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참고도서를 찾으면 도서관에 있었다

불행히도 내가 사랑하는 본이란 도시에는 너무나 많은 도서관이 있다. 본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학도서관이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립도서관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달력에 관한 책을 한 권 읽고 미진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참고도서를 찾으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있었다. 수메르와 로마의 달력에 관하여 1800년대에 출판된 책들이 글자체만 현대적으로 바뀌어 재출간된 것을 비롯하여 달력에 관한 수십 종의 책을 동네의 조그만 시립도서관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 본에 없는 책은 사서에게 부탁을 하면 다른 도시에서라도 구해서 가져다 주었다. 생태생화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달력'에 관한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독일의 우수한 도서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책이 나오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본의 도서관에 감사의 말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정모, 『달력과 권력』(서울: 부키, 2015), 초판 2001. 6쪽.


내가 아래와 같은 트윗을 올리자 '인터넷에서 논문 찾아보는 법 모르시나 봅니다'라고 빈정거리던 자들이 있었는데, 나는 위에 인용한 문단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 삼아 남겨둔다.






2015-12-29

[북리뷰] 북한의 새해는 우리보다 늦게 온다

달력과 권력
이정모, 부키, 1만2800원.

새 해가 시작되는 이맘때, 달력은 일상 속의 사물을 넘어 하나의 사유 대상이 된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은 인위적으로 단절되고 그것이 하나의 개념들을 이루어내며, 그 개념의 내용을 보기 좋게 편집하고 구성한 사물이 바로 달력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본에 체류중이던 생화학자 이정모는 도서관에서 독일의 과학 잡지 <게오(GEO)>를 펼쳐들었다. 1999년 1월의 일이다. 새로운 천년이 다가온다는 기대감에 전 세계가 들떠있던 시절이다. '지난 천년은 총 며칠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본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윤년 규칙을 조합해 답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그가 내놓은 정확한 계산보다 열흘이나 적었다. "율리우스 달력과 그레고리우스 달력의 윤년 규칙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열흘이나 틀린 것이다."(5쪽) 그 결과에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독일의 공립도서관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참고 문헌의 바다를 헤엄치며, 달력의 과학적 측면 및 그에 얽힌 사회 문화 권력의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을 펴냈다.

<달력과 권력>이 탄생하게 한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다.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로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19쪽) 정답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한 건의 살인 사건도 없었고, 그 누구도 물건을 사고 팔지 않았다. 아무도 농사짓고 밥짓고 집짓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칙령에 의거해, 그동안 사용하던 율리우스(카이사르) 달력의 오차를 바로잡고자 열흘을 통째로 빼버린 탓이다.

1582년 10월의 로마 달력에는 5일부터 14일까지가 빠져 있다. 하지만 이 달력은 잘못 인쇄된 것이 아니다. 또는 못된 폭군이 재미 삼아 백성들에게 어처구니없는 달력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이 달력은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달력으로, 제대로 된 달력이었다. 어쨌든 이 달력에 따라 사람들은 1582년 10월 4일 목요일 밤에 잠들어 다음 날인 금요일 10월 15일 아침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20쪽)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유럽의 열흘. 그것은 고대 로마부터 중세 유럽을 거쳐 당시까지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 달력의 오차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달력과 계절이 맞지 않았다. 그 결과 농사에 지장이 왔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춘분을 기점으로 삼아 계산하는 부활절의 날짜 또한 맞지 않게 되었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삼는 온갖 기독교 행사들의 날짜가 어그러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유럽은 제 시간을 되찾았고, 기독교를 믿는 유럽이 세계를 재패하면서, 그레고리우스 달력은 오늘날 세계의 표준 달력이 되었다.

<달력과 권력>은 흥미진진하면서도 아쉬운 책이다. 율리우스 달력을 거쳐 그레고리우스 달력이 확정되기까지의 문화사가 책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을 차지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의 혁명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담아 만든 달력들을 소개하고 그 실패를 곱씹어본다. 그러나 이후 온갖 고대 문명의 달력들과 조선 세종때 만들어진 칠정산 등을 소개하는 대목으로 넘어가면 책의 구성에 일관성이 사라진다. 그레고리우스력을 개혁하려던 온갖 시도들이 그 뒤를 잇는데, 그 자체는 재미있지만, 책의 탄력은 이미 떨어진 상태가 되어버린다.

북한의 새해는 우리보다 30분 늦게 밝는다. 최근 시차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달력을 만들고 공표하는 것은 결국 권력의 본질 중 하나다. 모든 사회 구성원의 시간을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추는 것이니 말이다. <달력과 권력>은 이러한 주제를 다룬 첫 번째 책이다. 새해에는 더 많은 과학 교양 저자들이 시간과 힘의 문제를 다뤄주면 좋겠다.


2016.01.12ㅣ주간경향 115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2-28

[별별시선]여자를 뭘로 보고?

2015년 현재 세계를 가르는 가장 큰 균열은 이른바 ‘게이 디바이드’(gay divide)라 불리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따라 국가들을 분류해볼 수 있고, 그 경우 넘을 수 없는 간극이 관찰된다는 말이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는 동성결혼이 법제화됐거나 되어가는 중이다. 반대로 이슬람국가(IS) 점령지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법에 의해 처벌당하고,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국가가 동성애자들에 대한 린치를 사실상 방관하고 있다. 세계는 ‘동성애자 인권’이라는 지표를 두고 반으로 쪼개지고 있는 중이다.

‘게이 디바이드’라고 하지만, 그 격차는 여성 인권을 소재로 삼더라도 거의 동일하게 유지된다. 다시 IS의 사례를 들어보자. 그들은 공공연히 여성을 성노예로 사고팔면서, 그 과정에서 남자들이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사기꾼을 처벌하기까지 한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동성혼이 법제화되어 있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여성 노예 매매가 합법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을, 본인이 소수자에 속하지 않는 이성애자 남자 지식인들은 ‘문화적 차이’로 일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다양한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고 목소리를 낸다. 젊은 진보, 새로운 진보를 떠받쳐줄 새로운 세대의 지지자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문화에 대해 훨씬 관대하다. 동시에 그들은 명백한 야만과 폭력이 ‘문화적 다양성’의 탈을 쓰고 유포되는 것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뜻을 표한다.

2015년의 가장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였던 페미니즘의 부활, 혹은 ‘새로운 페미니즘’의 가시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덕분에, 혹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포함한 여성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팟캐스트를 녹음해놓고도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문제 삼기 전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개그맨 장동민을 디딤돌 삼아, 사람들은 SNS를 통해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며 그동안 한국의 진보 진영이 소홀히 해왔던 가장 큰 사회적 쟁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터넷에는 여성혐오적 표현이 넘쳐나고 있다. 소라넷처럼 단지 언어 표현을 넘어 몰카와 ‘도촬’을 공유하며 강간 모의를 하고 실행에 옮기는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적잖은 남성 중심 웹사이트들은 오히려 소라넷을 문제 삼는 여성 커뮤니티들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다시 말해 2015년 이전까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의 여성 혐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혹은 눈길이 닿더라도 ‘인터넷 하위문화라서 그렇다’는, 일종의 문화상대론적 입장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너무도 명백하게 여성과 성소수자를 억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체성 중 일부로 삼는 무장집단이 국가를 참칭하고 있다. 더군다나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눈에 띄게 신장되고 있음에도,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를 포함한 사회적 차별이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젊은 여자들에게 ‘애 낳아서 출산율을 끌어올리라’며 성화를 부린다. 그래놓고는 어린이집 이용 시간을 줄이고,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불이익당하는 것을 방관하며, 취업 및 승진에서 남자에게 특혜를 주는 기업 관행을 묵인하고 있다. 여자, 특히 젊은 여자를 뭘로 보는 걸까? 지금까지 여성들의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았던 것이 더욱 이상한 일 아닌가?

올해는 긴 터널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여성혐오에 맞서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그냥 참아왔던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불편’을 표현한 덕분이기도 하다. 시간은 절로 흐를지 모르지만, 역사는 바로 그렇게, 맞서 싸우는 이들 덕분에 진보한다. 2015년은 페미니즘의 해였다. 이런 움직임이 진보 진영을 넘어 한국사회를 이끄는 동력이 되기를 희망한다.


입력 : 2015.12.28 21:36:35 수정 : 2015.12.28 22:11: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282136355&code=990100#csidxda5a5459543056bb7b074ed5614c976

덧붙임: 내가 편집국에 보낸 제목은 "2015년, 페미니즘의 해"였다.

2015-12-17

[북리뷰] 기후변화, 이제는 '회의'할 시간이 없다

6도의 멸종
마크 라이너스, 세종서적, 1만6천원


2010년대에 들어서 멸종된 종(種)은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온난화 회의론자'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들의 세력은 건재한 것처럼 보였다. 대기 중 탄소 농도와 지구의 평균 기온이 거의 확실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에 거의 모든 진지한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 온난화 회의론자들은 태양 흑점이나 통계의 오류 등을 운운하며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받아왔던 것이다.

지난 12월 12일 파리에서 막을 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자총회(COP21)를 보더라도 그렇다. 전 세계 195개국의 대표단이 모였다. 그 모든 나라의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면, 이제는 더 이상 온난화 회의론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인간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및 온실가스의 위험성에 대해, 늦게나마 전 세계가 눈을 떴다. 이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초점을 맞춰야 할 시점이다.

국내의 여론 동향은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후 변화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책보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던가 <쿨 잇> 같은 온난화 회의론자의 책이 더 잘 팔리는 그런 나라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겪게 될 위기가 무엇인지 아직도 실감을 못 하고 있다. 과학 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가 쓴 <6>을 펼쳐보자.

이 책을 대중에게 설명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기온이 2˚C, 4˚C, 6˚C씩 올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15˚C씩 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 목요일의 기온이 수요일보다 6˚C 높다는 것은 외투를 집에 두고 나오면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이 6˚C 상승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23쪽)

지금보다 지구기온이 6도 낮았던 그 시절을 우리는 빙하기라고 부른다. 지금보다 5도 이상 높았던 시절도 지질학적으로 발굴되어 있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PETM)'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PETM은 지질학적 기록 중에서 지금처럼 화석연료를 태워댄 탓에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는 현상과 가장 가까운, 자연의 실제 사례"(247쪽)라고 저자는 그가 참고한 수많은 과학 논문 중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절 지구는 우리가 아는 지구가 아니었다. 바다는 뜨겁고 끈적한 산성 액체였고, 해수면의 온도가 높은 탓에 엄청난 토네이도가 얼마 남지 않은 육지를 후려쳤다. 뉴욕, 런던, 상하이 등 중요 항구 도시들이 있어야 할 곳은 진작에 물에 잠긴 상태다. 물론 인류에게는 지능과 기술이 있으므로 모든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동식물들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사라지고, 대신 수렵과 채집 및 작은 규모의 농업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동물'로서의 인간만 남게 되는 것이다.

지구기온이 평균 3도 이상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탄소 배출량을 아무리 줄인다 한들 소용이 없다. 이미 배출된 탄소가 지구 기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을 포함해 많은 곳에 묻혀있는 탄소가 더욱 배출되는, 이른바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허리케인 카타리나, 2010년 러시아의 산불, 미국 서부의 극심한 가뭄 등으로 지구기온 평균 1도 상승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온난화 회의론자들에 의해 낭비된 세월이 안타까울 뿐이다. 올바른 정보가 유통되고 여론이 형성되기를 희망한다.


2015.12.29ㅣ주간경향 115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2-03

[북리뷰] 그 가스등을 보라

가스등 이펙트
로빈 스턴, 랜덤하우스코리아, 1만4천800원


'데이트폭력'의 핵심은 '데이트'가 아니라 '폭력'에 있다. 하지만 그 폭력이 적용되고 발현되는 양태는 다른 폭력과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적으로 친밀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속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양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빈 스턴은 미국에서 20여년간 심리상담가, 교사, 우드헐리더십연구원 등으로 일하며 수많은 상담을 진행해온 리더십 강사 및 컨설턴트다. 그는 데이트나 결혼 등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며 결국 파국으로 몰아가는 '가스라이팅'을 발견하고 이론화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알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또 다른 폭력이다.

'가스라이팅'에 대해 알아보자. 고전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드먼이 연기하는 젊은 가수 폴라는 나이 많은 남자 그레고리와 결혼한 후 자신감을 잃고 회의에 빠진다. 그레고리와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집안의 물건이 없어지고, 위치가 바뀌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그레고리의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폴라는 점점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사실인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히스테리에 빠진다. 그레고리가 서랍을 뒤지기 위해 가스등을 켤 때, 가스의 압력 때문에 자기 방에 켜둔 가스등은 불빛이 약해지는데, 그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결국 창밖에서 그 가스등이 흐릿해지는 현상을 목격한 형사의 증언을 통해 폴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접고 그레고리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괴롭힘은 성별과 무관하게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남자들은 이른바 '신병'으로 부대에 갓 배치될 무렵 비슷한 일을 겪는다. 뻔히 다 아는 것을 일부러 틀리게 물어본다거나, 반대로 절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을 물어본 후 상대가 당황하면 윽박지르는 식으로, '갈구는' 것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스라이팅'은 남녀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나는 수많은 상담 사례를 통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고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22쪽) 그 남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자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한다.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가 로맨틱한 이벤트를 연출하는 남자? 그 남자는 상대방 여자에게 억지 감동을 뽑아냄으로써 상대방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하는 남자 역시, 상대방의 가스등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하물며 그 여자를 때리는 남자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가스등 이펙트>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책이다. 데이트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가령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입버릇처럼 '뚱뚱하다'고 놀리는 게 어떠한 종류의 폭력인지 우리는 아직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짓궂은 애정도 관계의 미숙함도 관심의 표현도 아니다. 상대방의 자아를 흔들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려는 폭력적 영향력 확장, 즉 가스라이팅이다.

