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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8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답: 불가능하다. 돈도 결국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나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해외 금융자산 동결. 아무리 많은 '외환보유고'를 쌓아도, 그게 자기 땅 자기 곳간에 물리적으로 들어 있지 않은 한, 이토록 쉽게 빼앗기고 마는 현실을 전 세계인이 깨닫고 있다.

링크한 WSJ 기사도 그런 것. 아예 첫 줄부터 이렇게 묻는다. "What is money?" If Russian Currency Reserves Aren’t Really Money, the World Is in for a Shock"

실로 그렇다.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그토록 열심히 축적해온 '외환보유고'라는 게, 이런 식이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국과 전쟁하려고 하면 싹 동결될 싸이버 머니 아닌가?

그런데, 원래 돈이 그런 것이다. 돈을 돈으로 만드는 건 화폐 구성 물질의 재화로서의 가치나 유용성이 아니다. 신용을 보증해줄 권력, 힘, 폭력, 그런 것들이 돈을, 특히 기축통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노정태라는 훌륭한 필자가, 신동아라는 역사와 전통의 근본 시사 정론지에 쓴, 이 칼럼을 참고해볼 수 있다.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을 한 단계 더 이어가 보자. 민주당의 통일정책이란 결국 '평화를 돈으로 사자'로 요약된다. 북한에 유화책을 펴서 돈을 주고, 돈을 더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면, 우리 말을 잘 들을 거라는 논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평화란 힘이 충분히 강해 상대방이 나를 넘보지 못할 때 구현되는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돈을 적에게 주는 식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악당에게 돈을 줘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란 힘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악당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은 평화의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짓이다.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그것은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전쟁을 이겨 세계를 정복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워낙 막대한 힘으로 평화가 강요되었기에 돈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드디어 '장기 20세기'가 완전히 끝났다. 지정학과 네셔널리즘의 시대가 돌아왔다. 우리 국민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2020-12-06

학자금 대출 탕감은 공정한 정책인가

 미국 진보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학 학자금 대출 때문에 젊은이들이 빚더미 위에서 인생을 시작한다! 국가가 나서서 탕감해줘야 한다!'

별 고민 없이 미국 진보의 레파토리를 수입하곤 하는 국내 진보 계열에서도 많이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정의로운 소리냐, 이런 비판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대학 진학률이 30% 정도밖에 안 되는데, 대체로 상류층과 어퍼 미들이죠. 그걸 국가가 세금으로 갚아준다? 좀 그렇죠?

앞장서서 '브라만 좌파'라는 용어를 만든 피케티가 그런 소리 하는 것도 웃기다는 지적. 학자금 대출 탕감은 '브라만 구제금융'(brahman bailout)이라는 신랄한 표현을 적어둘만 합니다.

 Zaid Jilani, Canceling Student Debt Would Be a ‘Brahmin Bailout’, Wall Street Journal, 2020년 11월 29일.

2020-06-14

근속별 임금격차가 차별의 핵심

"근속·성·학력별 임금격차, 한국이 유럽보다 훨씬 커", 한겨레, 2017년 7월 4일.

한국의 근속, 성, 학력별 임금격차를 살펴보자. "근속별 임금격차는 근속 20~29년과 근속 1년미만 비교"한 값인데, 무려 4배 차이가 난다.

한국 다음으로 심한 시프러스가 2.44배이고 그 다음으로 포르투갈이 2.09배. 이 그래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한국의 근속별 임금격차는 독보적인 것이다.

한국 정규직과 공무원의 '자동 상승하는 연봉 시스템'이 낳는 누적효과. 일단 정규직 트랙에 올라가서 연차를 쌓으면 걍 연봉이 올라가고, 그 연봉 위에 또 연봉이 올라가고, 하다보면 근속 20년에서 29년차가 되었을 때 신입사원의 4배를 받는 것.

우리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 중에 그런 나라는 없음.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도 같은 논리로 설명 가능. 일단 대기업 뿐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도 여성을 정규직으로 잘 안 뽑음. 그런데 여성은 정규직으로 입사해도 출산 육아 과정에서 퇴직(당)하는 반면, 남성 직원들은 쭉 남아서 연차를 쌓는다. 저 '4배 월급'의 사다리에 올라가지 못하고 굴러떨어진다는 것.

