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28

토니 주트의 글쓰기 방법론

언제나 자신의 어휘를 섬세하게, 내면의 음조에 맞춰 장인처럼 조율했던,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는 글쓰기의 체계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고, 이 책에 실린 에세이는 모두 같은 방법론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심지어 2008년부터 2010년 사이, 그가 병에 걸리고 전신마비에 시달리던 무렵[1] 쓴 글들 역시 그러하다. 첫째, 그는 한 주제에 대해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고, 노란색 유선 리걸패드에 손으로 노트를 작성했다. 그리고 개요로 넘어가 색깔별로 A, B, C, D를 분류하고, A1i, A1ii, A2iii 등으로 이어지는 하위 분류를 (더 많은 리걸패드에) 작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식당 테이블에 수도사처럼 몇 시간씩 앉아 노트의 모든 문장들, 모든 사실들, 날짜, 요점, 개념 등이 개요 속에 배치되도록 정렬했다. 다음, 가장 중요하고 충격적인 단계에서 그는 자신의 원래 노트를 전부 개요의 순서에 맞게 옮겨적었다. 에세이를 쓰기 위해 앉을 때쯤이면 그는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들 중 대부분을 베끼고, 또 베끼고, 외워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문을 걸어잠근 후 (마마이트 샌드위치와 진한 에스프레소를 곁들인 짧은 휴식을 제외하면)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고쳐쓰고 또 고쳐썼다. 끝으로 "광내기"를 했다.

병에 걸렸을 때에도 이 과정은 바뀌지 않았고 다만 힘들어졌을 뿐이다. 누군가가 손을 보태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자료들을 수합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타자를 쳐야 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면서 그는 가장 사적인 일이라 할 수 있는 생각하기와 글쓰기를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재교육해야 했는데, 이는 그의 특출난 지성의 유연성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조수와 함께 작업했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보통 밤에 그의 머릿속에서 기억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렇게 작성, 분류, 색인, 재서술된 그의 정신적 노트는 아침에 A, B, C, D의 개요 순서에 따라 나, 우리의 아이들, 간호사, 그의 조수의 손을 통해 타자로 옮겨졌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그의 정신 세계의 지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논리, 인내력, 밀도 높은 집중과 주의 깊은 논변의 구축, 사실 및 세부사항에 대한 군인같은 경계심, 대부분의 작가와 달리 최초의 구상안에서 빗겨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확신 등. 어려움은 "지상 위의 사실"이 아닌 "내면의 사실", 그의 내면에 배치된 가구마냥 그저 거기 있을 뿐인 것, 자기 자신도 완전히 보거나 알지 못하는 내면의 무언가와 부딪칠 때 발생했다. 그중 가장 명백한 난제는 그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 Jennifer Homans[2]의 서문. Tony Judt, When the Fact Changes(New York: Penguin Press, 2015)

[1] 토니 주트는 2008년 루게릭병이 발병하여 투병하다가 사망하였다. 루게릭병에 걸리면 몸의 근육이 마비된다.
[2] 토니 주트의 부인. 1993년 결혼하여 2010년 토니 주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참고: 같은 역사학자지만 E. H. 카의 글쓰기 방법론은 완전히 다르다.

2016-07-20

[북리뷰]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미래의 아랍인 1, 2
리아드 사투프, 휴머니스트, 각권 1만5천원.


프랑스의 만화가이자 영화감독인 리아드 사투프의 어머니는 아랍에 대해, 좀 더 정확히는 아랍에서 온 한 남자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클레망틴 사투프는 시리아에서 온 압델 라작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미래의 아랍인>의 주인공인 리아드, 즉 작가 본인이기 때문이다.

197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리아드는, 아버지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가 다스리던 리비아로 향했다. 1980년, 어머니까지 포함해 온 가족이 이주한 것이다. 리아드의 아버지는 서구에서 교육을 받은 범아랍주의자였고, "교육을 통해 아랍이 그 종교적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빠의 생각이었다."(1권, 11쪽) 카다피가 바로 그 선봉에 선 인물이었으므로 시리아 출신이지만 리비아를 택해 아랍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미래'는 없었다. 카다피는 국민들에게 주택의 소유를 금지했고, 모든 사람은 문이 열려 있다면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 살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리아드의 가족은 처음 할당받은 집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카다피는 온 국민이 서로 직업을 바꾸어야 한다고 공표했는데, 그 무렵 리아드의 아버지는 리비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단, 프랑스에서 교수직을 알아보는 대신, 시리아로 향했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아랍에 돌아와 뭔가 '큰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낙후한 제3세계의 현실 속에서 리아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아간다. 산책을 하다가 발견한 염소에게 돌을 던지며 즐거워하고, 리아드의 동생이 딸이면 좋겠다는 어머니를 윽박지른다.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 가면 리아드의 어머니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남자들이 먹고 남긴 음식을 먹어야 한다.

