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2

[별별시선]국민은 선진국, 대통령은 후진국

요즘 반성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간파한 바와 같이 이 나라는 초중앙집중적 1극 사회이며 그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러므로 ‘에이,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나라가 회까닥 뒤집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그러한 퇴행적 변화를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개인적 숙원 사업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에, 교육부 관료들은 알아서 기는 쪽을 택한다. 문제는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로 시행되고 있는 이 사업이, 해방 후 70년간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염원해온 공통의 의지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념과 진영을 막론하고, 시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모든 한국인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대립 구도를 검토해보자. 이것은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쪽에 방점을 찍을지를 놓고 벌어지는 입장 대립이다. 발전된 산업국가를 만드는 것이 먼저인지, 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를 만드는 게 먼저인지가 논점일 뿐이지, 양자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선진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선진국을 만들자. 해방 후 70년, 대한민국이 품어온 가장 근본적인 목적의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선진국인가?’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갈라졌다. ‘어떻게 선진국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의사결정과 집행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가치를 잠시 접어두자는 것이 산업화 세력의 논리인 것이다. 반대로 민주화 세력은 민주적인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이 나라가 더 이상 선진화의 길을 걷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대통령만은 다르다. 그는 ‘내 아버지가 독재자라고 욕을 먹는다면, 굳이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해방 이전, 개항 이후부터 한반도를 지배해온 선진화 아젠다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건 이 나라는 과거에 비해 더 나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직 박근혜만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높일 수 있다면 이 나라가 다시 후진국이 되어도 좋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40% 선에서 오가고 있음에도, 이것이 박근혜 한 사람의 문제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야권에서 갈등의 축을 ‘친일 독재 미화 반대’로 잡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착시 현상이다. 산업화 대 민주화의 대립을 고스란히 반복하면, 당연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력의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국정화에 찬성하지 않지만 야권의 정치적 레토릭에 동의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가 제기하는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이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온 나라의 수준이 후진국으로 떨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한, 방글라데시, 수단, 터키 등 소위 후진국으로 여겨지는 국가들만이 선택하고 있는 그 길을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가 없다.

국민은 선진국을 지향하는데, 대통령은 후진국으로 역주행한다. 박근혜는 해방 후 70년을 관통하는 선진국 건설의 의지와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정작 박정희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면서도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인물임에도 말이다. 조국 선진화의 길은 여기서 끝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부디 아버지의 명예를 올바른 방법으로 지켜주기 바란다.


입력 : 2015.11.02 20:48:40 수정 : 2015.11.02 21:09: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022048405&code=990100#csidxbccd7df7e5526db84dad4d43c11ae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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