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7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정치개혁인가 자승자박인가

정치개혁인가 자승자박인가
게시됨: 2014년 02월 27일 23시 55분

1만 명의 군인들이 적진 한 가운데에 갇혔다.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페르시아의 퀴로스 2세는 자신의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대왕을 공격하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이민족 정벌을 핑계 삼아 대규모의 용병을 불러온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게 1만 3천여 명의 군사들이, 대부분의 경우 생전 처음 가보는 적진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퀴로스의 음모를 몰랐지만, 곧 발각되었고, 반란 수괴인 퀴로스는 전투 중 사망하게 되었다.

그리스 군은 그 전투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1만여 명의 병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잘못된 정보를 듣고 용병이 되어 온 것이므로, 품삯을 지불해야 할 퀴로스가 죽은 이상 이제 귀향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페르시아, 즉 최강의 적국 한 가운데에 뚝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튼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 군사들은 반란 세력의 일부, 적군이다. 페르시아의 대왕은 그리스 군을 향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라고 요구한다.

자존심 강한 그리스의 보병들은 그 말을 무시했다. 만약 페르시아가 그리스 군을 상대로 이겼다면, 직접 와서 시체 위에 떨어진 창과 방패를 주워가라고 응수한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싸워보지도 않고 무장을 해제한 채 항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스의 중무장한 밀집 대형의 보병들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다. 맞붙어 싸운다면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우리는 친구다, 친구끼리는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겠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의 친구가 된다면,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보다 무기를 들고 있을 때 더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희들이 우리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을 때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의 협상에 대해서 이보다 더 탁월한 통찰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일시적인, 혹은 극복 가능한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하는 것은, 전략적 목표가 확실하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때로는 단기적인 손실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이나 능력 그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쪽에서 먼저 무장을 해제하고 '친구'가 되면, 그 '친구'는 금새 '정복자'로 돌변할 것이니 말이다. '내줄 수 있는 것'과 '내줄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전자를 양보하더라도 후자는 포기하지 않아야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상향식 공천제에 대한 논의가 과연 '정치개혁'일까? 정당의 가장 큰 힘 중 하나가 바로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고 그를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서 적절한 선거 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한국의 여당과 야당은 모두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내던지는 '개혁'을 하겠다고 목청을 높히고 있다.

여기에 제3후보 안철수 의원 측에서,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처지이므로, 선수를 쳐서 민주당을 머쓱하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제 민주당은 그놈의 '개혁'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다. '정치개혁'을 해버리면 정당의 가장 크고 중요한 정치적 수단을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그것을 '정치개혁'이라고 말해버린 이상, 개혁에 역행하는 세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한복판에 갇혔는데, 이미 방패와 창을 버리겠다고 선언해버렸고, 페르시아의 대왕은 그저 청와대에서 껄껄 웃고 있을 뿐이다.

정치개혁.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과연 정치'를' 개혁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국민들이 정치개혁을 원하는 것은, 정치'를' 개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치'가' 개혁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이미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페르시아의 '친구'가 되어버린 정치가, 대체 누구를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단 말인가. 기업은 국민들의 사적 생활을, 관료들은 국민들의 공적 생활을, 이미 침식할대로 침식해버린 상황이다. 정치권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일단 벗고 보는 눈물의 홀딱쇼를 멈추고,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힘을 이용해, 국민들의 행복과 권리를 지켜달라는 말이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바로가기 http://www.huffingtonpost.kr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게시된 이 글 바로가기 http://www.huffingtonpost.kr/jeongtae-roh/story_b_4812776.html?utm_hp_ref=korea

2014-02-25

[북리뷰]민주주의는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

[북리뷰]민주주의는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

2014 02/25ㅣ주간경향 1064호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김순영 옮김·1만원·후마니타스

민주주의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 대체 민주주의의 목적은 무엇인가?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인류 보편의 선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적어도 남들에게 보란 듯이 “나는 반민주 세력이오”라고 떠벌리는 정치 세력이나 개인을 찾아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둘째,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 성립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민주주의’와 비교한다면 훨씬 민주적이라고 우리 모두는 동의할 수 있다. 그 차이는 궁극적으로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

올해 2월 5일 세상을 떠난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1915년에 태어나 1940년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미국의 대표적 석학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크고 힘이 셌던 그는 12살 소년이었지만 어른이라고 남들을 속이고 부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과 대학원 학비를 미리 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대학을 나온 로버트 달은 예일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딴 후 정부에서 일하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충동적으로 자원 입대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후 학계에 안착하여 예일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부터 그가 숨을 거두던 2014년까지 그는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학자로서의 커리어는 1960년대에 만개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파워 엘리트>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C W 밀즈의 논의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어올린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파워 엘리트’들이 쥐락펴락하는 과두정에 가깝다는 것이 밀즈의 입장이었다.