이것이 한국의 '10대 90' 격차의 핵심. 10퍼센트 안에만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여자라서 애 낳느라 쫓겨나지 않는 한, 버티기만 하면 됨. 그러면 퇴직을 앞두고는 신입사원의 4배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

참고로 포르투갈은 소위 '이중국가화'가 심각한 것으로 자주 언급되는 나라. 그런데 그 포르투갈보다 대한민국의 상태가 더 안 좋은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 그런데 그와 같은 임금 구조는 대기업 뿐 아니라 공무원 등 소위 '좋은 일자리'의 핵심이어서 아무도 감히 손댈 수 없을 것.

2020-06-09

마이클 델, 이재용, 오너의 책임 경영

마이클 델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면서 회사에서 지급하는 컴퓨터나 모니터로 많이 쓰는 델 컴퓨터의 오너다.

마이클 델은 컴퓨터를 값싸게 조립하여 판매하는 생산 라인을 확보했지만, 오프라인 판로를 뚫지 못했다. 그는 거기서 좌절하는 대신, 온라인으로 컴퓨터 견적을 맞추고 주문하여 물건을 받는, 20세기 말로서는 가히 획기적이었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서 대박을 터뜨리고 델 컴퓨터를 상장한 후 소위 '엑싯'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델 컴퓨터는 기나긴 침체와 방황을 겪었다. 컴퓨터 산업에 대해 비전도 없고 꿈도 없고 그냥 숫자로 나오는 실적만 예쁘게 해서 자기들 수당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된, 소위 '경영충'들의 놀이터가 되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마이클 델은 투자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엑싯'으로 번 돈을 허공에 날리지 않고 이리저리 굴려서 덩치를 더 키웠다. 그렇게 만든 시드 머니로 그는 희대의 결정을 했다. 자신이 상장했던 회사 주식을 다시 사들인 후 비상장기업으로 만들어 의사결정권도 독점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너의 귀환'인 셈이다.

그 후 나온 첫 작품이 Dell XPS 13이었다. 랩탑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텐데, (충격과 공포의 노란 봉투) 맥북 에어 이후 애플과 비벼볼만한 노트북으로 윈도우 계열에서 나온 첫 제품이라고 흔히들 평가한다. 극단적으로 베젤 크기를 줄여 거의 11인치 노트북에 가까운 본체 크기와 무게를 구현했다. Dell XPS 15는 15인치 화면을 13인치 크기에 우겨넣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한번 되찾은 프론티어의 위상을, 델 컴퓨터는 이제 내려놓지 않고 있다. 올해는 17인치 화면을 15인치의 본체 크기에 끼워넣은 Dell XPS 17도 나왔다. 오너가 만들고, 상장했다가 '경영충'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던 과거의 혁신 기업을, 오너가 되찾은 후 혁신의 DNA를 재주입한 멋진 사례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너 경영'이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1) 어떤 '오너십'이냐 2) 그 '오너'에게 정말 비전이 있느냐 3) 그 '오너'의 '오너십'에 경제적, 법적으로 투명하고 확실한 근거가 있느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과 달리, 삼성의 미래에 대해 이재용만큼 근심하고 진지한 결정을 내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국민연금이 대주주가 된 후, 낙하산 타고 내려와 한탕 하고 사라질 정권의 수족들보다는, 소위 '경영권'이라는 것을 이재용이 행사하는 편이 삼성의 미래에, 더 나아가 한국의 경제 전체의 미래에 바람직할 가능성이 크다. (포스코라는 반례를 보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재용이 편법 상속을 위해 동원한 다양한 '테크닉'에 대해 공정한 법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은 '오너 책임 경영' 그 자체가 아니다. 소위 '오너'라는 사람들이 주주의 이익을 실현시키지도 않고, 경영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기업의 의사결정과 이익만을 독점하는 잘못된 구조가 문제다.

