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28

[별별시선]‘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넘어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1988년 10월로 돌아가보자. 그해 10월8일 한 젊은 범죄자가 일당들과 함께 호송 중 탈출했다. 그는 560만원을 훔쳤는데 새로 도입된 보호감호제 때문에 징역만 17년에 10년의 보호감찰 처분이 덧붙었다. 560만원을 훔쳤는데 감옥에서 27년이다. 반면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밝혀진 것만 수십억원에 달하는 사기 및 횡령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고작 2년 정도 옥살이를 한 후 풀려났다.

절도는 타인이 점유하고 있는 재물을 훔치는 것이고, 횡령은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재물을 훔치는 것이다. 두 범죄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도둑질이다. 하지만 1988년의 대한민국은 560만원을 훔친 사람에게 27년간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명령하면서 수십억원을 훔친 사람은 고작 2년 만에 그 죄를 사하여 주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바로 그런 부조리하에서 터져나온 절규였다.

‘지강헌사건’이 벌어진 후 벌써 26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느리지만 분명 우리 사회는 진보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회장님’들은 얼마를 횡령하고 무슨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배임을 저지르건, 거의 무조건적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음을 떠올려보자. 당시에는 ‘기업인 가석방’ 따위는 논의의 대상도 아니었다. 애초에 ‘회장님’들이 감옥에 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갇혀 있는 ‘회장님’을 가석방해야 한다는 여론몰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2014년의 대한민국은 1988년보다 분명 법 앞의 평등이 조금씩이나마 실현되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잠시 눈을 감옥 밖으로 돌려보자. 굳이 남의 돈을 훔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늘 겪으며 살아간다. 교통사고의 과실 비율 계산 및 수리비 산정 방식 때문에 그렇다. 고급차를 탄 사람과 소형차를 탄 사람이 교통사고를 냈는데, 과실 비율이 9 대 1로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고급차를 탄 사람이 9배는 더 잘못했지만, 그의 차는 고급차이기 때문에 수리비가 5000만원이고, 소형차는 100만원이다.

이 경우 우리의 도로교통법은 총 수리비 5100만원을 9 대 1로 분할한다. 소형차 운전자는 사실상 본인 잘못이 매우 경미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차 수리비 100만원뿐 아니라 상대방 차량의 수리비 410만원을 더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도로 위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할 수 있다. 값싼 차를 타고 다니면 설령 내 과실이 매우 적더라도, 비싼 차와 충돌했을 경우 덤터기를 쓰게 된다는 말이다.

도로 위의 법이 이런 식이니, ‘운전대만 잡으면 성격이 확 달라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내가 고급차를 몰고 있다면 값싼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 앞에서는 운전을 좀 함부로 해도 된다. 사고 나면 가난뱅이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형차 운전자는 고급차 운전자 앞에서 잘못도 없는데 쩔쩔매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지금껏 우리는 이토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인 가석방’에 반대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시민사회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도로 위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조장하는 교통사고 과실 산정 방식의 변화를 촉구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선진국은 교통사고 발생 시 두 운전자 중 조금이라도 과실이 큰 사람이 수리비를 전액 부담하는, 이른바 ‘51% 룰’을 적용한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모두 적극적으로 방어 운전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교통 법규를 알아서 잘 지키는 가운데 갓 운전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은 경찰과 공권력에 대한 존중심을 익힌다.

단지 감옥에 갇힌 ‘회장님’들이 형량을 다 채우고 나오는 것을 넘어서, 일상적으로 타인과 부대끼는 도로 위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하지 않는 사회를 우리는 원한다.

법 앞의 평등과 예측 가능한 절차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2014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기원해보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282045225&code=990100&s_code=ao122

2014-12-26

'차세대 토착화 현상(second-generation indigenization phenomenon)'

이런 태도의 부각을 도어(Ronald Dore)는 '차세대 토착화 현상(second-generation indigenization phenomenon)'이라고 표현하였다. 서구의 식민지였던 중국이나 독립국이었던 일본 같은 나라의 '근대화' 세대나 '해방' 세대는 대개 외국(서구) 대학에서 서구어로 교육을 받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처음 외국에 나갔다는 이유도 부분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은 서구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빠르게 흡수하였다. 반면에 2세대는 1세대가 만든 자기 나라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며 외국어가 아니라 자국어로 강의를 듣는다. 이 대학들은 세계적 본토 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며 지식은 대체로 범위가 제한되었거나 수준이 낮은 번역에 의해 토착화된다. 이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서구에서 교육받은 1세대의 지배에 반감을 느끼며 그래서 외세 배격 운동에 쉽게 동조할 수 있다. 야심 만만한 젊은 지도자들은 서구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부국 강병의 길을 더 이상 서구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자기 사회의 가치관과 문화로 복귀한다.

- 새뮤얼 헌팅턴, 이희재 옮김, 『문명의 충돌』(서울: 김영사, 1997), 119쪽.

2014-12-19

[판결문]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사건 (2013헌다1 통합진보당 해산, 2013헌사907 정당활동정지가처분신청)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사건

(2013헌다1 통합진보당 해산, 2013헌사907 정당활동정지가처분신청)

선고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재판관 8(인용) : 1(기각)의 의견으로, 피청구인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그 소속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한다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피청구인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한 것은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고, 이러한 피청구인의 실질적 해악을 끼치는 구체적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 외에 다른 대안이 없으며,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비례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고, 위헌정당의 해산을 명하는 비상상황에서는 국회의원의 국민 대표성은 희생될 수밖에 없으므로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은 위헌정당해산 제도의 본질로부터 인정되는 기본적 효력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당해산의 요건은 엄격하게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하는데, 피청구인에게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없고, 피청구인의 강령 등에 나타난 진보적 민주주의 등 피청구인의 목적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으며, 경기도당 주최 행사에서 나타난 내란 관련 활동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만 그 활동을 피청구인의 책임으로 귀속시킬 수 없고 그 밖의 피청구인의 활동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재판관 김이수의 반대의견이 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청구인이 신청한 정당활동정지가처분신청은 기각하였다.

2014. 12. 19.

헌법재판소 공보관실

사건의 개요 및 심판의 대상

사건의 개요

- 청구인은 2013. 11. 5. 피청구인의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피청구인의 해산 및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에 대한 의원직 상실을 구하는 이 사건 심판을 청구하였다.

심판의 대상

-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

-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을 선고할 것인지 여부와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에 대한 의원직 상실을 선고할 것인지 여부

※ 피청구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과의 관련성이 인정되는 범위에서 판단의 자료로 삼을 수 있으나, 민주노동당의 목적이나 활동 자체가 이 사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이유의 요지

청구의 적법성 - 적법

- 대통령이 직무상 해외 순방 중인 경우에는 국무총리가 그 직무를 대행할 수 있으므로,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이 사건 정당해산심판 청구서 제출안이 의결되었다고 하여 그 의결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

- 국무회의에 제출되는 의안은 긴급한 의안이 아닌 한 차관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나, 의안의 긴급성에 관한 판단은 정부의 재량이므로,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 등이 관련된 내란 관련 사건이 발생한 상황에서 제출된 이 사건 정당해산심판청구에 대한 의안이 긴급한 의안에 해당한다고 본 정부의 판단에 재량의 일탈이나 남용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와 정당해산심판의 사유

○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

정당해산심판제도는 정당 존립의 특권 특히 정부의 비판자로서 야당의 존립과 활동을 특별히 보장하고자 하는 헌법제정자의 규범적 의지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제도로 인해서 정당 활동의 자유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한계 역시 설정되어 있다.

○ 정당해산심판의 사유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 중 어느 하나라도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어야 한다.

헌법 제8조 제4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모든 폭력적ㆍ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과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정치적 질서를 말한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지 않는 한 정당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념적 지향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나 저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강제적 정당해산은 핵심적인 정치적 기본권인 정당 활동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 제한이므로 헌법 제37조 제2항이 규정하고 있는 비례의 원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 - 위배

○ 피청구인의 목적

정당의 강령은 그 자체로 다의적이고 추상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피청구인이 지도적 이념으로 내세우는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그 자체로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이른바 자주파에 의해 피청구인 강령에 도입되었다.

자주파는 이른바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NL) 계열로 우리 사회를 미 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 반(半)봉건사회 또는 반(半)자본주의사회로 이해하고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파악하고 계급적 지배 체제의 극복을 중시했던 민중민주(People‘s Democracy, PD) 계열 또는 평등파와 구별된다.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추구하는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연합의 주요 구성원 및 이들과 이념적 지향점을 같이하는 당원 등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자주파에 속하고 그들의 방침대로 당직자 결정 등 주요 사안을 결정하며 당을 주도하여 왔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과거 민혁당 및 영남위원회, 실천연대, 일심회, 한청 등에서 자주ㆍ민주ㆍ통일 노선을 제시하면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북한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였다. 이들은 북한 관련 문제에서는 맹목적으로 북한을 지지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무리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이석기가 주도한 내란 관련 사건에도 다수 참석하였고 이 사건 관련자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우리나라를 미국과 외세에 예속된 천민적 자본주의 또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인식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자본가 계급의 정권으로서 자본가 내지 특권적 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민중을 착취 수탈하고 민중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강탈한 구조적 불평등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민중이 주권을 가지는 민중민주주의 사회로 전환하여야 하는데 민족해방문제가 선결과제이므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로 안정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 정부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설정하였다. 한편,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연방제 통일을 추구하고 있는데,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이후 추진할 통일국가의 모습은 과도기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거친 사회주의 체제이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우리 사회가 특권적 지배계급이 주권을 행사하는 거꾸로 된 사회라는 인식 아래 대중투쟁이 전민항쟁으로 발전하고 저항권적 상황이 전개될 경우 무력행사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헌법제정에 의한 새로운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여 집권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이석기 등의 내란 관련 사건으로 현실로 확인되었다.

○ 피청구인의 활동

이석기를 비롯한 내란 관련 회합 참가자들은 경기동부연합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고, 당시 정세를 전쟁 국면으로 인식하고 이석기의 주도 아래 전쟁 발발 시 북한에 동조하여 대한민국 내 국가기간시설의 파괴, 무기 제조 및 탈취, 통신 교란 등 폭력 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하였다.

내란 관련 회합의 개최 경위, 참석자들의 피청구인 당내 지위 및 역할, 이 회합이 피청구인의 핵심 주도세력에 의하여 개최된 점, 회합을 주도한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의 수장으로서의 지위 및 이 사건에 대한 피청구인의 전당적 옹호 및 비호 태도 등을 종합하면, 이 회합은 피청구인의 활동으로 귀속된다.

그 밖에 비례대표 부정경선,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 및 관악을 지역구 여론 조작 사건 등은 피청구인 당원들이 토론과 표결에 기반하지 않고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관철시키려고 한 것으로서 선거제도를 형해화하여 민주주의 원리를 훼손하는 것이다.

○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이를 기초로 통일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북한을 추종하고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거의 모든 점에서 전체적으로 같거나 매우 유사하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민중민주주의 변혁론에 따라 혁명을 추구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고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도 게양하지 않는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석기 등 내란 관련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사정과 피청구인 주도세력이 피청구인을 장악하고 있음에 비추어 그들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의 목적과 활동으로 귀속되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은 1차적으로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최종적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조선노동당이 제시하는 정치 노선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당의 특정한 계급노선과 결부된 인민민주주의 독재방식과 수령론에 기초한 1인 독재를 통치의 본질로 추구하는 점에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피청구인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민항쟁이나 저항권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든 폭력적ㆍ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기본원리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에 정면으로 저촉된다.

내란 관련 사건,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 및 관악을 지역구 여론 조작 사건 등 피청구인의 활동들은 내용적 측면에서는 국가의 존립, 의회제도, 법치주의 및 선거제도 등을 부정하는 것이고, 수단이나 성격의 측면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ㆍ위계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민주주의 이념에 반하는 것이다.

피청구인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고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이나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을 일으키는 등 활동을 하여 왔는데 이러한 활동은 유사상황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피청구인 주도세력의 북한 추종성에 비추어 피청구인의 여러 활동들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성이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란 관련 사건에서 피청구인 구성원들이 북한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의 존립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구체적 위험성을 배가한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피청구인의 위와 같은 진정한 목적이나 그에 기초한 활동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하였다고 판단되므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 비례의 원칙에 위배되는지 여부

피청구인은 적극적이고 계획적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격하여 그 근간을 훼손하고 이를 폐지하고자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성을 시급히 제거하기 위해 정당해산의 필요성이 인정된다.

대남혁명전략에 따라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는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도 고려하여야 한다.

위법행위가 확인된 개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당 자체의 위헌성이 제거되지는 않으며,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언제든 그들의 위헌적 목적을 정당의 정책으로 내걸어 곧바로 실현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합법정당을 가장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정당보조금을 받아 활동하면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피청구인의 고유한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결정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정당해산결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법익은 정당해산결정으로 초래되는 피청구인의 정당활동 자유의 근본적 제약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일부 제한이라는 불이익에 비하여 월등히 크고 중요하다.

결국,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가해지는 위험성을 실효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부득이한 해법으로서 헌법 제8조 제4항에 따라 정당화되므로 비례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 여부 - 상실

○ 국회의원의 국민대표성과 정당 기속성

국회의원은 국민 전체의 대표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소속 정당의 이념을 대변하는 정당의 대표자로서도 활동한다. 공직선거법 제192조 제4항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대하여 소속 정당의 해산 등 이외의 사유로 당적을 이탈하는 경우 퇴직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의 의미는 정당이 자진 해산하는 경우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퇴직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국회의원의 국민대표성과 정당기속성 사이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조화시켜 규율하고 있다.

○ 정당해산심판제도의 본질적 효력과 의원직 상실 여부

엄격한 요건 아래 위헌정당으로 판단하여 정당 해산을 명하는 것은 헌법을 수호한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러한 비상상황에서는 국회의원의 국민 대표성은 부득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

해산되는 위헌정당 소속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유지한다면 위헌적인 정치이념을 정치적 의사 형성과정에서 대변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활동을 허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그 정당이 계속 존속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오므로, 해산 정당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을 상실시키지 않는 것은 결국 정당해산제도가 가지는 헌법 수호 기능이나 방어적 민주주의 이념과 원리에 어긋나고 정당해산결정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헌법재판소의 해산결정으로 해산되는 정당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은 위헌정당해산 제도의 본질로부터 인정되는 기본적 효력이다.

재판관 김이수의 반대의견의 요지

※ 이 사건 심판청구의 적법성, 그리고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와 정당해산심판의 사유에 대하여는 법정의견과 의견을 같이함.

○ 정당해산요건의 엄격한 해석, 적용의 요구

정당해산요건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그 문언적 의미를 제한적으로 이해하여야 하고,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 내지 근거를 선별함에 있어서는 당해 정당과의 관련성을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의 판단자료는 대부분 표현행위이므로 그 의미는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해석 방법론에 의하여 확정되어야 한다. 또 정당해산의 요건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는 어떤 논리적 오류나 비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 피청구인에게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점 자체가 엄격하게 증명되어야 할 사항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청구인의 논증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피청구인은 당비를 납부하는 진성 당원의 수만 3만 여명에 이르는 정당인데, 그 대다수 구성원의 정치적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 논증하는 과정에서 구성원 중 극히 일부의 지향을 피청구인 전체의 정견으로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 피청구인의 일부 구성원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머지 구성원도 모두 그러할 것이라는 가정은 부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을 전체에 부당하게 적용하는 것으로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자주파가 주축이 된 피청구인의 목적이 1차적으로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최종적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다는 법정의견의 판단이 정당해산심판 사유를 엄격하게 해석, 적용한 결과인지 의문이다.

○ 피청구인의 목적 -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음

피청구인의 강령이나 이를 구체화하는 문헌들을 종합해 볼 때,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민중이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피청구인의 선언은, 일하는 사람, 민중에 해당하는 계급과 계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극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피청구인의 강령상 ‘진보적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른바 진보적 정치세력들에 의하여 수십 년에 걸쳐 주장되고 형성된 여러 논리들과 정책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조합한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광의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또 법정의견이 보는 것처럼 피청구인이 북한식 사회주의 추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였다고 볼 수 있는 증거도 없다.

한편 자주파의 대북정책이나 입장이 우리 사회의 다수 인식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고 자주파가 친북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자주파 전체가 북한을 무조건 추종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민주노동당에서 피청구인에 이르는 분당과 창당 및 재분당 과정을 통하여 피청구인은 민주노동당보다 인적으로 축소된 상태이고 자주파나 이에 우호적인 사람들의 비중이 커졌다고 볼 수 있으나, 민주노동당 구성원 가운데 종북 성향을 가진 사람만이 피청구인에 남았다고 볼 수도 없다.

청구인은 민혁당 잔존세력이 피청구인을 장악하였다고 주장하나, 피청구인 구성원 가운데 민혁당 조직원이나 하부 조직원 또는 관계자였던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직접 유죄판결을 받았거나 판결에서 조직원으로 언급된 단지 몇 명에 불과하고, 경기동부연합이 과거 민혁당 또는 민혁당 조직원 등에 의하여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나,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경남연합이 어떤 이념을 공유하거나 지지하여, 통일적으로, 단결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다.