이 책은 너무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본다. 책의 대부분이 피해자의 심리 분석과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의 논지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탓하기'로 향할 우려가 있다. 그러한 비판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저 흔들리는 수많은 가스등을 보라. 그것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이 명백한 폭력들을 우리는 지적하고 바꿔나가야 한다.


2015.12.15ㅣ주간경향 115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1-29

[별별시선]청와대로 가지 말자

요즘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2008년의 나는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는데, 그럴 때마다 큰 아쉬움을 느꼈다. 왜 우리는 저 버스를 당장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이렇게 평화적인 투쟁에만 집착하고 합법적인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을까.

반성이 시작된 것은 비슷한 시기 태국에서 벌어진 사태 때문이었다. 노란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나서서 정권이 뒤집히면, 이번에는 빨간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정부를 끌어내린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군부는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갔고 태국의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내려앉은 상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수많은 나라에서 민주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좌초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규모 시위가 폭동으로 이어지고 정권이 뒤집히면서 민주적 권위가 쇠약해지면, 군부가 총칼로 안정을 제공한다. 당장 경제 성장을 원하는 중산층은 일단 군부를 지지한다. 하지만 중산층은 서서히 더 많은 자유를 찾아 군부가 아닌 민주 세력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 시점, 다시 말해 1987년에, 성공했다. 물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의 두 축이 견고하게 버텨냄으로써, 그중 한쪽이 군부와 살림살이를 합치는 역사적 퇴행이 벌어졌을 때에도 민주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가 1 대 1로 맞붙는 경우, 민주화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급속하게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선거로 뽑혔지만 군부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압살한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12월5일로 예정된 제2차 민중총궐기에 2008년 촛불시위의 기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뜨거운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다. 큰 집회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경찰과 맞서지만 세상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대규모 집회를 통해 ‘세력 과시’를 하는 일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매번 집회가 열릴 때마다 마치 정해진 식순처럼 경찰버스를 훼손하고 캡사이신 섞인 최루액을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적당히 늦은 시간이 되면 집에 간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가 나오고 경찰의 폭력이 벌어지지만 여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7년째다.

설령 어쩌다가 경찰 버스를 뛰어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을 개척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청와대로 가서 대체 뭘 어쩔 것인가? 대통령이나 그 외 중요 인사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시위대는 경찰의 주장대로 ‘폭도’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청와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반면 그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쪽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대규모 집회를 조직해 세력을 과시하지 않으면 단 한 번의 눈길조차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집회가 커지고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면 모든 언론은 일제히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다. 결국 지금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목소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상대가 짜놓은 외통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않는 것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외신 기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우리 스스로의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더 많은 국민들에게 시위의 쟁점들을 알리고 지지를 끌어내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청와대로 가지 말자. 대신 방향을 돌려,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 2008년 촛불시위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시위대의 방향을 불타버린 남대문으로 돌리면서 한 연설의 내용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단 한 명의 권력자 대신, 수많은 이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행동을 이끌어낼 해법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입력 : 2015.11.29 20:56:16 수정 : 2015.11.29 21:02: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11292056165#csidxdce0acec71fddcda0123b58627a3766

2015-11-19

[북리뷰] 미셸 우엘벡이 말하지 않은 것들

복종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1만4500원

지난 1월 7일, 파리에 위치한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실이 공격당했다. 그 상처가 아물어가나 싶었던 11월 13일 다시금 대형 총기 난사 및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11월의 파리 테러에서는 총 132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을 당했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 사건이 벌어지던 날,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 현지에서 출간되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우엘벡의 친구 한 사람이 당일 IS의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은 세계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혹은, 더 큰 분기점이 될 이번 파리 테러의 전주곡과도 같다. 그 충격 속에서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2년의 프랑스. 소설 속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장 마리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과, 힘을 잃고 표류하는 사회당, 그리고 모하메드 벤 아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이끄는 이슬람박애당이 대선을 앞두고 3파전을 벌인다. 1차 투표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국민전선이 1위, 그리고 이슬람박애당이 2위를 기록한 것이다. 사회당은 정권을 얻기 위해 이슬람박애당과 손을 잡아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들은 장관 자리의 절반, 알짜배기인 재정부와 내무부 등을 넘겨받는 댓가로, 이슬람박애당에게 교육과 결혼에 대한 권한을 넘겨준다.

교육과 결혼. 어찌 보면 비교적 사소한 것 같지만 그 함의는 실로 깊고 중대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를 만나 대화중인 프랑스의 정보 요원은 그 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니 지정학이니 하는 것들은 신기루일 뿐이에요. 아이들을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한다, 그것으로 얘기 끝이죠."(100쪽) 이슬람박애당은 대체 어떤 사회적 변화를 불러오려는 것일까?

"우선 이슬람은 어느 경우에도 남녀공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에게는 몇몇 전문과정만이 개방될 뿐이죠.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초등교육을 마친 뒤 가사교육 학교를 거쳐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극소수의 여자들만이 결혼 전에 문학이나 예술 공부를 이어가고요.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표본이죠."(101쪽)

대기업이 아니라 가족기업 중심으로 경제 체제를 바꾸고,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낸 후 가사수당을 지급하는 등, 우리가 알던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슬람박애당은 서서히 뒤흔든다. 실업률에 시달리는 가난한 남자들에게는 자영업자의 꿈을 불어넣어주고, 사회의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부유한 남자들에게는 일부다처제 도입을 통해 문자 그대로 '성 로비'를 벌인다. 모든 교육 기관이 이슬람 교육 기관이 된 탓에, 개종을 하지 않으면 교수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 프랑수아는 개종하고, 젊은 부인을 맺어주겠다는 약속도 받은 채, 다짐한다. "조금은 이런 식으로 몇 년 전에 내 아버지가 혜택을 입었듯, 내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삶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두번째 삶의 기회가 되리라."(363쪽)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도외시한다. 중년 남자 지식인을 화자로 삼고 있으면서, 중년 남자 지식인이 어떻게 종교화, 보수화 속에서 '태평천하'를 누리는지 신랄하게 풍자하기 위한 기법이다.

<복종>은 이슬람포비아를 느끼는 프랑스 사회를 바라보는 한 위선적인 중년 남성 지식인을 바라보는 우엘벡의 시각을 서사화해 담아낸 작품이다. 바로 그렇게 이 책은 남자 대학 교수의 눈을 통해 이슬람교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갈등 지점을 절묘하게 (비)가시화한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으로 남겨둔다.


2015-11-11

리누스 토발즈는 왜 리눅스를 GPL로 풀었는가?



잊을 만하면 RT되는 이 트윗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1991년 9월 17일, 나는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내가 올린 운영체계를 겨우 몇 명만이 체크하리라 생각했다. 그 운영체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특정 컴파일러를 설치하고, 새로 부팅하여 기존의 파티션을 제거하고, 나의 커널을 컴파일한 다음 셸을 작동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셸 작동이 나의 운영체제를 이용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운영체제의 소스 코드를 프린트해 보면, 그것은 1만 줄을 넘지 못했다. 글자 크기를 작게 하면, 1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물론 지금의 리눅스 코드는 1000만 라인을 넘고 있다.

운영체제를 배포했던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가 실질적으로 무엇인가 만들었다는 것, 단지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상에서는 입소문이 순식간에 번진다. 섹스든 운영체제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사이버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많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지며 날조되게 마련이다. 나의 운영체제 구축에 대한 입소문이 무성해졌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자, 보시오. 내가 실질적으로 거둔 성과요. 나는 당신들을 속이지 않았소. 여기 내가 이룬 성과들이 있소……."
리누스 토발즈, 데이비드 다이아몬드, 안진환 옮김, 『리눅스 그냥 재미로 』(서울: 한겨레출판, 2001), 140-141쪽. 강조는 인용자.

좋은 책인데 현재 절판이니 도서관 등을 통해 읽어보도록 합시다.

2015-11-10

아이유, 아동성애, 아티스트

1.

아이유는 새 음반에 수록된 곡 'Zeze'에서 작사가로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주인공인 제제를 소재로 삼아,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라던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등의 가사를 썼다. 그 음반의 엘범 아트에는 망사스타킹을 신은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아이유가 아동성애를 부추긴다, 아동성폭행 피해자를 도외시하고 있다, 기타등등 아동 인권과 관련한 온갖 악덕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난이 일순 쏟아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이어지는 중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대한민국은 아동학대에 전혀 민감한 나라가 아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학대 사례들을 빼놓고, 그냥 미디어에 반영되는 내용만 봐도 그렇다. 지난 10월 13일 SBS에서 방영된 <육룡이 나르샤>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남자 등장인물 '땅새'의 각성을 위해,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 연희가 강간당하는 장면이 버젓이 밤 10시 공중파 드라마에 나왔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동성애를 금기시하고 아동학대에 민감한 나라였던가? 아이유에게 아동성애 코드를 팔아먹는다고 손가락질하는 분들은, 아이유가 대놓고 '삼촌'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낼 때에는 뭐 하고 계셨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미성년자 강간 장면이 공중파 드라마에 나왔다. 고작 한 달 전 일이다. 'Zeze'처럼 은근한 암시를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는 안 나오던 분노가 왜 이제서야 치밀고 있는가?


2.

한국의 대중가요에서 미성년자 소녀가 남성들에게 스스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역사는 실로 유구하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이에요"부터 시작해야 할까?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것부터 이야기해보면 그렇다. 비교적 최근 임펙트 있게 다가왔던 것으로 박지윤의 '성인식'을 꼽아볼 수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 그대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 그대 기다렸던만큼 나도 / 오늘을 기다렸어요."

아이유의 기존 행보 역시 이러한, 명백히 아동성애에 가깝지만 대중적으로 별 논란 없이 받아들여지던 시선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이라며 고음을 높이고, "너랑 나랑은 지금 안되지"라며 소녀 아이유를 향한 '삼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굳이 아이유에게 '아동성애 컨셉'이라고 말한다면, 당신들이 아이유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던 그때야말로 '아동성애 컨셉'이 한창 꽃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아이유가 달라졌다. 전작 '모던타임즈'부터 서서히 '삼촌팬을 위한 소녀'가 아닌 무언가의 자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작 '스물셋'에 와서 드디어 논란이 불거졌다. 아이유에게 붙은 죄명은 뜬금없게도 아동성애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한도전의 무도가요제에서 레옹의 마틸다 컨셉을 하고 나왔을 때에는 아무 탈이 없었는데 말이다.


3.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어떤 아동성애'는 별 문제가 안 된다. 반면 '다른 아동성애'는, 실제로 아동성애인지 아닌지와는 큰 상관 없이, 지탄의 대상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한국어판을 낸 출판사에서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며 가상인물의 정신적 순결함을 항변하지 않나, 어떤 소설가라는 분은 아이유의 음반을 전량 폐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유의 아동성애 컨셉은 이미 한 차례 트위터를 포함한 소수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가 무도가요제에서 영화 '레옹'의 마틸다로 분장하고 나왔던 그때의 일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미성년자 여성을 향한 남자들의 성적 욕망'을 인식하고 그에 맞춰 차려입은 아이유를 보며, 몇몇 트위터 사용자와 네티즌들이 불만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지금과 달리 논란이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쁘기만 한데 왜들 저러냐'는 식의 비아냥 섞인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아이유가 스스로를 아동성애적 욕망의 대상으로 포장하여 내놓는 것은, 한국 사회의 도덕적 가이드라인과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혹시 모를까봐 하는 말인데 '레옹'의 마틸다는 미성년자다).

반면 'Zeze'의 가사와 앨범 아트 역시 소수의 네티즌들이 발견하고 불편함을 표현했는데, 이번에는 일이 커졌다. 음반이 나온지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논란이 시작되었고, 애초에 '아동성애'라는 금기 자체가 '할아버지가 고추 따먹는' 이 나라에서 과연 그렇게 굉장한 터부인가 싶기도 했으나, 출판사가 끼어들면서 논의가 한층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사안의 화제성을 놓고 보자면 음반의 수록곡 중 하나일 뿐인 'Zeze'는 무도가요제와 비교할만한 대상이 못 된다. 아동성애로 장사를 한 게 문제라면 논란은 마틸다 코스프레를 할 때 일어났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그러한 종류의 페도필리아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과 그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국 그 차이는 아이유가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놓았느냐, 아니면 제 손으로 쓰는 가사의 '창작자', 즉 어떠한 종류의 주체로 내세웠느냐에서 갈라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젊은 여자 가수 아이유가 자신을 소아성애적 욕망의 '대상'으로 내놓는 것에는 대한민국의 윤리 의식이 발작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4.

