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환경주의의 다양성

환경주의는 넓은 개념이다. 가령 최초의 동물 보호 운동을 벌였던 것은 사냥꾼들이었다. 자신들이 사냥을 하다보니 생태계 균형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환경주의자'는 반드시 '탈원전'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환경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으니 말이 나온 김에 분류를 해보기로 하자.

1) 반인간적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만약 위 문장에서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굉장히 극단적인(혹은 '래디컬'한) 입장인 셈이다. 영화 〈12 몽키즈〉에 나왔던 것처럼,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그런 반휴머니즘적 환경주의의 길을 택하는 것이니 말이다.

2) 문명 퇴행을 수용하는 환경주의: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길어진 기대 수명, 풍요로운 식생활, 청결과 위생,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구조, 법치주의 등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래야 하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반 문명적' 태도에서 환경주의를 주장하는 셈이다. 이웃간에 정감 넘치는 생활을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철학자' 강신주 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함께하는 진보 진영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는 생각이다.

3) 현대 문명과 함께하는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하는 대신, 우리가 가진 과학과 문명의 도구를 최대한 발전시켜야 하는가? 나를 포함해 원자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환경주의자들이 택하는 입장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서비스와 풍요를 누리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그 활용도를 더 높여야 한다.

현재 '탈원전' 논의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2)에 속하는 이들이 3)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일에 너무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3)에 속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2)는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방사능 공포를 부추기면서,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벌어질 기후 변화의 충격을 나몰라라하는 이기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일종의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할까?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 그리고 우리의 솥단지

우리가 누리는 풍요를 그들이 누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환경주의의 이름으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우리는 개발도상국이 급격하게 화석 연료의 사용을 늘림으로써 기후 변화의 충격이 더욱 강하게 몰아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도 안 된다. 결국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기저부하를 공급할 수 있는, 현재로서의 유일한 해법인 원자력 발전을 더욱 확장하는 것만이 해법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누렸던 행운도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재획득했고, 그렇게 얻은 정치적 동력을 바탕으로 영남권의 공업 단지에서 요구하는 전력 수요에 따라 해당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를 대거 건설할 수 있었다.

오늘날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도시 거주민들은 원전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결국 문재인 정권의 급격한 탈원전 드라이브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표심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대체 왜 해당 지역에 그렇게 원자력 발전소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지역에 대한민국의 핵심 중공업 단지가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공업 단지들의 존재로 인해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은 높은 경제 수준을 향유하고 있으며, 더불어 대한민국의 경제도 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고리1호기를 내팽개쳤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우리가 수십년 동안 밥을 해먹은 솥단지인 것이다.

아무리 원전이 싫고 미워도 그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말자.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24시간 생산해내는 원자력의 힘으로 대한민국은 가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문명화된 삶을 누리고 있다.

선진국 환경주의자들의 이기적 폭력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에너지 복지를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전지구적 기후 변화가 세계인들의 거주지를 뒤흔들고 건강과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지금, 원전을 포기하자는 주장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가.

무턱대고 방사능의 공포를 외치며 반대하는 그런 식의 환경주의는 1960-70년대 가장 풍요롭고 잘 살던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너무도 당연했기에 그들은 자발적 가난을 칭송했다. 단 한 번도 굶주려본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거리낌없이 녹색혁명을 비난하고 화학비료의 사용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환경을 위해서는 인류의 숫자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멜서스주의적 세계관 역시 그 무렵 환경주의자들이 유포한 것이다. '인구 폭발'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도덕적 당위인 양 포장되면서, 서구의 임신중절기술이 한국, 중국, 인도 등의 개발도상국에 도입되었으며, 그 결과 무수한 여아들이 선별낙태당했다.[1] '에너지 사용을 늘리지 말고 인구를 줄이자'는 발상은 이토록 반인륜적이다. 줄어드는 '인구'는, 당연히,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자들은 반성하고 있다. 〈판도라의 약속〉에 출연한 마크 라이너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통스럽게 실토한다. 환경주의자들이 무턱대고 원자력에 대한 증오심만을 불러일으킨 결과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력발전의 공해로 목숨을 잃었다고. 환경주의자들은 그러한 판단 착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더 이상 원자력혐오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한 사람, 1960-70년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창시자 중 하나인 스튜어트 브랜든은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도시화를 반대하고 시골 생활이 좋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정작 시골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는, 내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환경주의자가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전혐오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생각을 직접 만들어낸 사람이기에, 그것을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또 바꿀 수 있었으리라.

지구를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방법론이다.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충분히 풍요로운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라면 냉장고를 없애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먹자는 소리를 할 턱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환경을 걱정한다면서 사람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그런 환경주의에 나는 반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이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말이다.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떠냐'고 으스대거나 '에어컨 안 틀어도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가진 자의 여유일 뿐이다. 그 몇 푼의 전기요금도 내지 못해 여름에는 헐떡이고 겨울에는 덜덜 떠는 그런 이들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와 에너지 정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건 보수라고 생각하건, 더 많은 이들이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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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구 폭탄'론의 유포, 아시아권을 향한 서구의 산부인과 기술의 급속한 전파, 그로 인한 여아 선별 낙태에 대해서는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를 참고. 이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은 「주간경향」 1151호(2015.11.17)에 게재되었으며,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2017-08-10

여성의 폭력과 법 앞의 평등

나의 검열삭제 경험담

2016년 10월 11일의 일이다. 경향신문 오피니언팀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오피니언팀을 담당하던 부장님 전화였다.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고소위원회에서 8월 1일자 칼럼 "'물뽕'과 부동액"에 대해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시정 권고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된 문단을 삭제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이다.

2008년 무렵부터 신문 지면에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언론중재위원회의 연락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이미 작성한지 두 달이 넘은 글을 두고 무슨 소리냐 싶었다. 나에게 거부권이 없는 상황이므로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검열삭제'를 경험한 것이다. 성행위를 뜻하는 은어로서의 검열삭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생각과 말을 제약당하는 검열삭제 말이다.

그렇게 잘려나간 문단은 다음과 같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경향신문, 2016년 7월 3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312051005&code=990100#csidxbdbdec283bdaff7aafb36493d4a385b 삭제되지 않은 원문은 내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basil83.blogspot.kr/2016/08/blog-post_4.html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저 고급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자동차 부동액은 무색무취하기 때문에 타인을 독살하기에 아주 좋다는 정보는 SBS의 인기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한편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서 저런 논의가 오간다는 사실은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가령 이런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말이다.

‘부동액 커피’ 사건은 지난 6월 워마드에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용어)을 재기시켜도(죽게 해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이거 먹여라’는 글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이 글에는 1일 1회 5ml씩 희석해서 먹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명시돼있으며 부동액은 마트에서 구매할 때 현금 결제를 해야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당부도 담겨 있다.

전종선, “남성에 부동액 타 먹였다” 워마드 경찰 수사 착수에 네티즌 “암덩이들 도려내야”, 서울경제, 2016년 7월 28일. http://www.sedaily.com/NewsView/1KZ1J58KL3

이제 두 문단을 비교해보자. 내 칼럼에 실렸다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권고를 받고 잘려나간 문단과, 아직도 인터넷을 통해 잘 남아있는 위 기사의 문단에서, 정보의 차이가 있는가? 1일 1회 5㎖라는 구체적인 용량까지 동일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당시 쏟아져나온 수많은 언론 보도를 보고 저 칼럼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언론중재위원회는 내 칼럼을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똑같은 내용이 담긴 다른 기사들에 대해서는 시정 권고 조치를 내리지 않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위 기사를 포함해 당시 워마드의 게시물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언론 보도는 워마드를 '꾸짖는' 것에만 중점을 두고 있었던 반면, 내 입장은 달랐기 때문이다. 삭제된 문단을 포함한 전문을 다시 올려보도록 하겠다. 검열삭제된 문단은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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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2015년 11월 중순, 서울 성동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단강간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소라넷에 올렸다. 술 혹은 약물에 의해 정신을 잃고 벌거벗은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작성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라를 잘 안 해서 랜덤 채팅 양톡으로 여태 3분 정도 와서 질사하고 가셨는데 ㅋㅋ 오늘은 소라에서 한번 해볼까요?”

‘골뱅이’란 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을 뜻하는 은어다. ‘왕십리 골뱅이’의 작성자는 첫 게시물을 올리고 11분 후 두 번째 글을 업데이트했다. 역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줄 서봅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중이었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지만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과는 다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한남(한국 남자)을 재기(사망)시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달린 가상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흔한 ‘인증샷’도 없이 인터넷에서 그냥 하는 소리, 시쳇말로 ‘드립’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부동액 섞인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원인이 밝혀지면서 실제 범행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 범죄의 정황이 없지만 경찰은 일단 수사를 개시했다. 허위 게시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공권력은 작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2015년 11월, 인터넷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던 활동가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을 신고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가 단체인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팀이 공개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담당자는 “요거를 전체적인 댓글이나 글 게시된 걸 분석해 보니까 범죄혐의는 전혀 없”다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장난한 것 같애요. 이 소라넷 사이트 이용하는 애들이~ 반응 보려고~.”

설령 농담이라 해도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이자고 모의하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전복적 발화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런 ‘미러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누군가 먹였다는 제보를 받은 공권력이 그것을 장난으로 간주해버리는 것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는 발화자들의 개인적 존엄 및 품위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얼마나 공정하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두고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왜 여자가 남자에게 부동액을 먹였다는 신고와, 남자가 여자에게 ‘물뽕’을 먹였다는 신고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이토록 다른 것인가? 전자는 살인이지만 후자는 성범죄이므로 범죄의 무게가 달라서라면, 경찰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저년 배를 칼로 쑤시겠다,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식의 살해 협박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 오는 그녀를 함락시키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버젓이 데이트 강간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겠다고 하면 ‘농담’이라고 대충 넘어가면서,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말을 하면 곧장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뽕’과 부동액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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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죽이러 가겠다'는 경범죄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2017년 8월 현재까지도 법 앞의 평등이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8월 9일 새벽, 아프리카 BJ 김윤태는 생방송을 진행했다. 유튜브 스트리머 갓건배의 집 주소를 알았다며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경기도 부천, 서울 성북구 둘 중 하나라며 차를 타고 나가던 그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7000여 명에게 중계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여,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울 성북경찰서에만 이날 새벽 1시30분께부터 총 3차례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해당 BJ는 스트리밍을 하면서 "그 주소에 갓건배가 살지 않아도 여성이라면 목졸라 죽이겠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것이 방송을 본 이들의 증언이다(링크). 특정한 피해자의 신원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분풀이 삼아 여성을 살해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표명하였고, 어떤 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여 현장으로 향하던 중이다.

과연 이 사람에게 형법상 살인예비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관련된 대법원 판례(2009도7150)는 다음과 같다.

형법 제255조, 제250조의 살인예비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형법 제255조에서 명문으로 요구하는 살인죄를 범할 목적 외에도 살인의 준비에 관한 고의가 있어야 하며, 나아가 실행의 착수까지에는 이르지 아니하는 살인죄의 실현을 위한 준비행위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준비행위는 물적인 것에 한정되지 아니하며 특별한 정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범행의 의사 또는 계획만으로는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보아서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

김윤태가 흉기를 준비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집에 갓건배가 살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를 목졸라 죽이겠다'고 발언했다. 흉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갓건배를 살해하겠다는 의도가 없었고, 살인의 준비 행위가 없었다고, 확실히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방송을 보는 이들로부터 제보를 받아 갓건배가 살고 있을법한 위치를 좁히고 실제로 차를 타고 나갔다는 사실은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가?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태는 "한 파출소로 임의동행돼 아침까지 조사를 받았고, 경범죄처벌법상 '불안감 조성' 행위로 범칙금 5만원 통고처분을 받고 귀가했다." 경찰은 이 사건이 "형사과로 넘기기에는 사안이 경미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시킨 후 귀가시켰다"고 설명했다."(이효석, ""죽이러 간다" BJ 생방송에 경찰 수사 소동…BJ에 범칙금 5만원 ", 연합뉴스, 2017년 8월 10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8/10/0200000000AKR20170810151500004.HTML)

설령 백번 양보해서 김윤태의 방송 행위가 살인예비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미 지난달 벌어진 '왁싱샵 살인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소위 '1인 미디어'가 생산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폭력은 쉽사리 전염되기 때문이다. 김윤태의 방송을 보고 '나도 갓건배 죽이러 가겠다'고 나설 사람이 과연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작년 8월에 쓴 칼럼이 10월에 검열삭제된 사건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래서이다. 한국 사회와 그 사회의 법 체계는, 여성의 일탈에 유독 민감하고, 더 강한 처벌의 잣대를 들이댄다. 실제로 처벌이 불가능하다 싶어보여도 일단 경찰 수사를 해서 겁을 준다. 반대로 남성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을 휘두르면 가장 엄격한 죄형법정주의와 절차중심주의를 통해 최대한 그 벌을 가볍게 한다.


여성들이 법 앞의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앞서 내 칼럼의 소재가 되었던 워마드 부동액 사건을 되짚어보자. 부동액을 먹고 사람이 죽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었다면 경찰이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대략 알면서도 겁주기용으로 워마드 수사에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반면 인터넷을 통해 남자들이 '인증'하려고, '리플' 받고 관심 끌려고 범죄 모의를 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일은 심심찮게 벌어진다. 가령 지난 2월, 일간베스트(일베)에 자신을 39세 일용직 노동자라고 밝힌 누군가가 선화예고 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해당 학교는 2월 5일까지 임시로 학교 시설을 폐쇄했고, 서울 광진경찰서는 학교 인근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며 게시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방송을 하는 BJ의 행동이 범행을 불러온 사례가 최근에 또 있었다. 7월 초 한 남성이 왁싱샵에서 홀로 일하던 여성을 찾아가 살해하고 금품을 챙기며 강간까지 시도했던 사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는 한 유명 BJ가 피해자의 가게에서 브라질리언 왁싱 시술을 받는 것을 소재로 한 자극적인 영상물을 보고 범행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서울 역삼동 주택가에서 대낮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여성이기에 당하는 폭력이 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남성의 폭력을 모방하여, 남자들에게 뭐가 폭력인지 가르쳐주기 위한 어떤 퍼포먼스가 있다. 그런데 법은 양자를 똑같이 '폭력' 취급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법의 눈이 둔감하다고, 남성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 언론중재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당한다. 그것이 내가 작년 10월에 겪었던 일이다.

2016년 강남역에서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졌지만, 2017년에는 역삼역 인근에서 혼자 일하는 여성이 살해당한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이들이 한 여성을 붙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어도 고작 범칙금 5만원 처분을 받는다. 법 앞의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2017-08-09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탈원전과 핵잠수함, 쌀밥과 파스타

유럽 선진국들이 앞장선다는 그 '탈핵'. 특히 대대적인 탈핵 실험을 진행중인 독일이 많이 거론되며, 스위스도 가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국내 언론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도 그렇고 스위스도 그렇고, 탈원전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나라들은 핵잠수함 도입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사방이 내륙인 스위스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U-보트로 영국과 미국의 해군을 쩔쩔매게 만들었던 독일 역시 핵잠수함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핵잠수함이란 가압형 경수로를 탑재한 잠수함이기 때문이다. 즉, 탈핵과 핵잠수함 도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탄수화물 줄이기 위해 쌀밥 끊고 파스타 먹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라는 게 있습니다

지난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어때서?'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주제파악을 못하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대중적 인식과 청와대의 의사 결정 수준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핵잠수함을 보유한 나라, 그리고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그것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핵잠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핵탄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NPT 공인)
핵탄 보유 선언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
핵탄 보유 추정국: 이스라엘

뭔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핵확산금지조약(NPT)상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다섯 나라는 모두 핵잠수함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들은 동시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퀴즈.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어떤 나라들일까?

정답: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아주 간단한 문제다. 왜 어떤 나라는 핵을 가져도 되고 어떤 나라는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지 아닌지 감시를 당해야 하는가? 인류가 마지막으로 겪은 전면적 국제전에서 만들어진 세계 질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 질서를 이겨내고 싶다면, 인도나 파키스탄 혹은 북한처럼 국제적 고립과 제재를 감수하고 NPT에서 탈퇴해가면서 핵무기를 만들거나, 3차 세계대전을 벌인 후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고사하고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심지어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 식자층은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도 몰랐기 때문에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타령을 하고 있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미국 앞에서 핵무기 타령하지 말라

핵무기 보유의 국제정치학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한국이 돈 좀 벌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다고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안 되나?'라고 하는 행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에 어떻게 보일까? 아파트 한 채 샀다가 값 올랐다고 수백억 수천억 부자들 앞에서 돈자랑하고 '나 무시하냐?' 이러는 강남 중산층처럼 보이지 않을까?