로버트 달의 생각은 달랐다. ‘보통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모든 사안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는 그런 ‘이상적 민주주의’는 이론적 사고를 위해 필요하지만, 현실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엘리트들이 상호 견제 및 이익 추구를 통해 균형을 찾아나가는 ‘다원주의’(polyarchy)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물론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모습은 현실 속에서 영원히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 또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모아 ‘파워 엘리트’들의 게임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신의 뜻이야 어떻건, 밀즈의 급진주의는 환멸과 냉소로 향하는 비탈길 노릇을 더러 수행했다. 반면 달의 현실주의는 오히려 작은 실천의 가능성을 남겨주는 것이었다.

현실주의자로 출발한 로버트 달은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자에 가까워졌다.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기업들의 전횡으로 민주주의가 침해되고 있음을 고발하는 책이다.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에서 그는 미국의 헌법이 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한 최선의 장치가 아님을 역설한다.그리고 만년의 작품인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에서 그는 우리가 이 글을 시작할 때 던졌던 두 개의 질문에 대해 하나의 답을 내놓는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모든 사람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 체제다. 노학자는 날로 심해져 가는 경제적 양극화와 신분제 복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도구를 우리에게 남겨준 셈이다.

<노정태 번역가/자유기고가>

2014-02-23

[별별시선]손기정, 김연아, 빅토르 안

[별별시선]손기정, 김연아, 빅토르 안

노정태 | 자유기고가

아마추어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각자의 조국을 대표하여 경기하게 하는 올림픽은, 그 출발부터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그랬고,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를 통해 질리도록 보고 듣고 배운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나라를 빼앗겼기에 조국의 깃발이 아닌 정복자의 국기를 달고 뛰는 마라토너 손기정. 그가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낭보를 듣고도 끝내 기뻐하지 못하는 식민지 조선 사람들. 그 소식을 전하면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린 동아일보 기자들. 그로 인한 탄압, 고취되는 민족의식, 기타 등등.

그런데 이번 소치올림픽에서는 퍽 다른 양상이 전개됐다. 태극기를 달고 빙판을 누비던 쇼트트랙 최강자 안현수 선수가,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정말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기에, 러시아로 귀화해 그 나라의 국가대표가 됐다. 그는 부상에 시달렸고 소속팀이었던 성남시청이 해산되는 불운을 겪었다. 일각에서는 안현수가 한국빙상연맹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운동을 계속하고자 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겼고, 러시아인들에게 친숙한 가수 빅토르 최의 이름을 따 스스로를 ‘빅토르 안’이라고 부르게 됐다.

냉전이 끝나고 ‘평평해진’ 세계 속에서, 자신의 선수 생활을 보장하는 나라로 엘리트 체육인이 귀화하는 일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빅토르 안의 경우처럼 주목받은 사례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계 체육인이 어느 외국의 국가대표가 되는 일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로도 발생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특별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 TV나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어느새 대한민국 국가대표팀보다 오히려 러시아 국가대표인 빅토르 안을 응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SNS를 통해 확인되는 여론은 그랬다.

