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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5

인구감소가 해방이라는 주장의 오류

'지배집단은 노예를 원한다, 인구감소가 해방이다'라는 주장의 오류. 그렇게 말하는 사람 본인은 지배계급인가, 노예인가? 지배계급이라면 그것은 마치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부르주아 집안 자식 같은 고결함 내지는 위선의 표현일 뿐이지만, 노예라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 신분이 낮고, 재산이 없고, 특별한 재능이 없을수록,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인 평범한 사람들의 노고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예를 낳지 말자'는 주장에서 더 큰 손해를 보는 건 주인이 아니라 노예다. 자신이 다른 노예들과 서로 돕고 살아가기에 지금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하며 오만한 노예.

2023-05-13

넷플릭스식 Binge Watch 단상

넷플릭스가 조져놓은 드라마를 둘러싼 문화적 관습이 한둘이 아닌데, 그 중 최악은 Binge Watch라고 생각한다.

TV 시리즈는 그런 게 아니다.  

힌국 기준으로 16부작은 1주 2화씩 8주에 보도록 맞춰져 있다.

딱히 기한 없이 흘러가는 연속극도 1주에 한 편 내지는 두 편, 요즘은 잘 만들지도 않는 일일연속극은 1주 5화 1일 1화가 최대치다.

이게 답답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연속'극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의 흐름과 시청자의 인생의 흐름이 함께하는 그 감각. 그것이 영화와 드라마를 가르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영화는 극장이라는 단절된 시공간에 들어가서, 대충 2시간 아무리 길어도 4시간이 안 되는 영상물을 보고 나온다. 영화 감상은 '이벤트'다.

반면 드라마는 TV가 됐건 모니터가 됐건, 익숙한 시공간과 시청 환경에서, 최소 8시간(이면 너무 짧고), 대충 16시간을 함께한다. 이건 '이벤트'가 아니라 '라이프'다.

빈지 와치는 바로 이 '라이프'로서의 드라마를 조져버린다. 하루 날잡고 쫙 정주행하는 그것은 드라마를 보는 자세가 아니다.

갑자기 왜 혼자 급발진하는가?

오랜만에 더 와이어 여전히 시즌 1... 의 8화를 보고 하는 소리임. 걍 무시하세요. 한 화 정도만 더 봐야지...

2022-11-27

유전자 조작 아기를 낳는 것을 진보가 옹호할 수 있는가

마이클 샌델이 쓴 <완벽에 대한 반론>을 읽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책. 명확한 지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괜찮은 논증을, 하버마스로부터 빌려와 잘 썼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더 나은 아이를 '선택'해서 출산하는 행위를 미국의 주류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옹호하는데, 그에 대한 반발이다.

같은 주제를 논하면서 하버마스는 '우리가 아는 자유의 개념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주 멀리 보면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의 연장이고, 가깝게는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던져짐' 개념을 빌려왔던 것의 연속성 위에 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진보'라 여겨지는 미국의 고학력 리버럴 계층은, 자신을 닮았는데 여러모로 능력이 탁월한 아이를 통해 존재의 유한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큰 듯 하다. 반면 공동체주의자인 샌델은 '아이는 신이 주신 선물이며 꽝이 나와도 어쩔 수 없다'는 보수적 가치를 옹호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서구 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가치(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한 죄인이며 죽을 때는 다 똑같다)로부터 벗어난 중국계 이민자에 의해 '글로벌 대리모 서비스 앱'이 출시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쌓아나가야 한다.

다시 샌델의 책으로 돌아와보면 이 아이러니가 더욱 도드라진다. 20세기 자유주의 철학자의 대명사인 하버마스의 입을 빌어, 21세기에 가장 잘 팔리는 공동체주의 철학자가, 21세기 미국의 '리버럴'들을 공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201n년이니까요!' 같은 말은 정말 아무 쓸모가 없다.

-2019년 5월 5일에 쓴 글

2022-05-22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

오늘(5월 22일 일요일) 막을 내린 권진규 100주년전.

일단 대단히 훌륭한 전시였고, 여러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 하나.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줘야 하지만, 누군가 어떤 말을 굳이 반복해서 한다면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권진규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젊은 시절 일본 가서 조각 배우고 왔을 때부터 그랬다고 전시 초반에 써 있는데, 실제로 걸어온 행보는 그와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 그리고 나무로 만든 불상 모두 그렇다.

그의 예수상은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다. 멀쩡히 교회에서 돈 받고 의뢰 받아서 만든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따로 있는 작품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권진규는 그 예수의 머리의 후광을 굳이, 굳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들었다.

수레바퀴란 종교에서 어떤 상징인가? 불교의 상징이다. 불교의 法이요, 윤회의 輪이다. 예수 머리의 halo를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도에게 일종의 신성모독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작업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건 아니다. 가령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정도까지 전국의 여러 성당들은 앞다투어 '상투 틀고 있는 예수'라던가, '색동저고리 입은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같은 성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Roman Catholic'과도 미묘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천주교의 맥락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천주교에서 그런 유형의 성상을 주문 제작할 때에도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권진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남의 돈을 받아서 작업을 할 때도 아주 대놓고 자신의 의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곤조를 밀어붙였다.