주제 파악을 좀 하고 살자는 소리다. 우리는 기껏해야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력을 갖춘 나라고, 그나마 1인당 구매력 기준으로 놓고 보면 선진국 클럽에 들어가기에는 체급이 딸리는, 태평양 북서쪽에 붙은 자그마한 사실상의 섬나라일 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좀 팔리고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히트 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싶은데, 현재 대한민국은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강국의 반열에 들 수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나라들이, 최소 20%에서 최대 90% 이상 농축한 우라늄-235을 연료로 쓰는 가압형 경수로를 잠수함에 탑재하면, 그게 바로 핵잠수함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도 돈 좀 벌었으니까 어깨에 힘 좀 주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소리들을 하는구나 싶다.

군용 원자력 잠수함이지만 군사 목적의 원자력은 아니라구요

핵잠수함은 원자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무기다. 원자력 잠수함이 연료 보급 없이 긴 시간 작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우라늄-235를 농축시켜야 한다. 핵탄두를 만드는 것과 원자력 잠수함 연료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핵탄두를 가질 수 없는 나라는 공개적으로 핵잠수함을 가질 수도 없다. 그리고 201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한 핑계를 대면 우리가 핵탄두(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국제 사회가 용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핵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추진력으로 사용할 뿐이니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문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를 막론하고 보이는데, 한미원자력협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 제13조를 읽어보자.

제13조
폭발 또는 군사적 적용 금지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및 구성품과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에 이용되었거나 이러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의 이용을 통하여 생산된 모든 핵물질, 감속재 물질, 또는 부산 물질은 ①핵무기 또는 어떠한 ②핵폭발 장치, 어떠한 ③핵폭발 장치의 연구 또는 개발이나 어떠한 ④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지 아니한다.

해군과 정부, 그리고 청와대 및 야권의 핵무장론자들은 우리가 잠수함에 탑재하는 것이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일 뿐이므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 조항의 문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폭발하는 방사성 물질과 그 연구 개발은 ①에서 ③까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터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군사적 활용'은 ④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군용 잠수함은 군사적 목적으로 움직인다. 군함이기 때문이다. 그 잠수함에 들어가는 원자로가 ④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대놓고 한미원자력협정을 어기겠다는 소리를 지금 대통령 포함 해군과 정치권에서 마구 하는 중이다. 한때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다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갖는다니까 핵잠수함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라고 완곡어법을 써가며 옹호한다. 미국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장난하냐?

눈앞의 북핵을 핑계로 언젠가 완성될 비밀 핵개발?

북한의 핵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북한의 미사일이 한반도에 떨어지기 전에 격추시키는 종말고고도지역방어시스템, 즉 사드(THAAD)가 필요하다. 이미 '임시 배치'되어 있지만 몇 기 더 배치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이 우리에게 핵을 쏜다면 즉각적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는 확실한 위협 수단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자체적인 핵무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에 입각해 미국의 전략핵무기를 다시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해보지도 않은 '자체 핵개발'을 대응책으로 제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도외시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배치할 수 있고, 확실히 날아가서 터진다고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전술핵 배치야말로 '대북 억제력'으로서 유의미하다. 원자력 잠수함을 설령 몰래 만든다 한들 그걸 언제 완성할 것인가? 핵잠수함을 국제 사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들어서 몰래 실전 배치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억지력이 필요하면 한미동맹에 기반해 미국의 전략핵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주체적 핵개발' 좋아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놓자고 하면 또 드러눕고 난리 피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자력 잠수함 추진에 대해서는 별 말 없던 온갖 '평화 지킴이'들이 드러눕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무궁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고 싶다는 군국주의적 열광

자체적 혹은 '주체적'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1990년대, 한국 사회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버블 호황기' 비슷한 것을 누리던 시절, 상업화된 민족주의적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퍼져나간 군국주의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풍 열광이 몰아닥쳤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핵무장마저도 '재평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핵무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긍정적 인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자는 뜻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데프콘』 같은 대중적 소설이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군국주의적 열광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걸 일본에게 쏜다 해서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모든 국민의 삶은 군국주의로 인해 피폐해질 것이다. 마치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삶도 황폐해졌듯이 말이다.

무궁화 꽃은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풍요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으로 향하는 첫 단추인 원자력 잠수함에 집착하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핵폭탄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무궁화 꽃을

정부는 원전 폐로 등에 연구를 집중하고 소형모듈원전 등 차세대 원전의 개발을 뒷전으로 미룰 태세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가는 선박용 원자로는 만들고 싶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원자력 잠수함을 정 만들고 싶다면, 민간용 원자력선인 무츠를 만들어서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했던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탈핵합니다! 그런데 핵잠수함 만들고 싶다 핵 핵핵핵' 하는데 미국이 대체 왜 한미원자력협정을 바꿔준단 말인가? '사우스와 노스 모두 코리아는 핵에 미쳤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핵폭탄을 가진 가난한 나라. 북한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거부해야 한다. 신고리 5, 6호기는 마저 짓고, 4세대 원전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체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깨끗하게 접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도록 하자. 그것이 평화와 번영의 길이다.

2017-08-06

발전소, 잠수함, 핵탄두

'탈핵'을 선언하고 착공한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를 멈춘 나라가 있다. 그런데 그 나라는 한 차례 전쟁을 겪었고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휴전'중인 적국에서 핵탄두와 미사일을 개발하는 안보 위협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2017년 8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3자의 시각으로 생각해보자. 원자력 발전소를 짓겠다고 대통령이 선언하고 국내에서 설왕설래가 오가는 가운데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그 원자력 잠수함이 핵탄두를 가진 미사일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의아한 소리이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핵탄두를 해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원자력 발전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땅 위의 경수로는 반대, 물 속의 경수로는 찬성?

월성 1, 2, 3, 4호기를 제외하고 나면 현재 건설되어 있는 모든 발전용 원자로는 가압경수로다. 그런데 원자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최초의 가압경수로는 미 해군에 의해 개발되었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호에 탑재되었다. 원자로와 직접 닿는 고압의 냉각수가 열교환기를 통해 2차 계통의 물에 열을 전달한다. 그렇게 발생된 증기로 발전기를 돌리면 가압경수로가 된다. 반면 그 증기로 잠수함의 스크류를 작동시키면 원자력 잠수함인 것이다(프랑스에서는 원자로로 발전을 하여 그 전기를 이용해 추진력을 얻는 형태의 원자력 잠수함도 운용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가동중인 발전용 원자로 중 대다수는 원자력 잠수함에 실리는 원자로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탈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건설중인 가압경수로 원전의 공사를 멈추면서, 똑같이 가압경수로가 들어가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자는 논의를 하는 정부는, 원자력의 안전성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땅 위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는 비행기가 들이받아도 꿈쩍하지 않는 철근 콘크리트와 철판 등으로 차폐벽을 둘러싼다. 애초에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바깥에 건설되어 있으며 ('임시 배치'된) 사드에 의해 보호받는다. 반면 원자력 잠수함은 군사 작전에 투입되는 함정이기에,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위험성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원자로'를 줄이겠다고, 없애겠다고, 짓던 것도 안 만들겠다고 '탈핵 선언'을 한 대통령이, 어떻게 동시에 '원자로'를 바닷속에 풀어놓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한반도에서 발생한 적도 없는 진도 7.0의 강진이 정확히 원자력 발전소를 강타할 가능성을 운운하는 환경주의자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이 도입하겠다는 원자력 잠수함이 북한의 어뢰나 기뢰에 맞아 폭파될 가능성은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심지어 러시아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는 딱히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관리가 부실했던 어뢰의 폭발로 침몰한 바 있다). 과연 우리는 최소한의 상식적 기준을 가진 상태로 '탈핵' 논의를 하고 있긴 한 걸까.


군사용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니?

북한이 핵탄두를 개발했다는 이유로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겠다는 논리는 더더욱 이상하다. 북한의 핵개발이 문제인 이유는 원자폭탄을 보유한 국가의 숫자와 핵탄두의 수량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우리는 우라늄-235를 20%미만까지 농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당연한 전제 조건이 따라붙는데, 그것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니 원자력 잠수함을 만들어도 그것은 평화적 이용이다'라는, 딱 들어도 세계가 납득할 리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부에선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핵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저농축우라늄(우라늄 235 동위원소가 20퍼센트 미만)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유철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군사적 목적으로는 (핵)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방지하는 차원이고 우라늄 농축의 20% 이하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발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협상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 문구 해석을 놓고 양국이 상당 기간 갈등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핵잠수함은 핵무기가 아니고 핵연료로 추진하는 잠수함일 뿐"이란 논리가 미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얘기다.

강기헌, "한국형 핵잠수함 가능한가…기술력은 충분, 안정적인 핵연료 확보가 관건", 중앙일보, 2016년 8월 30일. http://news.joins.com/article/20523425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규정상 비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사용은 핵사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원자력 잠수함을 '비군사적'이라고 우기고 있다면, 은밀함이 생명인 원자력 잠수함에 대해 IAEA의 핵사찰을 허용해야 한다. 같은 기사를 좀 더 인용해보자.

IAEA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라도 원자력 관련 시설을 사찰할 수 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이런 상황까지도 펼쳐질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사전 통보 없이 IAEA 직원이 한국을 찾아온다.
"핵잠수함 핵연료 전용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잠수함이 어디에 있나요?"(IAEA 직원)
"글쎄 그걸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해군)
핵연료 사찰을 거부하는 건 IAEA 규정 위반이다. 그렇다고 사찰을 받아들여 핵잠수함의 위치가 노출된다면 '은밀성'이 깨지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자체적 핵무장을 추진하는가?

반대로 군사적 목적임을 솔직하게 밝힌다면 IAEA의 핵사찰을 받지는 않겠지만 한미원자력협정 위반이다. 그러한 행위는 북한만 몰래 핵개발 하는 '불량국가'인 줄 알았던 전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이미 2004년, 노무현 정권 시절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두고 논의가 오갈 때, 지적되었던 부분이다.

결국 한국이 저농축이든 고농축이든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잠수함을 추진한다는 것은 단순한 ‘해군력 강화’가 아니라 그대로 ‘핵무장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물질 보유량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북한 핵 위기’가 일어났듯, 한국의 핵잠수함 추진은 ‘남한 핵 위기’로 비화될 공산이 크다. 이쯤 되면 비핵화선언은 신경 쓸 거리도 못 된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1990년대 이후의 모든 논의는 한국의 핵잠수함을 둘러싸고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 한국이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의혹 국가 명단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미국 입장에서도 핵무장은 동맹 파기를 고려할 만한 사안. UN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에 대한 제재를 결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이 입게 될 정치·경제·안보적 손실은 추산이 불가능할 것이다.

황일도, "한국 핵잠수함 보유, 무엇이 문제인가", 신동아, 2004년 3월호.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3221/3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핵잠수함을 만들겠다는 소리는, 북한이 국제 사회의 문제아니까 우리도 문제아가 되고야 말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이고, 그렇게 해석할 것을 알면서도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운운한다면 그거야말로 '핵무기 마피아'의 일원임을 자백하는 꼴이다.

문제는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원자력 정책의 방향이 바로 그렇다는 데 있다. 평화적 목적으로 쓰이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신고리 5, 6호기는 짓다가 말고 공론화를 벌인다. 그러면서 군사적 목적일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한다고 분위기를 띄우면서, 결국 자체 핵무장을 하겠다는 속내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토록 한다.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북한의 핵무기보다 한국의 원전이 위험하다는 사람들

북한은 자타공인 국제 사회의 골칫거리다. 주민들이 굶주리고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핵무기를 개발해왔고 이제 완전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내부 엘리트들도 치를 떠는 공포정치로 체제를 유지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는 그 북한에 원유 등 핵심적인 자원을 제공하고 무역을 통해 달러를 공급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최근에만도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습 사건, 연평해전 등을 저지른 바 있다. 그들 말로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원한다고 할 뿐이지만, 지속적으로 한국의 재산 및 군인과 민간인들을 공격해왔다. 아직도 북한에는 납치되어 구금된 일본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핵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북핵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다. 사람을 죽이고 해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무기'를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집단의 손에 핵탄두가 들려있지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미국이 북한을 몰아세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핵개발을 했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긴 하니 일단 사실로서 인정하긴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들 가운데 문재인 정권의 탈핵 선언과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에 반대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핵무기는 위험하다. 특히 위험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 반면 원자력 발전소는 위험하지 않다.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망자 수를 비교해보면 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에 따라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하는데 사망자가 나오는 비율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석탄(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 440명.
수력(세계 평균) 1400명.
원자력(세계 평균) 90명(체르노빌, 후쿠시마 포함).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최악의 원전 참사'를 다 더해도, 원자력 발전은 지붕에 설치하는 친환경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을 제외하고 미국 내에서의 사망자만을 꼽는다면, 1조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 0.1명이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전력 공급원은 원자력이다. (출처: James Conca, "How Deadly Is Your Kilowatt? We Rank The Killer Energy Sources", Forbes, 2012년 6월 10일. https://www.forbes.com/sites/jamesconca/2012/06/10/energys-deathprint-a-price-always-paid/#2398b939709b)

그런데 대체 왜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로 행동할까? 가장 안전한 발전 수단인 원자력은 위험하다고 '탈핵'하자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핵무장으로 향하는 첫 걸음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의가 대체 무엇일까?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평화의 원자력을 버리고, 위험하고 가난하며 고통스러운 자체 핵무장과 국제적 고립의 길로 향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칼을 쳐서 보습을, 핵탄두를 연소시켜 발전을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폭발시켜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원자로에 넣어서 연소시켜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농축된 우라늄-235 혹은 플루토늄-239를 원자로에 넣고 천천히 분열시킴으로써, 모두에게 유익한 에너지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핵탄두 해체인 것이다. 성경 구절에 나오듯,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미가 4:03)드는 평화의 이상 그 자체다.

실제로 미국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현재 생산중인 전력 중 10% 가량이 노후된 핵탄두를 연료로 삼아 나오고 있다. 그 많은 핵무기를 다 유지하는 것도 부담이 되는 일이고, 아무 이유 없이 터뜨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핵탄두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도 이와 같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북한이 핵을 개발해놓으면 우리가 그것을 손에 넣어 '민족의 힘'을 보여준다는 망상이 넘쳐났지만, 그것은 한낱 망상일 뿐이다.

우리는 북한이 아니다. 우리는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중요한 플레이어이며 세계 10대 규모의 교역 국가다. 만약 대한민국의 손에 북한의 핵탄두가 들어온다면, 그것이 들어갈 곳은 오직 원자로 뿐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평화적 목적의 발전용 원자로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 유명한 사진을 보자.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발전소를 지어줘도 냉각탑을 폭파시켰던 북한은, 밤이 되면 불이 켜지지 않는 암흑의 국가다. 반면 우리는 일본보다 먼저 원자력공학과를 개설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온 평화의 원자력 국가다. 이 차이가 바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원자력이라는 자연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무기로 쓰느냐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쓰느냐에 따라, 두 나라의 오늘이 이토록 달라진 것이다.

북한의 핵탄두가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로 사용하는 그날, 북핵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바로 그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현 정부는 정 반대의 원자력 정책을 펴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를 경계하라

고리1호기를 방사능 괴물이라도 되는 양 쫓아내며 문재인 대통령은 자뭇 비장한 표정으로 '탈핵'을 깜짝 선언해버렸다. 수십년 간 우리 산업과 가정의 에너지를 책임져온 솥단지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선포한 셈이다. 그러더니 북한을 핑계로 대신 칼과 창을 만들겠다고, 누가 봐도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전초 단계인 원자력 잠수함 건설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 정권의 탈핵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은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는 이들을 향해 '원전 마피아'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들 아닌가?

