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0

"층간 내리사랑"과 국가의 역할

KBS 1FM 라디오를 듣던 중 공익광고가 흘러나왔다. 자기 집에서 살살 걸어다니고, 악기 연습을 자제하는 등 조심스럽게 생활하는 사례들을 죽 나열한 것이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이어지는 멘트.

"위층은 아래층을, 아래층은 그 아래층을 먼저 생각하는 층간 내리사랑. 이웃간의 새로운 사랑법입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적어두었다. 위 인용문은 공영방송 KBS 라디오 공익광고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친 것이다. 층간소음이 심하니 이웃간에 서로 '배려'해야 한다며,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하자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은 광고를 하고 있다.

이 광고는 대한민국에서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실패가 어떻게 시민사회의 짐으로 전가되고 있는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은연중에 강조하거나 미화한다.

아파트 층간소음은 구조적 문제다. 사회경제적 구조 이전에 건물의 구조상 발생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지어지는 아파트 중 대다수는 벽식 구조로 지어져 있다. 별도의 기둥 없이 아파트의 벽 자체가 중량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벽식 건물은 공사 속도를 내기 좋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인근의 진동이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층간소음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절대다수의 아파트가 애초부터 층간소음이 울려펴지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벽식 구조에서는 바닥 울림이 고스란히 벽을 타고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맹점이 있다. 쉽게 말해 진동을 일으킨 바닥과의 접점이 모든 벽으로 넓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달이 잘 된다. 특히 벽식 구조라면 7층의 쿵쿵대는 소리가 5층·4층까지는 물론, 거꾸로 위로 8층으로도 더 잘 전해진다. 반면 기둥식은 벽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핵심은 기둥과 보이다. 바닥의 충격음, 진동이 보와 기둥으로 분산된다. 바닥 충격이 기둥을 타고 전달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철승 연구원은 “네모난 상자를 두드리면 벽이 공진현상을 일으켜 진동이 증폭된다. 벽식 구조 아파트가 이런 형태다”라며 “구조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바닥 두께나 차음재에 치중해 왔다”고 지적했다.

전병역, "‘구멍뚫린’ 층간소음, 대안은 기둥식인데…", 경향신문, 2016년 8월 20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01832011&code=940100

기둥식 건물은 벽식 건물에 비해 공사비가 많이 든다. 같은 높이의 건물을 지을 경우, 벽식으로 지어야 더 많은 세대를 우겨넣을 수 있다. 기둥식으로 지으면 층고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대별로 부담해야 할 돈 또한 늘어난다. 최종적으로 그 비용은 소비자인 주민이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답일까? 아이가 뛰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데, 자기 집에서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조심조심 까치발로 다녀야 하는 상황이 정상일까? 서울 시내 아파트의 경우 수억원씩 하는데, 그 돈을 들여가며 자기 집에서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해야 하나?

이것은 전형적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문제다. 리스크를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분명 존재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층간소음이 발생하지 않을만큼 확실한 기준을 만들어 건설사를 규제하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하면 모두가 편해지지만, 만들고 정착시키는 비용을 아무도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는,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 말이다. 그러한 역할을 하라고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가는 그 세금으로 군대와 경찰과 행정 조직을 꾸려나간다. 공익을 위해 정부가 설정한 넓은 의미에서의 규제 외의 영역에서 국민은 자유롭게 거래하고, 영업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

KBS 1FM에서 흘러나오는 공익광고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따위 공익광고를 통해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오늘날 한국인의 거주 형태 중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의 건설에 있어서, 대체 어떤 구조적 하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층간소음에 의해 고통받는지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을 규제함으로써 개인들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너희들끼리 친절하고 행복하게 지내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와중에 동원되는 수사법이 가족주의적 상하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집 사는 사람은 아랫집 사는 사람의 손윗사람이 아니다. '내리사랑'이라는 표현을 동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꼭데기층 사는 사람은 단군할아버지라도 되는가?

이런 식의 '개혁'은 폼이 나지 않는다. 건설사 뿐 아니라 자신들이 내야 할 분양가가 높아질 우려를 느끼는 아파트 소비자들 역시 반발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재벌 회장 몇 명 불러놓고 꾸짖는 모습 보여주고, 감옥 보내고, "재벌 혼내느라 늦었다"고 공정위 위원장이 말하는 그런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웃사랑은 '내리사랑'도 '치사랑'도 아니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수평적 관계다. 그건 국민들끼리 알아서 할테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실태 조사와 그에 따른 엄격한 규제다. 물론 멋지지도 않고 폼도 나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국가의 역할인 것이다.

2017-11-05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1.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 대한민국에는 핵탄두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이 있다. 한국형 신형 원전 모델인 APR-1400은 지난 10월 유럽사업자요건 인증을 받았고, 그보다 앞서 지난 6월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 심사를 사실상 통과"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안전성을 검증받은 원전 설계 기술이 있고, 설계도에 맞춰 실제로 원전을 만들어낼 기술과 인력 또한 확보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건만 갖춰진다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전을 '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는 우리가 가진 강점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오히려 원자력 발전을 말려죽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쏘는' 상상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환경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마따나, 우리는 다른 미래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2.

2017년 11월 5일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는 대규모 정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초대형 허리케인 마리아(Maria)와 어마(Irma)가 발전소가 밀집한 섬의 남동부를 강타하면서 주요 송전망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10월 23일 복스(Vox)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본섬의 79퍼센트가 아직 정전 상태에 놓여 있다.

푸에르토리코 대정전 사태는 엄밀히 말해 발전소가 아니라 송전망이 망가져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왜 송전망이 망가졌는지 따져본다면, 푸에르토리코의 경제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 잘나갔던 푸에르토리코 경제가 주저앉게 된 이유의 한복판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원전 논쟁의 한복판에서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는 본디 스페인의 식민지로 개발되었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스페인이 물러나게 되었고, 1952년 새 헌법을 통해 미국의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2012년 주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될 것을 결정했지만 미국의 연방의회에서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은 탓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령'이지만 '미국'은 아니다.

그 섬의 역사는 섬 전체에 전기를 공급해온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Puerto Rico Electric Power Authority (PREPA))의 역사와도 같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하고 있다. 1941년 설립된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은 197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호경기 속에서 함께 호황을 누렸다. 제약업체를 필두로 한 미국의 기업들이 세제 혜택을 노리고 푸에르토리코에 대거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다. 지금도 몇몇 의약품들은 잘 살펴보면 "Made in Puerto Rico"라고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1996년 클린턴 정부가 푸에르토리코의 세제 혜택을 없애면서 많은 공장들이 섬을 떠났다. 그와 함께 경제가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PREPA와 푸에르토리코 자치정부의 어리석은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는 요금을 내지 않고 전기를 쓰고 있었다. 둘째, 경제가 위기에 몰리자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태양광과 천연가스 발전에 돈을 쏟아부었다(“The story of Puerto Rico’s power grid is the story of Puerto Rico”. The Economist.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conomist.com/news/united-states/21730432-even-hurricane-maria-hit-it-was-mess-story-puerto-ricos-power-grid). 셋째, 기저발전으로서 제 역할을 해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3.

2016년 기준 푸에르토리코의 발전원 비중을 알아보자. 미국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47%가 석유, 34%가 천연가스, 17%가 석탄, 2%가 신재생에너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가격이 함께 오르내리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총 발전량의 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Puerto Rico - Territory Energy Profile Overview -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EIA)”.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ia.gov/state/?sid=RQ).

애초부터 유가의 등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푸에르토리코는 90년대 말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유가의 고공행진 속에서 경제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경제위기 이후 폭락했던 유가는 이제서야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데, 그동안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도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가격은 미국 내에서 하와이 다음으로 높았다. 그런데 하와이의 경우 관광산업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는 반면 푸에르토리코에는 그런 게 없다.

경제적으로 워낙 낙후되어 있는 탓에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다.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는 탓에 지금과 같은 대정전이 아니어도 자꾸 전기가 끊기고 공장의 생산 비용이 높아진다. 인프라가 엉터리인 탓에 경제가 절름거리고, 경제가 힘차게 달려나가지 못하니 인프라 확충이 늦어진다. 악순환이다. 앞서 인용한 Vox의 기사에서 FiveThirtyEight의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발전소 설비의 연식 중위값은 44년이다. 일반적인 산업국가 발전 설비 연식의 중위값이 18년인 것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낡은 전력 인프라에 의존해 간신히 돌아가던 경제가 초대형 태풍을 만나 좌초한 것이다.

4.

푸에르토리코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PREPA는 발전원 중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천연가스와 태양광 발전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기업들이 문을 닫고 떠나는 와중이었다. 세제 혜택이 사라진 마당에, 전기요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그들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어권에서 나온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아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 있다. 굳이 태양광과 가스 발전을 늘리려 드는 그러한 움직임이 '친환경'으로 포장되었으리라는 점 말이다. 산업과 경제의 기초 체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PREPA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아니라 '깨끗한 에너지'에 돈을 쏟아부었다.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 발전기, 가스 발전기가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을 불러온 직접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저렴한 발전원이 존재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도 푸에르토리코에는 풍력 발전기가 존재한다. 심지어 태풍을 맞은 상태에서도 건재하게, 전혀 고장나지 않은 발전기가 남아있었다(지멘스의 놀라운 기술력이여!). 하지만 발전기를 운용하는 이들은 망연자실하게 돌지 않는 풍력 터빈을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풍력 발전기를 최초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력원이 필요한데, 바로 그 외부 전력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태평양 앞바다가 사이다여도 컵이 없어서 못 마시는' 꼴이다(Dreazen, Yochi. “Darkness: life in Puerto Rico without electricity”. Vox, 2017년 10월 23일 접속. https://www.vox.com/2017/10/23/16501164/puerto-rico-hurricane-maria-power-water-sewage-trump).

5.

푸에르토리코에 건설되어 있던 태양광 발전 판넬이 태풍을 맞아 파괴된 모습.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던가. 일론 머스크는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자신의 태양광 발전 사업의 홍보 기회로 삼았다. 푸에르토리코 전역에 솔라시티(Solar City)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의 그러한 제안이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가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한 것처럼, 솔라시티에서 만드는 태양광 발전기 내장형 타일을 시공하여 테슬라 자동차 한 대를 굴리고 집안 전체에서 쓰고 남을만큼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해도, 푸에르토리코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기는 집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음악을 듣고 TV를 볼 때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등받이 쪽의 물탱크에 새로운 물이 차오른다. 그런데 수도가 정상 작동하려면 (고대 로마나 에도 시대의 일본처럼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당연히 어딘가에서 전기를 이용해 수압을 만들어내고 있어야 한다. 도시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보일러가 작동하기 위해서도 전기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인프라 중의 인프라인 셈이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그러한 재앙을,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위한 제품의 홍보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집집마다 옥상에 깔려서 각 가정의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전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섬의 인프라 전체를 작동시켜줄, 절대 꺼지지 않는, 어지간한 자연재해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원자력 말이다.

6.

1959년. BONUS(BOiling NUclear Superheat reactor)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BWR이라는 실험적 기법을 채택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이다. 푸에르토리코 측에서는 평범한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원했으나, 애석하게도 아주 작은 용량의 시험적 설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끝인 린꼰(Rincon)에 부지를 마련하고 1963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General Nuclear Engineering Corporation (GNEC)이 이리저리 인수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며 건설은 지체되고 비용이 상승했다. 결국 예정보다 한 해 늦은 1964년 4월에 첫 시동을 했고 1965년 9월에서야 최대 출력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발전소는 1968년 폐쇄되었고, 오늘날은 원자로의 건물을 재활용하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평범한, 검증된, 583메가와트의 발전소를 건설하고자 했다. 1970년 시작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실제로 진행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1978년 완전히 폐기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는 '핵발전소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섬'이 되어있다(“Nuclear Energy for Puerto Rico | ANS Nuclear Cafe”. 2017년 10월 22일 접속. http://ansnuclearcafe.org/2016/04/14/nuclear-energy-for-puerto-rico/).

7.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1970년의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푸에르토리코의 운명은 지금과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미 연방 정부의 세제 혜택 철회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안정적인 산업 기반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다졌더라면 그토록 낙후한 발전 및 송전 설비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은 경제적 실패의 문제고, 그 경제적 실패의 밑바탕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 실패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자력을 도입해야 할 시점을 놓쳤다. 둘째,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택한 것이 천연가스와 태양광이었다. 말하자면 후라이팬 바깥으로 뛰어서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실패에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 정책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린턴 정권과 함께 불어닥친 미국 내 탈원전 열풍에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정책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미국의 담론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많은 IT 기업들이 푸에르토리코를 소재로 자기 회사의 기발한 기술을 뽐낸다. 일론 머스크 뿐만이 아니다. 구글은 거대한 기구를 띄워서 푸에르토리코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24시간 돌아가는 신뢰할만한 기저발전이 없다면 현대 문명은 유지될 수 없는데 말이다.

8.

관련 뉴스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누구도 푸에르토리코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올리고 있지는 않다. 물론 원자력 발전소는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설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술 자체가 굉장히 고난이도이며, 여타의 발전소보다 훨씬 건설 비용이 크다. 당장 전기가 안 돌아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섬을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경제이고, 경제는 인프라가 확충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실질적으로는 섬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다. 마치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원자력이 필요하다. 설령 폭풍우와 기상 악화로 석탄이나 석유 혹은 가스를 실은 배가 입항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작동하는, 한 번 연료를 보급하면 1년 정도는 거뜬한, 그런 원자력 발전소 말이다.

만약 한국이 석유 47%, 천연가스 34% 등의 에너지 믹스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처지는 어땠을까?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견디고, 2008년 경제위기 이전까지의 고유가 상황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9.

11월 7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뭐니뭐니해도 북핵이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ICBM에 장착하여 발사 실험까지 성공하는 순간, 그것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실이 있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시 미국에 핵을 '쏠' 능력이 있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들의 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핵은 완성된 기술이며 평화적으로 활용되는 발전소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을만한 기술력을 인정받은 나라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원하는 300만 이상의 (미국 대통령 투표권은 없는) 미국 시민들이 살고 있다. 북한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에 핵을 '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상, 아니 망상에 가깝다. 현 정권의 탈핵 기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내의 여론과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의 의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담대한 계획'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원자력의 유용함과 안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래서 한국에 온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던진다면? 그렇게 우리가 가진 기술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밤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긴 글을 한 편 써 보았다.

2017-11-03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월 1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지방분권개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년 지방선거에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자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권한을 어떻게 지방에 넘겨줄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한 중 일부는 중앙정부가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덜컥 지방분권개헌을 약속하는 것은 무책임한 정치적 행보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지역 사회가 위축되고 소멸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실체 없는 이상을 앞세워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예산이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추진하는 백년지대계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있다. 가령 탈원전 정책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놓고 본다면 탈원전이란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우리는 사실상의 섬나라에 살고 있으며, 석유도 LNG 가스도 나오지 않는다. 바람의 질도 형편없고 국토의 70%가 산이다.

국가 단위의 에너지 정책을 놓고 볼 때 최선의 선택지는 원전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여 더 안전하고 풍부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반면 개별적인 지자체의 시선에서 보자면 탈원전이 좋다. 위험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다들 싫어하는 기피시설인 원전은 어딘가로 쫓아내버리고, 우리 동네는 소위 '꿀 빠는 지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최선일테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은 바로 저런 식의 지역이기주의를 적극 부추기고 그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원자력만큼 안전한 전력 공급원이 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는 마땅히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불편한 짐을 떠안고 있다고 느끼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이런 진실을 설득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일개 시장이나 도지사의 눈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라보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전공대의 건설과 유치에 대한 논의도 그런 식이다. 과연 지금 한국전력이라는 공기업이 대학을 추가로 건설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의 숫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고, 멀쩡히 있는 대학들도 정원을 줄이는 이 판국에 말이다. 정상적인 대통령의 시각으로, 나라 전체의 살림을 바라보며 미래를 대비하는 시각에서라면, 굳이 지금 대학을 더 지을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일개 지자체장의 눈으로 보자면 무슨 상관이랴? 일단 우리 지역에 번듯한 건물 가진 대학 하나 더 들어오는 게 급선무다.

