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1

[별별시선]이념대로 찍으려니…

나는 진보 정당의 고집불통 지지자였다. 진보 정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총선에서 자신이 속한 지역구에 진보 정당의 후보가 없으면 민주당 계열에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대선은 중요한 무대니까 잠시 내 정치적 의지를 접어두고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 역시 흔한 패턴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 내가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 정당, 후보에게만 표를 주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백지 투표를 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는 그러한 신념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새삼 ‘전략적 유연성’을 추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진보 정당들이 보여주는 ‘이념’ 중 그 무엇에도 전적인 동의를 표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순서에 따라 기호 4번 정의당부터 짚어보자. 지난 7일, 경찰은 네덜란드와의 국제 공조수사를 통해 ‘소라넷’의 핵심 해외 서버를 폐쇄했다고 발표했다. 소라넷은 몰래카메라, 도촬, 사적인 모습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공개하는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가 올라오는 성인 사이트다. 속칭 ‘골뱅이’라는, 심신상실 상태에 빠진 여성에 대한 강간 모의와 실행 ‘인증’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랑 사귈 때에 너는 저런 체위 한 적 없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내 꼬추가 더 크다”고, 정의당과 총선 홍보 영상 및 공식 테마송 협약을 맺은 ‘중식이 밴드’는 노래했다. ‘야동을 보다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노래는, 위에서 우리가 말한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를 보던 남자가 자신의 옛 여자친구를 발견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내용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의당은 여성위원회를 앞세워 사과의 말을 전했으나 어떤 후속 조치도 없다. 공개된 당원게시판에서 당원들이 목청 높여 반여성주의적, 심지어 성폭력에 가까운 언사를 내뱉는데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고 있다. 정의당의 공식 홍보 밴드는 ‘소라넷 보는 남자’의 입장에서 쓰인 노래를 부른다. 소라넷에 대한, 여성 인권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무엇인가?

투표용지를 한참 훑어내려가면 기호 14번 노동당이 나온다.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여성 인권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마포을 선거구에 출마한 하윤정 후보의 경우 대단히 적극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선거구는 마포을이 아니다. 정당으로서의 노동당을 평가하기 위해 선거 공보물을 펼쳐든다. 한숨이 나온다.

노동당은 “재벌증세 기본소득”을 핵심 구호로 내세우고 있다. 증세는 복지 확대를 위해 필수적이므로 원론적으로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본질적으로 ‘작은 정부 옹호론’이다. 진보 진영에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절대악으로 상정하던 ‘신자유주의’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국가 기구를 축소하고 보다 효율적인 시장을 통해 복지를 실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판을 하면 기존의 복지는 그대로 두고 재벌에만 세금을 거둬서 나눠주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재벌증세 기본소득’이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5000만 국민에게 월 3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연간 180조원이 필요하다. 2015년에 정부가 고용, 보건, 복지에 지급한 총예산이 115조7000억원이다. 나는 노동당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이런 공약을 내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기호 15번 녹색당도 마찬가지다. 녹색당은 ‘탈핵’과 ‘탈성장’을 정책의 근간으로 삼는다. 원론 차원에서 재생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탈성장’이다. 안타깝게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다. 녹색당은 실업률을 끌어내리고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20대 총선의 풍경이다. 진보 정당들이 여성 인권 문제를 회피하고, 구체성 없는 ‘대안’을 주워섬기며, 대중적 분위기만 좇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의 문제를 올바로 파악, 구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진보 정치 운동을 희망한다.


입력 : 2016.04.10 20:52:00 수정 : 2016.04.11 10:21: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102052005&code=990100#csidxebeb33135be7959895cfac39f001e60


덧붙임: 2016년 7월 현재, 여성혐오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한층 더 우스꽝스러워지고 있다. 메갈리아4 소송 지원을 위한 후원 티셔츠를 구입했던 김자연 성우가 그 사실을 인증하였고, 넥슨은 다음날 김자연 성우가 녹음한 캐릭터 음성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넥슨측에서는 '계약금을 모두 지불했다'며 정당성이 있다는 듯 항변했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프리랜서가 생산물을 제공할 때에는, 그 창작물이 계약 기간동안 사용된다는 것 역시 계약의 일부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부당한 계약해지이며, 진보 정당으로서의 정의당은 당연히 김자연 성우의 편을 드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에서 그렇게 온당한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한 다음 벌어졌다. 중식이밴드가 뭐가 문제냐고 난리를 치던 바로 그 정의당의 여성혐오적 남자 당원들이, 우르르 몰려가 온라인 몰매를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노회찬 원내대표는 그 성명을 공식적으로 철회시켰고, 오늘 심상정 대표는 "당의 하부단위에서 부적절한 논평이 나가고, 또 논평으로 야기된 당 안팎의 파장에 대해 중앙당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질책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올렸다. 결국 여성혐오적 당내 목소리에 그 당을 대표하는 두 거물이 굴복했거나, 애초부터 적극적으로 여성혐오와 맞설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칼럼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나는 '이념적'으로 현재의 진보 정당들과 함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본질적으로, '당 내의 옳지 못한 집단적 항의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적어도 정의당과는 함께할 수 없음을 밝혀둔다. 내부의 여성혐오에 굴북하는 정당이 무슨 국가적 악과 부조리에 저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칼럼들을 갈무리하는 도중에 적어둔다.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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