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6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자대에 온지 나흘째 되는 금요일이다. 화요일부터 겪었던 일들을 통해 나는,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현재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권위 혹은 권력관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뜻한다.

579일 남은 군 복무기간이 한없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설령 나의 신병기간이 끝나고 내가 상당한 고참이 되어 지금처럼 불편하게 살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군생활 자체가 편안한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입대 순서에 따라 경례해야 하는 것 만큼이나, 같은 순서로 경례를 받는 것 역시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이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남아있어야 한다는 당위적 지향성,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벗어난 고립된 상태의 개인의 존재 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개인들 사이에서의 경제적 정의의 실현에 관심이 많고, 계층간의 갈등과 불화가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에 의해 해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본질적 측면, 혹은 '개인성'의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고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

많은 경우 개인의 자유란 궁극적으로 '선택의 자유'라고 간주된다. 나를 가스실에 처넣겠다는 나치를 향해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경우에도 박탈될 수 없는 선택의 자유.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은, 그러한 종류의 자유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군대라는 것이다. KTA 3주차 월요일, 카투사 플래너 사용방법을 교육받을 때의 일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대한 감상적인 요약과 함께, 어떤 경우에도 모든 일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통속적 불교의 메시지로 그 내용은 쪼그라들어 버렸다. 비약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것을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으로 놓고 일방의 손을 들어주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군대에서 가르친다니.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떠한 경우에도 양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 상황에 처한 개인이 아닌 그 개인을 통제하는 시스템에 의해 발화되는 순간, 그것은 그 궁극적 자유를 제외한 수많은 것들을 시스템이 임의로 제한하는 행동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작동하게 된다. 군대 오니까 좆같지? 그래도 네게는 이 상황 속에서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자기개발서적을 읽는 군인들. 자신의 꼬리를 물어뜯고 있는 자유주의. 가장 휴머니즘적으로 표현된 자유주의의 한 모습이 군대 내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으로 이야기되는 광경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개인들의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체제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외부로부터의 구체적인 억압과는 별개로 나는 그 억압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은 그와 상당히 다른 결을 띈다. 그것 역시 근본적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오직 내면 속에서 시작되고 결정되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 선언은 나의 외면에 있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 그 대상과의 구체적인 관계,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 등.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명제를 발화하는 주체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다. 적어도 '나는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주체보다는 그렇다. 물론 4성 장군도 전자와 같은 말을 할 수야 있지만 그것은 상당히 넌센스처럼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우, 자유주의는 내면적 자유를 향해 침잠해가는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본래적 의도와 상반된다.

두 명제의 차이는 왜 자유주의가 끝까지 부정적인 서술에 더 가깝게 머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가진 힘과 그것을 제약하는 외부적인 권력의 대립관계를 전제한다. 그런데 만약 개인의 힘을 긍정적으로 서술한다면, 그러한 전개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권력은 그 긍정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약한다. 군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네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을 제공할 수도 있는 권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텅 빈 서술은 그와 정 반대다. 그것은 화자에게는 긍정적인 서술이 아니나, 청자 즉 권력에게는 분명 어떠한 행위를 하겠다는 예고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그와 같은 표현을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는 대단히 양면적이고 역설적인 사상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권력론과 인식론을 함유하며, 동시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론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나는 바로 그런 것들을 연구하고 싶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는 자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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