정작 지자체의 운영을 보면 한숨만 나올 지경이다. 풍기인삼축제조직위원회는 지난 10월 20일, 2.5미터 크기의 인삼 조형물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이런 꼴이었다.

축제의 주제를 나타내는 조형물로 축제장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남원천에 세워졌다. 문제는 인삼 조형물 중간 부분에 붉은 색을 띤 남자의 성기 모형이 부착돼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터장치를 해 성기 모형이 아래위로 계속 움직인다. 인삼 조형물에는 '인삼의 힘!'이라고 적힌 어깨띠가 걸쳐져 있다. 풍기인삼이 정력에 좋다는 뜻을 담기 위해 조직위가 설치했다. (이용호, "풍기인삼축제? 풍기문란축제!", 한국일보, 2017년 10월 23일.)

지자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돈을 펑펑 쓰고 있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시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만들고 기네스북에 등재하기 위해 1억1천6백만원을 소진했다. 울산시 울주군의 초대형 옹기에는 9천만원, 충북 영동군의 초대형 북에는 2억3천만원이 들었다. 지자체장이 자신의 업적으로 삼으려고 했거나, 알량한 '관광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물건들일 것이다. (참고: 윤영현, "'세계 최대'가 뭐길래...지자체 '억' 단위 세금 펑펑", SBS, 2017년 10월 31일.)

이건 반드시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강남스타일 말춤 조형물'이 있다. 2016년 신연희 강남구청장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풍기인삼처럼 문란하지는 않지만 제작비는 총 4억원 가량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여선웅 강남구의회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시 싸이측에서 동상 제작에 부정적이어서 완전한 말춤 동상을 제작할 수 없었다"며 "정상적이면 포기해야 되는데 기어코 손목이라도 만들어 버린 것이다"라고 조형물 관련 뒷얘기를 전했다"(김남중, "싸이, 코엑스 '강남스타일' 조형물에 "과하다"", 국민일보, 2017년 7월 24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유보될 수 없는 자유의 이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의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자의적 판단이나 폭력에 우리의 자유가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의 확충은 지자체에 수많은 예산을 퍼주고 그것을 낭비하건 말건 수수방관하며, 큰 필요성이 있건 없건 아무 축제나 벌이고 대학을 짓겠다고 하는 그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런 과정에서 국가 전체의 역량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자유와 풍요는 훼손된다. 지방자치의 이상 하에 우리 개인들의 삶이 침해당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치경찰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위 '섬마을 주민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인 교사는 낙도의 경찰이 아니라, 그 경찰을 관할하는 목포의 지서까지 찾아가 신고를 했다. 왜일까? '섬마을 공동체'와 경찰은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는 이웃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신고해봐야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복을 당할 우려가 크다는 판단이었다. 공권력은 주민과 친근해야 하지만, 유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자치경찰제가 과연 지역 토호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 내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모든 지방자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줄어드는 인구와 고령화에 대응해 훨씬 밀도 높고 '스마트'한 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재정적으로 자립도 어렵고 산업 기반도 허물어진 가운데, 지자체들이 궁여지책으로 조잡하고 흉측한 조형물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대학 유치에나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제동을 걸기는커녕 도리어 지방분권개헌을 덜컥 약속해버리는 오늘날의 모습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지자체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예산을 최종적으로 책임진다. 지자체는 내부의 범죄나 소요를 통제하지 못하면 군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 지자체는 남자 성기가 껄떡거리는 인삼 조형물 수천 개를 만들고 파산해도 중앙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반면 중앙정부가 재정적으로 파산하면 그 여파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요컨대 권한과 책임의 범주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지자체적 시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지자체는 내후년의 산업 동향과 '미래 먹거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지자체에게 돌아갈 몫을 어떻게 우리 지자체가 확보하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하지만 국가는 다르다. 국가의 경영은 미래를 바라보며 이루어져야 하고, 때로는 국민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도 추진하며 동의를 얻어나가야 한다. 요컨대, 대승적 관점을 견지해야 마땅하다. 언제나 주민 행복만을 위해 오직 그것만을 원칙으로 삼아도 큰 탈이 없는 지자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이게 나라냐?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많이 들려왔던 구호다. 당시 시위의 참여자들은 그 시위를 통해 '나라다운 나라'가 이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현재의 집권 세력은 '나라다운 나라'를 '촛불특별시'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대한민국은 국가다. 지자체의 연맹이 아니다. 청와대가 지자체의 눈으로 국가를 바라보지 말고, 국가의 눈으로 지자체를 바라보면서, 온 국민을 위한 미래의 계획을 수립할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2017-11-01

탈핵론자들은 대체 무엇에 반대하는가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탈핵론자들은 뭔가를 열심히 반대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뭘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방사능 유출의 위험'은 한국 원전의 설계와 가능한 사고의 영역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핵물질이 유출된 것은 격납 용기를 감싸는 콘크리트 외벽의 두께가 고작 16cm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수소폭발을 견디지 못했다.

반면 미국 최악의 원전 사고였던 TMI(Three Mile Islands) 발전소 사건은 달랐다. 노심용융으로 인해 수소폭발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격납 용기 외벽의 두께가 1미터였고, 내부의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견뎌냈다. 심지어 사고가 난 2호기는 폐쇄했지만 그 옆의 1호기는 얼마 후 정상 가동했다. 하루에 적어도 8시간씩 노동자들이 출근해서 일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후에 일하던 사람들도, 방사능 때문에 죽지 않았다. 격납 용기의 힘이다.

이와 같이, 방사성 물질이 원자로를 감싸고 있는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방사능은 유출되지 않는다. 방사능이란 방사성 물질이 뿜어내는 파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그 어떤 발전용 원자로도 후쿠시마처럼 16센티미터에 불과한 콘크리트 외벽을 가진 격납 용기 안에 들어있거나 하지 않다.

한국에서 최악의 원전 사고가 터져도 핵물질이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0에 매우 가깝다. 왜냐하면 원전 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수소폭발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고, 그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너끈히 견뎌내기 때문이다. 그럼 방사능은 나오지 않는다. 방사능의 위험 때문에 원전에 반대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말하는 '원전이 공격당하면 핵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이 끔찍하다'는 말 또한 현실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이미 미국에서 2002년에 실험을 해봤다. 두께 1미터 이상의 격납 용기는 보잉 767로 들이받아도 끄떡없다.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아와 직격해도, 어지간히 센 탄두를 탑재하고 있지 않은 한, 격납 용기 내의 핵물질을 유출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강력한 탄두, 가령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이 날아온다면 그때는 원전이 아니라 그 공격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동남권에 위치한 원전은 원전에 반대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대체로 반대하는 THAAD가 '죽음의 전자파'를 쏘아대며 지켜주는 범위 안에 있다. THAAD의 주된 목적은 부산항에서 왜관을 거쳐 평택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보급선을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미군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되었다. 원전이 북한 미사일에 공격당할까봐 걱정되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THAAD 배치에 찬성하고, 추가 배치를 추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그들이 말하는 '규모 7.0의 지진이 바로 원전 밑에서 발생하면 큰일 아니냐'는 우려 역시 말이 안 된다. 그럼 당신들은 규모 7.0의 지진이 청와대 바로 밑에서 발생할 가능성은 0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0.00000000000000000001%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원전을 폐쇄해야 한다면, 청와대 역시 같은 확률로 지진 피해를 입고 폭싹 무너질 수 있다(하지만 그런 지진을 겪어도 원전 건물은 안 무너진다.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당장 청와대에서 나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연재해를 견딜 수 있는 어딘가로 피신해야 한다. 어디가 좋을까? 노아의 방주?

그들이 말하는 소위 '화장실 없는 아파트' 타령, 사용후핵폐기물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엉터리다. 사용후핵폐기물이 10만 년을 가니까 원전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사람은, 화력발전소가 만들어내는 폐기물인 탄소가 몇 년을 가는지 알고 있나? 무한대다. 왜냐하면 탄소는 원자이며 원자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핵융합이나 핵분열 혹은 방사성 붕괴 등)가 아닌 다음에야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쭉 그냥 그대로 가기 때문이다.

사용후핵폐기물이 걱정된다면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면 된다. 이미 과학적으로 처리 방법은 다 고안되어 있다. 다만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와 핵탄두의 개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에,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두려워한 미국에 의해 해당 기술의 발전이 막혀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원자력계는 4세대 원전 개발에서도 앞서나가는 선두주자다. 4세대 원전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순간, 10만 년을 간다는 사용후핵폐기물 문제는 깨끗하게 사라진다. 대신 그 핵폐기물이 값싸고 훌륭한 발전 연료로 재활용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미래의 에너지라고 칭송하는 핵융합보다 훨씬 쉽게 구현 가능하고 그만큼 안전한 대안적 에너지 시스템이다.

그들이 말하는 온갖 '위험'에는 실체가 없다. 반면 실체가 없는 위험을 떠벌이는 '세력'에는 실체가 있다. 당신들은 원전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원전의 위험을 떠벌이는 당신들의 세력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탈원전을 외치는 이들은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을 보여주기 바란다. 사실 당신들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탈원전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숙의'하면 할수록,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당신들의 공포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실체가 없는 '위험'을 홍보하는 것으로 뭉친 '세력'에는 존재의 당위가 없다. 나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환경주의가 새롭게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2017-10-17

[북리뷰] 독일 통일, '그 후'도 연구해야 한다

독일 통일 25년 후
이기식 저·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1만4000원

9월 24일 치러진 독일 총선의 결과는 예상대로 충격적이었다. 예상대로 메르켈 총리는 4선 연임에 성공했지만,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2.6%를 득표하며 기독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의 뒤를 이어 3위에 등극한 것이다. 나치의 패망 이후 최초로 극우 정당이 연방의회의석을, 전체 709석중 무려 94석이나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알리는 한국 언론 중 상당수가 거론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독일대안당의 세력권이 구 동독과 포개진다는 것 말이다. 특히 작센 주에서는 독일대안당이 기민련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득표율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독 출신 메르켈의 든든한 텃밭이었던 그곳이 극우 세력의 토양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해체되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필자는 유학생 신분으로서 독일의 통일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대단한 행운이었다."(194쪽) 그 유학생 이기식은 귀국하여 교편을 잡은 후, 자료 연구 및 현지 조사 등을 통해 『독일 통일 15년의 작은 백서』, 『독일 통일 20년』, 『독일 통일 25년 후』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오늘 살펴볼 책은 2016년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세 번째 책이다.

"동서독이 어떻게 해서 통일이 되었는지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분단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관심이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 독일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남녀가 만나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보여 주는 우리의 드라마와 마찬가지다."(8쪽)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여전히 깊은 감정의 골이 패여 있고, 두 지역 출신은 서로 교류하지 않으며, 특히 동독 출신들은 서독에 대해 끝없이 열등감을 느낀다. 생필품 공급, 영양 상태 등 기초적인 삶의 질은 분명히 나아졌다. "하지만 동독인들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서독인들과 비교한다. 자신의 여건이 좀 나아지면 또다시 서독인과 비교하는 것이다."(64쪽) 이렇게 상대적 박탈감에 젖은 동독인들의 불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외국인, 특히 유색인종에게 향한다.

"'디 차이트'와 '타게스 슈피겔'지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1990년 통독부터 2012년까지 적어도 152명이 극우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136쪽)다. 그런데 "2012년에 발생한 인종주의적 사건은 모두 130건"이며 "이중 47%인 61건이 동독 지역에서 벌어졌"다. 문제는 "동독 인구는 독일에서 겨우 17%에 불과"(109쪽)하다는 것이다. 물론 서독에도 지지자들이 있지만, 페기다(PEGIDA) 운동과 독일대안당 극우 세력은 동독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독일의 언론조차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 의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탈리아는 통일 왕국을 건설하고 민주정을 수립한지 150여년이 지나도록 남북간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예멘이나 베트남 역시 내부의 골이 깊다. 최근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 시사하고 있다시피 미국 역시 내전까지 치러가며 통일되었지만 아직도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같은 민족인데 남북의 이데올로기 차이든, 체제 차이든 쉽게 극복할 수 있다"(7쪽)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공부해야 할 시점이다.

2017.10.17ㅣ주간경향 1247호

2017-10-03

'에너지 민주주의'라는 가짜 이념

탈핵론자들이 내거는 멋진 기치 중 하나가 바로 '에너지 민주주의'다.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고 작동시키는 원전보다, 개똥이네 말숙이네 집에 모두 태양광 발전기가 깔려있으면, 그게 본질적으로 '민주적'이고 따라서 옳다는 논리다.

이건 에너지 정책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하는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일단 근대국가를 전제로 한다. 근대국가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이고, 다만 그 폭력의 활용 방식을 법치주의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큰 발전소를 다 없애버리고 작은 발전소만 돌아가는 것을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에너지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에너지 전근대주의, 혹은 에너지 봉건주의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애초에 민주주의 자체가 (고대 그리스의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근대적 이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렴하게 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갖는 것, 본인이 사용한만큼 필요에 따라 적용된 누진제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요금을 내는 것, 그리고 그 에너지의 생산과 사용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감시 체제가 돌아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탈원전'과 필연적인 상관이 없다.

에너지의 생산과 유통을 감시하는 문제도 그러하다. 원자력 업계가 그렇게 의심스럽고 사악해보인다면, 감시하는 단체들이 전문성을 키움으로써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다. 오히려 원전은 숫자가 많지 않고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http://nsic.nssc.go.kr/main.do)와 같이 자료를 공개하는 일이 가능하다.

원전을 욕하기 위해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 자료를 참고하는 사람들이, 그 생태적 피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태양광과 풍력을 예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너무 잘 관리되는 탓에 알 수 있는 '문제'에만 손가락질하고, 자신들이 정작 파악하지도 못하는 '문제'들은 아예 없는 셈 쳐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무조건 선이니까 관리 감독의 필요가 없다고? 태양과 바람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리가 없다고? 그런 목가적 판타지에 기반해 국가 정책을 추진하자는 소리인가?

오히려 에너지 봉건주의자들의 이상대로 '공동체' 단위로 발전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살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에너지의 값이 비싸진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존에 저렴한 가격에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었던 빈곤층부터 소외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독거노인들이 전기장판을 못 틀게 된다는 말이다.

에너지는 민주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에너지를 민주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집집마다 발전기를 나눠 달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에너지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총을 들고 무장할 권리가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미국의 총기 소지 옹호론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에너지의 생산은 최소한의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하고, 그것을 적법한 기구에 의해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한다. 마치 국가의 총과 무기는 군대와 경찰이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다만 국민들은 국회나 정부 및 법원을 통해 그 무장 조직들을 감시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기본인 것처럼 말이다.

원전에 반대하는 논리로 뭘 갖다 붙이건 그건 주장하는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탈원전을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포장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알고도 그런다면 '강남 좌파 판타지'에 복무하는 것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고민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7-10-02

고래와 영웅 - 도덕적 에너지 실천에 대하여

1.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다.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어린이의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고, 일상은 지루하며 때로 고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세상과 맞장을 뜨는 사람들'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어떤 정치적 당위가 없거나 아예 부도덕한 존재라 해도, 그가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흥분하고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지강헌처럼 부당한 형사 정책에 희생된 이가 탈옥을 하면 국민들은 호응하고 그를 기린다. 하지만 신창원 같은 명백한 범죄자가 탈옥을 해도, 그저 탈옥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언론이 흥분하고 팬클럽이 생기며 그가 입었던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것이다.

약한 것과 옳은 것은 전혀 같은 가치가 아니지만 우리는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할 때에는, 설령 자신들이 실제로는 강자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약자라고 포장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와 같은 무모한 도전은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대신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이 박히는 어떤 '그림'이 나와주는 것이 관건이다. 마치 1975년,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포경선에 달려들던 그린피스처럼 말이다.


2.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태학 박사 과정을 밟던 대학원생 패트릭 무어(Patrick Moore)는 1971년, 냉전의 한복판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뜨거웠던 대학가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지기로 예정된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자 하는 한 환경운동 그룹에 참여한 것이다. 그들은 낡은 어선 한 척을 타고 수소폭탄 실험의 현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본인들을 '인간 방패'로 제공하는 시위를 하기로 했다.