아이유에게 잘못이 있다면 단 하나, 성적 욕망의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이유는 지속적으로 '아티스트'를 지향하는 자기 자신을 내세워왔다. 작사와 작곡에 참여하고, 이번 음반은 자신이 프로듀서로 나섰고, 지난 음반에는 음악계의 '선배님'들을 모셨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아동성애 논란이 벌어졌다. 아이유가 노골적으로 마틸다 코스프레를 하며 아동성애 컨셉을 '팔아먹고' 있을 때에는 없던 일이다. 왜일까? 그 아동성애 컨셉을 '소비하던' 대중들에게, 어린 소녀에게 나이 많은 남자가 성욕을 느끼는 것은 사회규범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처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유가 'Zeze'의 가사에서 사용한 은유와 상징들은 어딘가 어설프고 아귀가 안 맞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년을 향한 성인 여성의 욕망인 것처럼 해석되더니만, 난리가 나고 있다.

'Zeze'의 은유는 덜컹거린다. 결국은 밍기뉴라는 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제제라는 소년의 순수함과 영악한 욕망이 오가는 어떤 지점을 잡아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아이유의 목표대로라면 밍기뉴를 넘어서 결국 그가 해석한 제제에게 힘이 확 실려야 하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화자인 밍기뉴가 '성인 여성'이라는 혐의에 힘이 실렸고(꼭 그러라는 법은 없을텐데. 소설에서 가상의 친구인 밍기뉴와 뽀르뚜까 아저씨는 모두 남자 아니던가), 가수로서 지금까지 아동성애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아이유가 순식간에 아동성애적 욕망의 '주체'로 둔갑해버렸다.

동녘출판사의 단호한 입장과 달리, 모든 창작물은 발표되는 순간부터 해석의 무중력 속에 던져진다. 누가 그 작품을 보고 무슨 식으로 읽어낼지 창작자는 미리 다 알 수도 없고, 물론 어떤 효과를 노리기야 하겠지만, 그 결과를 일일이 통제할 수도 없다. 대중이 'Zeze'의 가사에 아동성애의 혐의를 씌우는 것 자체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머리에는 떨쳐낼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가령 조영남은 작품 활동을 넘어 현실의 생활 속에서 별별 '금기'를 다 넘나드는 행보를 보이면서도 '아티스트로서의 면책 특권'을 십분 누리며 살아간다. 반면 아이유는 현실 속에서 아동성애는 커녕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장기하와 연애하며 근면 성실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아이유에게는 조영남에게 허락되는 것과 같은 '아티스트 면책 특권'이 반에 반도 부여되고 있지 않은가?


5.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한, 대한민국은 아동성애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남자들은 '산삼보다 몸에 좋은 고3, 고3보다 몸에 좋은 중3' 같은 소리를 시시덕거리고 있다. 아이유는 그런 욕망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면서 슈퍼스타가 되었고, 지금은 그렇게 스타로서 쌓아올린 자산을 차분히 매각하며 아티스트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빚는 중이다.

아이유의 새로운 행보를 두고, 대중들은 자신들이 소비해왔던 아동성애적 기호들을 새삼 '발견'하며 분노한다. 그러한 해석은 아이유의 의도를 넘어, 스물셋이 된 아이유가 다섯 살짜리 소년 제제에게 '어른의 놀이'를 가르치려 든다는 식의 망상으로 뻗치고 있는 것 같다.

아이유가 '아동성애' 컨셉으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왜곡했다는 대중들의 분노는, 바로 그 아이유를 상대로 같은 욕망을 불태웠던 스스로에 대한 알리바이 만들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나라에서 진정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어린 여자를 향한 나이 많은 남자의 성욕이 아니라, 여자가 감히 욕망의 대상에서 벗어나려 드는 것 뿐이라는 현실이 폭로되고 있는 중이다. 아티스트 아이유의 건투를 빈다.

2015-11-04

[북리뷰] 남성 과잉 사회? 여성 혐오 사회!

남성 과잉 사회
마라 비슨달, 현암사, 1만8천원

<사이언스>의 중국 특파원인 저자는 10대 시절을 아시아에서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중국사를 공부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비슨달의 어머니는 이혼 후 홍유라는 이름의 중국인 하우스메이트와 함께 일종의 공동 육아 체계를 구축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그는 자라면서 중국어를 배우고 마침내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꿈을 품고 말이다. "마오쩌둥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에 갈 때까지 나는 그 말을 믿었다."(9쪽)

그가 유학 시절 목격하고, 다시 기자의 신분으로 돌아간 중국의 하늘은, 그러나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어느 교실에 가도 남학생들이 여학생보다, 자연 성비를 넘어 월등히 많은 현상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아이이자 홍유의 아이였던 나는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처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12쪽)

우리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재의 30대가 가장 극심하게 겪고 있는 성비 불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한국에서 성 감별 열풍이 한창일 때 첫아이의 성비는 거의 정상 수치인 104였지만 둘째의 출생 성비는 113, 셋째는 185, 넷째는 209였다. 한 부부가 딸보다 아들을 낳을 확률이 1대2를 넘어선 것이다."(50쪽) 남자는 많고 여자는 없는 사회, 남성 과잉 사회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남성 과잉 사회, 혹은 여아 집단 선별 낙태가 벌어지게 된 이유를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부터 조명한다. 성비가 무너진 나라에서는 태아 선별 낙태 기술이 도입되기 전부터 태어난 여아를 살해하곤 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하던 초기부터 발견된 바, "120만 명이 거주하는 한 정착지에서 매년 약 2만 명의 여아가 죽는 것으로 나타"(99쪽)나기도 했던 것이다. 1960-1970년대 미국의 대중들을 사로잡은 '인구 폭탄'에 대한 공포가 그 위에 불을 붙였다. 프린스턴 대학의 식물학자 폴 에를리히가 쓴 책 <인구 폭탄>이 200만 부 넘게 팔리면서, 무지막지하게 불어난 인구, 특히 아시아인들이 미국으로 넘어올 것이라는 대중적 공포가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초음파 검사기가 양산 후 보급되기 시작했다. 1억 6천만 명이 넘는 여아들이 '사라져'버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량학살의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성비가 무너진 사회의 성차별적 문화보다는, 인구 조절과 통제라는 대의를 내세우고 여아 선별 낙태를 방조하거나 심지어 지원한 미국의 정책과 과학자들을 향한 비난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같은 기술이 서구와 아시아에 동시에 보급되었을 때, 유독 아시아의 성비만이 크게 균형을 잃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기술 차원의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 보급 전까지는 태어난 여아를 죽이던 문화권에서, 이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미리 '처리'해버린 후, 수십년 후 자기 아들이 장가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며 한탄하고 있다. 저자와 달리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문화권 속에 살고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를 내야 마땅하다.

여성 혐오는 남성 과잉의 원인이다. 남자들이 '결혼 시장에서 소외되어' 여성 혐오를 한다는 설명은, 그 남자들에게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는 해주겠지만,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여아 살해 풍습이 신기술을 만나 폭발하는 매커니즘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 야만을 직시하라. 그래야 문제가 보이고,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5.11.17ㅣ주간경향 115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1-02

[별별시선]국민은 선진국, 대통령은 후진국

요즘 반성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간파한 바와 같이 이 나라는 초중앙집중적 1극 사회이며 그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러므로 ‘에이,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나라가 회까닥 뒤집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그러한 퇴행적 변화를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개인적 숙원 사업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에, 교육부 관료들은 알아서 기는 쪽을 택한다. 문제는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로 시행되고 있는 이 사업이, 해방 후 70년간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염원해온 공통의 의지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념과 진영을 막론하고, 시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모든 한국인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대립 구도를 검토해보자. 이것은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쪽에 방점을 찍을지를 놓고 벌어지는 입장 대립이다. 발전된 산업국가를 만드는 것이 먼저인지, 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를 만드는 게 먼저인지가 논점일 뿐이지, 양자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선진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선진국을 만들자. 해방 후 70년, 대한민국이 품어온 가장 근본적인 목적의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선진국인가?’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갈라졌다. ‘어떻게 선진국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의사결정과 집행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가치를 잠시 접어두자는 것이 산업화 세력의 논리인 것이다. 반대로 민주화 세력은 민주적인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이 나라가 더 이상 선진화의 길을 걷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대통령만은 다르다. 그는 ‘내 아버지가 독재자라고 욕을 먹는다면, 굳이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해방 이전, 개항 이후부터 한반도를 지배해온 선진화 아젠다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건 이 나라는 과거에 비해 더 나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직 박근혜만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높일 수 있다면 이 나라가 다시 후진국이 되어도 좋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40% 선에서 오가고 있음에도, 이것이 박근혜 한 사람의 문제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야권에서 갈등의 축을 ‘친일 독재 미화 반대’로 잡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착시 현상이다. 산업화 대 민주화의 대립을 고스란히 반복하면, 당연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력의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국정화에 찬성하지 않지만 야권의 정치적 레토릭에 동의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가 제기하는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이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온 나라의 수준이 후진국으로 떨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한, 방글라데시, 수단, 터키 등 소위 후진국으로 여겨지는 국가들만이 선택하고 있는 그 길을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가 없다.

국민은 선진국을 지향하는데, 대통령은 후진국으로 역주행한다. 박근혜는 해방 후 70년을 관통하는 선진국 건설의 의지와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정작 박정희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면서도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인물임에도 말이다. 조국 선진화의 길은 여기서 끝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부디 아버지의 명예를 올바른 방법으로 지켜주기 바란다.


입력 : 2015.11.02 20:48:40 수정 : 2015.11.02 21:09: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022048405&code=990100#csidxbccd7df7e5526db84dad4d43c11aed8

2015-10-21

청년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나라

너무 심한 모욕을 당하면 어이가 없어서 화를 못 내는 경우가 있다. 요 며칠 사이 출산율과 관련하여 정부와 새누리당이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그렇다. 이들은 가임기 여성과 혼인 적령기 남성들을 딱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어서 너희들이 새끼를 쳐야 할텐데, 라고 혀를 차는 양돈장 주인의 눈빛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한다.

10월 18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안)을 내놓았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비혼(非婚)·만혼(晩婚) 경향이라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었다.

일단 이 분석부터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 어떤 선진국에서도 비혼과 만혼을 줄여서 출산율을 높이지는 못했다. 출산율을 회복한 나라가 없지는 않다. 프랑스가 그런데, 프랑스는 비혼여성들이 낳은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복지와 인식 개선을 통해 출산율을 회복했다. '출산'을 '결혼'과 연결짓는 한, 현대 산업 사회의 국민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꺼리게 된다. 반대로 그 연결을 끊으면 끊을수록, 자녀를 낳고 기르고 싶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발휘되어, 출산율이 회복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의 판단은 정 반대다. 빨리 시집 장가 보내서 애 낳게 해야 한다는, 전지적 시부모 시점으로 청년 세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나오는 대책의 모습은 인격과 판단력을 지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 사회의 정책결정자들은 애완견 눈 맞추는 브리더들처럼, "국가가 나서서 미혼 남녀를 위한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1]다.

"광역지자체가 복지부 소관 단체인 인구보건복지협회와 함께 '만사결통(萬事結通·만사는 결혼에서 통한다)'이라는 단체 맞선 프로그램을 마련해 총각, 처녀 사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2]

이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아니다. 청년들을 진정 '사람'으로 본다면, 서로 자유롭고 자발적인 만남을 갖고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사회 여건을 개선하면 될 문제다. 청년들을 단지 '일해서 세금 내고 번식해서 그 뒷세대 낳을 것들'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암컷 수컷 눈 맞춰주면 번식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말이다.

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도 그런 고민을 안 해봤던 것이 아니지만, 10월 21일자 뉴스를 보고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국회에서 열린 제3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당정협의에서, 새누리당은 "새누리당은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현행 만 6세에서 1년 정도 앞당기고 초등학교를 6년제에서 5년제로, 중·고 6년을 5년으로 줄이는 학제개편까지 중장기 과제로 검토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3]했다.

입학연령 1년, 초등학교 1년, 중학교 고등학교 각각 1년씩 해서 총 4년을 빨리 졸업시키겠다는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대학 교육을 빨리 받게 하기 위해서? 절대 아니다. 어서 고등학교 졸업해서 결혼하고 애 낳으라는 소리다. 청년이라는 이름의 개·돼지들, 국민이라는 이름의 가축들에게, 어서 번식하고 새끼 쳐서 세금 내고 국민연금 납부할 장래의 또 다른 가축을 생산하라는 대한민국 축사 주인들의 헛기침 소리인 것이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의 말을 들어보자. "재정투입 중심의 출산과 보육대책이 축을 이루고 있어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발상의 전환과 획기적인 대책을 요구했습니다."[4] 실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긴 하다. 국민을 '사람'이 아니라 '가축'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번식의 본능이 있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빼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하며, 건강상의 이유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에는 입양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모든 여건이 바람직하다면, 적잖은 사람들은 알아서 자녀를 낳고 기른다.

