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3

엠마 왓슨에게 공개 서한을 보낸 고종석 선생님께 보내는 공개 서한


1.


고종석 선생님, 안녕하세요.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 "에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께"를 읽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읽었고, 반면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엠마 왓슨은 읽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죠.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애초부터 그 '편지'는 엠마 왓슨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게 아니니까요.

경향신문에 연재하시는 코너 '고종석의 편지'에 실리는 내용이 실은 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게재된 제목들을 쭉 훑어보면, "IS 전사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그나마 수취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 대사,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이번에 문제가 된 엠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 등은 극동의 변방에서 한국어로 실린 공개 서한에 눈길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국제적 명사들입니다. 하물며 사회주의자 여운형, 익사한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 등을 수신인으로 호명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공개 서한'이라는 민망한 글쓰기 방식을 저도 시도하고 있는 지금, 그 형식에 대해 한 차례 곱씹어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그 글에서 지목하는 상대가 읽기를 바라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정말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연락처를 알아내어 직접 전달해야 할 테니까요. 공개 서한은 누군가를 '명시적 독자'으로 삼아,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을 '실질적 독자'로 만듭니다.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적어도 동참하게끔 유도하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일종의 상소문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오바마'와 '공개 서한'을 함께 검색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뉴욕타임즈>의 광고란을 사서 오바마를 상대로 공개 서한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박근혜'를 함께 검색해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요컨대, 힘 없는 다수의 목소리를 모아서 권력의 꼭데기에 있는 누군가에게 발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대사에게 보내신 '편지'는 그러한 고전적인 양식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한껏 칭찬하다가, 그 모든 개방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여성 사제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교황의 입장을 비판하시죠. 케네디 대사를 향해서는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밀착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우려를 전달하면서, 결국 한국의 독자들에게 현재의 국제 정세를 전달하셨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2.

편지가 시작된 후 다섯 문단에 걸쳐 고종석 선생께서는 엠마 왓슨의 HeForShe 연설과 그 캠페인을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이 '편지'가 진정으로 엠마 왓슨을 향한 것이라면 그 내용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엠마 왓슨 본인이 잘 알고 있을 내용일 테니까 말이죠. 

엠마 왓슨은 "연설에서 페미니즘을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지녀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정의한 뒤, 그것이 남성 혐오와 동일시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사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혐오합니다. 하지만 어떤 페미니스트가 남성을 혐오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튼 연설을 듣고 고종석 선생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여성과 남성은 자유롭게 감성적이 돼야 하고 자유롭게 강인해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대로, HeForShe 캠페인은 모두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엠마 왓슨과 함께 HeForShe 캠페인을 기획한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캠페인이 갖는 근본적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나 고종석 선생님보다야 잘 알고 있었겠죠. 간헐적으로 칼럼을 쓰는 저나 고종석 선생님과 달리, 그들은 직업적으로 장기간에 걸쳐서 여성 인권 뿐 아니라 다양한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요컨대 HeForShe는 세계에서 가장 큰 힘과 든든한 자원을 가진 집단의 페미니즘 기획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려했을법한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평가와 왜곡이, 그것도 엠마 왓슨을 수신인으로 호명한 공개 서한에 빼곡이 담겨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것이 나름 선진국 반열에 속한 대한민국의 언론 지면에 정식으로 실릴 것이라고는 말이죠.

일단 이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당신이 제한된 시간 때문에 그 멋진 연설에서 누락했을 문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칼럼의 후반부는 그 "누락"된 문제들을 지적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그 문제들이 누락된 이유가 과연 '시간 제한' 때문이었을까요? 과연 엠마 왓슨과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캠페인 담당자들이 그저 '시간이 부족'하여, 고종석 선생님도 아실만큼 잘 알려진 젠더 이슈들을 간과한 것일까요?


3.