삼성전자의 덩치가 너무 커져서 과연 '합법적'인 방법으로 '경영권' 방어가 될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이재용 부회장이 올바른 방식으로 정당하게 키워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법은 만인에게 공정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초석이니 말이다.

2020-05-31

고작 회계 문제? 돈이 곧 윤리다

정의연 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회계 문제다. 회계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 가령 뭐 운동의 대의가 어쩌고 활동가의 선의가 저쩌고 따위는 모두 부차적이다. 장부에 돈 거래를 제대로 써놓고 투명하게 거래하는 것은 운동권 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범한 시민들은 돈을 벌고 있다. 혹은 내일의 돈벌이를 위해 쉬고 있다. 돈을 번다는 건 그렇게 지엄한 일이다. 돈을 벌어서 그 기록을 투명하게 남기고, 내야 할 세금을 내고, 사장이라면 직원 월급 밀리지 않고, 회삿돈을 잘 관리하는 것 등은 모두 우리 삶의 기본이면서 가장 숭고한 영역인 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를 왜 하는가? 민주화운동을 왜 했는가?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안온하게 잘 살기 위해서이다. 남을 속이지 않고 권력에게 휘둘리지도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모든 회계는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반대로, 그 어떤 아름다운 대의를 갖다 댄들, 회계를 속이는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그 사회는 투명할 수도 건강할 수도 민주적일 수도 없다.

'그깟 회계 문제'를 운운하는 자들아, 입 닥쳐라. 너희들은 지금 '그깟 회계'로 계산되는 '그깟 푼돈' 벌겠다고 새벽에 눈꼽 떼고 일어나 직장으로 일터로 택배 상하차 물류센터로 향하는 그 모든 평범한 생활인들을 모욕하고 있다. 너희들의 운동이 대체 뭐가 그렇게 고상하고 굉장하기에 이 모든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돈 문제를 이토록 얕잡아 본단 말이냐. 그토록 돈 문제를 우습게 보면서 어쩌면 네놈들 뒷주머니만은 알뜰하게 채워넣고 있단 말이냐.

돈 문제다. 이건 돈 문제고, 바로 그렇기에 가장 투명하고 엄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반미주의니 반일주의니 거대한 헛소리 다 집어치워라. 돈이 깨끗하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할 수 있단 말이냐. 이 숭고한 회계 문제 앞에서, 피해자와 활동가의 윤리가 어쩌고 저쩌고 지껄이는 배부른 운동권 족속들, 그 역겨운 아가리들을 다 닥치란 말이다.

2020-04-04

코로나 바이러스와 페미니즘의 위기

COVID-19 사태는 여성주의와 그 성과마저 위협하고 있다. 재택근무 혹은 자가격리가 일상화되면서 당연하다는 듯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떠안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외신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지만 아시아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8일 재택근무와 함께 가사노동·자녀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어린이집과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특히 일하는 여성의 육아 고충이 커지고 있다. 성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가연, “”코로나 때문에 일이 두배” 육아·가사노동에 피로 호소하는 여성들”, 아시아경제, 2020년 3월 10일. https://www.asiae.co.kr/article/2020031009205389640

이는 단지 집에서 밥을 더 자주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 등이 여성에게 편중되게 떠넘겨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가령 말레이시아의 경우 SNS를 통해 재택근무중인 여성들을 상대로 ‘남자를 위한 직장의 꽃’ 역할까지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가 빈축을 산 바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여성부는 앞서 이동제한령에 따른 봉쇄 기간 중 아내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들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현재 삭제된 게시물에서 여성부는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여성들이 집에서도 편하게 입기보다는 옷을 단정히 입고, 화장도 하라고 권했다. 평상복 차림의 여성 그림에는 금지 표시를 하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PC작업을 하는 여성을 포스터에 등장시켰다. 여성들이 가사일에 도움이 필요할 때 ‘비꼬는’ 태도를 남편에게 취하지 말라고도 했다.