높으신 분들은 안달이 나 있다. 이 국민이라는 이름의 가축들이 어서 새끼를 쳐야 자신들이 계속 지배자 노릇을 할 수 있을텐데, 왜 이것들이 번식을 안 하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을, 청년들을 바로 그렇게 가축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는 간단한 진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런 모욕적인 '정책'으로 출산율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심지어 동물도 여건이 안 좋으면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은 다음 기르지 않고 물거나 밟아서 죽여버린다. 나치 독일에서도 국민 강제 번식 정책을 추진한 바 있었지만 실패했다. 사람을 가축 취급하는 이 나라의 국격은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하루에 8시간 일하고, 충분한 급여를 받으며, 안정된 주거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면 출산율은 장기적으로 알아서 회복될 것이다. 반대로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정책을 빙자한 모욕이 쏟아진다면, 글쎄, 사람들이 과연 언제까지 참아줄 성 싶은가?



[1, 2] 연합뉴스, "<인구위기> ② 국가가 처녀총각 단체 미팅 주선한다", 2015년 10월 18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16/0200000000AKR20151016186900017.HTML

[3, 4] SBS뉴스, "새누리, 초등학교 조기입학 추진…"신중해야"", 2015년 10월 21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28032&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2015-10-20

[북리뷰] 용인 벽돌 투척 사건, 형벌과 정의를 묻는다

마르부르크 강령
프란츠 폰 리스트, 강, 1만5천원

일군의 철학자들이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발상을 떠올리고, 세력화하여, 최종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철학의 개념과 현실의 작동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골이 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철학자가 법철학자라면 사정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법은 세상의 작동 방식을 추상화한 관념 체계이니 말이다.

프란츠 폰 리스트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사촌동생으로, 19세기 독일 형법학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불러온 인물이다. 이른바 형법에서의 '신파'와 '구파'의 대립 중 '신파'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구파'는 죄형법정주의라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범인의 책임 능력과 행위에 따른 예측 가능한 처벌이 형법과 형사정책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신파'는 범죄라는 행위는 범죄자라는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므로, 그 양자를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우리의 판단 대상은 행위인가 아니면 행위자인가?"(84쪽, 강조는 원문)

근대 형법의 근본 원칙들을 생각해보자. 형법은 원칙적으로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다. 살인자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을 뿐, 과거에 살인을 했던 '살인자'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 게 아니다. 또한 그 행위자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인식과 통제력이 있을 때에만 처벌할 수 있다. 정신이상자는 살인을 저질러도 치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오직 행위시에 존재하는 법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간통을 해도 간통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리스트의 생각은 달랐다. 기계적으로 같은 행위에 대해 같은 형량을 부여한다면, 가령 오래도록 괴롭힘을 당하던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경우와, 가정 학대를 일삼던 남편이 끝내 부인을 살해한 경우에 같은 형량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 법 적용은 정의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일단 그는 범죄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98쪽) 개선 가능한 부류에 대해 인도적 처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104쪽)

'행위 뿐 아니라 행위자도 바라보는' 형사 체계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악한 상황에 몰린' 이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사회 내에 혹형주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때, 리스트의 목적사상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어떤 수형자들에게 구제 불능의 딱지를 붙인 후 그들을 아예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치 독일에서, 그리고 가깝게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절도범이었던 지강현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관찰제도로 인해 징역 10년에 보호관찰 7년을 추가로 선고받고는, 급기야 탈옥을 감행했던 것이다.

죄가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용인 아파트 벽돌 투척 사건의 범인이 만9세의 초등학생임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죄와 벌의 문제를 고민하는 듯하다. 대중적 공분과 열기 속에서 <마르부르크 강령>을 다시 읽어본다. 올바른 형사 체계와 정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시작해야 한다.


2015.11.03ㅣ주간경향 114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0-13

내용적 종북, 형식적 종북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내용적 종북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으되, 형식적 종북은 국정 운영의 기조가 되었다'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패기 넘치게 '박근혜 대통령 떨어뜨리려 나왔다'던 이정희 대표의 통진당은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해산심판을 통해 공중분해되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든 '종북 사냥'의 사례가 존재한다. 심지어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 종북'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정 운영의 많은 부분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주체적인가?

가령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행사를 생각해보자. 블랙 프라이데이는 기본적으로 북미 지역의 백화점이 그간 쌓아두었던 재고를 헐값에 털기 위해 하는 행사다. 처음부터 수많은 물류 비용을 공급자가 떠안고 있으며, 물류 비용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는 그런 행사가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에서, 아니 청와대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은 눈물을 머금고 할인 행사를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그 손실은 공급자가 나눠서 지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가 아니다. 하다못해 북한 장마당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격 통제를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공산권 국가를 조롱하기 위해서나 등장했던 그런 에피소드가, 201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이 의사 결정의 방식, 막무가내식 상명하달, 시장 경제와 가격 결정 원리에 대한 철저한 비존중을 놓고 볼 때, 그 행사는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종북 프라이데이, 혹은 블랙 장마당데이 정도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현 정부의 북한 따라잡기는 급기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에 이르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국정교과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우리가 '발전 모델'로 삼을만한 나라가 전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에 북한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어휘라는 이유로 '동무'가 일상 언어에서 완전히 소거되어 버릴 만큼 반공은 우리의 제1국시였다. 북한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정 반대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자신들이 어떠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북한의 길을 뒤따르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쉽게도 말하지만, 정작 그 통일이 되고 나면 북한의 깊은 산속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는 홀로 고민해보곤 한다. 북한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오래도록 유지되고 있는 유사 종교적 독재 국가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통일이 되고 난 후에는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 주체주의자들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대한민국은 '형식적 종북'에 대해 이토록 관대한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북한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따라해서가 아니라, 북한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정 반대의 방향을 택했기에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설마 아직도 대한민국이 북한과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핵심 과제는 북한을 이기는 게 아니다. 이미 이겼다. 북한을 흡수하고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박근혜 정권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한다. 통진당이 해산된 이 시점,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 청와대를 능가할만한 조직이 대한민국에 없다. 동시에, 국정교과서 논란을 '역사 왜곡'으로만 몰아가는 야권 역시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형식부터가 '쪽팔리는',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말해보자.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측에서는 '내용적 종북'이 들어있기 때문에 여타의 교과서를 없애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그것은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그 덫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끝나지 않는 논쟁을, 혹시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피해야 한다.

어떻게? 상대방을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다시피 현 정부는 '내용적 종북'과 거리가 멀지언정(정말 그런지도 의문이지만),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어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최근 시사 용어로 '미러링'이라고 한다. 종북 프레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너희들은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 다 해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지 않나.

이제는 미러링을 해볼 때다. 야권이 종북이라고? 아니다. 북한이나 하는 국정교과서를 기습 추진하는 현 정권이야말로 종북 정권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보호해야 한다. 청와대에 종북 세력이 숨어들어 있다. 건국 70년, 공산주의와 맞서며 이룩해낸 우리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취를 이렇게 무위로 돌릴 수는 없다. 통진당의 해산 이후, 대한민국에 조직화된 '내용적 종북'은 없다. 이제는 '형식적 종북'의 문제를 고민해볼 때다.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다. 피땀흘려 이룬 나라가 하루아침에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는 꼴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경제 수준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고대하며, 숨죽여 외쳐본다. 종북세력 물러가라. 자유민주주의 만세.

2015-10-06

[북리뷰] 우리말의 탄생, 우리말의 재탄생

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책과함께, 1만4천9백원.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물러난 후라 경성역 창고에는 갈 곳이 없는 화물이 많이 쌓여 있었다. 화물을 정리하는 인부들 사이에서 이를 점검하던 역장은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내용물을 살펴본 역장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이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서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천5백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 만에, 해방 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20여 일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37쪽)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제목은 언듯 들으면 형용모순 같다. '우리말'은 따로 '탄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부제인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위에서 인용된 본문의 첫 문단을 읽으면, 우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재정립해나가던 바로 그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1894년 조선 정부는 칙령 제1호 공문식에서 한글을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 제14조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되, 한문을 덧붙여 번역하거나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한국어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식자층은 고전 한문을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었고, 사실상 지배 계급 역시 필요에 따라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를 소리대로 적고 있긴 했지만 그 언어에 어떤 공식적 지위와 권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꾸고 신장 개업을 하면서,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어를 공식어로 선언한 것은 그 중 하나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조선의 식자층이 한국어 그 자체를 그다지 진지한 연구와 학습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국문'이 된 입말은 어제까지만 해도 '언문'으로 불리던 백성들의 말이었을 뿐이다.

<우리말의 탄생>은 바로 그 '국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많은 학자들과, 그들이 겪었던 내부 갈등 및 외부로부터의 탄압 등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책이다. 우리말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제국에는 그런 국책 사업을 추진할만한 힘이 없었고,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필요성 때문에 한국어 연구를 어느 정도 방관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한국어 혹은 한글에 대한 신화적 열광을 떨쳐내는 데 도움을 준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의 발명품을 이용해 어떻게 한국어를 담아내고 또 다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와 혼란이 있었다.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서 쓰자는 급진적인 논의가 가능했던, 말하자면 우리말의 가소성이 큰 시점을 다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이 지금의 이 모습인 것에는 그 어떤 절대적 필연성도 없다. 다만 수많은 학자와 언어 대중이 고심하고 합심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한국어는 근대적 민족국가와 함께 탄생하였고, 지금도 계속 재탄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인 것이다.


2015.10.20ㅣ주간경향 114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0-04

[별별시선]기성세대의 염치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기성 지식인이나 청년 논객 할 것 없이 지금의 청년들을 뭔가 구별지어 특별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각종 형태의 ‘청년 담론’들을 즐비하게 내놓고 있다. 이것들을 조심하라. 답은 ‘다수화 전략’에 있다.” 지난달 11일, 경향신문에 실린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의 칼럼 ‘또 하나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결론이다. 인용문에서 지적된 ‘청년 논객’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서, 대답해볼 필요가 있겠다.

칼럼이 게재될 무렵, 새누리당은 “청년 일자리를 위하여 임금피크제를!” 같은 구호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노동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는 청년들을 중장년층과 대립하게 만들어 고립시키고,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홍기빈의 지적이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2년 대선·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의 보수 지배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립 구조에 지배당해왔”다는 대목을 보면, 그의 논리 구조가 결국 ‘피해자 탓하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2년 이후 한국 정치에서 호남이 고립된 것은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화 세력의 절반을 군사독재 세력과 뒤섞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노무현은 바로 그 3당 합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이의 있습니다!’라며 반대했고, 결국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사람이다. 호남의 고립은 호남의 탓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김영삼의 지지 기반인 영남이 등을 돌려서 벌어진 일이다.

청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청년 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보다 높을까? 정부의 주장대로 임금피크제가 시행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야 없겠으나, 청년 실업률을 높이는 주된 원인에 진보 진영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면 절대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없는 노동시장의 구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은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를 ‘1차 노동시장’이라고 하고, 후자를 ‘2차 노동시장’이라고 부른다. 그 사이에는 임금, 고용안정성, 노동조건 등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한 번 ‘눈높이를 낮추면’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유사 신분제에 가깝다. 당연히 청년들은 처음부터 ‘1차 노동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는 자본과 정부의 책임만을 묻는다. 하지만 조합주의에 빠져버린 노동계 역시 이 사태에 있어서 결코 결백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홍기빈이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다수화 전략’은, 노동조합 조직률 10%대를 맴도는 한국의 노동계가 진작에 수행했어야 한다.

청년들은 정부에 속고 있는 게 아니다. 중장년층이 가지고 있는 ‘양질의 일자리’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진보 진영을 믿지 않을 뿐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잘 조직되어 있는 일부 대기업 생산직에서 이미 가족이나 친지를 대상으로 한 ‘일자리 대물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대체 청년들이 뭘 어쨌어야 한다는 말인가? ‘청년 담론’은 때로 보수의 분할 통치 방안으로 동원된다. 하지만 청년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의 영역에 분할 통치와 이간질이 가능한 차별이 존재함에도, 그것을 미리 바로잡아놓지 않은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좀 해줬으면 한다. 그것이 기성세대가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염치라고, 한 ‘청년 논객’은 외치는 바이다.


입력 : 2015.10.04 20:48:37 수정 : 2015.10.04 20:52: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42048375&code=990100#csidxf53f26551e49056a682ddaf2c5c432b

2015-09-23

엠마 왓슨에게 공개 서한을 보낸 고종석 선생님께 보내는 공개 서한


1.


고종석 선생님, 안녕하세요.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 "에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께"를 읽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읽었고, 반면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엠마 왓슨은 읽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죠.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애초부터 그 '편지'는 엠마 왓슨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게 아니니까요.

경향신문에 연재하시는 코너 '고종석의 편지'에 실리는 내용이 실은 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게재된 제목들을 쭉 훑어보면, "IS 전사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그나마 수취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 대사,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이번에 문제가 된 엠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 등은 극동의 변방에서 한국어로 실린 공개 서한에 눈길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국제적 명사들입니다. 하물며 사회주의자 여운형, 익사한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 등을 수신인으로 호명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공개 서한'이라는 민망한 글쓰기 방식을 저도 시도하고 있는 지금, 그 형식에 대해 한 차례 곱씹어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그 글에서 지목하는 상대가 읽기를 바라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정말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연락처를 알아내어 직접 전달해야 할 테니까요. 공개 서한은 누군가를 '명시적 독자'으로 삼아,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을 '실질적 독자'로 만듭니다.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적어도 동참하게끔 유도하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일종의 상소문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오바마'와 '공개 서한'을 함께 검색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뉴욕타임즈>의 광고란을 사서 오바마를 상대로 공개 서한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박근혜'를 함께 검색해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요컨대, 힘 없는 다수의 목소리를 모아서 권력의 꼭데기에 있는 누군가에게 발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대사에게 보내신 '편지'는 그러한 고전적인 양식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한껏 칭찬하다가, 그 모든 개방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여성 사제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교황의 입장을 비판하시죠. 케네디 대사를 향해서는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밀착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우려를 전달하면서, 결국 한국의 독자들에게 현재의 국제 정세를 전달하셨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2.

