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1

[별별시선]선비질을 위한 변명

오늘날 ‘선비’라는 말은 일종의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주로 인터넷 사용이 많은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용례가 확립되었다. 그냥 ‘선비’만 쓰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단어 앞에 쌍시옷으로 시작하며 성행위를 의미하는 욕설형 접두사가 붙거나, ‘용두질’ ‘요분질’처럼 비하의 뜻을 담는 접미사 ‘-질’이 붙는다. 그리하여 ‘선비질’이다.

‘선비질’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웃자고 하는 소리’에 정색하는 것이다. 인터넷 혹은 SNS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김치녀’, ‘오크녀’, ‘성괴(성형괴물)’ 등의 비하 발언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보자. 어렵지 않게 ‘선비질 하지 마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 호남 비하 발언, 외국인 노동자 혐오 발언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하는 순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뉘에 뉘에 선비님 잘 알겠습니다아’라고 비아냥거리며 그러한 지적을 ‘선비질’로 몰아가는 것이다.

한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여성도 아니고, 호남 사람도 아닌 한국인들에게 저러한 경향성은 그저 남의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국가정보원이 일베를 거점으로 삼아 2012년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저 혐오발언들이 야권 혹은 진보진영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를 타깃으로 삼는, 자신들의 문제를 지적하면 되레 ‘선비질’을 운운하는, 그 잘못된 ‘하위문화’가 뿌리를 내렸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새삼스럽게 생겨났다기보다는, 사회의 면면에 흐르던 차별이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문제는 2016년 현재,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선비질’로 전락해버린 이 세상에서 말이다.

현실은 매우 비관적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펼쳐보자.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 인간과 사회라는 보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기존의 진리와 이 기존의 진리 위에 성립된 행위 전체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빌려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지식인은 존재 자체가 형해화되어가는 중이다.

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지식인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인터넷 때문이다, 일베를 필두로 하는 반지성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탓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게으른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크고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다시 한 번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지식인을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라고 해보자. 보편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보편적 인간’의 범주에서 추방당하고 그 존재와 권리를 부정당하는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특수성으로 ‘내몰리는’ 집단은 여성, 호남, 외국인처럼, 일베가 ‘웃자고 하는 소리’의 타깃으로 삼는 이들과 정확히 포개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진짜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한국의 지식인들은 ‘지식인’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자신이 속하지도 않은 정당을 옹호하기 위해 호남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면, 과연 그는 지식인인가? SNS에서 확산되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을 비웃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을 들먹인다면, 그는 여성을 ‘보편적 인간’으로부터 추방하는 일베와 어떤 면에서 궤를 함께하는 것이 아닌가?

지식인이 어떤 정당이나 정파의 편을 화끈하게 들어주고 지지를 받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식인의 본령은 ‘논객질’이 아니라 ‘선비질’이다. 중년의 논객들이 도덕과 윤리를 내버리고 ‘논객질’을 일삼는 사이, 일베에 모인 청년들은 온갖 혐오를 현실 속에서 ‘인증’하기 시작했다.


입력 : 2016.02.21 20:31:39 수정 : 2016.02.21 20:37: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12031395&code=990100#csidx3edc1470c435ce3b14271e69cdef448

덧붙임: 이 칼럼은 트위터에서 온갖 호남 멸시 발언을 일삼던 진중권과, 여성혐오적 표현을 구사하며 페미니스트들을 조롱하던 고종석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내가 트위터에 올린 어떤 트윗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유머에서 나를 비난하는 경향이 눈에 띄었다. 이 칼럼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선비질'에 대해 전혀 비판적이지 않고, 도리어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임을 밝혀둔다. 해당 커뮤니티의 유저들은 어설프게 '갓끈 풀지' 말고 체통을 지키기 바란다.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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