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06

[북리뷰] '비국민'을 배제하고 '국민'을 앞세우는 그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얀 베르너 뮐러 저·노시내 역·마티·1만4000원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정치적 으르렁말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소위 '퍼주기 공약'을 일삼는다는 비난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뿐 아니라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얀 베르네 뮐러는 바로 그 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포퓰리즘에 대한 짧은 분량의 개론서를 썼다. 『누가 표퓰리스트인가』를 펼쳐보자.

"이렇게 포퓰리즘 거론이 흔한 요즘--현대 민주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불가리아의 정치학자 이반 카르사테프는 심지어 현대를 "포퓰리즘의 시대"라고 부른다--혹시 우리가 포퓰리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건 아닌가 하는 관찰에서 이 책은 비롯되었다."(10쪽)

우리가 20세기 말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수많은 '이론가'들과 달리, 저자는 길고 현란한 문장으로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최고의 이상("국민이 직접 통치하게 하자!")를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다."(16쪽) 여기서 핵심은 '타락한 민주주의'이다. 포퓰리즘은 예컨대 왕정이나 귀족정 등과 달리 어쨌건 민주주의의 한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타락한 민주주의이며, 역설적이게도 그 타락은 국민주권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벌어진다는 것이다.

국민이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그 개념 정의상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하다. 모든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선호에 차이가 있으며, 사회에는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 어떤 사안에서 이득을 보는 자와 손해를 입는 자의 간극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포퓰리스트들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부정한다.

포퓰리스트가 말하는 '국민'은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33쪽) 존재다. 그리고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기들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33쪽)한다. 그 결과, 첫째, 포퓰리스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진짜 국민'이 된다. 둘째, 포퓰리스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짜 국민'에서 배제된다. 즉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의 존재를 위해, 누군가가 '비국민'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지금까지 '빨갱이'나 '호남'을 타자화하는 극우 세력의 그것과 유사해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군사 독재 세력은 '주권자인 국민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도덕적 우월성 대신 박정희 신화, 경제발전의 성과를 앞세워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해왔기 때문이다.

얀 베르너 뮐러가 말하는 포퓰리즘적 정치는 오히려 '촛불 시민의 함성'에서 모든 정치적 선택과 행동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는 오늘날의 풍경과 더욱 잘 맞아떨어진다. 행정부만 바뀌었을 뿐 '기득권 세력'이 존속하고 있으며 그들이 대통령을 '왕따'로 만들고 있다는 식의 피해자 서사가 득세하는 모습 또한 그러한 우려를 증폭시킨다.

포퓰리즘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일면이다. '포퓰리즘을 추방하자'는 주장은 그러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조율해나가며 공존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의 이행만이 정답일 것이다. 이 작고 가벼운 책은 그 무거운 고민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7.06.06ㅣ주간경향 12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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