편지가 시작된 후 다섯 문단에 걸쳐 고종석 선생께서는 엠마 왓슨의 HeForShe 연설과 그 캠페인을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이 '편지'가 진정으로 엠마 왓슨을 향한 것이라면 그 내용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엠마 왓슨 본인이 잘 알고 있을 내용일 테니까 말이죠. 

엠마 왓슨은 "연설에서 페미니즘을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지녀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정의한 뒤, 그것이 남성 혐오와 동일시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사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혐오합니다. 하지만 어떤 페미니스트가 남성을 혐오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튼 연설을 듣고 고종석 선생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여성과 남성은 자유롭게 감성적이 돼야 하고 자유롭게 강인해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대로, HeForShe 캠페인은 모두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엠마 왓슨과 함께 HeForShe 캠페인을 기획한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캠페인이 갖는 근본적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나 고종석 선생님보다야 잘 알고 있었겠죠. 간헐적으로 칼럼을 쓰는 저나 고종석 선생님과 달리, 그들은 직업적으로 장기간에 걸쳐서 여성 인권 뿐 아니라 다양한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요컨대 HeForShe는 세계에서 가장 큰 힘과 든든한 자원을 가진 집단의 페미니즘 기획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려했을법한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평가와 왜곡이, 그것도 엠마 왓슨을 수신인으로 호명한 공개 서한에 빼곡이 담겨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것이 나름 선진국 반열에 속한 대한민국의 언론 지면에 정식으로 실릴 것이라고는 말이죠.

일단 이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당신이 제한된 시간 때문에 그 멋진 연설에서 누락했을 문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칼럼의 후반부는 그 "누락"된 문제들을 지적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그 문제들이 누락된 이유가 과연 '시간 제한' 때문이었을까요? 과연 엠마 왓슨과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캠페인 담당자들이 그저 '시간이 부족'하여, 고종석 선생님도 아실만큼 잘 알려진 젠더 이슈들을 간과한 것일까요?


3.

HeForShe는 2014년 이전까지의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볼 때 굉장히 이상한 캠페인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만, 애초에 공개 서한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만 보라고 쓰는 게 아니니까, 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페미니즘은 크게 세 개의 세대로 구분됩니다. 1세대 페미니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참정권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기본권의 동등한 보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1960년대부터 대략 1980년대 정도까지, 기본적인 정치적 평등을 넘어서는 사회적 균형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표출되었고요. 3세대 페미니즘은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페미니즘 그 자체가 간과할 수밖에 없는 범주들을 발견하고 그 의의를 부각시키면서 페미니즘의 다각화 혹은 발전적 해체로 향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맥락을 놓고 고종석 선생님의 진심어린 충고를 살펴보면, 스스로 인식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으나, 고종석 선생께서는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3세대 페미니즘의 레퍼토리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계셨음이 드러납니다. "당신도 최근에 인정했듯,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과 불평등은 양상이 크게 다"르다거나, "존재는 중층적으로 결정"되며 "그렇게 중층적으로 결정된 존재는 어떤 순간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논변 등은 아주 고전적입니다. 특히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이라는 표현은, '백인 중산층 여성'들을 겨냥하여 수많은 소수 젠더 그룹들이 불만을 드러냈던 맥락을 거의 고스란히 상기시킵니다. 가령 이런 것이지요.

여성 일반을 대변하여 여성들 사이의 자매애와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가부장제를 공격하던 과거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보편 범주로서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면서 많은 비판과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과거의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은 기존 페미니즘 이론의 '사각지대', 즉 인종과 계급, 성 정체성 등을 축으로 하여 다양한 층위로 드러나는 '여성' 내의 차이들을 조명하는 움직임 속에서 다양한 담론들로 나타난다. 이른바 페미니즘의 제3물결이라고도 하는 유색인종 여성의 비평들이 제2물결 페미니즘의 백인 중심적 전제를 비판하고 '여성'이라는 범주에 내재하는 인종적·계급적·문화적·민족적·성 정체성적 차이에 주목한 이래,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추상적 범주보다는 다양한 여성들의 개별 경험과 각각의 삶이 지니는 특수성에 대해 성찰하는 페미니즘'들'로 분화되었다.[1]

이렇게만 놓고 보면 고종석 선생님의 공개 서한은 퍽 그럴듯한 말처럼 보입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3세대 페미니즘의 맥락을 빌려 HeForShe를 2세대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전략은, 그 자체로서는 성립하지만, 문제는 '누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2세대 페미니즘과 3세대 페미니즘이 분화하는 지점에 대해 생각해보시죠. '너는 백인 중산층 여성이므로, 흑인 빈곤층 여성인 나의 경험을 대변할 수 없다'는 문장은, 오직 발화자가 흑인 빈곤층 여성일 때에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흑인 빈곤층 여성'이 무엇으로 바뀌더라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격차에 대해 온전히 경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로서 그 삶을 살아본 한국 여성 뿐입니다.

결국 3세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그 자체를 해체하는 페미니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인용한 책을 조금 더 읽어볼까요. "1980~90년대 페미니즘 이론이 침체기를 맞이하고 '포스트페미니즘'이 거론되면서 페미니즘이 '젠더 연구'로 이행하는 동시에 동성애론이 성장한 것은 '차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2] 차이와 다양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여성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깨어져 나갔습니다.


4.

그것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혹은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온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주의는 보다 더 넓고 다양한 성차를 포함하는 젠더 연구로 이행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은, 적어도 3세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에게는, 꺼림직한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국내에서 '여성학자'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평화학 연구자'로 소개하기도 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펼쳐볼까요.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3]

현재 진보 진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한국인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은,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정체성의 정치'가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페미니즘은 정체성의 정치를 벗어나야 하고, 실제로 정체성의 정치 그 이상의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철학인데, 왜 여성만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4]

그러한 입장은 최근 그분께서 <한겨레>에 기고하신 서평에서도 유지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고 하시면서도, "제가 페미니스트냐고요? 페미니스트는 직업도, 정체성도, 멤버십도 아닙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어쩌면 그냥 지칭(指稱) 명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죠"[5]라고, 아마도 최근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운동에 고무되어 당신께 문의 메일을 보냈을 수많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페미니즘 그 자체를 어떤 강고한 '주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 "교차, 우회로, 가로지르기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횡단의(transversal) 정치"[6]로 여기는 이와 같은 발상은, 고종석 선생님께도 매우 친숙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한국의 페미니즘에 이러한 입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법적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해온 이태영 박사님과 그 후속 세대들의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고종석 선생님께는 정희진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가 매우 친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실 것이라고 봅니다.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엔본부에서 출범식을 가진 HeForShe, 그리고 2015년 트위터를 넘어 국내의 전반적인 여론에서 페미니즘을 주요 의제로 끌어올린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 이 두 가지 운동에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공론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어휘 역시 봉인을 뜯고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활발히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 운동 모두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합니다. 3세대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으로, 광범위한 젠더 연구로 발전적 해체를 거듭해온 맥락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합니다만,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러한 맥락에서 한 발 비켜나 새로운 각도에서 새롭지만 익숙한 페미니즘을 제기합니다. '여성주의'로서의 페미니즘과, 그 페미니즘에 동참하는 외부 세력으로서의 '남성'이라는 범주를 재창출하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지금까지의 맥락을 놓고 볼 때 HeForShe는 굉장히 이상한 프로젝트'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차이, 횡단, 교차, 가로지르기 등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 담론을 지배해온 용어들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젠더 범주들을 호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던 '여성'이 복귀합니다. 

기존의 '차이'가 놓이던 자리에는 대신 '남성'이 들어가고요. 엠마 왓슨을 앞세워 HeForShe를 기획한 이들은, 젠더 연구의 주된 화두였던 다양한 성소수자 뿐 아니라, 암흑의 핵심이요 가부장제의 원흉이며 세상의 악이란 악은 모두 저지르는 테스토스테론의 노예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을 페미니즘의 논의에 암묵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모르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시스젠더'란 스스로 생각하는 성정체성과 육체의 성정체성이 동일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저처럼 스스로 이성애자 남자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성애자 남자들이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이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의 최근 경향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센 국제기구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배우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삼아,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그'를 소환했습니다. 2014년 말에 벌어진 일입니다.


5.

자, 먼 길을 돌아 다시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낸 편지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비판했다시피, 그 편지는 전제부터 잘못 설정되어 있습니다.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이 고종석 선생님보다 페미니즘을 몰라서 '가난을 경험해본 적 없는 백인 여성 영화배우'에게 연설문을 넘겨준 게 아닙니다. 고종석 선생께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맥락을 넘어서, 그간의 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HeForShe는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이지만, 동시에 남성 운동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주어가 He, 즉 남자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저 구호를 접하고 '대체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마치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양, 그리고 남자들을 무슨 백마 탄 왕자인 양 포장해주는 것 같은데, 그게 유엔에서 추진하는 캠페인이라고?

그런 의문을 품었던 것은 저 역시 기존에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유통되어온 페미니즘, 혹은 포스트페미니즘, 아니면 젠더 연구 등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2015년이 되고, 다양한 여성 문제가 터져나올 때, 특히 고종석 선생님같은 남성 지식인들의 대응을 보니, 우리의 남성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편지에서 201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거론합니다. "지난해에 노벨평화상을 탄 파키스탄의 여성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당신보다 일곱 살이 젊지만, 당신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았"다며, 엠마 왓슨의 페미니즘은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역을 맡으며 벼려졌을 것"이지만 "말랄라의 페미니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온 경험의 소산"이라고 일침을 놓으시더군요. 이 대목을 읽고 저는 즉각적으로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남자 지식인들의 버릇이 잘못 들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성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논변이 득세한 탓에, 정작 남자 지식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지식을 달달 외울지언정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엠마 왓슨과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이고, 두 사람 모두 2015년 현재를 대변하는 페미니즘의 아이콘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사례를 들어 엠마 왓슨을 가르치신다고요? 이건 부산 사람이 광주 사람더러 목포 사람보다 너는 덜 차별당한다 운운하며 호남차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꼴입니다.

여성주의는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경험을 이론화하여 형성되었습니다. 물론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선각자가 있긴 하였지만, 그 역시 부인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였고, 심지어 자기 원고가 말이 되는 소리인지 부인에게 원고 검수를 받기라도 했지요. 그런데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원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성들에게 '책을 더 읽어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 상황이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습니다. 부산 사람이 목포 사람에게 호남차별에 대해 가르치다가, '책을 읽어봐라'라고 말하는 상황을 또 한 차례 상상하게 되네요.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겨우니까요.


6.

HeForShe라는 구호에는 인류가 성적으로만 구분된다는 함의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입니다.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에 당신도 동의할 것입니다.

글쎄요. 이런 식이라면 '여성주의'는 세상에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겠죠.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 '모든 폭력 반대주의', '착하게 살자주의'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3세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고종석 선생님의 이런 물타기성 발언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젠더 개념을 다각화하자는 것이지,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자체를 없는 셈 치자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시 호남차별을 예로 들어보죠. 누군가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은 평생토록 따라다니는 차별의 딱지입니다만, 그래도 세상에는 호남 출신 사장의 회사에서 일하는 영남 출신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나열한다 해서 호남차별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그 호남 출신 사장이 영남 출신 직원의 임금을 떼어먹었다 해도 '영남차별'이라는 범주가 새롭게 탄생했다고 우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웬 영남 출신 지식인이 '호남이라는 말은 단지 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 뿐 아니라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민중이다'라고 멋들어진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고종석 선생님, 이제 역지사지가 되십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을 두고 가르치신 '페미니즘'은 역설적이게도 협소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건 젠더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최소한의 요건이 성립되는데, 선생님께서는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알고 보면 남자도 희생자일 수 있고, 흔하다면 흔한 상대주의적 논변을 거쳐서 결국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즘인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실 따름입니다. 물론 어떤 페미니즘은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만, 모든 페미니즘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페미니즘은 해당 사조 전반을 대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고종석 선생님의 페미니즘 강의 그 자체를 지칭하는 여성주의 용어는 존재합니다. 이미 들어보셨겠죠? '맨스플레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이 쓴 에세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 독자적인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7]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맨스플레인이라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남자들처럼, 이것은 단지 남자들이 '지식 자랑'을 더 좋아할 뿐이기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맨'들의 과오라고 지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이죠. 

하지만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 그 자체의 이면에 있는 중요한 성차별적 가정을 지적합니다.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르치려고 드는 남자는, 상대가 자신보다 해당 주제에 대해 무지할 것이라고, 너무도 태연하게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에서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8]


7.