목표와 방법이 정해졌다. 그런데 그 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처음에는 '평화(Peace)'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누군가의 제안으로 그 앞에 '녹색(Green)'이 붙었다. '그린피스(Greenpeace)'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린피스호는 그들이 막고자 했던 그 수소폭탄 실험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수소폭탄 실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과연 그린피스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린피스 호에 탔던 12명의 환경운동가들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핵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린피스의 활동은 1975년 전기를 맞이한다. "Save the Whales", 일본과 소련의 포경선에 맞서 고래들을 구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린피스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포경선의 작살이 날아다니고 고래들이 물보라를 튀기는 가운데 그린피스의 젊은 활동가들이 그 어느 나라의 법도 적용되지 않는 공해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린피스는 자신들의 활동을 영상에 담았고, 언론은 이런 '멋진 그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린피스는 전 세계인이 아는 환경운동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후 그들은 승승장구하며 다양한 환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패트릭 무어와 다른 이들의 입장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였던 패트릭 무어는 거대 조직으로 거듭난 그린피스가 염소(Chlorine)의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염소는 그냥 염소일 뿐이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용 화학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나트륨과 결합된 염소는 염화나트륨, 즉 소금이다.

특정한 원소 하나를 두고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며 모든 종류의 일상용품으로부터 염소를 추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던 그린피스를, 훈련된 생태학자인 패트릭 무어는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린피스의 창립자 중 하나인 그는 그린피스를 탈퇴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3.

화학은 화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제품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린피스는 자연에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인 원자번호 17번을 가진 그 원소를 '악'으로 보기 시작했다. 포경선과 싸우는 것은 이제 식상한 일이다. 미국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지상 핵실험 따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린피스는 여전히 맞서 싸울 거대한 악을 필요로 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염소를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고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방사능을 '죽음의 파장'이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방사능은 자연에 존재하는 특정한 파장들을 이르는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면 적외선이고 짧으면 자외선이다. 그 자외선보다 짧은 파동에는 X선과 감마선이 있고, 알파파, 베타파, 감마파라는 입자선도 존재한다. 이러한 파장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름이 바로 그 무시무시한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일반적으로 방사성 물질이 더 안정한 물질로 붕괴될 때 발생하는 입자선 혹은 전자기파라고 정의된다.

그냥 그게 전부다. 염소가 염소인 것처럼, 방사선은 방사선이고, 방사능이란 특정 물질이 방사선을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다. 염소를 '악'이라 부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면 방사능을 '악'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한심한 일이다.

인간은 19세기 말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방사선의 존재를 파악하고 방사능 물질을 추출하여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주기율표에 써있는 자연수의 형태로 똑 떨어지는 줄만 알았던 원자들이, 중성자의 갯수에 따라 다양한 동위원소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우라늄에는 중성자가 238개 있는 것도 있지만 235개 있는 것도 있으며 자연계에 0.7%가량 존재하는 중성자 235개짜리 우라늄을 많이 뭉치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핵분열의 속도가 빨라지며 심지어 임계치를 넘기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발견과 기술적 진전은 도덕과 무관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있고 그것을 꺼내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만약 핵분열의 발견과 통제 기술의 발달이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리지 않았더라면 핵무기의 제작은 훨씬 뒤로 늦춰졌을 것이다. 원유를 정제해서 나오는 가솔린이 오래도록 연료와 연구용으로만 사용되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제서야 네이팜탄으로도 만들어지고 몰로토프 칵테일(일명 화염병)로도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보다 먼저 그것이 폭탄으로 사용되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원자력이라는 에너지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반핵 운동이 터져나온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린피스 역시 반핵운동 단체로 시작했고, 원자폭탄 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까지 그 모든 원자력에 반대했다. 마치 십수년 후 '염소'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듯, 그린피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환경 운동은 '방사능'이라는 자연 현상에 대한 반대 운동에서 출발한 셈이다.


4.

방사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린피스는 방사능에 반대했고, 염소에 반대했고, 지금은 또 무언가에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자연 현상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거대 자본/원자력 마피아/미 제국주의/기타등등'으로 표상되는 어떤 거대한 권력과 조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소리가 버젓이 진보적 담론으로 유통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거대한 조직과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소수자들'로 포장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포지셔닝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방사능이 뭔지 몰라도, GMO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심지어는 염소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린피스의 편을 든다. 한국수력원자력과 몬산토와 카길과 미 제국주의가 그 배후에 있다고 외치면 많은 이들의 판단은 그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도덕심의 작동 원리를 그들이 잘 활용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소수자의 편에 서는 것, 그것은 권태롭고 피곤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웅의 편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포경선과 맞서 싸우는 그린피스의 모습을 TV로 보고 후원금을 퍼부어주었던 서구 시민들 중 대부분은 그 전까지 일본이 고래고기를 먹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심지어 적잖은 이들은 고래라는 동물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삼킨 동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그린피스의 활약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크고 무시무시한 작살을 단 배' 앞에 어줍잖은 낡아빠진 어선을 끌고 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 영웅들에게, 나의 후원금을 보낸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5.

2017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에서 오가는 탈핵 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정책적 당위성의 측면에서도 탈핵 진영은 탈핵 반대 진영에 비해 논거가 빈약하다. 아니, 사실 논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체르노빌처럼 흑연을 감속재로 쓰는 고속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후쿠시마처럼 비상용 발전기를 침수될 수 있는 낮은 곳에 배치해놓은 원자력 발전소도 한국에는 없다. 우주에서 공룡을 멸종시킬만큼 거대한 운석이 날아와 강타하지 않는 한 한국의 원전은 깨질 뿐 폭발하지는 않는다. 우라늄이 폭발할 수 있을만큼 농축되어 있지 않으니까. 심지어 북힌의 장사정포가 날아와도 원자로의 방호벽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찬성하는 이들은 당당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이 그들의 편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탈핵 반대 진영은 본인들이 과학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린피스나 환경운동연합이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도덕적 당위의 담지자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탈핵은 '운동'인 반면, 원자력 발전은 '정책'이며 '기술'일 뿐이다. 탈핵에 찬성하는 것은, 고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린피스를 후원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을 안겨준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구차한 현실론에 지나지 않는 무언가로 취급된다. 심지어 원자력 업계 종사자들도 종종, 그래 실은 그렇게 좋은 건 아니고 궁극적으로 보자면 없어져야겠지만 당장은 할 수 없죠,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현실의 무게를 아는, 일상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이지 않는 영웅적 노력의 결과물인지 아는 나잇대의 사람들은 그러므로 원자력 발전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세상을 바꾸고 싶고, 저 거대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싶고,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젊은이들은, 일단 탈핵에 찬성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싱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원자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왜 도덕적이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가격이 싸서, 짓다 만 발전소가 있으니까, 수십조원에 달하는 원전 시장을 빼앗기니까, 라는 식의 주장으로는 대통령 탄핵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청산주의적, 도덕주의적 열기를 이겨내기 어럽다.

원자력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 왜 사용해야 하며 왜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아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6.

이제서야 국내에서도 원자력 발전이 기후 변화 대응책으로서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론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와 교역량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세계적 트렌드에 뒤쳐진 나라다. 고맙게도 현 장권의 기습적인 탈핵 정책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원자력 발전이야말로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저발전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기후 변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21세기 인류가 처한 단 하나의 가장 큰 안보 위험 요소를 꼽는다면 그것은 기후 변화일 수밖에 없다. 가령 방글라데시의 경우 인구는 1.6억인데 그 중 4천만 명 이상이 해발 1미터 이하의 저지대에 살고 있다. 해수면이 1미터만 높아져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환경 난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은 따로 도망갈 곳도 없으므로 최선을 다해 기후변화에 맞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최대한 많은 국토를 가꾸고, 가급적 나무를 심어서 토양의 유실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의 '신재생 발전' 드라이브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서 태양광 발전기를 짓고 있다. 그런 식으로 국토를 벌거숭이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원전은 없애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유지하고 에너지 믹스에서 원전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이거나 합리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만큼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한국에 비해 가난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나라의 빈민들이 그만큼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방글라데시처럼 인구는 많은데 기술력이 부족한 나라에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현재 방글라데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원전을 건설중이다).


7.

원자력 발전에 찬성하는 것이 과연 '영웅적'인 일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여기 원자력 발전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너무도 안전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높이자'는 대중적인 운동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 말이다. 원자력 발전은 실로 너무도 안전하다. 얼마나 안전하냐면, 심지어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WHO 조사에 따르면,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마다 석탄은 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는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는 440명, 수력(세계 평균)은 1400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런데 원자력은 인류 최악의 사고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까지 포함해도 세계 평균 고작 90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이다. 이보다 안전한 에너지원은 없다.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원자력 발전이 더 안전한 것이다.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가 그것을 입증한다.

안전한 원자력 발전을 계속 사용하는 것, 그 활용을 늘려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원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전의 사용은 결코 영웅적인 일이 아니다. 무릅써야 할 위험 따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 원전이 '폭발'하면 수백만의 이재민이 생길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탈핵 반대 진영에서는 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원전이 위험하지 않다고 홍보하는 쪽에 주력해왔다. 그런 계몽은 언제나 옳고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확률이 0.0000000000000000000001%여도 0은 아니니까 위험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해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 과학적인 사실, 기술적인 설계, 그에 대해 쌓여있는 한국의 노하우를 놓고 볼 떄, 원전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2) 원자력 발전은 저렴하고 질 좋은 전기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으므로써, 기후 변화에 취약한 제3세계의 빈민들을 돕는 도덕적 에너지다.
3) 그러므로 아무리 사실에 입각한 안전성을 주장해도 수백조분의 1의 가능성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느끼는 그 엄청나게 희박한 가능성의 공포심을, 견뎌내시라. 그것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에 사는 한국인의 의무다. 그 조그마한 공포심 때문에 우리가 원전을 포기하면, 방글라데시의 빈민가가 물에 잠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원전 공포심을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실 1)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2)도 당연한 것이고 3)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적잖은 이들은 아직도 원전의 사고 위험을 두려워하고, '수십만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핵폐기물'에 대해 정말 큰 부담감을 느낀다. 경수로에서 사용된 핵연료라고 해봐야 물에 담가서 열을 식힌 후 포장해서 쌓아두면 그만일 뿐인데도 말이다.

사실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것은 늘 필요하다. 그 가치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탈핵이란 원전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원전이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쁘기' 때문에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우리 인류에게 골고루 내재되어 있는 그러한 성향을 충족시킬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원전이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 위한 우리의 최후의 보루라고. 굉장히 안전하고 튼튼하며, 핵폐기물 문제도 과장되었다 뿐이지 사실 합리적으로 처리가 가능하지만, 그래도 걱정된다면 그 걱정을 하시라고. 당신이 걱정하면서 '핵발전소'를 참아내는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환경 난민들은 웃음지을 수 있다고.


8.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어린 시절에만 그런 게 아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며, 설령 남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해를 끼치지는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포경선을 향해 달려들던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이 자극한 것은 바로 그런 원초적인 참여의 본능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99.99%는 고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고래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 때, 뭔가 올바른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인류 본원의 도덕심은 위안을 받았다.

그린피스는 그렇게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고, 자신들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자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원자력에 수십년에 걸쳐 사악한 에너지이며 죽음의 방사능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이제는 그 낙인을 벗겨내고 현실을 올바로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 지구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화석 연료의 사용량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셰일 가스 로또를 터뜨린 미국은 한번 포기해버린 원전 기술을 복원하는대신 되려 석탄을 캐서 활활 불태우겠다고, 파리 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해 제3세계의 환경 난민에 대한 고민을 집어치우고, 태양광 발전기가 멈추는 밤이면 밤마다 석탄 화력 발전소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중이다.

원자력은 악이 아니다. 화력도 악하지 않다. 다만 현 시점에서, 보다 나은 에너지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를 촉진시키는 화력 발전의 규모를 늘려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모두 간헐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대규모의 화력발전, 특히 가스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태양과 바람의 나라는 사실 석탄과 가스로 돌아간다. 그것은, 도시에 거주하는 선진국 시민들에게는 흡족해보일 수도 있지만, 환경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한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는 재앙과도 같다.

원자력은 안전하다. 그 안전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이미 해두었다. 그래도 정 불안하다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라 지구 어딘가에 사는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원자력이라는, 아직 인류에게 친숙하지 않은 에너지의 사용에서 비롯하는 불안과 막연한 공포심을 참고 견디는 것, 원자력이 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공부하는 것,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쌓여온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한국 같은 발전된 산업 국가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도덕적 에너지 실천이다.

2017-10-01

유시민, '미친놈 전략', 민주주의

지난주 목요일(9월 28일) 방영된 썰전을 보며 매우 당황했다. 북핵 문제에 대해 유시민 작가가 매우 이상한 논리를 아주 힘주어 강변하는 가운데, 박형준 교수가 그것을 제대로 반박하지 않고 지나간 모습 때문이다. 편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청자에게 전달된 바 그렇다.

유시민의 논리를 요약해보자. 김정은은 '미친놈 전략'을 쓴다. 트럼프도 '미친놈 전략'을 쓴다. 그런데 수천 발이 넘는 핵탄두를 가진 미국의 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북한의 지도자를 비난할 도덕적 근거는 희박하다. 둘 다 '미친놈'이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은 당위론적인 정답인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덕과 당위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과 당위를 구분하는 것은 국제 정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미국 네가 뭘 잘한 게 있다고 북한한테만 핵을 포기하라는 거냐'는, 자주파의 기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미친놈 전략'이라는 표현이 가져다주는 착시일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모두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보자.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 나온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절벽을 향해 차를 몰아가고, 브레이크를 먼저 밟는 쪽이 지는 싸움을 한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결국 똑같은 전략적 행위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미친놈 전략'은 '미친놈'을 '나쁜놈'으로 착각하게 할 우려가 있는 반면, '치킨게임'은 이기는 쪽이 대범한 것이고 지는 쪽이 '치킨(겁쟁이)'인 싸움이니 말이다.

아마 트럼프와 김정은 둘 다, 스스로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중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미국의 행동도 바뀔 수 없다. 이것이 미국의 주장이다. 나를 포함해 문재인 정권의 대외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많은 이들도 이렇게 생각한다. 반면 유시민,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 그 외 여권을 옹호하는 이들은 북한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미국이 제재를 가하면 전쟁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경고한다. 뾰족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 빈정거리며, 미국도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양비론을 곁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치킨게임'의 관점에서 지금의 현상을 바라본다면, 유시민 식의 주장이 통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은 한 사람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동의하는 순간 핵 개발을 포기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설령 트럼프가 김정은과 사랑에 빠져서 데니스 로드맨과 셋이 함께 셀카를 찍는다 해도, 핵탄두를 지닌 북한이 ICBM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를 용납할 수가 없다. 북한은 독재국가인 반면 미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공식적인 시스템은 모두 김정은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김정은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거나 제거된다면 핵 개발도 멈출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국은 궁극적으로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상 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다. 물론 정치권의 판단과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정치인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국민이 원하면 전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갖는 '괴물같은 호전성'인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성향을 지닌다. 그런데 전쟁을 해야 할 상황이 오고, 그 전쟁으로 인하여 국민 정서가 자극되기 시작하면, 멈출 수도 없다. 국민이 최종적인 의사 결정을 하는데, '국민 일반'의 판단은 정치권에 비해 훨씬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굉장히 재수없는 엘리트주의자 같은 말을 했는데,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냉전의 설계자이며 궁극적으로 소련을 붕괴시킨 대전략가 조지 케넌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캐넌의 미국 외교 50년』의 한 페이지를 인용해보자.

