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3

[북리뷰] 엠마 보바리는 왜 죽어야 했는가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민음사, 1만1천원.


보바리 부인은 자살한다. 요즘은 이런 고전의 결론을 말하는 것도 '스포일러'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루오 영감의 딸 엠마는 많은 책을 읽고,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 푹 빠진 예쁘고 똑똑한 처녀다. 의사인 샤를르 보바리에게 시집을 가 보바리 부인이 되고, 애정 없는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껴 불륜을 저지르다가,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생긴 빚을 갚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의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세상에 공개된 후 지금까지 '여성의 낭만적 환상, 현실에 대한 불만족, 사치, 방탕, 불륜' 등을 꼬집는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책의 말미에 붙은 번역자의 해제를 읽어도 그런 논조로 써 있다. 심지어 '보바리즘'이라는 신조어가 당대에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더러 쓰인다고 한다. 그런 정보까지 알고 나면 독자들은 플로베르가 얼마나 섬세하게 '사실주의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묘사해냈는지에 대해, 남들의 평가를 참고하여, 호들갑스러운 찬사를 내뱉고 책장을 덮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엠마 보바리는 왜 죽어야 했을까? 단지 '보다 나은 삶', '여기에 없는 그 무언가'를 꿈꾸었다는 이유로?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초라함, 혹은 평범함을 참지 못해, 자신을 꾸미고 연인을 치장하기 위한 온갖 사치품을 구입하며 진 빚 때문에?

<마담 보바리>를 직접 읽기 전까지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2016년 오늘날에 와서야 이 책을 읽어보니 알겠다. 엠마 보바리는 달콤한 환상 때문이 아니라, 그 환상을 스스로 이루는 것을 꿈도 꿀 수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132쪽)

프루스트가 '사실주의적'으로 고스란히 반복하는 당대의 편견어린 서술을 젖혀두고 엠마 보바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자. 엠마는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의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시골 마을 오종의 약제사 오메 역시 마찬가지이다. 엠마가 소설의 세계를 꿈꾼다면 오메는 신문 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삶을 지향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엠마는 파국에 이르는 반면, 오메는 그 모든 위기와 추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 한 여자가 파멸하는 이야기인데, 소설은 한 남자가 "이제 막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503쪽)는 장면에서 끝난다. 모든 환상, 헛된 욕망, 탐욕과 거짓말과 교활함이 아닌, 오직 엠마의 그것들만이 단죄당한 것이다.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인생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55쪽) 그렇다. 엠마는 알고 싶었다. 엠마는 경험하고 싶었고, 자신의 살고 있는 인생이 자신이 알고 있는 멋진 삶의 모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혹은 부합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기회와 가능성이 너무도 제한되어 있었기에, 마치 발사에 실패한 로켓처럼 허공에서 폭발해버렸을 따름이다.

남자가 이런 생각을 품으면 세상은 그것을 야망이라고 부른다. 여자가 이런 생각을 품으면 세상은 그것을 '보바리즘'이라고 부른다. '세상'과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서 <마담 보바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2016.07.05ㅣ주간경향 1183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6-09

[북리뷰] 페미니즘, 남자의 역할을 묻는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또 하나의 문화, 9000원


추모의 포스트잇이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고, 공포와 분노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여성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그러자 불과 1, 2년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을 외치는 새로운 목소리에 시큰둥하던 이들의 태도가 변하고 있다. 특히 남자 지식인들의 입장 변화가 눈에 띈다. 성정치의 이론적 복잡성에 기대어, 혹은 '보다 큰 대의'를 위하여, 여성주의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한없이 보류하던 이들이 한 마디씩 말을 보태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한국의 지성계는 페미니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혹은, '그 페미니즘'과 '착한 페미니즘'을 가르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9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은 그저 약간 움텄을 뿐인데, 남자들은 호들갑을 떨며 '부잣집 딸내미들을 위한 운동을 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손사레를 치고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남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공론장을 과점하는 남자 지식인들과는 기꺼이 다른 입장을 택했던 사람이 있다. 권혁범의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글들은 여성주의자에게는 너무도 단순하고 당연한 글"이라고 겸양의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2007년에 나온 이 책은 당시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던 남성주의적 합의에 대해, 그들 중 일부인 한 남자가 반기를 들었던 기록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도 왜 한국의 남성-진보들은 틈만 나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선동하고 있을까? 혹 그들은 '부르주아'가 싫어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를 마음껏 위반하고 유린하는 똑똑하고 '잘난' 여성 지식인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괜히 양념으로 '가부장 좌파'에 대한 비판을 끼워넣은 게 아닐까? 그들의 페미니즘 비판에는 똑똑한 여성에 대한 근본적 혐오감이 깊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178쪽)

