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9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정보수사기관을 만든다."

정보부법은 헌법보다 세다

5월 18일 김종필이 서정순(행정개혁위원장 지냄), 이영근(7, 9, 10대 의원), 김병학(중정 국장 지냄) 세 중령을 불렀다. 모두 8기였고 정보계통 출신이었다.
JP와 서정순은 6·25 직전 육군정보국에서 함께 박정희 문관을 모셨다. 이영근도 같은 인연이었다. 그는 특히 CIC(방첩대)로 가서도 정보를 다루었다. 김병학은 HID(첩보부대) 출신이었다.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정보수사기관을 만든다. 셋이서 법을 만들어라.”
정보만 다루는 것이 아니고 수사권, 즉 사람을 잡아 가둘 수 있는 힘을 가지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원형(原型)은 이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는 박정희-JP가 합의한 구상이었다.
서, 이, 김 세 중령은 이화여고 앞 정동호텔에 방을 잡아 자료를 모으고 머리를 쥐어짰다. 윤일균(70년대 후반 중정 차장보 차장 지냄)의 기억에 의하면 이 법을 만드는 데 자신이 56년도에 작성한 논문 <국가정보와 중앙통제>가 참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중 법을 공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무지 법을 조문화하여 만들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JP에게 부탁해 박 장군의 법무참모였던 신직수(7대 정보부장)를 불러왔다.” (이영근 증언)
JP는 역시 용의주도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서-이 팀도 모르게 10기생 문무상(미국이민)에게 또 다른 정보부법 시안을 하청해 놓고 있었다. 나중에 문의 시안은 버려졌다.
JP는 “6월이 오기 전에 정보부법을 만들어야 한다, 정보부가 서야 혁명 과업을 시작한다”며 독촉했다. 서-이 팀은 5월 말 신직수가 다듬은 시안을 중심으로 JP에게 브리핑했다.
6월10일 중앙정보부법이 공포되었다.
실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만든 것이었지만 그 후의 이 나라 역사에 헌법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이었다.
5·16 쿠데타 주체들이 최초로 낸 법은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군인들이 3권을 장악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었다. 한강다리를 건넌 지 20일만인 6월6일 공포했다. 군정이 문서화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6월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중앙정보부법을 공포했으니까 정보부법의 중요성은 자명해진다. 이 6월10일은 지금도 국정원 설립기념일로 기려지고 있다.
최고회의법엔 이렇게 씌여졌다.
‘중앙정보부=공산세력의 간접침략과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최고회의에 정보부를 둔다.’(18조)

김충식 지음, 『남산의 부장들』(서울: 폴리티쿠스, 2012), 개정증보판. 6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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