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3

[북리뷰] 정치의 계절, 지식인의 역할을 묻는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이학사, 8천원


내가 그에게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식인이라니, 그런 구닥다리같은 용어를 사용하냐'며 되려 핀잔을 했다. 나는 그 대화를 나눈 후 문득 궁금해졌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진정 오늘날 효용을 다한 것일까. 20세기의 중후반부, 21세기의 초반부와 달리, 2010년대에는 그 단어가 그저 오작동할 뿐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르트르 뿐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사르트르가 일본의 도쿄와 교토에서 1965년 9월과 10월에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정리하여 묶은 책이다. 물론 사르트르 특유의 실존주의적, 다시 말해 휴머니즘적 관점을 투영하여 재해석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들이 제시되어 있긴 하지만, 애초부터 강연을 염두에 둔 원고였던 탓에 집중해서 읽으면 전제 지식이 없어도 어렵잖게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

첫째 날 하이데거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식인에 대해 사람들이 쏟아붓는 불만과 비판을 종합하여, 사르트르는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12쪽)이라는 가설적 정의를 끌어낸다. 가령 드레퓌스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레퓌스라는 한 군인과 군 참모부의 갈등이다.

그러나 자칭 타칭 지식인들은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 그 중 군인은 없었다. 소설을 잘 쓰는 사람, 시를 잘 짓는 사람,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과학자 등이 '참견'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얻은 명망을 바탕으로, 그러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분야의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개입하는 사람들이다.

강연은 다음날로 이어진다. "지식인의 기능"에서 사르트르는 어떻게 특정 분야의 지식만을 쌓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선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도전한다. 만약 그 지식인이 '기능적 지식인'의 위치에 머무르려고만 한다면 그는 부르주아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일 뿐 진정 보편적인 지식인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영역 속에서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입니다."(64쪽)

사르트르는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으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이러한 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보편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지 않더라도, 보편성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그의 말은 여전한 울림을 지닌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호남 사람, 이주민 등 다양한 이름 하에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해석'은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의 존재를 놓고 볼 때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사르트르는 오직 글을 쓸 뿐인 작가를 다른 분야의 지식인과 다르게 여긴다. 작가의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보편성을 창조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작가와 갖는 진정한 관계는 비-지식으로 남는 것"(139쪽)이라는 말은, 작가의 작품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식인에게 그 어떤 '보편성'도 기대하지 않는다. 화끈하게 '정치적 스탠스'를 밝히고 편을 드는 것이 더욱 정당하다는 인식 탓이다. 한때는 그게 옳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인은 '보편성'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의 편에 서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한 풍토가 되살아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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