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1

미래 세대를 위한 에너지 정책

미래 세대를 위한 탈핵?

'미래 세대를 위해 탈핵을 해야 한다!' 탈핵 찬성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사고가 난다면 그 해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원전에서 생산되는 핵폐기물은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미래 세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탈핵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한때 '청년 논객'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탈핵을 주장하는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해야만 하는 미래가 아니라, 대비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미래를 들이대며, 정작 미래 세대의 앞길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10만년 폐기물이라는 패배주의적 협박

원자력에 대한 공포심을 접어두고 잠깐만 생각을 해보자. 방사성 폐기물이 안전하게 보관되어야만 한다는 시간 10만년.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참고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2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10만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적' 단위가 아니다. '고고학적' 혹은 '천문학적'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원자력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것은 1898년의 일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최초의 원자로를 개발하여 인공적으로 핵분열을 유도해낸 것은 1942년. 그리고 지금은 2017년이다. 고작 7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엄청난 과학적 발견과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라. 라듐을 추출한지 44년만에 인류는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3년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70여년만에 독자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의 반열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10만년에 대해 생각해보자. 10만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돌도끼로 사냥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우라늄-235를 농축시켜 발전도 하고 폭탄도 만들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만약 우리 인류가 10만년이 더 흐르는 동안 멸망하지 않고, 기술 발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지구에 살고 있다면, 과연 그 시점에 방사성 폐기물 따위가 문제거리로 남아있을까?

10만년 운운하는 것은 그러므로 협박이다. 무슨 협박인가? 방사성 폐기물의 문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 말이다.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10만년동안 사라지지 않는 폐기물에 대한 공포심만을 자극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협박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빌 게이츠도 '원전 마피아'에게 매수당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마 전 지구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석 연료를 계속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할 수도 있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비중을 더 높일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는 기술적 제약이 존재한다.

포집된 탄소의 부피는 방사성 폐기물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태양광과 풍력은 모두 에너지 밀도가 너무 낮아서 굉장히 넓은 땅에 발전기를 깔아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공해 요소가 된다. 결국 좁은 면적에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해법은 원자력 뿐이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해답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담아 2010년 2월, TED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제로 탄소를 향한 혁신!'이다. 2050년 인류가 발생시키는 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들려면 원자력 발전의 대 혁신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7분 정도 시간을 내서 강연과 질의응답을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진행파원자로(TWR:Traveling Wave Reactor)는 MIT가 2009년 세계 10대 유망 기술로 선정한 바 있는 '오래된 미래'다. 아이디어가 제시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사용되는 원자로는 U-235를 분리하여 연료로 사용하는데, 그 분리 과정에서 U-238 혹은 열화우라늄이 발생하고 방사성 폐기물로 처리된다. 반면 진행파원자로는 바로 그 '폐기물'을 연료로 사용한다. 열화우라늄에 증식파(Breeding Wave)를 쏘아서 플루토늄-239로 증식시킨 후, 이후 발생하는 연소파(Burning Wave)를 이용해 Pu-239를 핵분열시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진행파원자로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한번 연료를 넣으면 최장 60년까지 발전소가 가동된다. 플루토늄까지 완전히 연소시키고 나면 남는 폐기물들은 안정적인 비방사성 물질, 그리고 독성이 약해진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양의 방사성 물질들 뿐이다. 그리고 그 폐기물을 그대로 뽑아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 60년의 기간 동안 연료를 추가할 필요도 교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오류'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훨씬 적다. 말하자면 꿈의 원자로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꿈이다. 아직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고속증식로를 개발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이런 형태는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모든 인류가 풍족하게 에너지를 쓰는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2011년 이후에도 빌 게이츠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부호이자 자선사업가이기 이전에 엔지니어이고, 위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vs. 빌 게이츠

빌 게이츠의 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대한민국의 탈핵 정책.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해보자. 양쪽 모두 '미래 세대'를 걱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구체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탈핵 논의는 '하지 말자'고 주저앉는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는 커녕 그 어떤 과학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진행파원자로가 과연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지, 언제쯤 가능한지,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이 글은 진행파원자로라는 특정한 기술을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둔다.

핵심은 이것이다. 현재의 탈핵 논의는 과학 이전에 세계관과 의지의 문제라는 것.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믿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미래의 에너지를 연구하고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빌 게이츠처럼, 에너지와 원자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난점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방사성 폐기물의 '10만년'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다. 적어도 그 반감기가 다 채워지기 전에 말이다. 우리가 '원전 마피아'를 향해 공허한 손가락질이나 하는 동안, 빌 게이츠를 포함해 미래를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훨씬 안전하고 깨끗하며 믿음직한 원자로를 개발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당연히 비싸게) 판매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10만년이라는 공허한 단위를 놓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면서, 정작 미래 세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킬 것이다.

10만년이 아니라 향후 10년부터 걱정하자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단위는 10만년이 아니다. 10년이다. 그리고 100년이다. 지금처럼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기후 변화가 임계점을 넘는다면 100년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기후 변화를 막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전 인류적 과제다.

한편 우리에게는 1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필요도 있다.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탈핵 정책이 추진된다면, 원자력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인력의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지금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10년쯤 지나면 다방면으로 그 충격이 밀려오게 된다.

빌 게이츠는 2012년 원전 기술 강국인 대한민국과 4세대 원전 개발에 대해 협의했다. 하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2014년 협상이 결렬되었다. 중요한 건 그 시점까지는 우리나라가 빌 게이츠와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탈핵 결정 후 10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래 타령을 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몫을 빼앗게 된다. 10만년 운운하다가 10년 후의 부와 풍요, 안정된 세상을 놓친다. 100년 후의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숙하고 한심한 일이 또 있을까? 대체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대신,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주저앉으면서 '미래'를 운운하고 있는가?

우리가 미래를 먼저 만들자

현재의 탈핵 논의는 기술과 과학 이전에 세계관의 투쟁이다. 새로운 힘, 물론 두렵지만 통제 가능한 에너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의사결정권자들, 환경주의자들과 여당 지지자들은 마치 척화비를 세우고 꽁꽁 문을 걸어잠그던 위정척사파처럼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회를 날려버리는 동안, 빌 게이츠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원전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보다 앞선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스스로 가난의 길을 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0만년 동안 남는 폐기물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 폐기물까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진취적인 미래를, 우리가 먼저 만들자는 말이다.

2017-07-14

한산모시, 세탁기, 에어컨

올 여름 더위는 한산모시로 맞서보자?

2017년 7월 13일, 대한민국 청와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천군수 출신으로 이날 처음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나소열 자치분권비서관이 눈에 띄자 문 대통령은 '한산모시'를 거론했다." 일종의 스몰 토크일 수도 있겠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 대통령이 ""예전 군수님으로 계실 때 한산모시를 입으셨는데 보기에도 참 좋았다"고 말"하자, "나 비서관은 "모시를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도 한산모시를 입으시면 어떠신가"라고 답해 회의장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 '한산모시' 대화는 복선이다. 어떤 복선인가? 현 정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핵 기조에 맞물려, 공공기관 냉방 온도 제한을 민간에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대통령의 심경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문 대통령이 여름철 냉방 온도가 28도에 맞춰져 있는 것을 거론하며 "우리는 28도 지키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수현 사회수석이 "여름철 온도가 28도 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냉방이 켜지고 내려가면 꺼진다"고 답했다.

이어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이 "사무실 냉방 온도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재킷을 벗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굉장히 좋다는 논문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을 벗어도 그렇다. 시민들은 반팔을 입는데 과거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에 반팔 입고 들어가면 추웠다"며 "정부는 28도를 스스로 하면 되는데 민간에는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김승욱, ""한산모시 입으면 3도 떨어져" 靑 회의서 '무더위나기' 화제", 연합뉴스, 2017년 7월 13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3/0200000000AKR20170713095500001.HTML

내가 지난 포스트(링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 청와대에서 나온 한산모시 타령은 박정희 시대의 '근검절약', '한 집에 전등 하나 끄기'와 동일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산업용으로 쓰기에도 전기가 모자라던 시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정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면?

다른 모든 판단을 일단 보류해두고, 한 가지 가정법을 도입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산모시에 대해 스몰토크를 하다가 '공공기관 에어컨 온도 28도를 민간에도 실현할 방법 없느냐'라고 말했다면 여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너무 잠잠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 이것은 값비싼 한산모시로 옷을 해 입는 기득권층 외의 모든 사람의 더위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옷감인 모시는 가격도 비쌀 뿐더러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바느질하기도 힘들다. 빨래할 때에도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 그걸 잘 널어서 말리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입을 때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풀을 뿌려서 빳빳하게 다려야 한다. 요컨대 생산 및 관리에 있어서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옷이다.

게다가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옷감이 너무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 쓰는 사람이 활동적으로 입으라고 만드는 옷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시조 읊는 양반님네들을 위한 옷이다. 만들고 관리할 때에는 남의 노동이 들어가고, 입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옷, 그런 옷을 입자는 말이 농담처럼 회의를 앞두고 오가는 청와대의 풍경이다.


지배층의 한산모시, 피지배층의 에어컨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일이다. 탈핵 탈원전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탈핵 선언을 해버린 청와대에서, 그 무더위에 맞서는 방법으로 농담인 양 슬쩍 한산모시를 운운한다는 것 말이다. 치열하게 머리를 쓰면서, 땀흘려 몸을 움직인 후, 제대로 냉방이 된 곳에서 쉬는 국민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와대는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과거의 지배계층, 세습 귀족들이 입던 노동집약적인 옷감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탈핵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전기 공급 저하에 맞춰 냉방 온도를 높일 것을 민간 영역에까지 넌지시 주문한다.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정작 본인들은 긴팔 옷 입고 있었고, 회의장에 들어올 때까지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한산모시는 그런 옷감이 아니다. 남이 빨아주고 다려주고 풀먹여주는 한산모시 입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거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산모시에 대한 대화는 애초에 더울 일 없는 '윗분들'한테나 통할 소리다.

그런데 그걸 국민들 들으라고, 기업들 들으라고 언론 앞에서 넌지시 흘리고 있다. 이것은 위선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21세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쯤에 해당하는 대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세계관의 차이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고장난 냉장고에 갇혀버린 '진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적극적인 에너지 수요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 탈원전론자들의 기본 논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 중 하나였던 값싼 전기를 포기하더라도, 탈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물론 산업용 전기가 한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저렴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방만하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정용 전기를 OECD 평균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링크). '에너지 절약'이라는 당위와 누진제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정신을 옥죄어온 탓이다.

그러므로 산업용 전기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민간 영역에서 소비하는 전기 사용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다. 탈핵 탈원전주의자들은 당연히 그 또한 줄여야 한다, 혹은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년 7월 2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12131165

이런 식의 주장은 환경주의의 탈을 쓴 전근대적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오가는 탈핵 탈원전 논의의 근간과, 이 퇴행적 전근대주의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에너지의 사용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현재의 환경 담론은 과연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더 효율적인, 더 평등한 에너지를

에너지를 더 쓴다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평등이며, 사랑이다. 일단 그것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 유명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 더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게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강신주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에너지의 사용, 가령 에어컨은, 한산모시 입고 부채질하는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도 여름에 시원하게 몸을 식힐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적으로도 더욱 평등한 선택지인 것이다. 방직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착취를 포함한 여러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전까지는 평생 한 벌의 옷만 겨우 입고 살았을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풍족한 의복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여름에는 제대로 틀어놓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낮 시간을 허비한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일을 하는데, 개인용 난방 기구를 틀려고 하면 회사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지는 원인 중 일부가 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편이지만 결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에어컨 온도를 높이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되지', 이것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다.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피지배계층을 포함한 국민 전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다. 그 한산모시를 만들고, 빨래하고, 풀을 먹여 다리는 사람의 노동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팔자 좋게 좋은 옷 입고 유유자적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도외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우리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마이너스로 잡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에 대해서만큼은 '지금보다 전기의 생산도 소비도 줄이자'는 말이 무슨 합리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에너지의 생산·소비는 경제 그 자체의 성장 및 침체와 직결된 것인데 말이다.

이번 탈핵 탈원전 논의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진영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전근대로의 퇴행적 경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인상이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생산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안에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의 위험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이면서 평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무턱대고 일단 원전은 악이니까 추방하고 보자는 식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 탈핵 논의는 우리를 경제성장도 안 되고 행복하지도 않은 전근대국가의 길로 주저앉힐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산모시가 아니라 26도, 혹은 25도로 맞춰진 에어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한산모시를 입고 다니면서 에어컨을 끄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터와 집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받는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이번 여름의 탈핵 논의를 계기로, 진보 진영 내의 퇴행적 전근대 경향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비판되기를 바란다.

2017-07-12

전기를 아끼는 나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 선포를 해버리면서 에너지 전환이 주요 정치적 논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본디 국가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긴 하나, 정치적 지지와 호오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해당 논점을 파악하고 입장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체로 기존에 '진보'로 여겨지던 진영에서는 탈핵에 찬성하며, '보수'는 탈핵에 반대하거나 신중론을 편다.

지금껏 '진보 논객' 소리를 들어왔지만 나는 지금처럼 기습적으로 선포된 탈핵 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논의일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발주한 공사를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엎어버리는 것이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다는 것이다.

탈핵 찬성론자들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다.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까짓거 한 달에 전기요금 만 원 더 내고 핵발전소(꼭 이렇게 부른다, 핵무기를 연상시키기 위해) 없는 세상에 살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해보자. 현재로서도 그 '단돈 만원'의 전기요금을 내지 않기 위해 무더위를 온몸으로 견디는 취약계층이 있다. 전기요금 내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선풍기 트는 것도 아쉬워하는 에너지 빈곤층이 2016년 기준으로 130만 가구를 넘었다. 이들 앞에서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같은 소리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크게 다르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산업용 전기료만 오르면 괜찮다?

그러면 대체로 이런 반론이 돌아온다. '산업용' 전기요금만 많이 올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약대로 탈핵을 추진할 경우 2030년 가구당 전기료가 연간 31만4000원 인상될 것이라는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의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를 읽어보자.

정 의원의 자료만 봐도 ‘연간 전기요금 31만원 인상’이라는 말은 과장이다. ‘31만원’은 산업용, 상업용, 주택용을 모두 합친 금액이다. 용도별로 나눠보면 산업용 전기료는 1320만7000원가량 인상된다. 하지만 주택용 전기료의 인상폭은 연간 6만2000원, 월간 5200원에 불과하다.

백철, "탈핵하면 전기료 폭탄 떨어진다는 가짜뉴스에 대하여", 경향신문, 2017년 7월 8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707081514011&code=940100

저 대목을 읽고 '아, 가정용 전기요금은 고작 한 달에 5000원 오르니까 괜찮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업용 전기료가 무려 1320만원 이상 오른다는 것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대한민국은 산업용 전기료가 지나치게 낮은 나라다. 너무 전기값이 싼 나머지, 심지어 제철소에서도 용광로보다는 전기로를 선호한다. 그 편이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저러한 주장은 '재벌'에 대한 분노와 맞물려, '저들'에게 '고지서 폭탄'을 날리고픈 감정선을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산업용 전기는 재벌 대기업만 쓰는 게 아니다. 게다가 상업용 전기료도 따라서 오를 수밖에 없다. 집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비한 사람들 중 적잖은 이들이 그것을 중고나라 등에 매물로 내놓는다. 왜냐하면 전기요금이 심각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페에는, 제아무리 '자그마한 동네 까페'여도, 그런 전기 먹는 괴물이 적어도 한 대 이상 있다. 만약 산업용 전기요금이 연간 1320만원 이상 오른다면 상업용 전기를 사용하는 '자그마한 동네 까페'들은 무사할까?

삼성전자도 동네 까페도 전기를 쓴다

'가정용' 전기는 '우리편'이고, '산업용' 전기는 '남의 편'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소규모 도자기 공방은 설비의 용이성과 편리성 때문에 가스가마가 아닌 전기가마를 운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정용이건 상업용이건 산업용이건, 전기 요금 인상의 직격타를 맞는다. 업무에 따라서 많은 양의 데스크탑을 사용하는 개인 개발자 프로그래머 등도 결국 전기요금 인상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이 오르는 것은 지금껏 배불리 먹고 있던 '재벌 밥그릇 빼앗기'니까 괜찮다는 식의 논리는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낮에는 산업용, 상업용 전기를 써가며 일을 하고, 밤에는 가정용 전기를 사용하는 집에서 쉰다.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을 뒤로하고 연일 승승장구하는 삼성전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기업인 키친아트도(참고로 나는 자주 쓰고 바꾸는 후라이팬 류는 꼭 키친아트에서 구입한다) 산업용 전기를 쓴다. 세상에 '나쁜 기업'에게만 미사일처럼 콕 박히는 전기요금 인상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나는 지금 한국의 굉장히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이 전적으로 옳고 훌륭하며 영원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용 전기와 달리 산업용 전기는 요금이 올라도 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그에 따라 옳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논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업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기업의 이익과 성장을 독점하는 일부 '오너'들과, 그들의 전횡을 수수방관하는 사회 시스템이 문제다. 아마 이 주장에는 대부분의 진보 진영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벌과 대기업이 밉다는 이유로 산업용 전기료가 폭등해도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출할 수밖에 없는 고정비용으로서의 전기료 인상은 대기업보다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들에게 더 큰 타격을 안겨줄 것이 너무도 명백한데 말이다.

이게 다 단군 할아버지 때문이다

전기요금은 장기적으로 볼 때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건 지금 너무 저렴하긴 하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사기를 당했던 건지, 여름에는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그 와중에 습도가 6-70%대를 찍는다. 겨울에는 반대로 영하 10도까지도 우습게 내려간다. 여름에는 킨샤샤보다 덥고 겨울에는 모스크바보다 추운 날이 적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 전기 소비 자체를 죄악시하고, 그 위에 재벌 대기업에 대한 적개심을 끼얹어, 문재인 정권의 앞뒤 가리지 않는 탈핵 선언을 옹위하려 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공공기관 실내 온도를 28도로 제한하는데 나라의 뇌가 푹 익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봄에는 미세먼지, 여름에는 폭서와 습기, 가을에도 미세먼지, 겨울에는 혹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렇다. 그렇다면, 무조건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당위를 내거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전기를 아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2016년에 폭염으로 무려 17명이 목숨을 잃은 나라에서,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은 28도에 맞춰진 에어컨 때문에 낮에 더워서 일도 못하고 헤롱거리다가 야근을 하게 되는 이게 정상인가?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여름에는 열사병으로 목숨을 잃는 취약계층은 겨울에는 또 가스비를 내기 어려워서 전기장판 하나로 목숨을 부지한다. 에어콘을 꺼요, 냉장고가 없으면 음식이 빨리 상해서 이웃과 사이좋게 나눠먹게 되네요, 선풍기 하나면 충분해요 같은 소리는 이미 충분히 잘 만들어진 집에 살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찍찍 내뱉는 배부른 비윤리적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탈핵 논의는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정치화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 때문에 에어컨을 끄고 땀흘려 고생하라는 식이었다면,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그 자리를 환경 담론이 차지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정권이나 저 정권이나, 퇴행적인 '에너지 절약'이라는 거짓 당위를 앞세워 냉철한 논의가 설 자리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고생한다며 정부에서 130억을 들여 택배 자동화 기술을 개발하기에 앞서, 모든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쉬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쉬는 시간에는 에어컨이 틀어진 휴게실에서 쉴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어주는 나라 말이다.