시리아에서 아이들은 동네에서 강아지와 '함께' 축구를 하지 않는다. 대신 강아지를 걷어차면서 논다. 급기야 좀 더 자란 아이가 그 개를 삼지창으로 찔러 들고 깃발처럼 흔드는 모습을 보며 리아드의 어머니는 아들과 프랑스로 향하지만, 그들은 다시 시리아로 돌아간다. "리아드, 미래의 아랍인! 이제 학교로 가는 거야!" 아버지의 이 대사와 함께, 당혹해하는 리아드가 비행기를 타러 가는 모습으로 1권이 끝난다.

2권의 내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어진다. 리아드의 눈으로 바라본 1980년대 아랍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아랍인>은 총 3권으로 예정되어 있다. 현재 2권까지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 모른다. 리아드의 어머니는 언제, 무슨 계기로 아버지와 갈라서게 될까. 리아드가 프랑스로 돌아온 후 적응하는 과정이 어떻게 묘사될까. 리아드의 아버지는 과연 시리아에서 본인이 원하던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통용되던 '정치적 올바름'에 익숙한 '진보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본인이 아랍에서 보고 듣고 겪은 종교에 의한 차별과 세속적 욕망에 의한 폭력을 모두 '까발리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리아드가 유년기를 보낸 아랍의 모습에 우리의 독재 정권 시절이 얼핏 겹쳐지기도 한다.

서구는 무조건 나쁘고 피식민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어쨌건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내 유년기의 체험담'이라는 형식 앞에서 힘을 잃는다. 저자는 마치 열두살 소년처럼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내가 저곳에서 계속 살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미래의 아랍인>은 수작이며, 문제작이다. 어서 3권이 출간되고 다양한 감상과 논의가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2016.08.02ㅣ주간경향 118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7-07

[북리뷰]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길, 4만원.


한국 사회의 경우,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큰 경계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 온 국민을 윽박지르던 시절, '자본주의'는 곧 '반공주의'였고, 따라서 실제로는 어떤 식으로도 정의되지 않고 있었다.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나니 순식간에, 21세기 초 인기를 끌었던 한 광고의 유명한 대사처럼,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으로 쓰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시점에, 한국의 담론계는 '신자유주의'라는 허상만을 쫓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위험 떠넘기기, 임금 착취하기, 투자금 떼어먹기 등 온갖 비윤리적 탐욕을 정상 상태로 용인하는 그런 사회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들 이렇게 말한다. 이게 자본주의라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개념 규정은 이미 육아실에서 배우는 문화사 수준에서 영원히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무제한적으로 영리를 탐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16쪽)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저자가 직접 강조하고 있다시피, 자본주의는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탐욕에 그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탐욕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립과 존속이 판가름난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 부를 누리는 게 목표라면, 경제 주체는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 복잡한 회계를 동원해서 그 부를 투명하게 관리해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 마치 오늘날 한국 기업들의 '오너' 일가들이 하는 것처럼, 자산을 대대손손 물려줄 궁리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게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 그래서 그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막스 베버는 되묻는다. 그러한 탐욕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고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했는데, 왜 자본주의는 오직 서구에서만 싹틀 수 있었냐고 말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색하는 책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의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은 다음 두 가지 발전 요소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오늘날의 경제적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가계와 기업의 분리가 그 한 요소이며, 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합리적 부기가 다른 한 요소이다."(21쪽)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사망한 막스 베버의 눈으로 볼 때, 전체 지분의 몇 퍼센트를 간신히 소유하는 '오너 일가'가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결코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이 아니다. 가계와 기업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합리적 부기에 따른 투명한 회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념의 시대가 지나고 나니, 그 후에는 '자본주의라도 제대로 하자'는 자조 어린 태도가 한 시절을 풍미하기도 했다. 그 후로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대한민국의 공론장은 아예 작동을 멈추었고, 이제는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 낄낄거리고 소리치는 팟캐스트가 '대세'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극복'도 못 하고,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의 논의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일단 이 책부터 읽기 시작해야 한다.