피청구인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구조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구조적이고 급진적인 변혁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확립된 질서에 도전한다는 것만으로는 민주 국가에서 금지되는 행위가 되지 않는다. 피청구인이 표방하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 되는 사회’나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자주적 정부’는 오래된 정치철학적 전통 속에 있는 주장으로 각국의 다양한 진보정당들이 같은 취지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으며 피청구인이 독창적으로 구성하여 제기한 것이 아니다. 피청구인이 현존하는 정치ㆍ경제 질서에 부정적 의사를 표시하고, 선거를 통한 집권 이외에 예외적으로 헌법질서가 중대하게 침해받는 경우에는 저항권에 의한 집권이 가능하다고 언급하고 있다는 사정만으로, 폭력적 수단이나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수단으로 변혁을 추구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의 전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다.

피청구인이 사회주의적 요소를 내포하는 강령을 내세우고 있고, 북한도 적어도 대외적ㆍ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피청구인의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일정 부분 유사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피청구인이 북한을 추종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유사성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정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적 정신과 시각이 북한과의 연계나 북한에 대한 동조라는 막연한 혐의로 좌절되는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점만으로 북한 추종성이 곧바로 증명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피청구인의 활동 -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음

피청구인의 지역조직인 경기도당이 주최한 2013. 5. 10. 및 5. 12. 모임에서 이루어진 이석기 등의 발언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남의 자주세력과 북의 자주세력이 힘을 합쳐서 적인 미국과 싸운다거나 대한민국의 국가기간시설을 공격한다는 발상을 담고 있어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 어긋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임을 되풀이하거나 구체적 실행으로 나아갈 개연성 등을 고려하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그러나 피청구인의 지역조직인 경기도당 행사에서 이루어진 위와 같은 활동은 비핵평화체제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피청구인 전체의 기본노선에 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피청구인이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그로부터 기본노선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므로 이를 피청구인의 책임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 즉, 이석기 등의 그와 같은 발언은 피청구인의 기본노선과 현저하게 다르고, 이 사건 모임 참석자들이 피청구인 전체를 장악하였다고 할 수 없으며, 나아가 피청구인이 이 사건 모임 또는 모임에서의 발언을 승인하였다고 볼 수도 없으므로, 이 사건 모임이나 그 모임에서 이루어진 구체적 활동으로 인한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의 문제를 피청구인 정당 전체의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이나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 야권단일화 여론조작 사건과 같은 피청구인 일부 구성원의 개별 활동이 당내 민주주의를 훼손하거나, 민주적 의사결정원리를 존중하지 않았거나,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피청구인 전체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 계획적, 적극적, 지속적으로 위와 같은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활동들을 제외하면 피청구인은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정당활동을 영위하여 온 점, 그간 우리 사회가 산발적인 선거부정 행위나 정당 관계자의 범죄에 대하여는 행위자에 대한 형사처벌과 당해 정당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해결하여 온 점 등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활동들이 피청구인의 정치적 기본노선에 입각한 것이거나 거꾸로 피청구인의 기본노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이 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피청구인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목적의 추구를 위하여 적극적, 의도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를 기용하였다고 볼 수도 없다.

결국 피청구인의 활동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아니한다.

○ 비례원칙 충족 여부 - 해산의 필요성 인정되지 않음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그것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사회적 이익이 통상적인 관념에 비해 크지 않을 수 있다. 그 반면 피청구인의 해산결정으로 인해 초래될 사회적 불이익은 민주 사회의 순기능에 장애를 줄 만큼 크다. 강제적 정당해산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당의 자유 및 정치적 결사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제약을 초래한다.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보호해야 할 사상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특히 소수자들의 정치적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수 있다. 나아가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과 안정에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지금까지 피청구인이 한국 사회에 제시했던 여러 진보적 정책들이 우리 사회를 변화하게 만든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고, 이는 피청구인에 소속된 대다수 당원들이 이 당의 당원이 되고자 결심하도록 만든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석기 등 일부의 당원들이 보여준 일탈 행위를 이유로 피청구인을 해산해 버린다면, 이 노선과 활동을 지지해 온 대다수 일반 당원들(피청구인 전체 당원 수는 10만여 명에 이른다)의 정치적 뜻을 왜곡하고 그들을 위헌적인 정당의 당원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에게 사회적 낙인 효과를 가하게 될 것이다. 이는 피청구인 자체를 반국가단체로, 그리고 당원 전체를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피청구인을 지지한 국민을 반국가단체 지지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과거 독일에서 공산당 해산심판이 청구되고 해산 결정이 이루어진 후 다시 독일공산당이 재건되기까지, 12만 5천여 명에 이르는 공산당 관련자가 수사를 받았고, 그 중 6천~7천 명이 형사처벌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는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에 비추어 보면, 이 결정으로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일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피청구인 소속 당원들(이석기 등 내란 관련 사건의 관련자들) 중 북한의 대남혁명론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전복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형법이나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그 세력을 피청구인의 정책결정과정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 그 세력 중 일부가 국회의원이고 그 지위를 활용하여 국가질서에 대한 공격적인 시도를 더욱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면, 국회는 이를 스스로 밝혀내어 자율적인 절차를 통해 그들을 제명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헌법 제64조 제3항).

정당해산제도는 비록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최후적이고 보충적인 용도로 활용되어야 하므로 정당해산 여부는 원칙적으로 정치적 공론(선거 등)의 장에 맡기는 것이 적절하며, 2014. 6. 4. 치러진 제6회 지방선거 결과(광역 비례대표 정당득표율 4.3%)와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공론 영역에서 피청구인에 대한 실효적인 비판과 논박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은 정당해산의 정당화사유로서의 비례원칙 준수라는 헌법상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이 사건 심판청구는 기각되어야 한다. 이는 피청구인의 문제점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피청구인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오랜 세월 피땀 흘려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기 위한 것이고, 또한 대한민국 헌정질서에 대한 의연한 신뢰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며, 헌법정신의 본질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2014-12-11

폭발물, 터지지 않은

12월 10일 밤에는 '폭탄 테러'로 보도가 되었지만, 다음날인 11일이 되자 "폭죽용 고체연료" 같은 창의적 표현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고등학생이 다양한 인화성 물질을 모아 도시락통에 넣어, 전북 익산 신동성당 예배실에서 진행중이던 '전국 순회 토크 문화 콘서트' 현장에서, 불을 붙인 후 투척한 사건에 대해 지금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사고 당시에는 '폭탄 테러'였는데, 어느새 "폭죽용 고체연료" 투척 사건으로, 슬쩍 표현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사안의 중요성을 은폐하고, 명백한 폭탄 테러를 마치 불장난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저러한 보도 경향 이면에는, '폭발물'에 대한 대법원의 납득하기 어려운 판례가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법원 2012.4.26, 선고, 2011도17254판결을 살펴보자. 피고인은 "①유리꽃병 내부에 휴대용 부탄가스통을 넣고 ②유리꽃병과 부탄가스 용기 사이의 두께 약 1㎝의 공간에 폭죽에서 분리한 화약을 채운 후, ③발열체인 니크롬선이 연결된 전선을 유리꽃병 안의 화약에 꽂은 다음 ④전선을 유리꽃병 밖으로 연결하여 타이머와 배터리를 연결하고, ⑤유리꽃병의 입구를 청테이프로 막은 상태에서, ⑥타이머에 설정된 시각에 배터리의 전원이 연결되면 발열체의 발열에 의해 화약이 점화되는 구조"(원문자는 인용자)의 물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집어넣었다.

①에서 ⑥까지의 과정을 쭉 읽어보자. 이건 누가 봐도 시한폭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피고인은 재주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들어 있던 것은 연소될 당시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물품보관함의 열쇠구멍으로 잠시 불꽃과 연기가 나왔으나, 물품보관함 자체는 내부에 그을음이 생겼을 뿐 찌그러지거나 손상되지 않았고 그 내부에 압력이 가해진 흔적도 식별할 수 없"는, 시시한 결과가 발생하고 말았다. 제대로 터지지도 않고 피식~ 했다는 뜻이다.

자, 이런 걸 만들고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설치까지 한 이 행위는, 형법상 무슨 범죄에 해당하는가?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제119조(폭발물사용) ①폭발물을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을 해하거나 기타 공안을 문란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172조(폭발성물건파열) ①보일러, 고압가스 기타 폭발성있는 물건을 파열시켜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에 대하여 위험을 발생시킨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1심은 그 '물건'을 형법 제119조 제1항의 "폭발물"로 보지 않고, 대신 제172조 제1항의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보았다. 검찰은 항소하였고,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은 원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유리꽃병 속에 부탄가스 통을 넣고 그 사이의 공간에 화약을 채워넣은 후 제 나름대로 도화선이라고 할 것도 꽂아넣고 시한장치까지 부착했는데도, 그것은 "폭발물"이 아닌 "폭발성있는 물건"이라고 본 것이다. 제119조 제3항은 "③전 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폭발물을 만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의 미수범으로 처벌할 수 있음에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시 이유는 이런 것이다. 형법 제172조가 이미 있기 때문에, 제119조에 해당하는 "폭발물"은 아주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하며, "떠한 물건이 형법 제119조에 규정된 폭발물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그 폭발작용 자체의 위력이 공안을 문란하게 할 수 있는 정도로 고도의 폭발성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폭발물'과 '폭발성있는 물질'의 구분은 폭발력, 즉 "폭발성능"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폭발시켜서 일부러 사람과 재산을 손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통상적인 목적에 따라 사용되는 인화성 물질이냐에 따라 그 구분선이 그어져야 마땅하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자동차의 연료통에 담배꽁초를 일부러 집어넣는다고 가정해보자. 휘발유는 만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경우, 한꺼번에 수십 리터의 휘발유가 폭발하므로, "폭발성능"은 굉장할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나 자동차의 연료통 그 자체는 폭발물이 아니다. 그것은 폭발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형법 제172조 제1항에서 "보일러, 고압가스"로 '폭발성있는 물건'의 예시를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뜻한다. 어지간한 기름 보일러나 가스 보일러가 폭발하면, 어설픈 사제폭탄을 가볍게 뛰어넘는 폭발성능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보일러나 고압가스 등도 그 자체가 폭발물인 것은 아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사제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말해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바라보는 대법원의 판례는, 대단히 위험하다. 사제 폭탄을 만들고 테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만으로는 형법 제119조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론이 불러오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자.

첫째. (<마스터 키튼> 같은 몇몇 귀중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전문적인 사제폭탄 제조자라고 해도 불발탄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 그런 경우, 그가 만든 폭탄은,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폭발물'이 아니게 되는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느냐가 '폭발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폭탄 테러범의 터지지 않은 폭탄도 형법 제119조에 의해 처벌 가능해진다.

둘째. 이러한 법 해석론은 총포·도검·화약류등단속법의 제2조 제3항에서 다음과 같이 "화약류"를 규정한 것과도 매끄럽게 상응하지 못한다. 우리의 법 체계는 이렇게 엄격하게 화약류를 규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모으거나, 만들어낸 폭발물을 왜 '폭발물'로 규정하고 처벌하지 않는가?

     1. 화약

        가. 흑색화약 또는 질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나. 무연화약 또는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다. 그 밖에 "가"목 및 "나"목의 화약과 비슷한 추진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2. 폭약

        가. 뇌홍·아지화연·로단염류·테트라센등의 기폭제
        나. 초안폭약·염소산칼리폭약·카리트 그 밖의 질산염·염소산염 또는 과염소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다. 니트로글리세린·니트로글리콜 그 밖의 폭약으로 사용되는 질산에스테르
        라. 다이나마이트 그 밖의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마. 폭발에 쓰이는 트리니트로벤젠·트리니트로토루엔·피크린산·트리니트로클로로벤젠·테트릴·트리니트로아니졸·핵사니트로디페닐아민·트리메틸렌트리니트라민·펜트리트 및 니트로기 3 이상이 들어 있는 그 밖의 니트로화합물과 이들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바. 액체산소폭약 그 밖의 액체폭약
        사. 그밖의 "가"목 내지 "바"목의 폭약과 비슷한 파괴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3. 화공품

        가. 공업용뇌관·전기뇌관·총용뇌관 및 신호뇌관
        나. 실탄(실탄;산탄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 및 공포탄(공포탄)
        다. 신관 및 화관
        라. 도폭선·미진동파쇄기·도화선 및 전기도화선
        마. 신호염관·신호화전 및 신호용화공품
        바. 시동약(시동약)
        사. 꽃불 그 밖의 화약이나 폭약을 사용한 화공품
        아. 장난감용 꽃불등으로서 행정자치부령이 정하는 것
        자. 자동차 긴급신호용 불꽃신호기
        차. 자동차에어백용 가스발생기

2012년에 나온 대법원의 이 판결은 매우 실망스럽고 또 우려스럽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전 세계의 양식 있는 시민들은 테러의 공포와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 미국에서 누군가가 압력밥솥을 이용해 사제폭탄을 만들어 보스톤 마라톤 대회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때도 일부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럼 그건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인가? 멀쩡히 테러범에 의해 제작되고 현장에 배치되었음에도?

하지만 일부러 폭탄을 만드는 자를 강하게 처벌하겠다는 입법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법문 해석상 그 의도는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대법원은 '폭탄은 터져야 폭탄'이라는, 법적 논리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상식에도 어긋나는 판례를 내놓고 있다.

폭발물은 터뜨리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제작된 물건이다. 그래야 한다. 제대로 터졌냐 안 터졌냐는 '폭발물'을 판단하는 기준일 수 없다. 그래야 이른바 '백색 테러'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발로 발생하게 될 '적색 테러'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안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책임 있는 수사와, 검찰의 뚝심 있는 공소가 이루어지기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추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12일 오군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폭발성물건파열치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범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옳지 않은 판례가 미치는 영향이 바로 이런 것이다.

2014-12-09

[북리뷰]20세기 말에 예견한 21세기 모습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이희재 옮김·김영사·1만7900원

당대에 아무리 큰 논란을 낳은 책일지라도 그 책의 예견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제대로 기억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작품을 ‘발견’ 혹은 ‘재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어깨 위에 온전히 놓이는 짐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2014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문명의 충돌>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게 될 21세기의 모습을 20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냉철하게 예측해냈기 때문이다.

‘문명’들이 ‘충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개별적인 ‘문명’들을 묶어주던 ‘이념’의 틀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21쪽) 헌팅턴은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그리스정교, 불교, 일본을 그러한 ‘문명’들로 보았다. 1990년대까지는 서구와 비서구, 즉 공산권이 대립하였지만, 이제는 다른 세상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 중 이슬람 문명에 대한 평가와 예측이 당시 불러일으켜진 논란의 핵심이었다. “이슬람의 경계선은 피에 젖어 있으며 그 내부 역시 그렇다”(350쪽)는 헌팅턴의 말은 <포린 어페어스>에 논문의 형태로 처음 실렸을 때부터 극단적인 반발과 호응을 동시에 불러왔던 것이다. 1996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후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2대의 여객기가 날아오면서 헌팅턴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현실 속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2014년, 이른바 ‘이슬람 국가’로 스스로를 표방하는 ISIL이 미국인 저널리스트 제임스 폴리를 참수하면서 ‘문명의 충돌’ 이론은 구태여 반박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상식’의 범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미국은 ‘이슬람 국가’와 싸우고, 중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며, 우크라이나는 유럽에 가까운 서쪽과 러시아에 가까운 동쪽으로 사실상 양분된 상태다. ‘문명의 충돌’ 그 자체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면모는 단지 문명들끼리의 충돌을 예견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소련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문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다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념분쟁이었으며, 판이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자유, 평등, 물질적 복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188쪽) 반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전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배들의 린치를 경찰이 묵인하고 방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문명’끼리 충돌하는 세계는 그 ‘문명’ 속의 야만이 ‘이념’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문명의 충돌>은 세월의 검증을 이겨낸 당당한 현대의 고전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21세기의 국제정치적 변화를 예측했고, 그 중 많은 수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문제는 그 속에 묘사된 세계와 한반도의 모습이 결코 밝지 않다는 데 있다. 차분한 마음으로 이 책을 다시 읽고, 다가올 새해와 새로운 세계 속의 우리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2021053111&code=116

2014-11-30

[별별시선]최장집, 김상률, 통합진보당

“김일성은 국내의 민중적 지지 기반,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대남한 강경 정책에 대한 정치적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지원,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자신감 등 모든 대내외적 조건들이 압도적 우세에 있었다. 그의 우세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그를 전쟁을 통한 총체적 승리라는 유혹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하였고, 결국 그는 전면전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1998년, 국민의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최장집의 책에서 인용된 문구다. 당시 ‘월간조선’은 이 ‘발견’을 대서특필하며 최장집을 청와대에서 쫓아냈다. 뒤이어지는 문장이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오판을 유도하였던 요소는 한반도의 국내 정치적 조건이라기보다는 국제 정치적 조건, 즉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던 냉전 체제의 성격과 그곳에서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국의 힘이었다”라는 것은 그 시점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문장 하나, 표현 하나를 꼬투리 잡아 ‘빨갱이 사냥’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 소유는 열강에 에워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민족 생존권과 자립을 위해 약소국이 당연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비장의 무기일 수 있다.” 현재 정당해산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핵심 인사가 내뱉은 말이 아니다. 김상률 신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2005년 저서 <차이를 넘어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적어도 인용된 문장의 ‘수위’만 놓고 보면, 1998년의 최장집이나 2005년의 김상률이나, 비슷한 말을 했다. 오히려 김상률의 경우가 더 심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지나간 일이지만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니 말이다. 이에 고무된 보수 언론들은 앞다투어 <차이를 넘어서>를 입수한 후 ‘문제 발언’들을 더욱 캐내기 시작했다. 최장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후 맥락 없이 툭툭 잘려나간 문장들이, 신문 지면을 수놓고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주적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욱 잘 이해해야 한다. 전략적 판단에는 역지사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북한 입장에서야 당연히 생존을 추구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려 들 테니 말이다. 문제는 저 인용된 문장이 과연 북한의 뜻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의 정치적 입장은 다르다’는 것인지, 언론 보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1998년과 거의 유사한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서술인지, 비판하기 위해 남의 말을 적어둔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실제로 동의하는 정치적 주장인지 아무런 구분도 없이 마구잡이로 인용된 문구가 언론 지면을 장식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니 어떻게 저런 빨갱이가 청와대에 들어가나’라는 대중의 비난 어린 손가락질이, 이번 경우에는 대통령 쪽으로는 결코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의 선고를 앞두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 선고를 앞두고 있다. 나 너 우리가 ‘종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선고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인지, 아니면 북한이라는 ‘적’을 상정해야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허약한 군사독재 국가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것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국면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된다면 우리는 1998년 이전으로 후퇴한다.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비로소, 청와대에 ‘종북’ 의혹을 받는 수석이 임명될 수도 있는, 2014년 이후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최장집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설명하며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김상률은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의 책에 적힌 내용은 에드워드 사이드 및 미국 좌파 지식인들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니 말이다. 통합진보당 역시 그들 스스로가 아닌 대한민국의 명예를 위해, 존속되어야 한다. 그들의 시대착오적 대북관을 심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권자이며 유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302100215&code=990100&s_code=ao122

2014-11-25

[북리뷰]모멸, 수치심 자극하는 최악의 방아쇠

모멸감
김찬호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500원

“박정희가 왜 죽었는지 아냐? 김재규한테는 술 안 따라주고 차지철한테만 따라줘서 총 맞아 죽은 거다.” 이런 이야기를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로부터 듣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기억이 있다. 세상에 자기한테 술을 안 따라준다고 사람을 죽일 수가 있을까? 일국의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그렇게 하잘것없는 개인적 감정 때문에 역사의 방향을 바꾸게 될 거사를 저질렀단 말인가?