조재희, “”아내들, 잔소리말고 화장해라”가 봉쇄 기간 정부 지침?”, 조선일보, 2020년 4월 1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1/2020040101974.html
/말레이시아여성부 인스타그램·호주 ABC | 조선일보 기사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경제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추구한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라는 명분 하에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아무런 사전적 사후적 제약 없이,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할 권리
  2. 여성이 직장에서 일함에 있어서 소위 ‘여성적인 역할’에 묶이거나 그러한 역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보다 근본적인 문제 또한 발생하는 중이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시행된 주말, 영국의 가정폭력 상담 핫라인에 걸려오는 학대 신고 건수가 65% 증가했다. BBC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살고 있던 여성이,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월세를 내지 못해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된 경우도 보도한다. 여성의 경제적 생활과 권리 이전에 직접적인 생존과 안전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은 COVID-19가 최초로 터져나온 중국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마치 그 동쪽에 있는 어떤 나라처럼) ‘우리가 코로나 대응을 정말 잘한다 최고다’ 따위 프로파간다에 매진했는데, 그 주요 소재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동원되어 왔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환자에게 헌신하기 위해 삭발한 간호사의 눈물겨운 사연이라던가, 뭐 그딴 것들. 인터넷의 반응을 살펴보면 일부 한국인들은 그런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지만, 중국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여성의 신체를 정권 홍보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위챗 기사가 1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올린 후 검열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중국의 의료 현장에서 여성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홍보를 위한 성적 이미지의 대상으로 착취당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들보다 더 열등한 급식을 받아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한 바 있다.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여성을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이상화하면서, 대상화하고, 뜯어먹는 것이다.

The propagandists’ portrayals of women during the epidemic—as self-sacrificing, brave or beautiful—“basically all follow the playbook”, says Zoe, the blogger. But she was surprised to see a state-run charity follow the volunteers’ lead and donate sanitary pads. People’s Daily has condemned “feudal” attitudes to menstruation and eulogies to “extreme behaviour” such as returning to work right after a miscarriage. Only fierce and widespread anger, she reasons, could have spurred the party’s mouthpiece to say such things.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https://www.economist.com/china/2020/03/07/covid-19-has-revealed-widespread-sexism-in-china

아직 사태가 종식되려면 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잠잠해진다 해도 언제 다시 발병자가 솟구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러한 재앙을 기회로 여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는 권력의 움직임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2020-03-19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었다.

'미국, 유럽인들은 왜 사재기를 할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한국인들은 안 그러는데?' 같은 소리 하면서 국뽕 빠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도 그짓 다 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2월 23일자 기사를 보자.

대량 구매 행렬은 대구에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22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의 한 마트에서도 라면, 생수 등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섰다. 같은 날 창원구 진해구의 한 온라인 카페에는 마트 내 유제품 판매대가 텅텅 빈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 서초구 코스트코 양재점에서도 매장 개점 이후 한 시간 만에 생수 수백 세트가 동났다. 서초구 거주자 박모 씨는 “서울도 이제 사재기 붐이 이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마스크나 생활용품 구매에 수백만 원을 쓰는 경우도 있다. 지난 주말 회원 수가 190만 명에 달하는 네이버 온라인 커뮤니티 ‘파우더룸’에 ‘코로나19 때문에 100만 원을 썼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밖으로) 최대한 안 나갈 수 있도록 비상식량, 비누, 세정제, 마스크, 생활용품 등을 사 놓았더니 100만 원이 넘었다”고 했다. 이에 다른 회원들은 “나는 200만 원을 썼다” “남 일 같지가 않다” 등의 댓글을 남겼다.

실제로 온라인 주문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 G마켓에 따르면 20일 즉석밥과 라면 매출은 일주일 전인 13일 대비 각각 54%, 80% 늘었다. SSG닷컴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1월 20일부터 2월 20일까지 식품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8% 증가했다.

"마트 먹거리 매대 ‘텅텅’…코로나19 확산에 ‘사재기’ 행렬 잇따라", 동아일보, 2020년 2월 23일

다들 좀 최소한의 품위를 갖고 살면 좋겠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 불안하면 일단 주변 사람들 보고 따라한다. 주변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러 가면 나도 사러 가야 안 불안하다.

