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3

21세기 번역

『21세기 자본』의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는데, 역시나, 책이 시중에 풀리기도 전에 그놈의 '번역 논란'이 한창이다. 프랑스어판으로 먼저 출간된 책인데 왜 영어판을 옮겼느냐는 것이다. 이미 출판사 글항아리는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을 일일이 대조했다'는 해명을 여러 차례 내놓은 바 있지만, 토마 피케티의 심오한 경제학을 온전히 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우리의 인문-소비자들의 원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왜 번역한 책을 읽을까? '원문'이 아니라 번역한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 우리가 어떤 책의 원서를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T1이라고 해보자. 반면 그것을 번역으로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T2로 표기한다. 우리는 논의의 대상이 한국어 화자라고 전제하고 있으므로, T1은 T2보다 언제나 크다. 만약 T1과 T2가 같거나, 전자가 후자에 비해 작다면, 굳이 번역된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그것을 U라고 표기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1
U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즉 우리는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원서를 읽느라 고생하는 만큼의 시간을 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번역 논란'을 벌이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가령 당신이 스티브 잡스 평전을 읽는다고 해보자. 한국어로는 24시간이 걸릴 책이 영어로는 100시간도 더 걸린다고 해보자. 2014년 기준으로 최저임금은 5210원인데, 그렇다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책을 읽을 때, 당신은 적어도 76시간을 더 쓰게 되며, 간단한 곱셈을 해보면 39596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으면, 책값의 차이를 논외로 했을 때, 약 40만원을 손해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어떤 분은 반박을 하실 것이다. 엉터리 번역, 날림 번역으로 책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읽은 그 책이, 저자가 쓴 그 책과 같은 책임을 대체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간단한 산수도 그렇거니와, 인식론적인 대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연 언어가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오랜 세월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트위터도 열심히 해본 바에 따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모국어로 쓰여진 글을 읽고도, 그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책을 무슨 언어로 읽더라도, 독자가 저자의 '진짜 진짜 그 내면의 그 속마음'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어불성설이다.

'번역서의 오류로 인해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오늘날의 독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서에 오류가 없더라도, 심지어 한국말로 쓰여진 글을 읽더라도, 우리는 종종 저자의 뜻을 잘못 파악한다. 

번역 논쟁을 일으키는 당신이나, 그 책을 번역한 번역자나, 저자의 뜻을 오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신이 직접 원서를 읽다가 저자의 의중을 잘못 짚을 경우, 당신의 오해를 지적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한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려면, 일단 번역자가 읽고, 그 내용을 한국어로 쓰고, 원문과 번역문을 놓고 편집자가 교정, 교열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요컨대 독자와 번역자의 싸움은 1:1의 싸움이 아니다. 독자는 책을 혼자 읽고 오해를 교정받지 않지만, 번역자의 작업은 출판사의 검토를 거친 후 세상에 나온다.

고의로 내용을 빼거나 왜곡해서 번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그렇다는 것이다. 번역자가 오역을 저지를 수 있는 만큼, 원서를 직접 읽는 당신도 그 책을 잘못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 완벽한 이해를 추구해야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다소 무모한 발언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변수를 또 발견할 수 있다. E1은 원서를 직접 읽을 때 내 머리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총합이다. E2는 반면, 번역서를 읽는데, 번역자의 실수로 인해 발생하여 책으로 찍혀 나오는 오류의 총합이다. 당신이 해당 언어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E1과 E2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나는, 대부분의 경우 E2보다 E1이 클 수밖에 없다고 겸허하게 인정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그냥 재미로만 읽을 수 있는 독자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뭔가 재생산을 해야 하는 독자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E1과 E2의 관계에 대해 사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번역서의 오류마저도 일종의 즐길거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책을 읽고 그에 기반해 뭔가 논의를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폼을 잡아야 할 때, 어떤 오역으로 인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는 일을 우리는 대체로 피하고 싶어한다.

가령 당신이 『이방인』을 읽었는데, 지금까지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뮈르소가 무어인을 쏘아 죽인 것이 정당방위임을 몰랐다고 해보자. 그래서 당신은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고, 빈정이 상해서, 술상을 엎고 울면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이방인』을 읽었다면 까뮈의 진정한 뜻을 알았을지 몰랐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즉 E1과 E2 중 뭐가 더 큰지 확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경우 어쨌건 당신은 번역서를 읽었으므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E2일 것이다.

이 경우 앞서 등장한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은 변형을 겪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을 위해 앞서의 경우를 U1, 지금의 효용을 U2라고 한다면,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2
U2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 E2

가 도출된다.

결론을 내보자. '번역에 대한 논란이 많네요, 저는 그냥 (나중에) 원서로 읽으려고요'는 과연 얼마나 타당한 표현인가?

T1이 T2보다 큰 사람, 다시 말해 원서를 읽는 속도가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빠른 사람은 굳이 그런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T1과 T2의 차이가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원서를 읽거나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피해가, 그 책을 어쨌건 익숙한 언어로 빨리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보다 클 때에야, 우리는 번역서를 집어던지고 원서를 읽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정말 그런가? 오역, 혹은 오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주는 '피해'가, 기꺼이 그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은 당신에게 그렇게나 심대한 타격을 주는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저 허접한 공식을 집어던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읽어도 저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 못할 가능성', 즉 E1은 고스란히 남는다. 그리고 당신의 실수는, 번역자의 것과 달리, 그 누구도 지적해줄 수가 없다. 술자리에서 '뽀록'이 나서 망신을 당하기 전까지 말이다.

'번역 논쟁'을 부추기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야 하겠고,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번역된 책이 나오면, 적어도 읽어보기라도 하고, '논쟁'을 하던 말던 하자는 말이다.

댓글 2개:

  1. 하든 말든 이라고 쓰셔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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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1,2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생겨 글을 남깁니다.

    1. 이 두 식은 모두 기회비용을 나타낼 뿐, 내가 얻는 '효용'은 못 구할 식이 아닌지요? 일단 시간이 오래 걸리든 적게 걸리든 하나를 선택했을 때, 시간축을 기준으로 한계효용을 나타내지 않으면 소용없지 않은지요?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어도, 영어실력 증진과 원서를 스스로 읽어냈다는 자부심(?) 등으로 얻은 만족도가 상당히 높을 수도 있지 않은지요?

    2. 애초에 T1-T2는 거의 대다수 한국어화자가 마이너스값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노정태 자유기고가님께서 지적하셨지요. 그러면 애초에 마이너스값이 나오는 것은 뻔하고, 1에서 제가 썼듯이, 한 사람이 책1권을 읽은 뒤 얻는 효용값이 없으니 뺄 필요가 있을런지요.

    인문독자의 대략적인 책 한권 읽는 시간의 중앙값 혹은 평균값을 기준으로 개별 독자시간을 뺀 식에 절대값을 붙여야 유의미한 기준상에서 떨어진 거리가 나와, 자료의 유용성이 증가하지 않을런지요.
    혹은 T2를 T1으로 나누어 상대값을 구하는 게, 계산해보지 않아도 '- '혹은 '-무한대'가 나오는 식이 더 유의미한 것으로 바뀌지 않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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