<모멸감>을 쓴 사회학자 김찬호에 따르면 저러한 ‘민담’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작동하며, 때로는 개인의 감정이 사회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회학은 인간의 감정을 중요한 변수로 다루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렬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29쪽) 그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저자는 ‘감정사회학’이라는, 기존의 연구 문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아주 무서운 감정인 ‘모멸감’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은 바로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모욕은 누군가의 자기존재감을 해치는 행위라고 정의한 그는 그 모욕 중에서도 ‘경멸’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모멸감’에 주목한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67쪽)

이렇게 구분짓긴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모욕과 모멸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가족처럼’ 생각해서 여직원의 엉덩이를 더듬었다고 주장하는 중년 남성 관리자와 ‘친하니까’ 함부로 말하고 다소 괄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은 풍토 속에서, 내가 남에게 모욕을 가했다, 혹은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는 인식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최근 우리 사회의 양심을 울리고 있는 이른바 ‘압구정동 ㅅ아파트 경비원 분신 사건’의 경우도 그렇다. ‘사모님’으로 흔히 지칭되는 70대의 ㄱ씨는 경비노동자 고 이만수씨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모멸감을 선사했다. 분류된 재활용 쓰레기를 놓고 트집을 잡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5층 높이에서 그에게 음식을 던지며 “슛, 골인”이라고 외쳤다는 증언도 있다. 자기 나름대로는 모욕을 주기는커녕 ‘친하니까’, ‘가족같으니까’, 혹은 ‘우리 아파트에서 일하는 머슴 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대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작은 모욕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내면이 폭발한다.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사회 전체가 터져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모멸감을 선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두고 있는 한, 이 구조 속의 우리는 그 누구도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없다. 젠더 감수성, 인권 감수성과 같은 맥락에서 ‘모욕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사회적 인식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이대로 모멸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 사회에는 지속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1181102071&code=116

2014-11-11

[북리뷰]전염병, 올바른 공공정책 방향

[북리뷰]전염병, 올바른 공공정책 방향
2014.11.11ㅣ주간경향 1100호

바이러스 도시
스티븐 존슨 지음·김명남 옮김·김영사·1만4500원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유행은, WHO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월 1일 현재 1만여명에 가까운 감염자를 발생시켰고 그 중 절반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74년에 확인된 에볼라 바이러스가 이렇게 많은 감염자를 낳은 것은 처음이다. 그 전에도 몇 차례 유행이 있었지만, 워낙 치사율이 높았을 뿐더러 발병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도시로의 인구 밀집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위기를 안겨준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조건이 맞는다는 전제 하에, 더욱 쉽게 숙주를 찾을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면 그만큼 유전적 변이가 발생하고, 그래서 더욱 그 질병을 퇴치하기 어려워진다. 전 세계적으로 에볼라 바이러스의 대도시 상륙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머전스>로 잘 알려진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은 <바이러스 도시>에서, 19세기 런던을 강타했던 콜레라 유행과 그에 대한 공공의학적 대응에 주목한다. 당시 세계의 수도 노릇을 했던 런던은 무려 300만명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대소변과 기타 오물을 적당히 모아서 집 근처의 오물 웅덩이에 퍼부었다. 그 오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정화되기도 했지만, 도시의 거주민들이 이용하는 우물에 녹아들어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바로 그렇게 런던 소호의 브로도 거리에서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자는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마취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적으로 개량해낸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의사 존 스노와 브로도 거리를 담당하는 세인트제임스 교구의 목사인 헨리 화이트헤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기, 19세기 중반은 의학이 과학으로서 갓 걸음마를 내디딘 시점이었다. 콜레라는 오물의 악취를 맡으면 발생하는 질병인지, 아니면 그것을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게 하는 요소, 즉 ‘감염’의 원인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학적 논쟁이 한창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 즉 ‘독기설’을 취한 반면 존 스노는 후자인 ‘감염설’을 지지했다.

<바이러스 도시>는 존 스노가 10여년에 걸쳐 감염설을 연구하고 있던 중, 자신이 살던 지역의 콜레라 발병을 목격하고, 본인의 연구를 현실에 적용시켜 군집생활을 하는 인류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를 막아낸 영웅담이다. 그는 사람들이 오염된 물을 마셔서 콜레라에 걸린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확인한 후, 화이트헤드 목사를 설득해 오염된 물이 나오는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했다. 과학으로서의 의학이 공공정책의 영역에 개입한 최초의 사례이자, 명백한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런던은 상하수도를 갖췄고 콜레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올바른 공공정책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국제적·인도적 차원에서 의료진을 에볼라 발병 지역에 파견하되, 병에 걸릴 경우 제3국에서 치료를 받고 오게 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야만과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에볼라에 걸린 후 완치된 간호사 니나 팸에게 따뜻한 포옹을 선사했다. 우리는 미지의 질병 그 자체보다는 그 질병에 대한 공포심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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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

[별별시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어린 시절의 내게 신해철은 넥스트의 신해철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쓰고 부른 바로 그 신해철이었다. 그는 동성동본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의 인습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가 그런 시대이기도 했다. 서태지는 북한을 향해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자고 노래했고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리들을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있는 공교육을 비판했다. H.O.T.의 데뷔곡은 ‘전사의 후예’인데, 학교폭력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아 “그들은 나를 짓밟았어”라고 노래한다.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대중문화는 이른바 ‘기성세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1990년대는 ‘문화 전쟁’이 한창이었다. 연세대학교의 마광수 교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썼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직을 잃은 것이 1992년의 일이었다. ‘무한궤도’를 통해 혜성처럼 데뷔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마초 사범이라는 딱지를 달게 된 신해철은 1995년에 동성동본 연인들을 위한 송가를 불렀다.

신해철의 저항은 구체적이었다. ‘이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식의 추상적인 내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동성동본 연인들의 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한국 사회는 “대마가 가지고 있는 환각 증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과장함으로 인해서 예술가들에게 인격적 모욕을 주고 인간 쓰레기로 만든다”고,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까지 목청을 높였다. 가수로서, 또 라디오 DJ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두 번째 이름으로 삼았다.

그의 느닷없는 죽음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당시 신해철에게 쏟아졌던 온갖 비난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처럼 낭만적인, 요즘 말로 ‘중2병’스러운 가사는,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반감과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음미되어야 한다.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로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다는, 철들지 않는 소년과 같은 순수함이 없다면, 스스로를 동성동본 연인을 앞에 둔 누군가로 상정하고는 “아직 단 한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사회와 대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번 구체적인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록 동성동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 비록 학생일지라도 학교에서 ‘사랑의 매’를 맞지 않고 싶은 욕망. 비록 법으로 금지된 대마초를 흡입한 사람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멸시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 소년의 꿈과 희망은 현실의 벽 앞에 자주 부딪쳤다. 우리는 언젠가 그 벽이 깨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어느 날, 그는 얄리를 따라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1997년 7월16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의해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법 제809조 제1항이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승리를 제외하고 나면, 신해철이 지지했던 구체적인 욕망들은 아직도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한 표 차이로 간통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이미 합법화 혹은 비범죄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대마의 재배와 사용이 엄격하게 처벌되고 있다. 학생들의 인권 보호는 학부모가 선출하는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우된다.

한국은 아직도 개인과, 그 개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나라다. 공개적으로 동성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김조광수 감독이 제출한 혼인신고서는 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무죄다. 모든 사랑은 합법이다.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995년의 신해철이 만들었던 노래를,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22043065&code=990100&s_code=ao122

2014-10-28

[북리뷰]무차별 ‘인터넷 사찰’의 막전막후

[북리뷰]무차별 ‘인터넷 사찰’의 막전막후
2014.10.28ㅣ주간경향 1098호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글렌 그린월드 지음·박수민, 박산호 옮김·모던타임스·1만5000원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처음 ‘사이버 망명’ 이야기가 나왔을 때 비교적 무덤덤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가 있는데, 그것은 국내 서버에 메시지를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이후 텔레그램을 설치한 사람들은 대략 200만 명을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쯤 되면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이렇듯 대중들이 인터넷과 사이버 프라이버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은 반대로 인터넷을 통해 국민들의 정보를 추적하려 드는 오늘날을 일컫는 용어가 있다. ‘포스트-스노든 시대’(Post-Snowden Era)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국가안보국 NSA의 전산시스템 관리자였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글렌 그린월드와 접선하여, 자신이 빼온 고급 정보를 전달하고, NSA가 무차별적으로 인터넷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 바로 그 사건 이후, 인터넷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바로 그 역사적 폭로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인 글렌 그린월드가 스노든의 폭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행동의 전후 맥락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킨키나투스’라는 익명으로 그린월드에게 스노든이 이메일을 보냈지만 처음에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제보를 받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던 일화에서 출발해, 그린월드는 스노든의 폭로가 이루어진 과정, NSA의 무차별적 도·감청이 수행된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더 안전하고 개방적인 인터넷을 만들 수 있을지 등 다양한 주제로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사실 NSA의 감청과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는 사뭇 다르다. NSA는 적법하게 영장을 발급받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하여 국민들의 메시지를 기술적으로 뚫고 들어갔다. 반면 한국의 검찰과 경찰은 수사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감청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그러한 청구를 받아들여 ‘영장 자판기’ 노릇을 한 듯하다. 미국의 법원이 한국처럼 영장을 남발했다면 NSA는 굳이 스노든 같은 IT 전문가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즉, 한국에서의 문제는 IT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법적 절차의 작동방식 그 자체다.

하지만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을 사찰하는 ‘정보기관’이 움직이는 방식은 동일하다. NSA가 수집한 정보는 테러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수집한 정보 중에는 적어도 ‘미국인’ 한 명의 온라인 성생활과 인터넷 상에서의 ‘방탕한 행위’, 예컨대 포르노 사이트 방문과 배우자가 아닌 여성과의 은밀한 채팅 섹스에 관한 세부 내용이 있었다. NSA는 목표 대상의 명성과 신뢰성을 훼손하기 위해 이런 정보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244쪽) 사생활을 수집해 반체제인사, 혹은 반정부인사를 물밑으로 협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 검찰은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말에, ‘왜 위축되나, 아무 문제없는 글을 쓴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NSA가 미국인들의 성생활까지 감시하는 데서 알 수 있다시피, 어떤 글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그들’이 정한다. ‘사이버 망명’이 아닌 민주주의의 회복만이 유일하고 확실한 해법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0211421211&code=116

2014-10-14

[북리뷰]성장보다 분배, 조세정의 확립을

[북리뷰]성장보다 분배, 조세정의 확립을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지음·장경덕 옮김·글항아리·3만3000원

지난 9월 19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의 경제정책, 이른바 ‘초이노믹스’를 ‘아베노믹스’와 비교 설명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최근 한국의 경제정책은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등 세계적 경제학자들의 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폴 크루그먼 교수는 진보적, 혹은 ‘리버럴’한 경제정책을 대변하는 이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옹호하는 폴 크루그먼이 대체 어떤 맥락에서 ‘초이노믹스’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

다소 분명하지 않게 경제학자들을 그저 성향에 따라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로 나눈다면 토마피케티와 크루그먼은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진보’에 속한다. 하지만 그들 각각이 현재의 문제를 해석하여 내놓는 답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피케티는 <21>에서 대규모 공공부채에 대해 크게 세 가지 해법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자본에 대한 세금, 인플레이션, 긴축재정이다. 민간자본에 대해 파격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한다면 인플레이션이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공정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최악의 해결책은 지속적인 긴축재정인데, 이것이 바로 현재 유럽이 따르고 있는 방식이다.”(650쪽)

이것은 비단 공공부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공공부채 문제는 “부의 분배, 특히 공공부분과 민간부문 사이의 문제이지 절대적인 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국가의 정부는 가난하다.”(같은 곳)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소득 하위 50%는 대부분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므로 결국 부유한 국가의 공공부채 문제는 상류층이 민간부문의 자본을 독점하는 문제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세 번째 해답, 즉 공공자본의 민영화를 골자로 한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실패로 판명되었으니, 문제는 과세 정책이냐, 아니면 재정 확장을 통한 경기 부양이냐의 선택이다. 최경환이 자신의 경제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하는 폴 크루그먼은 미국 내의 재정 축소론자들에게 맞서 ‘돈 뿌리기’를 주장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아베노믹스에 대해 ‘소득세를 높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제언을 덧붙인다는 점이다. 증세 없이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를 살리면 장기적으로 볼 때 경제가 회복되고 불평등도 줄어든다는 일종의 낙관론이다. <21>에서 피케티가 주장하는 바는 그와 궤도를 달리한다. “공공부채에 대한 이러한 ‘진보적’인 관점은 인플레이션이 오래 전부터 19세기보다 그리 높지 않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재분배 효과가 비교적 불분명한데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161쪽) 피케티는 경제성장보다 분배 그 자체를 목표로 삼고, 더욱 확실한 조세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정부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간접세 중심으로 세수를 늘리면서, 동시에 재정 지출을 확대한다. 크루그먼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크루그먼의 말도 듣지 않고, 피케티의 조언에는 등을 돌린 셈이다. <21>에 대한 논의들은 바로 이 각도에서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정태 ‘논객 시대’저자/번역가>

2014.10.14ㅣ주간경향 1096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0071119071&code=116

2014-10-12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Nuclear waste has, for many years, seemed an almost insoluble problem, at least politically in the United States. But when seen in relative terms, the problem of nuclear waste starts to look very different.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that would have to be managed and injected underground with a mojor carbon-storage program. All the nuclear waste generated by the entire civilian nuclear program would fill no more than a single football field[인용자 주: 120 yards * 53.3 yards = 109.3m * 48.7m = 5322.9m^2]to the height of ten yards[인용자 주: 9.14m]. By comparison, the output of CO2 from a single coal plant, put into compressed form, would require about 600 football fields--and that would be just one year's output. 

Daniel Yergin, The Quest, Chapter 20, Kindle location 6792

2014-10-05

[별별시선]성역 없는 진상규명, 진상 없는 성역규명

세월호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하면서 이른바 ‘세월호 정국’이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건 초기부터 넓은 의미에서 야권과 적잖이 다른 입장을 표명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결말 앞에 한없이 착잡한 심정이다.