양자는 줄곧 혼용되어왔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시피, 분명히 다르다. 나는 원자력 발전소를 더 발전시키고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한민국의 자체적 핵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를 모두 없애되 원자력 잠수함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이들을 '원전 마피아'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해방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누려온 평화와 경제 성장은 전승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제 질서와 자유무역에 힘입은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던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어냈다. 반면 북한은 90년대 이후 핵무기를 만들어 체제 보장을 받기 위해 골몰했고 지금껏 불량국가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체 왜 2017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을 내던지고 핵무기를 손에 들려고 하는가? 왜 성공적이었던 평화의 길을 벗어나 북한과 같은 경로를 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키는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더니, 그 통일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향평준화를 택한 것인가?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현 정부의 탈핵에 대해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자력 잠수함을 꼭 만들어야만 한다는 그 '농축 우라늄 중독 증상'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준 것은 원자력 발전소이지 핵탄두가 아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핵탄두를 원자로에 넣어 전기를 뽑아내자. 우리가 가야 할 평화로운 번영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2017-07-28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책을 쓰는 사람, 책을 외우는 사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 있을까? 본인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고민하여 판단한 사람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무슨 이유로 어떤 결정이 내려진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이 한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어떤 '경전'을 잘 외우고 지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일 뿐이다.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에 넘어왔을 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렇다. 주자학은 중국 내에서 지배 이념의 자리를 잠시 차지했지만 얼마 후 부흥한 양명학의 비판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의 지적 흐름도 그에 따라 변했다. 그리고 중국의 학문은 고증학으로 넘어가, 청 제국의 말기에 이르면 유교 문헌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판적인 문헌 비평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반면 그 중국 고전을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느냐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던 조선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는 이미 '유행'이 끝난 주자학의 해석을 놓고 당쟁을 벌이고 지배 계급끼리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조선 밖의 세상에서는 해상 국제 무역이 출현하고 일본 및 중국은 서구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옛날 책'을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 셸런버거? 그게 누군데?'

스스로 생각한 자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탈핵이 아니라 더 많은 원자력 발전을 요구하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되짚어보며 자꾸 곱씹게 되는 말이다.

미국의 환경 단체 '환경 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마이클 셸런버거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향해 탈핵 정책을 철회해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내고,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및 기고를 통해 한국인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부터 생각해보자. 적지 않은 문재인 정권 지지자, 네티즌, 그리고 환경단체 운동가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마이클 셸런버거? 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은 누군데?

이러한 태도 자체가 '주체적'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상식적인 대응일 것이기 때문이다. 셸런버거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의해 2008년 '환경 영웅'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서명을 한 인물들 중 온실가스 감축 운동의 선봉장인 미 항공우주국(NASA)출신 기상학자 제임스 핸슨(James Hansen)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조차, '너는 듣보잡이고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핵발전소 옹호론자일 뿐이다'라는 편견의 벽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가차없이 '듣보잡' 취급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핑커 역시 해당 공개 서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다. 객관적인 숫자와 자료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고민하며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미 맹목적인 반핵 운동을 접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늘리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한 사례다.


원자력 발전: 가이아 여신을 위하여

실제로 많은 환경주의자들이 현재 원자력 발전을 더 개발하고, 그 이용을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는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름도 있고, 다들 너무도 잘 아는 이름이기에 깜짝 놀랄 사람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부터 꼽아보도록 하자.

'가이아 이론'.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정규 교육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니 말이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생명체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발상으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1972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임스 러브록은 2004년, 영국의 신문 〈인디팬던트〉(Independent)에 한 편의 기념비적 칼럼을 기고했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임스 러브록: 원자력 에너지는 유일한 친환경 해법이다(James Lovelock: Nuclear power is the only green solution)

러브록의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기후 변화가 초래할 엄청난 재앙을 고려해볼 때, 화석 연료를 계속 태우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24시간 돌아가는 기저전력을 공급하며, 발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고, 폐기물의 양도 석탄에 비해 훨씬 적다. 따라서 기후 변화의 재앙 앞에 직면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이 칼럼이 공개된 후 세계의 환경주의자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세계관의 창조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핵심 교리 중 하나를 부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것을 계속 믿기로 했다. 제임스 러브록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대다수 환경주의자들의 관성적 사고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

그러한 고정관념에 다시 한 번 돌을 던진 사람이 등장했다. 영국의 환경운동가이며 저술가인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도 『도둑맞은 세계화』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그는, 2011년 4월 5일 영미권에서 가장 대표적인 진보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의 지면을 통해 환경주의자들의 격분을 자아내는 칼럼을 발표한다.

"반핵 로비 단체들이 우리 모두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The unpalatable truth is that the anti-nuclear lobby has misled us all)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반핵 로비 단체들이 과장하고 부풀려온 대표적인 사례로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자 수를 지적한다. 탈핵론자들은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기 일쑤다. 하지만 진실은, 핵방사능 효과에 관한 과학위원회(UNSCEAR, United Nations Scientific Committee on the Effects of Atomic Radi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Of the workers who tried to contain the emergency at Chernobyl, 134 suffered acute radiation syndrome; 28 died soon afterwards. Nineteen others died later, but generally not from diseases associated with radiation. The remaining 87 have suffered other complications, including four cases of solid cancer and two of leukaemia.
체르노빌 원전을 봉쇄하기 위해 투입된 인부 중 134명이 즉각적인 방사능 피폭의 영향을 받았다. 28명이 곧 사망했다. 19명이 추후 목숨을 잃었지만, 대체로 방사능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나머지 87명은 그 외의 복합적 증세를 겪었는데, 네 명은 고형암(solid cancer)에 걸렸고 두 명이 백혈병에 걸렸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만큼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려면, 격납 용기도 없이 폭발한 체르노빌 사고 현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정도의 일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사고 체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은 수십년에 걸쳐 계속 그러한 오해를 증폭시키며, 자기들끼리 인용하여,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를 보라고! 당신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많은 국내의 환경주의자들과 그들이 증폭시키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지 몬비오는, 심지어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지 고작 열흘이 지난 시점, 역시 〈가디언〉을 통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정론을 말했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Why Fukushima made me stop worrying and love nuclear power)의 마지막 문단이다.

Yes, I still loathe the liars who run the nuclear industry. Yes, I would prefer to see the entire sector shut down, if there were harmless alternatives. But there are no ideal solutions. Every energy technology carries a cost; so does the absence of energy technologies. Atomic energy has just been subjected to one of the harshest of possible tests, and the impact on people and the planet has been small. The crisis at Fukushima has converted me to the cause of nuclear power.
그렇다, 나는 여전히 원자력 업계의 거짓말쟁이들을 혐오한다. 그렇다, 만약 무해한 대안이 존재한다면 나는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 기술에는 댓가가 따른다. 에너지 기술의 부재에도 댓가가 따르고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는 가장 가혹한 시험 중 하나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이 사람들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작았다. 후쿠시마 사태는 나를 원자력 발전의 옹호자로 개종시켰다.

물론 그 사고로 인해 많은 이들이 대피해야 했다. 지금도 후쿠시마 원전과 아주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수십만의 이주민은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 아니라 쓰나미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방사능의 누출 그 자체로 발생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최근 인기 예능 〈알쓸신잡〉에서 이른바 '어용 지식인' 유시민 작가도 유포했던,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일본국민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말은, 지진 및 쓰나미 피해자와 원전 사고 피해자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혹은 구분하지 않는, 거짓말일 뿐이다.


환경주의자들의 '선택적' 공감과 우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6도의 멸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진 저널리스트 겸 환경운동가 마크 라이너스(Mark Lynas)역시 원자력 발전을 적극 활용해야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후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6도의 멸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1도, 2도, 3도, 4도, 5도, 6도 높았던 시점을 연구한 고고학/고생물학 논문들을 전부 뒤지고 스크랩하여, 우리가 다가올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 경우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설득력있게 제시한 바 있다.

지구기온이 4℃ 상승하면, 해수면이 0.5미터 이상 높아지면서 이 대도시도 긴 수명을 다할 것이다. 오늘날도 도시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 21세기 후반에는 치명적인 침수가 시작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이 했던 연구에 따르면, 2050년이면 해수면이 50센티미터 올라가 150만 명이 살던 곳을 버려야 하며, 350억 달러의 피해가 날 것이라고 한다. 나일 강 삼각주의 넓은 지역이 바다에 잠기면 로제타나 포트사이드 같은 도시의 시민 수백만 명도 집을 떠나야 한다.[204-205쪽]

이와 같은 재앙을 피하는 방법, 피하지 못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탄소 배출을 급격하게 줄이는 것 뿐이다. 그러자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너무도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환경주의'에 흡착되어버린 '탈핵'의 망령의 힘이 너무도 거세다. 더욱 끔찍한 것은, 해외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여 입장을 변경한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일종의 교조적 이념이 되어버린 환경주의가 국가 정책을 뒤흔들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히피들의 구루, 원전 전도사 되다

무조건적인 탈핵이라는 이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얼마나 무섭냐 하면, '환경주의'라는 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반박하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을만큼 완강하다. 공자가 직접 나타나서 논어를 다시 해석해주는데도 조선의 유생들이 '그것은 진정한 공자의 뜻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10년 2월, TED 토론에서의 일이다.

나는 실제로 그 잡지를 본 적 없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 때문에, 한국의 식자층들 중 많은 이들은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영향을 받았다는 바로 그 잡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원류라는 바로 그 잡지 말이다. 그리고 그 잡지를 창간한 환경주의의 대부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1968년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했던 스튜어트 브랜드가 2000년대에 원자력 발전을 옹호한다. 반면 그렇게 태어난 환경주의를 책으로 공부하거나 귀동냥으로 듣거나 그저 막연한 불안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일단 원전을 없애고 봐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토론을 볼 필요가 있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그의 논적으로 등장한 마크 제이 제이콥슨은 모두 탄소 변화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한다. 나는 당연히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주장 가운데 '풍력 발전이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좁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풍력발전기는 단지 막대가 꽂힐 땅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날개가 돌아감으로써 조류들을 죽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공해 원인이기도 하니 말이다.


탈핵론자들의 공포 마케팅, 청와대를 홀리다

아무튼 '원자력 발전'과 '핵폭탄'을 동치시키는 공포 마케팅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얼마나 강력하냐하면, 스튜어트 브랜드와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토론에서 처음에는 75:25로 원자력 발전의 손을 들어주었던 청중들의 태도가 바뀌어 65:35로 변하게 만들 정도로, '공포'는 힘이 세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 가운데 10%는 오히려 핵탄두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원자력 발전은 핵무기의 생산이 아니라 해체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해도, 이미 들쑤셔진 '공포 마케팅'은 잠들지 않는다.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의 한계는 명확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구름에 해가 가리면 발전이 안 되는 태양광, 바람이 멈추면 발전이 안 되는 풍력만으로는,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발전기가 필요한데, 지형의 한계상 수력 발전으로 그것을 충당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선택은 화력 아니면 원자력 뿐이다. 그리고 둘 중 더 '환경적'인 선택은 당연히 원자력이고 말이다.

환경주의자는 당연히 원자력에 반대해야 한다는 어떤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심지어 '유령'도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굉장히 힘이 세다. 얼마나 힘이 세냐면 환경주의의 창시자가 입장을 바꿔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는 서서히 원자력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환경주의자들이 원자력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원자력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인류에게 100년 후의 미래는 없거나, 매우 불투명하다. 선각자들은 일찌감치 경고를 시작했고, 지난번에 언급한 빌 게이츠처럼, 그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공포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

나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환경주의자'라고 할만한 어떤 활동 내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해외의 환경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늘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왔으며, 그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면에서 나름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환경주의는 맹목적인 탈핵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고 말이다.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해보자. 스스로 생각했던 사람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반면 남이 했던 주장을 그대로 주워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못한다. 그 입장을 바꾸는 순간 본인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주의자들은, 진보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기후 변화 앞에, 그리고 한국의 좁은 땅이라는 선천적 한계 및 기저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는 태양광 및 풍력의 태생적 제약에 대해, 그들은 어떤 해답을 내놓고 있는가. 그저 〈녹색평론〉을 비롯한 몇몇 환경주의자들만의 회람 목록에서 맴돌고 있을 뿐 아닌가. 우리는 과연 〈판도라〉라는 영화 한 편이 나라의 미래와 관련된 논의를 뒤흔들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은 것인가.

탈핵 중심의 환경 운동을 만든 사람들은 이미 그 생각을 버렸다. 우리가 그 고정관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스스로 생각하자. 그래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생각을 바꿔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17-07-21

미래 세대를 위한 에너지 정책

미래 세대를 위한 탈핵?

'미래 세대를 위해 탈핵을 해야 한다!' 탈핵 찬성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사고가 난다면 그 해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원전에서 생산되는 핵폐기물은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미래 세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탈핵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한때 '청년 논객'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탈핵을 주장하는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해야만 하는 미래가 아니라, 대비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미래를 들이대며, 정작 미래 세대의 앞길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10만년 폐기물이라는 패배주의적 협박

원자력에 대한 공포심을 접어두고 잠깐만 생각을 해보자. 방사성 폐기물이 안전하게 보관되어야만 한다는 시간 10만년.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참고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2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10만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적' 단위가 아니다. '고고학적' 혹은 '천문학적'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원자력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것은 1898년의 일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최초의 원자로를 개발하여 인공적으로 핵분열을 유도해낸 것은 1942년. 그리고 지금은 2017년이다. 고작 7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엄청난 과학적 발견과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라. 라듐을 추출한지 44년만에 인류는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3년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70여년만에 독자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의 반열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10만년에 대해 생각해보자. 10만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돌도끼로 사냥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우라늄-235를 농축시켜 발전도 하고 폭탄도 만들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만약 우리 인류가 10만년이 더 흐르는 동안 멸망하지 않고, 기술 발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지구에 살고 있다면, 과연 그 시점에 방사성 폐기물 따위가 문제거리로 남아있을까?

10만년 운운하는 것은 그러므로 협박이다. 무슨 협박인가? 방사성 폐기물의 문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 말이다.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10만년동안 사라지지 않는 폐기물에 대한 공포심만을 자극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협박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빌 게이츠도 '원전 마피아'에게 매수당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마 전 지구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석 연료를 계속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할 수도 있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비중을 더 높일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는 기술적 제약이 존재한다.

포집된 탄소의 부피는 방사성 폐기물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태양광과 풍력은 모두 에너지 밀도가 너무 낮아서 굉장히 넓은 땅에 발전기를 깔아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공해 요소가 된다. 결국 좁은 면적에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해법은 원자력 뿐이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해답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담아 2010년 2월, TED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제로 탄소를 향한 혁신!'이다. 2050년 인류가 발생시키는 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들려면 원자력 발전의 대 혁신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7분 정도 시간을 내서 강연과 질의응답을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진행파원자로(TWR:Traveling Wave Reactor)는 MIT가 2009년 세계 10대 유망 기술로 선정한 바 있는 '오래된 미래'다. 아이디어가 제시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사용되는 원자로는 U-235를 분리하여 연료로 사용하는데, 그 분리 과정에서 U-238 혹은 열화우라늄이 발생하고 방사성 폐기물로 처리된다. 반면 진행파원자로는 바로 그 '폐기물'을 연료로 사용한다. 열화우라늄에 증식파(Breeding Wave)를 쏘아서 플루토늄-239로 증식시킨 후, 이후 발생하는 연소파(Burning Wave)를 이용해 Pu-239를 핵분열시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진행파원자로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한번 연료를 넣으면 최장 60년까지 발전소가 가동된다. 플루토늄까지 완전히 연소시키고 나면 남는 폐기물들은 안정적인 비방사성 물질, 그리고 독성이 약해진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양의 방사성 물질들 뿐이다. 그리고 그 폐기물을 그대로 뽑아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 60년의 기간 동안 연료를 추가할 필요도 교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오류'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훨씬 적다. 말하자면 꿈의 원자로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꿈이다. 아직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고속증식로를 개발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이런 형태는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모든 인류가 풍족하게 에너지를 쓰는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2011년 이후에도 빌 게이츠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부호이자 자선사업가이기 이전에 엔지니어이고, 위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vs. 빌 게이츠

빌 게이츠의 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대한민국의 탈핵 정책.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해보자. 양쪽 모두 '미래 세대'를 걱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구체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탈핵 논의는 '하지 말자'고 주저앉는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는 커녕 그 어떤 과학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진행파원자로가 과연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지, 언제쯤 가능한지,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이 글은 진행파원자로라는 특정한 기술을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둔다.

핵심은 이것이다. 현재의 탈핵 논의는 과학 이전에 세계관과 의지의 문제라는 것.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믿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미래의 에너지를 연구하고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빌 게이츠처럼, 에너지와 원자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난점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방사성 폐기물의 '10만년'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다. 적어도 그 반감기가 다 채워지기 전에 말이다. 우리가 '원전 마피아'를 향해 공허한 손가락질이나 하는 동안, 빌 게이츠를 포함해 미래를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훨씬 안전하고 깨끗하며 믿음직한 원자로를 개발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당연히 비싸게) 판매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10만년이라는 공허한 단위를 놓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면서, 정작 미래 세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킬 것이다.

10만년이 아니라 향후 10년부터 걱정하자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단위는 10만년이 아니다. 10년이다. 그리고 100년이다. 지금처럼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기후 변화가 임계점을 넘는다면 100년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기후 변화를 막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전 인류적 과제다.

