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16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미디어스에 올라온 제 칼럼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업데이트되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블로그에 게시하지 못했네요. 전문을 올려둡니다.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지난해 10월, 영국. 한 소녀가 실종됐다.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고 하루종일 채팅하고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 17세의 소녀 애쉴리 미쉘 홀(Ashleigh Michelle Hall)은 한창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소년과 데이트 약속을 잡은 차였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고,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1996년 두 명의 성매매 여성을 흉기로 위협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은 피터 채프먼(Peter Chapman)은 2001년 가석방되었다. 그는 범행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접속했고, 어떤 잘생긴 젊은 소년의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피터 카트라이트(Peter Cartwright)라는 가명으로 접속한 그는 여러 차례 채팅을 통해 홀 양의 환심을 샀고, 결국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33세지만 그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자신의 추한 외모를 역으로 이용해, 피터의 아버지 행세를 함으로써 피해자를 안심시켜 차에 타도록 했다. 홀 양은 차에 탄 후 곧바로 습격당하고 성폭행당한 후 살해되었다.

한편 2010년 2월 24일 한국, 밤 9시 무렵.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주택에서 이모(13)양이 실종되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을 발견한 경찰은 비공개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사흘 후 피해자의 집에 남아있던 족적을 토대로 김길태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공개 수배에 나섰다. 김길태는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결백을 주장하였고 그 사실은 뒤늦게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 3월 3일, 경찰은 김길태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하고 추적하였지만 체포에 실패하였고, 결국 3월 6일 사건 현장 인근 주택의 물탱크에서 이모 양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이후 10일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부터 사건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비상근무에 돌입했고 피의자로 김길태를 특정했다. 결국 3월 10일, 시신 발견 후 5일만에 김길태는 부산 덕포시장 인근에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범행 동기, 과정, 이후 도주 경로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3월 11일 새벽 3시 현재까지 김길태는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범인을 살해하고 은신하고 검거되기까지, 그의 동선은 현장에서 반경 300미터를 넘어서지 않았다.

전자의 사건은 후자의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국내 언론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사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단순한 형사사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 피터 채프먼에 대한 수사가 끝나고 그의 유죄가 확정된 후, 영국 경찰은 성범죄자에 대한 온라인 감시를 강화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법정은 범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고, 사건을 담당한 피터 폭스(Peter Fox)판사는 범인이 “젊은 여성들에게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이며, 가석방될 것을 예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앨런 존슨(Alan Johnson) 영국 내무부 장관은 “우리는 이 사건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며 “우리는 성범죄자들이 온라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바로 그 내용이 연합뉴스에 의해 인용(기사보기)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정을 내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 코너, 『우물 밖 개구리』의 첫 꼭지에서 바로 이 사건을 다루겠다고. 이 인용은 영국에서 사건이 벌어진 맥락과 거의 무관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사건의 약탈’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내막을 들춰보도록 하자.

홀 사건의 범인 채프먼은 피해자를 차에 태워 성폭행하고 살해한 후 곧장 유기했다. 그는 범행을 저지른 후 하루도 되지 않아 검거됐다. 피의자의 시신을 버린 후 도주하다가 교통경찰에게 붙잡혔는데, 그 교통경찰은 채프먼이 제대로 면허 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또한 채프먼의 언행 등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한 경찰은 곧장 그를 경찰서로 연행하여 심문한 끝에, 바로 당일에 범인의 인도를 받아 피해자 홀 양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은 매우 짧고 간결했다. 경찰은 범인이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사건을 수사했고 정의의 실현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딸을 잃은 분노에 ‘범인을 죽여야 한다. 사형제를 부활시켜라’고 외치던 홀 양의 어머니도 차츰 평정을 되찾았다. 채프먼에게 종신형이 선고되던 날 그는 ‘저런 사람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피해자의 가족,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도 결국은 사형제가 아닌 종신형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국 언론에서 인용된 것처럼, BBC와의 인터뷰에서 앨런 존슨 내무부 장관은 성범죄자의 온라인 활동을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민주당의 쉐도우 캐비넷 중 한 사람인 크리스 헌(Chris Huhne)은 성범죄자 등록•관리에 인터넷 사용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미국에서 일반화된 것처럼 성범죄자들의 IP나 이메일 주소까지 등록할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정책은 경찰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검열하도록 할 것”이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치권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혹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한국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다르다. 경찰은 사건이 벌어진지 10여 일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이모 양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이 발견된 위치와 범인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 모두 한 동네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국적으로 수배망을 넓히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고 ‘사후적’으로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의자 김길태 씨가 진범이라는 것은 법원에 의해 확정된 사실이 아님에도, 경찰과 언론은 이미 그를 진짜 범인으로 가정한 채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정작 그 과정에서 완전히 어긋나버린 경찰의 초동수사 과정에 대한 책임은 사라져버렸다.

정치권과 경찰의 향후 대책 역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현재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전자발찌의 ‘소급 입법’만이 해답인 양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전자발찌 착용이 시행되기 전에 석방된 성범죄자들에게도 그것을 소급해야 한다는 것을 ‘해법’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범죄 발생에 대한 사전적 예방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이렇게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았던 것의 상당부분은 경찰의 책임이다. 그 지점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채 전자발찌에만 매몰된, 그것도 여야를 막론하고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공포스럽다.

에밀 뒤르켐은 범죄를 사회에 발생하는 질병과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예방할 수는 있으되 온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모 양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와는 별개로, 그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올바른 사회적 에너지로 승화시킬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전자발찌, 전자발찌, 전자발찌! 이것은 결코 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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