HeForShe는 2014년 이전까지의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볼 때 굉장히 이상한 캠페인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만, 애초에 공개 서한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만 보라고 쓰는 게 아니니까, 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페미니즘은 크게 세 개의 세대로 구분됩니다. 1세대 페미니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참정권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기본권의 동등한 보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1960년대부터 대략 1980년대 정도까지, 기본적인 정치적 평등을 넘어서는 사회적 균형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표출되었고요. 3세대 페미니즘은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페미니즘 그 자체가 간과할 수밖에 없는 범주들을 발견하고 그 의의를 부각시키면서 페미니즘의 다각화 혹은 발전적 해체로 향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맥락을 놓고 고종석 선생님의 진심어린 충고를 살펴보면, 스스로 인식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으나, 고종석 선생께서는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3세대 페미니즘의 레퍼토리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계셨음이 드러납니다. "당신도 최근에 인정했듯,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과 불평등은 양상이 크게 다"르다거나, "존재는 중층적으로 결정"되며 "그렇게 중층적으로 결정된 존재는 어떤 순간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논변 등은 아주 고전적입니다. 특히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이라는 표현은, '백인 중산층 여성'들을 겨냥하여 수많은 소수 젠더 그룹들이 불만을 드러냈던 맥락을 거의 고스란히 상기시킵니다. 가령 이런 것이지요.

여성 일반을 대변하여 여성들 사이의 자매애와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가부장제를 공격하던 과거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보편 범주로서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면서 많은 비판과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과거의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은 기존 페미니즘 이론의 '사각지대', 즉 인종과 계급, 성 정체성 등을 축으로 하여 다양한 층위로 드러나는 '여성' 내의 차이들을 조명하는 움직임 속에서 다양한 담론들로 나타난다. 이른바 페미니즘의 제3물결이라고도 하는 유색인종 여성의 비평들이 제2물결 페미니즘의 백인 중심적 전제를 비판하고 '여성'이라는 범주에 내재하는 인종적·계급적·문화적·민족적·성 정체성적 차이에 주목한 이래,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추상적 범주보다는 다양한 여성들의 개별 경험과 각각의 삶이 지니는 특수성에 대해 성찰하는 페미니즘'들'로 분화되었다.[1]

이렇게만 놓고 보면 고종석 선생님의 공개 서한은 퍽 그럴듯한 말처럼 보입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3세대 페미니즘의 맥락을 빌려 HeForShe를 2세대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전략은, 그 자체로서는 성립하지만, 문제는 '누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2세대 페미니즘과 3세대 페미니즘이 분화하는 지점에 대해 생각해보시죠. '너는 백인 중산층 여성이므로, 흑인 빈곤층 여성인 나의 경험을 대변할 수 없다'는 문장은, 오직 발화자가 흑인 빈곤층 여성일 때에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흑인 빈곤층 여성'이 무엇으로 바뀌더라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격차에 대해 온전히 경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로서 그 삶을 살아본 한국 여성 뿐입니다.

결국 3세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그 자체를 해체하는 페미니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인용한 책을 조금 더 읽어볼까요. "1980~90년대 페미니즘 이론이 침체기를 맞이하고 '포스트페미니즘'이 거론되면서 페미니즘이 '젠더 연구'로 이행하는 동시에 동성애론이 성장한 것은 '차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2] 차이와 다양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여성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깨어져 나갔습니다.


4.

그것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혹은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온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주의는 보다 더 넓고 다양한 성차를 포함하는 젠더 연구로 이행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은, 적어도 3세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에게는, 꺼림직한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국내에서 '여성학자'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평화학 연구자'로 소개하기도 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펼쳐볼까요.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3]

현재 진보 진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한국인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은,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정체성의 정치'가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페미니즘은 정체성의 정치를 벗어나야 하고, 실제로 정체성의 정치 그 이상의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철학인데, 왜 여성만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4]