한편 우리에게는 1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필요도 있다.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탈핵 정책이 추진된다면, 원자력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인력의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지금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10년쯤 지나면 다방면으로 그 충격이 밀려오게 된다.

빌 게이츠는 2012년 원전 기술 강국인 대한민국과 4세대 원전 개발에 대해 협의했다. 하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2014년 협상이 결렬되었다. 중요한 건 그 시점까지는 우리나라가 빌 게이츠와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탈핵 결정 후 10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래 타령을 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몫을 빼앗게 된다. 10만년 운운하다가 10년 후의 부와 풍요, 안정된 세상을 놓친다. 100년 후의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숙하고 한심한 일이 또 있을까? 대체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대신,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주저앉으면서 '미래'를 운운하고 있는가?

우리가 미래를 먼저 만들자

현재의 탈핵 논의는 기술과 과학 이전에 세계관의 투쟁이다. 새로운 힘, 물론 두렵지만 통제 가능한 에너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의사결정권자들, 환경주의자들과 여당 지지자들은 마치 척화비를 세우고 꽁꽁 문을 걸어잠그던 위정척사파처럼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회를 날려버리는 동안, 빌 게이츠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원전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보다 앞선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스스로 가난의 길을 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0만년 동안 남는 폐기물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 폐기물까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진취적인 미래를, 우리가 먼저 만들자는 말이다.

2017-07-14

한산모시, 세탁기, 에어컨

올 여름 더위는 한산모시로 맞서보자?

2017년 7월 13일, 대한민국 청와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천군수 출신으로 이날 처음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나소열 자치분권비서관이 눈에 띄자 문 대통령은 '한산모시'를 거론했다." 일종의 스몰 토크일 수도 있겠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 대통령이 ""예전 군수님으로 계실 때 한산모시를 입으셨는데 보기에도 참 좋았다"고 말"하자, "나 비서관은 "모시를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도 한산모시를 입으시면 어떠신가"라고 답해 회의장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 '한산모시' 대화는 복선이다. 어떤 복선인가? 현 정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핵 기조에 맞물려, 공공기관 냉방 온도 제한을 민간에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대통령의 심경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문 대통령이 여름철 냉방 온도가 28도에 맞춰져 있는 것을 거론하며 "우리는 28도 지키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수현 사회수석이 "여름철 온도가 28도 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냉방이 켜지고 내려가면 꺼진다"고 답했다.

이어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이 "사무실 냉방 온도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재킷을 벗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굉장히 좋다는 논문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을 벗어도 그렇다. 시민들은 반팔을 입는데 과거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에 반팔 입고 들어가면 추웠다"며 "정부는 28도를 스스로 하면 되는데 민간에는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김승욱, ""한산모시 입으면 3도 떨어져" 靑 회의서 '무더위나기' 화제", 연합뉴스, 2017년 7월 13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3/0200000000AKR20170713095500001.HTML

내가 지난 포스트(링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 청와대에서 나온 한산모시 타령은 박정희 시대의 '근검절약', '한 집에 전등 하나 끄기'와 동일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산업용으로 쓰기에도 전기가 모자라던 시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정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면?

다른 모든 판단을 일단 보류해두고, 한 가지 가정법을 도입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산모시에 대해 스몰토크를 하다가 '공공기관 에어컨 온도 28도를 민간에도 실현할 방법 없느냐'라고 말했다면 여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너무 잠잠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 이것은 값비싼 한산모시로 옷을 해 입는 기득권층 외의 모든 사람의 더위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옷감인 모시는 가격도 비쌀 뿐더러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바느질하기도 힘들다. 빨래할 때에도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 그걸 잘 널어서 말리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입을 때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풀을 뿌려서 빳빳하게 다려야 한다. 요컨대 생산 및 관리에 있어서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옷이다.

게다가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옷감이 너무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 쓰는 사람이 활동적으로 입으라고 만드는 옷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시조 읊는 양반님네들을 위한 옷이다. 만들고 관리할 때에는 남의 노동이 들어가고, 입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옷, 그런 옷을 입자는 말이 농담처럼 회의를 앞두고 오가는 청와대의 풍경이다.


지배층의 한산모시, 피지배층의 에어컨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일이다. 탈핵 탈원전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탈핵 선언을 해버린 청와대에서, 그 무더위에 맞서는 방법으로 농담인 양 슬쩍 한산모시를 운운한다는 것 말이다. 치열하게 머리를 쓰면서, 땀흘려 몸을 움직인 후, 제대로 냉방이 된 곳에서 쉬는 국민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와대는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과거의 지배계층, 세습 귀족들이 입던 노동집약적인 옷감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탈핵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전기 공급 저하에 맞춰 냉방 온도를 높일 것을 민간 영역에까지 넌지시 주문한다.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정작 본인들은 긴팔 옷 입고 있었고, 회의장에 들어올 때까지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한산모시는 그런 옷감이 아니다. 남이 빨아주고 다려주고 풀먹여주는 한산모시 입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거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산모시에 대한 대화는 애초에 더울 일 없는 '윗분들'한테나 통할 소리다.

그런데 그걸 국민들 들으라고, 기업들 들으라고 언론 앞에서 넌지시 흘리고 있다. 이것은 위선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21세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쯤에 해당하는 대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세계관의 차이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고장난 냉장고에 갇혀버린 '진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적극적인 에너지 수요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 탈원전론자들의 기본 논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 중 하나였던 값싼 전기를 포기하더라도, 탈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물론 산업용 전기가 한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저렴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방만하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정용 전기를 OECD 평균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링크). '에너지 절약'이라는 당위와 누진제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정신을 옥죄어온 탓이다.

그러므로 산업용 전기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민간 영역에서 소비하는 전기 사용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다. 탈핵 탈원전주의자들은 당연히 그 또한 줄여야 한다, 혹은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년 7월 2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12131165

이런 식의 주장은 환경주의의 탈을 쓴 전근대적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오가는 탈핵 탈원전 논의의 근간과, 이 퇴행적 전근대주의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에너지의 사용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현재의 환경 담론은 과연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더 효율적인, 더 평등한 에너지를

에너지를 더 쓴다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평등이며, 사랑이다. 일단 그것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 유명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 더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게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강신주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에너지의 사용, 가령 에어컨은, 한산모시 입고 부채질하는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도 여름에 시원하게 몸을 식힐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적으로도 더욱 평등한 선택지인 것이다. 방직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착취를 포함한 여러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전까지는 평생 한 벌의 옷만 겨우 입고 살았을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풍족한 의복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여름에는 제대로 틀어놓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낮 시간을 허비한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일을 하는데, 개인용 난방 기구를 틀려고 하면 회사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지는 원인 중 일부가 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편이지만 결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에어컨 온도를 높이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되지', 이것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다.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피지배계층을 포함한 국민 전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다. 그 한산모시를 만들고, 빨래하고, 풀을 먹여 다리는 사람의 노동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팔자 좋게 좋은 옷 입고 유유자적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도외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우리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마이너스로 잡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에 대해서만큼은 '지금보다 전기의 생산도 소비도 줄이자'는 말이 무슨 합리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에너지의 생산·소비는 경제 그 자체의 성장 및 침체와 직결된 것인데 말이다.

이번 탈핵 탈원전 논의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진영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전근대로의 퇴행적 경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인상이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생산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안에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의 위험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이면서 평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무턱대고 일단 원전은 악이니까 추방하고 보자는 식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 탈핵 논의는 우리를 경제성장도 안 되고 행복하지도 않은 전근대국가의 길로 주저앉힐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산모시가 아니라 26도, 혹은 25도로 맞춰진 에어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한산모시를 입고 다니면서 에어컨을 끄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터와 집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받는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이번 여름의 탈핵 논의를 계기로, 진보 진영 내의 퇴행적 전근대 경향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비판되기를 바란다.

2017-07-12

전기를 아끼는 나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 선포를 해버리면서 에너지 전환이 주요 정치적 논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본디 국가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긴 하나, 정치적 지지와 호오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해당 논점을 파악하고 입장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체로 기존에 '진보'로 여겨지던 진영에서는 탈핵에 찬성하며, '보수'는 탈핵에 반대하거나 신중론을 편다.

지금껏 '진보 논객' 소리를 들어왔지만 나는 지금처럼 기습적으로 선포된 탈핵 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논의일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발주한 공사를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엎어버리는 것이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다는 것이다.

탈핵 찬성론자들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다.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까짓거 한 달에 전기요금 만 원 더 내고 핵발전소(꼭 이렇게 부른다, 핵무기를 연상시키기 위해) 없는 세상에 살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해보자. 현재로서도 그 '단돈 만원'의 전기요금을 내지 않기 위해 무더위를 온몸으로 견디는 취약계층이 있다. 전기요금 내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선풍기 트는 것도 아쉬워하는 에너지 빈곤층이 2016년 기준으로 130만 가구를 넘었다. 이들 앞에서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같은 소리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크게 다르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산업용 전기료만 오르면 괜찮다?

그러면 대체로 이런 반론이 돌아온다. '산업용' 전기요금만 많이 올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약대로 탈핵을 추진할 경우 2030년 가구당 전기료가 연간 31만4000원 인상될 것이라는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의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를 읽어보자.

정 의원의 자료만 봐도 ‘연간 전기요금 31만원 인상’이라는 말은 과장이다. ‘31만원’은 산업용, 상업용, 주택용을 모두 합친 금액이다. 용도별로 나눠보면 산업용 전기료는 1320만7000원가량 인상된다. 하지만 주택용 전기료의 인상폭은 연간 6만2000원, 월간 5200원에 불과하다.

백철, "탈핵하면 전기료 폭탄 떨어진다는 가짜뉴스에 대하여", 경향신문, 2017년 7월 8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707081514011&code=940100

저 대목을 읽고 '아, 가정용 전기요금은 고작 한 달에 5000원 오르니까 괜찮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업용 전기료가 무려 1320만원 이상 오른다는 것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대한민국은 산업용 전기료가 지나치게 낮은 나라다. 너무 전기값이 싼 나머지, 심지어 제철소에서도 용광로보다는 전기로를 선호한다. 그 편이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저러한 주장은 '재벌'에 대한 분노와 맞물려, '저들'에게 '고지서 폭탄'을 날리고픈 감정선을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산업용 전기는 재벌 대기업만 쓰는 게 아니다. 게다가 상업용 전기료도 따라서 오를 수밖에 없다. 집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비한 사람들 중 적잖은 이들이 그것을 중고나라 등에 매물로 내놓는다. 왜냐하면 전기요금이 심각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페에는, 제아무리 '자그마한 동네 까페'여도, 그런 전기 먹는 괴물이 적어도 한 대 이상 있다. 만약 산업용 전기요금이 연간 1320만원 이상 오른다면 상업용 전기를 사용하는 '자그마한 동네 까페'들은 무사할까?

삼성전자도 동네 까페도 전기를 쓴다

'가정용' 전기는 '우리편'이고, '산업용' 전기는 '남의 편'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소규모 도자기 공방은 설비의 용이성과 편리성 때문에 가스가마가 아닌 전기가마를 운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정용이건 상업용이건 산업용이건, 전기 요금 인상의 직격타를 맞는다. 업무에 따라서 많은 양의 데스크탑을 사용하는 개인 개발자 프로그래머 등도 결국 전기요금 인상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이 오르는 것은 지금껏 배불리 먹고 있던 '재벌 밥그릇 빼앗기'니까 괜찮다는 식의 논리는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낮에는 산업용, 상업용 전기를 써가며 일을 하고, 밤에는 가정용 전기를 사용하는 집에서 쉰다.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을 뒤로하고 연일 승승장구하는 삼성전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기업인 키친아트도(참고로 나는 자주 쓰고 바꾸는 후라이팬 류는 꼭 키친아트에서 구입한다) 산업용 전기를 쓴다. 세상에 '나쁜 기업'에게만 미사일처럼 콕 박히는 전기요금 인상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나는 지금 한국의 굉장히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이 전적으로 옳고 훌륭하며 영원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용 전기와 달리 산업용 전기는 요금이 올라도 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그에 따라 옳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논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업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기업의 이익과 성장을 독점하는 일부 '오너'들과, 그들의 전횡을 수수방관하는 사회 시스템이 문제다. 아마 이 주장에는 대부분의 진보 진영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벌과 대기업이 밉다는 이유로 산업용 전기료가 폭등해도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출할 수밖에 없는 고정비용으로서의 전기료 인상은 대기업보다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들에게 더 큰 타격을 안겨줄 것이 너무도 명백한데 말이다.

이게 다 단군 할아버지 때문이다

전기요금은 장기적으로 볼 때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건 지금 너무 저렴하긴 하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사기를 당했던 건지, 여름에는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그 와중에 습도가 6-70%대를 찍는다. 겨울에는 반대로 영하 10도까지도 우습게 내려간다. 여름에는 킨샤샤보다 덥고 겨울에는 모스크바보다 추운 날이 적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 전기 소비 자체를 죄악시하고, 그 위에 재벌 대기업에 대한 적개심을 끼얹어, 문재인 정권의 앞뒤 가리지 않는 탈핵 선언을 옹위하려 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공공기관 실내 온도를 28도로 제한하는데 나라의 뇌가 푹 익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봄에는 미세먼지, 여름에는 폭서와 습기, 가을에도 미세먼지, 겨울에는 혹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렇다. 그렇다면, 무조건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당위를 내거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전기를 아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2016년에 폭염으로 무려 17명이 목숨을 잃은 나라에서,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은 28도에 맞춰진 에어컨 때문에 낮에 더워서 일도 못하고 헤롱거리다가 야근을 하게 되는 이게 정상인가?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여름에는 열사병으로 목숨을 잃는 취약계층은 겨울에는 또 가스비를 내기 어려워서 전기장판 하나로 목숨을 부지한다. 에어콘을 꺼요, 냉장고가 없으면 음식이 빨리 상해서 이웃과 사이좋게 나눠먹게 되네요, 선풍기 하나면 충분해요 같은 소리는 이미 충분히 잘 만들어진 집에 살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찍찍 내뱉는 배부른 비윤리적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탈핵 논의는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정치화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 때문에 에어컨을 끄고 땀흘려 고생하라는 식이었다면,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그 자리를 환경 담론이 차지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정권이나 저 정권이나, 퇴행적인 '에너지 절약'이라는 거짓 당위를 앞세워 냉철한 논의가 설 자리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고생한다며 정부에서 130억을 들여 택배 자동화 기술을 개발하기에 앞서, 모든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쉬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쉬는 시간에는 에어컨이 틀어진 휴게실에서 쉴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어주는 나라 말이다.

저렴한 전기료가 우리의 실생활과 상관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값싼 전기를 '사람'이 아닌 '기계'에만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직장에서 혹은 각자의 일터에서 보낸다. 일하는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 그 어떤 나도 행복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전기료의 급격한 인상은 일터의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전기를 사람이 쓰는 것, 사람의 몸이 편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이런 논의가 동반되지 않는 한 전기요금과 관련된 현재의 논의는 극히 퇴행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에 에어컨을 28도로 고정시키는 정부와, 아파트 경비실에 설치된 에어컨을 틀지 못하도록 하는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전기를 아끼는 게 개인의 고통보다 중요하다'는 박정희 시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 자리에서 쫓아낸 지금도 그 망령은 여전히 살아있다. 아니, 이제는 친환경 탈핵 탈원전이라는 새로운 망토를 두르고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탈핵 탈원전의 당위를 무턱대고 앞세우는 대신, 보다 냉철하게 향후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여름이 되기를 바란다.



* 일러두기: 본문의 부정확한 서술을 수정했습니다. 2017년 7월 12일 오후 5시 20분.

2017-06-05

문재인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문재인 정권의 전반적인 경향성을 네 글자로 줄이자면 '내로남불'일 것이다. 자신들이 하면 위장전입도 건강보험료 부정도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요컨대 '내로남불'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울러 '정규직 일자리 81만개 확충', '원자력 발전소 전면 폐쇄'처럼 요란하게 홍보했던 멋진 정책들도 모두 슬그머니 포기하거나 목표를 과감하게 하향 조정하고 있다. 노래 가사마냥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하지만 국정과제 선정 과정에서 문 대통령 공약 일부는 수정 혹은 폐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정기획위는 이미 부처별 1차 업무보고에서 일부 공약을 수정하거나 실제 이행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기업 반발이나 현실적인 제한 때문에 공약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기도 쉽지 않거나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가계 통신비 인하(통신 기본료 폐지), 광화문 대통령, 탈(脫)원전·탈석탄발전소, 고교학점제 도입, 전속고발권 폐지 등이 대표적 사례다. 국정기획위가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현재 6470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4대강 보 개방 등도 추진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일 수 있다.