야권은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입장을 대변해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세월호특별법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 중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가 논의의 쟁점이 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다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낱낱이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 야권의 설명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이미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성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을 수사하고 기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특검이 됐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됐건, 수사를 하고 기소를 하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많은 경우 공소가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그러므로 세월호특별법에 부여하고자 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은 ‘성역’을, 다시 말해 청와대를 겨냥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까지 왔으니 부디 아니라고 하지 말자. 굳이 범위를 더 넓히자면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정도가 기존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셋째, 그렇다면 야권은 세월호특별법을 통해, 청와대를 수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청와대에 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요구를 상대방이 받아줄 턱이 없다. 설령 야권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을 모두 압승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선거에 졌기 때문에 세월호특별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다기보다는, 통과시킬 수 없는 법을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에 선거에서 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전국 단위의 지방선거라 해도 지방선거는 어디까지나 지방의 살림을 책임질 사람들을 선출하는 선거다. 제아무리 규모가 커도 재·보선은 국회의 빈자리를 채워넣기 위한 선거다. 하지만 야권은 이 각각의 선거에 세월호특별법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뉘앙스를 한껏 깔았다.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세월호특별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성역’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대해서는 이미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여권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하는 세월호특별법’을 ‘박근혜 특별법’쯤으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논의의 초점은 어느새 세월호에서 박근혜로 넘어가 버렸다. 닳고 닳은 표현을 빌리자면 ‘프레임’을 빼앗긴 셈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내릴 수 없는 배>에서 말한 것처럼, 세월호가 침몰한 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정작 사람들은 여객선이 아니라 박근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27년 된 노후 선박 바캉스호가 세월호 참사 다음날 안전검사를 통과해 운항하고 있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특별법’에 정신이 팔려 ‘세월호’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의원을 포함해 야권의 주요 정치인들이 단식까지 해가며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진상 없는 성역 규명’뿐이다. 우리는 세월호라는 배에 대해, 그 배의 침몰 원인 등에 대해,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이번 세월호 정국을 통해, 박근혜라는 한 정치인이 한국 사회의 성역으로 올라섰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인신공격과 비방을 삼가라고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직접 훈계하는 시대가 열리고 만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한, 스스로를 성역으로 규정하는 성역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구시대적 사고방식에 맞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과 시민들의 몫이다. 가족과 친지를 잃고 형언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진 세월호 유족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한 것부터가 큰 잘못이라는 말이다. 세월호 유족을 앞세웠던 야권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통렬한 반성과 자기 비판을 요구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052105485&code=990100&s_code=ao122

2014-09-30

[북리뷰]진보면전에 내다꽂은 ‘도덕 이론’

[북리뷰]진보면전에 내다꽂은 ‘도덕 이론’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1만3000원

지식인의 임무는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지성을 이용하여 그 어떤 감정적 반응을 내놓기에 앞서, 대상을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실용적인 책이다. 진보 정당들뿐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까지를 포함해 넓은 의미의 ‘진보’라 부르는 강준만은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200쪽)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는 판단한다. 속된 말로 ‘싸가지 없는 진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진보가 ‘싸가지’를 상실하고 있는 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전체 유권자를 대략 보수 40%, 진보 40%, 중도파 20%로 나눈다면, 그 중 중도파 20%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싸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만이 이 책의 부제에 적혀 있는 것처럼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이라고 강준만은 주장한다. 그가 조너선 하이트, 조지 레이코프 같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논의 전개와 결론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는 분위기나 경제적 유인에 좌우되는 ‘중도층’이 아니라 자신들의 확고한 윤리 체계를 가진 사람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40%의 콘크리트 보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강준만은 이 책에서 보수가 아닌 진보의 ‘싸가지 없음’을 분석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싸가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그런 의미에서 ‘도덕 이론’을 한국에 적용했다기보다 한국의 진보세력의 면전에 ‘도덕 이론’을 내다 꽂은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지난 8월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다. 워낙 제목이 강렬해서인지, 아니면 강준만이라는 ‘원조 논객’의 영향력이 살아 있어서인지, 즉각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진보의 문제는 싸가지가 아니라 콘텐츠가 없다는 것’이라는 반박을, 칼럼니스트 박권일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수사법으로 인해 오히려 시민들이 정치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는 촌평을,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진보는 공감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문제’라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남겼다.

기사를 유심히 읽어본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그 누구도 저 각각의 코멘트를 내놓을 시점에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읽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 명의 논객들은 각각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제목만을 두고 각자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장착되어 있던 논의를 하나씩 꺼내어 늘어놓았을 뿐이다. 결국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에 대한 토론은 온데간데 없고,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세 마디 어구에 대한 가벼운 설왕설래가 벌어진 후 사람들은 이내 관심을 잃어버린 듯하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과 그것을 둘러싼 논란이 보여주는 진보의 현실이 바로 그런 것이다. 미국의 도덕 이론을 원용하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유권자에 대한 심층 분석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책을 읽지도 않은 다른 지식인들은 그저 제목만을 놓고 입씨름을 벌인다. 특히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보면, 한국의 진보는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문제인 것 같다.

<노정태 ‘논객 시대’ 저자/ 번역가>
2014.09.30ㅣ주간경향 1094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9231101121&code=116&s_code=nm038

2014-09-22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훔쳐볼까봐 걱정된다면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훔쳐볼까봐 걱정된다면


요 며칠 사이 사람들 사이에 Telegram(https://telegram.org/)이라는 채팅 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고 있다. 아무래도 며칠 전인 9월 19일, 검찰에서 '인터넷 명예훼손 전담 소송팀'을 출범시켜서 포털, SNS, 카카오톡을 언제나 감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돈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

한 가지 사례를 만들어보자. 당신이 구성지게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하는 대화 내용을, 단체 대화방에 있던 누군가가 캡쳐했고, 그 내용이 '짤방'으로 매우 흥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부주의하게도 당신의 대화명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 대화명이라는 게 딱 보고 누구라고 분간할 수 있을만큼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카카오톡의 협조가 없다면 감히 존엄하신 박근혜 대통령님을 모독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고 해보자.

이 경우 경찰이나 검찰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1.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온 후, 카카오 본사에 간다.
2.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오지 않고도, 카카오 본사에 간다.

당연히 어떤 시점까지는 2번이 정답이었다. 어떤 시점까지 그랬다는 것은,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는데, 천천히 보면 어렵지 않다.

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고 해보자. 여기서 우리는 '정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통화를 하는 '나'의 이름이나 주소 등의 신원 정보. (2) 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는 사실로부터 파생되는, 통화 시간, 상대방의 전화번호, 통화 위치 등의 기타 정보. (3) 통화 내용 그 자체.

통신비밀보호법은 여기서 (1)에 해당하는 내용을 '통신자료'라고 부르고, (2)는 '통신사실확인자료'라고 하여 따로 규정한다. (3)은 내용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떤 법적 호칭은 없다. 그런데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2)와 (3)은 영장을 받아와야 통신사로부터 수사기관이 자료를 넘겨받을 수 있는 반면 (1)은 그렇지 않다.

다시 우리의 카카오톡 단톡방 사례로 돌아가보자. 이 경우 (주)다음카카오는 설령 검찰이 와서 대뜸 '내놔'라고 하더라도, 통신사실확인자료에 해당하는 것, 즉 당신의 그 단톡방에 누가 있었고 당신이 그 드립을 언제 쳤는지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면 안 된다. 검찰이 영장을 가지고 오지 않는 한, 그런 자료를 제공하면 다음카카오라는 회사도 처벌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드립을 친 당신이 누구냐 하는 것, 즉 '통신자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영장을 받아와야만 하는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통신사업자는 수사기관에 그 정보를 임의제출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 '통신자료', 즉 '카톡에 꼬끼요 라고 적은 애 이름하고 주소 불러'는, 수사의 기본이며 수사기관이 가장 필요로 할 가능성이 큰 정보라는 데 있다. 어디 사는 누군지 알면 수사의 반은 끝난 것이다. 게다가 영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어떤 시점까지, 경찰과 검찰은 국내 통신사업자들에게 '통신자료'의 제출을 요구하고, 통신사업자들은 별 생각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관행처럼 통용되어 왔다.

그 '어떤 시점'이란 그럼 무엇인가. 세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 김연아, 유인촌, 차 모씨. 2010년, 김연아 선수에게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이 포옹을 요청했는데, 김연아 선수의 표정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차 모씨는 영감을 얻어, GIF 파일의 프레임을 몇 개 빼는 방식으로, 김연아 선수가 유인촌 장관의 포옹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듯한 영상(처럼 보이는 이미지 파일)을 만들었다. 이른바 '회피 연아' 영상이다.

그 파일은 처음 어떤 네이버 까페에 올라갔다는데, 그리고 나서는 여기저기 퍼졌고, 유인촌은 이거 만든 놈 누군지 몰라도 경찰 수사를 의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경찰은 동영상의 최초 유포자를 찾다가 결국 네이버 까페에 도달했고, 늘 그렇듯 (주)NHN을 향해 '아이디 뭐뭐뭐 쓰는 사람의 주소, 이름, 전화번호, 기타등등을 제공하라'며 임의제출을 요구했다. 당연히 당시의 NHN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차 모씨는 난데없는 송사에 휘말렸지만, 유인촌이 고소를 취하하면서 일단 명예훼손 건은 마무리됐다.

문제는 차 모씨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는 NHN을 향해 소송을 걸었다. 당시의 기사를 인용해보자.

유 전 장관은 고소를 취하했지만 차씨는 NHN이 경찰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송을 걸었다. 1심에선 차씨가 패소했고 지난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선 “약관상의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지키지 않고 인적사항을 경찰에 제공했다”며 원심을 깨고 NHN에 “50만원을 지급하라”는 일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서윤경, "‘회피 연아 동영상’ 이후 포털 업체들 “수사기관 통신자료 요청 제한적으로만 협조할 것”", 국민일보, 2012년 11월 1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6587774&code=11151100&sid1=eco&sid2=0001

2012년 연말 이후, 그래서, 한국의 통신사업자들은 기존의 관행을 바꿔, 수사기관에서 이용자의 '통신자료', 다시 말해 신상정보를 요구하더라도 잘 내주지 않는다. 올해 4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합동수사본부는 카카오톡 자료를 좀 보고 싶어했는데, 그 경우에도 압수수색을 해야만 했다. 이전처럼 '통신자료'를 그냥 제공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사를 위해서는 '통신사실확인자료'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정리해보자. NHN이 됐건 카카오가 됐건, 국내의 통신 사업자는 만약 통신자료를 함부로 제공했다가 소송이 걸릴 경우, 물어줘야 하게 생겼다. 그러니 이전처럼 경찰에서 되는대로 이용자의 신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과민한 일이다. 하지만 국내 법원의 영장을 받으면 그들은 상당히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을 경우, 아예 서버를 이용하지 않는 비트토렌트 챗(http://labs.bittorrent.com/experiments/bittorrent-chat.html)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다음에야(이것도 현재 알파 서비스 단계) 완벽하게 공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라인'에 정보를 보내지만 그 '온라인'은 어딘가에 놓인 서버에 저장되는 디지털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의 법원이 발급한 영장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한국 수사기관의 협조 요구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이석기 일당을 때려잡아야 하는데 그런 온갖 절차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검찰의 심정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지메일은 구글 본사가 있는 미국에 서버를 두고 있는 데다 가입 시 개인정보를 기재할 필요가 없어 수사당국의 압수수색 및 추적이 어렵다. 구글은 우리 사법당국이 요청할 경우 내부 기준에 따라 일정 부분 이메일 내용 열람을 허용하고 있지만, 복잡한 사법 공조 절차 등으로 인해 실제로 압수수색이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의 법 집행력이 지메일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공안사범들은 실제로 2000년대 후반부터 국내 이메일보다 지메일을 사용하고 있다.

조선닷컴, "'이석기 R0 수사' 발목잡는 구글 지메일…美측 사법 공조에 불응 압수수색 못해", 2014년 6월 24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4/2014062402763.html

즉, 한국의 수사기관이 특히 지메일을 '종북메일'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입김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서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스노든이 폭로한 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해킹한 NSA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 경우에는 영장 없이 개인의 정보를 무작위로 도감청한 것이고, 이 경우에는 영장이 있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다. 반면 당신이 미국인이고, 미국에서 사건을 터뜨렸고, 미국 경찰에 의해 수사받고 있다면, 그 범죄가 무엇이냐에 따라 구글은 아주 흔쾌히 당신의 계정에 대한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출할 수 있는 것이다.


스노든이 폭로한 NSA의 구글 감청 프레젠테이션. 당시 구글의 클라우드 서버 사이에서는 암호화되지 않은 텍스트로 통신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한다).  GFE의 SSL을 뚫었다고 말하면서 웃고 있는 :-) 모습이 인상적이다. 출처는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national-security/nsa-infiltrates-links-to-yahoo-google-data-centers-worldwide-snowden-documents-say/2013/10/30/e51d661e-4166-11e3-8b74-d89d714ca4dd_story.html

그러므로, 만약 국내의 수사기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메시징 앱을 원한다면, 굳이 텔레그램을 쓸 필요도 없다. iOS 디바이스에 기본적으로 딸려오는 아이메시지를 쓰거나, 모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필수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구글 행아웃을 사용하면 된다. NSA는 어쩌면 그것들을 해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의 경찰이나 검찰은 압수수색영장을 받아도 당신이 타인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적 거물'이 되지 않는 한 그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

정리해보자.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들여다볼까 걱정된다면, 일단 예전에 비해 국내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들이 수사기관에 덜 협조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면, 극소수만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 후 아무도 없는 대화창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리다가 삭제하지 말고, 행아웃이나 아이메시지처럼 국내에 서버와 본사를 두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방법을 사용해보자.

한국의 수사기관은 첨단 해킹 기술이 아니라 법치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를 동원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크게 어렵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과연 '카톡'으로 표상되는, 복잡한 한국식 소셜 네트워킹 그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이다. 카톡 뿐 아니라 싸이월드를 해본 적도 없고, 페이스북은 가입만 해둔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2014-09-13

21세기 번역

『21세기 자본』의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는데, 역시나, 책이 시중에 풀리기도 전에 그놈의 '번역 논란'이 한창이다. 프랑스어판으로 먼저 출간된 책인데 왜 영어판을 옮겼느냐는 것이다. 이미 출판사 글항아리는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을 일일이 대조했다'는 해명을 여러 차례 내놓은 바 있지만, 토마 피케티의 심오한 경제학을 온전히 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우리의 인문-소비자들의 원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왜 번역한 책을 읽을까? '원문'이 아니라 번역한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 우리가 어떤 책의 원서를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T1이라고 해보자. 반면 그것을 번역으로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T2로 표기한다. 우리는 논의의 대상이 한국어 화자라고 전제하고 있으므로, T1은 T2보다 언제나 크다. 만약 T1과 T2가 같거나, 전자가 후자에 비해 작다면, 굳이 번역된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그것을 U라고 표기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1
U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즉 우리는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원서를 읽느라 고생하는 만큼의 시간을 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번역 논란'을 벌이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가령 당신이 스티브 잡스 평전을 읽는다고 해보자. 한국어로는 24시간이 걸릴 책이 영어로는 100시간도 더 걸린다고 해보자. 2014년 기준으로 최저임금은 5210원인데, 그렇다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책을 읽을 때, 당신은 적어도 76시간을 더 쓰게 되며, 간단한 곱셈을 해보면 39596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으면, 책값의 차이를 논외로 했을 때, 약 40만원을 손해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어떤 분은 반박을 하실 것이다. 엉터리 번역, 날림 번역으로 책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읽은 그 책이, 저자가 쓴 그 책과 같은 책임을 대체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간단한 산수도 그렇거니와, 인식론적인 대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연 언어가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오랜 세월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트위터도 열심히 해본 바에 따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모국어로 쓰여진 글을 읽고도, 그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책을 무슨 언어로 읽더라도, 독자가 저자의 '진짜 진짜 그 내면의 그 속마음'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어불성설이다.

'번역서의 오류로 인해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오늘날의 독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서에 오류가 없더라도, 심지어 한국말로 쓰여진 글을 읽더라도, 우리는 종종 저자의 뜻을 잘못 파악한다. 

번역 논쟁을 일으키는 당신이나, 그 책을 번역한 번역자나, 저자의 뜻을 오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신이 직접 원서를 읽다가 저자의 의중을 잘못 짚을 경우, 당신의 오해를 지적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한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려면, 일단 번역자가 읽고, 그 내용을 한국어로 쓰고, 원문과 번역문을 놓고 편집자가 교정, 교열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요컨대 독자와 번역자의 싸움은 1:1의 싸움이 아니다. 독자는 책을 혼자 읽고 오해를 교정받지 않지만, 번역자의 작업은 출판사의 검토를 거친 후 세상에 나온다.

고의로 내용을 빼거나 왜곡해서 번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그렇다는 것이다. 번역자가 오역을 저지를 수 있는 만큼, 원서를 직접 읽는 당신도 그 책을 잘못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 완벽한 이해를 추구해야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다소 무모한 발언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변수를 또 발견할 수 있다. E1은 원서를 직접 읽을 때 내 머리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총합이다. E2는 반면, 번역서를 읽는데, 번역자의 실수로 인해 발생하여 책으로 찍혀 나오는 오류의 총합이다. 당신이 해당 언어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E1과 E2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나는, 대부분의 경우 E2보다 E1이 클 수밖에 없다고 겸허하게 인정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그냥 재미로만 읽을 수 있는 독자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뭔가 재생산을 해야 하는 독자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E1과 E2의 관계에 대해 사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번역서의 오류마저도 일종의 즐길거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책을 읽고 그에 기반해 뭔가 논의를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폼을 잡아야 할 때, 어떤 오역으로 인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는 일을 우리는 대체로 피하고 싶어한다.

가령 당신이 『이방인』을 읽었는데, 지금까지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뮈르소가 무어인을 쏘아 죽인 것이 정당방위임을 몰랐다고 해보자. 그래서 당신은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고, 빈정이 상해서, 술상을 엎고 울면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이방인』을 읽었다면 까뮈의 진정한 뜻을 알았을지 몰랐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즉 E1과 E2 중 뭐가 더 큰지 확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경우 어쨌건 당신은 번역서를 읽었으므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E2일 것이다.

이 경우 앞서 등장한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은 변형을 겪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을 위해 앞서의 경우를 U1, 지금의 효용을 U2라고 한다면,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2
U2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 E2

가 도출된다.

결론을 내보자. '번역에 대한 논란이 많네요, 저는 그냥 (나중에) 원서로 읽으려고요'는 과연 얼마나 타당한 표현인가?