저렴한 전기료가 우리의 실생활과 상관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값싼 전기를 '사람'이 아닌 '기계'에만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직장에서 혹은 각자의 일터에서 보낸다. 일하는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 그 어떤 나도 행복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전기료의 급격한 인상은 일터의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전기를 사람이 쓰는 것, 사람의 몸이 편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이런 논의가 동반되지 않는 한 전기요금과 관련된 현재의 논의는 극히 퇴행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에 에어컨을 28도로 고정시키는 정부와, 아파트 경비실에 설치된 에어컨을 틀지 못하도록 하는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전기를 아끼는 게 개인의 고통보다 중요하다'는 박정희 시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 자리에서 쫓아낸 지금도 그 망령은 여전히 살아있다. 아니, 이제는 친환경 탈핵 탈원전이라는 새로운 망토를 두르고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탈핵 탈원전의 당위를 무턱대고 앞세우는 대신, 보다 냉철하게 향후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여름이 되기를 바란다.



* 일러두기: 본문의 부정확한 서술을 수정했습니다. 2017년 7월 12일 오후 5시 20분.

2017-06-05

문재인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문재인 정권의 전반적인 경향성을 네 글자로 줄이자면 '내로남불'일 것이다. 자신들이 하면 위장전입도 건강보험료 부정도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요컨대 '내로남불'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울러 '정규직 일자리 81만개 확충', '원자력 발전소 전면 폐쇄'처럼 요란하게 홍보했던 멋진 정책들도 모두 슬그머니 포기하거나 목표를 과감하게 하향 조정하고 있다. 노래 가사마냥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하지만 국정과제 선정 과정에서 문 대통령 공약 일부는 수정 혹은 폐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정기획위는 이미 부처별 1차 업무보고에서 일부 공약을 수정하거나 실제 이행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기업 반발이나 현실적인 제한 때문에 공약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기도 쉽지 않거나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가계 통신비 인하(통신 기본료 폐지), 광화문 대통령, 탈(脫)원전·탈석탄발전소, 고교학점제 도입, 전속고발권 폐지 등이 대표적 사례다. 국정기획위가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현재 6470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4대강 보 개방 등도 추진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일 수 있다.

김채연, 이태훈, 황정수, 박동휘, 이정호, "국정기획자문위원회 1차 업무보고 마무리…폐기·수정 기로에 선 5대 공약", 한국경제, 2017년 6월 4일, (링크).

그러나 어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청와대 참모들은 이미 배치된 사드를 조용히 '착하게' 포장하는대신, 이미 들어와 있다고 언론에 보도까지 되었던 미사일 발사대 4기를 문제삼아 국방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분노가 밀려온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미 배치하기로 합의가 끝났고, 당연히 국회의 비준 따위 처음부터 필요 없는 포대 하나를 두고, 신임 정부가 끝없이 어깃장을 놓고 있다. 대한민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을, 특히 평택 미군기지와 왜관 부산으로 이어지는 미군 보급선을 지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포대를 놓는데, 수도권의 시민들은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반론'을 야권에서 끊임없이 생산하다가 급기야는 그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까지 했다. 미군들이 죽건 말건 한국 정부는 신경 안 쓰지만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이런 나라에 정나미가 안 떨어지면 이상한 일 아닌가?

미국의 입장이 '옳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최소한의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북한은 한국을 향해 전면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 반대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북한을 선뜻 폭격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폭격을 사랑하는 나라가 미국이고, 북한의 핵 시설을 날려버릴 폭탄쯤은 넘쳐난다. 하지만 때릴 수가 없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미군의 피해가 당연히 발생하고 대대적인 확전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북한 뿐 아니라 미군의 우발적 행동 역시 막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드는 그 주한미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받으며 주둔하는 한, 대한민국 역시 위 문단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보호받는다. 저러한 식의 '공포'를 북한에 심어주기 위해서 우리가 '자주국방'을 하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과연 얼마가 될까? 북한의 전면적 공격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이렇듯 많은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골수' 진보 자주파가 아닌 다음에야, 주한미군의 철수에는 대체로 반대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1.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2.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와 비용을 어느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가?
  3. 셋째,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할 경우 그 비용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설득할 의향이 있는가?

5월 31일 문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 소속 딕 더빈 상원 원내총무를 만나 사드 배치에 대해 논의했다. 더빈 의원은 면담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원치 않으면 9억2300만 달러(약 1조300억원)의 관련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밝혔"다(링크). 문제는 청와대에서 내놓은 해당 면담에 대한 브리핑에서는 그러한 충격적 발언에 대한 언급이 쏙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더빈 의원이 거짓말로 인터뷰를 한 게 아니라면, 청와대에서 언론 브리핑에서 해당 내용을 '보고 누락'한 셈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언론의 추가 취재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다. 마음을 굳게 먹고 출입기자단과 청와대 관계자의 문답을 읽어보자.

▶기자=“더빈 총무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이냐”
▶청와대 관계자=“비슷한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미국은 한국에 사드 배치를 위해 9억2300만 달러를 지불할 예정인데 한국 내에서 사드 배치가 큰 논란이 되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고 했다”
▶기자=“민감한 발언인데 어제(5월 31일)는 왜 공개를 안 했나”
▶관계자=“(더빈 총무 발언이) 그렇게 중요한가…아, 그냥 미국 시민으로서 국익 차원에서 평범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다”

허진, "[현장에서] 더빈 발언을 “그냥 미국 시민 질문”으로 느꼈다는 청와대", 중앙일보, 2017년 6월 2일, 강조는 인용자. (링크).

저 청와대 관계자의 말대로라면 문재인 대통령은 '일개 미국 시민'과 만나서 사드 배치라는 안보 중대사에 대해 논의를 한 셈이다. 문재인의 청와대에는 대체 무슨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들어가 있는 것인가?

더빈 의원의 발언이 갖는 심각성을 인식해서 브리핑에서 뺐다면 그것은 의도적 왜곡이며 '보고 누락'이다. 반면 저 설명대로 '일개 미국 시민'이 하는 흔한 소리로 이해해서 언론 브리핑에 소개하지 않은 것이라면, 청와대 외교 안보팀은 그 자리에 앉아있을 능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한국에 불고기와 비빔밥을 먹으러 온 여느 미국인 관광객이 아니라, 미국 국방 예산을 주무르는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청와대는 미국 더빈 의원의 발언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라는 발언까지 대놓고 했다.

세상에 이런 무례한 행동이 다 있나? 한국인들은 조지 W. 부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 사람'(this man)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모욕감을 느껴왔다. 그런데 자신들은 미국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상원 원내총무를 '그냥 미국 시민'이라고 부르다니?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사드 배치에 대한 기존의 협의 사항을 잘 지켜나가자고 다시 당부했지만, 문제는 청와대에 있다. 문 대통령과 문정인 외교안보수석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그래서 이렇게 사드를 놓고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의 외교적 지향점이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크고 엄청난 사건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미 ('K값'이 무려 1.6이나 나온, 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부정선거'지만) 합법적 절차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 신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놓고 있는 외교적 행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일언반구 언급 없이 그저 보여주기식 '사이다' 행보만을 거듭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사드 배치를 취소하고 싶게 만드는 모든 행동을 하면서, 겉으로는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논하고 있다. 이것은 부산으로 도망치면서 서울은 안전하다고 외친 이승만의 거짓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정직함을 요구한다. 청와대 참모진에게 최대한의 업무 파악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들은 지금, 동맹의 가치를 코 푼 휴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최악의 예측불가능한 미국 대통령이 재임한 가운데, 극히 위험한 외교 안보적 불장난을 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철수, 한미동맹의 파기, 중국의 보호 하에 가능한 북한과의 통일을 원한다면, 제발 정직하게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국민들에게 논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혹시 잊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2017-05-31

E. H. 카의 글쓰기 방법론

비전문가들--말하자면 학계에 있지 않은 분들 혹은 다른 학문분야에 있는 분들--은 이따금 나에게 역사가는 역사를 쓸 때 어떻게 작업하느냐고 묻는다. 역사가는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단계나 기간으로 나누어 작업한다는 것이 가장 상식적인 생각인 것 같다. 우선 역사가는 자신의 사료들을 읽고 그의 노트를 사실들로 채우는 데에 오랜 준비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나서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사료들을 치워놓고 노트를 꺼내 든 채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나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으며 그럴듯해 보이지도 않는다. 내 경우에는, 주요한 사료라고 생각되는 것들 중에서 몇 가지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너무나 좀이 쑤셔--반드시 처음부터가 아니더라도, 어디부터이든 상관없이--쓰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는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읽기를 계속하는 동안 쓰기는 추가되고 삭제되며 재구성되고 취소된다. 읽기는 쓰기에 의해서 인도되고 지시되며 풍부해진다: 쓰면 쓸수록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내가 찾고 있는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역사가들은 아마도, 마치 어떤 사람이 장기판과 말이 없어도 머릿속에서 장기를 두듯이, 펜이나 종이나 타이프 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 준비단계의 글쓰기를 모두 머릿속에서 할 것이다: 이는 내가 부러워하는, 하지만 흉내낼 수 없는 재능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역사가에게는 경제학자가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이라고 부르는 그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며, 실제로 그 두 과정은 단일한 과정의 부분들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그것들을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이단론들 중의 어느 하나에 빠지게 된다. 여러분은 의미나 중요성을 무시하는 가위와 풀의 역사를 쓰거나 아니면 선전문이나 역사소설을 쓰게 될 것이며,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부류의 글쓰기를 치장하려고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E. H. 카,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서울: 까치, 2015), 개역판, 44-45쪽.

이 글에서 E. H. 카의 목적은 '사실'의 수집에 집착하는 랑케 식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맥락에 이미 식상해버린 오늘날의 독자, 즉 나는, 순수하게 '작업 방법론'의 측면에서 이 대목을 재미있게 읽었다.

자료를 한도 끝도 없이 모으고, 참고문헌 목록을 영원히 갱신하고, 스스로의 논리를 (완성을 위한 텍스트가 아닌 간단한 메모나 그조차도 없는 망상의 형태로) 반박하고 또 반박하는 등의 행동은, 심지어 석사 논문같은 간단한 관문을 통과할 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고 있다,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즐기려는 게 아니라면, 일단 쓰기 시작해야 한다. E. H. 카의 말처럼 '좀이 쑤시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말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내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상식적이다. "대부분의 작가와 달리 최초의 구상안에서 빗겨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자료들을 다 모은 후, 읽고, 일일히 손으로 베낀 후, 그것들을 편집하고 원고로 쓰면서 다시 베껴썼다는 토니 주트의 글쓰기 방법론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 이미 완성된 글을 그저 '쓰는' 사람이 존재한다. E. H. 카는 짐짓 겸손한 태도로 본인이 그러한 경우에 속하지 않음을 밝히며, 그 과정에서 '가위와 풀'(오늘날의 표현대로 하자면 '복붙')로 대변되는 랑케의 역사관에 반대했던 것이다.

2017-05-30

문재인 정권, 싸드 불장난을 멈춰라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싸드 발사대가 두 대만 들어와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국방부로부터 그렇게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네 기가 더 있었기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했다고 윤영찬 홍보수석비서관이 발표했다. 5월 30일, 오늘 가장 큰 뉴스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 이것은 언론플레이다. 그것도 아주 수준이 낮고 질이 나쁜 언론플레이다. 외교 안보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로 이런 불장난을 하는 문재인 정권을 나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이렇게 대놓고 집권한지 한 달도 안 돼서 언론플레이부터 하는 청와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국방부(와 한통속이 된 미국)'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여론몰이 하려는 의도는 알겠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 서서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청문회 정국에서 여론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과 그의 주변 인사들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 유포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백번 양보해서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왔었다는 것을 청와대가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고 쳐보자. 그걸 홍보수석을 통해 언론에 대고 발표하는 것은 과연 '대통령'으로서, '청와대'로서, 합당한 행동인가?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와 있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2017년 4월 28일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28일 군관계자는 "현재 사드의 발사대 4기는 경북 칠곡 왜관의 캠프 캐럴에 보관중이며 성주골프장의 시설공사를 마치는 하반기에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링크) 그보다 이틀 전에 나온 다른 뉴스. "이동식 발사대는 요격미사일을 쏘는 발사대로 지난달 6일 사드 장비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했고, 보통 사드 1개 포대는 6기의 발사대를 갖춥니다."(링크)

정리하자면 첫째, 싸드 발사대가 한반도에 총 여섯 기 들어와있다는 것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둘째, 설령 그 보도를 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싸드라는 것이 어떤 시스템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1개 포대가 배치된 이상 6기의 발사대가 뒤따라왔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마치 '장전된 리볼버 한 정'에는 실탄 여섯 발이 들어있으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말이다.

문재인의 청와대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트집을 잡고 있는 셈이다. 보고가 누락되었다 한들 '아니 어떻게 발사대 네 기가 몰래 들어와 있을수가?'라고 역정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조직과 인력들이라면 설령 저런 착오가 있었다 한들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혼동한 사람이 쪽팔리는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화를 낸다면 이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싸드 발사대 네 기가 한반도에 몰래 들어와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가짜뉴스'다. 문제는 그 '가짜뉴스'의 출처가 청와대라는 것이다. 싸드는 현재 외교 국방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사안이다. 그것을 두고 청와대에서 '가짜뉴스'를 유포한다? 그것도 한낱 국내 정치에서 팻감으로 쓰기 위해? 국방부 길들이기 하려고? 국방부를 길들이려면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인사권을 활용할 일이지, 이렇게 동맹국과의 신의를 지속적으로 흔드는 수를 써야만 하는 것일까? 문재인과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외교란 무엇이고, 안보란 무엇이며, 국방이란 또 대체 무엇인가?

나는 문재인에게 한 표를 던지지 않은 60%의 국민의 일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문재인을 대통령으로서 존중한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과 청와대 역시 국민들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한 외교 안보 이슈를 국내 정치용, 청문회 국면 돌파용, 국방부 길들이기용 카드로 휘두르지 않는 것은 그러한 국민 존중의 첫 걸음이다. 문재인 정권은 안보 불장난을 멈추고 수권세력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17-05-18

문재인의 '10조 추경',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이었던 '80만 일자리 만들기'를 실현하기 위해 10조 단위의 추경을 추진할 예정이다. 물론 대통령 본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지지자들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5월 17일 나온 기사에 따르면, 우리는 무턱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며 잘 될 것이다'라는 태도만을 취할 수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각종 위원회를 신설하면서 공직사회가 반색하고 있다. 만성적인 인사적체를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새 정부는 위원회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위원회가 많으면 부처와 중복되는 ‘옥상옥’ 조직이 돼 관료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병률, "관료들, 새 정부 각종 위원회 신설에 ‘반색’…인사적체 해소 기대", 경향비즈, 2017년 5월 17일

이미 대선 과정에서 수없이 지적되었다. 문재인 캠프는 대체 '10조 추경'을 통해 어떤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인 내역을 밝힌 바 없다(링크). 서서히 그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반가운 일인데, 그것이 '옥상옥' 조직이 될 우려가 큰 온갖 '위원회' 만들기에 투입된다면? 그러한 예산 편성과 집행이 '중년 공직자 배불리기'의 일환일 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

국가 전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무원은 늘어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대선 토론 과정에서 지적되었다시피, 한국의 공무원 숫자가 OECD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비판은 과장된 허위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만 합한 숫자인데, 다른 국가들은 관공서 비정규직을 비롯해 비영리 공공단체와 사립학교 교원, 군인까지 모두 포함한 경우가 많"(링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무원 숫자를 많이 늘리겠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현직 공무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많이 늘린다는 문재인의 대선 공약은 지금이라도 철저히 검증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공무원이 현재 '안정된 일자리'로서 최우선 순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망한 나라인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의 건강한 성장이지 공무원 일자리'만'의 성장이 아니다.

2017-05-17

노무현과 진보 언론의 갈등

진보 언론에 대한 문재인 지지자들의 원성이 높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노무현을 무조건 매도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후에야 꼬리를 내린 비겁자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일단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진보 언론이 노무현과 대립했던 것은, 노무현과 대립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 언론은 진보 언론이기에 노무현을 비판해야 했다. 그가 재임 중, 그리고 퇴임 후에 연루되었던 가족 친지들의 뇌물 수뢰 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이라는 이유로 뇌물을 받았는데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보' 이전에 그냥 '언론'이 아니다.

위 표는 2006년 7월 7일 경향신문에 실린 "조·중·동의 왜곡 ‘신문발전기금’ 악의적 보도"(링크)가 출처다. 행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진보의 이상을 배신한 것은 노무현임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은 '조중동'을 비판하는 쪽에 더욱 가깝지 노무현에게 직접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지는 않다.

불과 10여년 전의 사실들을 두고 '설명'이 필요하게 될 줄이야.

2017-05-10

중식이밴드 정중식 씨의 페이스북 게시물에 대한 비판

일러두기) 이것은 2016년 12월, 중식이밴드의 정중식 씨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에 대한 반박문이다. 나는 2016년 12월 10일 트위터에 트윗 타래를 올렸고, 그 내용을 지금 갈무리하여 블로그에 적어둔다. 원문을 보고 싶다면 이 링크를 클릭하여 확인할 수 있다.



정중식 씨가 자신의 페북 포스트를 비공개로 돌린 모양이다. 꼭 지적해야 할 내용이 있었는데. 기억에 더듬어 말해보자. 그는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남자도 편해지도록 만들어준다'고, 어디서 잘못 읽고 체한 상태다. 전혀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은 남자를 '편해지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가부장주의적 성역할'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이다. 어떤 남자들, 아니 실은 많은 남자들이 가부장제의 성역할을 사실은 좋아하고 즐긴다. 다른 남자들에게 지배당하지만, 여자를 하대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가부장제가 수천년간 이어저온 이유다. 가부장제가 실은 남자들 전반에게 해로우면 그게 수천년이나 이어져 왔겠는가? 여자들 전부를 노예화함으로써 피지배층인 남자들에게 제공하는 가부장제가 양심 없는 남자들에게 '불편할'리가 없다.

페미니즘은 '여자도 돈벌어오고 집 사오고 남자인 나는 편해지고 ㅋㅋ'가 아니다. 여자는 원래부터 돈을 벌어온다. 다만 차별당하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해도 버는 돈은 60%다. 여자들은 같은 일을 하고 돈 더 받아야 하고, 남자는 집안일해야 한다.

정중식 씨의 사례를 보면, '페미니즘은 남자들에게도 이익이다' 같은 식의 설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 남자들은 별로 손해도 안 봤으면서 자신에게 뭔가 단물(사근사근하게 설득해주는 예쁜 페미녀?)이 돌아오지 않으면 즉각 반발한다.

그럼 대체 왜 남자가 페미니즘을 옹호해야 하나? '남자'인 내게 손해인데도? 맞다. 가부장제의 구조 속에 안주해온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은 분명 손해다. 하지만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차별받는 동료 인류에 대한 인간적 의무다.

'페미니즘에 동의하면 잠재적 연애 대상이 많아지니까', '진정한 페미니스트 여성은 월 200도 못버는 인디밴드 나님에게 공짜 섹스를 배풀어줄테니까' 이런 거 아니다. 그냥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여성차별에 대한 반대니까.

월 200도 못 버는 남자의 성매매를 옹호하는 정중식 같은 남자들은, 그 남자들을 위해 빚으로 옭아매인 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일부로 기꺼이 복무한다.

그래놓고 휴머니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국 '여자'를 '사람'의 범주에서 뺀다는 뜻이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정중식 씨 당신은 방금 그렇게 말해놓고, 욕 좀 먹으니까 페이스북 게시물을 비공개로 돌렸다. 당신은 성차별주의자 이전에 인간차별주의자다.

페미니즘 책 읽지 마라. 거기서 어설프게 한 두 문장 주워섬기면서 '야 여자도 같은 권리가 있으니까 같은 의무를 짊어져라' 같은 개소리 내뱉는 남자들 정말 보기 흉하다. 여자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도 않는 자들이 왜 '페미니즘'을 공부해?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하고 남자들처럼 야근을 못하고 그래서 유리천장이 생겼고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이런 헛소리 늘어놓을 거면 페미니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해롭다. 그럼 힘 약한 남자한테는 임금차별 해도 정당한가?