처음 이 편지를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내보겠습니다.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고종석 선생께서 쓰신 편지는 결국 페미니즘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을 받는 상대가 누구냐일 것입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거나 하지 않으시므로, 당신께서 한국어로 한국 신문에 쓰신 글이 엠마 왓슨 본인에게 가 닿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엠마 왓슨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엠마 왓슨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여성'으로서 무언가를 실천하려 하는 젊은이들이 실질적 독자로 상정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거든요. 그저 HeForShe 운동을 소개하고 더 많은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싶다면 굳이 '당신이 열 살이었을 때 벌어졌기에 몰랐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여성 미군 사병이 벌인 잔학행위' 등을 꺼내들 필요가 없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당신의 머릿속에 어떤 페미니즘, 하지만 잘 따지고 보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수렴하는 무언가를 상정한 채, 요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한 말씀 하신 게 아닌가요.

그런 맨스플레인을 화끈하게 풀어내셨으니, 트위터에서 실시간 트랜드에 등극하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맨스플레인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그 개념이 소개되자 다들 갓 말문이 트인 헬렌 켈러처럼 환호했던 여성들이, 고종석 선생님의 '편지'가 갖는 근본적인 속성을 설마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엠마 왓슨을 소환해놓고 여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내가 페미니즘을 한 수 가르쳐주마'라고 하셨으니 반발이 쏟아지는 게 당연합니다.

아, 어쩌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젊으셨던 시절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게 이상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옛날에는 운동권 남자들이 여자 후배에게 접근하면서 '너는 성적으로 해방된 주체니?' 같은 질문을 던져가며 '그러니까 나랑 섹스하자'는 암시를 던지곤 했다는군요. 또, 많은 '운동권 오빠'들이 여후배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쳤다고도 합니다. 운동은 운동대로 하고, 남자가 자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자고, 임신을 해도 혼자 알아서 잘 처리하는 게 페미니즘인 양 가르쳐온 인간 말종 운동권 오빠들의 전설은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21세기의 벽두에도 은은하게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정확히 그런 '운동권 오빠'라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저런 오빠들 조심해라'라고 말하는, 운동권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페미니즘 가르치는 오빠. 하지만 이전과 달리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방향이 뭐가 됐건 '페미니즘 가르쳐주는 남자'를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8.

HeForShe는 남자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합니다. 페미니즘의 개념과 정의 자체를 대단히 단순한 차원에 못박음으로써, 남자들이 '설명'을 할 필요조차 없는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동시에 남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아주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남자들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그 단순한 대의에 동참하고 묵묵히 참여하는 것 말입니다. 굳이 역할을 덧붙이자면 여성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떠드는 다른 남자들을 제어하는 것이겠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맨스플레인 하는 남자 지식인이 물의를 빚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것 역시 다른 남자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고종석 선생님께 공개 서한을 보내야 할 당위가 생깁니다. 맨스플레인을 하는 남자들은 여자들이 뭘 모른다고 전제하고 있기에, 어지간해서는 여자들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저와 비교하자니 머쓱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썼을 때의 상황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숫제 듣지 않으며 그들의 권리를 억압한다면, 다른 남자들이 나서서 말려야지요.

HeForShe가 갖는 실천적 의의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페미니즘 내에서 다양한 의견과 입장이 상호 교차하는 가운데, 가부장적 억압의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남자들 중, 양심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반인 그 남성들이 동질적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나도 아는 사실"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어떤 남자들은 성평등의 문제에서 자신이 속한 젠더 그룹이 아닌 억압받는 집단의 편에 섭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늘어나야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은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지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페미니즘의 주체는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인류입니다. 남성과 LGBT를 포함한 모든 인류입니다. 인종과 계급과 장애 여부를 가로지르는 모든 인류입니다." 앞서 지적된 것처럼,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저 "He"와 "She"의 범주를 아주 넓게 잡으셨죠.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HeForShe 선언을 안 하실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이 칼럼을 읽으면서 가장 의아하게 느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페미니즘을 넘어, 사실상 젠더 이슈도 아닌 무언가로까지 '진정한 페미니즘'을 확장시켜놓으시더니, 정작 본인은 남들 다 하는 그 쉬운 HeForShe 선언조차 안 하셨으니 말입니다. 'He'가 모든 범주의 강자고, 'She'가 모든 범주의 약자라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HeForShe를 안 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슬쩍 하셨나요?

페미니즘이 후기구조주의적 비평과 이론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남자들이 책 한 두 권 읽고 너의 무의식이 어쩌고 욕망이 저쩌고 하면서 개폼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났습니다. 엠마 왓슨더러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고 비난해봐야,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남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가기에, 많은 여성들은 선생님이나 저 같은 한국인 남자보다는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동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성차별의 문제는 다시금 단순명료한 평등의 문제로 재정의되었고, 그렇게 단순화된 페미니즘의 구도 속에서 남자들은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문제는 남자입니다. 남자들이 여성 차별적인 사회를 만들고, 그 구조를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설령 다 못 지킨다 하더라도, 더 많은 남자들이 여성들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여성 뿐 아니라 모든 젠더 그룹이 겪는 폭력과 차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아직 HeForShe를 하지 않았더군요. 이 편지를 쓰는 김에 동참합니다. 고종석 선생님도 조만간 함께하시면 좋겠습니다. 뭐가 옳은 일인지, 이미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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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조원,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테레사 드 로레티스, 이브 세지윅, 주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이희원, 이명호, 윤조원 외,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1), 19쪽.

[2] 같은 책, 20쪽.

[3]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서울: 교양인, 2013), 개정증보판, 초판 2005. 29쪽

[4] 같은 책, 30쪽.

[5] 정희진, "페미니스트", <한겨레>, 2015년 8월 21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5476.html

[6] 같은 곳.

[7]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5쪽.

[8] 같은 책, 20쪽. 강조는 인용자. 맨스플레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트위터 사용자 미원(@umami_er)님의 트윗에서 도움을 받았다.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0075939135488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1786506366976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3730725666816 참고.

2015-09-20

귀족이냐 평민이냐

1.

정치는 갈등이다. 어떤 집단과 집단이 무슨 주제로 갈등하고 있느냐를 파악하면 정치적 구도가 그려진다. 유행어가 된지 10여년 만에 시쳇말이 되어버린 '프레임'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조지 레이코프가 제시한 언어심리학적 개념의 섬세한 학술적 맥락과 달리, 현재 한국에서는 누가 누구와 왜 싸우고 있는지를 단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개념으로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가깝게 잡아도 2008년 대선부터 야권은 늘 지고 있다. 대선에서 두 차례나 패배했고, 총선에서도 다수석을 점해본 적이 없다. 시계를 조금 더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997년, 2002년의 대선 승리는 주기적인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시작이 아니라 역사적 예외로 기록될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많은 이들이 시달린다. 현재의 야권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한 것은 오직 17대 총선에서만 가능했었고, 그 총선은 다들 기억하고 있다시피 탄핵 역풍 속에 치뤄진 '비상선거'였다.

요컨대 야권은 늘 불리한 상황 속에 처해 있었고, 최근에도 늘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념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쭉, 계속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마치 지형지물처럼 주어진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야권이 패배하면 운동장이 기울어진 탓이라는데, 입장을 바꿔서 국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야권의 브레인 내지는 빅마우스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패배한 것은 원래 환경이 그래서 그렇습니다'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꼴이다.

'프레임'을 바꿔야 이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현실을 설명할 때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프레임을 퍼뜨리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이 실망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도가 20퍼센트 대에서 맴도는 것도, 야당의 구성원들끼리 총선과 대선의 승리라는 단일한 목적 의식 하에 단결하여 일관된 지도 체제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이미 담론이 오가는 내용과 수준만 놓고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타령을 하며 국민들에게 징징거리고, '20대 개새끼론'을 들먹이며 본디 야권 지지 성향이 높은 청년층에게 표 내놓으라고 반 협박을 해서 도리어 심정적 지지도를 갉아먹고, 이중 삼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투표장으로 이끌고 지지층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기는 커녕 '아줌마들이 몰표를 줘서 박근혜가 당선되었다'는 여성혐오적 인식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야권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2.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정치는 갈등이다. 이것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정치학의 거장 E. E. 샤츠슈나이더의 통찰이다. 정치는 갈등의 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긋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게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갈등의 선이 불리하게 그어져 있는 한, 미시적인 노력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령 지금까지 '지역감정'이라는 말로 호도되어 온 호남혐오, 호남포위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군사정권과 그들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는 정치 세력은 위협적인 대선 후보 김대중을 눌러앉히기 위해 끝없이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동시에 그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누군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면 그는 호남 사람이다, 이렇게 김대중이라는 개인과 호남을 1:1로 결부시킴으로써, 김대중을 둘러싼 갈등을 '호남 대 비호남'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대중이 어떤 새로운 정치적 갈등의 선을 제안하건, 그것을 빨갱이 아니면 호남이라는 두 개의 타자화된 개념틀에 포박지어 버림으로써 그를 1997년까지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전략은 현재 '친노 대 비노'라는 구도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나중 문제고, 일단 그가 '친노'라고 분류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등의 선이 그어진다. 야권 내의 정치인을 '친노'와 '비노'로 분류하고 있으니, 당연히 갈등은 노무현이라는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그어질 수밖에 없다. 비극적인 것은 노무현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기준선으로 그어진 갈등을 극복하거나 재설정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끝없이 갈등의 선으로 제시되며, 사실상 학대당하고 있다.

야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더 나아가 다가올 총선과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고민은 좀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갈등은 어디에 있는가?


3.

현재 야권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매달려 있다. 이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형식이 만들어진 나라에서, 2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대선도 그래서 졌다. 정치인 박근혜의 가장 큰 자산이자 부채는 그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갈등'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그 구도가 여전히 통용된다고 믿었고, 특히 이제는 50대에 접어든 386 세대 사이에서 그러한 믿음이 팽배했던 것 같다.

그들은 군사독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20대를 향해 '너희가 문재인을 찍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사 독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협박했다. 20대는 꾸역꾸역 선거장에 나가 야당에 많은 표를 몰아주었지만, 정작 386들은 자신들의 동년배가 경제적 이유로, 혹은 잘난척하는 386들을 더는 참아주기 싫다는 이유로 도리어 박근혜에게 몰표를 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2년 대선 결과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0대 이상에서 박근혜에게 몰표가 쏟아졌기 때문에 진 것이다. 그들은 숫자도 많고 표 결집도도 높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민주 대 반민주'라는 갈등은 거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386들은 고장난 축음기처럼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붙들었고, 영남 득표에 올인하더니, 졌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이 몇 번의 구조적, 혹은 명칭에서의 변화를 겪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갈등의 구조를 업데이트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친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선거에서 졌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 체계인 '민주 대 반민주'를 버리지 못한다. '비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심지어 그 정도의 이념적 틀거리도 갖추지 못한 채 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간헐적으로 드러내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겠지만, 정치는 갈등이다. 새로운 갈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정치도 있을 수 없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한 행복과 개혁을 약속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서 당장 맞서 싸워야 할 핵심적인 갈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듯하다. 안철수 현상이 대선 직후 시들어버리고 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갈등의 설정이어야만 한다.


4.

그렇다면 여권의 핵심적인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야당 성향의 지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같은 말을 얼른 꺼내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이 '빨갱이' 낙인 찍기로 압축되는 그러한 갈등 구도를 지금까지 즐겨 사용해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그러한 구도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성립하지도 않거니와, 애초에 '빨갱이 딱지 붙이기'는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선 긋기를 가능하게 할 뿐 어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갈등을 창출해내지 못한다.

선진국 대 후진국. 그것이 지금까지 여권에서 국민 일반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해온 가장 근본적인 갈등의 축이다. 보수 정당 중 하나의 이름이 '자유선진당'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누리당이라는 이름부터가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를 새로운 어떤 차원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선진화시킨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후진국이 되지 말자, 가난에서 벗어나자, 경제를 발전시키자, 그렇게 선진국이 되자. 이것은 5.16 쿠데타 이후 군부와 신군부의 교체를 거치고, 3당 합당으로 입당한 김영삼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면서까지도 바뀌지 않은, 여권의 핵심 갈등이다. 지금까지 야당보다는 여당이 정치적 논의를 주도해왔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결국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개발독재 시대를 넘어 아주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핵심 갈등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해방 직후 해외 원조에 의존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해외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된 것은, 그만큼 선진국 대 후진국의 대립 구도가 국민 전체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잡아, 최선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는 긍정적 갈등으로 기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늘날 그 갈등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 되었지만, 과연 우리가 '선진국 대 후진국'의 갈등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따라서 그 갈등이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진국 대 후진국'의 구도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효하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 우리는 잘 살게 되었고, 이제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심지어 국회마저도 '선진화' 되었으니 말이다.

선진국이 되어야겠다는 열망은 사라졌지만 개별적인 경제 주체들의 탐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나라가 모두 함께 더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국의 꿈'은, 어느덧 남들이야 망하건 말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각자도생의 꿈'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가 힘을 잃었지만, 그것을 대체할만한 전 국민적 도전 과제가 새롭게 제시되지는 않은 지금, 대한민국은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그저 표류하고 있다.


5.