미국인들이 사재기를 하는 것은 대체로 미국인들이 집이 넓고, 넓은 지역을 점유해서 살기 때문에 한국처럼 모든 것을 온라인 배송으로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 즉 '생필품 서플라이' 그 자체가 하나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역시 한국처럼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트에 직접 가서 우르르 사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사람이고, 당신도 사람이다. 외국 네티즌들이 한국 약국 앞에 마스크 사겠다고 줄 선 거 보면서 낄낄거리면 기분 좋겠나? 정말이지, 너무도 천박하다.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다. 한 달도 채 안 된 일이다. 윤리의 많은 부분은 기억력에서 나온다. 기억을 좀 하면서 살자.

2020-03-17

도쿄 올림픽,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진다면

나는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대신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올림픽은 관객 이전에 선수들을 위한 행사다. 선수들은 4년에 한 번 거행되는 이 대회를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진실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정은 지켜져야 한다.
  2. 올림픽을 보는 전 세계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올림픽 일정은 지켜지는 편이 낫다. 우리가 비록 약 100여년만에 전 세계적인 유행병과 싸우고 있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다는 긍정적 모티베이션을 전달할 수 있다.
  3. 세계 경제의 침체를 막기 위해서도 올림픽은 일정대로 치러지는 편이 낫다. 올림픽은 단지 스포츠 행사일 뿐 아니라 방송, 광고, 기타 비즈니스가 결부된 거대한 경제 이벤트다. 이것이 미뤄진다면 안그래도 휘청이는 세계 경제에 좋지 않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서는 올림픽처럼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밀접하게 모여앉아 열광하고 환호하고 끌어안는 행사를 안 하는 게 좋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100% 무관중 올림픽이 답일 수 있다. 단 한 명의 현장 관객 없이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스포츠 중계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은 위기지만 동시에 큰 기회일 수 있다. 카메라 및 기타 장비와 스탭이 관중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며, 관중에게 보이더라도 최대한 덜 보여야 한다는, 스포츠 중계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핵심적인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해보자. 지금 축구 중계에 관중석이 없다면? 그래서 스탭들이 원하는대로 영상을 찍고 뽑아낼 수 있다면?

수십개의 드론을 동원할 수도 있고,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크레인을 배치할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까지 차마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다양한 각도와 기법을 동원한 촬영이 가능해진다. 현장 중계지만 마치 각본을 가지고 찍은 영화처럼 실시간으로 편집하여 송출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올림픽을 완전한 미디어 스펙터클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수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드러내어 겨룰 온전한 기회를 얻고, 주최국과 IOC는 비즈니스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선수와 스텝, 방송 등 인원 전부를 합쳐봐야 1만명도 되지 않는다. 이들이 감염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올림픽에 참여시키고 귀국시키는 것은 일본 정도의 나라라면 불가능한 일이 전혀 아니다. 일본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은 관중인데, 관중 없이 올림픽을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마라톤 같은 실외 스포츠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통제하면 된다. 혹은 마라톤 또한 실내 경기장에서 치름으로써,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마라톤 스코어'가 어떻게 될지 확인하는 기회를 가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망상이니까 무슨 말을 못하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이거다. 우리는 COVID-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구 전체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 또한 막아야 한다. 무턱대고 때려치우고 안하고 거리두기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성을 유지해주는,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지켜주는 것들은, 동시에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또한 올림픽이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스포츠 중 상당수가 등장하는 무대에서, 100% 무관중 경기를 '관객'이라는 제약 없이 중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운동인가' 싶을 정도의 영상이 실시간 송출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나는 그런 것을 문득 보고 싶어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무턱대고 안하고 때려치우고 집에 틀어박히고 이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뉴노멀'이 닥쳐온다면 그 '뉴노멀'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올림픽 취소해라 일본 망해라 아베 좆돼라'라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불현듯 한마디 해 보았다.