자기 자신이 전쟁과 평화 중 어느 상황에 처했다고 보는지에 따라 하룻밤 새에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뒤바꾸는 이런 놀라운 능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묘한 특징입니다. 이를테면 엊그제만 해도 우리나라와 다른 강국 사이의 쟁점은 미국의 젊은이 한 명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의 대의는 신성하고, 대가는 고려할 가치도 없으며, 폭력에는 무조건 항복 말고는 어떤 한계도 없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여기에 대한 답을 압니다. 민주주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민주주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의 자극에 느릿느릿 대응합니다. 그런데 일단 자극을 받아서 칼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면, 이제 자극했다는 사실 자체가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화가 나서 싸웁니다 --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싸우는 거죠. 민주주의는 자신을 자극할 만큼 경솔하고 적대적인 강국을 징벌하기 위해 싸웁니다 -- 이 강국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런 전쟁은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조지 F. 케넌, 유강은 옮김, 『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서울: 가람기획, 2013), 180-181쪽. 강조는 인용자.

김정은은 하루아침에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끝낼 수도 있다. 북한의 전쟁 시작과 끝은 모두 김정은 혹은 그에 준하는 수뇌부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달렸다. 북한 주민 2천5백만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트럼프가 처한 상황은 정 반대다. 물론 미국 대통령은 의회나 대법원의 승인 없이 독자적인 결정만으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코드를 가지고 있지만, 트럼프가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미국의 전쟁은 미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미국이 함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훌륭한 안전핀이다.

문제는 그 안전핀이 뽑기 어렵게 고안된만큼, 한번 뽑으면 되돌리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조지 케넌이 말하는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이다. 그가 볼 때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그렇게 깊숙이 휘말릴 필요가 없었다. 미국 국민들의 생각도, 전쟁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다가 막상 미국인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미국의 국민들이 더 많은 피를 보고 싶어하게 되었다. 미국인이 흘린만큼 독일인의 피도 강처럼 흘러야 한다는 분노가 미국을 뒤덮었고, 전쟁은 끝날 때가지 끝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보자. 유시민은 너무도 '상식'인 양,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에 시작된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엉터리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인 이유는 그게 아니다.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불타죽고 떨어져 죽고 건물 잔해에 깔려죽는 것을 보아버렸기 때문에, 뭐가 됐건 '나쁜 씹새끼들'을 처부숴야 했던 복수심이 핵심이다. 당시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던 미국 상하원 의원들, 가령 힐러리 클린턴 뉴욕 주 상원의원 같은 사람은, 내심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보복성 무력행동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이 다들 눈이 뒤집힌 상태였고, 정치권이 국민 여론을 따라간 것이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이다.

심지어 조지 W. 부시와 그의 측근들도 어느 시점에는 이라크에 WMD(대량살상무기)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그런데도 왜 전쟁을 했을까. 석유 때문에 전쟁을 했다, 이런 '진보의 상식'만을 달달 외우고 있는 사람들은 밥 우드워드가 쓴 『부시는 전쟁중』(Bush At War)과 『공격 시나리오』(Plan of Attack), 그리고 『현실 부정 국가』(State of Denial, 번역 미출간)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미 백악관 수뇌부도 빈 라덴에게 테러를 당하고 후세인을 두들겨 패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미국인 전반이 '빡이 돌아있는' 상태였고, 그들 스스로도 '빡이 돌아있는' 상태여서, 눈에 보이는 '개새끼'한테 손에 잡히는대로 폭탄을 집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북한과 미국이 치킨게임을 한다. 누가 꿇어야 하나? 당연히 북한이 꿇어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김정은이라는 '미친놈' 하나만 생각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설령 2020년에 오바마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해도, 미국 국민 전부가 '미친놈'처럼 화를 내기 시작하면 전쟁을 할 수 있다. 조지 W. 부시 개인이나 럼즈펠트와 딕 체니가 전쟁광이어서가 아니라, 9/11을 당한 미국인 대부분이 'mad'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3억명의 미국인 전부가 '미친놈'이 되기 전에, 김정은이라는 한 사람의 '미친놈'이 치킨게임에서 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할까? 일단 미국 정부는 북한인의 입국을 모두 막은 상태지만, 한국 여권 들고 미국으로 잠입한 북한 공작원이 무슨 짓을 하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김정은 정권의 목적은 결국 협상이라고? 김정은 정권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고, 그들 중 누군가는 김정은 정권을 몰락시키기 위해 미국을 자극하는 테러를 감행할 수도 있다. 이건 그냥 '시나리오'일 뿐이지만, 9/11도 터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가능할 줄 누가 알았는가?

북한과 미국, 김정은과 트럼프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김정은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치킨게임에서 지느니 그냥 전쟁을 해버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는 '미국'이다. 트럼프라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평범한 시민들'이 전쟁을 결심하면 이라크에 대량학살무기가 있건 없건 그딴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김정은이 제2의 오사마 빈 라덴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 한국에 미국인이 얼마나 살건 미국남자니 영국남자니 하는 여행객들이 한국 음식 맛있어요 같은 유튜브 영상을 올리건 말건, 삼성전자 공장이 파괴되면 아이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건 말건, 미국은 전쟁을 할 것이다. 저기 잡아야 할 개새끼들이 있는데 아이폰 다음 세대 출시에 지장이 생길까봐 전쟁을 안 한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 분위기에 일단 휩쓸리고 나면, 팀 쿡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미군, 특히 일선에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사병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하고 대도시에 거주하는 리버럴한 고학력 미국인 말고, 소위 '플라이오버 스테이트' 출신의 십중팔구 트럼프 찍었을 저학력 저소득층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보다 전쟁 경험이 많은 나라도 흔치 않다. 우리에게는 전쟁이라는 것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미국은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생각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김정은 정권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 '김정은도 미친놈, 트럼프도 미친놈, 에헤야 모르겠다 전쟁은 안된다' 같은 시골 서당 훈장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여권의 주요 지식인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너무도 우려스럽다. 국제 정치와 안보를 다루면서 '미친놈' 전략이니까 고집하는 놈이 '나쁜놈'이라는 식의 논변이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아닌 진지한 의견으로 여겨지며 TV를 통해 유포된다. 과연 우리에게는 과연 김정은이나 트럼프를 '미친놈'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긴 한 것인가?

2017-09-26

[북리뷰] 북핵 위기, 케인스를 공부할 시간

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저 정명진 역 부글·1만5000원

그 영국 재무부 관료는 1차 세계대전의 뒷수습을 위한 파리평화회의가 자기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전범국들이 끝도 없는 가난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 가운데, 전승국들은 원초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경제학자인 그가 볼 때 턱도 없는 배상을 요구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한 미국마저도 그 복수의 굿판을 방관하고 있는 상황. 그는 공직을 내려놓고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명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그렇게 태어난 책이다. 머리말에서 케인스는 스스로를 3인칭으로 두고 이 상황을 기술한다. "그는 평화조약의 조건을 적은 초안을 수정할 수 있는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아니 유럽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파리평화회의의 전반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근거들이 이 책의 여러 장을 통해 설명될 것이다."(9쪽)

케인스의 주장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보자. 독일은 석탄과 철로 산업을 일으켜 해외 무역으로 돈을 버는 나라다. 그런데 승전국들은 독일에게 석탄을 현물로 내놓고 모든 식민지와 무역용 상선까지 포기하면서 동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갚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능할 때마다 통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가설의 늪에 빠져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독일은 여러 해에 걸쳐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려 외환 보유를 확대할 수 있어야만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176쪽)

독일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므로 수출 산업의 부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경우, 유일한 천연자원이라 할 수 있는 석탄을 판매하거나 현물로 제공하는 것 외에는 배상을 할 방도가 없다. 결국 승전국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합리적 수준의 배상을 위해 독일의 경제 부활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독일 경제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계속 배상을 요구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케인스는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를 예상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으깨버리는 길을 택했고, 독일은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리하게 화폐 발행을 일삼다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버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틈을 타 독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권력을 잡았고, 연합국을 비난하기 위해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자주 거론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성찰하는 이들에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법.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승전국들은 비로소 케인스의 처방을 받아들였다.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벌인 독일을 향해 마셜 플랜을 펼침으로써 경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다. 그렇게 부유하고 평화로운 민주국가로 거듭난 서독은 결국 동독과 다시 하나가 되었다.

독일은 히틀러의 집권 이전부터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한을 향한 경제적 지원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운 반면, 독일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비교적 고르게 분배한 모범적인 복지국가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우리의 현실, 특히 북한을 향한 경제 봉쇄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읽고 공부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국제 정세와 경제적 현실을 아우르며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그려내면서 현실을 과감히 비판하는 지식인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2017.09.26ㅣ주간경향 1245호

2017-09-12

[북리뷰] 현대 문명에 흐르는 검은 피

황금의 샘 1, 2
다니엘 예긴 저·김태유 허은녕 역·라의눈 각권 2만4800원

1911년 여름,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에 임명되었다. 영국은 하루가 다르게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키워가는 빌헬름 황제의 독일에 대응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처칠은 선택을 해야 했다. 해군 함정의 연료를 계속 석탄으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석유로 전환할 것인가?

"그 시절, 영국 군함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석유로의 전환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웨일즈산 석탄 대신,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페르시아산 석유에 의존해야 되기 때문이다. 처칠은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유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풍랑이 심한 바다에 무기를 맡겨놓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연료를 석유로 바꾸면 함정의 속력을 높이고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점이 크다는 점은 명확했다. 결국 처칠은 함정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진했다."(1권 17쪽)

처칠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였지만, 그런 위험을 먼저 무릅쓰고 우수한 해군 함정을 건설하여 영국 해군을 굴복시킨다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산산조각나버릴 테니 말이다. 더 효율적이고 막강한 에너지원이 발견되어버린 이상 영국 뿐 아니라 석유가 나오지 않는 모든 나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처칠은 그의 회고록에 '지배력이란 모험을 무릅쓴 데 대한 상(賞, prize)이다'라고 썼다."(1권 17쪽)

석유 산업 및 국제 정치 경제의 권위자인 다니엘 예긴의 책 『황금의 샘』은 석유가 만들어낸 20세기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내는 대작이다. "석유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20세기를 지배했고, 이 책은 바로 석유의 지배가 일어나게 된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1권, 18쪽)

『황금의 샘』의 원제인 The Prize는 바로 그런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주로 자동차, 비행기, 선박의 연료로 사용되며,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석유화학제품의 원료이기도 하고, 투기의 대상이기도 하며, 수많은 국제 분쟁을 야기하고, 그 가격의 오르내림에 따라 전 세계의 경제가 울고 웃는 단 하나의 상품. 그리고 그것을 확보하는 나라만이 세계의 패권국이 될 수 있는 상급. 그것이 바로 석유이며, 따라서 석유의 역사는 곧 20세기 인류의 역사와도 같다.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존 D. 록펠러는 '수직 계열화'라는 경영의 일대 혁신을 이루어냈다. 석탄을 연료로 쓰는 해군력으로 패권국이 되었던 영국은 석유를 갖지 못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위축되고, 반대로 자국 내에서 석유를 펑펑 뽑아내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편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진주만을 폭격하고 전쟁을 벌여 예정된 패배의 늪으로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지난 7월, 중국은 동아프리카의 요충지인 지부티에 사상 최초의 해외 군사 기지를 가동했다. 석유 수송로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과 일본 입장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중국이 계속 원유를 공급하는 한 북한 봉쇄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세상을 읽으려면 여전히 석유의 흐름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 석유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2017.09.12ㅣ주간경향 1243호

2017-08-29

[북리뷰] 일본의 발전, 그 뿌리를 찾아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 저·뿌리와이파리·1만5000원

'조선은 임진왜란때 망했어야 마땅한 나라다.' 조선의 패망과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 등을 논할 때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망할만한 나라'였다면, 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 일본은 '성공할만한 나라'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는 일본이 오랜 전란 끝에 통일되었던 그 시기, 즉 에도시대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공직을 박차고 나와 우동집 '기리야마 본진'을 차린 것으로 유명한 전직 외교관 신상목의 책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화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로서의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17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내막은 훨씬 복잡하고 의미심장하다. 도쿠가와 가문의 당시 본거지는 슨푸(시즈오카)였지만, 도요토미는 도쿠가와가 교통의 요지에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에도(도쿄)로 쫓아냈던 것이다.

오늘날의 도쿄를 보면 '에도로 쫓아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신들과 함께 자리잡았던 그 무렵, 에도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강 하구 습지에 불과했다. 에도 성이 있었지만 낡아빠진 상태였다. 우물을 파면 소금물이 나오는 그런 척박한 땅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괴롭힘에 굴하는 대신 가신들과 철저히 단결하여 에도를 발전시켰다. 치수(治水) 사업을 통해 "1)인공의 물길을 뚫고, 2) 자연 물길의 흐름을 바꾸고, 3) 수면을 메워버리는 대토목공사"(36쪽)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렇게 척박한 에도를 교통과 상업의 허브이며 옥토로 바꾸는동안, 부질없는 전쟁에 몰두한 도요토미는 몰락하고, 버려졌던 땅 에도를 기반으로 삼아 발전시킨 도쿠가와 가문이 패자가 되었다. 에도시대는 계획도시 에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출현 과정을 조선왕조의 건국 이야기와 비교해보자. 이성계는 풍수지리에 능한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쩔 수 없이 자리잡은 터를 본인과 신하들의 힘으로 '개척'해내고 기반으로 삼았다. 건국 영웅담의 이면에 작동하는 사고의 체계부터 이미 확연히 다르다.

한층 더 대담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이른바 '자생적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조가 청계천 준설 공사를 벌인 것을 '조선판 뉴딜 정책'이라고 칭하곤 한다.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일본의 '자생적 근대화'는 에도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다시 말해 우리보다 약 170여년 빨랐다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에도 개척의 역사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가장 앞부분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낯설지만 우리의 한반도 중심 세계관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막연한 거부감과 우월감만 앞세우던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합병당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면, 우리가 잊지 말고 배워야 할 역사는 '우리'의 역사만이 아닐 것이다.

2017.08.29ㅣ주간경향 1241호

2017-08-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환경주의의 다양성

환경주의는 넓은 개념이다. 가령 최초의 동물 보호 운동을 벌였던 것은 사냥꾼들이었다. 자신들이 사냥을 하다보니 생태계 균형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환경주의자'는 반드시 '탈원전'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환경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으니 말이 나온 김에 분류를 해보기로 하자.

1) 반인간적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만약 위 문장에서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굉장히 극단적인(혹은 '래디컬'한) 입장인 셈이다. 영화 〈12 몽키즈〉에 나왔던 것처럼,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그런 반휴머니즘적 환경주의의 길을 택하는 것이니 말이다.

2) 문명 퇴행을 수용하는 환경주의: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길어진 기대 수명, 풍요로운 식생활, 청결과 위생,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구조, 법치주의 등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래야 하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반 문명적' 태도에서 환경주의를 주장하는 셈이다. 이웃간에 정감 넘치는 생활을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철학자' 강신주 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함께하는 진보 진영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는 생각이다.

3) 현대 문명과 함께하는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하는 대신, 우리가 가진 과학과 문명의 도구를 최대한 발전시켜야 하는가? 나를 포함해 원자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환경주의자들이 택하는 입장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서비스와 풍요를 누리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그 활용도를 더 높여야 한다.

현재 '탈원전' 논의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2)에 속하는 이들이 3)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일에 너무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3)에 속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2)는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방사능 공포를 부추기면서,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벌어질 기후 변화의 충격을 나몰라라하는 이기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일종의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할까?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 그리고 우리의 솥단지

우리가 누리는 풍요를 그들이 누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환경주의의 이름으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우리는 개발도상국이 급격하게 화석 연료의 사용을 늘림으로써 기후 변화의 충격이 더욱 강하게 몰아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도 안 된다. 결국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기저부하를 공급할 수 있는, 현재로서의 유일한 해법인 원자력 발전을 더욱 확장하는 것만이 해법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누렸던 행운도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재획득했고, 그렇게 얻은 정치적 동력을 바탕으로 영남권의 공업 단지에서 요구하는 전력 수요에 따라 해당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를 대거 건설할 수 있었다.

오늘날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도시 거주민들은 원전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결국 문재인 정권의 급격한 탈원전 드라이브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표심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대체 왜 해당 지역에 그렇게 원자력 발전소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지역에 대한민국의 핵심 중공업 단지가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공업 단지들의 존재로 인해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은 높은 경제 수준을 향유하고 있으며, 더불어 대한민국의 경제도 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고리1호기를 내팽개쳤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우리가 수십년 동안 밥을 해먹은 솥단지인 것이다.