김채연, 이태훈, 황정수, 박동휘, 이정호, "국정기획자문위원회 1차 업무보고 마무리…폐기·수정 기로에 선 5대 공약", 한국경제, 2017년 6월 4일, (링크).

그러나 어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청와대 참모들은 이미 배치된 사드를 조용히 '착하게' 포장하는대신, 이미 들어와 있다고 언론에 보도까지 되었던 미사일 발사대 4기를 문제삼아 국방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분노가 밀려온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미 배치하기로 합의가 끝났고, 당연히 국회의 비준 따위 처음부터 필요 없는 포대 하나를 두고, 신임 정부가 끝없이 어깃장을 놓고 있다. 대한민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을, 특히 평택 미군기지와 왜관 부산으로 이어지는 미군 보급선을 지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포대를 놓는데, 수도권의 시민들은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반론'을 야권에서 끊임없이 생산하다가 급기야는 그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까지 했다. 미군들이 죽건 말건 한국 정부는 신경 안 쓰지만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이런 나라에 정나미가 안 떨어지면 이상한 일 아닌가?

미국의 입장이 '옳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최소한의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북한은 한국을 향해 전면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 반대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북한을 선뜻 폭격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폭격을 사랑하는 나라가 미국이고, 북한의 핵 시설을 날려버릴 폭탄쯤은 넘쳐난다. 하지만 때릴 수가 없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미군의 피해가 당연히 발생하고 대대적인 확전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북한 뿐 아니라 미군의 우발적 행동 역시 막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드는 그 주한미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받으며 주둔하는 한, 대한민국 역시 위 문단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보호받는다. 저러한 식의 '공포'를 북한에 심어주기 위해서 우리가 '자주국방'을 하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과연 얼마가 될까? 북한의 전면적 공격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이렇듯 많은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골수' 진보 자주파가 아닌 다음에야, 주한미군의 철수에는 대체로 반대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1.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2.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와 비용을 어느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가?
  3. 셋째,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할 경우 그 비용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설득할 의향이 있는가?

5월 31일 문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 소속 딕 더빈 상원 원내총무를 만나 사드 배치에 대해 논의했다. 더빈 의원은 면담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원치 않으면 9억2300만 달러(약 1조300억원)의 관련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밝혔"다(링크). 문제는 청와대에서 내놓은 해당 면담에 대한 브리핑에서는 그러한 충격적 발언에 대한 언급이 쏙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더빈 의원이 거짓말로 인터뷰를 한 게 아니라면, 청와대에서 언론 브리핑에서 해당 내용을 '보고 누락'한 셈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언론의 추가 취재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다. 마음을 굳게 먹고 출입기자단과 청와대 관계자의 문답을 읽어보자.

▶기자=“더빈 총무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이냐”
▶청와대 관계자=“비슷한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미국은 한국에 사드 배치를 위해 9억2300만 달러를 지불할 예정인데 한국 내에서 사드 배치가 큰 논란이 되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고 했다”
▶기자=“민감한 발언인데 어제(5월 31일)는 왜 공개를 안 했나”
▶관계자=“(더빈 총무 발언이) 그렇게 중요한가…아, 그냥 미국 시민으로서 국익 차원에서 평범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다”

허진, "[현장에서] 더빈 발언을 “그냥 미국 시민 질문”으로 느꼈다는 청와대", 중앙일보, 2017년 6월 2일, 강조는 인용자. (링크).

저 청와대 관계자의 말대로라면 문재인 대통령은 '일개 미국 시민'과 만나서 사드 배치라는 안보 중대사에 대해 논의를 한 셈이다. 문재인의 청와대에는 대체 무슨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들어가 있는 것인가?

더빈 의원의 발언이 갖는 심각성을 인식해서 브리핑에서 뺐다면 그것은 의도적 왜곡이며 '보고 누락'이다. 반면 저 설명대로 '일개 미국 시민'이 하는 흔한 소리로 이해해서 언론 브리핑에 소개하지 않은 것이라면, 청와대 외교 안보팀은 그 자리에 앉아있을 능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한국에 불고기와 비빔밥을 먹으러 온 여느 미국인 관광객이 아니라, 미국 국방 예산을 주무르는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청와대는 미국 더빈 의원의 발언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라는 발언까지 대놓고 했다.

세상에 이런 무례한 행동이 다 있나? 한국인들은 조지 W. 부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 사람'(this man)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모욕감을 느껴왔다. 그런데 자신들은 미국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상원 원내총무를 '그냥 미국 시민'이라고 부르다니?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사드 배치에 대한 기존의 협의 사항을 잘 지켜나가자고 다시 당부했지만, 문제는 청와대에 있다. 문 대통령과 문정인 외교안보수석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그래서 이렇게 사드를 놓고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의 외교적 지향점이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크고 엄청난 사건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미 ('K값'이 무려 1.6이나 나온, 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부정선거'지만) 합법적 절차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 신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놓고 있는 외교적 행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일언반구 언급 없이 그저 보여주기식 '사이다' 행보만을 거듭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사드 배치를 취소하고 싶게 만드는 모든 행동을 하면서, 겉으로는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논하고 있다. 이것은 부산으로 도망치면서 서울은 안전하다고 외친 이승만의 거짓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정직함을 요구한다. 청와대 참모진에게 최대한의 업무 파악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들은 지금, 동맹의 가치를 코 푼 휴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최악의 예측불가능한 미국 대통령이 재임한 가운데, 극히 위험한 외교 안보적 불장난을 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철수, 한미동맹의 파기, 중국의 보호 하에 가능한 북한과의 통일을 원한다면, 제발 정직하게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국민들에게 논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혹시 잊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2017-05-31

E. H. 카의 글쓰기 방법론

비전문가들--말하자면 학계에 있지 않은 분들 혹은 다른 학문분야에 있는 분들--은 이따금 나에게 역사가는 역사를 쓸 때 어떻게 작업하느냐고 묻는다. 역사가는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단계나 기간으로 나누어 작업한다는 것이 가장 상식적인 생각인 것 같다. 우선 역사가는 자신의 사료들을 읽고 그의 노트를 사실들로 채우는 데에 오랜 준비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나서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사료들을 치워놓고 노트를 꺼내 든 채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나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으며 그럴듯해 보이지도 않는다. 내 경우에는, 주요한 사료라고 생각되는 것들 중에서 몇 가지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너무나 좀이 쑤셔--반드시 처음부터가 아니더라도, 어디부터이든 상관없이--쓰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는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읽기를 계속하는 동안 쓰기는 추가되고 삭제되며 재구성되고 취소된다. 읽기는 쓰기에 의해서 인도되고 지시되며 풍부해진다: 쓰면 쓸수록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내가 찾고 있는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역사가들은 아마도, 마치 어떤 사람이 장기판과 말이 없어도 머릿속에서 장기를 두듯이, 펜이나 종이나 타이프 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 준비단계의 글쓰기를 모두 머릿속에서 할 것이다: 이는 내가 부러워하는, 하지만 흉내낼 수 없는 재능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역사가에게는 경제학자가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이라고 부르는 그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며, 실제로 그 두 과정은 단일한 과정의 부분들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그것들을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이단론들 중의 어느 하나에 빠지게 된다. 여러분은 의미나 중요성을 무시하는 가위와 풀의 역사를 쓰거나 아니면 선전문이나 역사소설을 쓰게 될 것이며,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부류의 글쓰기를 치장하려고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E. H. 카,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서울: 까치, 2015), 개역판, 44-45쪽.

이 글에서 E. H. 카의 목적은 '사실'의 수집에 집착하는 랑케 식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맥락에 이미 식상해버린 오늘날의 독자, 즉 나는, 순수하게 '작업 방법론'의 측면에서 이 대목을 재미있게 읽었다.

자료를 한도 끝도 없이 모으고, 참고문헌 목록을 영원히 갱신하고, 스스로의 논리를 (완성을 위한 텍스트가 아닌 간단한 메모나 그조차도 없는 망상의 형태로) 반박하고 또 반박하는 등의 행동은, 심지어 석사 논문같은 간단한 관문을 통과할 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고 있다,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즐기려는 게 아니라면, 일단 쓰기 시작해야 한다. E. H. 카의 말처럼 '좀이 쑤시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말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내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상식적이다. "대부분의 작가와 달리 최초의 구상안에서 빗겨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자료들을 다 모은 후, 읽고, 일일히 손으로 베낀 후, 그것들을 편집하고 원고로 쓰면서 다시 베껴썼다는 토니 주트의 글쓰기 방법론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 이미 완성된 글을 그저 '쓰는' 사람이 존재한다. E. H. 카는 짐짓 겸손한 태도로 본인이 그러한 경우에 속하지 않음을 밝히며, 그 과정에서 '가위와 풀'(오늘날의 표현대로 하자면 '복붙')로 대변되는 랑케의 역사관에 반대했던 것이다.

2017-05-30

문재인 정권, 싸드 불장난을 멈춰라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싸드 발사대가 두 대만 들어와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국방부로부터 그렇게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네 기가 더 있었기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했다고 윤영찬 홍보수석비서관이 발표했다. 5월 30일, 오늘 가장 큰 뉴스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 이것은 언론플레이다. 그것도 아주 수준이 낮고 질이 나쁜 언론플레이다. 외교 안보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로 이런 불장난을 하는 문재인 정권을 나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이렇게 대놓고 집권한지 한 달도 안 돼서 언론플레이부터 하는 청와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국방부(와 한통속이 된 미국)'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여론몰이 하려는 의도는 알겠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 서서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청문회 정국에서 여론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과 그의 주변 인사들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 유포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백번 양보해서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왔었다는 것을 청와대가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고 쳐보자. 그걸 홍보수석을 통해 언론에 대고 발표하는 것은 과연 '대통령'으로서, '청와대'로서, 합당한 행동인가?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와 있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2017년 4월 28일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28일 군관계자는 "현재 사드의 발사대 4기는 경북 칠곡 왜관의 캠프 캐럴에 보관중이며 성주골프장의 시설공사를 마치는 하반기에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링크) 그보다 이틀 전에 나온 다른 뉴스. "이동식 발사대는 요격미사일을 쏘는 발사대로 지난달 6일 사드 장비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했고, 보통 사드 1개 포대는 6기의 발사대를 갖춥니다."(링크)

정리하자면 첫째, 싸드 발사대가 한반도에 총 여섯 기 들어와있다는 것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둘째, 설령 그 보도를 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싸드라는 것이 어떤 시스템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1개 포대가 배치된 이상 6기의 발사대가 뒤따라왔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마치 '장전된 리볼버 한 정'에는 실탄 여섯 발이 들어있으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말이다.

문재인의 청와대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트집을 잡고 있는 셈이다. 보고가 누락되었다 한들 '아니 어떻게 발사대 네 기가 몰래 들어와 있을수가?'라고 역정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조직과 인력들이라면 설령 저런 착오가 있었다 한들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혼동한 사람이 쪽팔리는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화를 낸다면 이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싸드 발사대 네 기가 한반도에 몰래 들어와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가짜뉴스'다. 문제는 그 '가짜뉴스'의 출처가 청와대라는 것이다. 싸드는 현재 외교 국방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사안이다. 그것을 두고 청와대에서 '가짜뉴스'를 유포한다? 그것도 한낱 국내 정치에서 팻감으로 쓰기 위해? 국방부 길들이기 하려고? 국방부를 길들이려면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인사권을 활용할 일이지, 이렇게 동맹국과의 신의를 지속적으로 흔드는 수를 써야만 하는 것일까? 문재인과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외교란 무엇이고, 안보란 무엇이며, 국방이란 또 대체 무엇인가?

나는 문재인에게 한 표를 던지지 않은 60%의 국민의 일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문재인을 대통령으로서 존중한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과 청와대 역시 국민들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한 외교 안보 이슈를 국내 정치용, 청문회 국면 돌파용, 국방부 길들이기용 카드로 휘두르지 않는 것은 그러한 국민 존중의 첫 걸음이다. 문재인 정권은 안보 불장난을 멈추고 수권세력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17-05-18

문재인의 '10조 추경',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이었던 '80만 일자리 만들기'를 실현하기 위해 10조 단위의 추경을 추진할 예정이다. 물론 대통령 본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지지자들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5월 17일 나온 기사에 따르면, 우리는 무턱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며 잘 될 것이다'라는 태도만을 취할 수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각종 위원회를 신설하면서 공직사회가 반색하고 있다. 만성적인 인사적체를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새 정부는 위원회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위원회가 많으면 부처와 중복되는 ‘옥상옥’ 조직이 돼 관료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병률, "관료들, 새 정부 각종 위원회 신설에 ‘반색’…인사적체 해소 기대", 경향비즈, 2017년 5월 17일

이미 대선 과정에서 수없이 지적되었다. 문재인 캠프는 대체 '10조 추경'을 통해 어떤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인 내역을 밝힌 바 없다(링크). 서서히 그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반가운 일인데, 그것이 '옥상옥' 조직이 될 우려가 큰 온갖 '위원회' 만들기에 투입된다면? 그러한 예산 편성과 집행이 '중년 공직자 배불리기'의 일환일 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

국가 전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무원은 늘어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대선 토론 과정에서 지적되었다시피, 한국의 공무원 숫자가 OECD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비판은 과장된 허위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만 합한 숫자인데, 다른 국가들은 관공서 비정규직을 비롯해 비영리 공공단체와 사립학교 교원, 군인까지 모두 포함한 경우가 많"(링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무원 숫자를 많이 늘리겠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현직 공무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많이 늘린다는 문재인의 대선 공약은 지금이라도 철저히 검증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공무원이 현재 '안정된 일자리'로서 최우선 순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망한 나라인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의 건강한 성장이지 공무원 일자리'만'의 성장이 아니다.

2017-05-17

노무현과 진보 언론의 갈등

진보 언론에 대한 문재인 지지자들의 원성이 높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노무현을 무조건 매도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후에야 꼬리를 내린 비겁자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일단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진보 언론이 노무현과 대립했던 것은, 노무현과 대립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 언론은 진보 언론이기에 노무현을 비판해야 했다. 그가 재임 중, 그리고 퇴임 후에 연루되었던 가족 친지들의 뇌물 수뢰 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이라는 이유로 뇌물을 받았는데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보' 이전에 그냥 '언론'이 아니다.

위 표는 2006년 7월 7일 경향신문에 실린 "조·중·동의 왜곡 ‘신문발전기금’ 악의적 보도"(링크)가 출처다. 행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진보의 이상을 배신한 것은 노무현임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은 '조중동'을 비판하는 쪽에 더욱 가깝지 노무현에게 직접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지는 않다.

불과 10여년 전의 사실들을 두고 '설명'이 필요하게 될 줄이야.

2017-05-10

중식이밴드 정중식 씨의 페이스북 게시물에 대한 비판

일러두기) 이것은 2016년 12월, 중식이밴드의 정중식 씨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에 대한 반박문이다. 나는 2016년 12월 10일 트위터에 트윗 타래를 올렸고, 그 내용을 지금 갈무리하여 블로그에 적어둔다. 원문을 보고 싶다면 이 링크를 클릭하여 확인할 수 있다.



정중식 씨가 자신의 페북 포스트를 비공개로 돌린 모양이다. 꼭 지적해야 할 내용이 있었는데. 기억에 더듬어 말해보자. 그는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남자도 편해지도록 만들어준다'고, 어디서 잘못 읽고 체한 상태다. 전혀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은 남자를 '편해지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가부장주의적 성역할'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이다. 어떤 남자들, 아니 실은 많은 남자들이 가부장제의 성역할을 사실은 좋아하고 즐긴다. 다른 남자들에게 지배당하지만, 여자를 하대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가부장제가 수천년간 이어저온 이유다. 가부장제가 실은 남자들 전반에게 해로우면 그게 수천년이나 이어져 왔겠는가? 여자들 전부를 노예화함으로써 피지배층인 남자들에게 제공하는 가부장제가 양심 없는 남자들에게 '불편할'리가 없다.

페미니즘은 '여자도 돈벌어오고 집 사오고 남자인 나는 편해지고 ㅋㅋ'가 아니다. 여자는 원래부터 돈을 벌어온다. 다만 차별당하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해도 버는 돈은 60%다. 여자들은 같은 일을 하고 돈 더 받아야 하고, 남자는 집안일해야 한다.