그러한 입장은 최근 그분께서 <한겨레>에 기고하신 서평에서도 유지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고 하시면서도, "제가 페미니스트냐고요? 페미니스트는 직업도, 정체성도, 멤버십도 아닙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어쩌면 그냥 지칭(指稱) 명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죠"[5]라고, 아마도 최근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운동에 고무되어 당신께 문의 메일을 보냈을 수많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페미니즘 그 자체를 어떤 강고한 '주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 "교차, 우회로, 가로지르기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횡단의(transversal) 정치"[6]로 여기는 이와 같은 발상은, 고종석 선생님께도 매우 친숙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한국의 페미니즘에 이러한 입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법적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해온 이태영 박사님과 그 후속 세대들의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고종석 선생님께는 정희진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가 매우 친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실 것이라고 봅니다.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엔본부에서 출범식을 가진 HeForShe, 그리고 2015년 트위터를 넘어 국내의 전반적인 여론에서 페미니즘을 주요 의제로 끌어올린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 이 두 가지 운동에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공론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어휘 역시 봉인을 뜯고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활발히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 운동 모두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합니다. 3세대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으로, 광범위한 젠더 연구로 발전적 해체를 거듭해온 맥락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합니다만,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러한 맥락에서 한 발 비켜나 새로운 각도에서 새롭지만 익숙한 페미니즘을 제기합니다. '여성주의'로서의 페미니즘과, 그 페미니즘에 동참하는 외부 세력으로서의 '남성'이라는 범주를 재창출하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지금까지의 맥락을 놓고 볼 때 HeForShe는 굉장히 이상한 프로젝트'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차이, 횡단, 교차, 가로지르기 등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 담론을 지배해온 용어들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젠더 범주들을 호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던 '여성'이 복귀합니다. 

기존의 '차이'가 놓이던 자리에는 대신 '남성'이 들어가고요. 엠마 왓슨을 앞세워 HeForShe를 기획한 이들은, 젠더 연구의 주된 화두였던 다양한 성소수자 뿐 아니라, 암흑의 핵심이요 가부장제의 원흉이며 세상의 악이란 악은 모두 저지르는 테스토스테론의 노예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을 페미니즘의 논의에 암묵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모르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시스젠더'란 스스로 생각하는 성정체성과 육체의 성정체성이 동일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저처럼 스스로 이성애자 남자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성애자 남자들이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이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의 최근 경향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센 국제기구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배우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삼아,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그'를 소환했습니다. 2014년 말에 벌어진 일입니다.


5.

자, 먼 길을 돌아 다시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낸 편지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비판했다시피, 그 편지는 전제부터 잘못 설정되어 있습니다.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이 고종석 선생님보다 페미니즘을 몰라서 '가난을 경험해본 적 없는 백인 여성 영화배우'에게 연설문을 넘겨준 게 아닙니다. 고종석 선생께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맥락을 넘어서, 그간의 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HeForShe는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이지만, 동시에 남성 운동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주어가 He, 즉 남자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저 구호를 접하고 '대체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마치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양, 그리고 남자들을 무슨 백마 탄 왕자인 양 포장해주는 것 같은데, 그게 유엔에서 추진하는 캠페인이라고?

그런 의문을 품었던 것은 저 역시 기존에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유통되어온 페미니즘, 혹은 포스트페미니즘, 아니면 젠더 연구 등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2015년이 되고, 다양한 여성 문제가 터져나올 때, 특히 고종석 선생님같은 남성 지식인들의 대응을 보니, 우리의 남성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편지에서 201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거론합니다. "지난해에 노벨평화상을 탄 파키스탄의 여성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당신보다 일곱 살이 젊지만, 당신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았"다며, 엠마 왓슨의 페미니즘은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역을 맡으며 벼려졌을 것"이지만 "말랄라의 페미니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온 경험의 소산"이라고 일침을 놓으시더군요. 이 대목을 읽고 저는 즉각적으로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남자 지식인들의 버릇이 잘못 들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성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논변이 득세한 탓에, 정작 남자 지식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지식을 달달 외울지언정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엠마 왓슨과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이고, 두 사람 모두 2015년 현재를 대변하는 페미니즘의 아이콘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사례를 들어 엠마 왓슨을 가르치신다고요? 이건 부산 사람이 광주 사람더러 목포 사람보다 너는 덜 차별당한다 운운하며 호남차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꼴입니다.

여성주의는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경험을 이론화하여 형성되었습니다. 물론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선각자가 있긴 하였지만, 그 역시 부인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였고, 심지어 자기 원고가 말이 되는 소리인지 부인에게 원고 검수를 받기라도 했지요. 그런데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원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성들에게 '책을 더 읽어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 상황이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습니다. 부산 사람이 목포 사람에게 호남차별에 대해 가르치다가, '책을 읽어봐라'라고 말하는 상황을 또 한 차례 상상하게 되네요.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겨우니까요.