아무리 원전이 싫고 미워도 그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말자.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24시간 생산해내는 원자력의 힘으로 대한민국은 가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문명화된 삶을 누리고 있다.

선진국 환경주의자들의 이기적 폭력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에너지 복지를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전지구적 기후 변화가 세계인들의 거주지를 뒤흔들고 건강과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지금, 원전을 포기하자는 주장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가.

무턱대고 방사능의 공포를 외치며 반대하는 그런 식의 환경주의는 1960-70년대 가장 풍요롭고 잘 살던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너무도 당연했기에 그들은 자발적 가난을 칭송했다. 단 한 번도 굶주려본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거리낌없이 녹색혁명을 비난하고 화학비료의 사용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환경을 위해서는 인류의 숫자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멜서스주의적 세계관 역시 그 무렵 환경주의자들이 유포한 것이다. '인구 폭발'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도덕적 당위인 양 포장되면서, 서구의 임신중절기술이 한국, 중국, 인도 등의 개발도상국에 도입되었으며, 그 결과 무수한 여아들이 선별낙태당했다.[1] '에너지 사용을 늘리지 말고 인구를 줄이자'는 발상은 이토록 반인륜적이다. 줄어드는 '인구'는, 당연히,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자들은 반성하고 있다. 〈판도라의 약속〉에 출연한 마크 라이너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통스럽게 실토한다. 환경주의자들이 무턱대고 원자력에 대한 증오심만을 불러일으킨 결과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력발전의 공해로 목숨을 잃었다고. 환경주의자들은 그러한 판단 착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더 이상 원자력혐오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한 사람, 1960-70년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창시자 중 하나인 스튜어트 브랜든은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도시화를 반대하고 시골 생활이 좋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정작 시골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는, 내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환경주의자가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전혐오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생각을 직접 만들어낸 사람이기에, 그것을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또 바꿀 수 있었으리라.

지구를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방법론이다.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충분히 풍요로운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라면 냉장고를 없애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먹자는 소리를 할 턱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환경을 걱정한다면서 사람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그런 환경주의에 나는 반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이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말이다.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떠냐'고 으스대거나 '에어컨 안 틀어도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가진 자의 여유일 뿐이다. 그 몇 푼의 전기요금도 내지 못해 여름에는 헐떡이고 겨울에는 덜덜 떠는 그런 이들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와 에너지 정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건 보수라고 생각하건, 더 많은 이들이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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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구 폭탄'론의 유포, 아시아권을 향한 서구의 산부인과 기술의 급속한 전파, 그로 인한 여아 선별 낙태에 대해서는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를 참고. 이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은 「주간경향」 1151호(2015.11.17)에 게재되었으며,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2017-08-15

[북리뷰] 현해탄의 군함도, 오호츠크해의 게공선

게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저·양희진 역·문파랑·1만원

『게공선』은 1929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될 때부터 화제를 불러모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걸작이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부터 새삼스레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책의 말미에 붙은 번역자의 말에 따르면 게공선의 새로운 바람은 "일본 매스컴이 일본 사회의 빈곤 현상을, 워킹 푸어(Working Poor)와 〈게 공선〉의 작품 세계를 연결해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196쪽)다고 한다. 그 열풍은 『88만원 세대』의 출간을 계기로 청년들의 빈곤 문제에 대해 논의가 한창이었던 한국으로도 이어졌다. 나는 그때 이 책을 한 번 읽었고, <군함도> 논란이 뜨거운 지금 다시 펼쳐들었다.

책으로 들어가보자. 1920년대 일본, 홋카이도의 도시 하코다테(函館)에서 게잡이 공선 하쓰코호가 출항하는 장면에서 작품은 시작된다. 공선(工船)이란 수산물 가공 설비를 갖추고 있는 어선이다. 가령 참치캔 같은 어류 가공품의 상당수가 공선에서 만들어진다. 공선에서 곧장 어류를 가공하면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고 제품을 보관하기에도 용이하다. 하지만 『게공선』에서 말하는 바, 당시 공선을 운용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 공선은 '공장선'으로 '선박'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는다."(41쪽) 그 결과 하쓰코호는 선장이 아니라 노동자를 관리하는 감독이 지배한다. 하지만 바다에 떠 있기에, 혹은 작품 내에서 설명하지 않는 다른 이유로, 게 공선은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은 달리 없었다."(42쪽)

어선이면서 공장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어선이 받아야 할 규제도 공장이 받아야 할 규제도 받지 않는 치외법권. 그것이 게 공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 착취는 일본 제국의 경제적 성장과 궤도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 "내지에서는, 노동자들의 힘이 커져서 무리하게 일을 시킬 수 없게 되었고, 시장도 대부분 개척해버리자, 자본가들은 '홋카이도, 사할린으로' 갈고리 같은 손톱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와 똑같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노동자를 '혹사'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자본가들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83쪽)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름이 아니라 특징으로 기술되는 익명의 노동자들은, 스스로 연대하고 투쟁하는 법을 배워나가 동맹파업에 이른다. 자신들의 편일 줄 알았던 해군이 오히려 파업을 진압하는 광경을 목도하며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같은 편이 없어. 이제야 알았다"(180쪽)고 절규한다. 그리고 또 다른 투쟁을 결의하면서 작품이 끝난다.

식민지 뿐 아니라 자국의 하층민들 역시 일본의 자본주의는 철저히 착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저항은 제국주의적 무력으로 억눌렀다. 『게공선』은 단 한 줄의 '이론적' 서술도 없이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는 자본의 원시축적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그려낸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덧붙이는 말>에서 "이 한 편의 글은 '식민지에 있어서 자본주의 침입사'의 한 페이지이다"(185쪽)라고 말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은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횡포와 뒤엉켜있다는 사실을 1929년의 그는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보다 섬세하게 입체적으로 심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군함도>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게공선』을 다시 거론하게 되는 이유다.

2017.08.15ㅣ주간경향 1239호

2017-08-10

여성의 폭력과 법 앞의 평등

나의 검열삭제 경험담

2016년 10월 11일의 일이다. 경향신문 오피니언팀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오피니언팀을 담당하던 부장님 전화였다.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고소위원회에서 8월 1일자 칼럼 "'물뽕'과 부동액"에 대해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시정 권고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된 문단을 삭제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이다.

2008년 무렵부터 신문 지면에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언론중재위원회의 연락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이미 작성한지 두 달이 넘은 글을 두고 무슨 소리냐 싶었다. 나에게 거부권이 없는 상황이므로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검열삭제'를 경험한 것이다. 성행위를 뜻하는 은어로서의 검열삭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생각과 말을 제약당하는 검열삭제 말이다.

그렇게 잘려나간 문단은 다음과 같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경향신문, 2016년 7월 3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312051005&code=990100#csidxbdbdec283bdaff7aafb36493d4a385b 삭제되지 않은 원문은 내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basil83.blogspot.kr/2016/08/blog-post_4.html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저 고급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자동차 부동액은 무색무취하기 때문에 타인을 독살하기에 아주 좋다는 정보는 SBS의 인기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한편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서 저런 논의가 오간다는 사실은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가령 이런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말이다.

‘부동액 커피’ 사건은 지난 6월 워마드에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용어)을 재기시켜도(죽게 해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이거 먹여라’는 글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이 글에는 1일 1회 5ml씩 희석해서 먹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명시돼있으며 부동액은 마트에서 구매할 때 현금 결제를 해야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당부도 담겨 있다.

전종선, “남성에 부동액 타 먹였다” 워마드 경찰 수사 착수에 네티즌 “암덩이들 도려내야”, 서울경제, 2016년 7월 28일. http://www.sedaily.com/NewsView/1KZ1J58KL3

이제 두 문단을 비교해보자. 내 칼럼에 실렸다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권고를 받고 잘려나간 문단과, 아직도 인터넷을 통해 잘 남아있는 위 기사의 문단에서, 정보의 차이가 있는가? 1일 1회 5㎖라는 구체적인 용량까지 동일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당시 쏟아져나온 수많은 언론 보도를 보고 저 칼럼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언론중재위원회는 내 칼럼을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똑같은 내용이 담긴 다른 기사들에 대해서는 시정 권고 조치를 내리지 않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위 기사를 포함해 당시 워마드의 게시물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언론 보도는 워마드를 '꾸짖는' 것에만 중점을 두고 있었던 반면, 내 입장은 달랐기 때문이다. 삭제된 문단을 포함한 전문을 다시 올려보도록 하겠다. 검열삭제된 문단은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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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2015년 11월 중순, 서울 성동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단강간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소라넷에 올렸다. 술 혹은 약물에 의해 정신을 잃고 벌거벗은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작성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라를 잘 안 해서 랜덤 채팅 양톡으로 여태 3분 정도 와서 질사하고 가셨는데 ㅋㅋ 오늘은 소라에서 한번 해볼까요?”

‘골뱅이’란 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을 뜻하는 은어다. ‘왕십리 골뱅이’의 작성자는 첫 게시물을 올리고 11분 후 두 번째 글을 업데이트했다. 역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줄 서봅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중이었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지만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과는 다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한남(한국 남자)을 재기(사망)시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달린 가상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흔한 ‘인증샷’도 없이 인터넷에서 그냥 하는 소리, 시쳇말로 ‘드립’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부동액 섞인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원인이 밝혀지면서 실제 범행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 범죄의 정황이 없지만 경찰은 일단 수사를 개시했다. 허위 게시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공권력은 작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2015년 11월, 인터넷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던 활동가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을 신고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가 단체인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팀이 공개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담당자는 “요거를 전체적인 댓글이나 글 게시된 걸 분석해 보니까 범죄혐의는 전혀 없”다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장난한 것 같애요. 이 소라넷 사이트 이용하는 애들이~ 반응 보려고~.”

설령 농담이라 해도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이자고 모의하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전복적 발화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런 ‘미러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누군가 먹였다는 제보를 받은 공권력이 그것을 장난으로 간주해버리는 것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는 발화자들의 개인적 존엄 및 품위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얼마나 공정하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두고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왜 여자가 남자에게 부동액을 먹였다는 신고와, 남자가 여자에게 ‘물뽕’을 먹였다는 신고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이토록 다른 것인가? 전자는 살인이지만 후자는 성범죄이므로 범죄의 무게가 달라서라면, 경찰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저년 배를 칼로 쑤시겠다,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식의 살해 협박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 오는 그녀를 함락시키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버젓이 데이트 강간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겠다고 하면 ‘농담’이라고 대충 넘어가면서,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말을 하면 곧장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뽕’과 부동액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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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죽이러 가겠다'는 경범죄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2017년 8월 현재까지도 법 앞의 평등이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8월 9일 새벽, 아프리카 BJ 김윤태는 생방송을 진행했다. 유튜브 스트리머 갓건배의 집 주소를 알았다며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경기도 부천, 서울 성북구 둘 중 하나라며 차를 타고 나가던 그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7000여 명에게 중계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여,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울 성북경찰서에만 이날 새벽 1시30분께부터 총 3차례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해당 BJ는 스트리밍을 하면서 "그 주소에 갓건배가 살지 않아도 여성이라면 목졸라 죽이겠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것이 방송을 본 이들의 증언이다(링크). 특정한 피해자의 신원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분풀이 삼아 여성을 살해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표명하였고, 어떤 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여 현장으로 향하던 중이다.

과연 이 사람에게 형법상 살인예비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관련된 대법원 판례(2009도7150)는 다음과 같다.

형법 제255조, 제250조의 살인예비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형법 제255조에서 명문으로 요구하는 살인죄를 범할 목적 외에도 살인의 준비에 관한 고의가 있어야 하며, 나아가 실행의 착수까지에는 이르지 아니하는 살인죄의 실현을 위한 준비행위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준비행위는 물적인 것에 한정되지 아니하며 특별한 정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범행의 의사 또는 계획만으로는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보아서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

김윤태가 흉기를 준비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집에 갓건배가 살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를 목졸라 죽이겠다'고 발언했다. 흉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갓건배를 살해하겠다는 의도가 없었고, 살인의 준비 행위가 없었다고, 확실히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방송을 보는 이들로부터 제보를 받아 갓건배가 살고 있을법한 위치를 좁히고 실제로 차를 타고 나갔다는 사실은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가?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태는 "한 파출소로 임의동행돼 아침까지 조사를 받았고, 경범죄처벌법상 '불안감 조성' 행위로 범칙금 5만원 통고처분을 받고 귀가했다." 경찰은 이 사건이 "형사과로 넘기기에는 사안이 경미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시킨 후 귀가시켰다"고 설명했다."(이효석, ""죽이러 간다" BJ 생방송에 경찰 수사 소동…BJ에 범칙금 5만원 ", 연합뉴스, 2017년 8월 10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8/10/0200000000AKR20170810151500004.HTML)

설령 백번 양보해서 김윤태의 방송 행위가 살인예비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미 지난달 벌어진 '왁싱샵 살인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소위 '1인 미디어'가 생산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폭력은 쉽사리 전염되기 때문이다. 김윤태의 방송을 보고 '나도 갓건배 죽이러 가겠다'고 나설 사람이 과연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작년 8월에 쓴 칼럼이 10월에 검열삭제된 사건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래서이다. 한국 사회와 그 사회의 법 체계는, 여성의 일탈에 유독 민감하고, 더 강한 처벌의 잣대를 들이댄다. 실제로 처벌이 불가능하다 싶어보여도 일단 경찰 수사를 해서 겁을 준다. 반대로 남성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을 휘두르면 가장 엄격한 죄형법정주의와 절차중심주의를 통해 최대한 그 벌을 가볍게 한다.


여성들이 법 앞의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앞서 내 칼럼의 소재가 되었던 워마드 부동액 사건을 되짚어보자. 부동액을 먹고 사람이 죽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었다면 경찰이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대략 알면서도 겁주기용으로 워마드 수사에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반면 인터넷을 통해 남자들이 '인증'하려고, '리플' 받고 관심 끌려고 범죄 모의를 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일은 심심찮게 벌어진다. 가령 지난 2월, 일간베스트(일베)에 자신을 39세 일용직 노동자라고 밝힌 누군가가 선화예고 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해당 학교는 2월 5일까지 임시로 학교 시설을 폐쇄했고, 서울 광진경찰서는 학교 인근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며 게시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방송을 하는 BJ의 행동이 범행을 불러온 사례가 최근에 또 있었다. 7월 초 한 남성이 왁싱샵에서 홀로 일하던 여성을 찾아가 살해하고 금품을 챙기며 강간까지 시도했던 사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는 한 유명 BJ가 피해자의 가게에서 브라질리언 왁싱 시술을 받는 것을 소재로 한 자극적인 영상물을 보고 범행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서울 역삼동 주택가에서 대낮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여성이기에 당하는 폭력이 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남성의 폭력을 모방하여, 남자들에게 뭐가 폭력인지 가르쳐주기 위한 어떤 퍼포먼스가 있다. 그런데 법은 양자를 똑같이 '폭력' 취급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법의 눈이 둔감하다고, 남성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 언론중재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당한다. 그것이 내가 작년 10월에 겪었던 일이다.

2016년 강남역에서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졌지만, 2017년에는 역삼역 인근에서 혼자 일하는 여성이 살해당한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이들이 한 여성을 붙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어도 고작 범칙금 5만원 처분을 받는다. 법 앞의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2017-08-09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탈원전과 핵잠수함, 쌀밥과 파스타

유럽 선진국들이 앞장선다는 그 '탈핵'. 특히 대대적인 탈핵 실험을 진행중인 독일이 많이 거론되며, 스위스도 가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국내 언론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도 그렇고 스위스도 그렇고, 탈원전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나라들은 핵잠수함 도입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사방이 내륙인 스위스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U-보트로 영국과 미국의 해군을 쩔쩔매게 만들었던 독일 역시 핵잠수함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핵잠수함이란 가압형 경수로를 탑재한 잠수함이기 때문이다. 즉, 탈핵과 핵잠수함 도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탄수화물 줄이기 위해 쌀밥 끊고 파스타 먹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라는 게 있습니다

지난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어때서?'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주제파악을 못하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대중적 인식과 청와대의 의사 결정 수준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핵잠수함을 보유한 나라, 그리고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그것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핵잠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핵탄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NPT 공인)
핵탄 보유 선언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
핵탄 보유 추정국: 이스라엘

뭔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핵확산금지조약(NPT)상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다섯 나라는 모두 핵잠수함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들은 동시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퀴즈.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어떤 나라들일까?