T1이 T2보다 큰 사람, 다시 말해 원서를 읽는 속도가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빠른 사람은 굳이 그런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T1과 T2의 차이가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원서를 읽거나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피해가, 그 책을 어쨌건 익숙한 언어로 빨리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보다 클 때에야, 우리는 번역서를 집어던지고 원서를 읽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정말 그런가? 오역, 혹은 오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주는 '피해'가, 기꺼이 그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은 당신에게 그렇게나 심대한 타격을 주는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저 허접한 공식을 집어던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읽어도 저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 못할 가능성', 즉 E1은 고스란히 남는다. 그리고 당신의 실수는, 번역자의 것과 달리, 그 누구도 지적해줄 수가 없다. 술자리에서 '뽀록'이 나서 망신을 당하기 전까지 말이다.

'번역 논쟁'을 부추기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야 하겠고,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번역된 책이 나오면, 적어도 읽어보기라도 하고, '논쟁'을 하던 말던 하자는 말이다.

2014-09-09

세월호 참사에 대해 지금까지 쓴 칼럼 및 서평들

2014-04-20
[별별시선]‘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은 구분해야
http://basil83.blogspot.kr/2014/04/blog-post.html

2014-05-06
[북리뷰]초대형 참사는 작은 사고로부터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
찰스 페로 지음·김태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2만5000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5/blog-post.html

2014-05-20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민음사·2만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5/blog-post_20.html

2014-05-24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http://basil83.blogspot.kr/2014/05/1.html

2014-07-06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http://basil83.blogspot.kr/2014/07/blog-post.html

2014-08-03
[별별시선]교통사고다, 그래서?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_3.html

2014-08-25
송희영, 조갑제, 김영오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html

2014-08-26
[북리뷰]안전은 ‘공학과 경제학’의 문제다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
함인선 지음·마티·1만5000원
http://basil83.blogspot.kr/2014/08/blog-post_26.html

2014-08-31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http://basil83.blogspot.kr/2014/08/28-28.html

2014-08-31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별별시선]28사단의 세월호, 세월호 속 28사단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뉴욕타임스’에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그 제목은 “In Ferry Deaths, a South Korean Tycoon’s Downfall”(여객선 사고, 한국의 한 부호의 몰락)이었다. 200개에 육박하는 댓글 중 유독 하나가 눈에 띄었고, 한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서도 화제가 됐다. “북한은 공산주의의 문제를 보여주고, 남한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물론 그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가 한국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을 폭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문제의 기사를 읽어보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목포해양대학원 김우숙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가 그 정도로 많은 화물을 싣고 그렇게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세월호에 화물은 곧 현찰이었다.”

세월호가 보여준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한국선급은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개조했을 때, 그것이 안전의 기준선을 넘지 않았는지 제대로 감독했어야 한다.

한국해운조합은 세월호에 실린 화물이 너무 많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지나치다면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단체다. 만약 지금까지 밝혀진 대로, 세월호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진 이유가 제대로 묶여 있지 않은 컨테이너 때문이라면, 그 책임 중 적지 않은 부분이 한국해운조합에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리해보자. 세월호라는 배는 인천에서 제주도까지의 항로를 수도 없이 오갔다. 세월호 참사는 그 수많은 항해 중 어떤 하나가 잘못되어 벌어진 일이다. 적지 않은 분들은 세월호 참사에서 어떤 음모, 특히 정권 차원에서의 음모를 직감하고 있는 듯하지만, 배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이 참사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청해진해운이 감수했던 ‘위험’의 범위 안에 속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리 기업을 감독해야 할 공적 프로세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선급은 사실상 선주들의 이익단체이고, 한국해운조합의 양심적인 직원들은 문제를 고발할 수 있을 만한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배를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외부의 관리·감독 없이, ‘셀프 감시’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연안여객선의 안전 기준이 실제로 점점 후퇴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 일명 ‘윤 일병 사건’에서 보게 되는 모습이 그와 같다. 현 법체계상, 군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은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동시에 사법권도 행사한다. 그러니 본인이 지휘하는 부대가 ‘이상무’이기를 바라는, 그렇게 무사히 전역해서 연금을 수령하는 편안한 삶을 꿈꾸는 지휘관들은, 내부에서 사람을 두들겨 패고 죽이는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감추려 든다.

한국선급으로서는, 모든 일이 무사히 잘 돌아간다고 가정할 경우, 세월호의 증축과 개조를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28사단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군부대의 지휘관들도 내부의 가혹행위를 그저 덮어두고 쉬쉬하고 싶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이유로 ‘참사’가 되어버렸다. 공식적인 지휘 통제권을 가진 누군가가 제 역할을 했더라면 그 피해는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세월호의 선장이 승객들에게 제대로 탈출 안내 방송을 했더라면, 그리고 윤 일병이 소속되었던 의무대의 부사관이 가해자 병장의 가혹행위를 저지했더라면 말이다.

이후의 전개도 비슷하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정작 한국의 연안여객선 관리의 복마전에 대한 조사 및 처분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듯, 28사단 폭행 사망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군은 자신들이 가진 재판권을 전혀 내놓을 생각이 없다.

여기서 세월호 참사와 28사단 폭행 사망사건의 접점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그들이 ‘내부’에서 행사하던 관리·감독의 권리를 ‘외부’로 끌어내야 한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을 햇볕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2014-08-26

[북리뷰]안전은 ‘공학과 경제학’의 문제다

[북리뷰]안전은 ‘공학과 경제학’의 문제다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
함인선 지음·마티·1만5000원

1911년 뉴욕. 당시 미국은 세계의 공장이었고, 그 중에서 뉴욕은 세계의 봉제공장이었다.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브라운 빌딩에 불이 났다. 그 건물에는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봉제공장이 있었는데, 공장주가 문을 잠가놓은 탓에 123명의 여성과 23명의 남성이 화재로 숨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미국의 의류업계도 어린 여성들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탓에 사태는 더욱 끔찍해졌다. 생때같은 10대·20대 소녀들이 불에 타서, 연기를 들이마시고, 그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창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잃었다.

책의 말미에 수록된 저자의 말을 읽어보면,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나의 작업기를 바탕으로 그 작업들의 이론적·실천적 배경이 된 근대 건축가들의 얘기로 꾸며볼 계획”(232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의 탈고를 앞둔 시점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으려던 경주 리조트 붕괴사건에 대해서도 발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책 자체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거기에 각각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우리는 책 제목을 통해 그 구분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앞에서는 ‘정의와 비용’을, 뒤에서는 ‘도시와 건축’을 논하는, 뜻하지 않게 시의성을 갖춘 책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의’라는 단어 뒤에 곧장 ‘비용’이라는 개념이 붙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담론 지형에서 상당히 낯선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하다. “결국은 공학과 돈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자꾸만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문제로 바꾸려 든다”(19쪽)고 지적한 후 “공학적 사고의 원인은 안전율의 부족 때문이고 안전율의 부족은 돈의 부족 때문”(27쪽)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안전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안전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삼풍백화점부터 경주 리조트 붕괴, 세월호 침몰까지 공학적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것은 안전 불감‘증’(症)의 문제가 아니다. 안전 ‘공학-경제학’의 문제이다.”(같은 곳)

그러한 시각으로 세월호 침몰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 참사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배의 안전율은 곧 운항 수익의 함수이다. 그리고 운임은 좁게는 그 회사의 경영진이 정했겠지만 넓게는 동종업계의 합의였을 것이고 더 크게는 물가를 통제하는 당국과 시장이 정했을 것이다.”(22쪽) 실제로 정부는 연안여객선을 이용하는 승객들의 불만을 고려하여 요금을 올리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었고, 청해진해운은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배의 평형수를 빼고 신고하지 않은 화물을 실었다. 그렇게 생긴 이윤은 배와 안전에 재투자되지 않고 유병언 일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박하게 책정된 안전율임에도 범죄자들은 이마저도 빼먹을 것이라는 것은 경험상 ‘예견된 일’이다.”(같은 곳)

1911년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화재 이후 미국은 같은 종류의 대형 참사를 다시는 겪지 않았다. 안전이 사회적 비용의 문제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울의 도로가 푹푹 꺼지는 싱크홀 현상까지 목격하고 있는 우리는 그 비극으로부터 대체 무엇을 배웠을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8-25

송희영, 조갑제, 김영오

송희영, 조갑제, 김영오


1. 8월 23일, 송희영 칼럼 "국가와 싸우는 국민들"

8월 23일, 조선일보 주필 송희영의 칼럼이 게시되었다. 제목은 "국가와 싸우는 국민들". 그는 미국의 핵 물리학자 리원허(李文和)가 간첩 혐의로 FBI에 체포되었던 사건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다.

리원허 박사는 중국에 핵무기 정보를 몰래 제공한 것 외에, 59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지만, 그것은 FBI의 잘못된(아마도 '기획'된) 수사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무죄가 선고되었고 "FBI의 잘못된 수사에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송희영 칼럼 첫 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다.

2014년 8월 23일, 한국 저널리즘의 한 풍경. 거대 신문사의 유명 주필이 외국에서 벌어진 무리한 기획 수사 이야기를 꺼내들고, 삼권분립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그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넓은 의미의 정부'의 권한을 셋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는 듯 논지를 끌어간다. 그러면서 결국은 세월호 유족들이 '사회계약을 넘어서는 초법적 권리'를 요구한다고, 전교조 혹은 수많은 노동조합들과 다를 바 없다고, "대통령·국회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골몰한 나머지 정작 계약의 당사자인 다수 국민과 싸우고 있는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딱지를 붙인다.

이제, 세월호 피해자들을 조선일보가 어떻게 몰아가려 하는지, 분명해졌다. 제목에는 '국민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국가와 싸우는 비국민들'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2. 삼권분립 위에 '나랏님' 있다?

잠시 그의 칼럼을 조금 더 짚어보자. 송희영은 삼권분립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삼권분립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인, '넓은 의미에서의 정부'를 강조한다. FBI가 잘못 수사해서 벌어진 일이지만 리원허가 감옥에 갇혀있던 것에 대해, 보석(保釋)조차 허가받지 못했던 것에 대해, 판사가 판결문을 통해 사과한 것을 두고 그런 논지를 펼친다. "FBI의 수사 실패를 왜 판사가 사과하느냐고 한국인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송희영은 단정짓는다.

교묘한 사실의 왜곡이다. FBI가 엉터리 기소를 했더라도, 법원에서 제대로 그 내용을 간파하고 보석을 허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원허 사건에서 법원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는 식으로 송희영은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뜻이다. 법원은 법원의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사과를 한 것이다. "법원이 행정부를 대신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와 행정부가 한 몸이라는 입장에서 사과한 것"이 아니다.

가령 인혁당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시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 공안조작 사건을 벌여 피고인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18시간만에 형을 집행했다. 이 경우, '사법살인'의 궁극적인 주체는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며 사건을 조작한 중앙정보부지만, 법원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대한민국이 진정 삼권분립을 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한다면, 그러므로 그 사과의 주체는 법원과 정부 양쪽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코 한쪽이 다른 쪽의 역사적 사죄를 대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리원허 사건과 그 전개에 대한 송희영 나름의 해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사과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은 리원허가 더 나쁘다. 몇 문단 아래로 내려가보자. 리원허가 자서전에서 "자기 조국(祖國) 미국을 원망했다"며, 여태까지 학교나 연구소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판사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해 사과했지만 그가 먼저 자기 나라를 등졌기 때문일까"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질문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사실상 협박에 가깝다. 대통령도 사과했고 판사까지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해 사과했으니, 억울해하지도 말고 그런 내용을 자서전으로 쓰지도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이다. 되도 않은 기획 수사에 휘말려 인생이 뒤엉킨 피해자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은 온데간데없고, '나라가 사과했으면 백성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봉건적 논리만이 남아있는 셈이다.

리원허 사건에서 삼권분립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법원은 FBI의 무리한 기소를 애초부터 인정하지 말았어야 한다. 설령 기소했다 한들 그를 독방에 가둬두고 보석조차 허락하지 않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말았어야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 모두 나름의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사과를 했다. 하지만 송희경은 거기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정부'로 성급하게 나아간 후, 오히려 '조국을 욕하고 다니다니'라며 리원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송희영의 세계 속에, 과연 '이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나는 그 과오를 밝힌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내부고발자나 양심적·비판적 애국자의 자리가 남아있을 수 있을까. 삼권분립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을 읽는 대신, 그는 3부를 통괄하는 '나랏님'의 존재를 이끌어내고, 세월호 유족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그 '나랏님'을 국민 전체와 등치시킨다. '비국민'을 만들어내기 위한 담론적 포석이다. 이것이 2014년 8월 23일,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세월호 사태 대응 전략이다. 그들을 전교조처럼, 노동조합 가입자들처럼, 비국민으로,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이다.


3. 손석희 vs. 조갑제

세월호 참사가 막 시작되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배는 급격히 기울어 한 시간 가량 지난 오전 10시 5분, 이미 90도 가까이 기울어 좌현 전체가 거의 물에 잠겼다. 오전 10시 19분에는 완전히 전복되어 배의 바닥만이 수면 위로 드러난 상태가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참사의 시작이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처음에는 일종의 해프닝처럼 보도되었다.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했지만 승객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희대의 오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오보를 처음 낸 곳은 어디인지, 사실 확인 없이 받아적은 언론사들이 전부 어디인지, 낱낱이 밝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세월호 침몰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바로 그 '전원 구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머릿속에 '세월호 전원 구조'라는 잘못된 프레임이 입력되고 나니, 연이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원 구조가 가능했는데 해경의 잘못으로 애꿎은 생명이 희생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세월호 침몰 이후 해경의 대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1). 해경은 신고를 받고도 일부러 늑장 출동하였다.
(2). 해경은 일부러 세월호 선내에 진입하지 않는 등, 소극적 구조 활동에 머물렀다.
(3). 세월호가 전복된 후에도 '에어포켓' 등에 갇혀 있는 승객을 살려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언딘과 유착된 해경의 수상한 행동으로 인해 '골든타임'을 놓쳤다.

(1)에 대해 살펴보자. 왜 진도 VTS가 아닌 제주 VTS로 신고가 접수되었는지, 세월호의 변침을 왜 진도 VTS에서 놓쳤는지 등을 놓고 다양한 '의혹'이 제기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을 놓고 보면, 어쨌건 해경은 사고 신고 접수 후 출동했다. 해경 구조 헬기는 약 30분 뒤, 구조정은 약 40분 뒤에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비판자들은 마치 해경에게 무슨 순간이동 능력이라도 있는 양, 왜 배가 기울기 시작한 그 순간에 현장에 없었냐는 식으로 나무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경비정은 24노트의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신고를 받은 후 이보다 더 빨리 출동할 수 있는 방법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2)의 경우도 그렇다. 마치 단 한 사람의 해경도 세월호 선내에 갇힌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양, 그렇게 언론은 입을 맞춰 몰아갔고 그렇게 사실은 왜곡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배에 갇힌 단원고 학생을 해경이 망치와 파이프로 유리창을 깨고 구조했다. 세월호에서 승객을 구조해낸 당사자인 박상욱 경장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가 “선실 유리창 안에 사람들이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배가 船首 쪽으로 돌면서 발견한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급히 망치를 들고 세월호로 옮겨 탔습니다. 이형래 경사와 이종훈 경사 그리고 제 곁의 한 분은 구조된 승객이라 기억하는데 그 분도 저와 같이 유리창 깨는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제가 들고 있던 30cm 정도 되는 나무자루에 주먹 만한 쇠뭉치가 달린 망치였는데 이걸로 몇 번 가격해도 유리창이 멀쩡했습니다. 아마 가격할 때 자세가 불안정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기울어진 바닥에서는 망치질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종운 경사가 망치를 들고 저는 123정에서 전해준 쇠파이프 지주봉을 들고 때렸습니다. 지켜보던 123정에서 鐵製 지주봉을 뽑아 저에게 전해 준 겁니다. 함정에 추락방지용으로 설치한 鐵製 봉이었지요. 제 옆에 서 있던 승객도 망치를 건네 받은 뒤에 같이 몇 번을 내리 쳤습니다. 그래도 유리창은 멀쩡했습니다. 그때 제 곁에 있던 승객이 망치를 내리치는 순간 ‘퍽’ 하고 유리창이 깨져 나갔습니다. 거의 동시에 船室에서 두 손이 번쩍 올라왔습니다. ‘만세 자세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오는 손 마다 잡고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도 두 사람이 끝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부터는 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배가 더 기울어지면서 사람들의 손이 유리창 부근으로 다가오질 않는 겁니다. 이번에도 123정에서 ‘홋줄’을 건네 주었습니다. 이걸 내려주어 사람들이 줄을 잡고 올랐습니다. 
"세월호 조타실로 진입했던 海警(해경) 朴相旭 경장: "제발 사실대로만 써주세요. 부탁입니다"", 조갑제닷컴, 2014년 5월 26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941&C_CC=AZ

목포해경에 소속된 의경 김모(22)씨의 증언 역시, 당시 해경이 '적극적 구조 활동'을 하였으며, 심지어 그 구조 활동에는 이미 구조된 세월호 승무원이 참여하기도 했음을 시사한다. "김씨는 123정이 세월호에 두 번째로 맞대어 객실 유리창을 깨고 5~6명을 구조한 것과 관련, "누가 유리창을 깼느냐"는 검사의 질문을 받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직원(해경) 두 명이랑 승객 두 명이 있었다"고 답했다."("세월호 승무원 2명, 승객 구조 참여 정황 확인(종합2보)", 연합뉴스, 2014년 8월 19일, http://m.yna.co.kr/kr/contents/?domain=2&ctype=A&site=0100000000&cid=dJRTVKaDAJb)

언론을 포함해 블로거 등 독립적으로 여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사건 현장의 사진 한 두 장을 놓고, '세월호 선내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해경은 그것을 못본 척 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왜 해경은 이쪽에서는 유리를 깨고 사람들을 구조하고, 저쪽에서는 그냥 죽도록 내버려뒀을까?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해경은 최선을 다해 구조 활동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은가?