정중식은 결국 여자를 동등한 '사람'의 범주에서 배제하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을 어설프게 흡수한 후, 자신들의 가부장적 세계관에 맞도록 억지로 끼워넣는다. 여성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페미니즘 공부', 걍 하지 마라.

남자가 그대로인 채로 페미니즘 세상이 오면 '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해진다. 당연한 거 아닌가? 페미니즘은 새로운 남성성의 개발을 요구하며, 아직 그 길은 개척되지 않았다. 남자들 '편해지자'는 게 아니라, 남자를 '바꾸자'고 하는 것이다.

성차별이 해소, 혹은 최대한 완화된 세상이 오면, '양심적인 남자들'의 '양심'은 편해진다. 하지만 모든 남자들의 육체는 지금보다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예전처럼 '농담'도 못하고, '터치'도 못하고, '그랩'도 못하고, 돈은 돈대로 벌어와야 한다.

페미니즘은 '그러니까', '편해지니까' 동의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여자들도 오픈리 페미니스트가 되면 삶이 피곤해진다. 어떻게 남자가 '편해짐' 하나? 염치가 없나? 남자는 여자보다 몇 배로 더 불편해질 것이며,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옳으니까.

옳으니까 옳은 일을 한다. 가난하건 부유하건, 배웠건 못 배웠건. 나는 가난하고 못 배웠으니까 천박해도 된다고 말하는 정중식 씨는 '남자 망신' 그만 시키고, 페미니즘 공부도 그만두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당연한 진리부터 인정하기 바란다. -끝-

2017-05-02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

2017년 5월 9일 치러질 제19대 대선에서 기호 3번 안철수 후보에게 표를 줄 생각이다. 세상 만사에 의견 밝히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지 10년도 넘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누구를 찍겠다고 선언해본 적이 없다. 시인 김수영이 "엔카운터識"에서 했던 표현을 빌자면, "야한 선언은 안해도 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의 구절처럼, "어제하고는 틀려졌"고, "틀려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틀려져야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당신한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야한 선언'을 한다. 안철수를 찍겠다고.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그 이유는 세 사람의 이름과 이어진다.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


1. 신해철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뜰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그 신해철이 그렇게 열심히 지지했던 민주당에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약칭 의료분쟁조정법), 일명 '신해철법'의 통과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법안이 표류하게 되리라는 것 또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은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발의되었다. 전자는 더불어민주당 오제세 의원, 후자는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골자는 같다. 사망이나 중장애 등 중대한 피해 발생시, 의료사고 피해자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분쟁 조정을 신청하면 의료인의 동의 없이도 조정 절차가 개시될 수 있도록 법에 명문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큰 수술의 경우 마취된 상태로 본인의 몸을 맡겨야 하고, 전문적인 의료 지식이 없으며, 상대방의 고의나 과실을 입증하기도 어려워 의료사고 발생시에도 재판을 통해 권리를 보호받지 못했던 의료사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조정을 통해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주는 법이다. 반대로 의사들은 그러한 조정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15일 내에 이의를 제기하면 된다. 법으로 강제되는 것은 조정절차의 '개시'일 뿐 그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료 단체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고, 더불어민주당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법안 발의를 해놓고는 상임위 법안소위에 안건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결국 19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될 처지에 놓였는데 그때 고인의 유족 및 친지들이 안철수 의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안철수는 이름만 걸고 엉덩이를 빼는 대신,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틀만에 신해철법이 법사위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안철수는 전국의사총연합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낙선운동을 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바로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새누리당도 더불어민주당도 신해철법을 발의만 하고 내버려뒀던 것이다.

2016년 2월 12일, 4월 총선을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이다. 의사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철수는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기로 하고 옳은 일을 했다. 그러자 스포트라이트가 안철수에게만 쏠리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던 거대 여당과 야당의 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철수는 의석을 지켰고 국민의당은 모든 정치평론가들의 예상과 여론조사를 뒤엎고 40석에 가까운 제3당이 되었다. 그리고 20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여 신해철법이 통과된 것이다. 2016년 5월 19일의 일이었다.

이 사례는 대단히 중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문화적 프로파간다가 필요할 때마다 신해철의 음악과 발언 등을 많이도 이용해왔다. 하지만 정작 그의 유족들을 위해 결정적인 노력을 한 사람은 안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어떤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왜 신해철의 유족이 문재인이 아니라 안철수에게 "그대에게"와 "민물장어의 꿈"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는지 의아해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꼭 필요할 때, 예상되는 불이익을 무릅쓰고, 어려운 이들을 도왔기 때문이다.

신해철법의 통과 과정이 증명하고 있다. 안철수는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손해를 봐야 한다. 그 손해를 뛰어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얻지 못하더라도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지만, 큰 책임을 지고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도자에게 더욱 절실하다.

나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정치적 손해를 무릅쓸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 말로만, 선량한 이미지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다는 정치적 이력서를 가진 사람 말이다.


2. 김영란

일단 그 법의 이름을 '김영란법'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 점부터 확실히 해두고 싶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약칭은 "청탁금지법"이지 '김영란법'이 아니다. 청탁금지법의 역사는 안철수의 정치 이력과도 거의 포개진다. 이 대목은 이미 잘 정리된 기사를 인용해보자.

안 전 대표는 지난 2013년 8월 김영란법과 관련한 정부안이 제출됐을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사회정의'를 강조하며 "원안 통과"를 주장했다.

당시 안 전 대표는 같은해 4월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뒤 독자세력 구축에 나서고 있던 터라 혁신 경쟁을 벌였던 김한길 대표 체제의 옛 민주당이 2014년 김영란법을 정치혁신 과제로 선정‧발표하는 데 자극을 줬다.

안 전 대표의 김영란법 소신은 옛 민주당과 통합해 새정치연합으로 거듭난 이후 의원총회 등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안 전 대표는 지난해 3월31일 새정치연합 창당 후 처음으로 열린 의원총회에서 "'김영란법을 이번 4월 국회에서 통과해야 한다"며 "원래 취지대로, 많은 국민이 바라는 대로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4월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도 김영란법 처리를 요구하며 "이 법안의 통과야말로 정치권의 자기정화 의지를 국민에게 보여드리는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안 전 대표는 7·30 재보궐 선거 참패로 대표직에서 물러나 5개월여간 자숙기간을 가진 뒤 내놓은 첫 일성도 '김영란법 처리'였다.

당시 김영란법이 소관 국회 상임위인 정무위원회 처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안 전 대표는 성명을 내고 "'김영란법'은 가히 '부패공화국'이라고 할 대한민국의 공직자 부패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강력한 반부패 법안으로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힘을 실었다.(링크)

그런데 부정청탁법은 '신해철법', 즉 의료분쟁조정법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다. 의사들의 반발만 이겨내면 그만이었던 의료분쟁조정법과 달리, 교수, 기자, 공무원, 정치인 등 너무도 많은 이들이 부정청탁법의 적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료분쟁조정법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양이가 대단히 많고 힘도 세다.

안철수가 한 일은 여당과 야당의 책임자들을 만나 그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2015년 2월 26일, 안철수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차례로 만나, 부정청탁법을 다음 본회의에서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는 국민의당을 창당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안철수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대립 구도를 넘어, 양자를 오가며 합의점을 찾아내고 옳은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부정청탁법을 좌초시키면서 생색내는 건 너무도 쉽다. 거대 여당과 거대 야당이 서로를 탓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면 된다. 그러면 국민들은 속이 터지겠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놈들 때문에 그랬다'면서 남탓만 하면 우리쪽 지지층은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을텐데. 그것이 바로 적대적 공존의 매커니즘이다.

애초에 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미 '적'으로 보고 있다면, 그래도 대화를 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정치인은 군인이 아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합의점을 도출해내야 한다. 안철수는 날치기 통과도 필리버스터도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가장 많은 고양이, 아니 호랑이들의 목에 방울을 달아야 했던, 부정청탁법을 두고서 말이다.

안철수를 찍고 싶지만 문재인이나 심상정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진보적인, 혁신적인, 개혁적인 의제 가운데 많은 것들은 어쩌면 안철수가 대통령이 될 때 더욱 잘 실현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부정청탁법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안철수의 정치 스타일은 '말이 되고 좋은 법이면 누가 발의했건 통과시킨다'이기 때문이다. 좋은 법이지만 새누리당에서 발의했으니까 안 되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더민주가 빛을 볼까봐 일부러 망쳐버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정책에 대해 제대로 토의하고 협상하여 빠르게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권을 원한다면 현재로서는 안철수를 찍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번 대선은 누가 이기건 여소야대 대통령이 된다. 우리에게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정치를 할 줄 아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던져놓고 원외투쟁을 일삼거나, 국회법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날치기 통과를 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안철수는 소위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법의 통과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입증한 바 있는, 당선 가능한 대통령 후보다.


3. 안철수

안철수가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국회의원 의석수 200석으로 줄이겠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국회를 불신하지만, 그 국회에게 탄핵당한 박근혜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행정부보다는 입법부에게 더 많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에 부합한다. 안철수는 정치 혐오에 기대어 급성장한 포퓰리스트라고 나는 판단했고, 절대 그에게 표를 줄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런 면에서, 2012년에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정치는 큰 혼란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을 조율하고 그 중에서 최선을, 차선을, 차차선을, 차악을 택해나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때로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끌어내야 하지만 때로는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안철수는 의사로 교육받은 후 프로그래머로, 또 사업가로 살아왔다. 의학은 과학이다. 생명 그 자체의 신비로움과는 별도로, 사람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고, 명백한 오답이 존재한다. 프로그래밍은 그보다 훨씬 더 확실한 논리의 세계다. 사업은 1인1표가 아니라 1주1표의 원리로 돌아가는, 민주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일이다. 정치에 뛰어들자마자 대통령이 되었으면 안철수가 대한민국에 큰 혼란을 초래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하지만 안철수는 금방 배웠다. 앞서 살펴본 두 사례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20대부터, 30대부터 국회의원이 되어 지금껏 기세등등한 구386들보다 안철수가 훨씬 '정치'를 '정치답게' 잘 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용기, 정치적 목표의 실현을 위해 상대방과 마주앉아 대화하고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지혜를, 이미 실천적으로 입증했다. 대통령직에 요구되는 새로운 도전 과제에도 역시 잘 적응하고 대처해낼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현재 당선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후보자는 총 세 명이다. 그런데 그 중 대통령이 된 후에도 뭔가를 배워나갈 것이라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안철수 뿐이다.

대한민국은 외교, 안보, 정치, 경제, 기타등등 전방위적인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지지자들에게 종교적인 숭배를 받고 있지만 국회 활동 실적부터가 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스스로를 '스트롱맨'이라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발언과 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젊은 시절 약물을 이용한 강간을 시도했다는 사실까지 자서전에 써놓은 사람을 두고 대통령의 자격을 논해야 하는 걸까. 소거법으로 생각해봐도 당선권 내에서 '찍을만한 사람'은 안철수 뿐이다. 이렇게 다시 한 번 검산을 해본 후, 나는 안철수를 찍기로 결정하고,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이번 대선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붕괴했기 때문에 치러지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다. 그런데 그 빈 자리에 무능한 운동권 세력이 들어선다면, 그들과 적대적 공존 관계인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홍준표가 지지율을 높이면서 벌어지고 있는, 5월 2일 현재 상황이 바로 그렇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무능한 운동권 세력의 적대적 공존, 그것은 '절대적 공존'이다.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그 구도가 깨진다. 국민이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정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수십년에 한 번 돌아올까 말까 한 역사적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결과를 보고 싶다. 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내 힘을 보태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안철수를 찍을 것이다. 내 결정을 알리고, 이 생각의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설득되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양자택일 속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는 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하는 말을 인용해보자.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대담하고, 과감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지만 잘 살펴보면 안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 나는 10년 전의 여당도 두 달 전의 여당도 아닌, 미래의 여당에 한 표를 던진다.




보론

이른바 '진보 논객'이면서 왜 심상정을 찍지 않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들어올 것이다. 맞다. 나는 '진보 논객'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들도 나를 그렇게 바라본다. 하지만 한국 진보 진영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논의 중 많은 것들에 나는 동의할 수 없고, 애석하게도 그 논의들은 심상정의 공약에 반영되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싸드다. 나는 싸드를 한반도에 배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바꿔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확고한 싸드 배치 찬성론자다. 당연히 싸드 비용은 미국이 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미군이 소유하고 운용하는 미군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 미국의 무기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진보 진영의 기본적인 세계관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은 군사동맹을 맺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안전과 번영의 토대다.

이것은 진보 진영의 세계관 전체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2008년 이후, 진보는 정부가 추진하는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온갖 종류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며 반대하는 관성에 젖어 있다. 그래서 싸드에서는 중국 영토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전자파가 나오고 그것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 그 전자파는 '죽음의 전자파'여서 레이더보다 해발 고도가 낮은 곳에 위치한 참외밭의 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드 배치를 반대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을 향해 무력 충돌을 운운하는 것은 이쪽에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지만, 미 대통령 트럼프가 말도 안 되는 10억 달러를 운운하는 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는 주권 침해가 된다.

요컨대 반미주의, 반과학주의, 음모론주의가 오늘날의 진보 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면 세계에 대해, 국제 정세에 대해, 대단히 부정확한 정보 하에 분기탱천할 뿐인 오늘날의 대한민국 진보의 모습이 나온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래도 사회적 당위의 실현을 위해 진보 정당을 지지해왔으나, 모든 대선 공약이 '복지 확대'로 수렴되고 있는 지금, 나는 진보 진영과 나의 세계관 차이를 더는 없는 척 할 수가 없다.

앞서 부정청탁법을 논의할 때 기술했다시피, 안철수가 지금까지 해온 정치적 스타일을 놓고 볼 때,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심상정의 공약 중 좋은 것들은 현실화될 수 있다.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면 안철수의 공약들을 가져다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심상정 본인과 그의 정당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이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는 심상정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진보 진영의 세계관과 나의 그것이 갖는 차이에 대해, 그리고 내가 왜 동의할 수 없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머지않아 (어쩌면 여러 편의) 글로 정리할 예정이다. 그렇게 내 입장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과 나의 의견의 차이가 조금씩 좁혀질 그날을 기대한다.

2017-04-30

19대 대선, 누구를 찍을 것인가? (수정)

대선이 벌써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 구도가 짜이기 전부터 누구를 찍을지 마음을 정해놓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 선거가 급하게 치러지는 바람에 아직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어떻게 자신의 투표를 설명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써본다. 목차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면서 누구에게 나의 소중한 표를 줄지 결정해보자.


1.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가?

이번 대선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다. 많은 이들이 이쯤 되니까 아예 박근혜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있지만 아직 1심 유죄판결조차 받지 않은 피의자일 뿐이다. 복역중이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투표권도 있다(언론에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이번 대선 투표는 기권할 것 같지만, 아무튼 권리가 있다).

그 박근혜를 지지하는 세력과 후보 역시 여전히 활동중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가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남재준은 독자 출마 후 4월 29일 홍준표 지지를 밝히며 사퇴했다. 보도에 따르면 "홍 후보는 "조 후보도 아마 그만둘 것 같다"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암시했(링크)"다고도 하던데, 여기서 말하는 '조 후보'는 조원진이며 그의 선거 구호는 '박근혜를 지킵시다'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탄핵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홍준표를 찍는 게 맞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본인의 부정적 입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숫자로 제시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도 홍준표를 찍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가 왜곡되어 정치권에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준표를 으면 근혜가 아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2.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당신은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나는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를 좋아하는가? 심상정을 좋아하는가? 유승민을 보면 배신자라고 느끼나?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 않고도 그들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이유는 충분히, 정책과 입장으로 인해 나누어진다. 하지만 문재인은 예외다. 정치적, 정책적 발언을 근거로 문재인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인 싸드 배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재인의 입장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10억 불'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트럼프가 이상한 소리를 하자 '국회 비준을 거쳐 배치하자'고 한다. 그런데 그는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다. 그렇다면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나의 정책적 지향점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선거에 임하겠다, 왜냐하면 싸드 배치 반대하는 표 떨어질까봐, 이 소리 아닌가?

다른 공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공약 전부가 그런 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예산 문제부터가 불투명하니 말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 측은 28일 19대 대선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득표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유로 세율인상의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았다."(링크) 득표 활동에 도움이 안 되니까, 이것저것 퍼주는 공약을 제시하되, 세율 인상은 슬쩍 뭉개고 지나간다. 그것도 대선 정책공약집이라는, 말 그대로 '공약'을 해야 하는 문서에서 말이다. 그 이유를 문재인 선대위 윤호중 공동정책본부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국민도 자신이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틀렸다. 어떤 국민들은 문재인을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문재인이 당선 후 뭘 하건 그냥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문재인을 찍으면 된다.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재인이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꼭 문재인을 찍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버리는 편을 권하고 싶다.

나는 문재인의 공약을 믿기 어렵다. 공약과 정책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찍는 선거는 2012년을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에서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문재인을 꼭 찍고 싶다면, 어쩌겠는가, 찍어야지.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가?

현 대선 국면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의미한 질문을 단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이것은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 나누어지는 양자택일형 질문이며, 온 국민의 안위와 관련된 안보 이슈일 뿐 아니라, 한국 및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일단 심상정은 현 대선 국면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싸드 배치 반대 의사를 흔들림 없이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후보다. 앞서 말했듯 문재인의 입장은 '다음 정부인 내가 알아서 하겠다, 지금 나한테 묻지 마라'는 쪽이지 결코 싸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국회 비준을 거치겠다는 말도 그렇다. 대통령이 된 후에 국회에 통과를 요구하면 당연히 통과될 것이니 결코 반대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반면 심상정은 한미동맹의 폐기까지 감수할 수 있다는 아주 강경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 싸드 배치 반대는 궁극적으로 한미동맹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미국의 힘이 약해져서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재래식 병력만으로 북한과 전쟁을 하면 당연히 대한민국이 이긴다. 하지만 수만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이미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동맹을 파기하고 '주체적'으로 남쪽에서도 핵무장을 한다면, 그것은 북한과 같은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런 과감한 군사적, 외교적 실험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싸드 배치만은 절대 안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아니 상당수는, 사실 민주당과 문재인이 반대하니까 덩달아 반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 '착한 싸드'를 놓으면 오히려 싸드 예찬론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진심으로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미국으로부터 당장 전시작전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며, 싸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소위 '죽음의 전자파' 때문에 성주에서 나오는 참외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 싸드 배치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심상정의 득표율만이 한미동맹의 파기를 무릅쓰더라도 싸드 배치를 철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존재하는지 확인해주는 공식적이고도 명백한 지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싸드 배치에 찬성한다면 안철수를 찍어야 한다. 유승민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러므로 유승민을 찍는 것 역시 싸드 배치에 찬성하되, 박근혜 탄핵 반대 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선택지가 된다.