정답: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아주 간단한 문제다. 왜 어떤 나라는 핵을 가져도 되고 어떤 나라는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지 아닌지 감시를 당해야 하는가? 인류가 마지막으로 겪은 전면적 국제전에서 만들어진 세계 질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 질서를 이겨내고 싶다면, 인도나 파키스탄 혹은 북한처럼 국제적 고립과 제재를 감수하고 NPT에서 탈퇴해가면서 핵무기를 만들거나, 3차 세계대전을 벌인 후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고사하고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심지어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 식자층은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도 몰랐기 때문에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타령을 하고 있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미국 앞에서 핵무기 타령하지 말라

핵무기 보유의 국제정치학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한국이 돈 좀 벌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다고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안 되나?'라고 하는 행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에 어떻게 보일까? 아파트 한 채 샀다가 값 올랐다고 수백억 수천억 부자들 앞에서 돈자랑하고 '나 무시하냐?' 이러는 강남 중산층처럼 보이지 않을까?

주제 파악을 좀 하고 살자는 소리다. 우리는 기껏해야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력을 갖춘 나라고, 그나마 1인당 구매력 기준으로 놓고 보면 선진국 클럽에 들어가기에는 체급이 딸리는, 태평양 북서쪽에 붙은 자그마한 사실상의 섬나라일 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좀 팔리고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히트 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싶은데, 현재 대한민국은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강국의 반열에 들 수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나라들이, 최소 20%에서 최대 90% 이상 농축한 우라늄-235을 연료로 쓰는 가압형 경수로를 잠수함에 탑재하면, 그게 바로 핵잠수함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도 돈 좀 벌었으니까 어깨에 힘 좀 주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소리들을 하는구나 싶다.

군용 원자력 잠수함이지만 군사 목적의 원자력은 아니라구요

핵잠수함은 원자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무기다. 원자력 잠수함이 연료 보급 없이 긴 시간 작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우라늄-235를 농축시켜야 한다. 핵탄두를 만드는 것과 원자력 잠수함 연료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핵탄두를 가질 수 없는 나라는 공개적으로 핵잠수함을 가질 수도 없다. 그리고 201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한 핑계를 대면 우리가 핵탄두(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국제 사회가 용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핵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추진력으로 사용할 뿐이니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문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를 막론하고 보이는데, 한미원자력협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 제13조를 읽어보자.

제13조
폭발 또는 군사적 적용 금지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및 구성품과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에 이용되었거나 이러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의 이용을 통하여 생산된 모든 핵물질, 감속재 물질, 또는 부산 물질은 ①핵무기 또는 어떠한 ②핵폭발 장치, 어떠한 ③핵폭발 장치의 연구 또는 개발이나 어떠한 ④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지 아니한다.

해군과 정부, 그리고 청와대 및 야권의 핵무장론자들은 우리가 잠수함에 탑재하는 것이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일 뿐이므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 조항의 문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폭발하는 방사성 물질과 그 연구 개발은 ①에서 ③까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터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군사적 활용'은 ④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군용 잠수함은 군사적 목적으로 움직인다. 군함이기 때문이다. 그 잠수함에 들어가는 원자로가 ④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대놓고 한미원자력협정을 어기겠다는 소리를 지금 대통령 포함 해군과 정치권에서 마구 하는 중이다. 한때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다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갖는다니까 핵잠수함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라고 완곡어법을 써가며 옹호한다. 미국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장난하냐?

눈앞의 북핵을 핑계로 언젠가 완성될 비밀 핵개발?

북한의 핵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북한의 미사일이 한반도에 떨어지기 전에 격추시키는 종말고고도지역방어시스템, 즉 사드(THAAD)가 필요하다. 이미 '임시 배치'되어 있지만 몇 기 더 배치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이 우리에게 핵을 쏜다면 즉각적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는 확실한 위협 수단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자체적인 핵무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에 입각해 미국의 전략핵무기를 다시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해보지도 않은 '자체 핵개발'을 대응책으로 제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도외시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배치할 수 있고, 확실히 날아가서 터진다고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전술핵 배치야말로 '대북 억제력'으로서 유의미하다. 원자력 잠수함을 설령 몰래 만든다 한들 그걸 언제 완성할 것인가? 핵잠수함을 국제 사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들어서 몰래 실전 배치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억지력이 필요하면 한미동맹에 기반해 미국의 전략핵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주체적 핵개발' 좋아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놓자고 하면 또 드러눕고 난리 피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자력 잠수함 추진에 대해서는 별 말 없던 온갖 '평화 지킴이'들이 드러눕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무궁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고 싶다는 군국주의적 열광

자체적 혹은 '주체적'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1990년대, 한국 사회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버블 호황기' 비슷한 것을 누리던 시절, 상업화된 민족주의적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퍼져나간 군국주의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풍 열광이 몰아닥쳤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핵무장마저도 '재평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핵무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긍정적 인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자는 뜻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데프콘』 같은 대중적 소설이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군국주의적 열광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걸 일본에게 쏜다 해서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모든 국민의 삶은 군국주의로 인해 피폐해질 것이다. 마치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삶도 황폐해졌듯이 말이다.

무궁화 꽃은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풍요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으로 향하는 첫 단추인 원자력 잠수함에 집착하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핵폭탄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무궁화 꽃을

정부는 원전 폐로 등에 연구를 집중하고 소형모듈원전 등 차세대 원전의 개발을 뒷전으로 미룰 태세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가는 선박용 원자로는 만들고 싶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원자력 잠수함을 정 만들고 싶다면, 민간용 원자력선인 무츠를 만들어서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했던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탈핵합니다! 그런데 핵잠수함 만들고 싶다 핵 핵핵핵' 하는데 미국이 대체 왜 한미원자력협정을 바꿔준단 말인가? '사우스와 노스 모두 코리아는 핵에 미쳤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핵폭탄을 가진 가난한 나라. 북한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거부해야 한다. 신고리 5, 6호기는 마저 짓고, 4세대 원전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체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깨끗하게 접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도록 하자. 그것이 평화와 번영의 길이다.

2017-08-06

발전소, 잠수함, 핵탄두

'탈핵'을 선언하고 착공한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를 멈춘 나라가 있다. 그런데 그 나라는 한 차례 전쟁을 겪었고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휴전'중인 적국에서 핵탄두와 미사일을 개발하는 안보 위협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2017년 8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3자의 시각으로 생각해보자. 원자력 발전소를 짓겠다고 대통령이 선언하고 국내에서 설왕설래가 오가는 가운데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그 원자력 잠수함이 핵탄두를 가진 미사일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의아한 소리이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핵탄두를 해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원자력 발전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땅 위의 경수로는 반대, 물 속의 경수로는 찬성?

월성 1, 2, 3, 4호기를 제외하고 나면 현재 건설되어 있는 모든 발전용 원자로는 가압경수로다. 그런데 원자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최초의 가압경수로는 미 해군에 의해 개발되었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호에 탑재되었다. 원자로와 직접 닿는 고압의 냉각수가 열교환기를 통해 2차 계통의 물에 열을 전달한다. 그렇게 발생된 증기로 발전기를 돌리면 가압경수로가 된다. 반면 그 증기로 잠수함의 스크류를 작동시키면 원자력 잠수함인 것이다(프랑스에서는 원자로로 발전을 하여 그 전기를 이용해 추진력을 얻는 형태의 원자력 잠수함도 운용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가동중인 발전용 원자로 중 대다수는 원자력 잠수함에 실리는 원자로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탈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건설중인 가압경수로 원전의 공사를 멈추면서, 똑같이 가압경수로가 들어가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자는 논의를 하는 정부는, 원자력의 안전성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땅 위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는 비행기가 들이받아도 꿈쩍하지 않는 철근 콘크리트와 철판 등으로 차폐벽을 둘러싼다. 애초에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바깥에 건설되어 있으며 ('임시 배치'된) 사드에 의해 보호받는다. 반면 원자력 잠수함은 군사 작전에 투입되는 함정이기에,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위험성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원자로'를 줄이겠다고, 없애겠다고, 짓던 것도 안 만들겠다고 '탈핵 선언'을 한 대통령이, 어떻게 동시에 '원자로'를 바닷속에 풀어놓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한반도에서 발생한 적도 없는 진도 7.0의 강진이 정확히 원자력 발전소를 강타할 가능성을 운운하는 환경주의자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이 도입하겠다는 원자력 잠수함이 북한의 어뢰나 기뢰에 맞아 폭파될 가능성은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심지어 러시아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는 딱히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관리가 부실했던 어뢰의 폭발로 침몰한 바 있다). 과연 우리는 최소한의 상식적 기준을 가진 상태로 '탈핵' 논의를 하고 있긴 한 걸까.


군사용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니?

북한이 핵탄두를 개발했다는 이유로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겠다는 논리는 더더욱 이상하다. 북한의 핵개발이 문제인 이유는 원자폭탄을 보유한 국가의 숫자와 핵탄두의 수량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우리는 우라늄-235를 20%미만까지 농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당연한 전제 조건이 따라붙는데, 그것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니 원자력 잠수함을 만들어도 그것은 평화적 이용이다'라는, 딱 들어도 세계가 납득할 리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부에선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핵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저농축우라늄(우라늄 235 동위원소가 20퍼센트 미만)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유철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군사적 목적으로는 (핵)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방지하는 차원이고 우라늄 농축의 20% 이하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발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협상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 문구 해석을 놓고 양국이 상당 기간 갈등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핵잠수함은 핵무기가 아니고 핵연료로 추진하는 잠수함일 뿐"이란 논리가 미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얘기다.

강기헌, "한국형 핵잠수함 가능한가…기술력은 충분, 안정적인 핵연료 확보가 관건", 중앙일보, 2016년 8월 30일. http://news.joins.com/article/20523425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규정상 비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사용은 핵사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원자력 잠수함을 '비군사적'이라고 우기고 있다면, 은밀함이 생명인 원자력 잠수함에 대해 IAEA의 핵사찰을 허용해야 한다. 같은 기사를 좀 더 인용해보자.

IAEA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라도 원자력 관련 시설을 사찰할 수 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이런 상황까지도 펼쳐질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사전 통보 없이 IAEA 직원이 한국을 찾아온다.
"핵잠수함 핵연료 전용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잠수함이 어디에 있나요?"(IAEA 직원)
"글쎄 그걸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해군)
핵연료 사찰을 거부하는 건 IAEA 규정 위반이다. 그렇다고 사찰을 받아들여 핵잠수함의 위치가 노출된다면 '은밀성'이 깨지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자체적 핵무장을 추진하는가?

반대로 군사적 목적임을 솔직하게 밝힌다면 IAEA의 핵사찰을 받지는 않겠지만 한미원자력협정 위반이다. 그러한 행위는 북한만 몰래 핵개발 하는 '불량국가'인 줄 알았던 전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이미 2004년, 노무현 정권 시절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두고 논의가 오갈 때, 지적되었던 부분이다.

결국 한국이 저농축이든 고농축이든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잠수함을 추진한다는 것은 단순한 ‘해군력 강화’가 아니라 그대로 ‘핵무장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물질 보유량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북한 핵 위기’가 일어났듯, 한국의 핵잠수함 추진은 ‘남한 핵 위기’로 비화될 공산이 크다. 이쯤 되면 비핵화선언은 신경 쓸 거리도 못 된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1990년대 이후의 모든 논의는 한국의 핵잠수함을 둘러싸고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 한국이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의혹 국가 명단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미국 입장에서도 핵무장은 동맹 파기를 고려할 만한 사안. UN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에 대한 제재를 결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이 입게 될 정치·경제·안보적 손실은 추산이 불가능할 것이다.

황일도, "한국 핵잠수함 보유, 무엇이 문제인가", 신동아, 2004년 3월호.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3221/3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핵잠수함을 만들겠다는 소리는, 북한이 국제 사회의 문제아니까 우리도 문제아가 되고야 말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이고, 그렇게 해석할 것을 알면서도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운운한다면 그거야말로 '핵무기 마피아'의 일원임을 자백하는 꼴이다.

문제는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원자력 정책의 방향이 바로 그렇다는 데 있다. 평화적 목적으로 쓰이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신고리 5, 6호기는 짓다가 말고 공론화를 벌인다. 그러면서 군사적 목적일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한다고 분위기를 띄우면서, 결국 자체 핵무장을 하겠다는 속내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토록 한다.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북한의 핵무기보다 한국의 원전이 위험하다는 사람들

북한은 자타공인 국제 사회의 골칫거리다. 주민들이 굶주리고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핵무기를 개발해왔고 이제 완전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내부 엘리트들도 치를 떠는 공포정치로 체제를 유지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는 그 북한에 원유 등 핵심적인 자원을 제공하고 무역을 통해 달러를 공급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최근에만도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습 사건, 연평해전 등을 저지른 바 있다. 그들 말로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원한다고 할 뿐이지만, 지속적으로 한국의 재산 및 군인과 민간인들을 공격해왔다. 아직도 북한에는 납치되어 구금된 일본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핵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북핵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다. 사람을 죽이고 해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무기'를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집단의 손에 핵탄두가 들려있지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미국이 북한을 몰아세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핵개발을 했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긴 하니 일단 사실로서 인정하긴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들 가운데 문재인 정권의 탈핵 선언과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에 반대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핵무기는 위험하다. 특히 위험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 반면 원자력 발전소는 위험하지 않다.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망자 수를 비교해보면 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에 따라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하는데 사망자가 나오는 비율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석탄(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 440명.
수력(세계 평균) 1400명.
원자력(세계 평균) 90명(체르노빌, 후쿠시마 포함).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최악의 원전 참사'를 다 더해도, 원자력 발전은 지붕에 설치하는 친환경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을 제외하고 미국 내에서의 사망자만을 꼽는다면, 1조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 0.1명이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전력 공급원은 원자력이다. (출처: James Conca, "How Deadly Is Your Kilowatt? We Rank The Killer Energy Sources", Forbes, 2012년 6월 10일. https://www.forbes.com/sites/jamesconca/2012/06/10/energys-deathprint-a-price-always-paid/#2398b939709b)

그런데 대체 왜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로 행동할까? 가장 안전한 발전 수단인 원자력은 위험하다고 '탈핵'하자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핵무장으로 향하는 첫 걸음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의가 대체 무엇일까?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평화의 원자력을 버리고, 위험하고 가난하며 고통스러운 자체 핵무장과 국제적 고립의 길로 향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칼을 쳐서 보습을, 핵탄두를 연소시켜 발전을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폭발시켜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원자로에 넣어서 연소시켜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농축된 우라늄-235 혹은 플루토늄-239를 원자로에 넣고 천천히 분열시킴으로써, 모두에게 유익한 에너지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핵탄두 해체인 것이다. 성경 구절에 나오듯,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미가 4:03)드는 평화의 이상 그 자체다.

실제로 미국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현재 생산중인 전력 중 10% 가량이 노후된 핵탄두를 연료로 삼아 나오고 있다. 그 많은 핵무기를 다 유지하는 것도 부담이 되는 일이고, 아무 이유 없이 터뜨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핵탄두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도 이와 같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북한이 핵을 개발해놓으면 우리가 그것을 손에 넣어 '민족의 힘'을 보여준다는 망상이 넘쳐났지만, 그것은 한낱 망상일 뿐이다.