(3)으로 넘어가보자. 진도체육관에 몰려 있는 유가족들을 생중계하기 시작한 언론은 그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내보내며, 마치 뒤집어진 세월호 속에 생존자가 있을 수 있다는 듯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전의 '전원 구조' 오보가 정정되고 난 후, 국민들의 관심이 비로소 쏠리기 시작한 시점인지라, 자극적인 보도 소재가 필요했기에 모든 언론은 거의 암묵적으로 '저 속에는 생존자가 있다'는 전제를 너무도 당연하게 공유하기 시작했다.

7~8월 해수욕장에 한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체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4월의 바닷물 속에서, 설령 구명조끼를 입고 물 위에 떠있다 한들, 몸이 바닷물에 닿는 한 하루 이상 실종자가 생존해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당 수역의 수온을 전제로 한다면 침몰 후 6시간이 경과했을 무렵 생존자가 존재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우리는 고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다.

세월호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뒤집힌 배에서 생존자를 발견해 꺼낼 수 있다는 발상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더욱 명백해진다. 세월호의 높이는 50미터가 넘고, 수면 위로 드러나있던 배의 아랫부분에는 창문 따위가 없다. 배의 밑바닥이니까 당연히 '물 샐 틈 없이' 튼튼한 철판으로 용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존자를 만약 잠수부가 발견한다면, 그 생존자는 수십 미터 물 속을 잠수하여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아무런 장비 없이, 이미 지칠대로 지친, 훈련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말이다. 이 조건이 과연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세월호 침몰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1), (2), (3)의 '상식'은, 모두 사실이 아닌 그저 희망사항에 기반한 것들이다. 해경은 최대한 빨리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배가 45도 이상 기울어진 상태였다. 선장과 선원이 탈출하면서 선내에 승객들이 얼마나, 어떻게 존재하는지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탓에,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는 작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선내 진입 시도가 있었지만 배가 너무 많이 기울어서 100톤급 구조정에 실린 장비로는 어림도 없었다. 배가 완전히 뒤집힌 다음에는 사실상 생존자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침몰 당일, JTBC의 손석희 사장은 자신이 진행하는 뉴스9에서 백점기 부산대조선해양공학과 교수와의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백점기 교수는 "세월호 격실이 폐쇄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배의 구조상 공기 주입을 하더라도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며, '에어포켓'에 생존자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손석희가 10여초간 침묵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왜, 언론은 이후에도 '에어포켓'에 집착하며 '골든타임'을 되돌려달라고, 현장에서 실종자 수습 작업에 매진하던 해경을 몰아붙였을까?



여객선 세월호 침몰...백점기 부산대조선해양공학과 교수 전화 연결
http://youtu.be/VQLyJu_1F6Q?t=5m55s

사고 당일 언론인으로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손석희마저도, '다이빙 벨'을 투입해야 한다는 일부 여론에 편승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추김으로써, 세월호 침몰과 관련된 논의는 더욱 수렁에 빠져들었다. 언딘과 해경의 유착설이 떠오르면서 정작 그 해경이 사고 초기에 174명을 구조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혔다. 승객을 구조해낸 해경의 공로는 완전히 도외시되고, 그들은 '자력으로 탈출'했다는 식으로 보도되기까지 했다.

세월호 같은 크기의 배에서 당신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내린다고 가정해보자. 차갑고 조류가 빠른 진도 앞바다에서, 몸이 떠있고 숨을 쉰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살아있다'는 뜻은 아니다. 빨리 안전한 배로 옮겨 타야 한다. 배가 침몰하는 바다에는 온갖 부유물이 떠다니며, 그것에 부딪치면 부상을 입는다. 물에 뛰어내리는 과정에서도 부상을 입을 수 있다. 바다로 '탈출'한다고 해서 자력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그런 오만은, 안전한 곳에서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헛소리라는 말이다.

앞서 인용한 박상욱 경장의 인터뷰를 조금 더 읽어보자. 구조 현장의 모습은 이랬다.

잠시 뒤에 또 한 사람이 의식불명인 채로 배로 옮겨졌습니다. 학생이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이름표가 ‘정찬웅’이었을 겁니다. 이형래 경사와 제가 즉각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바다에 떠 있어 건졌는데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고 구조대원 중 누군가가 전해 주었습니다. 뇌진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의 神이 끌어가기 전에 제가 살려내야 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도해도 이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폐 소생술이 예상외로 무척 힘이 듭니다. 제가 지치면 李 경사가 시도하는 식으로 교대로 했지만 더 이상 바이탈 사인(Vital sign·호흡, 맥박, 체온, 혈압 등 活力 징후-注)이 생기질 않아서 헬기로 후송시켜야 했습니다. 그럴 때의 절망감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뉴스를 들으니 사망했더군요. 
"세월호 조타실로 진입했던 海警(해경) 朴相旭 경장: "제발 사실대로만 써주세요. 부탁입니다"", 조갑제닷컴, 2014년 5월 26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941&C_CC=AZ

세월호 참사는 한국 언론의 참사이기도 하다. 사건 당일, '에어포켓' 따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손석희는 며칠 후 '다이빙 벨'에 올인했다. 그 기적의 다이빙 벨이 현실 속에서 검증되어 어떤 민망한 결과를 연출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서술하지 않겠다. 세월호 참사 내내 가장 믿음직하다고 여겨졌던 '손석희 뉴스'가 이런 식이었다. 냉정한 사실을 파악한 후 그것을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대신, 헛된 가능성을 부풀리며 '희망 고문'을 하는 여느 언론의 대열에 동참하고 만 것이다.

오히려 이번 참사에서 유일하게 사실에 입각한 진실을 말하던 언론인은 조갑제 뿐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조갑제'라고 말하고 있다. 조갑제는 달랐다. 그는 4월 17일, 그 누구보다 빨리 세월호의 침몰이 과적 및 화물 결박 문제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화물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급회전 때 탈락, 배가 기울 수 있다", 조갑제닷컴, 2014년 4월 17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473&C_CC=AZ). 후속 보도인 "파도 없는 바다에서 이 정도의 急변침만으로 큰 배가 전복된다면 海運이 성립될 수 없다!"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배의 操舵(조타)는 35도 이상 꺾을 수 없다. 배는 덩치가 커서 자동차처럼 핸들을 꺾는다고 금방 회전하는 것도 아니다. 즉 급회전만으로 배가 顚覆(전복)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급회전이, 무게중심이 높은 船體(선체)를 기울게 하고, 여기에다가 적당히 묶어두었던 컨테이너 등 화물이 풀려, 그쪽으로 쏠리고 여기에다가 강한 潮流가 가세하면 배는 復原力 한계를 넘게 되어 전복되는 것이다. 
"파도 없는 바다에서 이 정도의 急변침만으로 큰 배가 전복된다면 海運이 성립될 수 없다!", 조갑제닷컴, 2014년 4월 17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480&C_CC=AZ

나는 조갑제의 거의 모든 정치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를 애국자로 내세우는만큼 나도 애국자라고 생각하지만, 박정희와 이승만을 우상화함으로써 그 애국이 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오히려 그런 식의 우상 숭배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조갑제 본인이 말하는 바와 제대로 부합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있어서만큼은 조갑제가 옳다. 조갑제만이 올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보도한 언론인이었다. 충분한 지면을 할애하여 해경 뿐 아니라 세월호 선장의 변호사까지 인터뷰하는 언론인도 조갑제 뿐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국민의 알 권리'를 제대로 지켜주고 있는 오직 단 한 사람을 꼽자면, 적어도 나는 손석희가 아니라 조갑제의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조 활동에 나섰던 해경을 언론은 '참사의 원흉'으로 몰아갔다. 7시간 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 청와대에 거주하는 시사평론가 박근혜 씨는, 그 언론 보도를 고스란히 받아적어 '대통령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시사평론가 박근혜 씨는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직후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활동을 펼쳤다면 희생을 크게 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라고,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선포'하면서, 해경을 해체해버린 것이다. 너무도 노골적인, 희생양을 만들어 국민들의 분노한 여론으로부터 도망가려는, 꼬리 자르기였다.

9. 朴 대통령은 성난 여론 앞에 해경을 희생양으로 바쳐 위기를 벗어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잠수사들이 죽어 나가는, 목숨을 건 屍身(시신)수습 작업의 주체인 해경을 격려하고 보호하기는커녕 선동 언론과 합세, 뭇매를 때린 대통령을 공무원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세월호 침몰 후의 사태 전개 정리: 언론이 가장 큰 개혁대상임을 확인", 조갑제닷컴, 2014년 5월 30일,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5992&C_CC=AZ


4. 조선일보는 어쩌면, 알고 있었다.

박근혜가 하는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지 않는 수많은 야권 성향의 인사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들도 백이면 백, 저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말만큼은 철석같이 믿는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전제조건을 시사평론가님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해경 해체가 발표된 후 각 신문사에서 내놓은 사설들을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해경 해체의 논리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올바른 일이 된다거나, 조선일보가 찬성하는 일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그들은 특유의 정보력과 여론 감각을 가진 '1등 신문'이다. 해경 해체에 대한 조선일보 사설을 읽어보자.

박 대통령은 담화에서 해경 해체라는 극약 처방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세월호 사태에서 드러난 해경의 구조적 문제를 꼽았다.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이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해양 구조·구난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은 해경의 무능과 무책임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해경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박 대통령의 문제 의식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해양 구조·구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해경 본연의 업무이자 우리의 주권 수호와 직결된 해양 경비·경계 역량을 약화하는 쪽으로 흘러가선 안 된다.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를 볼 때 해양 경계·경비 업무는 더욱 강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선 별도의 해양 경비 조직이 꼭 필요하고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사설] 해경 해체에도 '海洋 주권' 지킬 기구는 강화해야", 조선일보, 2014년 5월 21일, http://m.chosun.com/svc/article.html?contid=2014052004191&sname=news

사설 전체에서 해경에 대한 비난이 등장하는 문장은 딱 두 줄 뿐이다.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이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해양 구조·구난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은 해경의 무능과 무책임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해경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박 대통령의 문제 의식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두 문장 외에는 모두, 해양주권을 지키기 위한 별도의 조직이 왜 필요한지, 중국의 해양 영유권 주장이 거세지고 중국 어선들이 우리 바다에서 활개를 치는 지금 특히 왜 절실한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지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행간을 꼼꼼히 읽어보면 조선일보가 과연 해경 해체에 찬성한다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하다. 주요 부분들을 짚어보자.

"바다 주권(主權)을 지키는 해양 경계·경비 업무가 국가안전처 내 실(室)·국(局) 단위 조직으로 편입되는 셈이다. 주권 수호 기능이 구조(救助) 기능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은 머지않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해경이 세월호 구조 작업에 매달려 있는 사이 중국 어선들이 우리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연평도·백령도·흑산도 등 주요 어장에선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매단 중국 어선만 눈에 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중국 어선들은 도끼와 낫, 쇠창 등으로 무장한 채 떼를 지어 다니면서 어종을 가리지 않고 불법 남획을 일삼고 있다. 준(準)군사작전이나 다름없는 이들에 대한 단속 업무까지 국가안전처가 맡게 되는 것이 맞는 방향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 각국은 지금 해양 주권을 지키기 위한 선제적 조치들을 취해나가고 있다. 육·해·공군과는 별도의 해안경비대를 강화하는 나라도 적지 않다. 국방부가 지난 3월 발표한 국방 개혁 기본계획에서 현재 육군이 맡고 있는 해안 경계 업무를 2021년까지 해경에 넘기겠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해경이 해체되면 국방 기본계획까지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이런 내용들을 앞에 한참 늘어놓은 후, '국민 모두 분노했다, 박근혜의 인식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며 해경 해체에 슬쩍 찬성하는 모양새를 만드는 조선일보는, 어쩌면 '해경 책임론'이 세월호 사태에 대한 올바른 진입 경로가 아님을, 늦어도 이 시점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후 언론들의 보도 행태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보수 언론들은 종편 방송사를 총동원하여 유병언 일가에 대한 검찰의 추적에 집중했다. 반면 진보 언론들은 계속 '해경 책임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세월호 책임론'을 물고늘어졌다. 여당과 야당의 대응도 바로 같은 경로로 나뉘었다. 그리고 우리는 8월 25일 현재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선일보에서 반대한다고 해서 그게 꼭 옳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조선일보에서 찬성하는 일이 다 나쁜 일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뭔가 독특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거기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 해경 책임론이 바로 그렇다. 이미 조선일보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사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 어느 정도 손을 털었다. 혹자는 그 이유를 '해경을 감싸기 위해서다, 더 큰 음모가 배후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영양가가 없어서'라고 보는 편이 좀 더 간명하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 관계자들은 대부분이, 특별법과 특검 없이도 경찰과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었고,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다. 이준석 선장을 포함한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이 대표적이다. 해경 대원들 역시 재판의 참고인으로 많은 조사를 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면, 해경은 그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면수심'이라고 비난받던 세월호 선원들 중 일부도, 자신들이 그 배에서 탈출한 후에는 창문을 깨고 승객을 구조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현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세월호 사건의 진상은 조금씩이나마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야권의 대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는 잘못된 프레임이다. '전원 구조'가 오보라면, '전원 구조할 수 있었다'는 주장 역시 잘못된 가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세월호는 침몰 시작 후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복되었다. 흘수선과 가까운 곳에, 자동차를 싣기 위한 격문이 설치되어 있는 로로선(Ro-Ro船)의 특징이다. 무게중심이 높아서 잘 뒤집히고, 전복되기 시작하면 그 피해를 걷잡을 수 없다. 1994년 9월 28일, 노르웨이의 여객선 에스토니아호 사건이 그렇다. 01시 00분 무렵에 쾅 소리가 들렸고, 01시 30분 무렵이 되자 배가 90도로 기울었다. 선원과 승객을 포함해 989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138명이 구조되었고 그 중 한 사람이 병원에서 사망했다.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와 비교해보면 세월호 침몰에 대한 한국 해경의 대응이 과연 '늑장 대응'이었다고, '무책임한 태도로 우리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수수방관했다'고,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 적어도 조선일보는 지금 이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야권의 인식을 굳이 교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전제를 놓고 달려들게 내버려두는 편이 '정치적'으로 볼 때 좀 더 나은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요구하는 '진상 규명'이 '해경 책임론'에 근거하고 있는 한, 진도 VTS가 어쨌고 저쨌고 언딘이 어쩌고 저쩌고에 매달려있는 한, 야권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배가 기울기 시작한 순간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선장과 선원들이 잘못된 선내 방송을 틀어놓고 탈출해버린 한 승객을 전원 구조하는 것은 불가능했음을, 설령 승객 전부가 바다에 뛰어내렸다 한들 불행한 희생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음을,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언론은 희생양 만들기에 골몰했고 박근혜 정권은 그 여론몰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해경 해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초강수를 두었다. 진상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부로서의 책무를 내팽개친 것이다. 로로선이 기울어진 이상 비극은, 크건 작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먼저 깨닫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살려내라'고 해경을 향해, 청와대를 향해, 그 누군가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영악한 '1등 신문'은 그 포지션에서 이미 발을 빼고,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유가족 중 특히 김영오 씨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이쪽에서 먼저 저들보다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대응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또 당할 것이다. 뱀처럼 지혜로우며 비둘기처럼 온유하라는 성경의 말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기울어진 배에,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해경이 뛰어들었다면, 그들은 희생자들을 구조하기는 커녕 스스로가 시신이 되어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야권 언론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선량함을 입증하기 위해 계속 기존의 논의에 매달려있을 때, 조선일보는 이미 그들을 두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5. '침묵의 카르텔'을 향한, 김영오 씨와 우리 모두의 싸움

본격적인 신상털기가 시작되었다. 이미 자료를 확보해두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영오 씨가 작년 7월 충남 궁도협회에서 궁도 초단을 땄다는 그런 '정보'는 과연 어디서 어떻게 입수할 수 있는 것인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실 확인이 좀 더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만, 아무튼 조선일보는 방향을 정했다. 신상을 털겠다는 것이다.

이 신상털기가 무서운 이유는 단지 김영오라는 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붙이기 때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공동의 의제로 소화되어야 할 사안을, 단지 한 사람의 '땡깡'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안전과 생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거칠게 막아서고, 대신 김영오라는 사람, '유민 아빠'라는 누군가가 과연 정말 그렇게 가난해서 딸 양육비도 안 보냈느냐 마느냐로 화제의 촛점을 옮긴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더욱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세월호 특별법이 정말 '수사'하고 '기소'해야 할 대상은, 현장에 출동한 해경이 아니라, 세월호라는 배를 그런 식으로 개조하고 운항할 수 있도록 허가해준 총체적 안전 관리 시스템이다.

