문제는 이러한 반박이 나의 논지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데 있다. '비문'이라는 단어를 엄밀하게 사용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겠으나, 나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주제 중심적'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볼 때 거부감을 느낀다. 물론 통계적으로 따지면 언제나 그 숫자는 미비할 것이며, 전체 한국어 화자 중 그런 언어 생활에 반감을 느끼고 그러한 경향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추판다님은 그에 대해 "이미 있는 걸 또 다시 '생산'하는건 삽질이고, 그저 아무도 쓰지 않을 한국어 닮은 인공언어를 하나 만드는 것 뿐"이라고 대응한다. 여기서 그는 내 주장을 다소 과장하여 논박하고 있다. 인공언어의 창조까지는 바라지 않고, 다만 한국어 사용자들 중 일부라도 현존하는 방향과 다른 쪽을 일부러 지향함으로써 좀 더 정확하고 명료한 표현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수준의 주장을 나는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화이트칼라'와 '윤리'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개인적으로 바빠서 적절한 시점에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댓글들은 흘러 흘러 결국 '가게 점원들의 이상한 높임말'이라는 고전적 떡밥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나는 바로 이런 모습에서 한국어 화자들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를 다루고 작성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앞서서 '올바른'(그것이 어떤 방향이 되었건)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은,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적어도 내게는 그리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과 상관 없는 '타자'인 가게 점원들의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쌍심지를 켜고 사례를 외워둔 다음 기회가 날 때마다 되새기고 곱씹는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 체계 하에서도 이런 행동은 용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나브로' '우리말글'을 '바투어' 나가자는 식의 손쉬운 대응은 이제 그만두고, 혼동의 가능성이 최소화된 한국어 문장을 사용하며, 미적인 완결성을 지니는 문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있다.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 거스름돈 있으시고요'를 탓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며, 윤리적이다.

내게 한국어는 많은 사람들이 쓰는 한국어의 통계적 합산치로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다. 이 결심은 지극히 사적인 차원에서 머무를 수 있으되, 다른 이들에게도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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