우리는 북한이 아니다. 우리는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중요한 플레이어이며 세계 10대 규모의 교역 국가다. 만약 대한민국의 손에 북한의 핵탄두가 들어온다면, 그것이 들어갈 곳은 오직 원자로 뿐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평화적 목적의 발전용 원자로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 유명한 사진을 보자.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발전소를 지어줘도 냉각탑을 폭파시켰던 북한은, 밤이 되면 불이 켜지지 않는 암흑의 국가다. 반면 우리는 일본보다 먼저 원자력공학과를 개설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온 평화의 원자력 국가다. 이 차이가 바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원자력이라는 자연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무기로 쓰느냐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쓰느냐에 따라, 두 나라의 오늘이 이토록 달라진 것이다.

북한의 핵탄두가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로 사용하는 그날, 북핵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바로 그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현 정부는 정 반대의 원자력 정책을 펴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를 경계하라

고리1호기를 방사능 괴물이라도 되는 양 쫓아내며 문재인 대통령은 자뭇 비장한 표정으로 '탈핵'을 깜짝 선언해버렸다. 수십년 간 우리 산업과 가정의 에너지를 책임져온 솥단지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선포한 셈이다. 그러더니 북한을 핑계로 대신 칼과 창을 만들겠다고, 누가 봐도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전초 단계인 원자력 잠수함 건설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 정권의 탈핵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은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는 이들을 향해 '원전 마피아'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들 아닌가?

양자는 줄곧 혼용되어왔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시피, 분명히 다르다. 나는 원자력 발전소를 더 발전시키고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한민국의 자체적 핵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를 모두 없애되 원자력 잠수함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이들을 '원전 마피아'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해방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누려온 평화와 경제 성장은 전승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제 질서와 자유무역에 힘입은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던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어냈다. 반면 북한은 90년대 이후 핵무기를 만들어 체제 보장을 받기 위해 골몰했고 지금껏 불량국가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체 왜 2017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을 내던지고 핵무기를 손에 들려고 하는가? 왜 성공적이었던 평화의 길을 벗어나 북한과 같은 경로를 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키는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더니, 그 통일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향평준화를 택한 것인가?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현 정부의 탈핵에 대해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자력 잠수함을 꼭 만들어야만 한다는 그 '농축 우라늄 중독 증상'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준 것은 원자력 발전소이지 핵탄두가 아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핵탄두를 원자로에 넣어 전기를 뽑아내자. 우리가 가야 할 평화로운 번영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2017-08-01

[북리뷰] 중국의 양심, 그의 목소리를 듣다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
류샤오보 저·김지은 역·지식갤러리·1만8000원

지난 7월 20일, 류샤오보(劉曉波)가 사망했다. 향년 61세. 사인은 간암. 그를 기리는 뜻에서 국내에 출간된 류샤오보의 책을 펼쳐들었다. 아내를 위해 쓴 시집 『내 사랑 샤에게』, 아내 류샤(刘霞)가 남편을 위해 쓴 『그리운 샤오보』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책은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 뿐이다.

이 책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만하임에 소재한 S. 피셔 출판사에서 출간된 선집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독립 중국 펜 센터의 대표인 톈치 마틴 랴오와 류샤가 옥중에 갇힌 류샤오보 대신 원고를 편집해서 2011년 내놓은 책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존재 자체가 투쟁이며 비극인 셈이다.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정치, 2장은 사회와 문화, 3장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 혹은 중국인으로서 바라보는 세계의 문제들, 4장은 그가 중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내놓았던 선언, 08 헌장, 법정에 제출했던 최후진술서 등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5장은 자작시 모음을 지나 법원이 내린 판결문으로 마무리된다. 정치적 행위로서의 텍스트가 담긴 4장을 논외로 한다면, 가장 빛나는 글은 제일 처음 등장하는 "포스트 전체주의 의식에 대한 조망"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의식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포스트 전체주의 사회인 중국은 '냉소화(犬儒, cynicos)' 시대 속에서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과 목적을 잃은 채 이율배반과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17쪽) 중국인들은, 심지어 공산당원들도, 모두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체제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푸념한다. 이렇게 둘러대면서 말이다. ""나는 녹을 받고 당신은 재야에 있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같다. 단지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다. 당신은 밖으로 외치고 나는 내부적으로 와해시키고 있다.""(18쪽)

어떠한 저항 운동이 성공하려면 '체제 내의 동조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체제 내의 동조자'만 하려고 든다면 그 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 중국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체제의 변화와 민주화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다들 '언젠가 올 그날'만을 기다리며 냉소적 태도를 보일 뿐이라고 말이다.

류샤오보가 말하는 중국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경제 성장으로 세계적인 부호가 여럿 등장하였지만 "부호를 손보는 수단으로 정부에서 '국유자산유실'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가 평생을 모아온 어마어마한 재산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릴 수 있다."(95쪽) 농민의 힘으로 공산당은 혁명에 성공한 후 권력을 잡았다. 그런데 "농민이 중국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민대표회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농민은 전체 인구의 20%도 안 되는 도시주민 대표의 사분의 일에 불과할 정도로 극소수"(110쪽)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만한 여유를 지닌 이들은 '포스트 전체주의'에 걸맞는 냉소적 태도로 자아를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언론의 자유를 요구한 댓가로, 중국 정부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의 시신을 화장하여 바다에 뿌렸다. 마치 미국이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을 처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류샤는 행방이 묘연한 채 '강제 여행'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류샤오보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제 갚아나가기 시작해야 할 때다.

2017.08.01ㅣ주간경향 1237호

2017-07-28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책을 쓰는 사람, 책을 외우는 사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 있을까? 본인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고민하여 판단한 사람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무슨 이유로 어떤 결정이 내려진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이 한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어떤 '경전'을 잘 외우고 지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일 뿐이다.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에 넘어왔을 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렇다. 주자학은 중국 내에서 지배 이념의 자리를 잠시 차지했지만 얼마 후 부흥한 양명학의 비판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의 지적 흐름도 그에 따라 변했다. 그리고 중국의 학문은 고증학으로 넘어가, 청 제국의 말기에 이르면 유교 문헌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판적인 문헌 비평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반면 그 중국 고전을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느냐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던 조선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는 이미 '유행'이 끝난 주자학의 해석을 놓고 당쟁을 벌이고 지배 계급끼리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조선 밖의 세상에서는 해상 국제 무역이 출현하고 일본 및 중국은 서구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옛날 책'을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 셸런버거? 그게 누군데?'

스스로 생각한 자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탈핵이 아니라 더 많은 원자력 발전을 요구하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되짚어보며 자꾸 곱씹게 되는 말이다.

미국의 환경 단체 '환경 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마이클 셸런버거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향해 탈핵 정책을 철회해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내고,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및 기고를 통해 한국인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부터 생각해보자. 적지 않은 문재인 정권 지지자, 네티즌, 그리고 환경단체 운동가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마이클 셸런버거? 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은 누군데?

이러한 태도 자체가 '주체적'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상식적인 대응일 것이기 때문이다. 셸런버거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의해 2008년 '환경 영웅'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서명을 한 인물들 중 온실가스 감축 운동의 선봉장인 미 항공우주국(NASA)출신 기상학자 제임스 핸슨(James Hansen)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조차, '너는 듣보잡이고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핵발전소 옹호론자일 뿐이다'라는 편견의 벽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가차없이 '듣보잡' 취급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핑커 역시 해당 공개 서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다. 객관적인 숫자와 자료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고민하며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미 맹목적인 반핵 운동을 접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늘리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한 사례다.


원자력 발전: 가이아 여신을 위하여

실제로 많은 환경주의자들이 현재 원자력 발전을 더 개발하고, 그 이용을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는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름도 있고, 다들 너무도 잘 아는 이름이기에 깜짝 놀랄 사람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부터 꼽아보도록 하자.

'가이아 이론'.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정규 교육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니 말이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생명체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발상으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1972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임스 러브록은 2004년, 영국의 신문 〈인디팬던트〉(Independent)에 한 편의 기념비적 칼럼을 기고했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임스 러브록: 원자력 에너지는 유일한 친환경 해법이다(James Lovelock: Nuclear power is the only green solution)

러브록의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기후 변화가 초래할 엄청난 재앙을 고려해볼 때, 화석 연료를 계속 태우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24시간 돌아가는 기저전력을 공급하며, 발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고, 폐기물의 양도 석탄에 비해 훨씬 적다. 따라서 기후 변화의 재앙 앞에 직면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이 칼럼이 공개된 후 세계의 환경주의자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세계관의 창조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핵심 교리 중 하나를 부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것을 계속 믿기로 했다. 제임스 러브록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대다수 환경주의자들의 관성적 사고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

그러한 고정관념에 다시 한 번 돌을 던진 사람이 등장했다. 영국의 환경운동가이며 저술가인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도 『도둑맞은 세계화』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그는, 2011년 4월 5일 영미권에서 가장 대표적인 진보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의 지면을 통해 환경주의자들의 격분을 자아내는 칼럼을 발표한다.

"반핵 로비 단체들이 우리 모두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The unpalatable truth is that the anti-nuclear lobby has misled us all)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반핵 로비 단체들이 과장하고 부풀려온 대표적인 사례로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자 수를 지적한다. 탈핵론자들은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기 일쑤다. 하지만 진실은, 핵방사능 효과에 관한 과학위원회(UNSCEAR, United Nations Scientific Committee on the Effects of Atomic Radi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Of the workers who tried to contain the emergency at Chernobyl, 134 suffered acute radiation syndrome; 28 died soon afterwards. Nineteen others died later, but generally not from diseases associated with radiation. The remaining 87 have suffered other complications, including four cases of solid cancer and two of leukaemia.
체르노빌 원전을 봉쇄하기 위해 투입된 인부 중 134명이 즉각적인 방사능 피폭의 영향을 받았다. 28명이 곧 사망했다. 19명이 추후 목숨을 잃었지만, 대체로 방사능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나머지 87명은 그 외의 복합적 증세를 겪었는데, 네 명은 고형암(solid cancer)에 걸렸고 두 명이 백혈병에 걸렸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만큼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려면, 격납 용기도 없이 폭발한 체르노빌 사고 현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정도의 일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사고 체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은 수십년에 걸쳐 계속 그러한 오해를 증폭시키며, 자기들끼리 인용하여,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를 보라고! 당신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많은 국내의 환경주의자들과 그들이 증폭시키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지 몬비오는, 심지어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지 고작 열흘이 지난 시점, 역시 〈가디언〉을 통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정론을 말했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Why Fukushima made me stop worrying and love nuclear power)의 마지막 문단이다.

Yes, I still loathe the liars who run the nuclear industry. Yes, I would prefer to see the entire sector shut down, if there were harmless alternatives. But there are no ideal solutions. Every energy technology carries a cost; so does the absence of energy technologies. Atomic energy has just been subjected to one of the harshest of possible tests, and the impact on people and the planet has been small. The crisis at Fukushima has converted me to the cause of nuclear power.
그렇다, 나는 여전히 원자력 업계의 거짓말쟁이들을 혐오한다. 그렇다, 만약 무해한 대안이 존재한다면 나는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 기술에는 댓가가 따른다. 에너지 기술의 부재에도 댓가가 따르고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는 가장 가혹한 시험 중 하나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이 사람들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작았다. 후쿠시마 사태는 나를 원자력 발전의 옹호자로 개종시켰다.

물론 그 사고로 인해 많은 이들이 대피해야 했다. 지금도 후쿠시마 원전과 아주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수십만의 이주민은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 아니라 쓰나미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방사능의 누출 그 자체로 발생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최근 인기 예능 〈알쓸신잡〉에서 이른바 '어용 지식인' 유시민 작가도 유포했던,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일본국민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말은, 지진 및 쓰나미 피해자와 원전 사고 피해자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혹은 구분하지 않는, 거짓말일 뿐이다.


환경주의자들의 '선택적' 공감과 우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6도의 멸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진 저널리스트 겸 환경운동가 마크 라이너스(Mark Lynas)역시 원자력 발전을 적극 활용해야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후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6도의 멸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1도, 2도, 3도, 4도, 5도, 6도 높았던 시점을 연구한 고고학/고생물학 논문들을 전부 뒤지고 스크랩하여, 우리가 다가올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 경우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설득력있게 제시한 바 있다.

지구기온이 4℃ 상승하면, 해수면이 0.5미터 이상 높아지면서 이 대도시도 긴 수명을 다할 것이다. 오늘날도 도시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 21세기 후반에는 치명적인 침수가 시작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이 했던 연구에 따르면, 2050년이면 해수면이 50센티미터 올라가 150만 명이 살던 곳을 버려야 하며, 350억 달러의 피해가 날 것이라고 한다. 나일 강 삼각주의 넓은 지역이 바다에 잠기면 로제타나 포트사이드 같은 도시의 시민 수백만 명도 집을 떠나야 한다.[204-205쪽]

이와 같은 재앙을 피하는 방법, 피하지 못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탄소 배출을 급격하게 줄이는 것 뿐이다. 그러자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너무도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환경주의'에 흡착되어버린 '탈핵'의 망령의 힘이 너무도 거세다. 더욱 끔찍한 것은, 해외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여 입장을 변경한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일종의 교조적 이념이 되어버린 환경주의가 국가 정책을 뒤흔들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히피들의 구루, 원전 전도사 되다

무조건적인 탈핵이라는 이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얼마나 무섭냐 하면, '환경주의'라는 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반박하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을만큼 완강하다. 공자가 직접 나타나서 논어를 다시 해석해주는데도 조선의 유생들이 '그것은 진정한 공자의 뜻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10년 2월, TED 토론에서의 일이다.

나는 실제로 그 잡지를 본 적 없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 때문에, 한국의 식자층들 중 많은 이들은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영향을 받았다는 바로 그 잡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원류라는 바로 그 잡지 말이다. 그리고 그 잡지를 창간한 환경주의의 대부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1968년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했던 스튜어트 브랜드가 2000년대에 원자력 발전을 옹호한다. 반면 그렇게 태어난 환경주의를 책으로 공부하거나 귀동냥으로 듣거나 그저 막연한 불안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일단 원전을 없애고 봐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토론을 볼 필요가 있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그의 논적으로 등장한 마크 제이 제이콥슨은 모두 탄소 변화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한다. 나는 당연히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주장 가운데 '풍력 발전이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좁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풍력발전기는 단지 막대가 꽂힐 땅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날개가 돌아감으로써 조류들을 죽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공해 원인이기도 하니 말이다.


탈핵론자들의 공포 마케팅, 청와대를 홀리다

아무튼 '원자력 발전'과 '핵폭탄'을 동치시키는 공포 마케팅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얼마나 강력하냐하면, 스튜어트 브랜드와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토론에서 처음에는 75:25로 원자력 발전의 손을 들어주었던 청중들의 태도가 바뀌어 65:35로 변하게 만들 정도로, '공포'는 힘이 세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 가운데 10%는 오히려 핵탄두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원자력 발전은 핵무기의 생산이 아니라 해체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해도, 이미 들쑤셔진 '공포 마케팅'은 잠들지 않는다.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의 한계는 명확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구름에 해가 가리면 발전이 안 되는 태양광, 바람이 멈추면 발전이 안 되는 풍력만으로는,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발전기가 필요한데, 지형의 한계상 수력 발전으로 그것을 충당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선택은 화력 아니면 원자력 뿐이다. 그리고 둘 중 더 '환경적'인 선택은 당연히 원자력이고 말이다.

환경주의자는 당연히 원자력에 반대해야 한다는 어떤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심지어 '유령'도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굉장히 힘이 세다. 얼마나 힘이 세냐면 환경주의의 창시자가 입장을 바꿔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는 서서히 원자력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환경주의자들이 원자력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원자력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인류에게 100년 후의 미래는 없거나, 매우 불투명하다. 선각자들은 일찌감치 경고를 시작했고, 지난번에 언급한 빌 게이츠처럼, 그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공포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

나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환경주의자'라고 할만한 어떤 활동 내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해외의 환경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늘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왔으며, 그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면에서 나름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환경주의는 맹목적인 탈핵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고 말이다.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해보자. 스스로 생각했던 사람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반면 남이 했던 주장을 그대로 주워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못한다. 그 입장을 바꾸는 순간 본인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주의자들은, 진보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기후 변화 앞에, 그리고 한국의 좁은 땅이라는 선천적 한계 및 기저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는 태양광 및 풍력의 태생적 제약에 대해, 그들은 어떤 해답을 내놓고 있는가. 그저 〈녹색평론〉을 비롯한 몇몇 환경주의자들만의 회람 목록에서 맴돌고 있을 뿐 아닌가. 우리는 과연 〈판도라〉라는 영화 한 편이 나라의 미래와 관련된 논의를 뒤흔들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은 것인가.