정중식 씨의 사례를 보면, '페미니즘은 남자들에게도 이익이다' 같은 식의 설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 남자들은 별로 손해도 안 봤으면서 자신에게 뭔가 단물(사근사근하게 설득해주는 예쁜 페미녀?)이 돌아오지 않으면 즉각 반발한다.

그럼 대체 왜 남자가 페미니즘을 옹호해야 하나? '남자'인 내게 손해인데도? 맞다. 가부장제의 구조 속에 안주해온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은 분명 손해다. 하지만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차별받는 동료 인류에 대한 인간적 의무다.

'페미니즘에 동의하면 잠재적 연애 대상이 많아지니까', '진정한 페미니스트 여성은 월 200도 못버는 인디밴드 나님에게 공짜 섹스를 배풀어줄테니까' 이런 거 아니다. 그냥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여성차별에 대한 반대니까.

월 200도 못 버는 남자의 성매매를 옹호하는 정중식 같은 남자들은, 그 남자들을 위해 빚으로 옭아매인 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일부로 기꺼이 복무한다.

그래놓고 휴머니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국 '여자'를 '사람'의 범주에서 뺀다는 뜻이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정중식 씨 당신은 방금 그렇게 말해놓고, 욕 좀 먹으니까 페이스북 게시물을 비공개로 돌렸다. 당신은 성차별주의자 이전에 인간차별주의자다.

페미니즘 책 읽지 마라. 거기서 어설프게 한 두 문장 주워섬기면서 '야 여자도 같은 권리가 있으니까 같은 의무를 짊어져라' 같은 개소리 내뱉는 남자들 정말 보기 흉하다. 여자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도 않는 자들이 왜 '페미니즘'을 공부해?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하고 남자들처럼 야근을 못하고 그래서 유리천장이 생겼고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이런 헛소리 늘어놓을 거면 페미니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해롭다. 그럼 힘 약한 남자한테는 임금차별 해도 정당한가?

정중식은 결국 여자를 동등한 '사람'의 범주에서 배제하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을 어설프게 흡수한 후, 자신들의 가부장적 세계관에 맞도록 억지로 끼워넣는다. 여성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페미니즘 공부', 걍 하지 마라.

남자가 그대로인 채로 페미니즘 세상이 오면 '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해진다. 당연한 거 아닌가? 페미니즘은 새로운 남성성의 개발을 요구하며, 아직 그 길은 개척되지 않았다. 남자들 '편해지자'는 게 아니라, 남자를 '바꾸자'고 하는 것이다.

성차별이 해소, 혹은 최대한 완화된 세상이 오면, '양심적인 남자들'의 '양심'은 편해진다. 하지만 모든 남자들의 육체는 지금보다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예전처럼 '농담'도 못하고, '터치'도 못하고, '그랩'도 못하고, 돈은 돈대로 벌어와야 한다.

페미니즘은 '그러니까', '편해지니까' 동의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여자들도 오픈리 페미니스트가 되면 삶이 피곤해진다. 어떻게 남자가 '편해짐' 하나? 염치가 없나? 남자는 여자보다 몇 배로 더 불편해질 것이며,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옳으니까.

옳으니까 옳은 일을 한다. 가난하건 부유하건, 배웠건 못 배웠건. 나는 가난하고 못 배웠으니까 천박해도 된다고 말하는 정중식 씨는 '남자 망신' 그만 시키고, 페미니즘 공부도 그만두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당연한 진리부터 인정하기 바란다. -끝-

2017-05-02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

2017년 5월 9일 치러질 제19대 대선에서 기호 3번 안철수 후보에게 표를 줄 생각이다. 세상 만사에 의견 밝히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지 10년도 넘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누구를 찍겠다고 선언해본 적이 없다. 시인 김수영이 "엔카운터識"에서 했던 표현을 빌자면, "야한 선언은 안해도 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의 구절처럼, "어제하고는 틀려졌"고, "틀려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틀려져야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당신한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야한 선언'을 한다. 안철수를 찍겠다고.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그 이유는 세 사람의 이름과 이어진다.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


1. 신해철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뜰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그 신해철이 그렇게 열심히 지지했던 민주당에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약칭 의료분쟁조정법), 일명 '신해철법'의 통과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법안이 표류하게 되리라는 것 또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은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발의되었다. 전자는 더불어민주당 오제세 의원, 후자는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골자는 같다. 사망이나 중장애 등 중대한 피해 발생시, 의료사고 피해자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분쟁 조정을 신청하면 의료인의 동의 없이도 조정 절차가 개시될 수 있도록 법에 명문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큰 수술의 경우 마취된 상태로 본인의 몸을 맡겨야 하고, 전문적인 의료 지식이 없으며, 상대방의 고의나 과실을 입증하기도 어려워 의료사고 발생시에도 재판을 통해 권리를 보호받지 못했던 의료사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조정을 통해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주는 법이다. 반대로 의사들은 그러한 조정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15일 내에 이의를 제기하면 된다. 법으로 강제되는 것은 조정절차의 '개시'일 뿐 그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료 단체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고, 더불어민주당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법안 발의를 해놓고는 상임위 법안소위에 안건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결국 19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될 처지에 놓였는데 그때 고인의 유족 및 친지들이 안철수 의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안철수는 이름만 걸고 엉덩이를 빼는 대신,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틀만에 신해철법이 법사위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안철수는 전국의사총연합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낙선운동을 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바로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새누리당도 더불어민주당도 신해철법을 발의만 하고 내버려뒀던 것이다.

2016년 2월 12일, 4월 총선을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이다. 의사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철수는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기로 하고 옳은 일을 했다. 그러자 스포트라이트가 안철수에게만 쏠리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던 거대 여당과 야당의 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철수는 의석을 지켰고 국민의당은 모든 정치평론가들의 예상과 여론조사를 뒤엎고 40석에 가까운 제3당이 되었다. 그리고 20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여 신해철법이 통과된 것이다. 2016년 5월 19일의 일이었다.

이 사례는 대단히 중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문화적 프로파간다가 필요할 때마다 신해철의 음악과 발언 등을 많이도 이용해왔다. 하지만 정작 그의 유족들을 위해 결정적인 노력을 한 사람은 안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어떤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왜 신해철의 유족이 문재인이 아니라 안철수에게 "그대에게"와 "민물장어의 꿈"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는지 의아해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꼭 필요할 때, 예상되는 불이익을 무릅쓰고, 어려운 이들을 도왔기 때문이다.

신해철법의 통과 과정이 증명하고 있다. 안철수는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손해를 봐야 한다. 그 손해를 뛰어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얻지 못하더라도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지만, 큰 책임을 지고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도자에게 더욱 절실하다.

나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정치적 손해를 무릅쓸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 말로만, 선량한 이미지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다는 정치적 이력서를 가진 사람 말이다.


2. 김영란

일단 그 법의 이름을 '김영란법'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 점부터 확실히 해두고 싶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약칭은 "청탁금지법"이지 '김영란법'이 아니다. 청탁금지법의 역사는 안철수의 정치 이력과도 거의 포개진다. 이 대목은 이미 잘 정리된 기사를 인용해보자.

안 전 대표는 지난 2013년 8월 김영란법과 관련한 정부안이 제출됐을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사회정의'를 강조하며 "원안 통과"를 주장했다.

당시 안 전 대표는 같은해 4월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뒤 독자세력 구축에 나서고 있던 터라 혁신 경쟁을 벌였던 김한길 대표 체제의 옛 민주당이 2014년 김영란법을 정치혁신 과제로 선정‧발표하는 데 자극을 줬다.

안 전 대표의 김영란법 소신은 옛 민주당과 통합해 새정치연합으로 거듭난 이후 의원총회 등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안 전 대표는 지난해 3월31일 새정치연합 창당 후 처음으로 열린 의원총회에서 "'김영란법을 이번 4월 국회에서 통과해야 한다"며 "원래 취지대로, 많은 국민이 바라는 대로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4월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도 김영란법 처리를 요구하며 "이 법안의 통과야말로 정치권의 자기정화 의지를 국민에게 보여드리는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안 전 대표는 7·30 재보궐 선거 참패로 대표직에서 물러나 5개월여간 자숙기간을 가진 뒤 내놓은 첫 일성도 '김영란법 처리'였다.

당시 김영란법이 소관 국회 상임위인 정무위원회 처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안 전 대표는 성명을 내고 "'김영란법'은 가히 '부패공화국'이라고 할 대한민국의 공직자 부패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강력한 반부패 법안으로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힘을 실었다.(링크)

그런데 부정청탁법은 '신해철법', 즉 의료분쟁조정법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다. 의사들의 반발만 이겨내면 그만이었던 의료분쟁조정법과 달리, 교수, 기자, 공무원, 정치인 등 너무도 많은 이들이 부정청탁법의 적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료분쟁조정법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양이가 대단히 많고 힘도 세다.

안철수가 한 일은 여당과 야당의 책임자들을 만나 그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2015년 2월 26일, 안철수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차례로 만나, 부정청탁법을 다음 본회의에서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는 국민의당을 창당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안철수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대립 구도를 넘어, 양자를 오가며 합의점을 찾아내고 옳은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부정청탁법을 좌초시키면서 생색내는 건 너무도 쉽다. 거대 여당과 거대 야당이 서로를 탓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면 된다. 그러면 국민들은 속이 터지겠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놈들 때문에 그랬다'면서 남탓만 하면 우리쪽 지지층은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을텐데. 그것이 바로 적대적 공존의 매커니즘이다.

애초에 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미 '적'으로 보고 있다면, 그래도 대화를 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정치인은 군인이 아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합의점을 도출해내야 한다. 안철수는 날치기 통과도 필리버스터도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가장 많은 고양이, 아니 호랑이들의 목에 방울을 달아야 했던, 부정청탁법을 두고서 말이다.

안철수를 찍고 싶지만 문재인이나 심상정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진보적인, 혁신적인, 개혁적인 의제 가운데 많은 것들은 어쩌면 안철수가 대통령이 될 때 더욱 잘 실현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부정청탁법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안철수의 정치 스타일은 '말이 되고 좋은 법이면 누가 발의했건 통과시킨다'이기 때문이다. 좋은 법이지만 새누리당에서 발의했으니까 안 되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더민주가 빛을 볼까봐 일부러 망쳐버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정책에 대해 제대로 토의하고 협상하여 빠르게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권을 원한다면 현재로서는 안철수를 찍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번 대선은 누가 이기건 여소야대 대통령이 된다. 우리에게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정치를 할 줄 아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던져놓고 원외투쟁을 일삼거나, 국회법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날치기 통과를 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안철수는 소위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법의 통과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입증한 바 있는, 당선 가능한 대통령 후보다.


3. 안철수

안철수가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국회의원 의석수 200석으로 줄이겠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국회를 불신하지만, 그 국회에게 탄핵당한 박근혜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행정부보다는 입법부에게 더 많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에 부합한다. 안철수는 정치 혐오에 기대어 급성장한 포퓰리스트라고 나는 판단했고, 절대 그에게 표를 줄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런 면에서, 2012년에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정치는 큰 혼란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을 조율하고 그 중에서 최선을, 차선을, 차차선을, 차악을 택해나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때로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끌어내야 하지만 때로는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안철수는 의사로 교육받은 후 프로그래머로, 또 사업가로 살아왔다. 의학은 과학이다. 생명 그 자체의 신비로움과는 별도로, 사람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고, 명백한 오답이 존재한다. 프로그래밍은 그보다 훨씬 더 확실한 논리의 세계다. 사업은 1인1표가 아니라 1주1표의 원리로 돌아가는, 민주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일이다. 정치에 뛰어들자마자 대통령이 되었으면 안철수가 대한민국에 큰 혼란을 초래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하지만 안철수는 금방 배웠다. 앞서 살펴본 두 사례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20대부터, 30대부터 국회의원이 되어 지금껏 기세등등한 구386들보다 안철수가 훨씬 '정치'를 '정치답게' 잘 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용기, 정치적 목표의 실현을 위해 상대방과 마주앉아 대화하고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지혜를, 이미 실천적으로 입증했다. 대통령직에 요구되는 새로운 도전 과제에도 역시 잘 적응하고 대처해낼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현재 당선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후보자는 총 세 명이다. 그런데 그 중 대통령이 된 후에도 뭔가를 배워나갈 것이라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안철수 뿐이다.

대한민국은 외교, 안보, 정치, 경제, 기타등등 전방위적인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지지자들에게 종교적인 숭배를 받고 있지만 국회 활동 실적부터가 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스스로를 '스트롱맨'이라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발언과 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젊은 시절 약물을 이용한 강간을 시도했다는 사실까지 자서전에 써놓은 사람을 두고 대통령의 자격을 논해야 하는 걸까. 소거법으로 생각해봐도 당선권 내에서 '찍을만한 사람'은 안철수 뿐이다. 이렇게 다시 한 번 검산을 해본 후, 나는 안철수를 찍기로 결정하고,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이번 대선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붕괴했기 때문에 치러지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다. 그런데 그 빈 자리에 무능한 운동권 세력이 들어선다면, 그들과 적대적 공존 관계인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홍준표가 지지율을 높이면서 벌어지고 있는, 5월 2일 현재 상황이 바로 그렇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무능한 운동권 세력의 적대적 공존, 그것은 '절대적 공존'이다.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그 구도가 깨진다. 국민이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정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수십년에 한 번 돌아올까 말까 한 역사적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결과를 보고 싶다. 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내 힘을 보태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안철수를 찍을 것이다. 내 결정을 알리고, 이 생각의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설득되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양자택일 속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는 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하는 말을 인용해보자.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대담하고, 과감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지만 잘 살펴보면 안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 나는 10년 전의 여당도 두 달 전의 여당도 아닌, 미래의 여당에 한 표를 던진다.




보론

이른바 '진보 논객'이면서 왜 심상정을 찍지 않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들어올 것이다. 맞다. 나는 '진보 논객'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들도 나를 그렇게 바라본다. 하지만 한국 진보 진영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논의 중 많은 것들에 나는 동의할 수 없고, 애석하게도 그 논의들은 심상정의 공약에 반영되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싸드다. 나는 싸드를 한반도에 배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바꿔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확고한 싸드 배치 찬성론자다. 당연히 싸드 비용은 미국이 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미군이 소유하고 운용하는 미군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 미국의 무기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진보 진영의 기본적인 세계관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은 군사동맹을 맺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안전과 번영의 토대다.

이것은 진보 진영의 세계관 전체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2008년 이후, 진보는 정부가 추진하는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온갖 종류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며 반대하는 관성에 젖어 있다. 그래서 싸드에서는 중국 영토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전자파가 나오고 그것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 그 전자파는 '죽음의 전자파'여서 레이더보다 해발 고도가 낮은 곳에 위치한 참외밭의 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드 배치를 반대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을 향해 무력 충돌을 운운하는 것은 이쪽에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지만, 미 대통령 트럼프가 말도 안 되는 10억 달러를 운운하는 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는 주권 침해가 된다.

요컨대 반미주의, 반과학주의, 음모론주의가 오늘날의 진보 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면 세계에 대해, 국제 정세에 대해, 대단히 부정확한 정보 하에 분기탱천할 뿐인 오늘날의 대한민국 진보의 모습이 나온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래도 사회적 당위의 실현을 위해 진보 정당을 지지해왔으나, 모든 대선 공약이 '복지 확대'로 수렴되고 있는 지금, 나는 진보 진영과 나의 세계관 차이를 더는 없는 척 할 수가 없다.

앞서 부정청탁법을 논의할 때 기술했다시피, 안철수가 지금까지 해온 정치적 스타일을 놓고 볼 때,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심상정의 공약 중 좋은 것들은 현실화될 수 있다.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면 안철수의 공약들을 가져다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심상정 본인과 그의 정당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이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는 심상정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진보 진영의 세계관과 나의 그것이 갖는 차이에 대해, 그리고 내가 왜 동의할 수 없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머지않아 (어쩌면 여러 편의) 글로 정리할 예정이다. 그렇게 내 입장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과 나의 의견의 차이가 조금씩 좁혀질 그날을 기대한다.

2017-04-30

19대 대선, 누구를 찍을 것인가? (수정)

대선이 벌써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 구도가 짜이기 전부터 누구를 찍을지 마음을 정해놓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 선거가 급하게 치러지는 바람에 아직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어떻게 자신의 투표를 설명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써본다. 목차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면서 누구에게 나의 소중한 표를 줄지 결정해보자.


1.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가?

이번 대선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다. 많은 이들이 이쯤 되니까 아예 박근혜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있지만 아직 1심 유죄판결조차 받지 않은 피의자일 뿐이다. 복역중이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투표권도 있다(언론에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이번 대선 투표는 기권할 것 같지만, 아무튼 권리가 있다).