한국 사회의 이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다시 짜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을 재정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인당 국민 소득 2만불을 넘긴 나라, 평균 출산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 국민들이 밤낮 없이 일하지만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 이 나라의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이냐, 평민이냐'의 갈등을 겪고 있다. 소수의 '귀족'들이 그들의 '가족'을 위해 국가 전체의 이익을 해치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느냐, 아니면 절대 다수의 '평민'들이 틀을 깨고 연합하여 일 하는 사람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위대한 평민의 나라'로 향하느냐의 갈림길이다.

최근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어를 떠올려보자.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수십년 더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눈에는 곧장 보이는 것이다. '상속받을 유무형의 재산이 있는 자'와 '부모로부터 빚이나 잔뜩 물려받지 않으면 다행인 자'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당신들이 함부로 순진하다고 치부하며 계도하려 드는 젊은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헬조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최근 언론에서 그 단어를 거론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섯불리 현실 속에서 절망하는 젊은이들을 꾸짖느라 바쁜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국 인생의 문제를 부모와 조부모의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태어난 평민 청년들의 울부짖음이다. 왜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헬대한'이 아니라 '헬조선'이라고 말하는가? 젊은이들이 경험한 바, 이 나라는 신분제 조선에 더욱 가까운 무언가로, 다시 말해 양반이라는 특권 귀족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그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헬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그저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이 나라가 아무리 '선진국'이 된다 한들 그 과실이 자신에게 돌아올 리 없다는, 남들은 행복하겠지만 자신은 끝없이 늘어나는 노동 시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데, 선진국 타령이 말같은 소리로 들리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의 청년들은 성장기에 2002년 월드컵을 일종의 원체험으로 경험했고, 전 세계인들이 케이팝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지 말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선진국이 된다 한들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청년 세대가 볼 때 대한민국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선진국의 작동 방식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귀족이냐 평민이냐. 오직 이 갈등만이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6.

현존하는 정치적 갈등을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재편하는 것은 야권에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겨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기울어졌다고 불평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운동장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물론 새누리당도 선거를 앞두고 '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야권보다 좀 더 왼쪽에서는 '민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서민'이나 '민중'은 그러나, 그에 대립하는 개념이 없는, 정치적으로 오작동하기 딱 좋은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학적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생각해보자. '서민'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중산층'인가? 아니다. '서민과 중산층'은 마치 짜장면과 짬뽕처럼 한 세트로 취급될 뿐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둘 다 모든 정치 세력이 앞장서서 지켜줘야 할 누군가이며, 더 많은 연말정산 환급을 받아야 하고, 온갖 종류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할 시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언어 속에는 '서민과 중산층' 바깥의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서민 정당'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반서민 정당'을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이익'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가 돌아와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 된다. 그러므로 선거를 앞두고는 좋은 말을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서민을 위해, 중산층을 위해.

그 결과 진정한 정치적 갈등은 실종되어 버렸다. 2012년 대선을 돌이켜보자. 여당과 야당의 경제 공약이 거기서 거기였다. 야당의 지지자들은 '어차피 저들은 실천하려는 진정성도 없이 공약을 마구 베꼈다'라고 불평한다. 하지만 애초에 공약을 '베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만약 야당의 공약이 진정으로 올바른 갈등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올바른 혜택을 가져다주며 갈등선 너머에 있는 세력에게 불이익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면, 그런 공약은 절대 도둑질당할 수 없다. 여당이 야당의 경제 공약을 베낀 게 아니라, 야당이 여당의 경제 공약을 대신 써준 셈이다. 어차피 양당 모두 한국 사회의 갈등을 올바로 파악하고 재설정하여 그에 맞춰 정치의 룰을 다시 짜는 대신, 그들에게 익숙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의미한 갈등 위에서 기존의 지지층을 재결집하여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7.

'평민'은 '서민'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서민'은 '민중'처럼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선의 거대한 대변자이면서 수혜자인 반면, '평민'에게는 분명한 외부의 적이 있다. '귀족'이 바로 그것이다. 평민은 귀족과 맞서서, 단결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지켜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서민'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실존적 선택도 강요하지 않는다. 연봉 1억을 받아도,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별별 희한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이 서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스스로를 '평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한 실존적 선택이다. '귀족 마케팅'이 넘실거리고 '없어보이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분명 그렇다.

바로 그렇기에 '평민'은 정치적인 힘을 갖는 단어다. '나는 평민이다, 그렇다면 너도 평민인가?'라고 유의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스스로 평민이 아니라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귀족이겠군, 나는 다른 평민들과 함께 당신 같은 귀족에 맞서겠다'고 말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나뉘는 세상에서, 너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편인지 물어볼 수 있는, 현실과 맞물려 제대로 작동하는 대립적 언어의 쌍을 우리는 지금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저 '귀족'의 범위 안에 우리는 수많은 이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창업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왜 국민들이 납부한 국민연금이 투입되어야 하는가? 그들 같은 귀족을 위해 우리 평민들이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귀족들은 땀흘려 일하는 평민을 내쫓고 권리금을 빼앗으며 임대료를 올려 자영업자들을 고사시킨다. 평민 집안의 자녀들은 날로 복잡해져가는 대입의 문턱에서 좌절하지만, 귀족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녀를 일찌감치 외국에 빼돌려놓은 상태다. 여차하면 평민들이 총알받이 하는 사이 귀족의 아들들은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되어 돌아와 통치할 기세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가르는 갈등의 선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노동귀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IMF 이후 대대적으로 비정규직이 늘어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작은 기득권을 사수하는데 급급하여 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도 늘리지 않고, 비정규직은 아예 내팽개쳤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그 노동귀족들은 경영귀족, 관료귀족들이 평민들의 노동권을 침탈하는 것을 반쯤은 방조와 묵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진보는 '노동귀족'들이 내팽개친 평민들의 손을 잡는 대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런 귀족'과 '저런 귀족' 사이의 선택지만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무직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잘 조직된 대규모 블루칼라 사업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청년들에게, 더 나아가 정치적인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귀족들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지켜줄 단단한 정치 조직이다.


8.

레드 컴플렉스는 통합진보당의 해산, 그리고 김정은의 뚱뚱한 몸매와 함께 정치의 장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우리는 그 동력을 상실한 채 후진국으로 한 걸음씩 후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야당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끝없이 반복하면서 역사의 퇴행을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정작 그 사이, 이제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청년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그것은 단순한 비관이나 풍자가 아니다. 신분제 사회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비명이다. 특권층, 양반, 귀족들이 지배했던 우울한 역사를 벗어나, 가까스로 노력한 만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절망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과 평민이 대립하는 나라다. 회사를 물려받고 건물을 물려받고 학벌과 명성을 물려받는 귀족들이 있고, 자기 손으로 아등바등 벌어도 가까스로 먹고 살까 말까 하는 평민들이 있다.

평민들이 귀족을 이기는 것은 역사의 당위다. 올바른 정치 세력이라면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이기고 싶은 정치 세력이라면 더더욱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귀족보다 훨씬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갈아엎고, '노령화 핵폭탄'을 맞은 인구 구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은 오직 그것 뿐이다. 갈등을 새로 짜라. 이제는 평민들이 힘을 합쳐 귀족과 싸워야 한다.

2015-09-17

[북리뷰] 우리의 노동,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노동여지도
박점규, 알마, 1만6800원.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우리 모두는 사용자 아니면 피용자, 즉 노동자다. 하지만 '노동자'라는 단어는 2015년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빨간색 조끼를 입고 파업을 하는 사람들' 정도의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는 듯하다. 게다가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 화이트칼라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수도권 밖의 넓은 세상을 잘 인지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노동여지도>는 바로 그 좁은 편견을 깨주는 책이다. 주간경향의 독자라면 다들 익숙할 바로 그 연재가 묶여서 책으로 나왔다. 저자 박점규는 1998년부터 민주노총에서 홍보와 투쟁을 담당해왔고, 이후 수많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수원, 울산, 인천, 서울 등 큼지막한 도시들 뿐 아니라, 군산, 구미, 화성, 광양, 동해, 삼척 등의 소도시에도 노동의 현장이 있다. 저자는 "2013년 3월 수원을 출발해 바다 건너 제주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28개 지역을 돌았"(8쪽)다.

그가 바라보는 전국 노동 현장의 모습은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각자의 맥락과 상황이 있을테니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절망과 탄식 속에 제한된 희망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현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대전의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연구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공공연구노조 이광오 사무처장의 말이다. "연구원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이에요. 스펙도 좋고 유학파도 많아요. 지금은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때쯤이면 쫓겨납니다."(171쪽)

<노동여지도>는 뚜렷한 대립각과 입장을 세우는 책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깊은 동지애가 느껴지지만, 대체로 사측에 대해서는 깊게 언급하지 않는다. 제한된 지면에 연재된 원고여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노동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흔히 말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언급할 때만큼은 비판적인 뉘앙스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와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36일간의 파업 이후, 울산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을 외면한 부끄러운 역사를 지나왔다. 현대자동차 정규직노조는 생산현장에 16.9퍼센트의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고, 비정규직과의 노조 통합을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29쪽)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하나의 노동자계급이 일하던 공장은 연봉 9000만원의 A급 직영노동자, 연봉 4500만원의 B급 하청노동자, 초단기 알바로 일하는 C급 촉탁노동자로 나뉘었다."(36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냉정한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따스한 동지애에 기반하여 쓰여진 책이다. 전국의 수많은 사업장, 그 중에서도 중소기업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화합하여 승리를 얻어낸 사례들을 기록할 때, 저자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타다대우상용차의 정규직 선배들이 매년 2천만원이 넘는 성과급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정규직 후배들을 정규직이 되도록 도와준 사례를 읽고 있노라면 독자의 입에도 절로 미소가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례가 그리 흔치만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는 것. 그 당연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세상이 십수년 째 지속되어왔고, 이제는 정리해고를 넘어 일반해고가 포함된 노사정 대타협안이 통과되었다. 다가올 미래가 그리 희망차 보이지 않는 지금,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우리의 노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2015.10.06ㅣ주간경향 114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10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여아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주겠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물론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은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이 표현되는 한 양상이며, 총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인단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여당에서도 야당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좀 더 원론적인 차원으로 논의를 끌어가보자. 과연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은 '정치'의 고유 권한, 말하자면 공천권 같은 게 아니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올바른 정치의 '결과'다.

정치공학적인 고려를 완전히 배제하고 말해보자. 오픈프라이머리가 됐건 국민공천단이 됐건 그것은 모두 원칙적으로 당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애초에 당원들에게만 공천투표권을 준다면 역선택을 우려할 필요도 없고 안심번호 같은 기술적 해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의 의사 결정이 정당정치의 기본 원리에도 잘 부합한다.

그러나 여당 야당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각 계파마다 원하는 결과에 제도를 뜯어 맞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바라볼 때에만 현재의 논란이 제대로 보인다. 정당은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물적, 제도적, 금전적 지원을 하되, 정작 그 후보는 일부 당원을 포함한 '국민'들의 공천투표를 통해 결정된다면,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당비 내는 진성당원 같은 걸 하겠는가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 이것은 서로 정치적 계산이 뻔히 서 있는 상황에서, 말하자면 '명분'을 끌어들이기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지만, 문제는 빌미로 제공된 명분 그 자체다. 다시 원래의 문제 제기로 돌아가보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저 말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1)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누구인가?
2)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정치'란 무엇인가?
3)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돌려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지금처럼 공천권 싸움을 하면서 '국민'을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받을 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으며, 정치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동원되지 않는 한 공천투표권을 행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재벌 총수부터 서울역 앞 노숙인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 아니다. 내년 총선 출마 지망생, 정치적 변화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 정치 고 관심층 등이 포함되는 협의의 개념일 뿐이다.

둘째,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허위다. 왜냐하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공천권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정치에서 아주,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공천권의 배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 내부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정치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각자의 삶을 최선을 다해 꾸려나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공정한 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 대선 결과에 따라 삶의 이해관계가 180도 달라지는 그런 삶을 사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정치권 동향에 민감한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기업 사원이거나, 공무원이거나, 대선 테마주를 매입했거나, 언론사 직원이거나, 여러 사례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전체 인구 비중을 놓고 볼 때 10퍼센트도 채 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90퍼센트의 국민들이 정치권에 원하는 것은 공천권이라던가, 공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따위가 아니라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셋째, 그렇기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거대한 사기극으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권으로 표상되는 '정치권 내부의 정치'와 직접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치권이 뭔가를 '돌려준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돌려주긴 뭘 돌려준단 말인가. 그런 복잡하고 세세한 정치권 내부의 역학관계에서의 이득은 국민이 받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정치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통령을 바꿨더니 나라가 더 좋아진다는 결과, 우리 동네 국회의원을 잘 뽑아서 내가 원하는 정책이 실현된다는 그런 결과만이, 정치가 국민에게 약속할 수 있으며 또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런 약속을 흔히 공약이라고 하며, 그 공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 정치인은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의 정치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공천을 받아서 나오는지 그런 것에 대하여, 국민들 일부의 관심만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 결과, 정작 정치의 결과에 따라 국민 전반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도 못하다. 더욱 큰 문제는 정치인이 자신이 실현하겠다는 결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그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문화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는' 대신, 정치권이 정치 내부의 일을 알아서 잘 해결하면서, 대신 국민들에게 정확한 결과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신 국민들은 정치가 약속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다음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고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적 대의정치의 작동 방식이다.