덧) 올림픽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이 존재한다. 가령 말콤 글래드웰은 '올림픽을 나라 옮겨가면서 하지 말고 어떤 섬 하나를 '올림픽 섬'으로 정해서 4년마다 같은 경기장과 트랙에서 경기를 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각국에서 올림픽 유치 후 벌어지는, 많은 경우 훗날 쓸모없어지는 대규모 시설 공사가 낭비라는 것이다. 만약 말콤 글래드웰의 주장대로 '올림픽 섬'에서 올림픽을 치른다면, 관객까지 싹 격리하는 결과가 되므로, COVID-19 확산 따위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2020-03-03

마스크 뱅크런: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 하면 어떻게 될까? 은행은 예금을 맡아주는 곳일 뿐 아니라 그 돈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주며 유통하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예금주가 한꺼번에 돈을 찾겠다고 하면 내줄 수가 없다. 망한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 자본국가들이 20세기 초 경험했던 '뱅크런'이다.

지금(3월 4일 0시 무렵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스크 대란' 역시, 따지고 보면 뱅크런과 유사한 현상이다. 다수가 일시에 패닉을 일으켜 특정 재화를 원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뱅크런의 경우는 그 대상이 현금이었다면, 지금은 마스크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왜 마스크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구입하려 할까? 과도한 건강 우려? 마스크가 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데 그걸 모르는 우매함 때문에? 아니다.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마스크를 구입하려 하는 이유는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언제 마스크를 못 사게 될 지 모르니, 살 수 있을 때 사두자, 이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형적인 '시장의 실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시장 원리에 따라, 혹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시장에 공급하는 식으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제공하는 시장 뿐 아니라, 실은 그 시장의 바탕이 되는 정부마저 서서히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법은 정부가 정부답게 일하는 것이다. 뱅크런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뱅크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은행에 더 많은 돈을 갖다주는 게 아니다. 부족한 것은 화폐 그 자체가 아니라 화폐와 은행에 대한 예금주들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언제건 은행은 당신들에게 돈을 줄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실제로 예금을 주지는 말아야, 예금주들이 믿고 집에 돌아가면서 뱅크런이 종료된다.

문제는 화폐와 달리 마스크는 소비재라는 것이다. 지금 정부는, 미쳤나본데, 마스크를 오래 써도 된다느니 빨아 써도 된다느니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국민들로서는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나보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아껴 쓰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마스크를 확보하고자 줄을 서게 된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장군처럼 하면 된다. 전국 읍동면 단위까지 퍼져있는 행정력을 이용해, 1인당 몇 장의 마스크를 정부가 확보하여, 신분증을 확인하고 직접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최선의 해법이며, 가장 자본주의적인 해법이다. 왜냐하면 시장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다. 마스크라는 물건 자체가 관건이 아니다. 지금 줄을 선 사람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국민에게 마스크를 1인당 몇 장씩 직접 손에 쥐어줄 수 있는가?

만약 정부가 이걸 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마스크를 사겠다고 줄을 서는 행렬 자체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마스크를 유통하는 시장과, 그 시장의 질서를 확보하는 정부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지금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다. 정부가 물량을 70%, 80%, 아니 100% 확보한 채로 유통에 나서도 이런 식이면 마스크는 계속 부족할 것이다.

사람들이 시장과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사서 비축해두려 할 것이며, 따라서 공급은 모자라고, 남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 불안해져서, 자신도 줄을 서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설마 하면서도 줄을 선다. 마스크 뱅크런이다.

마스크 그게 뭐 비싼 것도 아니고, 생산 물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지금 없는 것은 신뢰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 앞으로 2주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총력전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그에 걸맞는 단호한 모습을 정부가 보였으면 한다.

직접 나눠줘라. 그러면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굳이 사러 나가서 줄을 서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으면, 다들 어느 정도는 안정을 되찾고, 굳이 줄까지 서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마스크는 약국이나 마트에 가면 흔히 쌓여 있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이게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게 무슨 어려운 논리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할까? 우리나라 행정력이 그렇게 부족한가? 정부가 직접 물량을 확보까지 해놓고 그걸 굳이 '판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부 물량을 '판매'하면 실수요자가 아닌 누군가가 매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그런 식이면 품귀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외 국가에 그것을 유통하여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이 나오거나, 그런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기 너무도 좋은 여건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시장과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따라서 또 사재기에 나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마스크 뱅크런이다. 정부가 정부답게 행동하여 국민을 안정시키고 신뢰를 회복하면 금방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부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지 말라.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하라.