6.

HeForShe라는 구호에는 인류가 성적으로만 구분된다는 함의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입니다.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에 당신도 동의할 것입니다.

글쎄요. 이런 식이라면 '여성주의'는 세상에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겠죠.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 '모든 폭력 반대주의', '착하게 살자주의'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3세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고종석 선생님의 이런 물타기성 발언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젠더 개념을 다각화하자는 것이지,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자체를 없는 셈 치자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시 호남차별을 예로 들어보죠. 누군가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은 평생토록 따라다니는 차별의 딱지입니다만, 그래도 세상에는 호남 출신 사장의 회사에서 일하는 영남 출신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나열한다 해서 호남차별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그 호남 출신 사장이 영남 출신 직원의 임금을 떼어먹었다 해도 '영남차별'이라는 범주가 새롭게 탄생했다고 우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웬 영남 출신 지식인이 '호남이라는 말은 단지 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 뿐 아니라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민중이다'라고 멋들어진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고종석 선생님, 이제 역지사지가 되십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을 두고 가르치신 '페미니즘'은 역설적이게도 협소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건 젠더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최소한의 요건이 성립되는데, 선생님께서는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알고 보면 남자도 희생자일 수 있고, 흔하다면 흔한 상대주의적 논변을 거쳐서 결국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즘인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실 따름입니다. 물론 어떤 페미니즘은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만, 모든 페미니즘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페미니즘은 해당 사조 전반을 대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고종석 선생님의 페미니즘 강의 그 자체를 지칭하는 여성주의 용어는 존재합니다. 이미 들어보셨겠죠? '맨스플레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이 쓴 에세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 독자적인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7]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맨스플레인이라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남자들처럼, 이것은 단지 남자들이 '지식 자랑'을 더 좋아할 뿐이기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맨'들의 과오라고 지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이죠. 

하지만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 그 자체의 이면에 있는 중요한 성차별적 가정을 지적합니다.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르치려고 드는 남자는, 상대가 자신보다 해당 주제에 대해 무지할 것이라고, 너무도 태연하게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에서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8]


7.

처음 이 편지를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내보겠습니다.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고종석 선생께서 쓰신 편지는 결국 페미니즘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을 받는 상대가 누구냐일 것입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거나 하지 않으시므로, 당신께서 한국어로 한국 신문에 쓰신 글이 엠마 왓슨 본인에게 가 닿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엠마 왓슨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엠마 왓슨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여성'으로서 무언가를 실천하려 하는 젊은이들이 실질적 독자로 상정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거든요. 그저 HeForShe 운동을 소개하고 더 많은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싶다면 굳이 '당신이 열 살이었을 때 벌어졌기에 몰랐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여성 미군 사병이 벌인 잔학행위' 등을 꺼내들 필요가 없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당신의 머릿속에 어떤 페미니즘, 하지만 잘 따지고 보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수렴하는 무언가를 상정한 채, 요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한 말씀 하신 게 아닌가요.

그런 맨스플레인을 화끈하게 풀어내셨으니, 트위터에서 실시간 트랜드에 등극하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맨스플레인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그 개념이 소개되자 다들 갓 말문이 트인 헬렌 켈러처럼 환호했던 여성들이, 고종석 선생님의 '편지'가 갖는 근본적인 속성을 설마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엠마 왓슨을 소환해놓고 여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내가 페미니즘을 한 수 가르쳐주마'라고 하셨으니 반발이 쏟아지는 게 당연합니다.

아, 어쩌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젊으셨던 시절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게 이상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옛날에는 운동권 남자들이 여자 후배에게 접근하면서 '너는 성적으로 해방된 주체니?' 같은 질문을 던져가며 '그러니까 나랑 섹스하자'는 암시를 던지곤 했다는군요. 또, 많은 '운동권 오빠'들이 여후배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쳤다고도 합니다. 운동은 운동대로 하고, 남자가 자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자고, 임신을 해도 혼자 알아서 잘 처리하는 게 페미니즘인 양 가르쳐온 인간 말종 운동권 오빠들의 전설은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21세기의 벽두에도 은은하게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정확히 그런 '운동권 오빠'라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저런 오빠들 조심해라'라고 말하는, 운동권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페미니즘 가르치는 오빠. 하지만 이전과 달리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방향이 뭐가 됐건 '페미니즘 가르쳐주는 남자'를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8.