여성이 '잘난' 모습을 보이면, 피해자가 되어 엉엉 울지 않으면, 상당수의 남성 지식인들은 지지하지도 연대하지도 않는다. 권혁범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똑똑하고' '잘난' 여성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부당하게 묘사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2001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아줌마'에 대한 그의 단상을 살펴보자. 장진구와 이혼을 택한 주인공에 대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는 "여전히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심혜진 씨가 분한 역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유포되어 있는 여성 지식인에 대한 전형적 편견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똑한 고학력 여성은 예민하고 잘난 체하고 히스테릭하고 이기적이며 철모르고 자라난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통념 말이다."(59쪽)

이 책이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의 심리를 한 남자가 거침없이 폭로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편견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지적인 수준이 높은 여성은 부담스럽고 또한 쉽게 지배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60쪽) 그렇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혹은 자신이 차별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당의(糖衣)라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에 대해 남자는, 특히 지식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빨리 여성주의를 '공부'해서 다른 남자들을 가르쳐야 하나? 그도 그렇지만,  '그 페미니즘'과 '저 페미니즘'을 구분하고 손가락질해왔던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는 그런 면에서 좋은 귀감이 되는 책이다.


2016.06.21ㅣ주간경향 118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6-05

[별별시선]‘서프라제트’에서 배운다

20세기 초 영국. 그나마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자유당이 여당이었고, 자유당의 가장 큰 맞상대는 보수당이었다. 노동당과 아일랜드 자치파 등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와 비슷한 사회적 신분 및 교양 수준을 가진 이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자유당을 지지했다. 수많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처럼 말이다.

자유당은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여성들의 권리를 한없이 유보시켰다. 그럼에도 자유당은 자신들이 ‘차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냐며 비난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른바 ‘잠재적 아군’들의 논리다. 너희들이 지금 뭘 요구하는지 모르지 않지만, 당장 그것보다 시급한 일이 산적해 있다. 그러니 일단 너희들의 요구사항을 접어두고 ‘대의’에 복무하라. 우리 ‘잠재적 아군’들을 적으로 돌리지 말고 ‘조곤조곤’, ‘사근사근’하게 설득하는 태도를 보여라.

이런 주장에 혹하는 사람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여성 자유당원이나 합법적 참정권론자들 역시 이런 현명한 체하는 논의를 펼쳤다. 그들은 정당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충고했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는 콧방귀를 뀌며 자유당을 상대로 한 낙선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진지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자유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후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한반도 역사상 단 한 번도 여성들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사회적 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인터넷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리면서 상스러운 여성혐오적 표현이 전국을 누볐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 약물에 정신을 잃고 나체가 된 사진, 원치 않게 촬영된 성관계 장면 등을 남자들은 돌려보고 시시덕거리며 자기들끼리 품평회를 즐겨왔다.

이 도저한 차별과 폭력과 혐오와 멸시의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몇몇 용감한 여성들이 바로 그 공격적인 언어를 되돌려주는, 이른바 ‘미러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김치녀’라고 10년 넘게 멸시당해오던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마세요’라고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남자들을 향해 ‘김치남’이라고 맞받아친다. 놀랍게도, 그러자 비로소 남자들이 ‘온라인 언어폭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기들도 맞아보고 이제서야 아프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나는 이 시위를 지휘할 것이고, 돌멩이야말로 내가 사용하려는 논쟁 방식입니다. 돌멩이야말로 가장 쉽고 직접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서프라제트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면서 여성 투표권을 외쳤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의 투표권은 바로 그렇게 쟁취된 것이다.

‘미러링’이 불편한가? ‘증오의 총량’이 늘어날까 우려되는가? 20세기 초의 서프라제트와 달리, 21세기 초 대한민국에서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리창 하나도 깬 적 없다. 한없이 온건하게 포스트잇을 붙이고, 슬픔을 나누고, 지금까지 너무도 속 편하게 기득권으로 살아온 ‘한국 남자’들의 행태를 거울에 비춘 듯 되돌려 보여줬을 뿐이다. 혹자는 여성혐오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이 ‘남녀 대결 구도’로 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니다. ‘남녀 대결 구도’가 맞다. 그리고 여자들이 이겨야 옳다. 여성혐오와 맞서는 여성들을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전적으로 지지한다.


입력 : 2016.06.05 20:35:01 수정 : 2016.06.05 20:38: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52035015&code=990100&s_code=ao122#csidx61e949ec133181684245e6a55eeafc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