2020-02-12

박완서 (1)

박완서의 소설 "서글픈 순방"의 한 대목. 화자인 새댁은 적금 50만원에 문간방 전세금 40만원을 합쳐 90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넣었다. 그걸로 어디 변두리에 땅을 사고 움막을 지어 살면서, 벽돌이니 뭐니 하는 걸 하나씩 사모아 집을 짓자고 계획한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에 묘사된 그 무렵의 주택 사정도 놀랍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움막살이'를 대수롭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그 태연함이다. 1970년대의 어느 계층에게 움막살이는 인생이 폭싹 망해야만 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딜 수 있는 어떤 디딤돌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20세기 중후반 고도성장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때로 너무 의아할 때가 있다. 그 무렵에는 모두 행복했고, 모두에게 꿈이 있었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인 양 말하는 그 물결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1983년에 태어나 90년대에 자란 내 기억만 보더라도, 우리의 20세기는 전혀 그런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박완서를 펼쳐보자. 영동고속도로 현장에 취직한 조카를 만나러 간 여성의 이야기인 "카메라와 워커"를 통해 그 시절로 돌아가볼 수 있다. 화자는 조카를 '임시직'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회사 윗사람에게 '와이로'를 찔러주어야 하나 노심초사한다. 고도성장기에는 마치 비정규직이라는 게 없었던 것처럼, 일자리가 지천에 널려있고 청년의 꿈이 공정하게 펼쳐질 수 있었던 것처럼, 2020년 대한민국이 흠뻑 빠진 가짜 노스탤지어에 찬물을 끼얹는다.

내 짧은 견문의 한계일 수도 있고, 고도성장기의 단물을 받아먹었다는 어떤 집단 속에서 내가 성장기를 보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내가 커온 세상은, 요즘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떠올리는 '쑥쑥 크던, 모두가 절로 부자가 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박완서의 단편들 중 툭툭 등장하는 묘사들 속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20세기를 실감나게 재회한다.

아무튼 중요한 건 20세기의 한국이 그렇게 공정한 곳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잘 살 기회를 열어주고 있던 유토피아는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많던 싱아를 먹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팠다. 심지어 그 시대를 나보다 오래 살았던 40대, 50대, 60대들 사이에서도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살기 좋았다', '취업하기 좋았다' 같은 소리가 마치 사실인 양 오가는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던 차에, 새삼스레 박완서를 읽다가 한 마디 적어본다.

2020-01-23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2019-09-29

'과거를 청산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독일 재벌 가문 중 ⅓ 가량은 자손이 성년(16세-18세)이 될 무렵 서약서를 쓰게 한다. 지분 소유와 경영 개입이 주된 골자지만, 종교적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산다거나, 공적으로 사진 찍혀 노출되지 않는다거나, SNS를 안 한다거나,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사실 독일은 미국 중국 다음으로 슈퍼리치가 많은 나라다. 하지만 이렇듯 부자들이 극히 몸을 사리는 문화로 인해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독일이 잘 사는 나라니 부자가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짜 질문'은, 대체 왜 독일 부자들은 미국 부자들과 달리 자기현시욕을 억누르며 살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만 간단하다. 1세대 부호들이 탑 랭커인 미국과 달리 독일 부자들은 대부분 기존 자동차/부품/유통업체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기업들은 직간접적으로 나치 시대에 협력자였다.

독일 (특히 북부) 특유의 경건한 개신교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나치 시대부터 재벌이었던 가문의 자손들이 바로 독일의 현재 상위 부호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 가능한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독일을 '나치/과거 청산'의 모범적인 사례인 양 떠들어대는 국내의 분위기는 사실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 구체제에 협력하거나 그 일부였던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가 전쟁 이후에도 거의 같거나 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고 살았던 것은 독일, 일본, 그 외 모든 전범국에서 마찬가지였다.