그 박근혜를 지지하는 세력과 후보 역시 여전히 활동중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가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남재준은 독자 출마 후 4월 29일 홍준표 지지를 밝히며 사퇴했다. 보도에 따르면 "홍 후보는 "조 후보도 아마 그만둘 것 같다"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암시했(링크)"다고도 하던데, 여기서 말하는 '조 후보'는 조원진이며 그의 선거 구호는 '박근혜를 지킵시다'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탄핵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홍준표를 찍는 게 맞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본인의 부정적 입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숫자로 제시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도 홍준표를 찍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가 왜곡되어 정치권에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준표를 으면 근혜가 아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2.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당신은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나는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를 좋아하는가? 심상정을 좋아하는가? 유승민을 보면 배신자라고 느끼나?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 않고도 그들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이유는 충분히, 정책과 입장으로 인해 나누어진다. 하지만 문재인은 예외다. 정치적, 정책적 발언을 근거로 문재인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인 싸드 배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재인의 입장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10억 불'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트럼프가 이상한 소리를 하자 '국회 비준을 거쳐 배치하자'고 한다. 그런데 그는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다. 그렇다면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나의 정책적 지향점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선거에 임하겠다, 왜냐하면 싸드 배치 반대하는 표 떨어질까봐, 이 소리 아닌가?

다른 공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공약 전부가 그런 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예산 문제부터가 불투명하니 말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 측은 28일 19대 대선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득표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유로 세율인상의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았다."(링크) 득표 활동에 도움이 안 되니까, 이것저것 퍼주는 공약을 제시하되, 세율 인상은 슬쩍 뭉개고 지나간다. 그것도 대선 정책공약집이라는, 말 그대로 '공약'을 해야 하는 문서에서 말이다. 그 이유를 문재인 선대위 윤호중 공동정책본부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국민도 자신이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틀렸다. 어떤 국민들은 문재인을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문재인이 당선 후 뭘 하건 그냥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문재인을 찍으면 된다.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재인이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꼭 문재인을 찍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버리는 편을 권하고 싶다.

나는 문재인의 공약을 믿기 어렵다. 공약과 정책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찍는 선거는 2012년을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에서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문재인을 꼭 찍고 싶다면, 어쩌겠는가, 찍어야지.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가?

현 대선 국면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의미한 질문을 단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이것은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 나누어지는 양자택일형 질문이며, 온 국민의 안위와 관련된 안보 이슈일 뿐 아니라, 한국 및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일단 심상정은 현 대선 국면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싸드 배치 반대 의사를 흔들림 없이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후보다. 앞서 말했듯 문재인의 입장은 '다음 정부인 내가 알아서 하겠다, 지금 나한테 묻지 마라'는 쪽이지 결코 싸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국회 비준을 거치겠다는 말도 그렇다. 대통령이 된 후에 국회에 통과를 요구하면 당연히 통과될 것이니 결코 반대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반면 심상정은 한미동맹의 폐기까지 감수할 수 있다는 아주 강경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 싸드 배치 반대는 궁극적으로 한미동맹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미국의 힘이 약해져서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재래식 병력만으로 북한과 전쟁을 하면 당연히 대한민국이 이긴다. 하지만 수만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이미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동맹을 파기하고 '주체적'으로 남쪽에서도 핵무장을 한다면, 그것은 북한과 같은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런 과감한 군사적, 외교적 실험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싸드 배치만은 절대 안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아니 상당수는, 사실 민주당과 문재인이 반대하니까 덩달아 반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 '착한 싸드'를 놓으면 오히려 싸드 예찬론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진심으로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미국으로부터 당장 전시작전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며, 싸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소위 '죽음의 전자파' 때문에 성주에서 나오는 참외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 싸드 배치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심상정의 득표율만이 한미동맹의 파기를 무릅쓰더라도 싸드 배치를 철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존재하는지 확인해주는 공식적이고도 명백한 지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싸드 배치에 찬성한다면 안철수를 찍어야 한다. 유승민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러므로 유승민을 찍는 것 역시 싸드 배치에 찬성하되, 박근혜 탄핵 반대 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선택지가 된다.

안철수는 본래, 4월 30일 현재 문재인이 취한 것과 흡사하게, 국회의 비준을 거쳐 싸드를 배치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입장을 바꾸었다. 입장을 바꾼 이유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TV 토론을 통해 여러 차례 설명했다. 대선후보에 맞춰서 국민의당 역시 싸드 배치에 대한 입장을 변경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지원은 "햇볕정책은 튼튼한 한미동맹에 기반한다"며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입장이다. 나는 싸드 배치 그 자체에 대해서 동의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치인과 정당이 입장을 변경하고 표명하는 과정의 투명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관리인인 박지원은 당연히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햇볕정책을 영원토록 유지하며, 개성공단을 되살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와 입장이 다르므로,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후보의 입장을 조율했다. 이런 게 바로 정치인과 정당의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승민의 경우에도 목적지는 같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재정 정책 하에 '중부담 중복지'로 복지 정책을 펴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향점이 유사할 경우, 당연히 당선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유승민을 찍는 것보다 안철수를 찍어서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유승민의 정치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다른 정책들은, 그리고 온갖 네거티브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미 지지율 1위인 후보의 캠프부터가 공약에 수반하는 예산에 대해 정직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그런 선거다. 어차피 정책들은 주어진 예산과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령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당장 2018년 최저임금을 순식간에 1만원으로 올릴 수는 없다. 문재인이 대통령 된다고 해서 내년에 곧장 전국에 단설유치원이 쫙 깔리고 모든 유아들을 수용할 수 있을 성 싶은가?

달콤한 공약만큼이나 씁쓸한 네거티브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후보에게 호의를 갖고 보기 시작하면 모든 공약이 다 좋아보인다. 반대로 '저 인간 조져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뉴스를 보면 네거티브의 소재는 늘 넘쳐난다. 문재인 아들 문준용 씨의 취업 비리 의혹, 안철수 후보 부인 김미경 씨의 소위 '갑질' 논란, 심상정은 본인이 진보라면서 아들을 '귀족학교' 보냈다더라, 유승민은 선거에 딸 동원 안하겠다면서 지지율 안 나오니까 홍대입구에 데리고 나왔네, 등등.

한편 홍준표는 돼지발정제로 강간 모의를 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밝히고도 10%가 넘는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감으로 생각한다. 그 수치는 박근혜의 탄핵에 동의하지 않았던 여론조사상 수치와 거의 흡사하다. 다시 말해 홍준표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네거티브는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안철수나 문재인의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부터 지지하던 사람들이 최근 나온 몇 개의 이슈 때문에 마음을 바꿀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본인이 부동층에 속하는 경우,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몇 개의 네거티브 사안들을 돌려보면서 어떤 후보를 반대하거나 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지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도 그 정도 논란은 당연히 있다. 그런데 상대편의 네거티브한 요소를 욕하면서 자신이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후보자에 대한 의혹들은 일부러 무시하기 시작하면, 소위 '빠'가 되어버린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선거에 못 이겨도 '빠'는 되지 말자.


6. 세계적 추세(잡담)

이것은 잡담이다. 객적은 소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현재 세계인들은 '안 해봤던 짓'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브렉시트, 트럼프, 그리고 프랑스 대선이 마크롱과 르펜의 대결이 된 것. 물론 이 배후에는 억울하다고 느끼는 백인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크게 도사리고 있다(그에 대해서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나의 칼럼들을 참고해도 좋겠다.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링크), "[별별시선]트럼프, 샌더스, 대한민국"(링크)).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작년부터 벌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이변에는 결국 '지금까지 안 해왔던 일'을 해보자는 갈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정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기존 정치권이 그러한 변화에의 갈망을 보다 순치(馴致)된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시키지 못한 채 포퓰리스트들이 놀이터로 삼는 동안 수수방관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최근 정치적 상황 역시 세계적 경향의 일부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총선을 통해 자체적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제3당이 출현했고,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으며, 결국 12월이 아니라 5월에 조기 대선을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안 가봤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여당도 둘로 쪼개졌고, 야당도 둘로 쪼개졌으며,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여당이 아예 사라져버린 채 치러지는 선거다. 정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기존에 자신이 해왔던 투표에 비해 보다 파격적인 표를 던져도 좋을 시점이다.[주]


7. 요약 및 결론

1)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면 홍준표 찍자.
2) 문재인이 그냥 좋으면 문재인 찍자.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면 심상정 찍자.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면 안철수나 유승민이다.
5) 당선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안철수를 찍자.

이번 대선은 대통령 보궐선거다. 대한민국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선거이며, 3당 합당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거대 여당의 잔존 세력들을 완전히 정치의 변방으로 몰아낼 수 있는 역사적 기회다. 동시에 미국의 트럼프, 일본의 아베, 중국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을 상대할 수 있는 유능하고 대담한 정치 지도자를 반드시 선출해야만 하는 그런 선거이기도 하다. 싸드 배치 논란과 중국의 보복, 트럼프의 돌발 발언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해야만 할 시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의 사안(박근혜 탄핵, 싸드 배치)와 한 명의 인물(문재인)을 기준선으로 하여,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의사 결정 가이드를 만들어 보았다. 온갖 종류의 현란한 공약들을 수십개씩 클릭하는 것보다, 위에서 제시한 다섯 개의 선택지에 따라 다섯 명의 후보자 중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는 것이 훨씬 명확하고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한 사람의 유권자이자 주권자로서, 이 글을 읽은 분들의 사고 역시 조금이나마 더욱 단단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꼭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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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허핑턴포스트에 이 글을 보냈다. 그런데 허핑턴포스트가 선관위에 문의해본 결과,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기사나 기고를 실으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여, 글을 일부 수정했다(허핑턴포스트 블로그도 일종의 '언론'으로 취급되고 있나보다). 5월 2일에 허핑턴포스트에 올라올 게시물과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해당 지면에 맞춰 수정한 내용을 이곳에도 반영한다. 참고로 삭제된 문단은 다음과 같다.

지난 총선에서, 다들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안철수는 40석에 가까운 제3당을 출현시켰다. 그 결과 새누리당의 내분도 가시화되고, 점점 친박과 비박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박근혜의 탄핵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안 가봤던 길'이다. 우리는 군사독재냐 민주화냐라는 30년 묵은 대립구도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선택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5월에 대선을 치르고 있다.

1에서 5까지 다 읽고도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안 가봤던 길'을 가보자. 투표권을 갖게 된 이래 지난 총선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비판적 지지'따위 하지 않고 올곧게 진보정당만 찍어온 나의 결론이다. 지금은 보수정당의 후보를 찍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정치권의 전체 구도가 바뀌고, 진보정당에도 새로운 활로가 뚫릴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 두 문단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기왕 허핑턴포스트 블로그에 송고한 판본에서 삭제되기까지 했으니, 조만간 (적어도 사전 투표가 시작되기 전) 해당 내용에 대해 좀 더 길게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허핑턴포스트에 보내지 않고 내 블로그에만 올릴 계획이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 글은 다음과 같다.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2017년 5월 2일 작성)

2017년 4월 30일 03:40 작성 / 2017년 4월 30일 21:45 수정

2017-04-25

[북리뷰] 기다린다,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 엘릭시르, 1만3천8백원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스웨덴이란 인근의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다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범죄소설들을 통칭하여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 하는데, 최근 독서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재나』는 바로 그 '스칸디나비아 느와르'의 출발점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스웨덴 남부를 가로지르는 예타운하에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고 교살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중년의 수사관 마르틴 베크가 이 사건을 떠안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경찰은, 마르틴 베크는, 그럴 수 없다.

여자의 신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신문들은 더 이상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고, 함마르는 더이상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새로 접수되는 실종자 신고 중에 여자의 인상착의에 조금이라도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런 여자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르틴 베크와 알베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던 것조차 잊은 듯했다.(82쪽)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로재나』가 출간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작품은 196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던 '현재'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지 않은 세상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헨닝 만켈이 쓴 서문을 펼쳐보자.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휴대전화는 없었다. 다들 공중전화를 썼다. 다들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자그마한 녹음기를 주머니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며, 컴퓨터란 걸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때의 스웨덴은 미래보다 과거와 밀접한 사회였다."(12쪽)

그러므로 모든 수사는 기다림과 뛰어다님의 반복이다. 가령 피해자의 모습이 찍혀있을지 모를 사진 한 장을 찾으려면 배에 탔던 승객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일일이 탐문 수사를 벌여야 한다. 숨막히는 긴장과 스릴이 아니라, 두텁게 깔린 짙은 안개속을 더듬어나가는 듯한 암담함이 소설 전체를 뒤덮는다. 명탐정의 천재적 시각이 아니라 평범한 경찰들이 '개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사건의 조각을 하나씩 찾아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가깝게는 헤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부터 멀게는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수사반장'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경찰추리극은 『로재나』와 그 뒤를 이은 총 열 권짜리 연작의 후예들인 것이다.

현재 발행된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모두 이른바 '스포일링'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모가 어떠한지, 독자도 모르고 경찰도 모른다. 마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독자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단서들을 하나씩 모으며 끈질기게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이 중요하다. 끝내 어떤 자는 법의 칼날을 미꾸라지처럼 피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1960년대 스웨덴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현실을 마주보면서 참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짧고 강렬한 현실 도피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7.04.25ㅣ주간경향 1223호

2017-04-16

[별별시선] 진보의 적폐, 음모론자들

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한 이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레이더 무기부터,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나라의 잠수함까지, 수많은 '아니면 말고'가 밑도 끝도 없이 던져졌다. 선박 및 교통안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검증하느라 귀중한 논의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난 후 속된 말로 가장 '멘붕'한 쪽도 다름아닌 일부 진보 세력이었다. 그들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잠수함과의 충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굉장한 음모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부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듯이 분위기를 조성하던 사람들. 세월호가 떠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계속 음모론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닻을 던져서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던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월호 인양 후에도 '고의침몰설'을 고수하더니, 4월 14일에는 18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더 플랜>을 인터넷으로 공개했다.

<더 플랜>에서 인터뷰한 UC 버클리 통계학과 교수 필립 스타크의 말을 통해 <더 플랜>의 기본적 오류를 반박해보자.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이 기록지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록지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전자투표는 오류를 확인하거나 수정이나 복원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한국의 선거는 정확히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투표가 아니다. 투표지분류기는 이름 그대로 투표지를 '분류'만 해줄 뿐이고, 실제 개표는 사람이 한다. 애초부터 한국의 선거는 애초부터 수개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수개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계를 동원해 표를 '분류'할 뿐이다. 미분류표에 박근혜 표가 많았건 문재인 표가 많았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최종적으로 사람이 손으로 넘겨보고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표소에는 각 후보 및 정당에서 추천한 참관인들이 있다. 18대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도록 부정개표가 이루어졌다면 민주통합당에서 추천한 참관인 중에 매수 혹은 협박당한 사람, 혹은 그런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어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이 시점에서 음모론을 하나 던져보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18대 대선 개표부정설을 퍼뜨린다니 이게 무슨 짓일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불복 운동을 벌이려는 냄새가 나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누가 이기건 정권교체가 예정된 대선이다. 보수의 적폐세력은 무너졌다. 이제 범진보진영 역시 스스로의 적폐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청산해야 한다. 동쪽에는 트럼프, 서쪽에는 시진핑, 북쪽에는 김정은이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음모론 따위에 낭비할 여력은 없다. 진보의 고질병인 음모론, 적폐세력인 음모론자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자.

입력 : 2017.04.16 21:28:04 수정 : 2017.04.16 21:32:33

2017-04-11

[북리뷰] 갈등의 시대, 통합의 리더십을 고민한다

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21세기북스, 3만5천원

미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 국가다. 정치의 기본 단위가 주(州)인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에는 각각의 주마다, 그리고 연방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준주마다, 노예제에 대한 개별적인 입장이 존재했다. 그 차이는 남부의 이탈과 연방의 붕괴로 이어질 참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두막집에서 성장한 일리노이의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이 처한 정치적 조건이 그랬다.