한편 많은 이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바, 김연아 선수는 한국빙상연맹에서 체계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는커녕,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홀로 짊어지고 있었다. 요컨대 대한민국이 김연아에게 해준 것은 김연아가 대한민국에 해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은 적어도 김연아의 팬들 사이에서, 넓게는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 및 기타 스포츠 전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 국민국가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모든 인간은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등록되며, 그에 따르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 그래서 마라토너 손기정은 본인의 뜻과 달리 일본인으로서 경기를 치러야 했고, 한국인 안현수는 러시아인 빅토르 안이 되어 빙판 위를 누볐으며, 그의 라이벌이라는 아사다 마오 선수에 비교해볼 때 터무니없이 빈약한 지원을 받은 김연아는 그래도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기정에서 빅토르 안까지. 그리고 ‘국적이 안티’라는 말을 종종 듣는 김연아까지. 1936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 갓 독립할 당시만 해도 최빈국 중 하나였던 그 나라는,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는, 적어도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의 격전지’를 놓고 볼 때, 사뭇 다르다. 나라 잃은 설움을 곱씹고 공분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지금은 적지 않은 국민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한 선수를 응원하며, 오히려 그런 탁월한 이를 놓친 조국을 비웃는다.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한 명의 대한민국이다”라는 광고를 보며 마치 내 일처럼 분통을 터뜨린다.

개인의 행복과 성공보다 애국심과 헌신을 앞세울 수 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한민국’을 재정의할 것인가? 2014년 2월24일 막을 내리는 소치올림픽이 던진 숙제가 바로 그것이다.

2014-02-14

『논객시대』 (서울: 반비, 2014)

2014년 2월 14일,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쓴 첫 책, 『논객시대』가 나왔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논객시대』(서울: 반비, 2014)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2014-02-11

[북리뷰]대한조선공사 민주노조의 기록들

[북리뷰]대한조선공사 민주노조의 기록들

2014 02/11ㅣ주간경향 1062호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남화숙 지음·후마니타스·2만3000원

배는 인류와 대단히 친숙한, 아마도 가장 큰 움직이는 인공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특히 어떤 집단이나 단체를 비유할 때 ‘누구누구호’라는 식의 화법이 종종 쓰이곤 한다.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은 ‘히딩크호’가 되고, 감독이 홍명보로 바뀌면 ‘홍명보호’로 불리는 식이다. 그렇게 본다면, 1960년대를 살았던 모든 한국인은 ‘박정희호’에 원하건 원치 않건 탑승해야만 했다.

‘박정희호’는 근대적 선진 강국 건설이라는 확고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장 박정희가 가진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국토의 7할이 산인 나라에서 결국 살 길은 공업을 육성하는 것뿐인데, 대체 무엇을 어떻게 만들고 팔아야 한단 말인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조선중공업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새 정부로 이관되었고, 1950년 1월, 법령에 따라 대한조선공사로 재조직”되었다. 당시 해방 한국에는 그 정도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만한 자본이 없었기에 대한조선공사는 정부가 주식의 80%를 보유한 국책회사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까지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주지 못하고 내부 비리 등으로 도리어 비틀거릴 뿐이었던 대한조선공사는 4·19 이후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민주적 절차에 의해 노동조합 지부장을 선출하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를 써내려가게 된다.

1960년을 오직 ‘학생 혁명’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1987년을 ‘민주화 투쟁’으로만 되새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오류일 것이다. 87년 6월의 직선제 쟁취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른바 ‘789 노동자 대투쟁’을 벌여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냈다. 만약 789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는 성장한 경제규모에 걸맞은 소비력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60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산업 기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나라 경제는 갓 일어나고 있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60년 4~12월 사이만 해도 356개의 신규 노조가 5만9186명의 노동자를 조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는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 한진중공업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대한조선공사의 1960년대에 주목한다. ‘유신’이라는 이름의 친위 쿠데타를 저지르고 명실상부한 독재자로 거듭나기 전까지 노동자들은 박정희에 대해 특별히 적대적인 감정을 품지 않았다.

새로 들어선 정부 또한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중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봉건적’, ‘인습적’인 사 측에 맞서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주체로 거듭나고자 최선을 다했다.

대한조선공사 민주노조의 역사는 시대를 한 바퀴 돌아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이어진다고, 저자 남화숙은 담담한 어조로 설명한다. 그 벅차오르는, 패배하지만 결국은 승리하게 될 역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에서 성실하게 모아놓은 자료집 덕분이었다.

부당한 권력과 자본의 횡포에 맞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고자 했던 노동자들이 남겨둔 손때 묻은 기록들. ‘박정희호’는 박정희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배를 만들고 노를 젓고 새는 물을 퍼낸 수많은 이들을 이제 우리는 온전히 알아야 한다.

<노정태 번역가·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