둘째, 돈의 역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적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사업 영역이 생겨나고 자본주의가 역동적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보다 낫다고 볼 여지가 있다.

IPO로 한탕 하고 '엑싯'하는데 혈안이 된 젊은 사업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본주의 소굴 미국을 고까워하는 이들은 유럽, 독일을 어떤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처럼 칭송하곤 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은 모두 자신이 창업자로서 부를 쌓은 1세대 슈퍼 리치이며, 이런 이들이 큰 부와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한 나라가 미국이기도 하다. 이는 남의 눈을 피해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나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내려온 부를 간직하며 암암리에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식 부자 모델보다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를 정답으로 이끌어주는 원칙은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람이 노력한만큼 벌어서 먹고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물려받은 부가 대대로 이어져 사실상 신분제로 고착되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 혹은, 나쁜 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과거를 '청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역동적 힘이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대를 이어 내려오는 '묵은 돈'이 젊은 창의력과 에너지를 짓누르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참고 기사: “Germany’s business barons are finding it harder to keep a low profile”. The Economist, 2019년 6월 15일.

2018-01-14

'흙수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하지 말라?

대체 어떤 악마가 '흙수저들의 자수성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희한한 논리를 개발했는지 모르겠다. 현실은 그와 정 반대다. '흙수저'를 보호하려면 소위 '암호화폐' 거래를 규제해야 하며, 최대한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하고, 거래에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돈은 액수가 같아도 가진 사람에 따라서 절대 같은 돈이 아니다. 가령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쪼들린 적 없이 자란 청년이 친척들로부터 넉넉하게 받아온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 만든 500만원을 생각해보자. 날려먹어도 큰 상관이 없는 돈이다. 잘 사는 부모들은 심지어 자녀들한테 '투자 경험'을 안겨준다며 일부러 과하게 용돈을 주기도 한다더라. 그런 돈은 아무리 유입되어도 큰 문제가 될 건 아니다.

하지만 비트코인 열풍에 귀가 팔랑거린 빈곤계층 청년이 월세방 보증금을 빼온 500만원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 돈이 사라지면 그의 월세방도 사라진다. 주거의 질이 급감하고 삶의 질이 곤두박질친다. 더 나쁜 경우는 없는 돈 끌어모아 '가즈아~'에 동참한 경우.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았다거나, 기타등등. (회사 공금을 끌어다가 비트코인에 넣었는데 값이 안 올라서 큰일이라는 인터넷 게시물 캡쳐를 본 적도 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기록해둘만한 사안이다.)

이게 결국 돈 놓고 돈 먹기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흙수저'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하우스 입장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 아예 부자들은 돈을 날려도 된다. 하지만 가난하면 애초에 그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 이 정권은, 청와대는, 그리고 코인판이 계속 이렇게 규제 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또 잔인하다. 일확천금의 꿈으로 영혼까지 끌어올려 코인판에 갖다 부은 청년들이 대체 어떤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지 걱정되지도 않나?

처음부터 이건 돈놀이판이었다. 그냥 웃기는 장난으로 취급되던 비트코인이 진지하게 '투자 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랬다. 페이스북의 창업에 자신들의 지분이 있다고 주장하여 마크 주커버그로부터 거액을 받아낸 윙클보스 쌍둥이 형제가 '제미니'(라틴어로 쌍둥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거래소를 만들고 거액을 투자하면서부터 엉터리 아나키즘적인 몽상은 어엿한 투기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흙수저도 윙클보스 형제처럼 '존버'할 수는 없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흙수저'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탕 크게 먹어서 인생 바꿀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시달리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과 완전히 반대되는 짓이다.

대체 대한민국의 국격이 어디까지 후퇴하려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무슨 정당한 논의인 양 언론에 오르내리고 정치인이 왈가왈부하기에 이르렀는가? 자기 돈 갖다 박아서 한탕 하건 쪽박 차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게 마치 정당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인 양 포장하지 말라는 소리다.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마저 모두 망가져가고 있는 듯하다.

2009-11-2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한미FTA, 자동차 재협상 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 ⓒ청와대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