링컨은 포부가 매우 큰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랬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 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 동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외에 더 큰 야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야망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88쪽) 대학은 고사하고 남에게 책을 빌려 스스로 법학을 공부했던 가난한 젊은이가 있다. 그런데 그의 나라는 지금 건국 이후 전례 없는 갈등으로 인해 분단되거나 내전을 겪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모든 미국인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했다. 링컨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후 꾸렸던 '팀'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권력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링컨의 성공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 심지어는 자신을 뒤에서 헐뜯고 비방했던 이까지 포용해서 하나의 팀으로 결속시키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던 단단한 포용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링컨은 종이에 원하는 일곱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목록에는 대통령 후보 공천 당시 그의 경쟁 상대였던 슈어드, 체이스, 그리고 베이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 옛 민주당원인 몽고메리 블레어, 기디언 웰스, 노먼 저드와 옛 휘그당원인 뉴저지 주의 윌리엄 데이턴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각 구성이 완료되기 전 몇 달간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했지만, 링컨은 그날 새로운 공화당의 모든 파벌, 즉 옛 휘그당과 자유토지당, 노예제를 반대하는 민주당 출신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뽑기로 결심했다.(299쪽)

한국어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링컨을 중심으로 그가 꾸린 '경쟁자들의 팀'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지 숨돌릴 틈 없이 서술해나가는 비평적 전기(傳記)의 걸작이다. 정치권의 소수파, 아니 단독자였던 링컨은 지켜야 할 공통의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준수해나가며 자신의 편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복수가 아닌 포용의 힘으로 미국을 통합해나갔다. 남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악대에게 남부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딕시'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한국어판에는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 등이 생략되어 있을 뿐 아니라, 책과 각 장의 제목이 일종의 처세술 책처럼 옮겨져 있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가 헌정 문란 세력만의 것인양 오용되는 이 갈등 속에서 이 책은 보다 진지하게 읽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죄와 '우리'의 통합을 함께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링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함께 생각해보자.

2017.04.11ㅣ주간경향 1221호

2017-03-28

[북리뷰] 전쟁의 문헌들, 평화를 위해 읽는다

전쟁의 문헌학
김시덕, 열린책들, 2만8천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문헌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문헌을 통하여 한 민족 또는 시대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그러나 그 연구의 대상이 꼭 협의의 '문화'로 제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와 정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 전쟁에 있어서도 문헌학적 고찰이 가능하다. 김시덕의 책 『전쟁의 문헌학』을 펼쳐보자.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이 책은 15~20세기까지 6세기에 걸쳐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 문헌이 형성되고 주변 국가로 전래되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 대해 전쟁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지 시험한 결과물이다."(5쪽)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지성 교류사를 전쟁의 관점에서 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독자'보다는 문헌학이나 역사학 등에 기존의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차분히 페이지를 넘겨보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내용을 쫓아갈 수 있다. 누가 어떤 책을 읽었는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책이기 때문이다.

몇몇 대목에서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추리물같은 즐거움이 있다. 가령 조선에서 출간된 『동국통감』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 책을 당대의 장서가 하야시 라잔의 가문에서 재출간하여 『신간동국통감』이 일본에 유통되는데, 하야시 라잔의 차남 하야시 가호가 쓴 서문이 문제가 된다.

그는 『동국통감』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고대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잘못된 책이라고 비판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기반해 조선의 책을 비판한 그러한 관점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통설로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동국통감』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하야시 가호의 서문을 논박하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건너간 책이, 결국 또 다른 전쟁의 정당화 논리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일본 내부로부터 비판되기도 했던 것이다.

서문과 결론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청이나 일본과 달리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지 않고 200여년을 보냈다. 청은 준가르 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 및 서구 열강들과의 교역과 군사 분쟁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학술과 군사라는 두 가지 요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병존 가능한 것이고 또 병존해야 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367쪽).

반면 조선인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의 권12에 실린 두 편의 '일본론'을 통해 일본인들이 주자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문명인'이 되어서 더는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의를 펼친 바 있다. 물론 말년에는 입장을 수정하여 일본의 재침략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으나,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지 오래인 그의 주장은 조선이 빠져 있던 기나긴 평화의 단잠을 깨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전쟁의 문헌학』은 특정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전개되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전문적인 문헌학적 논의로 가득차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책을 불태우지만 새로운 책이 탄생하는 사건이기도 했는데, 애석하게도 '전쟁의 문헌'들을 더 치열하게 쓰고 읽은 쪽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17.03.28ㅣ주간경향 1219호

2017-03-19

[별별시선] 태어나고 싶은 나라

'박정희 신화'가 허물어졌다. 재벌 중심 수출 경제의 신화 역시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청년들은 절망하고 노인들은 폭주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공회전하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대통령을 파면해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고 토론해야 할 시점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논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가? 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장막'을 드리워볼 때이다.

어떤 사회가 근본적인 규칙을 형성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조건에 처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보자. 특권층에게 유리한 사회 구조를 만든다 해도 내가 그 특권층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무지의 장막'이 쳐져 있다면, 사람들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규칙을 수립할 것이라는 것이 존 롤스의 생각이었다.

무지의 장막을 쳐놓고 대한민국을 검토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본인에게 어떤 조건이 주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자신의 성별, 성정체성, 신체적 장애, 부모의 재산, 교육, 가정환경, 신분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는 말이다.

무지의 장막에 싸여진 아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태어나는 그 자체가 엄마의 경력 단절을 낳는 원인이다. 게다가 여자로 태어나면 내 엄마가 겪고 있는 차별이 내게 넘어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확률은 반반이다.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 한들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의 일원으로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 끝없이 투쟁해야 한다. 성소수자라면 본인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며, 결혼 등 동등한 법적 제도를 누릴 수 없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목표가 되는데, 일단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경제적 궁핍을 각오해야 한다. 고소득 정규직 혹은 전문직이 된다 한들 워낙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출산율이 높다면 그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까? 여론조사전문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16년 1월에 수행했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조사 대상자 1000명 가운데 30.2%에 지나지 않았다. 11.9%는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유보했고 57.9%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같은 조사에 의하면 69.0%가 막연하게나마 이민을 꿈꿔보았다.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마음 속에서 이 나라를 버린 것이다.

출산율이 낮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론 수준'의 문화 컨텐츠를 만들자,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반 이상의 한국인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고 싶은 나라가 아니다. 이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기회만 된다면 '탈조선'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한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나라에서 많은 것을 얻고 누려왔던 사람들조차 자기 자식은 '탈조선' 시키겠다며 온갖 편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그에 대해 사회적으로 지탄하기보다 오히려 부러워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수십년에 걸쳐 대한민국에 '빨대'를 꽂아온 최순실 일당의 목적도 결국은 '탈조선' 아니었던가?

이 땅에 남아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고, 지키고, 일구고, 가꾸고, 이루어내고,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이 분위기 속에서 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야 하는지, 무지의 장막 너머의 아기를 설득해낼 수 있는가?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입력 : 2017.03.19 19:37:00 수정 : 2017.03.19 23:29:07

2017-03-16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현재 오가는 개헌 논의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선거를 이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 어차피 내각제를 해도 총리 해먹을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체 왜 총선과 대선의 날짜를 맞추려 하는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영어로는 check and balace. 법을 만드는 입법부와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법적인 판단을 하는 사법부를 분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중요한 것은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서로 분열해야 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말은 바로 저 근본적인 원리를 무시하자는 소리다. 4년에 한 번씩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면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총선도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그렇다면 행정부, 다시 말해 대통령의 전횡을 야당이 견제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처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이 언론에 의해 발각된다 한들,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할 수도 없고 특검법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행정부의 야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총선이 곧 다음 대선이므로 다음 총선/대선까지 야당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한다. 대체 이게 민주주의인가? 뭐 하자는 소리인가?

내각책임제를 하고 싶다면 대놓고 내각책임제를 하자고 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내각제의 경우에는 '내각총사퇴'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고, 총선을 다시 치를 여지가 늘 열려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합의한 그 개헌은 대체 그 실체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분권형 대통령제'인데,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낳을 뿐이다.

애초에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끔찍한 발상을 정치권에 처음 던진 인물은, 내가 기억하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대체 이유와 목적을 알기 어려운 숱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모두 실패했는데,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개헌이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요컨대 그것은 노무현도 실패했던 일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거독재국가'로의 지름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정말 다들 아무말이나 막 던지고 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말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때 개헌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기화하는 그런 종류의 개헌이라면 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다.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독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과 총선을 결합시킨다는 건 총통을 뽑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2017-03-14

[북리뷰] 역사의 회색지대를 관통해 온 그들의 문학

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
김윤식, 소명출판, 1만8천원

역사적 사실부터 알아보자. "내외 조선인 전문·대학생 4,395명이 일제히 입영한 것은 1944년 1월 20일이었다."(11쪽) 당시 조선인 전문·대학생의 총 숫자는 7천여 명이었으나, 일부는 이공계거나 사범계이기에, 또 일부는 일부러 징집을 피해 도망갔기에, 4,395명이 징집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부족한 병역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일본과 조선의 대학생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학병'이라 부른다.

이러한 학병들은 다양한 출신지와 개인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출신 가문이란, 다양하겠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자식을 대학에 다니게 할 만큼 상류층에 속했음을 가리킴이 아닐 수 없다."(15쪽) 이들은 모두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가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전했던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특히 4.19 세대가 그랬다. "순종 한글세대인 이른바 4.19세대는, 그들의 순수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제로상태에서 출발했다고 자부"(67쪽)하면서, 이전 세대의 업적 뿐 아니라 문제의식까지도 단숨에 밀어내버렸다. 작가 및 비평가의 숫적으로, 그들이 생산해내는 원고의 양적으로, 4.19 세대는 압도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던 새로운 세대는, 책에 인용된 김현의 말마따나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69쪽)은 채 오늘까지 한국의 문학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씌여진 책이다. 첫째, 이병주와 선우휘라는 두 명의 작가밖에 보유하지 못한 학병세대의 존재를 되새기며 그들이 한국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야 마땅한지 검토한다. 둘째, 학병세대에 속하는 가상의, 현실의 인물들을 통해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과제를 두고 평생을 싸워온 김윤식 본인의 학문적 궤적을 반추한다. 셋째, '일본 전후 지성계의 천황'인 마루야마 마사오를 학병세대에 속하는 한 사람의 일본 지식인으로 정의한 후, 그의 영향력 하에 전개되어온 일본 및 한국 지성사의 전복을 도모한다.

이 책은 세 번째 주제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주제는 김윤식의 다른 책인 『내가 읽고 만난 일본』에서 확장된 형태로 존재한다. 문제는 첫 번째 화두다. 일본인으로서 전쟁터에 끌려간 후 학병세대는 각자 나름의 각성을 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또 한 차례의 전쟁을 경험한 후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친일파냐 독립군이냐'같은 너무도 단순한 구도에만 매몰되어, 어떤 세대는 그런 고민을 동남아시아나 만주의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함성을 외치면서, 정작 그 역사 속 회색의 시공간을 관통해온 이들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망각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만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학병세대는 그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기에 이후 세대들에게 문학적으로 없는 존재처럼 취급되었다. 그러한 선택적 망각은 정당한가. '순수한 민족의식'은 얼마나 순수한가. 김윤식은 우리에게 묻는다. "학병세대의 글쓰기를 건너뛰고도 한국문학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67쪽)

2017.03.14ㅣ주간경향 1217호

2017-03-06

나는 이런 서점에 가고 싶다

어떤 기사를 보니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한 해에 10만원 가량을 도서구입비로 지출한다고 한다. 그런 평균적 소비자를 끌어들여 10만원 쓸 것을 15만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마도 서점 업계의 목표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교보문고를 선두로 한 대형서점들은 '머물기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나처럼 한 해가 아니라 한 달에 적어도 10만원 이상의 책을 사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부류에게 오늘날의 대형서점이란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이며,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오프라인) 서점도 아니다. '책이 있는 문화공간'을 선호하는 평균적인 열 사람보다 '서점'을 원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해보자.

서점이란 무엇인가?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책을 구입하는 곳이다. 그런데 책이란 심지어 같은 저자가 같은 출판사에서 낸 같은 책이라 해도 판본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는 대표적 다품종 소량 구매 상품이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이 원하는 책은 베스트셀러, 화제의 신간, 스테디셀러의 세 범주로 포괄될 수 있다. 요즘 여기저기서 '특색있는 동네서점' 같은 것을 많이 차리는데, 사실 '동네서점'이란 기본적으로 많이 팔릴 수밖에 없는 저런 책들을 간신히 구비해놓는 곳이다. 남들 다 보는 책, 신문이나 TV에 광고가 나오는 책('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일을 근심하는 인간들아~' 권력과 부를 조롱하며 구름처럼 살다간 천재시인 김삿갓!), 오가며 별 생각 없이 넘겨보다가 버리면 그만인 깔깔 유모어집 등이 '동네책방'의 본령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해야 대형서점이 인터넷 이전 시대에 어떤 의미였는지 파악할 수 있다. 대형서점이란 '동네책방에는 없고 갖다 놓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 책'이 있는 곳이었다. 영어, 일본어 등 이른바 '원서'를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동네책방'에서는 팔지 않는다. '여기 없는 책이 저기에는 있다'가 대형서점의 본질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출현 이후 이 구도가 허물어졌다. 이전의 교보문고에는 온라인 DB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책이 종종 꽂혀있었지만 그 또한 2008년 촛불시위 기간의 리뉴얼과, 이후 무슨 열대우림에서 베어온 통나무 테이블 같은 걸 비치하는 과정에서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2017년 현재, '최대한의 책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면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는 것보다 인터넷 서점을 뒤지는 편이 낫다. 새롭게 단정된 '복합 문화공간'의 귀한 부동산을 점유할 가치가 없는, 그만큼 팔려나갈 가능성이 없는 수많은 책들이 곧장 창고에 처박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에서, 어린이와 학생과 직장인과 노인들이 책을 접고 밑줄을 긋고 원목 테이블 위에 내팽개친다. 그곳에 책은 없다. 적어도 내가 찾는 책은 그렇다. 적잖은 경우 허탕을 친다.

물론 출판업은 10권 중 한 권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만들어 나머지 9권을 발행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많이 팔리는 책이 많이 팔려야 적게 팔릴 책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많이 팔릴 책이 많이 팔리도록 최적화된 현재의 대형서점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출판시장은 동시에, 한국인의 도서 구입 비용 평균을 확 끌어올려주는 존재들 덕분에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동네책방' 뿐 아니라 현재의 대형서점에서도 만족스러운 소비를 할 수 없다.

그럼 대체 어떤 서점이 필요한가? 나 자신의 경우를 놓고 말해보자. 내가 원하는 서점은 이런 것이다.

  1. 책을 직접 들고 카운터에 갈 필요도 없게, 스마트폰의 바코드 리더 앱 등을 이용해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면 집으로 보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책을 욕심껏 집다보면 굉장히 무거워지고 부피도 커진다. 그런데 어차피 당일에 사들고 간 책을 당일에 다 읽는 경우는 없다. 쇼핑은 서점에서 하고, 책은 집(이나 사무실이나 아무튼)에서 받아볼 수 있도록 완벽한 플로우를 제공해주는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면 아주 좋겠다(교보문고 바로드림을 언급하지는 않기로 합시다).
  2. 최대한 많은 책을 보기 좋으면서도 밀도 있게 배치해야 한다. 온라인 서점을 뒤적거리는 것과 도서관이나 (과거의) 대형서점 등에서 걸어다니면서 책을 찾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연히 '어 이 책은?'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것들을 바코드만 띡띡 찍으면 장바구니에 담겨서 다음날(혹은 며칠 후)에 집으로 배송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쁘지 않은가.
  3. 쇼파라던가 문화 예술 공연이나 강연을 할 공간 등을 없애고 최대한 책에게 많은 공간을 제공할 것.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았더라도 실물을 접해본 적 없던 책을 직접 만져보고 페이지를 넘겨보는 그것이 더욱 서점의 본령에 가까운 게 아닐까. 서점에서 책을 읽는 것은 어디까지나 '몰래' 할 때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문제집 펼쳐놓은 수험생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요컨대 내가 원하는 서점이란 '온라인 서점을 오프라인에서 내 몸으로 브라우징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형 개가식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단번에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 신간이 아주 빨리 들어온다는 점, 빌려서 나갈 수는 없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만약 저런 종류의 서점이 생긴다면 나는 온라인 서점보다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것이다. 페이지를 넘겨보고, 물건을 확인하고, 책꽂이에 꽂혀 있는 유사한 주제나 제목의 다른 책을 통해 신선한 영감을 얻는 일은 오직 오프라인에서만 온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서점은 교통이 편한 곳에 큰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한마디로 자릿값이 많이 든다. 그런데 정작 베스트셀러 등의 마케팅에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서점들과 비교해볼 때, 전혀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서점에 과연 상업적 승산이 있을까? 그건 서점 업계의 관계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처럼 애초에 책을 많이 사던 사람들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으로 엄청난 액수의 책을 질러놓고, 집에 와서 울부짖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