해경들이 순간 그 장소로 순간이동해서 기관실의 마이크를 빼앗고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가라'고 방송을 했다면 아마 전원 무사히 구조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간 해경의 123정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세월호는 45도가 넘도록 기울어져 있었다. 스파이더맨이 아닌 다음에야 그보다 더 기울어지고 있는 배에 올라탈 수는 없다. 구조대원은 구조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구하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권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해경 책임론에 목을 매고 있고, 그들의 죄과를 낱낱이 밝히기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며, 청와대와 여당에서 그것을 순순히 내놓지 않자 '더 윗선에 닿은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숙덕거린다. 만약 그렇게 거창한 음모가 있다면, 과연 특별법에서 정한 그 알량한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윗선'을 죄다 털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야권과 야권 성향의 언론들은 있지도 않은 음모와 복선을 찾아야 한다고, 마치 지붕 위의 닭을 쳐다보는 개처럼 마구 짖어댔다. 자녀들의 생죽음을 경험한 유족들이 그러한 의견에 휩쓸려버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누가 김영오 씨의 신상을 털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조선일보다. 하지만 누가 김영오 씨를 고립시키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검증할 수도 없는 음모론과 해경 책임론 등등을 유포시킨 모든 언론 및 야권에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합심하여 세월호 유족들에게 검증될 수 없는 진실을 요구하도록 몰아갔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배가 뒤집혔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배가 왜 뒤집혔을까? 안전 규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있었어도 엉망으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배가 뒤집힌 이후, 승객들을 '전원 구조'해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는 듯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만약 밝혀진다면 박근혜 정권이 발칵 뒤집힐 것 같고, 결코 입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장으로 급히 달려간 해경은 민간인 어선들과 협력하여 최선을 다했고, 배가 뒤집혀버린 후에는 '에어포켓' 따위 없었으며, 생존자를 구조할 가능성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야권의 논지가 세워졌다면, 오히려 그들은 해경을 해체해버린 박근혜 정부를 향해 강력한 비난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무슨 대통령이 어떤 부처의 정상적인 기능 수행을 '실패'라고 단정짓고, 대뜸 해체를 선언해버린단 말인가? 이보다 무책임한 국정 총책임자를 우리는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야권 정치인과 언론들은 '해경 책임론'에서 시사평론가 박 모씨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바, 박근혜를 욕하면서도 박근혜의 정책을 지지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천안함 침몰을 둘러싸고 '진실게임'을 벌이다가 야권이 쓴맛을 본 2010년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국제합동조사팀이 '북한의 어뢰에 천안함이 피격되었음'이라는 결과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권 언론들은 계속 온갖 음모론을 양산했고, 심지어 '이스라엘 잠수함이 서해 바다에 와서 천안함을 들이받았다'는 기상천외한 소리까지 등장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영해로 북한 잠수함이 침투했다는 점을 두고 정부와 여당을 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기회는 전부 날아가버렸고, 대신 무능한 군과 정부가 애국자 행세를 하는 꼴이 연출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지는 일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한 해에 80여명씩 '자살'로 처리되는 군내 사망 사고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군대 속에서는, 4년마다 세월호가 한 척씩 침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보자.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왜 이딴 배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승객과 화물을 실어나를 수 있었느냐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배의 안전을 검사해야 할 한국선급은 사실상 선주들의 이익단체이며, 심지어 공공기관으로 지정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감사를 받지도 않았다. 세월호 참사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선급 전영기 회장은 4월 25일 사표를 제출했고 그 사표는 깨끗하게 수리되었다.

뉴스를 검색해보면 그를 비롯한 한국선급의 고위직에 대한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배가 침몰해서 벌어진 참사에 대해, 배가 침몰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수사하며 예의 주시하는 대신, 정작 사고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고 있던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이 현상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해경의 고위직들이 한국선급에 수사 정보를 흘려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다루고 밝혀내야 할 일이지만, 공권력 전체에 대해 묻지마 불신을 형성하고 퍼뜨리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안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통해 어떤 진실을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그 지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 아니 그 전에 협상 주체로 나서는 이들의 전반적인 합의가 과연 이루어져 있는가. '모든 의혹은 낱낱이 밝혀낸다'는 추상적인 구호 말고, 대체 무엇이 의혹의 대상이며 무엇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야권의 입장은 중구난방이며, 가장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세월호 참사 현장 사진 한 두 장을 가져다 놓고 '왜 당신들은 저 배에 뛰어들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식으로는, 그러나 그 어떤 '진실'에도 다가가지 못할 것이 너무도 명백해지고 있다.

한 발 떨어져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는 '안전'과 '이윤' 가운데 후자를 택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한다. 배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물을 싣고 승객을 태우는 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그렇게 생긴 이윤을 나눠먹는 사람들이 서로 입을 싹 씻고 다물어버리겠다는 합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침묵의 카르텔'은 세월호 참사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 가령 최근 28사단 폭행 사망 사건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군 내부의 문제들이 그렇다. 사람을 그렇게 많이 모아놓으면 확률적으로 폭행, 가혹행위, 사망 사건 등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군이 조직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그러한 일들을 은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군은 윤일병의 사망 원인을 질식사로 몰아가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은폐 시도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음을 너무도 확연히 바라볼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세월호 피해자들과 군 사망 사건 피해자들의 접점이 생긴다. 수학여행 보낸 자식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와,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보낸 아들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는, 모두 이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에 짓눌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선급을 포함한 해운업계라는 거대 조직, 혹은 군대라는 거대 조직은, 자신들이 '별 일 없이' 누려온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고 여론을 몰아간다.

현재 군 지휘관이 독점적으로 누리고 있는 군사법정의 재판권을 시민사회가 일부 되찾아오지 않는 한, 군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를 은폐하려 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전한 해상교통수단을 이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 한, 여전히 위험한 불법 개조를 감행한 배들은 바다 위를 활보하고 다닐 것이다.

이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에 맞설 때, 비로소, 딸에게 줄 양육비는 없고 국궁 쏘러 다닐 돈은 있다고 여론몰이당하고 있는 김영오 씨는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야권과 언론이 만들어온 프레임을 유지하는 한 세월호 유족들은 사회적으로 점점 더 고립되어갈 뿐이다.

'진상규명'이 아닌 '안전회복'에 더 무게를 두고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여론전의 각도를 재설정해야 할 필요성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국정원의 세월호 음모 따위에 계속 발목을 잡혀있으면 곤란하다. 세월호 참사의 핵심은 배가 침몰했다는 것이고, 배가 침몰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손쓸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향할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비겁하게도 행정부의 한 조직을 통째로 쳐냈다는 것이다. 어떤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가, 어떤 진상을 규명해야 하며 무엇은 의혹의 대상이 아닌가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지금이라도 시작되어야 할 필요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jeongtae-roh/story_b_5706973.html

2014-08-12

[북리뷰]대학을 접수한 자본의 대학경영

[북리뷰]대학을 접수한 자본의 대학경영

기업가의 방문
노영수 지음·후마니타스·1만5000원

그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고깃배에 탔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를 버티면 용하다고 빈정거렸지만, 그는 이겨냈다. 휴학을 하고 한 학기에 걸쳐 배를 탔다. 계약된 기간을 다 버티지 못하고 내리면 최저시급에 턱없이 부족한 기본급만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중앙대학교 독어독문과를 휴학한 복학생 노영수는 그 시간들을 징하게 버텨냈다. 그렇게 번 돈은 316만9000원. 지난 학기 등록금과 똑같은 액수였고, 등록금이라는 것은 매년 치솟는 탓에 2008학년도 등록금인 337만5000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배를 타고 번 돈을 들고 그는 학교로 돌아왔다. 그가 기억하는 학교는 고깃배와 달리, 낙오자의 몫을 남은 사람들이 갈라먹는 그런 잔인한 곳이 아니었다. 노영수의 회고에 따르면 중앙대학교는 학생 자치 및 교육에 있어서 ‘선’을 넘지 않았다. 2003년에 그가 입학할 무렵 중앙대학교 재단은 가난했다. 시설은 낙후되어 있었고 학생들의 자치활동에 대해 많은 재정적 지원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영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은 그 시절을 ‘좋았던 때’로 기억한다.

고깃배를 타고 파도를 건너 돌아온 복학생과 함께 한 기업가가 중앙대학교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는 이사장이 운영하는 사립대학의 형식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CEO가 경영하는 기업처럼 운영되었다고 노영수는 증언한다. 두산에 소속된 회사원들이 학교의 세부사항을 관리했다. 기업화된 대학은 인기 교수 진중권의 해임에 맞서 시위를 벌인 학생들을 꼼꼼하게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았다. 노영수는 마지막 학기에 본인이 속한 독어독문과 학생회장에 당선되지만, 이미 ‘찍힌’ 그의 이름으로는 과대표 장학금을 줄 수 없다고 재단은 통보해왔다. 노영수의 말에 따르면, 중앙대학교는 마치 두산중공업에서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수행했던 것과 같은 그런 다양한 기법들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기업가의 방문>은 스위스의 극작가 뒤렌마트의 희곡 <노부인의 방문>을 차용한 것이다. 작은 시골 마을 귈렌에 차하나시안 부인이 방문한다. 그 노부인은 세계 최고의 부자인데, 과거 자신을 임신시켜놓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여 배신한 첫사랑 알프레드 일을 누군가 죽인다면 귈렌의 시민들에게 1000억 프랑을 나누어 주겠노라고 제안한 것이다. 그 제안을 못 들은 척하던 사람들은 점점 술렁이기 시작한다. 있지도 않은 돈이 생겼다고 들떠서 씀씀이가 커진 시민들은 결국 알프레드 일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기어이 죽여버린다. 노부인은 약속했던 1000억 프랑을 남겨두고 귈렌을 떠난다. 뒤렌마트의 희곡은 거기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기업가의 방문’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는 전 세계인들에게 통제받지 않는 금융과 자본은 결국 파국을 불러올 뿐이라는 교훈을 안겨주었지만, 해묵은 시장주의의 논리는 오늘도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을 뒤덮으며 또 다른 ‘기업가의 방문’을 예고한다.

법인화된 서울대학교는 최근 두산그룹의 전 회장 박용현을 신임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박용성 중앙대학교 이사장의 동생이며, 중앙대학교의 이사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서울대학교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우리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기업가의 방문>을 꺼내어 한 페이지씩 다시 읽어나갈 뿐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8-03

[별별시선]교통사고다, 그래서?

[별별시선]교통사고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일종의 교통사고인가?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에 이어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역시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및 피해자들의 편에 서고자 하는 언론, 정치인,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발언에 대해 격렬한 반대의 뜻을 표하고 나섰다.

물론 그러한 발언이 나온 맥락과 시점을 고려해보면 두 사람의 여권 인사는 정부와 여당으로 향하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 같다. 내게 쏟아질 수 있는 비난을 무릅쓰고, 감히 물어보겠다. 세월호 참사는, 그렇다면, 교통사고가 아닌가?

경향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김혜진 국민대책위 집행위원장은 “많은 이들이 분노한 건 사고 자체가 아니라 사고가 참사로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속에서, ‘교통사고’는 ‘구조 실패’보다 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선행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우리가 향후 방지해야 할 것은 사고 그 자체다.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이미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망자와 생존자, 실종자와 그 모든 이들의 가족 및 친지들이 겪었고 앞으로도 겪게 될 고통을 그냥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 잔인한 현실이 존재한다. 이미 벌어진 비극으로서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동정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저질러진 일, 이미 벌어진 비극 앞에서, 우리의 감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세월호의 침몰과 그로 인한 대량의 인명 손실을 그저 ‘세월호의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그런 위험을 끌어안고 있다.

‘세월호는 일종의 해상 교통사고’라는 발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반발한 것은 그런 면에서 최선의 대응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교통사고’처럼,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 우리가 살다 보면 우연히 겪기도 하는 일이, 이렇듯 참사로 비화될 수 있다고 응수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월호 참사’는 과거의 사고이며, 희생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이 겪은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확률적으로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며, 현재와 미래의 사고이다.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누가 놀러 가라고 했냐, 누가 죽으라고 했냐’고 막말을 퍼붓는 어르신들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확률상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즉 ‘교통사고’라는 프레임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것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논의의 폭을 사회 전체로 끌어올릴 수 있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라고 누군가가 어떤 맥락 속에서 ‘막말’을 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에게 ‘너는 교통사고 안 당할 것 같냐’고 ‘막말’을 되돌려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럼 그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정부가 뭘 했냐’고 쏘아붙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미 벌어진 비극을 놓고 더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끌어올리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또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의 시민운동가 랄프 네이더는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를 통해, 충분히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은 자동차가 교통사고의 위험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광범위하게 규합해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움직임이다. 누군가가 이미 겪은 ‘참사’에서, 너와 내가 당할지 모르는 ‘사고’로, 논의의 초점을 옮기는 것 말이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 부른다 해도 정부의 잘못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프레임 속에서 해야 할 이야기가 적지 않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가 겪었고, 겪을 수도 있으며, 최선을 다해 예방해야만 하는, 그런 비극적인 교통사고인 것이다.


2014-07-29

[북리뷰]뿌리깊은 갈등의 다양한 비극

<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함규진 옮김·글논그림밭·1만2500원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서로를 향해 로켓을 쏘아대면서 전투를 시작한 이후,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 공간은 특히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진으로 뒤덮였다. 저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선의와 분노로 가득찬 이들이 새로운 게시물을 올리면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묵묵히 리트윗이나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 그들의 피로 흥건한 참상을 우리 스스로가 일종의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지만, 우리는 이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스마트폰 시대의 세계시민적 분노란 이런 게 아닐까.

1917년,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 경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공개 서한을 보냈다.

이렇게 비극의 씨앗이 뿌려졌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원주민이 아닌 유럽 열강들과의 협상을 근거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성서에 쓰여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의 정당한 거주민임을 주장했다. 단지 말로만, 혹은 외교 협상 문서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총과 칼과 탱크와 포클레인 등을 서슴없이 동원했다. 하염없이 수세에 몰리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87년 이스라엘군의 무장 점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인 ‘인티파다’를 벌인다.

2014년 현재까지 우리가 보게 되는 참상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단단히 꼬여 있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재판 없이 구금하고 고문한다. 이스라엘의 폭력이 일상화된 탓에 감옥에 다녀오지 않은 남자를 찾기가 어렵다. 군인들은 병원에 찾아와 환자들을 두들겨패가며 시위 주동자의 행방을 묻고는, 애먼 사람을 몇 명 붙잡아간다. 이것은 분명한 인권 유린이며, 당장 중단되어야 할 조직적인 국가 폭력이다.

그러나 현장에 뛰어들어 취재를 하고 그 내용을 만화로 그려내는 코믹저널리스트 조 사코가 보기에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그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암담하다. 이슬람 사회 특유의 고질적인 여성 차별, 폭력으로 종종 치닫는 내부 정파 갈등, 터무니없이 높은 실업률 등 이스라엘이 설령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서 손을 뗀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의 해결이면서 동시에 비교적 작지만 지독하기로는 큰 차이가 없을 다른 문제의 시작일 것이다. 조 사코는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필체로 팔레스타인의 암담한 풍경과 비극적 일상을 처절하게 담아냈다.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곳에 갈 수 있다. 가자 지구의 진창에서 뒹굴면서 예루살렘의 깨끗한 호텔로 돌아갈 날을 고대한다. 비극을 ‘경험’하지만, 그 비극의 ‘일부’는 아닌 관찰자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사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마주하면서 겪게 되는 거의 모든 딜레마를 정직하게 담아내고 있는 책이다. ‘좋아요’를 누르기 전에, 리트윗을 하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한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7-15

[북리뷰]우리는 어린이 인격을 존중하나

[북리뷰]우리는 어린이 인격을 존중하나

어린이 문화 운동사
이주영 지음·보리·1만3000원

‘어린이’라는 단어는 1923년에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다. 1899년 11월 9일 태어난 소파 방정환이 3·1 운동을 겪은 후 조선 민중 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들을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 <어린이 문화 운동사>의 저자인 이주영은 그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식민지배 아래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부모로 두었는데, 거기다 그 부모한테 또 억압을 받으니 어린이는 이중으로 억압받는 민중이라는 것이다.”(19쪽)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가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치러졌다. 참여자들은 12만장에 이르는 어린이날 선언을 종로와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기에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농촌의 어린이들은 말귀를 알아듣고 두 손 두 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그 때부터 한 사람의 농사꾼이 되어야 했다. 도시의 어린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노동에 시달리는 것뿐 아니라 어린이들은 일상적인 폭력과 박해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린이를 동등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사회라면, 당연히 그 어린이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1923년의 방정환이 벌인 혁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약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리하여 보편적인 인간 해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말이다.

“지금은 어린이날이 5월 5일이지만 처음에 어린이날은 5월 1일이었다. 어린이 운동가들은 노동자의 날인 5월 1일을 왜 어린이날로 했을까? 어린이 운동가들은 어린이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민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들도 오전에는 노동자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어린이날 행사를 했다.”(21쪽)

5월도 아닌 7월에 갑자기 웬 어린이날 타령인가, 왜 <어린이 문화 운동사>라는 책을 꺼내들었는가.

