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9

[별별시선]조선왕조 대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과연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은 다 ‘일제 잔재’이며, ‘우리 고유의 것’들은 모두 옳았는가? 역사학자 도면회 교수는 바로 그러한 통념에 도전했다.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를 인용해본다. “예를 들어 기존 연구 성과에서는 식민지 무단통치의 상징적 사례로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실시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심지어는 태형이 갑오개혁기에 폐지되었다가 일제 통치하에서 부활했다고 서술한 개설서나 교과서도 많다.”

‘일제시대’에 대한 이미지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악은 일본에서 왔고, 설령 일제가 ‘우리’에게 뭔가 좋은 것을 선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많은 수탈을 하기 위한 투자였으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은, 망국으로 치닫고 있던 그 시점, 문제가 많은 나라였다. “태형은 갑오개혁기에 폐지되기는커녕 중앙과 지방에서 법적 한도를 넘어 인명 살상에 이를 만큼 남용”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학정에 시달려 왔으므로 국정을 개선하면 한국인의 민심도 쉽게 수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예상은 옳았다. 관군이 무너지고 있을 때 의병이 일어나 전세를 역전시켰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고위 관료, 한때 2만여명에 달했던 한국군은 어찌하여 총 한 방 제대로 쏘지도 못한 채 권력을 빼앗기거나 무장해제를 당했단 말인가? 국가의 멸망을 앞에 두고 어찌하여 양반 유생층 일부만이 의병 투쟁에 나섰을까? 전국적 항쟁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 그 나라는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몰락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조선왕조와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헌법 전문을 펼쳐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나라다. 물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는 고조선부터 대한제국까지의 모든 과거가 포함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민주공화국은 조선왕조가 아니라 그 지배층이 지켜주지 못한 망국의 백성들의 저항에서 시작한 나라인 것이다.

광복을 맞이한 지 벌써 70년이 다 되어서 그런지, 대한민국을 부수고 조선왕조를 건설하려는 이상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하고 사직단을 ‘복원’하겠다는 발상만큼이나, 태릉선수촌을 헐고 태릉과 의릉을 ‘복원’한다는 계획은, 조선왕조가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망한 왕조의 귀신 모시는 자리가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나 그 시민들을 대신해 국제무대에 서기 위해 훈련했던 운동선수들의 피땀 어린 공간을 밀어낼 수 있다는 발상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퇴행적인 문화재 ‘복원’ 시도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가치라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대신 조선왕조 시대에나 통용되었을 법한 사고방식이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 제11조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대적인 8·15 특사가 이루어질 것이며 ‘경제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이 이토록 공허하게 들릴 수가 없다.

“황제의 전제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사면 조칙이 더욱 빈번하게 반포되어 재판기관의 존재를 무색하게 할 정도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그랬다. 대한민국은 망국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듯하다. 경제적 격차는 신분제의 부활처럼 무겁다. 젊은이들은 ‘헬조센’에서 탈출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지옥을 뜻하는 ‘헬’과 조선의 일본식 발음 ‘조센’을 합친 말이다. 해방 70년, 조선왕조를 이겨내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입력 : 2015.08.09 21:26:38 수정 : 2015.08.09 21:28: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092126385&code=990100#csidx647113877f821889e0a27d5af59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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