안철수는 본래, 4월 30일 현재 문재인이 취한 것과 흡사하게, 국회의 비준을 거쳐 싸드를 배치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입장을 바꾸었다. 입장을 바꾼 이유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TV 토론을 통해 여러 차례 설명했다. 대선후보에 맞춰서 국민의당 역시 싸드 배치에 대한 입장을 변경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지원은 "햇볕정책은 튼튼한 한미동맹에 기반한다"며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입장이다. 나는 싸드 배치 그 자체에 대해서 동의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치인과 정당이 입장을 변경하고 표명하는 과정의 투명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관리인인 박지원은 당연히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햇볕정책을 영원토록 유지하며, 개성공단을 되살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와 입장이 다르므로,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후보의 입장을 조율했다. 이런 게 바로 정치인과 정당의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승민의 경우에도 목적지는 같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재정 정책 하에 '중부담 중복지'로 복지 정책을 펴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향점이 유사할 경우, 당연히 당선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유승민을 찍는 것보다 안철수를 찍어서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유승민의 정치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다른 정책들은, 그리고 온갖 네거티브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미 지지율 1위인 후보의 캠프부터가 공약에 수반하는 예산에 대해 정직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그런 선거다. 어차피 정책들은 주어진 예산과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령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당장 2018년 최저임금을 순식간에 1만원으로 올릴 수는 없다. 문재인이 대통령 된다고 해서 내년에 곧장 전국에 단설유치원이 쫙 깔리고 모든 유아들을 수용할 수 있을 성 싶은가?

달콤한 공약만큼이나 씁쓸한 네거티브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후보에게 호의를 갖고 보기 시작하면 모든 공약이 다 좋아보인다. 반대로 '저 인간 조져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뉴스를 보면 네거티브의 소재는 늘 넘쳐난다. 문재인 아들 문준용 씨의 취업 비리 의혹, 안철수 후보 부인 김미경 씨의 소위 '갑질' 논란, 심상정은 본인이 진보라면서 아들을 '귀족학교' 보냈다더라, 유승민은 선거에 딸 동원 안하겠다면서 지지율 안 나오니까 홍대입구에 데리고 나왔네, 등등.

한편 홍준표는 돼지발정제로 강간 모의를 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밝히고도 10%가 넘는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감으로 생각한다. 그 수치는 박근혜의 탄핵에 동의하지 않았던 여론조사상 수치와 거의 흡사하다. 다시 말해 홍준표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네거티브는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안철수나 문재인의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부터 지지하던 사람들이 최근 나온 몇 개의 이슈 때문에 마음을 바꿀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본인이 부동층에 속하는 경우,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몇 개의 네거티브 사안들을 돌려보면서 어떤 후보를 반대하거나 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지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도 그 정도 논란은 당연히 있다. 그런데 상대편의 네거티브한 요소를 욕하면서 자신이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후보자에 대한 의혹들은 일부러 무시하기 시작하면, 소위 '빠'가 되어버린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선거에 못 이겨도 '빠'는 되지 말자.


6. 세계적 추세(잡담)

이것은 잡담이다. 객적은 소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현재 세계인들은 '안 해봤던 짓'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브렉시트, 트럼프, 그리고 프랑스 대선이 마크롱과 르펜의 대결이 된 것. 물론 이 배후에는 억울하다고 느끼는 백인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크게 도사리고 있다(그에 대해서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나의 칼럼들을 참고해도 좋겠다.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링크), "[별별시선]트럼프, 샌더스, 대한민국"(링크)).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작년부터 벌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이변에는 결국 '지금까지 안 해왔던 일'을 해보자는 갈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정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기존 정치권이 그러한 변화에의 갈망을 보다 순치(馴致)된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시키지 못한 채 포퓰리스트들이 놀이터로 삼는 동안 수수방관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최근 정치적 상황 역시 세계적 경향의 일부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총선을 통해 자체적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제3당이 출현했고,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으며, 결국 12월이 아니라 5월에 조기 대선을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안 가봤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여당도 둘로 쪼개졌고, 야당도 둘로 쪼개졌으며,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여당이 아예 사라져버린 채 치러지는 선거다. 정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기존에 자신이 해왔던 투표에 비해 보다 파격적인 표를 던져도 좋을 시점이다.[주]


7. 요약 및 결론

1)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면 홍준표 찍자.
2) 문재인이 그냥 좋으면 문재인 찍자.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면 심상정 찍자.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면 안철수나 유승민이다.
5) 당선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안철수를 찍자.

이번 대선은 대통령 보궐선거다. 대한민국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선거이며, 3당 합당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거대 여당의 잔존 세력들을 완전히 정치의 변방으로 몰아낼 수 있는 역사적 기회다. 동시에 미국의 트럼프, 일본의 아베, 중국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을 상대할 수 있는 유능하고 대담한 정치 지도자를 반드시 선출해야만 하는 그런 선거이기도 하다. 싸드 배치 논란과 중국의 보복, 트럼프의 돌발 발언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해야만 할 시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의 사안(박근혜 탄핵, 싸드 배치)와 한 명의 인물(문재인)을 기준선으로 하여,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의사 결정 가이드를 만들어 보았다. 온갖 종류의 현란한 공약들을 수십개씩 클릭하는 것보다, 위에서 제시한 다섯 개의 선택지에 따라 다섯 명의 후보자 중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는 것이 훨씬 명확하고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한 사람의 유권자이자 주권자로서, 이 글을 읽은 분들의 사고 역시 조금이나마 더욱 단단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꼭 투표합시다.



-----------------------------


[주] 허핑턴포스트에 이 글을 보냈다. 그런데 허핑턴포스트가 선관위에 문의해본 결과,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기사나 기고를 실으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여, 글을 일부 수정했다(허핑턴포스트 블로그도 일종의 '언론'으로 취급되고 있나보다). 5월 2일에 허핑턴포스트에 올라올 게시물과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해당 지면에 맞춰 수정한 내용을 이곳에도 반영한다. 참고로 삭제된 문단은 다음과 같다.

지난 총선에서, 다들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안철수는 40석에 가까운 제3당을 출현시켰다. 그 결과 새누리당의 내분도 가시화되고, 점점 친박과 비박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박근혜의 탄핵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안 가봤던 길'이다. 우리는 군사독재냐 민주화냐라는 30년 묵은 대립구도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선택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5월에 대선을 치르고 있다.

1에서 5까지 다 읽고도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안 가봤던 길'을 가보자. 투표권을 갖게 된 이래 지난 총선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비판적 지지'따위 하지 않고 올곧게 진보정당만 찍어온 나의 결론이다. 지금은 보수정당의 후보를 찍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정치권의 전체 구도가 바뀌고, 진보정당에도 새로운 활로가 뚫릴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 두 문단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기왕 허핑턴포스트 블로그에 송고한 판본에서 삭제되기까지 했으니, 조만간 (적어도 사전 투표가 시작되기 전) 해당 내용에 대해 좀 더 길게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허핑턴포스트에 보내지 않고 내 블로그에만 올릴 계획이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 글은 다음과 같다.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2017년 5월 2일 작성)

2017년 4월 30일 03:40 작성 / 2017년 4월 30일 21:45 수정

2017-04-25

[북리뷰] 기다린다,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 엘릭시르, 1만3천8백원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스웨덴이란 인근의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다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범죄소설들을 통칭하여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 하는데, 최근 독서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재나』는 바로 그 '스칸디나비아 느와르'의 출발점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스웨덴 남부를 가로지르는 예타운하에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고 교살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중년의 수사관 마르틴 베크가 이 사건을 떠안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경찰은, 마르틴 베크는, 그럴 수 없다.

여자의 신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신문들은 더 이상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고, 함마르는 더이상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새로 접수되는 실종자 신고 중에 여자의 인상착의에 조금이라도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런 여자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르틴 베크와 알베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던 것조차 잊은 듯했다.(82쪽)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로재나』가 출간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작품은 196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던 '현재'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지 않은 세상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헨닝 만켈이 쓴 서문을 펼쳐보자.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휴대전화는 없었다. 다들 공중전화를 썼다. 다들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자그마한 녹음기를 주머니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며, 컴퓨터란 걸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때의 스웨덴은 미래보다 과거와 밀접한 사회였다."(12쪽)

그러므로 모든 수사는 기다림과 뛰어다님의 반복이다. 가령 피해자의 모습이 찍혀있을지 모를 사진 한 장을 찾으려면 배에 탔던 승객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일일이 탐문 수사를 벌여야 한다. 숨막히는 긴장과 스릴이 아니라, 두텁게 깔린 짙은 안개속을 더듬어나가는 듯한 암담함이 소설 전체를 뒤덮는다. 명탐정의 천재적 시각이 아니라 평범한 경찰들이 '개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사건의 조각을 하나씩 찾아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가깝게는 헤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부터 멀게는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수사반장'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경찰추리극은 『로재나』와 그 뒤를 이은 총 열 권짜리 연작의 후예들인 것이다.

현재 발행된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모두 이른바 '스포일링'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모가 어떠한지, 독자도 모르고 경찰도 모른다. 마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독자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단서들을 하나씩 모으며 끈질기게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이 중요하다. 끝내 어떤 자는 법의 칼날을 미꾸라지처럼 피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1960년대 스웨덴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현실을 마주보면서 참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짧고 강렬한 현실 도피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7.04.25ㅣ주간경향 1223호

2017-04-16

[별별시선] 진보의 적폐, 음모론자들

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한 이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레이더 무기부터,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나라의 잠수함까지, 수많은 '아니면 말고'가 밑도 끝도 없이 던져졌다. 선박 및 교통안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검증하느라 귀중한 논의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난 후 속된 말로 가장 '멘붕'한 쪽도 다름아닌 일부 진보 세력이었다. 그들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잠수함과의 충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굉장한 음모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부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듯이 분위기를 조성하던 사람들. 세월호가 떠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계속 음모론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닻을 던져서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던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월호 인양 후에도 '고의침몰설'을 고수하더니, 4월 14일에는 18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더 플랜>을 인터넷으로 공개했다.

<더 플랜>에서 인터뷰한 UC 버클리 통계학과 교수 필립 스타크의 말을 통해 <더 플랜>의 기본적 오류를 반박해보자.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이 기록지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록지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전자투표는 오류를 확인하거나 수정이나 복원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한국의 선거는 정확히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투표가 아니다. 투표지분류기는 이름 그대로 투표지를 '분류'만 해줄 뿐이고, 실제 개표는 사람이 한다. 애초부터 한국의 선거는 애초부터 수개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수개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계를 동원해 표를 '분류'할 뿐이다. 미분류표에 박근혜 표가 많았건 문재인 표가 많았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최종적으로 사람이 손으로 넘겨보고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표소에는 각 후보 및 정당에서 추천한 참관인들이 있다. 18대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도록 부정개표가 이루어졌다면 민주통합당에서 추천한 참관인 중에 매수 혹은 협박당한 사람, 혹은 그런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어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이 시점에서 음모론을 하나 던져보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18대 대선 개표부정설을 퍼뜨린다니 이게 무슨 짓일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불복 운동을 벌이려는 냄새가 나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누가 이기건 정권교체가 예정된 대선이다. 보수의 적폐세력은 무너졌다. 이제 범진보진영 역시 스스로의 적폐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청산해야 한다. 동쪽에는 트럼프, 서쪽에는 시진핑, 북쪽에는 김정은이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음모론 따위에 낭비할 여력은 없다. 진보의 고질병인 음모론, 적폐세력인 음모론자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자.

입력 : 2017.04.16 21:28:04 수정 : 2017.04.16 21:32:33

2017-04-11

[북리뷰] 갈등의 시대, 통합의 리더십을 고민한다

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21세기북스, 3만5천원

미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 국가다. 정치의 기본 단위가 주(州)인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에는 각각의 주마다, 그리고 연방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준주마다, 노예제에 대한 개별적인 입장이 존재했다. 그 차이는 남부의 이탈과 연방의 붕괴로 이어질 참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두막집에서 성장한 일리노이의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이 처한 정치적 조건이 그랬다.

링컨은 포부가 매우 큰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랬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 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 동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외에 더 큰 야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야망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88쪽) 대학은 고사하고 남에게 책을 빌려 스스로 법학을 공부했던 가난한 젊은이가 있다. 그런데 그의 나라는 지금 건국 이후 전례 없는 갈등으로 인해 분단되거나 내전을 겪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모든 미국인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했다. 링컨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후 꾸렸던 '팀'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권력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링컨의 성공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 심지어는 자신을 뒤에서 헐뜯고 비방했던 이까지 포용해서 하나의 팀으로 결속시키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던 단단한 포용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링컨은 종이에 원하는 일곱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목록에는 대통령 후보 공천 당시 그의 경쟁 상대였던 슈어드, 체이스, 그리고 베이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 옛 민주당원인 몽고메리 블레어, 기디언 웰스, 노먼 저드와 옛 휘그당원인 뉴저지 주의 윌리엄 데이턴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각 구성이 완료되기 전 몇 달간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했지만, 링컨은 그날 새로운 공화당의 모든 파벌, 즉 옛 휘그당과 자유토지당, 노예제를 반대하는 민주당 출신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뽑기로 결심했다.(299쪽)

한국어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링컨을 중심으로 그가 꾸린 '경쟁자들의 팀'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지 숨돌릴 틈 없이 서술해나가는 비평적 전기(傳記)의 걸작이다. 정치권의 소수파, 아니 단독자였던 링컨은 지켜야 할 공통의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준수해나가며 자신의 편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복수가 아닌 포용의 힘으로 미국을 통합해나갔다. 남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악대에게 남부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딕시'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한국어판에는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 등이 생략되어 있을 뿐 아니라, 책과 각 장의 제목이 일종의 처세술 책처럼 옮겨져 있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가 헌정 문란 세력만의 것인양 오용되는 이 갈등 속에서 이 책은 보다 진지하게 읽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죄와 '우리'의 통합을 함께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링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함께 생각해보자.

2017.04.11ㅣ주간경향 1221호

2017-03-28

[북리뷰] 전쟁의 문헌들, 평화를 위해 읽는다

전쟁의 문헌학
김시덕, 열린책들, 2만8천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문헌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문헌을 통하여 한 민족 또는 시대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그러나 그 연구의 대상이 꼭 협의의 '문화'로 제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와 정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 전쟁에 있어서도 문헌학적 고찰이 가능하다. 김시덕의 책 『전쟁의 문헌학』을 펼쳐보자.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이 책은 15~20세기까지 6세기에 걸쳐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 문헌이 형성되고 주변 국가로 전래되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 대해 전쟁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지 시험한 결과물이다."(5쪽)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지성 교류사를 전쟁의 관점에서 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독자'보다는 문헌학이나 역사학 등에 기존의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차분히 페이지를 넘겨보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내용을 쫓아갈 수 있다. 누가 어떤 책을 읽었는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책이기 때문이다.

몇몇 대목에서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추리물같은 즐거움이 있다. 가령 조선에서 출간된 『동국통감』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 책을 당대의 장서가 하야시 라잔의 가문에서 재출간하여 『신간동국통감』이 일본에 유통되는데, 하야시 라잔의 차남 하야시 가호가 쓴 서문이 문제가 된다.

그는 『동국통감』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고대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잘못된 책이라고 비판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기반해 조선의 책을 비판한 그러한 관점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통설로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동국통감』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하야시 가호의 서문을 논박하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건너간 책이, 결국 또 다른 전쟁의 정당화 논리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일본 내부로부터 비판되기도 했던 것이다.

서문과 결론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청이나 일본과 달리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지 않고 200여년을 보냈다. 청은 준가르 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 및 서구 열강들과의 교역과 군사 분쟁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학술과 군사라는 두 가지 요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병존 가능한 것이고 또 병존해야 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367쪽).

반면 조선인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의 권12에 실린 두 편의 '일본론'을 통해 일본인들이 주자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문명인'이 되어서 더는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의를 펼친 바 있다. 물론 말년에는 입장을 수정하여 일본의 재침략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으나,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지 오래인 그의 주장은 조선이 빠져 있던 기나긴 평화의 단잠을 깨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전쟁의 문헌학』은 특정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전개되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전문적인 문헌학적 논의로 가득차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책을 불태우지만 새로운 책이 탄생하는 사건이기도 했는데, 애석하게도 '전쟁의 문헌'들을 더 치열하게 쓰고 읽은 쪽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17.03.28ㅣ주간경향 1219호

2017-03-19

[별별시선] 태어나고 싶은 나라

'박정희 신화'가 허물어졌다. 재벌 중심 수출 경제의 신화 역시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청년들은 절망하고 노인들은 폭주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공회전하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대통령을 파면해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고 토론해야 할 시점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논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가? 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장막'을 드리워볼 때이다.

어떤 사회가 근본적인 규칙을 형성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조건에 처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보자. 특권층에게 유리한 사회 구조를 만든다 해도 내가 그 특권층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무지의 장막'이 쳐져 있다면, 사람들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규칙을 수립할 것이라는 것이 존 롤스의 생각이었다.

무지의 장막을 쳐놓고 대한민국을 검토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본인에게 어떤 조건이 주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자신의 성별, 성정체성, 신체적 장애, 부모의 재산, 교육, 가정환경, 신분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는 말이다.

무지의 장막에 싸여진 아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태어나는 그 자체가 엄마의 경력 단절을 낳는 원인이다. 게다가 여자로 태어나면 내 엄마가 겪고 있는 차별이 내게 넘어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확률은 반반이다.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 한들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의 일원으로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 끝없이 투쟁해야 한다. 성소수자라면 본인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며, 결혼 등 동등한 법적 제도를 누릴 수 없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목표가 되는데, 일단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경제적 궁핍을 각오해야 한다. 고소득 정규직 혹은 전문직이 된다 한들 워낙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출산율이 높다면 그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까? 여론조사전문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16년 1월에 수행했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조사 대상자 1000명 가운데 30.2%에 지나지 않았다. 11.9%는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유보했고 57.9%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같은 조사에 의하면 69.0%가 막연하게나마 이민을 꿈꿔보았다.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마음 속에서 이 나라를 버린 것이다.

출산율이 낮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론 수준'의 문화 컨텐츠를 만들자,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반 이상의 한국인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고 싶은 나라가 아니다. 이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기회만 된다면 '탈조선'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한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나라에서 많은 것을 얻고 누려왔던 사람들조차 자기 자식은 '탈조선' 시키겠다며 온갖 편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그에 대해 사회적으로 지탄하기보다 오히려 부러워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수십년에 걸쳐 대한민국에 '빨대'를 꽂아온 최순실 일당의 목적도 결국은 '탈조선' 아니었던가?

이 땅에 남아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고, 지키고, 일구고, 가꾸고, 이루어내고,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이 분위기 속에서 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야 하는지, 무지의 장막 너머의 아기를 설득해낼 수 있는가?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입력 : 2017.03.19 19:37:00 수정 : 2017.03.19 23:29:07

2017-03-16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현재 오가는 개헌 논의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선거를 이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 어차피 내각제를 해도 총리 해먹을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체 왜 총선과 대선의 날짜를 맞추려 하는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영어로는 check and balace. 법을 만드는 입법부와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법적인 판단을 하는 사법부를 분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중요한 것은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서로 분열해야 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말은 바로 저 근본적인 원리를 무시하자는 소리다. 4년에 한 번씩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면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총선도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그렇다면 행정부, 다시 말해 대통령의 전횡을 야당이 견제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처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이 언론에 의해 발각된다 한들,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할 수도 없고 특검법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행정부의 야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총선이 곧 다음 대선이므로 다음 총선/대선까지 야당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한다. 대체 이게 민주주의인가? 뭐 하자는 소리인가?

내각책임제를 하고 싶다면 대놓고 내각책임제를 하자고 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내각제의 경우에는 '내각총사퇴'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고, 총선을 다시 치를 여지가 늘 열려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합의한 그 개헌은 대체 그 실체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분권형 대통령제'인데,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낳을 뿐이다.

애초에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끔찍한 발상을 정치권에 처음 던진 인물은, 내가 기억하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대체 이유와 목적을 알기 어려운 숱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모두 실패했는데,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개헌이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요컨대 그것은 노무현도 실패했던 일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거독재국가'로의 지름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정말 다들 아무말이나 막 던지고 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말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때 개헌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기화하는 그런 종류의 개헌이라면 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다.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독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과 총선을 결합시킨다는 건 총통을 뽑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2017-03-14

[북리뷰] 역사의 회색지대를 관통해 온 그들의 문학

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
김윤식, 소명출판, 1만8천원

역사적 사실부터 알아보자. "내외 조선인 전문·대학생 4,395명이 일제히 입영한 것은 1944년 1월 20일이었다."(11쪽) 당시 조선인 전문·대학생의 총 숫자는 7천여 명이었으나, 일부는 이공계거나 사범계이기에, 또 일부는 일부러 징집을 피해 도망갔기에, 4,395명이 징집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부족한 병역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일본과 조선의 대학생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학병'이라 부른다.