탈핵 중심의 환경 운동을 만든 사람들은 이미 그 생각을 버렸다. 우리가 그 고정관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스스로 생각하자. 그래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생각을 바꿔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17-07-21

미래 세대를 위한 에너지 정책

미래 세대를 위한 탈핵?

'미래 세대를 위해 탈핵을 해야 한다!' 탈핵 찬성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사고가 난다면 그 해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원전에서 생산되는 핵폐기물은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미래 세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탈핵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한때 '청년 논객'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탈핵을 주장하는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해야만 하는 미래가 아니라, 대비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미래를 들이대며, 정작 미래 세대의 앞길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10만년 폐기물이라는 패배주의적 협박

원자력에 대한 공포심을 접어두고 잠깐만 생각을 해보자. 방사성 폐기물이 안전하게 보관되어야만 한다는 시간 10만년.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참고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2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10만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적' 단위가 아니다. '고고학적' 혹은 '천문학적'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원자력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것은 1898년의 일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최초의 원자로를 개발하여 인공적으로 핵분열을 유도해낸 것은 1942년. 그리고 지금은 2017년이다. 고작 7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엄청난 과학적 발견과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라. 라듐을 추출한지 44년만에 인류는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3년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70여년만에 독자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의 반열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10만년에 대해 생각해보자. 10만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돌도끼로 사냥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우라늄-235를 농축시켜 발전도 하고 폭탄도 만들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만약 우리 인류가 10만년이 더 흐르는 동안 멸망하지 않고, 기술 발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지구에 살고 있다면, 과연 그 시점에 방사성 폐기물 따위가 문제거리로 남아있을까?

10만년 운운하는 것은 그러므로 협박이다. 무슨 협박인가? 방사성 폐기물의 문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 말이다.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10만년동안 사라지지 않는 폐기물에 대한 공포심만을 자극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협박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빌 게이츠도 '원전 마피아'에게 매수당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마 전 지구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석 연료를 계속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할 수도 있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비중을 더 높일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는 기술적 제약이 존재한다.

포집된 탄소의 부피는 방사성 폐기물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태양광과 풍력은 모두 에너지 밀도가 너무 낮아서 굉장히 넓은 땅에 발전기를 깔아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공해 요소가 된다. 결국 좁은 면적에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해법은 원자력 뿐이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해답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담아 2010년 2월, TED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제로 탄소를 향한 혁신!'이다. 2050년 인류가 발생시키는 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들려면 원자력 발전의 대 혁신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7분 정도 시간을 내서 강연과 질의응답을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진행파원자로(TWR:Traveling Wave Reactor)는 MIT가 2009년 세계 10대 유망 기술로 선정한 바 있는 '오래된 미래'다. 아이디어가 제시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사용되는 원자로는 U-235를 분리하여 연료로 사용하는데, 그 분리 과정에서 U-238 혹은 열화우라늄이 발생하고 방사성 폐기물로 처리된다. 반면 진행파원자로는 바로 그 '폐기물'을 연료로 사용한다. 열화우라늄에 증식파(Breeding Wave)를 쏘아서 플루토늄-239로 증식시킨 후, 이후 발생하는 연소파(Burning Wave)를 이용해 Pu-239를 핵분열시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진행파원자로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한번 연료를 넣으면 최장 60년까지 발전소가 가동된다. 플루토늄까지 완전히 연소시키고 나면 남는 폐기물들은 안정적인 비방사성 물질, 그리고 독성이 약해진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양의 방사성 물질들 뿐이다. 그리고 그 폐기물을 그대로 뽑아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 60년의 기간 동안 연료를 추가할 필요도 교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오류'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훨씬 적다. 말하자면 꿈의 원자로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꿈이다. 아직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고속증식로를 개발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이런 형태는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모든 인류가 풍족하게 에너지를 쓰는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2011년 이후에도 빌 게이츠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부호이자 자선사업가이기 이전에 엔지니어이고, 위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vs. 빌 게이츠

빌 게이츠의 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대한민국의 탈핵 정책.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해보자. 양쪽 모두 '미래 세대'를 걱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구체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탈핵 논의는 '하지 말자'고 주저앉는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는 커녕 그 어떤 과학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진행파원자로가 과연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지, 언제쯤 가능한지,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이 글은 진행파원자로라는 특정한 기술을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둔다.

핵심은 이것이다. 현재의 탈핵 논의는 과학 이전에 세계관과 의지의 문제라는 것.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믿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미래의 에너지를 연구하고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빌 게이츠처럼, 에너지와 원자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난점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방사성 폐기물의 '10만년'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다. 적어도 그 반감기가 다 채워지기 전에 말이다. 우리가 '원전 마피아'를 향해 공허한 손가락질이나 하는 동안, 빌 게이츠를 포함해 미래를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훨씬 안전하고 깨끗하며 믿음직한 원자로를 개발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당연히 비싸게) 판매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10만년이라는 공허한 단위를 놓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면서, 정작 미래 세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킬 것이다.

10만년이 아니라 향후 10년부터 걱정하자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단위는 10만년이 아니다. 10년이다. 그리고 100년이다. 지금처럼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기후 변화가 임계점을 넘는다면 100년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기후 변화를 막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전 인류적 과제다.

한편 우리에게는 1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필요도 있다.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탈핵 정책이 추진된다면, 원자력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인력의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지금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10년쯤 지나면 다방면으로 그 충격이 밀려오게 된다.

빌 게이츠는 2012년 원전 기술 강국인 대한민국과 4세대 원전 개발에 대해 협의했다. 하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2014년 협상이 결렬되었다. 중요한 건 그 시점까지는 우리나라가 빌 게이츠와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탈핵 결정 후 10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래 타령을 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몫을 빼앗게 된다. 10만년 운운하다가 10년 후의 부와 풍요, 안정된 세상을 놓친다. 100년 후의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숙하고 한심한 일이 또 있을까? 대체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대신,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주저앉으면서 '미래'를 운운하고 있는가?

우리가 미래를 먼저 만들자

현재의 탈핵 논의는 기술과 과학 이전에 세계관의 투쟁이다. 새로운 힘, 물론 두렵지만 통제 가능한 에너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의사결정권자들, 환경주의자들과 여당 지지자들은 마치 척화비를 세우고 꽁꽁 문을 걸어잠그던 위정척사파처럼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회를 날려버리는 동안, 빌 게이츠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원전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보다 앞선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스스로 가난의 길을 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0만년 동안 남는 폐기물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 폐기물까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진취적인 미래를, 우리가 먼저 만들자는 말이다.

2017-07-18

[북리뷰] 읽고 쓰는 여자들, 스스로를 변호하다

문학소녀
김용언 저·반비·1만5000원

'문학소녀'는 멸칭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아도취적이며, 자기 자신과 소설 속의 주인공을 구분하지 못하고, 흔히 경제적으로 무책임하며, 그나마 문학적 취향도 사실 좋지 않은 여성들을 향한 조롱의 표현이 바로 '문학소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전혜린은 바로 그 '문학소녀'의 대명사와도 같다.

그러므로 전혜린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전혜린의 책을 감명깊게 읽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칼럼니스트 고종석 등의 냉소어린 평가는 전혜린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완전히 고착시켰다. "이들의 선고에 힘입어, 이제 전혜린은 특정한 독서의 출발점의 공통 대명사가 아니라, 부잣집 철부지 문학소녀의 대명사로 더욱 자주 호명되는 것 같다."(16쪽)

『문학소녀』는 바로 그러한 경향성과 맞서 싸우는 책이다. 애초에 '문학소녀'라는 멸칭을 제목으로 전유하고 있는 것부터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미스터리 소설 잡지 <미스테리아>의 편집장인 저자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전혜린과 '문학소녀'들에 대한 폄하의 근간에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내 말은, 전혜린이 그렇게 비웃음과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17쪽) 그에게 이 책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를 추적하면서 나의 '문화적 기억'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한, 내 어린 시절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전혜린을 이해하기 위한,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문학소녀는 왜 안전하게 놀려댈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그리고 전혜린을 쉽게 비웃는 이들에게 변호를 자청하기 위한 기나긴 '수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20쪽)

이 책을 읽고 환호할 독자들은 이 서평이 나가기 전부터 『문학소녀』의 출간 소식을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들에게는 앞서 인용된 것 이상의 책 소개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남자들, 그 중에서도 여성 차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비장하게 전혜린을 '변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여기서 잠깐 내 이야기를 해보자.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일이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대부분 시험과 무관한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그 무렵에 읽었다. 『태백산맥』의 1부 제목은 '恨의 모닥불'이다. 그걸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자율학습 감독을 하던 담임선생님이 내가 읽던 책을 힐끗 보더니, '성(性)의 모닥불?' 하면서 빼앗아가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읽던 소설이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려주었다. 혼나지도 않고, 조롱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머쓱해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좋은 책 읽는다고.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거나,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등, 우리 사회에 통용되던 책읽기에 대한 그 모든 관대한 시선들을 문득 떠올려본다. 내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였던 그것은 남자들에게만 허용된 특권 아니었을까? 전혜린을 읽지 않은, 전혜린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도 이 고민에 동참해야 한다. 지금까지 상식인 양 통용되어온 여성의 독서를 향한 폄하의 시선에 『문학소녀』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한국의 문학계는 좀 더 진지하게 응답할 의무가 있다.

2017.07.18ㅣ주간경향 1235호

2017-07-14

한산모시, 세탁기, 에어컨

올 여름 더위는 한산모시로 맞서보자?

2017년 7월 13일, 대한민국 청와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천군수 출신으로 이날 처음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나소열 자치분권비서관이 눈에 띄자 문 대통령은 '한산모시'를 거론했다." 일종의 스몰 토크일 수도 있겠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 대통령이 ""예전 군수님으로 계실 때 한산모시를 입으셨는데 보기에도 참 좋았다"고 말"하자, "나 비서관은 "모시를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도 한산모시를 입으시면 어떠신가"라고 답해 회의장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 '한산모시' 대화는 복선이다. 어떤 복선인가? 현 정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핵 기조에 맞물려, 공공기관 냉방 온도 제한을 민간에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대통령의 심경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문 대통령이 여름철 냉방 온도가 28도에 맞춰져 있는 것을 거론하며 "우리는 28도 지키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수현 사회수석이 "여름철 온도가 28도 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냉방이 켜지고 내려가면 꺼진다"고 답했다.

이어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이 "사무실 냉방 온도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재킷을 벗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굉장히 좋다는 논문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을 벗어도 그렇다. 시민들은 반팔을 입는데 과거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에 반팔 입고 들어가면 추웠다"며 "정부는 28도를 스스로 하면 되는데 민간에는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김승욱, ""한산모시 입으면 3도 떨어져" 靑 회의서 '무더위나기' 화제", 연합뉴스, 2017년 7월 13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3/0200000000AKR20170713095500001.HTML

내가 지난 포스트(링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 청와대에서 나온 한산모시 타령은 박정희 시대의 '근검절약', '한 집에 전등 하나 끄기'와 동일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산업용으로 쓰기에도 전기가 모자라던 시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정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면?

다른 모든 판단을 일단 보류해두고, 한 가지 가정법을 도입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산모시에 대해 스몰토크를 하다가 '공공기관 에어컨 온도 28도를 민간에도 실현할 방법 없느냐'라고 말했다면 여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너무 잠잠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 이것은 값비싼 한산모시로 옷을 해 입는 기득권층 외의 모든 사람의 더위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옷감인 모시는 가격도 비쌀 뿐더러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바느질하기도 힘들다. 빨래할 때에도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 그걸 잘 널어서 말리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입을 때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풀을 뿌려서 빳빳하게 다려야 한다. 요컨대 생산 및 관리에 있어서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옷이다.

게다가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옷감이 너무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 쓰는 사람이 활동적으로 입으라고 만드는 옷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시조 읊는 양반님네들을 위한 옷이다. 만들고 관리할 때에는 남의 노동이 들어가고, 입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옷, 그런 옷을 입자는 말이 농담처럼 회의를 앞두고 오가는 청와대의 풍경이다.


지배층의 한산모시, 피지배층의 에어컨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일이다. 탈핵 탈원전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탈핵 선언을 해버린 청와대에서, 그 무더위에 맞서는 방법으로 농담인 양 슬쩍 한산모시를 운운한다는 것 말이다. 치열하게 머리를 쓰면서, 땀흘려 몸을 움직인 후, 제대로 냉방이 된 곳에서 쉬는 국민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와대는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과거의 지배계층, 세습 귀족들이 입던 노동집약적인 옷감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탈핵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전기 공급 저하에 맞춰 냉방 온도를 높일 것을 민간 영역에까지 넌지시 주문한다.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정작 본인들은 긴팔 옷 입고 있었고, 회의장에 들어올 때까지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한산모시는 그런 옷감이 아니다. 남이 빨아주고 다려주고 풀먹여주는 한산모시 입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거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산모시에 대한 대화는 애초에 더울 일 없는 '윗분들'한테나 통할 소리다.

그런데 그걸 국민들 들으라고, 기업들 들으라고 언론 앞에서 넌지시 흘리고 있다. 이것은 위선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21세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쯤에 해당하는 대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세계관의 차이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고장난 냉장고에 갇혀버린 '진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적극적인 에너지 수요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 탈원전론자들의 기본 논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 중 하나였던 값싼 전기를 포기하더라도, 탈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물론 산업용 전기가 한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저렴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방만하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정용 전기를 OECD 평균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링크). '에너지 절약'이라는 당위와 누진제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정신을 옥죄어온 탓이다.

그러므로 산업용 전기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민간 영역에서 소비하는 전기 사용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다. 탈핵 탈원전주의자들은 당연히 그 또한 줄여야 한다, 혹은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년 7월 2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12131165

이런 식의 주장은 환경주의의 탈을 쓴 전근대적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오가는 탈핵 탈원전 논의의 근간과, 이 퇴행적 전근대주의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에너지의 사용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현재의 환경 담론은 과연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더 효율적인, 더 평등한 에너지를

에너지를 더 쓴다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평등이며, 사랑이다. 일단 그것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 유명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 더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게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강신주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에너지의 사용, 가령 에어컨은, 한산모시 입고 부채질하는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도 여름에 시원하게 몸을 식힐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적으로도 더욱 평등한 선택지인 것이다. 방직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착취를 포함한 여러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전까지는 평생 한 벌의 옷만 겨우 입고 살았을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풍족한 의복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여름에는 제대로 틀어놓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낮 시간을 허비한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일을 하는데, 개인용 난방 기구를 틀려고 하면 회사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지는 원인 중 일부가 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편이지만 결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에어컨 온도를 높이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되지', 이것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다.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피지배계층을 포함한 국민 전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다. 그 한산모시를 만들고, 빨래하고, 풀을 먹여 다리는 사람의 노동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팔자 좋게 좋은 옷 입고 유유자적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도외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우리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마이너스로 잡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에 대해서만큼은 '지금보다 전기의 생산도 소비도 줄이자'는 말이 무슨 합리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에너지의 생산·소비는 경제 그 자체의 성장 및 침체와 직결된 것인데 말이다.

이번 탈핵 탈원전 논의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진영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전근대로의 퇴행적 경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인상이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생산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안에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의 위험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이면서 평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무턱대고 일단 원전은 악이니까 추방하고 보자는 식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 탈핵 논의는 우리를 경제성장도 안 되고 행복하지도 않은 전근대국가의 길로 주저앉힐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산모시가 아니라 26도, 혹은 25도로 맞춰진 에어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한산모시를 입고 다니면서 에어컨을 끄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터와 집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받는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이번 여름의 탈핵 논의를 계기로, 진보 진영 내의 퇴행적 전근대 경향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비판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