7월 2일, 대전지법 형사법원 제1형사부는 친딸을 목검으로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즉 살인죄로 기소된 강모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그는 자신이 새로 사귄 여자친구가 싫다며 가출한 딸을 찾아 집으로 데려온 후 1m 길이의 목검으로 한 시간 반 동안 때렸다. 하지만 법원은 “사건 당일의 폭행은 설득과 훈육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으며, 강씨가 딸을 살해할 만한 다른 동기가 없다는 점을 참작해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죄를 적용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 시간 반 동안 목검으로 14세의 어린이를 때리는 것을 과연 ‘설득과 훈육의 연장선’상의 행위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어린이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라고 외치던 소파 방정환은 조국과 어린이들의 해방을 목격하지 못한 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나 과연 얼마나 어린이들의 인격과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7.15주간경향 1084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7071727351&code=116

2014-07-10

[GQ] 노인과 불바다

2014년 5월 28일 오전 10시 54분,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 막 진입하던 오금 방면 전동차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그로부터 불과 한달 전 벌어진 세월호 참사의 악몽이 잊히지도 않았거니와, 5월 2일 상왕십리역에서 벌어진 2호선 열차 추돌 사고의 충격이 생생하던 시점, 지하철에 불을 지른 범인은 71세 노인이었다. 범인 조 모 씨는 유흥업소를 운영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벌였는데, 재판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억울한 사연을 알리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2003년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의 범인 김 모 씨는, 범행 두 해 전 부터 갑작스럽게 걸린 병으로 장애인이 되었고, 신병을 비관하여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심정으로 지하철에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국보 1호 숭례문 역시 그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재가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던 채모 씨는 토지 문제로 H건설과 갈등을 빚다가 소송을 걸었고, 패했다. 비슷한 시기 아내와 이혼한 그는 곧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고 2년 후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들에는 일관된 패턴이 있다. 무엇보다, 나이 많은 남성이 있다. 지하철 3호선 방화 사건의 범인 조 모 씨는 71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김 모 씨는 당시 56세, 숭례문 방화 사건의 채 모 씨는 당시 70세였다. 그들은 사회, 세상, 혹은 시스템과 충돌하고 불화한다. 갑작스런 개인적 재난 상황에서, 그들은 일관되게 불특정 다수를 공격했다. 지하철에 불을 질러 억울함을 알리겠다는 생각,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남들도 죽이고 나도 죽어야겠다는 발상,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개인 대 개인, 인간 대 인간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러한 무작위 증오 범죄를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으로 시각을 확장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으로부터 당하고 쌓인 게 많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공공장소를 활보하는 ‘그들’에 대해,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2014년 6월 5일 <중앙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등장했다. ‘질풍노도의 노인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양선희 논설위원은 “요즘 노인 무섭다”는 말이 떠돈다며 운을 뗀다. 2011년을 기준으로 노인 범죄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폭력 사건이다. 전체 범죄 중 무려 32.5퍼센트를 차지한다. 지난 10년간, 노인들이 저지른 강도와 강간 사건은 4배, 방화는 2.7배, 살인은 2배 증가했다. 요약하자면, “노인 1명이 늘면 범죄 3건이 느는 꼴이다. 게다가 평생 전과 없이 살다가 60, 70대에 처음 범죄를 저지르는 초범은 5명 중 3명꼴이다.”

노인이 늘어나는 사회 속에서, 그 노인들이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비중 역시 커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노인 범죄와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노령화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은 대체로, 젊은 남성이 늙은 남성으로 대체되면서 그에 따라 강력 범죄가 줄어든다는 것을 논거로 삼곤 한다. 몸이 지치면서 영혼도 유순해지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인들은 반대다. 은퇴 연령을 넘긴 노인들이 사람을 때리고 칼을 휘두르며 성범죄를 저지르고 지하철에 불을 지른다. 나름의 방식으로 조사를 해본 양선희 논설위원은 이 현상에 대한 선행 연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한다.

이렇듯 폭주하는 비행 노인들이 늘어가고 있는 가운데, 얄궂게도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노인 친화적’인 곳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일단 호칭 문제부터가 그렇다. 노인들은 언제부턴가 ‘어르신’의 위치를 획득했다. 한국어의 크나큰 단점 중 하나는 발화자와 수용자 사이의 사회적 위계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2인칭 호격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야’, ‘너’ 같은 표현을 쓰면 십중팔구 좋지 않은 대답이 돌아온다. 애매하면 ‘저기요’나 ‘사장님’ 정도로 통칭하게 마련인데, 이 혼란 속에서 한국의 고령층, 특히 남성들은 ‘어르신’이라는 극존칭 대명사를 쟁취해냈다. 얼마 전 난동을 부리는 노인을 향해 사복경찰이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진정하시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어르신이라는 표현이 갖는 상대적 비중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극존칭이지만, 실제로는 별볼일없는 노인들에게 돌아가는 호칭이 바로 어르신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요금을 안 내고 승차하는 어르신, 젊은이들이 자리에서 비켜주기를 바라며 헛기침을 하는 어르신, 담배 피우는 젊은 여성과 시비가 붙은 어르신 등, 이 목록은 끝이 없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부대끼는 어르신들을 향해 짜증과 분노를 느끼는 동안,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어떤 이들은 멘토나 스승, 혹은 원로의 자리에 오른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찬조 연설에 나섰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의 찬조 연설을 보고 감동한 젊은이들의 반응은 사실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나이대의 노인이 이성적인 태도로 합리적인 말을 조곤조곤 한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대중교통에서 맞닥뜨리는 그 막무가내 어르신과 다른 모습을 봤다고 흥분했다. 드디어 우리가 존경할 수 있을 만한 어른을 만났다면서.

이듬해부터 서점가에 불어닥친 인문학 열풍은 어떤 면에서 ‘어르신의 귀환’이기도 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한때의 차세대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마저도 이제는 중견 취급을 받는다. 사사키 아타루나 히로세 준, 후쿠시마 료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이 인문서의 주요 저자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강신주를 빼고 나면, 주로 그보다 나이대가 더 높은 저자들의 것이었다. 서울대의 김난도 교수나 법륜 스님 등, 해당 직업군에서는 한창때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포문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 불문학자 황현산이나 문학평론가 도정일 같은 원로 인문학자들이 그동안 쟁여둔 원고를 꺼내 들고 나섰다.

이미 학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룬 이 원로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어르신과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에서 부대낄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들의 책을 손에 든 젊은이들은 출퇴근 시간의 번잡함을 견디며, 어르신과 함께 고단한 하루를 여닫고 있다. 어떤 노인의 책을 읽으며, 다른 노인을 가까스로 견디는 젊은이들은, 언제 어디서 불길이 치솟을지 모르는 지하철을 탄다.

이것은 대단히 부조리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교육을 받은 1930년대생, 4.19세대, 386세대 등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나이대로 묶고 이전 세대와 차별화하며 스스로의 이권을 지켜나갔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주로 대학생들을 향해, 멘토가 되어주고 꾸짖는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 연도를 중심으로한 세대론의 구조 속에서, 재산이 없고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자리는 애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잊힌 채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가져본 적 없는 그들이 오늘날 어르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엘리트 계층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아저씨가 되었고, 나이를 먹고 나니 어르신으로 불리며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엘리트들은 동년배 대중들의 존재를 내팽개쳤다. 그들을 설득하고 계몽해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재구성하는 대신, 그저 선거철이 다가오면 지역 개발 이슈를 던지거나 지역 감정을 자극하는 식으로 표를 긁어냈을 뿐이다. 그렇게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한평생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다가 나이를 먹은 어르신들, 새로운 세상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가슴속에 방향 없는 울분을 가득 쌓은 채 지하철에 타고 버스에 오르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어르신들, 노인들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기 전에, 멘토들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GQ>, 2014년 7월호.

2014-07-06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원인’을 찾느냐 아니면 ‘범인’을 찾느냐에 따라 근대인과 전근대인의 경계선이 나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적인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제거하려 한다. 반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와 맞닥뜨리면 원인이 아닌 ‘범인’을 파악하고 솎아내는 일에 골몰하게 마련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의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세월호가 왜 침몰했느냐 하는 것, 사고의 ‘이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가’ 세월호 침몰을 만들었는가, 침몰 원인이 아닌 ‘범인’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비난의 화살이 날아다니는 경로가, 적어도 이번 사건에서는 눈에 띄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사고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거대 함선 속에 뛰어들어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것은 해경의 명백한 직무 태만이라는 책임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중적 차원에서 보자면 온 국민이 격양된 상황 속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세월호 침몰의 이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채, 국가정보원부터 청와대까지 온갖 주체가 개입한 음모론을 만들고 유포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1987년 항쟁 이후 첫 대선을 앞두고 KAL기 폭파 사건이 터졌듯, 그렇게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특정 사건으로 돌려놓기 위한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수많은 오피니언 리더 가운데 특히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진행하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이런 입장을 널리 퍼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작 세월호 사고가 난 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되는 국가정보원에서 이렇게 대통령에게 불리한 조작 사건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둘째, 비행기가 폭파되자마자 폭파범 ‘마유미’를 체포해 국민 앞에 사냥감처럼 전시하였던 1987년과 달리, 지금은 멀쩡히 국내에서 도피 중인 것으로 여겨지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잡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일단 유병언의 신병을 확보한 다음 ‘거사’를 치렀어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국가정보원이 지금처럼 막대한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만약 세월호 침몰이 어떠한 종류의 정치 공작이라면, 이런 공작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김어준뿐 아니라 세월호 침몰에 관한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모든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세월호 침몰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은 언론인의 의무라는 말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한 서명이 진행되고 있다. 국정조사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그런데 과연 세월호 침몰은 어떤 사고였는지, 우리는 최소한의 합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 단원고 학생들을 해치고자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으며,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은폐하고 있는 사고인가? 아니면 어떤 대단히 큰 규모의 해상 운송 사고인데, 그것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대단히 많을 뿐인가?

전자를 택한다면 우리는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후자를 택하면 우리는 ‘원인’을 밝혀야 하고, 그 과정과 결과는 그리 후련하고 속 시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범인’보다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세월호 승객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또한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범인’이 누군지 묻고 따지는 그런 식의 음모론에 대해, 성숙한 시민사회의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비극을 비극으로, 사고를 사고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올바른 대응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062042245&code=990100&s_code=ao122

2014-07-01

[북리뷰]‘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의 필요성

[북리뷰]‘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의 필요성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지음·뿌리와이파리·1만8000원

<제국의 위안부>는 하나의 이미지와 싸우는 책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분노의 눈빛으로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는 위안부 소녀상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박유하 교수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그 위안부 소녀’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신 그가 제시하는 ‘위안부’의 모습은, 적어도 단발머리 소녀가 총칼 앞에 끌려와 유린당하는 모습보다는 일상적인 무언가에 가깝지만, 그렇기에 바로 그 이미지에 친숙한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박유하 교수는 지금까지 발행된 자료들을 토대로, 일제가 운영하던 위안소의 모습이 말하자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집창촌 등의 풍경에 더욱 가깝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다양한 발언이 터져나온 탓에 이 책 <제국의 위안부>도 졸지에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복수 할머니(98) 등 9명이 지난 16일, 서울동부지검에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그 다음날에는 이 책에 대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박 교수는 사과할 뜻이 없다고 밝혔고,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 보태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법원으로부터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이 나오기 전에 <제국의 위안부>를 구하여 읽어볼 것을 먼저 권한다. 이 사안은 단순한 ‘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 승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일본군 위안부는 업자인 포주에 의해 운영된 일종의 공창이었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기지촌’에서 숱하게 보아온 바로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속아서 갔건 자발적으로 갔건 관리매춘이 대부분이고, 그런 구조를 제대로 봐야 보상이든 사죄든 받을 수 있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운영하지 않았다는 것, 중간에 끼어든 포주들이 위안부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과 전표를 떼어먹고 그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는 것 등은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에 드리워진 ‘신성한 금기’를 젖혀두고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 아니다.

문제는 위안부의 실질적 운영 주체가 윤락업자라는 사실로부터, 박 교수가 지나치게 크고 많은 면죄부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그는 “게다가 동원이 ‘인신매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군이 알고도 지시한 것이 아닌 한, 설사 방관했다 하더라도 그 묵인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강제연행’이나 ‘인신매매’의 주체를 ‘일본군’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255쪽)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를 연장하면 우리는 공공연히 미군기지 앞에 ‘기지촌’이 운영되는 것을 방관하며, 혹은 음성적으로 지원하며 ‘외화벌이’에 나섰던 한국 정부의 지난 시절을 비난할 수도 없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배웠던 그대로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과 자료도 현재 많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다. 한국군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저 ‘도의적 책임’만을 논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묻혀버리는 수많은 전쟁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제국의 위안부> 논란은 좀 더 진지하게 전개되며 승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7.01ㅣ주간경향 1082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6241106461&code=116

2014-06-17

[북리뷰]보수·진보의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

[북리뷰]보수·진보의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지음·왕수민 옮김·웅진지식하우스·2만9000원

선거가 끝났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권은 선전했다. 한편 경기도지사와 인천시장이라는 두 자리를 놓치면서 야권 내에서는 책임 소재를 묻고 따지는 분위기도 서서히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늘 그렇다. 같은 정당의 다른 정파를 지지하는 사람들, 다른 정당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야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 실패의 원인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 삿대질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바깥을 향하기도 한다. ‘아니 어떻게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새누리당을 찍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도덕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자기 집값 올려주면 장땡인 거야?’ 같은 분노의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2014년의 우리에게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도덕성의 유무 혹은 강약으로 치환하는 화법이 매우 익숙하게 통용되고 있다. 나와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그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서평을 읽는 독자 중에도 최소한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새누리당 같은 ‘친일 독재 수구 꼴통’ 정당에 투표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반대로 굳건한 새누리당 지지자들 가운데에는 야권 지지자들을 ‘어리고 싸가지 없는 것들’로 치부하는 이들이 적지않은 현실이다. 한편 민주당 계열의 야당을 지지하는 이들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을 ‘분열주의자, 새누리당 2중대’로 치부하기도 하며, 진보정당에 한 표를 던지는 이들은 민주당 계열 지지자들을 또 나름의 방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모든 갈등의 골은 매우 깊으며, 심각한 피해를 낳고 있다. 상대방을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고 설득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번 지방선거는 심지어 통합진보당이 정당해산심판 소송에 걸려 있던 탓에 이른바 ‘야권연대’마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번 선거에서는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는 그저 ‘단일화’로, 표와 표를 합치자는 계산만 횡행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정치적 지지의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완전히 다른 도덕적 사고방식을 가진, 혹은 비도덕적인 괴물로 묘사하는 일에 너무도 익숙한 채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2012년의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지만 <바른 마음>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도 바로 이와 같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의 갈등이 낙태, 동성애 등의 사안을 따라 크게 불거지고 있는 미국에서 ‘리버럴’과 ‘보수’는 상호 대화의 가능성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는 수준이다. ‘리버럴’이 볼 때 ‘보수’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생명권을 들먹이며 산모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가부장주의자들이다. ‘보수’는 ‘리버럴’을 인간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재수없는 먹물들로 본다.

이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물경 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 조너선 하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상대방을 괴물로 취급하지 말라고. 다만 그들은 나와는 다른 방식에서 나름의 ‘도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먼저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고. 주제는 간명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연구 및 사례로 뒷받침되고 있다. ‘수구 꼴통’들은 도저히 답이 없다고, 저 ‘싸가지 없는’ 진보는 안 된다고, 고개를 내저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뒤적여보기 바란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6.17ㅣ주간경향 108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6101410091&code=116

2014-06-08

[별별시선]검찰총장도 선거로 뽑자

[별별시선]검찰총장도 선거로 뽑자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보수적인 성향의 언론들은 일제히 교육감 직선제를 공격하고 있다.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며, 4년마다 교육감이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 바뀌니 교육공무원들이 혼란스럽다는 등의 논리가 동원된다. 보수적인 성향의 정부에서 임명한 교육부 장관과 진보적인 교육감의 손발이 안 맞으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 틀린 말이다. 물론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감 선거의 직접적 이해관계자이지만, 교육은 아주 장기간에 걸친 국가적 방향을 움직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국 국민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상관없는 사람이 투표하기 때문에 교육감 직선제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언론 중, 그 상관없는 사람들의 교육감 투표권을 뺏는 대신,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 단 하나라도 있던가? 교육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국민에게는 그 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

중앙 정부와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논리 또한 그렇다. 온 나라가 똑같은 유형의 사람을 붕어빵처럼 찍어내려 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는 산업역군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야만 할 이유를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교육 행정의 안정성이 흔들린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안정성과 관료적 경직성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4년에 한 번씩 선거로 뽑으면, 적어도 직선제를 하지 않을 때보다는, 내부 파벌이 고착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무언가를 보수 언론이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보적일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교육감 선거의 반대 근거를 종합해보면 우리는 어떤 경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직선제로 어떤 조직의 장을 뽑으면, ‘윗선’에서 누군가가 낙점되어 내려올 때에 비해, 시끌벅적하고 어찌 보면 난잡하다. 선거에 드는 비용 자체가 낭비로 보일 수도 있다. 해당 조직의 구성원들은 누가 자신들의 ‘보스’가 될지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혼돈은 결국 민주주의의 필요조건들이다. 결국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검증된 교육감 진영을 갖춘 채, 그들에게 학생들과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교육감 직선제에 대한 반발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조직을 ‘민주화’하려면, 그 조직의 최종적인 책임자를 직선제로 뽑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 선거를 통해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아닌 국민 전체가, 교육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감 선거를 통해 교육은 비로소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게 뽑힌 교육감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교육감을 직선제로 뽑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사회는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교육감 직선제를 지켜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많은 직선제 선거를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령 검찰총장을 국민 직선제로 뽑는다면 어떨까? 국민의 표로 심판받는 검찰 조직이 과연 지금처럼 권력의 해바라기 노릇만 할 수 있을까?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젊은 검사라면 누가 시키기도 전에 일선에 나서서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다. ‘국민 검사’가 발에 차이고 넘쳐날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검찰총장, 다음번 선거에서도 재선되고 싶은 검찰총장은, 현역 대통령의 비리까지 성역 없이 수사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검찰의 모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6·4 지방선거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선거가 필요하다. 더 많은 권력이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양되어야 한다. 이른바 ‘권력기관’이라는 검찰의 수장은 국민이 뽑아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그 권력의 칼자루를 국민이 직접 손에 쥐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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