이러한 학병들은 다양한 출신지와 개인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출신 가문이란, 다양하겠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자식을 대학에 다니게 할 만큼 상류층에 속했음을 가리킴이 아닐 수 없다."(15쪽) 이들은 모두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가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전했던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특히 4.19 세대가 그랬다. "순종 한글세대인 이른바 4.19세대는, 그들의 순수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제로상태에서 출발했다고 자부"(67쪽)하면서, 이전 세대의 업적 뿐 아니라 문제의식까지도 단숨에 밀어내버렸다. 작가 및 비평가의 숫적으로, 그들이 생산해내는 원고의 양적으로, 4.19 세대는 압도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던 새로운 세대는, 책에 인용된 김현의 말마따나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69쪽)은 채 오늘까지 한국의 문학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씌여진 책이다. 첫째, 이병주와 선우휘라는 두 명의 작가밖에 보유하지 못한 학병세대의 존재를 되새기며 그들이 한국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야 마땅한지 검토한다. 둘째, 학병세대에 속하는 가상의, 현실의 인물들을 통해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과제를 두고 평생을 싸워온 김윤식 본인의 학문적 궤적을 반추한다. 셋째, '일본 전후 지성계의 천황'인 마루야마 마사오를 학병세대에 속하는 한 사람의 일본 지식인으로 정의한 후, 그의 영향력 하에 전개되어온 일본 및 한국 지성사의 전복을 도모한다.

이 책은 세 번째 주제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주제는 김윤식의 다른 책인 『내가 읽고 만난 일본』에서 확장된 형태로 존재한다. 문제는 첫 번째 화두다. 일본인으로서 전쟁터에 끌려간 후 학병세대는 각자 나름의 각성을 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또 한 차례의 전쟁을 경험한 후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친일파냐 독립군이냐'같은 너무도 단순한 구도에만 매몰되어, 어떤 세대는 그런 고민을 동남아시아나 만주의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함성을 외치면서, 정작 그 역사 속 회색의 시공간을 관통해온 이들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망각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만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학병세대는 그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기에 이후 세대들에게 문학적으로 없는 존재처럼 취급되었다. 그러한 선택적 망각은 정당한가. '순수한 민족의식'은 얼마나 순수한가. 김윤식은 우리에게 묻는다. "학병세대의 글쓰기를 건너뛰고도 한국문학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67쪽)

2017.03.14ㅣ주간경향 1217호

2017-03-06

나는 이런 서점에 가고 싶다

어떤 기사를 보니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한 해에 10만원 가량을 도서구입비로 지출한다고 한다. 그런 평균적 소비자를 끌어들여 10만원 쓸 것을 15만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마도 서점 업계의 목표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교보문고를 선두로 한 대형서점들은 '머물기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나처럼 한 해가 아니라 한 달에 적어도 10만원 이상의 책을 사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부류에게 오늘날의 대형서점이란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이며,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오프라인) 서점도 아니다. '책이 있는 문화공간'을 선호하는 평균적인 열 사람보다 '서점'을 원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해보자.

서점이란 무엇인가?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책을 구입하는 곳이다. 그런데 책이란 심지어 같은 저자가 같은 출판사에서 낸 같은 책이라 해도 판본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는 대표적 다품종 소량 구매 상품이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이 원하는 책은 베스트셀러, 화제의 신간, 스테디셀러의 세 범주로 포괄될 수 있다. 요즘 여기저기서 '특색있는 동네서점' 같은 것을 많이 차리는데, 사실 '동네서점'이란 기본적으로 많이 팔릴 수밖에 없는 저런 책들을 간신히 구비해놓는 곳이다. 남들 다 보는 책, 신문이나 TV에 광고가 나오는 책('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일을 근심하는 인간들아~' 권력과 부를 조롱하며 구름처럼 살다간 천재시인 김삿갓!), 오가며 별 생각 없이 넘겨보다가 버리면 그만인 깔깔 유모어집 등이 '동네책방'의 본령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해야 대형서점이 인터넷 이전 시대에 어떤 의미였는지 파악할 수 있다. 대형서점이란 '동네책방에는 없고 갖다 놓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 책'이 있는 곳이었다. 영어, 일본어 등 이른바 '원서'를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동네책방'에서는 팔지 않는다. '여기 없는 책이 저기에는 있다'가 대형서점의 본질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출현 이후 이 구도가 허물어졌다. 이전의 교보문고에는 온라인 DB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책이 종종 꽂혀있었지만 그 또한 2008년 촛불시위 기간의 리뉴얼과, 이후 무슨 열대우림에서 베어온 통나무 테이블 같은 걸 비치하는 과정에서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2017년 현재, '최대한의 책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면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는 것보다 인터넷 서점을 뒤지는 편이 낫다. 새롭게 단정된 '복합 문화공간'의 귀한 부동산을 점유할 가치가 없는, 그만큼 팔려나갈 가능성이 없는 수많은 책들이 곧장 창고에 처박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에서, 어린이와 학생과 직장인과 노인들이 책을 접고 밑줄을 긋고 원목 테이블 위에 내팽개친다. 그곳에 책은 없다. 적어도 내가 찾는 책은 그렇다. 적잖은 경우 허탕을 친다.

물론 출판업은 10권 중 한 권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만들어 나머지 9권을 발행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많이 팔리는 책이 많이 팔려야 적게 팔릴 책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많이 팔릴 책이 많이 팔리도록 최적화된 현재의 대형서점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출판시장은 동시에, 한국인의 도서 구입 비용 평균을 확 끌어올려주는 존재들 덕분에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동네책방' 뿐 아니라 현재의 대형서점에서도 만족스러운 소비를 할 수 없다.

그럼 대체 어떤 서점이 필요한가? 나 자신의 경우를 놓고 말해보자. 내가 원하는 서점은 이런 것이다.

  1. 책을 직접 들고 카운터에 갈 필요도 없게, 스마트폰의 바코드 리더 앱 등을 이용해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면 집으로 보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책을 욕심껏 집다보면 굉장히 무거워지고 부피도 커진다. 그런데 어차피 당일에 사들고 간 책을 당일에 다 읽는 경우는 없다. 쇼핑은 서점에서 하고, 책은 집(이나 사무실이나 아무튼)에서 받아볼 수 있도록 완벽한 플로우를 제공해주는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면 아주 좋겠다(교보문고 바로드림을 언급하지는 않기로 합시다).
  2. 최대한 많은 책을 보기 좋으면서도 밀도 있게 배치해야 한다. 온라인 서점을 뒤적거리는 것과 도서관이나 (과거의) 대형서점 등에서 걸어다니면서 책을 찾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연히 '어 이 책은?'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것들을 바코드만 띡띡 찍으면 장바구니에 담겨서 다음날(혹은 며칠 후)에 집으로 배송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쁘지 않은가.
  3. 쇼파라던가 문화 예술 공연이나 강연을 할 공간 등을 없애고 최대한 책에게 많은 공간을 제공할 것.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았더라도 실물을 접해본 적 없던 책을 직접 만져보고 페이지를 넘겨보는 그것이 더욱 서점의 본령에 가까운 게 아닐까. 서점에서 책을 읽는 것은 어디까지나 '몰래' 할 때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문제집 펼쳐놓은 수험생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요컨대 내가 원하는 서점이란 '온라인 서점을 오프라인에서 내 몸으로 브라우징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형 개가식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단번에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 신간이 아주 빨리 들어온다는 점, 빌려서 나갈 수는 없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만약 저런 종류의 서점이 생긴다면 나는 온라인 서점보다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것이다. 페이지를 넘겨보고, 물건을 확인하고, 책꽂이에 꽂혀 있는 유사한 주제나 제목의 다른 책을 통해 신선한 영감을 얻는 일은 오직 오프라인에서만 온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서점은 교통이 편한 곳에 큰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한마디로 자릿값이 많이 든다. 그런데 정작 베스트셀러 등의 마케팅에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서점들과 비교해볼 때, 전혀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서점에 과연 상업적 승산이 있을까? 그건 서점 업계의 관계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처럼 애초에 책을 많이 사던 사람들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으로 엄청난 액수의 책을 질러놓고, 집에 와서 울부짖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싶다.

2017-02-28

[북리뷰] 재앙을 상상하라, 이론을 공부하라

국제정치 이론과 좀비
대니얼 W. 드레즈너, 어젠다, 1만3천원.

요즘은 유행이 한물 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좀비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원래 사람이었던, 그저 다른 인간을 물어뜯고 감염시켜 같은 좀비로 만드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그 무리를, 우리의 대중문화는 끝없이 창작하고 변주하며 소비한다.

그런데 좀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중문화계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대니얼 W. 드레즈너에 따르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인육을 먹는, 되살아난 시체가 일으키는 문제에 주목해왔다."(30쪽) 진지하게 좀비 사태를 우려했다는 게 아니라 좀비를 소재로 한 다양한 논문과 학술적 단행본이 출간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계통에 있는 학문 분야가 이룬 성과와 비교해보면 사회학 일반, 구체적으로는 국제관계학은 좀비에 대한 이해 격차에 시달리고 있다."(31쪽) 그리하여 그는 『국제정치 이론과 좀비』라는, 짧고 재미있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 독특한 국제정치학 개론서를 써냈던 것이다.

이 책의 기획에는 합당한 논리적 이유가 있다. 해당 대목을 다소 길게 인용해보자. "여러모로 국제관계학은 좀비 폭동 대처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빠져 있는 연결 고리다. 언데드가 가하는 위협은 좀비가 등장하는 주요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국제정치에 대한 기초 지식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 살아 있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 분석 단위로 소규모 지역사회나 가족을 이용한다. 한 나라의 중앙정부나 국제관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시체가 '어떤' 식으로든 정책 대응을 야기할 거라는 게 논리적인 판단일 텐데도 말이다."(35쪽)

그렇다. 좀비는 사람을 문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좀비 집단은 자멸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점점 늘어가는 거대한 골칫덩이가 되며, 한 국가 내에서 통제할 수 있는 규모를 쉽사리 넘어설 것이고, 곧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좀비를 소재로 기존의 국제정치 이론들을 일별하고 장단점을 따져보는 기획은 가능할 뿐 아니라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국제정치 이론의 갈래 중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대규모 좀비 재앙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이상한 비-생명체의 집단 출현 자체야 신선한 일이겠으나, 본디 국제정치의 세계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잡아먹는 생생한 폭력의 현장이기에, 국제사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힘의 균형을 찾게 된다면 인류의 국제 사회는 좀비들의 집단과 나름 평화로운 공존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상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국제 이론의 눈으로 볼 때 좀비 집단과 인류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세계의 평화는 상호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할 때 가능할 것인데, 좀비들끼리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 해도 그 나라의 구성원들과 우리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직접 이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봐도 좋겠다.

이른바 '에듀테이너'들이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및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 다양한 위험과 변수가 공존하는 요즘이다. 우리는 더 재미있게, 더 진지하게,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2017.02.28ㅣ주간경향 1215호

2017-02-20

20170212-20170218: 마이클 플린 미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사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 김정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

* 현지시간으로 2월 13일, 마이클 플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사임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트럼프 당선 후 정권 인수 과정에서 오바마 정부는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해킹을 통해 개입한 정황을 확인하고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그 시점, 트럼프에 의해 발탁되어 백악관 내에서 고위직을 맡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플린은 러시아 대사와 통화를 하며 사태의 변화와 추이에 대해 논의했다. 둘째, 자신이 러시아측과 통화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등 상급자에게 허위로 보고했다. 셋째, 그러한 사유로 인해 정보 당국은 플린이 러시아에게 협박당할 소지가 있으며 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플린이 러시아측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정보기관들이 진작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다. 2015년 9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한 공화당 인사가 워싱턴에 소재한 Fusion GPS라는 싱크탱크에 거액을 기부하여 트럼프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했다. Fusion GPS는 전직 영국 정보요원 크리스토퍼 스틸(Christopher Steele, 현재 종적을 감춘 상태)을 고용해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를 추적했다. 스틸은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보고서는 FBI와 <뉴욕타임즈> 등 언론으로 흘러들어갔다. 진작부터 말이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플린을 도청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에 대한 오바마의 제재가 발표되던 그 시점에 플린이 러시아 대사와 통화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트럼프 측에서는 플린의 해임이 법적 책임과 무관하며 단지 그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트럼프는 76분에 걸친 기자회견(전문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을 열어서 본인을 향한 온갖 질문과 비판에 맞섰다. "(망하고 있는 @nytimes, @CNN, @NBCNews) 같은 가짜 뉴스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미국 인민의 적이다! 역겨움!"이라는 트윗을 올렸던 그는, 그것을 지우더니 "역겨움!"(SICK!)을 빼고 남는 공간에 "@ABC, @CBS"를 추가하는 파워트위터리언적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의 미치광이같은 대응을 조롱하는 것만으로 이 사태를 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트럼프 선거본부와 러시아 정보 당국과의 연계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FBI는 그 사실에 대해 선거 기간 중 함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FBI 국장 제임스 코미는 투표를 닷새 앞두고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을 재조사하겠다'고 발표해서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대체 왜 FBI 국장은 이미 의회 청문회까지 마친 민주당 후보의 '이메일 스캔들'을 선거 직전에 들쑤시면서, 공화당 후보 진영에서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루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가? 오바마의 임기 8년동안 미국의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트럼프 행정부의 향후 행보나 탄핵 여부 등과 무관하게, 이 또한 별도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 2월 18일 새벽,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미 한 차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되었던 특검은 절치부심 끝에 재도전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에 대해 지난달 1차 구속영장 청구시 적용했던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과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위증) 외에 범죄수익은닉, 재산국외도피를 추가해 총 5가지 혐의를 적용해 지난 14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심식사를 거르면서까지 특검과 변호인단 사이에 구속의 적절성과 필요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한정석 서울지방법원 영장전담 판사는 19시간에 걸친 자료 검토 끝에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재용이라는 한 사람이, 아직 유죄 판결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구속수사를 받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대단한 뉴스가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뉴스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논점이 얽혀 있다. 첫째, 한국의 재벌 총수, 특히 삼성을 향한 한국 사회의 신화화 경향성. 둘째, 실제로 법원에서 유죄와 무죄가 판결되는 것과 무관하게 '구속되면 유죄고 풀려나면 무죄'라고 여기는 한국 사회의 법 인식. 셋째, 대중들의 무지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언론의 문제.

물론 이재용이 구속되었다는 것은, 그가 최순실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이 구속수사의 필요성을 갖는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임을 법원이 인식했다는 것으로, 향후 특검 연장에 있어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중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에서 기술한 세 가지 문제점이 고스란히 남아 작동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집행유예가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형량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제는 그보다 더 크고 확실한 죄목으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할 때다.

* 2월 13일,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됐다. 두 명의 여성에게 습격당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약품을 흡입한 그는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송 도중 사망했다.

국가정보원은 김정남이 피살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김정남을 제거하는 것은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후로 지속되고 있는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이며, 따라서 북한의 소행'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사흘 전, <주간경향>의 정용인 기자가 "박근혜 유럽코리아재단 대북 비선은 김정남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단독 보도했던 사실과 맞물려, 박근혜의 대북 접촉 사실을 은폐하려는 국가정보원의 공작이거나 탄핵 국면에서 북풍을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기록해두건대 나 또한 사건 초기에 같은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될수록 이 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실제로 김정남에게 약품을 뿌린 두 명의 실행자 외에, 그들과 함께 활동한 용의자들 중 적잖은 이들이 북한 여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북한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시신을 인도하는 대신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북한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는 중이다. 한편 중국은 사건이 벌어진 주의 마지막 날인 2월 18일, 북한산 석탄의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이 북한의 최대 후견국이며 석탄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북한에게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북한 입장에서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김정남의 신변을 보호해주던 중국 측의 반발이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으나 정확한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2017-02-19

[별별시선] 신화는 없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 대해 특검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9년만에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회장이 구속되었다고, '삼성 불구속 신화'가 깨졌다고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삼성그룹의 회장은 한 차례 권력에 의해 붙잡힌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 있다. 1961년 5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지적하고 체포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고 한 박자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갈 줄 알았던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몸담았던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메트로호텔이라는 곳에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어떤 '신화'가 이어진다. 박정희는 자신이 경제를 잘 모르므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병철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인들을 석방해달라고 직언한 후, 일본의 일본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를 모델로 삼아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된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설하였으며 국가중심의 경제개발 전략 수립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박정희 신화, 혹은 한국의 재벌 신화를 윤색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일종의 평화로운 회의, 혹은 '이병철의 돌직구'가 한국 경제 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분수령으로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당시 귀국한 이병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계엄 상황이고, 상대는 바로 그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형무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만났다 해도 실질적으로 구금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박정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박정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만 할 상황이다. 박정희를 오래도록 보좌해온 누군가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후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병철은 모종의 방법으로 귀국하라는 설득을 받았고, 돌아오자마자 서울 모처에 감금됐다. 그러나 재능 있는 사업가이자 설득력 있는 화술의 소유자였던 이병철은 박정희 장군과의 협상 끝에, 그가 지닌 대부분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기업가들이 박정희가 제시하는 경제개발 전략에 따르도록 설득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병철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기업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36쪽)

대한민국의 기업과 정부의 관계란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다. 정권을 손에 쥔 자는 기업의 목에 칼자루를 들이댈 힘을 갖는다. 기업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 대신 정부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주요 사업에 참여할 권리와 더불어 해당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시중 금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출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대출받은 돈 중 일부는 다시 정치인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재용 측에서 최순실과 정유라의 말 구입 및 승마 비용을 지불해놓고도 그것이 뇌물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협박을 받아 내놓은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강제로' 돈을 내놓으면 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 하에 행동했을 따름이다. 1961년 이병철이 불법적으로 '구속'될 때부터 2017년 이재용이 합법적으로 구속될 때까지 이어져온 게임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삼성 불구속 신화'는 없다. 방금 깨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재벌과 정권의 결탁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제는 가짜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할 때다.

입력 : 2017.02.19 20:24:01 수정 : 2017.02.19 20:30:13

2017-02-14

[북리뷰] 우리가 모르고 싶었던 '진짜' 미국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새뮤얼 헌팅턴, 김영사, 1만9900원.

트럼프의 행정명령, 그 이전에 그의 당선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를 포함해, 그런 이들은 대부분 미국을 '이민자들의 국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동시에 미국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핵심적 가치, 즉 '미국적 신조'(American Creed)에 기반한 이념적 국가로 여긴다. 그러나 새뮤얼 헌팅턴의 생각은 다르다. 2004년작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을 펼쳐보자.

이 책의 원제는 Who Are We?이다. 제목이 곧 내용이다. "미국은 거의 모두가 영국제도에서 건너온 17~18세기의 개척자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59쪽)로,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은 대체로 이민자들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미국을 "이민자들의 국가"라고 자랑하지도 않았다"(59쪽)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민국가 미국'의 신화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형성되고 이후 1965년의 이민법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그는 주장한다.