2016.07.19ㅣ주간경향 118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7-04

[별별시선]‘서프러제트’와 ‘비밀은 없다’

2012년 연말로 돌아가보자. 벌써 4년 전이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그다지 훌륭한 작품이 아니었다. 소설이 가지고 있었던 모순과 복잡성은 평평해졌고, 뮤지컬이 가지고 있었던 본연의 에너지는 스크린을 찢고 튀어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관객들, 특히 정치적으로 ‘진보’라 분류되는 관객들은 열광했다. 작품 속에 묘사되는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를 보며 18대 대선 패배의 아픔을 달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극장에서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서프러제트>가 상영 중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서프러제트 운동을 다룬 최초의 장편 상업 영화인데, 그래서인지 해당 운동이 지니고 있었던 사회적 맥락을 최소화하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다양한 각도에서 대립하던 모습도 깊게 조명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은 그 작품을 철저한 ‘운동권 영화’로 만들어냈다.

주인공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 분)는 우연히 서프러제트의 시위 현장에서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어쩌다가 운동권에 휘말려, 결국 투사로 거듭난다. 동료가 이탈하고, 배신의 유혹을 받고, 어떤 이는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캐리 멀리건의 선한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다. 그저 착하고 순수했던 그가 한 사람의 ‘운동권’으로 재탄생하는, 꽤나 고전적인 서사가 2016년 극장가에서 상영 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레미제라블>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왕년의 운동권’들은 왜 극장으로 몰려가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레미제라블>을 ‘운동권 영화’로 소비하는 데에는 일종의 비평적 곡예가 필요했다. 반면 <서프러제트>는 그럴 필요가 없다. 대놓고 ‘운동권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짱돌’ 좀 던져봤다고 으스대다가 ‘문화운동’ 한다고 방향을 돌렸던 수많은 남성 비평가들은 <서프러제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매년 극장가에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다룬 대체로 뻔한 영화들이 절찬 상영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내부자들>을 꼽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경상도 방언을 쓰는 ‘꼴통 검사’가 전라도 방언을 쓰는 ‘착한 건달’과 손을 잡고,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내부자들’에게 한 방 먹인다는 줄거리이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치부’를 보여준다는 그런 작품들은 한 해에도 몇 편씩 나온다. 대체로 여성들은 피해자의 위치에서 폭언을 듣고, 두들겨 맞고, 강간당하고, 시신으로 발견되기 일쑤다. 그러면 남자인 주인공이 절규하면서 정의 구현을 위해 힘쓴다. 그리고 관객들은 폭력의 무신경한 재현 앞에 ‘날것’이라며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그 맥락에서 이경미 감독의 신작 <비밀은 없다>를 생각해보자. 자신이 태어난 경북의 한 도시에서 처음 출마한 정치 신인이 해당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탈당파 현역 국회의원과 맞붙는데, 그의 아내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이 ‘추문’으로 취급되며, 하나뿐인 딸은 실종됐다. 전라도 여자는 경상도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 광기 어린 추적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호남차별, 여성차별, 학교폭력, 동성애, 불륜 등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뜨거운 감자를 한꺼번에 씹어삼킨다.

그럼에도 <서프러제트>와 마찬가지로, <비밀은 없다>는 저평가 혹은 무(無)평가 당하고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매우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단지 희생자에 머무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들은 어떤 일을 겪고, 위협을 당하고, 폭력에 노출된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진다.

그러자 관객뿐 아니라 비평가들 역시 형식적인 코멘트만을 남겨놓고 침묵을 지키는 중이다. 그 침묵은 열렬한 예찬보다 우리 사회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말해준다. 한국 사회는 피해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을 순순히 용납하려 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주체-되기. 2016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겁게 논의되어야 할 ‘정치적’ 주제다.


입력 : 2016.07.04 20:53:03 수정 : 2016.07.05 11:25:0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042053035&code=990100&s_code=ao122#csidx8a9de7b24f74d368a77c68193f19f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