HeForShe는 남자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합니다. 페미니즘의 개념과 정의 자체를 대단히 단순한 차원에 못박음으로써, 남자들이 '설명'을 할 필요조차 없는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동시에 남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아주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남자들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그 단순한 대의에 동참하고 묵묵히 참여하는 것 말입니다. 굳이 역할을 덧붙이자면 여성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떠드는 다른 남자들을 제어하는 것이겠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맨스플레인 하는 남자 지식인이 물의를 빚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것 역시 다른 남자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고종석 선생님께 공개 서한을 보내야 할 당위가 생깁니다. 맨스플레인을 하는 남자들은 여자들이 뭘 모른다고 전제하고 있기에, 어지간해서는 여자들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저와 비교하자니 머쓱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썼을 때의 상황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숫제 듣지 않으며 그들의 권리를 억압한다면, 다른 남자들이 나서서 말려야지요.

HeForShe가 갖는 실천적 의의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페미니즘 내에서 다양한 의견과 입장이 상호 교차하는 가운데, 가부장적 억압의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남자들 중, 양심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반인 그 남성들이 동질적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나도 아는 사실"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어떤 남자들은 성평등의 문제에서 자신이 속한 젠더 그룹이 아닌 억압받는 집단의 편에 섭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늘어나야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은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지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페미니즘의 주체는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인류입니다. 남성과 LGBT를 포함한 모든 인류입니다. 인종과 계급과 장애 여부를 가로지르는 모든 인류입니다." 앞서 지적된 것처럼,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저 "He"와 "She"의 범주를 아주 넓게 잡으셨죠.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HeForShe 선언을 안 하실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이 칼럼을 읽으면서 가장 의아하게 느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페미니즘을 넘어, 사실상 젠더 이슈도 아닌 무언가로까지 '진정한 페미니즘'을 확장시켜놓으시더니, 정작 본인은 남들 다 하는 그 쉬운 HeForShe 선언조차 안 하셨으니 말입니다. 'He'가 모든 범주의 강자고, 'She'가 모든 범주의 약자라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HeForShe를 안 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슬쩍 하셨나요?

페미니즘이 후기구조주의적 비평과 이론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남자들이 책 한 두 권 읽고 너의 무의식이 어쩌고 욕망이 저쩌고 하면서 개폼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났습니다. 엠마 왓슨더러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고 비난해봐야,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남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가기에, 많은 여성들은 선생님이나 저 같은 한국인 남자보다는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동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성차별의 문제는 다시금 단순명료한 평등의 문제로 재정의되었고, 그렇게 단순화된 페미니즘의 구도 속에서 남자들은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문제는 남자입니다. 남자들이 여성 차별적인 사회를 만들고, 그 구조를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설령 다 못 지킨다 하더라도, 더 많은 남자들이 여성들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여성 뿐 아니라 모든 젠더 그룹이 겪는 폭력과 차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아직 HeForShe를 하지 않았더군요. 이 편지를 쓰는 김에 동참합니다. 고종석 선생님도 조만간 함께하시면 좋겠습니다. 뭐가 옳은 일인지, 이미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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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조원,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테레사 드 로레티스, 이브 세지윅, 주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이희원, 이명호, 윤조원 외,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1), 19쪽.

[2] 같은 책, 20쪽.

[3]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서울: 교양인, 2013), 개정증보판, 초판 2005. 29쪽

[4] 같은 책, 30쪽.

[5] 정희진, "페미니스트", <한겨레>, 2015년 8월 21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5476.html

[6] 같은 곳.

[7]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5쪽.

[8] 같은 책, 20쪽. 강조는 인용자. 맨스플레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트위터 사용자 미원(@umami_er)님의 트윗에서 도움을 받았다.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0075939135488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1786506366976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3730725666816 참고.

댓글 5개:

  1. 웹툰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읽는 내내 끝나는 게 너무 아쉬웠던 글이었습니다. 갑만에 눈 아니 뇌호강하고 갑니다. 늘 귀하고 값진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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