실제로 인구 구성을 보더라도 미국은 '이민자들의 국가'가 아니다. '개척자들과 그 후손들의 나라'라고 보는 편이 옳다. "간단하게 말해서, 20세기 말에 미국의 인구는 절반가량이 초기 개척자들과 노예들의 후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개척자들이 만든 사회에 합류한 이민자들의 후손이었다."(67쪽) 전적으로 자신을 이방인, 아웃사이더, 디아스포라라고 여길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것은, 영국과 그 외 유럽에서 건너온 신교도 개척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관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하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 책은 '개척자'와 그 후손들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미국에 거주하고 경제 활동을 하면서도 미국에 동화되려 하지 않는 이민자들, 특히 멕시코와 근접한 지역에서 스페인어를 쓰고 자기들끼리 별개의 사회를 꾸려가고 있는 히스패닉들에 대한 미국 주류의 불만과 불안이 명료한 학술적 언어로 기술되어 있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뉴멕시코 대학교의 찰스 트루실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즉, 적어도 2080년에는 미국의 남서부 주들과 멕시코의 북부 주들이 한데 합쳐 새로운 나라를 형성할 것이다."(303쪽)

그러한 '바닥 민심'을 철저히 반영한 탓에, 2004년 출간된 이 책에는 트럼프의 당선이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다. 빌 클린턴의 탄핵에 찬성했던 연방의회 하원 의원들은 모두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였다. '리버럴' 엘리트에 대한 백인 남성들의 공격은 이미 지난 세기부터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헌팅턴은 "기본적으로 백인 남성이고, 근로계층이고, 중산층인 사람들이 배타주의적인 사회정치적 운동을 전개"(381쪽)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운동은 인종적 및 문화적 특성을 가질 수 있고 반反히스패닉, 반흑인, 그리고 반이민일 수 있다."(381쪽) 그는 그러한 움직임에 '백인 현지인주의white nativism'이라는 완곡한 이름을 붙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이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ism'임을 알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진보주의자들이 선호하는 '노동계급의 반란'이 아니다. 백인들의 불만이 한 리얼리티 쇼 스타를 통해 분출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이념적 도식으로 미국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이 책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전혀 달갑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2017.02.14ㅣ주간경향 1213호

2017-02-12

20170205 - 20170211: 미일 정상회담, 박근혜 탄핵 심판 변론기일 연장, 일본 법원의 트렌스젠더 불임수술 의무화 위헌소송 기각

* 2월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일본은 센카쿠열도의 영토 분쟁에서 미국이 일본의 편을 들어줄 것임을 재확인했고, 미국은 TPP에서 탈퇴한 대신 일본과의 양자 무역 협정을 채결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입장을 제시했다.

아베는 정상회담 이전에 '미국에 일자리를 70만개 만들겠다'는 등, 트럼프의 백악관이 제시하는 온갖 종류의 경제적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의향을 강하게 드러내어 왔다. 그렇기에 센카쿠열도 영토 분쟁에서 미일 안보조약 5자가 변함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과연 그렇게 큰 성과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는 출범부터 지금까지 불안정성 그 자체였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신임 미 대통령으로부터 기존의 원칙을 직접 재확인받았다는 것은 아베의 외교적 성취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은 내용만큼이나 의전이 중요하다. 의전은 상대방으로부터 어떻게 대접받느냐, 그리고 상대를 어떻게 대접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외교전의 최첨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는 아베의 손을 19초 동안이나 붙들고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곤혹스러움을 안겨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미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탑승하고 플로리다 남부 팜 비치에 위치한 트럼프의 별장에서 이틀 밤을 보내며 함께 골프도 즐겼다. 그 별장 자체가 트럼프의 소유인 탓에, 일본 정부가 숙박료를 지불한다면, 대통령직을 이용해 돈을 번 셈이 된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이해상충을 이유로 들어 트럼프는 아베에게 별장 숙박비까지 '쐈다'. 온갖 립서비스와 굴욕적인 악수 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의전은 이렇게 챙기는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에 대한 변론기일이 2월 22일까지 연장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측에서, 이미 한 차례 건강을 이유로 증인신문에 불출석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소환해서 조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주심인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그것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이정미 권한대행은 김기춘을 2월 20일 오후 2시에, 최순실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22일에 소환하여 조사하기로 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의 변론기일은 최소 2월 22일까지 연장되었다.

변론기일의 연장이 중요한 것은 이후 심판 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변론기일이 모두 종료된 후에 결정문을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 작성에는 최소 1주일에서 최대 1달이 넘는 시간이 걸리므로, 2월 22일에 변론이 마무리된다면 아무리 빨라도 3월 초에나 탄핵의 인용이건 기각이건 결정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2월 말 탄핵은 이미 물 건너갔고, 3월 초에 결정이 나는 것이 최선이나, 만약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종료되는 3월 15일 이후가 된다면 남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총 7명으로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다.

정치권과 법조계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변론기일의 종료를 앞두고 출석 의사를 밝힌 후 그것을 미루는 방식으로 최대한 변론기일을 늦춰서 헌재 재판관을 7명까지 줄인 후,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소송 전략으로서 어느 정도 말이 되고, 현재 박근혜의 변호인측이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처럼 보이므로, 아마도 맞을 것이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증인인 박근혜 본인이 출석한다는 핑계로 심판을 지연시킬 때, 그것을 헌재가 어떻게 통제하여 제 시간에 심판을 끝낼 수 있느냐이다. 대단히 중요한 일정이 걸린 사안으로, 지속적인 추적이 필요하다.

* 2월 8일, 일본 오카야마(岡山) 가정법원 즈야마 지원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FTM)의 성별전환인정 요구 소송을 기각했다. 원고인 우스이 다카키토는 호르몬 요법중이지만 난소 적출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일본의 경우, 트랜스젠더가 전환 이후의 성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술을 통해 전환 이전 성별의 성기를 제거해야 한다. 우스이의 경우에는 FTM이므로 난소 등을 적출해야 본인의 새로운 성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MTF라면 고환과 음경 등을 제거하지 않으면 법적인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언론에서 보도된 바에 따르면 우스이는 호적상 이름도 남성적인 이름으로 바꿨지만 "(성별전환은) 수술 여부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본질"이라는 생각에서 난소적출 등의 수술은 받지 않았다."

일본은 각 지자체 단위로 동성혼을 사실혼으로 인정하는 등, 동북아시아 3국 중 상대적으로 가장 진전된 성소수자 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다. 우스이 또한 "작년 봄부터 파트너인 야마모토 미유키(39), 야마모토의 장남(6)과 셋이서 살고 있"다. 이 판결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퇴행적이지만, 판결이 제기된 맥락을 놓고 볼 때, 일본이 가령 대한민국보다 'Gay Divide'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보다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성소수자 정책이 요구된다.

* 일러두기: 2017년 2월 13일 21:30분 수정.

2017-02-06

20170129 - 20170204: 스티브 배넌의 NSC 회의 배석, 매티스 미 국방장관 방한, 백인우월주의자의 캐나다 퀘벡 모스크 테러

* 1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재편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본인의 선거 과정에서 수석 전략가 역할을 맡았던 스티브 배넌(Steve Bannon)를 NSC에 당연배석하도록 행정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대단히 이례적일 뿐 아니라 상식에 반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첫째, 당연히 NSC에 참석해야 할 국가정보국(DNI) 국장과 합동참모본부장이 배제되었다. 국가의 안보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 국가정보국 국장과 합동찬모본부장의 참석 권한이 없다. 오직 특정한 이슈가 있을 때에만 참석할 수 있도록 강등되었다. 둘째,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그 어떤 공직 경험도 없고, 다만 트럼프의 선거 운동을 도왔을 뿐인 백인우월주의자다.

현재 미국 "민주당 상·하원은 배넌을 NSC 수석회의의 당연직 위원에서 제외하고 DNI 국장과 합동참모본부장을 복귀시키는 내용의 법안을 각각 제출"한 상태다. 이것은 공화당 내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아직 공화당의 공식적 대응은 관측되고 있지 않다. 대단히 위험할 뿐 아니라 상징적인 사건으로, 전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백악관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 2월 3일,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방한했다. 그는 약 24시간 가량 한국에 채류하며 미국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대북 정책 및 동북아 정책의 방향이 유지될 것임을 확인했다. 그는 한미동맹에 대해 "아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하는 핵심 축(linchpin)"이라고 했는데, 조선일보는 이를 두고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때부터 사용했던 'linchpin'을 되풀이한 것은 한·미 동맹의 큰 틀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했다. 또한 그는 1972년, 1973년, 1974년 세 차례 해병 소대장으로 강릉에 훈련을 왔을 때 자신에게 김치를 가져다 주었던 '정 하사'를 만나고 싶다는 립서비스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 하사'가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은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970년대 초 미국인이, 한국인이 가져다주는 김치를 먹었다고?).

중요한 것은 이런 '있지도 않은 추억'을 굳이 창작해서 들먹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중국에 대한 견제 태세를 강화하려는 새로운 정부의 방향성 때문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실각해 있고 가장 유력한 야권 대선 주자의 주변에 친중파가 득시글거리는 상황 속에서, 아직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조차 배치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신임 미 국방장관은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평택 기지를 바라보며 '원더풀'을 연신 내뱉으면서, '정 하사'와의 보도자료용 추억을 회상한다.

이번 동아시아 방문은 일본보다 한국을 먼저 들렀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트럼프의 취임 이전에 그와 만남을 가졌던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일본은 최선을 다해 미국의 새로운 정권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하다못해 연방법원에 의해 가로막힌 트럼프의 '무슬림 밴' 행정명령에 발맞춰 일본항공(JAL)은 해당 6개국의 승객을 거부하겠다는 발표까지 했다. 그러한 일본의 노력은 전세계적인 비난과 조롱의 대상일 뿐이며 그 효과마저도 의문스러운 반면, 한국의 경우 국내의 싸드 배치 반대 여론이 일종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

* 현지시각으로 1월 30일 오후 7시 50분, 캐나다 퀘백 시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모스크)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발생했다. 사망자는 총 6명으로, 고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들이었다. 용의자는 알렉산드레 비소네테(27세, 男, Alexandre Bissonnette). 라발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반 외국인, 반 페미니즘 등을 소재로 인터넷에서 트롤링(악플을 달며 시비를 거는 행동)을 일삼아왔다.

용의자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신원을 확인하던 중이었지만, 폭스 뉴스는 용의자'들'이 '모로코 출신'이라고 트윗을 올렸다(해당 트윗은 현재 지워진 상태지만 캡쳐를 이 트윗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수상실에서는 폭스 뉴스를 향해 해당 트윗이 잘못되었음을 강하게 지적하는 공문을 발송했고, 폭스는 트윗을 삭제했으며, 야당인 보수당은 그러한 수상실의 행보에 대해 비판을 내놓았다. '물론 그 트윗은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었지만 수상은 보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비판의 내용이었다.

용의자인 알렉산드레 비소네테는 프랑스어 사용자로 미국보다 프랑스의 극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보도되고 있으나, 동시에 트럼프의 당선을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 사는 한국계 남성들이 트럼프의 당선을 두고 '노동 계급의 분노'를 운운하는 사이, 그 본질인 백인우월주의 혹은 인종주의가 진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2017-02-03

'백인 현지인주의white nativism'

1993년에 <뉴스위크>에서 데이비드 게이츠는 「무너짐Falling Down」이란 영화를 묘사했다. 이 영화에서 마이클 더글러스가 열연한 백인 전직 군수회사 직원은 자신이 볼 때 다민족, 다인종, 그리고 다문화 사회가 자신에게 가하는 손실, 패배, 분노, 그리고 모욕에 반응한다. 게이츠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와 같은 분노와 모욕은 백인들의 고난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더글러스를--흰 셔츠와 타이, 안경, 그리고 단정한 머리의 구시대 모범생 모습인 그를--다양하고 화려한 L.A. 사람들의 혼합에 대비시킨다. 이것은 다문화적 미국에서 궁지에 몰린 백인 남성의 만화적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은 만화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가 7년 후에,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과 관련해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있었던 투표에 대해 한 얘기를 생각해보라.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쪽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이었고, 거의 모두가 남부 출신이었고, 한 사람만 빼고 남성이었다.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쪽의 사람들은 천주교도, 유대교도, 흑인, 여성, 게이, 그리고 한명의 남부 WASP 남성이었다. 이와 같은 열정 속에서 남성 WASP들이 미국 사회에서 줄어들고 있는[380쪽] 자신들의 역할에 대항해 일으키는 반란을 보기는 그렇게 어려운가?"

그와 같은 '반란'과 그 이유들을 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오한 인구적 변화들이 다양한 형태의 반응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특이하고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 한 가지 가장 있음직한 반응은 기본적으로 백인 남성이고, 근로계층이고, 중산층인 사람들이 배타주의적인 사회정치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일 수 있다. 이들은 그와 같은 운동 속에서 그와 같은 변화들을, 그리고 자신들이 볼 때 점점 더 줄어드는 자신들의 사회적 및 경제적 지위, 이민자들과 외국들에 빼앗기는 일자리,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가 약해지는 것, 그리고 자신들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이 침식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막거나 되돌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이와 같은 운동은 인종적 및 문화적 특성을 가질 수 있고 반反히스패닉, 반흑인, 그리고 반이민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은 과거에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다수의 인종적 배타주의 및 반외국인 운동과 비슷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공유하는 사회적 운동, 정치적 집단, 지적 조류, 그밖의 다양한 저항들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백인 현지인주의white nativism'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일 수 있다.

새뮤얼 헌팅턴, 형선호 옮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경기도 파주: 김영사, 2004), 380-381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헌팅턴이 말하는 바 '백인 현지인주의'를 오늘날의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ism'라고, 혹은 더 줄여서 그냥 '인종주의'라고 부른다. 헌팅턴 스스로는 뒤이어지는 서술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백인 현지인주의를 극단주의 과격파 집단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382쪽)고 주장하나, 2017년의 우리는 그런 안일한 소리에 설득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목은 길게 인용해놓은 후 종종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2004년에 출간된 이 책 Who Are We?가, 헌팅턴의 다른 저작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해당 시점으로부터의 미래 전개를 예측하는데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용된 내용은 트럼프의 당선을 '노동 계급'과 연결짓고 싶어하는 '진보'의 발상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노동을 하는 백인-미국인'일 뿐 진보에서 가정하는 '노동계급'이 아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는 백인 우월주의자 혹은 '백인 현지인주의자'의 그것일 뿐 진보적 의제와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식자층은 트럼프 당선을 어떻게든 '노동'과 연결짓고 싶어하며, 반대로 헌팅턴은 '백인 우월주의'와 '백인 현지인주의'가 다르다고 끝내 우겨댄다.

반면에, 그["이를테면 1990년대에 잠시 미시건과 서부의 몇몇 주들에서 번창했던 민병대 운동이나 오직 반유대인 내지 반흑인 성격만을 띠면서 KKK에서 비롯한 선입견을 반영하는 온갖 종류의 '증오 집단들'"(382쪽)]보다 폭이 넓은 현지인주의 운동은 미국 사회의 새로운 현실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의 지도자들은 과격파 집단의 지도자들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중에서 많은 이들은 캐롤 스웨인이 말한 '새로운 백인 국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이고, 지적이고, 종종 미국의 일부 명문 대학들과 대학교들에서 인상적인 학위를 받은 사람들로서, 이 새로운 종의 백인 인종적 국가주의자들은 대중주의 정치인들이나 '옛날 남부'의 KKK 단원들과 전혀 다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이 아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인종적 자립과 자존이며" 미국이 "빠르게 비백인들의 지배를 받는 국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따르는 전통은 호레이스 캘런, 다문화주의자,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의 이분법 개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종, 민족성, 그리고 문화를 하나의 꾸러미로 묶으려 한다. 이들에게 인종은 문화의 원천이며, 개인들의 인종성은 고정된 것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개인들의 문화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인종적 균형이 변하는 것은 문화적 균형이 변하는 것이며,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백인 문화 대신에 그와 다르고 (그들이 볼 때) 지적 및 도덕적으로 열등한 흑인이나 갈색인 문화가 득세하는 것이다. 인종과 따라서 문화의 이와 같은 섞임은 국가적 타락의 길이라고 그들은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국을 미국으로 보존하려면 미국을 백색white으로 유지해야 한다.(383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우리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말이 결국 '미국을 다시 백인의 나라로 만들자'는 말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트럼프 본인이 진심으로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그의 선거 슬로건이 그에게 표를 던진 이들, 가령 '러스트 벨트의 노동 계급'의 인종주의적 감수성을 직격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헌팅턴의 책에 따르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백인 현지인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헌팅턴의 주장과 달리 그가 소개하는 내용에 따르면 '백인 현지인주의'는 인종분리정책 등을 추구하거나 그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게다가 차별주의자들이 늘 그렇듯 주장하는 바 그 자체에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문단 안에서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이 아니"라고 전달한 후, '백인 현지인주의'자들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백인 문화 대신에 그와 다르고 (그들이 볼 때) 지적 및 도덕적으로 열등한 흑인이나 갈색인 문화가 득세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라고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 '백인 현지인주의'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 인종차별주의임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아무튼 미국은 그런 나라가 되었다. 혹은, 그런 나라가 아닌 척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리버럴 엘리트'를 꼬까워하는 '노동 계급'의 이탈로 인해 거대한 퇴행을 감당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의 이 책은 '백인 현지인주의'에 존재의 당위와 면죄부를 제공해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2017-01-24

[북리뷰] 조류독감, 혹은 우리가 키우는 재앙

조류독감
마이크 데이비스·돌베게·1만2천원

마이크 데이비스는 역사학자지만 특정한 시대만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19세기 말 전 세계를 강타했던 엘리뇨와 식량 배분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대기근, 자동차 폭탄 테러, 초거대도시에 솟아오르는 마천루의 이면인 슬럼 등, 그가 단행본으로 다룬 내용은 한 사람의 지적 영역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넓고 동시에 뜨겁다. <조류독감>도 그 중 하나다.

우선 몇 가지 사실관계를 분명히 해두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플루엔자는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그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온혈동물이 고열, 오한, 설사, 구토 등 다양한 증상을 보일 때 우리는 '독감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바이러스의 종류에 따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있고, 돼지나 닭이 걸리는 것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의 본질적 특성상, 한 개체에서 다른 개체로 감염될수록 끝없이 변종이 생산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사람과 동물 사이에 교차 감염이 가능한 인플루엔자가 존재한다. 둘째, 인간은 공장식 축산을 통해 수백만, 수천만, 수억 마리의 돼지와 닭 등을 기르고 있다. 셋째, 따라서 한번 인플루엔자가 퍼지기 시작하면, 그 질병이 수없이 전파되고 또 복재되면서, 기존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살상력을 지니는 괴질이 탄생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마이크 데이비스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다.

바이러스학자들이 'H5N1'이라는 유전자 번호를 부여한 이 독감 아형(亞型, subtype)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97년 홍콩에서였다. 물새에서 인간으로 전이된 이 바이러스에 의해 당시 감염자 18명 가운데 6명이 사망했으며, 홍콩 시 당국은 모든 가금류를 긴급히 살처분해 이 갑작스러운 첫번째 사태를 제압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지하로 잠복했고, 집오리가 '조용한 보유숙주'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2003년, 조류독감은 다시 중국과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갑작스럽게 대규모로 등장했다.(11쪽)

유독 새를 좋아하는 홍콩과 중국 남부에서 조류독감이 자주 발생하였으나, 인플루엔자의 기습은 그곳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이 중국에서 발생한 비전형적인 폐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바로 그때, 네덜란드 헬레를란트의 한 농장에서 닭들이 죽어나간 것이다."(102쪽) H7N7, 아시아의 H5N1과는 또 다른 그 바이러스와 맞서기 위해 "가금류 산업 노동자들이 네덜란드 군대의 지원 속에서 3,000만 마리 이상의 닭을 살처분하기 시작했다."(103쪽) 2003년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노출된 인원 약 4,500명 가운데 553명이 결막염과 기타 증상을 호소했다."(105쪽)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고 방호구를 착용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의 인플루엔자가 인간에게 옮아왔던 것이다. 공장식 축산 과정으로 길러진 수천만 마리의 닭. 그들을 매개로 삼아 진화한, 인류에게 낯선 극도로 '난폭한' 바이러스. 그것이 다른 생명을 몰살시키는 끔찍한 일에 동원된 계급 사다리의 아래쪽에 위치한 노동자들을 공격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부제인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의 조류독감은 그러므로 단순한 방역 실패 사례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길러내고 있는 재앙의 전조일지도 모른다.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을 막기 위해, 일단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맞서야 할 것이다.