대한민국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소수의 이해관계자 및 정치 고 관심층을 상대로는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 비슷한 무언가가 시행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 그 자체로부터 유리된 채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세력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 이 모든 파행의 결과는 결국 대한민국 전체가 짊어지게 되는데, 그 고통의 배분조차도 불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대신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치의 결과만을 안져주길 바란다. 그 결과가 마음에 들면 국민들은 해당 정치 세력을 계속 지지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팽개칠 것이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원론이야말로 시간과 역사 속에서 검증된 유일한 정답일 때가 많다. 나는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이 아니라 양당이 경쟁하는 총선에서 내 투표권을 행사하여, 내가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나의 이익을 지키고 싶다. 그 밖의 논의는, 적어도 내게는, 그저 '지들끼리 치고 박는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수많은 국민들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공천권이 아니라, 올바른 후보를 찍어서 발생하게 될 정치의 결과 뿐이다. 그래야 국민도 정치에 올바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이 본질적 내용을 도외시하는 정치 개혁 논의는 모두 공허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북리뷰] 우리에게도 와 있는 그들, 난민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 박진숙, 이후, 1만6500원.


욤비 토나. 1967년 콩고에서 태어나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은 여러 차례 방송으로 소개되었고, 이 책 <내 이름은 욤비> 역시 널리 알려지고 읽힌 편에 속한다. 콩고에서 작은 부족의 왕손으로 태어난 저자는 제2차 콩고 내전과 관련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2002년에 망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최종적으로는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거쳐 2008년부터 난민 자격을 인정받은 상태다.

책에 따르면 "2012년 5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294명,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4515명"(333쪽)이다. 난민 인정률은 13퍼센트 가량으로, 전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이 약 30퍼센트인 것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욤비 토나는 그 13퍼센트의 확률을 이겨내고, 약간 높이는 데 기여한,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욤비 토나가 구술한 내용을 박진숙이 기록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욤비 토나의 궤적을 순서대로 추적하고 있다. 그가 13세에 처음 기숙학교로 떠나던 순간부터, 어떻게 본인이 지망하지 않았던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비밀정보국 요원이 되었는지, 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난민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해 충실한 설명을 제공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부연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욤비 토나라는 한 사람의 삶으로부터 난민 문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준다. 가령 욤비 토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1장의 끝에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따라붙고, 그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발을 내딛는 2장이 마무리되면서 32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 모부투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식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주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짜여진 책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난민도 사람이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난민들은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정치적 난민으로 살았던 홍세화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욤비 토나에게 일말의 동정심과 인류애적 연대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난민협약에서 정의하는 바,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로서 국적국 바깥에 있는 자"들을, 우리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한 가지 더 깊게 생각해볼만한 문제를 안겨준다. 욤비 토나의 자녀들은 대한민국에서 성장했고, 박지성을 '우리나라 축구선수'로 생각하며 유관순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로 인지할만큼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있다. 콩고로 돌아가 콩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저자와 달리, 자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콩고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상태다.

인류애적 당위와 공공선 차원에서 벗어나, 지금 토나 집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 1세대와 2세대의 문화적 갈등을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면, <내 이름은 욤비>가 놓치거나 간과하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오직 아버지의 눈으로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자녀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들과 딸의 시각에서 망명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경험을 논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세대간의 갈등이야말로 이민 문제의 핵심임에도 말이다.

난민에 대한 논의를 동정심 너머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의 고민은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5.09.22ㅣ주간경향 1144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06

[별별시선] '반미'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劒)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배를 타고 가다 물에 칼을 빠뜨린 사람이, 그 자리를 표시한답시고 뱃전에 칼집을 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배가 움직이는데 배에 표시를 해둔다 한들 물에 빠뜨린 칼을 찾을 수 있을 턱이 없다.

2015년 대한민국 진보 진영의 오늘을 묘사하면서 이 고사성어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의 진보, 좀 더 넓게 잡아 범야권은, NL과 PD를 막론하고 넓은 의미에서 ‘반미주의’라는 큰 배에 탑승해 있다. 그들이 눈과 귀를 막고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있지 않은 사이, 반미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는 끝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굉장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과 TV를 통해 주요 외신을 검토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지난 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상원의원 34명을 확보했다. 의회에서 절차를 밟아 지난 7월14일 최종 타결된 이란 핵 협상을 엎어버리려던 공화당의 의도는 실현 불가능하게 됐다.

미국의 중동정책이 큰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은 혈암(shale)에 갇힌 석유를 ‘프래킹’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40년 만에 원유를 수출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말은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밖에 중동 산유국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략적 가치가 급락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칼럼이 지난 2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우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절친,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이 이슬람국가 혹은 다양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해왔음에도 미국은 그 사실을 올바로 지적해오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석유에 중독돼 있었고 중독자들은 마약판매상에게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을 비난하던 바로 그 논리다. 미국은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 때문에, 인권과 평화를 위해 개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중독을 끊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 많은 전쟁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은 군사적 기반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서구의, 특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유 중독에서 갓 벗어난 미국이 왜 중동의 문제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입을, 마치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여겨왔다. 중동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이 발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섬세한 맥락을 고려해 정책을 제시하고 레토릭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면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해답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반미주의자 김기종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를 반대한다며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 공화당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그만큼 미국 국민들이 ‘세계의 경찰’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미국도 바뀌고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반미주의만큼은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하던 방식대로 미국에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미 미국은 거기에 없다. 낡은 반미주의로는 오늘날의 세계가 설명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스스로 변해야 할 때다.


입력 : 2015.09.06 20:52:10 수정 : 2015.09.06 20:56: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9062052105#csidxf9ef60d63661d69b37d4c961e6276a9

2015-08-27

[북리뷰] 함성이 포성으로 바뀔 때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평민사, 2만9천원.


긴 평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물론 유럽 내에 국한된 평화였기는 하지만, 식민지의 고통에 힘입어 유럽은 1870년 보불전쟁 이후 50여년간의 '벨 에포크'를 맞이했다. "1914년 당시 변두리에서 벌어졌던 발칸전쟁을 제외하면 유럽대륙에서는 한 세대 이상 전쟁이 없었"(492쪽)다. 그런데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유럽에는 호전적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오늘날보다 훨씬 짧았음을 상기해보자. 1914년쯤 되면 보불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거의 다 죽었거나, 전쟁 당시 어린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이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물건, 가령 자동차라던가 비행기라던가 전화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유럽인들의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무엇이든' 속에는, 당연하게도 전쟁이 포함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촉발 원인은 이른바 '사라예보의 총성'이지만, 그 암살 사건은 쌓여있는 화약에 불꽃을 튀겼을 뿐이다. 프랑스는 1870년 발발했던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반면 "1870년부터 독일인들은 군대와 전쟁만이 독일의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원천이라는 사상에 세뇌되어 있었다."(79쪽) 유럽 각국은 평화와 안정을 위해 거미줄처럼 동맹을 맺었지만, 오히려 그 수많은 동맹 관계 때문에 전쟁은 점점 커져만 갔고, 사라예보의 총성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8월의 포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 저술가 바바라 터크먼은 1962년 <8>을 출간했다. 그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되짚고, 그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였지만 <8>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애독자 중에는 존 F. 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영국의 맥밀란 수상에게 이 책을 증정하면서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1914년 8월과 같은 함정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6쪽)

그는 역사의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본인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탁월한 저자였다. 1차 세계대전 전체를 조망하는 대신, 개전 이후 30일까지의 상황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슐리펜 장군이 세워놓은 작전 계획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굳이 벨기에를 침공한 후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의 자신감의 충만했지만 전쟁 대비는 형편없었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지만, 마른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고, 1차 세계대전은 길고 지루한 참호전으로 고착되고 만다. "교전국들은 처음 30일 동안 전세를 결정짓는데 실패한 전투로부터 만들어진 덫, 그때도 또 그 이후로도 출구가 없는 그러한 덫에 걸려들었던 것이다."(680쪽)

전쟁 이후 세계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되던 사회주의자들의 형제애 그리고 재정, 상업, 그 이외의 다른 경제적인 요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같은 전쟁 억지력은 막상 때가 되자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가주의가 난폭한 돌풍처럼 일어나면서 그것들을 모두 날려버렸다."(491쪽) 막상 한 번 시작되자 전쟁은 뜻대로 쉽게 풀리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울려퍼졌던 '8월의 포성'은 멈췄다. 그러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함성은 쉽게 잦아들고 있지 않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직 <8>으로부터, 우리 스스로의 역사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2015.09.08ㅣ주간경향 1142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8-14

[북리뷰] 그들의 눈으로 침략을 되짚어본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학고재, 1만5천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대형 빌딩을 뒤덮은 거대한 태극기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그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나라다. 그리고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의 근원적 경험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수렴한다.

임진왜란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좌우하는 가장 근본적인 서사 중 하나다.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전>은 우리가 아는 '그 임진왜란' 이야기의 원형과도 같다. 최종 결정권자인 왕은 무능하고 의심만 많으며 자기 살 궁리나 한다. 역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신하들은 당파싸움에 정신이 팔려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대비를 게을리했다. 그 와중에 고군분투하는 단 한 사람의 장군, 이순신은, 끝까지 이용당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임진왜란 서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도 조선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임진년에 왜가 쳐들어와 난리가 났다는 그 명칭에서 이미 시각의 폭이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란'이었던 그 사건은, 일본인들의 눈으로 볼 때, 전국시대의 막바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의 몰락을 불러온 거대한 패착이었다. 명나라는 만력제가 조선에서의 전쟁에 뛰어드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과 명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서는 누르하치 세력이 힘을 얻고 결국 청나라를 일으킨다. 임진왜란은 국제전이었고, 동아시아의 역사의 큰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교수인 김시덕은 <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그 임진왜란'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다. 본디 고문서학자인 그가 택한 방법은 일본에서 출간된 대중적 출판물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수많은 대중 출판물이 범람하였는데, 그 중 임진왜란은 인기 있는 이야기거리였기 때문이다.

출판문화가 꽃을 피운 에도 시대에는 출판물이 당대인의 세계관·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정신에 자리한 임진왜란관 및 한국·중국관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고문서가 아니라 이들 대중적 문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에도 시대의 베스트셀러 출판물을 주목해 임진왜란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3쪽)

<그들이 본 임진왜란>은 단지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들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소개할 뿐 아니라, 임진왜란의 발발 및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역시 외부인의 눈으로 조망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관점이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지, 명백한 문헌적 증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징비록>의 일본판인 <조선징비록>이 출간되면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의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중요한 건, 그 무엇보다 먼저, 임진왜란이 '우리들만의 역사'가 아님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전쟁을 겪었고 곱씹었다. 그것은 물론 침략자로서의 시각이긴 하지만, 침략자였던 그들이 임진왜란을 이해했던 방식을 조선인들은 훗날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현대 한국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임진왜란은 '해양 세력'인 일본이 '대륙 세력'인 중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 첫 단계로 조선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을 그저 '무능한 왕 - 분열된 조정 - 고독한 장군'의 삼각 구도를 통해서만 이해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역사적 관점을 한 단계 업데이트해보자.


2015.08.25ㅣ주간경향 1140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8-12

'딱 중학생 수준에 맞춰서'라는 표현에 대하여

내가 저널리즘의 세계에 들어와 내딛은 첫걸음은 주간지 기자가 된 것이었다. 그때 선배기자로부터 엄하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문장의 구석구석까지, 과연 중졸짜리도 알 수 있을까 자문하면서 알기 쉬운 문장을 쓰라'는 것이었다. 같은 얘기를 지금의 신입기자들에게 했다면 오해를 초래할 것이다. 당시와 지금은 학력구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시점(1964년)에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해 취직한 사람만을 생각해도 중졸자가 틀림없이 30퍼센트 정도는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인이 되어 있는 사람들 전체의 학력을 생각해보면 당시는 중졸자가 다수파였던 것이다. 지금은 고졸자가, 곧 대졸자가 사회의 다수파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평균적 고졸자가 가진 지식을 공유지식이라 전제하고 글을 쓰려 해도, 과학이나 기술이 관련되는 문제라면 어느 시대의 고졸자를 전제로 해야 하는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다.(202쪽, 강조는 인용자)

다치바나 다카시, 박성관 옮김, 『지식의 단련법』(서울: 청어람미디어, 2009)

한국에서도, 특히 방송계에서 많이 쓰는 표현이다. '딱 중학생 수준에 맞춰서 컨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업계에서 사용되는 은어, 작업 관행, 표준 등이 일본에서 왔음을 전제로 해보면, '중학생에게 눈높이를 맞춰라'라는 표현 역시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그 경우 현재 한국의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아무 비판적 고찰 없이 저 표현을 되뇌이며 '중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 것은, 대중의 지적 수준을 오히려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과거의 중학생 수준이라면, 지금은 대학교 신입생 정도에 비교할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학 신입생 교양 교재로 쓸 수 있을만한 무언가를 만들라'고 해야 올바르지 않을까. 그렇게 눈높이를 설정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물론 시청률이나 구독률 등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