2017.01.24ㅣ주간경향 1211호

2017-01-20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인가

일러두기: 군 입대 전, 아직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절,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작성했던 원고입니다. 2012년 선거에서 승리하기 전, 다방면에서 공격당하며 재선 가능성조차 불투명해보였던 그 무렵의 오바마 정권을 다루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취임을 앞둔 1분 1초가 아쉽게만 느껴지는 지금, 2010년대 초반의 오바마 정권 평가를 되짚어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출판사의 생각과 제 원고의 방향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이 원고가 담겼어야 할 책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제목을 공개하자면, 『변방에서 세계읽기』라는 가제를 달고 있었죠. 몇 시간 후면 버락 오바마의 임기가 완전히 끝나는 이 시점에, 최소한의 편집만을 가한 후 그대로 웹에 공개합니다. 이 포스트 내용의 상업적 활용을 금지합니다. 재배포 등은 링크를 걸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합니다.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인가

버락 오바마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조지 W. 부시의 실정, 이라크 전쟁에서의 실패,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대표되는 경제적 파탄 등, 2008년 미국 대선은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도록 예정된 선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민주당의 대선 후보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 빌 클린턴의 아내이며, 영부인이 아닌 '공동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던 바로 그 사람. 힐러리는 진작부터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른 후보들과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많은 선거자금과 인적자원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정확한 데이터에 기반한 기사 및 예측으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시사지 <The Economist>는 일찍이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 후보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중앙 정치 경력이라고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당선밖에 없는 '신인' 오바마가 클린턴을 제끼고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을 때, 전 세계인들은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저 사람은 누구인가? 클린턴은 어째서 패배하였는가?

온갖 외신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한국인들은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미 이런 예외적인 정치 현상을 경험해봤기 때문이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는 당시 '대세'였던 이인제 후보를 꺾고 극적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세를 몰아 대권을 거머쥐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나를 포함한 적잖은 한국인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미국 대선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오, 저기서도 저런 일이 벌어지는군. '미국의 노무현'이라니, 거 참.

버락 오바마, 혹은 '미국의 노무현'?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것은 미국 현지 시각으로 2008년 11월 4일.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 시각으로 다음날인 11월 5일, 외교안보자문단과의 오찬에서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인과 대한민국의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꼴"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혼자 그런 말을 하면 쑥쓰러울 것 같다고 생각해서인지,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같은 날 "이 대통령은 대선 이후 일관되게 변화와 개혁을 국정 운영의 중요한 가치로 삼아 왔으며, 그런 점에서 두 정상은 공통된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오바마와 나는 닮은꼴'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은 네티즌들에 의해 즉각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인터넷은 "이름의 초성이 ㅇㅂㅁ라는 점이 닮았다"는 식의 실소 어린 유머로 순식간에 뒤덮이고 말았다. 분명 그 발언은 희극적인 사건이다. 오바마의 유명세에 기대보려는 시도가 다른 나라에서 없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가령 케냐의 정치인 니콜라스 라줄라(Nicholas Rajula)는 자신이 오바마의 사촌이라고 주장했고, 오바마의 대선 캠프는 그 주장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단지 오바마의 아버지가 라줄라의 아버지와 같은 동네에 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거운동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라줄라는 2007년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더 황당한 경우도 있다. 브라질의 정치인 클라우디오 핸리크 도스 안호스(Claudio Henrique dos Anjos)는 선거 후보자가 원하는 이름으로 출마할 수 있게 해주는 브라질의 선거법을 이용해, 아예 클라우디오 핸리크-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을 달고 선거에 임했다. 만약 그가 당선되었다면 브라질에서도 오바마가 정치를 할 뻔했다.

갑자기 떠오른 벼락 스타 버락 오바마의 유명세에 동참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나,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오바마가 떠오르는 모습에서 이명박이 아닌 노무현의 그림자를 보았다. 비주류 출신이라는 것 뿐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 끝없이 '통합의 정치'를 강조했다는 것도 그렇다. 오바마는 연설을 통해 자신을 '워싱턴'과 다른 누군가로 포지셔닝했다. 미국의 남부는 철통같이 공화당을 지지하고 동북부와 서부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역적 갈등 구조를 깨뜨려야 한다고, 오직 하나의 미국이 있을 뿐이라고 웅변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역감정의 골을 넘어서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과업으로 삼은 노무현을 떠올리지 않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의 유사성은 그뿐만이 아니다. 노무현에게 노사모가 있었다면, 오바마에게는 인터넷 정치 운동 단체 무브온(moveon.org)이 있었다. 무브온의 활동은 전방위적이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방송사 <폭스>에서 오바마를 비방하는 내용의 보도를 연이어 내놓자 50만 명의 서명을 모아 그 방송사에 전달하기도 했고,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과 대결하던 경선장에서도 그를 응원하며 지지를 호소하여 분위기를 몰아갔다.

무브온 뿐 아니라 인터넷 여론 자체가 이미 오바마의 편에 서 있었다. 유명 힙합 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의 리더 윌 아이앰(will i.am)은 오바마의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의 승리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다른 이들과 그 감동을 공유하기 위해 그 유명한 "예스 위 캔"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새로운 감성에 호소하는 정치 운동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 스스로를 '오바마 걸'이라고 부르며 비키니 차림으로 응원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자, 비슷한 동영상들이 연이어 출현했다. 인터넷을 통한 지지자들의 자발적 집결, 이전의 선거운동과는 다른 감성적 호소,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인들이 2002년 대선 과정에서 경험한 그것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소속 정당에서도 소수파인 젊은 정치인이, 젊고 파워풀한 이미지를 앞세워 자발적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폭풍처럼 몰아쳐 대권을 잡는 것, 이 광경에서 노무현과 오바마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국내에서는 『심리학자, 노무현과 오바마를 분석하다』(김태형 저, 예담)라는 책이 2009년 출간되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 따르면 "비주류 출신 대통령 노무현과 오바마는 행복한 유년기, 청소년기의 방황, 청년기의 새로운 도전, 진보운동에의 헌신,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입문, 대권 후보로 급부상, 대권 도전, 대통령 당선 등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두 사람이 극적으로 도약하는 과정에는 분명한 유사성이 있다. 물론 오바마는 명문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배웠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로스쿨을 다니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법학 전문지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을 역임한다. 반면 노무현은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지 못했고 10년 동안의 고시공부 끝에 법복을 입었다. 하지만 학력의 차이가 이후 두 사람의 정치적 성장 과정의 유사성을 가려줄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하버드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하버드 로 리뷰>에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편집장을 역임했다는 것은, 그 젊은 법조인의 장래가 매우 탄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식으로 말하자면 사법연수원을 1등으로 졸업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이 로스쿨에 온 이유를 잊지 않고, 시카고로 돌아가 민권운동에 헌신했다. 그러한 행동은 '정치적 야심' 같은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카고로 가지 않고 워싱턴이나 뉴욕 등 중심지에서 변호사로 명성을 쌓으면, 워싱턴 정가에서 더욱 쉽사리 출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고난의 길을 향해 귀환했다.

노무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상고 출신이었고 대학교 인맥도 없었지만, 시험 쳐서 들어가고 시험 점수 따라 판사-검사-변호사의 등급이 갈라지는 법조계는 그에게 비교적 공평한 경쟁의 기회를 제공했다. 영민했던 노무현은 판사 발령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은 후 세무변호사로 변신해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리기 시작했다. 계속 그 길을 걸었더라면 그는 대형 로펌의 대표, 혹은 부산 경남 지역의 중견급 정치인으로 성장했겠지만, 우리가 아는 대통령 노무현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81년 부림사건 변론을 계기로 그는 잘나가는 세무변호사에서 돈 못 벌고 경찰에게 감시당하는 인권변호사로 변신한다.

여기까지는 드물지만, 사실 희귀하지는 않은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엘리트들이 스스로의 보장된 앞날을 포기하고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해왔다. 하지만 그 모든 엘리트들이 오바마나 노무현처럼 극적인 정치적 성장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왜일까? 여타의 경우와 달리 오바마와 노무현에게는 '결정적 순간'이 있었고, 그것을 잡아채는 놀라운 정치적 감각과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오바마와 노무현의 진정한 공통점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소수파 출신이고 개인적인 역경을 진보 운동을 통해 이겨냈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결정적 순간'에 남들과는 다른 용기를 내어 이후의 초석으로 삼았다는 바로 그것 말이다.

오바마와 노무현의 결정적 순간

"어리석은 전쟁을 반대합니다"

하버드에서 로스쿨까지 마치고 돌아온 오바마였지만, 시카고 흑인 공동체에 뿌리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를 거쳐 아이비리그에서 대학을 나온 뜨내기였고, 지역에 뿌리 내린 흑인 공동체는 서로 촘촘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아내 미쉘이 시카고 토박이였고 오바마는 그 덕을 많이 보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가 제2의 고향에서 완전히 사랑받는 존재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바마는 2000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바비 러시에게 더블 스코어로 졌다. 절치부심하며 정신을 차린 오바마는 200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를 목표로 자신과 지지자들을 다잡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결정적 순간'이 다가왔다.

2001년 9월 11일, 전 세계인들이 다 아는 그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의 심장인 뉴욕, 그 뉴욕의 상징인 국제무역센터가 항공기 두 대의 충돌로 인해 허물어졌다. 미국인들은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분노했고,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 특히 럼즈팰트 국방장관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위험'을 제거한다는 명분 하에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참이었다. 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라크전은 베트남전과 많은 면에서 달랐다. 베트남 전쟁과 달리 이라크 전쟁은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로 병력을 충당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뭘 해야 할지 모르던 가난한 청년들이 군대에 가면 대학 보내준다는 말에 혹해서, 혹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리쿠르트 요원들의 꾀임에 넘어가 사막 한 가운데에 떨어지게 된다. 당시 그 젊은이들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라크전을 둘러싼 분위기는 1960년대의 그것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반전 집회가 있었지만 대규모로 불타오르지 않았고, 정치권에서도 주류적 견해는 '초당적 협력'을 통해 후세인의 독재 정권을 몰아내어야 한다는 합의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2004년에는 당신의 인생을 갈라놓을 중요한 선거가 있다. 중앙 정치 무대로 발돋움하느냐, 아니면 한 지역 정치가로 인생을 마무리짓느냐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국민 여론의 대다수는 전쟁을 지지하며 전쟁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는 매우 미약하다. 당신의 동료, 경쟁자, 친구들 중 상당수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거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냄으로써 이 분위기에 거스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다. 시카고에서 열린 작은 반전 집회에서 온 초청장을 받아든 오바마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껄끄러운 일은 적당히 넘기면 그만이다. 어떻게 입장을 표현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비 애국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상황이다. 참모들의 '합리적'인 만류를 뿌리치고 오바마는 연단에 섰다. 2002년 10월 2일 수요일, 흑인 최초로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을 역임하고, 흑인 최초로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직을 맡고 있으며, 앞으로 흑인 최초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그 사람이 연단에 올라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연설을 시작했다.

"저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닙니다." 반전 집회에 참석한 지역 정치인의 발언이었다. 청중들은 당황했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반전 집회에 와서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오바마는 남북전쟁과 2차 세계대전의 예를 들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치뤄야 하는 전쟁이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저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중산층의 가계가 무너지고 실업률이 오르며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어리석은 전쟁, 준비되지도 않았고 사담 후세인이 미국을 공격했다는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전쟁, 그런 어리석고 성급한 전쟁에 반대한다고 오바마는 목소리를 드높이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 싸움을 원합니까? 효율적인 정보 기관을 동원해 알 카에다, 빈 라덴과 싸우십시오." 사람들은 수긍했다. 오바마는 테러 문제의 본질을 짚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 싸움을 원합니까? 중동의 소위 동맹들,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집트가 자국민들을 억누르고 부패를 용인하는 행동을 멈추게 하십시오" 사람들은 환호했다. 오바마는 평화의 토대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 싸움을 원합니까? 엑손 모빌 사의 이익에 따른 에너지 정책을 버리고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의 젖을 떼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십시오." 사람들은 열광했다. 오바마는 미국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오바마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아직 이라크 전쟁은 시작되지도 않았고, 많은 미국인들은 지난 걸프 전쟁처럼 순식간에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 손을 털고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빈 라덴이건 누구건 붙잡고 분풀이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복수심이 팽배한 시점이었다. 모두가 전쟁에 대해 '예'라고 말하고 있을 때, 오바마는 홀로 '아니오'라고 외쳤다. 훗날 언론인 데이비드 멘델과의 인터뷰를 모은 책 『오바마: 약속에서 권력으로』에 따르면, 오바마는 자신의 정치 인생 중 바로 그 연설을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은 깊고 깊은 수렁으로 변해갔다. 민주당 경선은 그런 상황 속에서 치뤄졌다. 그런데 7인의 경선 후보 중 오바마처럼 떳떳하게 이라크 전쟁 반대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은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다. 다른 후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어리석은 전쟁에 반대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수년 째 지속되는 전쟁과 그 전쟁으로 인한 참상, 국제 사회의 비난으로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정신을 온전히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사람. 모든 전쟁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전쟁에는 반대하는 사람. 젊은이들은 오바마를 찍기 위해 기꺼이 투표장으로 나섰다. 그렇게 기적이 탄생한 것이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군사 독재. 그 지난했던 민주화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바퀴에 의존해 달려나갔다. 유신 독재와의 싸움, 뒤이어지는 신군부와의 갈등 속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선의의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협력 관계였다. 대선 후보로서 파괴력을 보여준 김대중은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오랜 가택 연금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비교적 운신의 폭이 넓었던 김영삼은 최대한 정권의 탄압을 피하는 범위 내에서 야당의 세를 늘리고 규합하는 일에 힘쓴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밝았다.

1987년 6월 10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 씨의 죽음,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전두환의 호헌 조치 등에 반발한 시민들은 동시다발적인 대규모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결국 전두환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후계자 노태우가 6월 29일 항복 선언을 한다.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부터 김영삼과 김대중의 해묵은 경쟁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향해 나아갔고, 결국 87년 6월의 승리는 12월의 패배로 끝난다. 김영삼이 630만 표, 김대중이 610만 표, 노태우가 820만 표를 얻어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가 민주화 이후에 다시 대통령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잘나가는 세무 변호사 노무현은 정계에 입문한다. 김영삼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초선의원 노무현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다. 1988년, 제13대 총선의 결과였다. 그렇게 국회의원이 된 그는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된 국회 청문회, 이른바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상대로 호통을 치고 명패를 던지며 일약 청문회 스타로 급부상한다. 노무현에게는 오바마와 같은 유창한 연설 실력은 없었으나, 진정 사람들이 원하던 바로 그 '한방'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하지만 노무현의 '결정적 순간'은 그 청문회가 아니었다.

1990년 1월 30일 서울 마포가든호텔 접견실. 김영삼 총재는 요식 행사를 서둘러 끝내고 싶었다. 그는 이미 일주일 전, 노태우 김종필과 청와대에서 만나 이른바 '3당 합당'에 합의했다. 박정희의 공화당, 신군부의 민주정의당, 그리고 정통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을 합쳐버리는 것이다. 노태우는 그 결과 여소야대 국면에서 벗어나고, 김영삼은 야당이 아닌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순전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물이었다. 이미 3당 합당은 결정된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통일민주당의 해산 뿐이다. 김영삼은 서둘렀다.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초선 의원 노무현이었다. 보스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음 선거에서 공천을 받을 수 없고, 다음 공천을 받지 못하면 정치 인생은 끝이다.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삭히고만 있던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노무현은 바로 그 순간에 오른팔을 치켜들고 벌떡 일어났다. 물론 이미 3당합당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군부 및 신군부 세력과 한솥밥을 먹는 사이가 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결정 뿐이다. 노무현의 저항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

3당합당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87년 대선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한 '군사독재 대 민주주의'의 정치 구도가 완전히 무너졌을 뿐 아니라, 그 경계선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도래하고야 만 것이다. 이전까지 유효한 것으로 보이던 정치적 선악의 판별 기준이 무의미해졌다. 이제 국민들은 '이 세력이 군부독재 세력이냐 아니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게 되었다. 김영삼과 노태우가 같은 당에 속해있으니 말이다. 그저 남은 것은 '저 집단의 대표자가 김영삼이냐 김대중이냐' 뿐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경남 거제 출신인 김영삼은 영남 지역에서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호남 전남 목포 출신인 김대중은 특히 5·18 민주화운동 이후 호남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하게 된다. 노태우와 전두환이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는 것도 그렇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군사독재 대 민주주의'라는 상징계의 기표가 허물어지고, 대신 그 자리를 '영남과 호남의 대립'이 채워넣게 된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치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젊은 정치인 노무현의 고난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른 영남 출신 정치인들은 그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노무현은 갈 곳이 없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꽉 쥔 채 오른팔을 번쩍 치켜올리는 그의 모습은 당시 현장 취재를 나와 있던 <경상일보> 기자 김종구씨에 의해 생생하게 필름에 담겼다. 3당 합당에 의해 고착된 지역 구도에 의해, 김대중의 공천을 받아 부산에 출마한 노무현은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맛보게 된다. 이후 한국 정치가 지역갈등에 의해 고착화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노무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당 합당에 반대한 정치인, 바로 그 지점에서 노무현은 지역 갈등 문제에 대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된 것이다. 네 번의 국회의원 선거 낙선을 통해 얻게 된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2001년부터 폭발하기 시작한다.

노무현이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는 그 모습이 다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지역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에서 환멸과 무기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가서겠다. 이것이 노무현의 전략이었다. 그 전략은 곧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의미한 정책적 대결이나 사상적 갈등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고, 그저 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어 반목하는 기존 정치권의 구도 속에서, 처음부터 3당합당에 반대하고 그 반대급부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던 노무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실패를 회복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수 차례의 곡절을 더 겪은 후, 경선 과정보다 더욱 드라마틱하게 대선을 치렀고,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왜 우리는 이런 '결정적 순간'에 주목해야 할까? 누군가가 소수파 출신이라는 것, 자신이 속한 정당의 주류 세력이 아니라는 것, 대중적인 열광을 등에 업어야만 중앙 정치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다. 지금 우리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가 흑인 혼혈이라는 것을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파악한다. 막상 경선이 진행되던 시점, 그리고 대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바마는 자신이 흑인 유권자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흑인과 백인 모두로부터 지지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흑인들에게는 자신의 혈통을 이용한 정치적 기회주의자로, 백인에게는 인종차별의 역사가 가져다주는 죄책감을 들쑤셔 표로 가져가려는 정략적 행위자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영남 출신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날의 칼은 언제나 자신을 벨 수도 있는 법이다. 노무현의 출신 성분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꾸준히 자신을 지역 갈등의 한가운데에 던져왔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승자들이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쉽사리 잊곤 한다. 오바마와 노무현 모두, 소수파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소수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원동력이 '결정적 순간'이다. 그들은 모두, 이성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속한 정치공동체의 양심이 큰 상처를 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대체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찬성표를 던질 때, 양심적인 시민들은 고뇌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부독재세력이 엄연히 두 눈 뜨고 살아있는 상황에서, 오직 정치공학적인 계산을 통해 3당 합당이 단행되어버릴 때, 87년 항쟁 속에서 경찰에게 맞고 최루탄에 눈물 흘렸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친 노무현은 그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최후의 정신적 보루였던 것이다.

오바마와 노무현에게는 바로 그 '결정적 순간'에 '아니오'라고 외쳤다는 것, 그 빼앗길 수 없고 다른 이가 훔칠 수도 없는 단단한 종잣돈이 있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과정만을 놓고 보면, 대체 왜 이들이 이렇게까지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노무현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또 오바마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국내외의 많은 논평자들은 인터넷, 젊은이에게 호소하는 감수성, 기타등등 '새로운 것'들을 주로 이야기해왔다. 정치 바깥에 있는 무언가가 오바마 혹은 노무현의 등을 타고 정치의 내부로 급격히 빨려들어간 결과 그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바마와 노무현의 종잣돈은 결국 정치적 사건에 대한 그들의, 정치인으로서의 결정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라크 전쟁에 반대할 때, 혹은 3당 합당에 이의를 제기할 때 정치인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갓 등장한 주목받던 젊은 정치인이 자신의 전도유망한 앞날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발언을 용기 있게 내뱉은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의 결정적 순간을 구성하는 내용물이다. 오바마와 노무현 모두 그들의 결정적 순간에 정치인이었고, 정치인으로서 올바른 결정을 한 그들을 대중은 선택했다. 소수파 출신의 아웃사이더들은 바로 그렇게 날개를 달고 역사의 흐름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미면 또 어떠냐"에서 "한미 FTA 임기내 처리"까지

오바마의 임기는 현재 진행중이다. 반면 노무현은 임기를 마치고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간 후,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다가 수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2009년 5월 23일,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무현 본인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 즉 참여정부 5년에 대한 평가 역시 그리 높지만은 않다.

노무현은 자주국방을 강조했고 전시작전권 회수 문제에 집착했다. 그는 후보 시절 "반미면 또 어떠냐"고 말함으로써, 지난 대통령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대미 관계 문제를 다룰 것임을 밝혔다. 전시작전권 환수, 동북아 균형자론의 추진 등에서 그러한 정책적 방향성이 드러나기도 했으나, 임기의 말미에서 그는 여론의 비판과 반발을 무릅쓰고 한미 FTA를 급속도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미면 또 어떠냐'고 당당히 묻던 노무현을 기억하던 이들은 큰 실망을 맛보았고, 등을 돌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이 보여준 이라크 전쟁에 대한 태도 변화 역시 그렇다. "반미면 또 어떠냐"던 노무현은, 국제 정치의 현실 등을 이유로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결정을 내린다. 한국의 그러한 결정에 반감을 품은 무장단체 '자마트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가 이라크 팔루자 인근에서 김선일 씨를 납치했고 대한민국 정부에 파병 중단 및 한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정부는 그 요구를 거부했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유시민은 "사람 하나 죽었다고 철군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발언으로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결국 무장단체는 2004년 6월 22일 김선일을 참수한다.

노무현 및 그의 주변 세력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지지층 사이의 괴리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반미면 또 어떠냐'던 기개는 사라지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국익' 앞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그까짓 것'으로 전락했다. 지지층을 실망시키기 시작한 노무현 정부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고 의회에서 통과되기까지 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의회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얻어냈다. 하지만 노무현 지지자들은 숙원과도 같았던 국가보안법 폐지의 감격을 맛보지 못한다. 대신 노무현은 더 오른쪽으로 향할 뿐이었다. 그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주장할 때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향하는' 행보는 절정에 달했다. 결국 노무현은 그 어느 편의 확고한 지지도 얻지 못한 채, 대통령으로서의 뚜렷한 성과 없이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야 했다.

노무현의 적극적인 옹호자들은 그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이유를 온전히 그의 반대 세력의 강고함에서 찾는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의석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했던 여당의 지도자였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그러한 변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대통령 권력 집중을 이루고 있는 나라이다. 심지어 대통령에게는 마치 봉건시대의 군주처럼, 원하는 죄인을 조건 없이 사면할 수 있는 특권마저 있다. '노무현에게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만한 힘이 없었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럴 때의 '힘'은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의 정치력에 더욱 가까운 무언가일 것이다.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으로 이해한 수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일꾼 힐러리와 달리 오바마는 시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젊은이들이 힐러리가 아닌 오바마를 택했다. 하지만 그 시인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어찌할 것인가? 지켜지지 않은 약속, 이루지 못한 희망, 이것들은 민주당 뿐 아니라 미국의 정치권 전체를 큰 무기력 속에 빠뜨릴 수 있다. 한국인들은 이미 그와 같은 '영웅'의 실패가 가져다주는 회의주의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미국인들 뿐 아니라 한국인들 역시 같은 근심에 빠져들었다. 오바마가 당선된 시점은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대출로 인해 경제 위기를 향해 걸어가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약속이 아니라,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강인한 리더십이 절실했다. 과연 오바마는 그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정치의 힘, 혹은 오바마의 만신창이 승리

오바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속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심각한 위기, 즉 세계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미국인들은 자신의 예금을 넣어놓은 은행이 망할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은행 문앞에 줄을 서고 예금을 찾아가고 있었다. 영세한 은행부터 하나씩 부도가 나고 있었고 그 여파가 전체 경제 시스템을 붕괴시키기 직전이었다.

루즈벨트는 취임하자마자 '모든 은행'의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온갖 법안들을 의회에 무더기로 제출했다. 이 충격요법이 미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를 부활시킨 원동력 중 하나였다. 다시 은행 문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았고, 예금을 찾고자 달려들지도 않았다. 루즈벨트의 이와 같은 전설적 리더십은 이후 모든 미국 대통령들에게 하나의 평가 기준이 되어버린다. '취임 후 100일',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오바마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787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에 사인했고,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를 명령했으며,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철수도 결정했다. 하지만 루즈벨트의 은행 폐쇄와 달리 관타나모 수용소는 그 결정 이후에도 그 자리에 계속 열려 있었다. 수용소를 이전할 대체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 철군 역시 순식간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경제는 기대했던 것처럼 호전되지 않았고, 도리어 다른 나라에서 발생하는 악재들이 미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결국 취임 1주년을 맞이했을 때 오바마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결정은 했지만 성과는 없는 상황이 줄곧 이어졌다. 오바마의 지지자들은 실망했고, 취임 초기 70%에 달하던 지지율은 57%까지 떨어졌다. 오바마를 정치적으로 이끌어준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세상을 떠난 후 치뤄진 보궐선거에서,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이었던 메사추세츠 주는 공화당을 택했다. '슈퍼 60석', 즉 야당의 방해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상원 의석수가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 오바마에게는 할 일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일, 모든 미국 진보파의 숙원, 건강보험 개혁이 바로 그것이었다.

2008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취임 후 100일'에 처리했어야 할 건강보험 문제를 질질 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며, 오바마가 클린턴 정부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중도파를 만족시키기 위해 양보하다가 본인의 지지 기반도 상실하는, 즉 산토끼 잡으러 갔다가 집토끼도 놓치는 상황에 빠졌다는 것이다.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즉 필자와 같은 이들 역시 같은 비관론에 빠져들었다. 오바마가 말하는 '초당적 협력'이 노무현의 실패한 '대연정'과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결국 미국인들도, 지금의 한국인들과 같은 정치적 실망과 회의의 늪에 빠져들게 될까?

오바마는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두 문화를 오가며 성장했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 전에 타인의 말을 듣고 관찰하는 습관이 베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 2만 5천에서 3만 명 규모의 병력을 증파하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바마와 클린턴 국무부 장관 및 기타 관계자들의 회의 내용을 보도한 뉴욕 타임즈의 기사 "How Obama Came to Plan for 'Surge' in Afghanistan"에 따르면, 오바마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대학 교수처럼 회의하고 토론하며 자료를 검토한다. 오바마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따로 불러 의견을 듣고 확인했다. 그의 최측근인 데이비드 엑셀로드 같은 이도, 추수감사절 전까지는 오바마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오바마는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가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으로 선출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두 파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고, 그것을 중제할 수 있는 인물은 오바마 뿐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그의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오바마의 그런 성격이 매우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는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속에서 절충되는 지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오바마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큰 꿈을 불어넣었지만, 정작 본인은 작은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들을 절충시키는 작업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보험 개혁안의 처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화당에서 가장 크게 반대하는 요소, 즉 '퍼블릭 옵션'(public option)을 일찌감치 포기함으로써 반대자들의 단결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퍼블릭 옵션을 포기한다는 것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 의료보험들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오바마의 목표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을 실망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하여 기나긴 토론과 회의 끝에, 2010년 3월 23일 건강보험 개혁안이 통과되었다.

오바마의 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바마 시대'는 현재진행형이다.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른 시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오바마는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실망시킬 것이지만, 그가 해야 할 일들을 어떤 식으로건 이루어내긴 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2010년 8월 19일,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던 마지막 미군 전투 여단이 떠나면서 오바마는 이라크에서 병력을 빼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물론 이것도 상처 투성이의 영광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를 돌이켜볼 때, 그 너덜너덜한 승리에 대한 부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바마와 노무현, 그 결정적 차이

오바마의 성공이나 실패를 논하는 것은 모두 너무 이르다. 하지만 그가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정치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해결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워진다. 기존의 세력과 새로운 세력, 본인의 개혁적 목표와 기존 정부의 보수적 경향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가는 오바마와 달리, 노무현은 좌충우돌했고 정보로부터 차단된 채 맴돌았으며 결국 지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국방 외교 전문지 <D&D 포커스>의 편집장 김종대의 책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의 한 장면. 2004년 5월 20일 안보관계장관회의,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나는 여기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 전부가 나에게는 진실로 들리지 않아요. 이게 대책회의 맞습니까?" 노무현은 관료들과의 의사소통 및, 제반 부처들 사이의 힘겨루기를 통제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물론 그 차이는 전적으로 오바마와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토론 문화, 각 정부 부처의 효율성, 엘리트 집단의 결속력 및 정보력 등에서 수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 본인의 성격과 스타일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현재 유엔 사령부가 통제하고 있는 한반도 전시작전권의 환수 문제에 있어서,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는 그 회의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국방 안보 문제를 전하고 토론하는 참모들은 크게 '자주파'와 '동맹파'로 나뉘어 있었다. 자주파는 전시작전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쪽이었고, 동맹파는 한미동맹을 공고히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양자의 대립이 팽팽한 가운데,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여러분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대통령으로 오늘 토론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전시작전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대통령 선거 전부터 내가 가져왔던 생각이고요. 다만 그 시점이 언제냐, 어떤 조건에서 하는 것이 적절하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미 노무현은 결정을 내린 상황이다. 다만 그 세부사항을 놓고 토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론'에 반발하는 참모를 향해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들어보세요. 청와대 참모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알려 드리지요. 참모는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좌표와 역사관을 이해하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가진 의견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 여러분의 견해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국방보좌관이 마치 이러한 논의 자체를 반대하는 듯이 나서게 되면 토론이 안 됩니다."

대통령의 의견에 대해 '토론'하되, 그 자체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진 의사결정권자. 바로 이 지점에서 오바마와 노무현의 스타일 차이가 도드라진다. 앞서 언급한 뉴욕타임즈의 기사 "How Obama Came to Plan for 'Surge' in Afghanistan"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발언을 인용해보자.

"대통령은 모든 범위의 의견 개진을 환영했고 반대되는 관점을 가진 이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긍정적인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전부 대통령과 상의하게 되니까요. 우리는 일이 다 결정된 다음 누군가가 '아니, 하지만' 이라고 단서를 붙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바마와 함께 토론하면] 지금 자신의 생각을 말하거나 확실한 동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4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맥크리스털 장군의 입장에 대해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들을수록 오바마는 자신이 설득되어가는 것을 느꼈고, 결국 아프가니스탄 병력 증파를 "필요한 전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노무현과 오바마, 오바마와 노무현. 두 대통령 모두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차근차근 실망시켰다. 문제는 그 지지자들을 실망시키는 방법이었다. 오바마는 원대한 꿈과 이상을 보여준 후 그것을 대단히 현실적·정치적으로 이루어나가며, 빠른 해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오바마는 겉과 속이 달랐다. 시인의 탈을 쓴 정치가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노무현은 훨씬 솔직하고 단순했다. 그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청와대에서 회의하고 토론하고 역정을 내었으며, 결국 좌절했다. 그와 같은 좌충우돌로 인해 노무현과 그의 참모들은 중요한 순간에 필요한 추진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결국 노무현은 정권 말기로 향할수록 더더욱 삼성경제연구소와 같은 외부 집단의 판단에 휩쓸려가게 된다. 설령 그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직언을 해줄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셰익스피어적인 성격 비극에 더욱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비극의 마지막 장면을.

한국의 오바마를 위하여

이제 최초의 질문에 대답을 해보도록 하자.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인가? 오바마와 노무현은 모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양심이 시험당하던 바로 그 순간에 꼭 필요한 용기를 냈다. 그것은 그들이 급격한 정치적 성장을 거둘 수 있게 해준 근원적인 동력이기도 했다. 본인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사람, 비주류 출신으로 엘리트 그룹에 들어가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오바마는 미국에 단 한 명, 노무현도 대한민국에 오직 그뿐이었다. '결정적 순간'에 양심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은 그토록 드물다.

하지만 오바마와 노무현은, 그들이 대중 앞에서 사용한 전략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달랐다. 오바마는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기 위해 정치인답지 않은 모습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바로 그래서 오바마의 지지자들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신들이 바라던 그 시인이 사실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하게 된다. 반면 노무현은, 선거 과정에서의 정치적 판단과는 별개로, 협상을 하거나 여러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에는 전혀 능숙하지 못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투사로 남았고, 자신이 거느린 조직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탈진해버렸다.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으로만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두 사람의 많은 차이 뿐 아니라,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중요한 미덕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대한민국에게 가장 중요한 외국인 미국, 그 미국의 대표자인 대통령 오바마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앎의 간극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미국의 노무현'이라는 개념을 떠올린 순간, 한국의 보수 뿐 아니라 진보 진영 역시 중요한 배움과 깨달음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바마와 노무현의 성장을 통해 우리는 '정치적 용기'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오바마와 노무현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정치적 행위' 그 자체가 갖는 의미와 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비주류 출신이며, 막강한 거대 언론사의 흔들기에 시달렸고 시달리고 있다. '미국인의 5분의 1이 오바마가 이슬람 교도라고 믿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대서특필하는 폭스 뉴스를 보며, 노무현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던 보수 언론들의 행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듯 말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들을 하나씩 수행해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정치인이다. 노무현이 그러하였듯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함으로써 상처받은 양심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람. 오바마가 그러하였듯이, 반대자의 의견까지 진정으로 경청하고 그 속에서 최선의 좁은 길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인가?'라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고쳐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오바마는 누구인가?' 그 답은 결코 정치의 바깥에 있지 않다.

정치를 바꿀 수 있는 동력, 그 동력의 구심점이 되는 누군가는 결코 정치권 외부로부터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비정치인이 정치의 판에 뛰어들면 정치판이 너무 더러워서 망가지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깨끗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정치판에 적응하지 못해 망가지는 경우가 더 많다.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수십 수백 명의 잠재적 경쟁자를 상대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노무현도 그렇고 오바마도 그렇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부 인사가 아니라, 나름대로 오랜 숙련 기간을 거친 이른바 '중고신인'이었다.

그러한 중고신인 중 누군가는 꼭 필요한 순간에 할 말을 하고 있다. 3당 합당의 순간에 노무현이 '이의 있습니다'를 외쳤듯, 이라크 전쟁이 결정되는 순간에 시카고의 정치 신인 버락 오바마가 '어리석은 전쟁에 반대'했듯 말이다. 바로 그런 순간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규정짓는 정치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모두가 '예'라고 외칠 때, 심지어 '우리 편'끼리도 이건 대세야, 어쩔 수 없어, 같은 비관적인 목소리가 횡횡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요'라고 외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누군가가 결국 세상을 바꾸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난 정권 시절 가장 큰 패착이 무엇이었을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이른바 '현실'을 핑계삼아서 저질러버린 그런 일, 그로 인해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게 된 사건이 무엇인가? 미국의 이라크 전쟁 참전 결정처럼, 바로 그와 같이 '여야의 초당적 협력'에 의해 저질러진 어리석은 사건들의 목록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아니오'라고 외친 사람들, 그들 중 누군가가 '한국의 오바마'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더 읽을거리

한 사람으로서 오바마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다면, 그 무엇보다 먼저 버락 오바마, 이경식 옮김,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을 읽어야 한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한 소년이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전기이자 성장소설이다. 한편 그 오바마가 정치인으로서 얼마나 탁월한 안목과 승부 감각을 지니고 있는지, 자신의 단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알고 싶다면 데이비드 멘델, 윤태일 옮김, 『오바마 약속에서 권력으로』(서울: 한국과미국, 2008)을 참고할 것. 수년간에 걸쳐 오바마를 밀착취재한 베테랑 언론인의 작품으로, 이상주의적 레토릭을 구사하지만 현실주의적 안목을 지니고 있는 오바마의 양면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노무현에 대한 책은 한국 서점가에 넘쳐난다. 하지만 그 중 특별히 주목해야 할 책은 세 권이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에 쓴 책들은 그의 솔직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들인데, 그 중 노무현, 『여보 나좀 도와줘』(서울: 새터, 2002), 개정판을 우선 읽어보는 것이 좋다. 젊은 정치인 노무현이 바라보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와는 다른 의미에서 노무현 역시 준수한 글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한 후 고향에서 유기농 재배 등 다양한 실험을 하며 참여정부의 실책을 검토하고 곱씹는다. 그 성찰이 노무현, 『진보의 미래』(서울: 동녘, 2009)에 담겨있다. 일부 지지자들의 생각과 달리 노무현은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헤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 한 번의 기회가 올 경우 좀 더 진보적인 입장을 펼칠 것이라고 다짐한다. 한편 그 노무현을 외부로부터 관찰한 책으로는, 본문에서 인용한 김종대,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서울: 나무와숲, 2010)을 꼽을 수 있다. '청와대 비화' 같은 식의 흥미 위주의 읽을거리가 아닌, 국내에서 드문 진지한 관찰 및 분석기이며, 참여정부의 내적 갈등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미국은 역사가 길지 않은 나라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헌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의 경험이 가장 오래 축적된만큼, 미국에서의 정치적 발전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그만큼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미국 정치사 개괄로는 폴 크루그먼, 예상한 외 옮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서울: 현대경제연구원BOOKS, 2008)을 추천할 수 있다. 경제학자가 쓴 책이며 경제학적 논의가 들어가지만, 기본적으로 미국 사회의 변화가 경제정책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논의하는 책이므로 '다른 목적'으로 활용하기에 더 좋다.

한국 현대 정치에 대해서는 다음 두 권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우선 1987년 이후의 정치적 변화에 대해서는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서울: 후마니타스, 2010) 개정 2판을 참조할 것. 최장집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내재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 이후에 대표되지 않는 갈등이 사회적 불안 및 정치적 무관심을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한국 현대 정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현대의 고전'중 하나이므로, 읽지 않더라도 책꽂이에 꽂아두어야 할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최장집의 제자인 박상훈은 박상훈, 『만들어진 현실』(서울: 후마니타스, 2009)에서 노무현이 맞서 싸운 지역주의의 실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는 지역주의라는 것이 실재하는 갈등이라기보다는, 책 제목처럼 '만들어진 현실'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한다. 박정희가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이기기 위해 도입한 담론이며, 궁극적으로는 19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장집의 책과 더불어 읽어보면 '하나의 시각'을 얻을 수 있다. 그 이후 그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새로운 눈을 얻고 싶다면, 두 권의 책에서 저자들이 반박하고 있는 참고문헌을 따라 읽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