나무로 만든 불상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커미션 받은 작품이 아니지만, 종교의 내적 논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가주의적 의지가 강하게 개입해 있다. 미륵의 관을 썼지만 옷깃과 수인, 결가부좌는 부처의 그것이다. 종교의 문법을 알면서 무시하는 것이다.

권진규의 예술가적 목표가 뭔지, 얼마나 잘 추구하였는지, 뭐 그런 것에 대해 내가 함부로 말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 써두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기술자/장인/등등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야말로 예술가적 자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진정 간도 쓸개도 빼놓고 시키는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훌륭한 전시에 쓸데없는 말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2-05-15

19세기 힌두교 르네상스, 바가바드기타, 계급과 차별과 의무

이 고전이 지니는 힘과 영향력은 간디뿐 아니라 틸라크 (B.G. Tilak), 오로빈도(Aurobindo),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라다크리슈난(S. Radhakrisnhan) 등 수많은 현대 인도 사상가와 정치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미쳤다. 사실 『바가바드기타』가 힌두교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대중적 경전이 된 것은 19세기의 이른바 힌두 르네상스(Hindu Renaissance)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는 인도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저항과 독립 의식을 고취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문화적 각성도 가져왔다. 특히 영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기독교와의 접촉은 인도 지식인들의 힌두교 이해와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힌두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공격적 선교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서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따라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무조건 동일시하던 견해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인 힌두교 사상의 강점을 새롭게 의식하게 되었다. 힌두교를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던 부정적 시각을 버리고 그들은 오히려 서구 세계를 향해 힌두교 철학과 종교 사상이 지닌 장점과 매력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에 누구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유명한 비베카난다(Vivekananda, 1863-1902)였으며, 그의 사상 역시 『바가바드기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서, 현대 힌두교를 만든 것은 바로 『바가바드기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393쪽, 해설]

- 길희성 역주,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가장 평이 좋은 길희성 역주 바가바드기타를 읽고, 부산대학교 박효엽 교수가 (당시는 교수가 아니었지만) 쓴 『불온한 신화 읽기』를 읽으니, 현대 힌두교가 지니는 여러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힌두교는 본래부터 다신교에 어떤 종파가 지배하고 있지도 못했다. 일종의 토착 민간 신앙 차원에서 발전이 멈춰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도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19세기에 '재발명'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약성경마냥 바가바드기타의 지위가 급상승하였고, 크리슈나는 '크라이스트'의 지위에 올랐다.

문제는 카스트 제도. 그 전까지도 인도를 관습적으로 묶어놓던 카스트 제도는 바가바드기타 역시 열렬하게 옹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약성경과 달리 바가바드기타는 '보편 해방의 경전'이 되지 못했다(그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힌두교 신학자 혹은 신도들도 상당히 많은 듯하지만). 결국 카스트 제도는 인도가 '현대화' 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고한 종교적, 이론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소리.

박효엽의 <불온한 신화 읽기>는 특히 이 지점을 충분한 분량을 동원하여 잘 언급하고 있다(제3장 "『기타』가 폭력을 옹호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과 윤리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무사 계급'의 특수한 의무를 앞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경우 힌두 신화 체계에 강하게 의존하지 않는 한 다수에게 설득력을 지니는 도덕 철학 체계를 이루기가 어렵다.

한국은 '의무'라는 개념이 아예 실종된 사회다. 특히 군복무와 관련된 논의를 보고 있노라면, '국방의 의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한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와 같이 의무 개념을 해석하며, 특수 의무를 보편 의무보다 절대적으로 앞세우면,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끔찍한 차별과 배제의 구렁텅이가 되고 만다. 『바가바드기타』를 비롯한 인도 철학을 애호하는 서구의 리버럴 엘리트, 서구 리버럴 엘리트를 흉내내는 한국의 식자층들은, 은연중 자신을 브라만 계급에 대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2022-05-13

동맹과 보험

우크라이나가 지금 나토에 가입할 수 없는 이유는 전쟁중이기 때문이다. 나토는 가입국이 전쟁하면 자동 참전하게 되어 있는데, 당장 나토가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토는 군사 동맹이며,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 그 존재 이유다. 우크라이나는 나토가 나토이기 때문에 나토에 가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암보험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보험은 병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정작 병에 걸려 있거나 질병 이력이 있거나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은 보험 가입을 제한당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결론: 한미동맹, 있을 때 잘 하자.

참고기사: "나토 가입, 핀란드·스웨덴은 되고 우크라는 안되는 이유", 뉴시스, 2022-05-13

2022-04-30

희망 ≠ 고문

문득 드는 생각. '희망고문'이라는 말, 과연 타당할까요.

희망은 고문이 아닙니다. 절망하고 있다고 해서, 혹은 희망을 버린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고통은 어떤 식으로건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차분히 응시하는 자(불교적 용어를 쓰자면 觀하는 자)는 그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택할 수 있을 따름이죠.

'희망고문하지 마' 같은 식의 표현이, 제가 이제 만으로도 30대 말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을 퍽 나약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한 마디 덧붙여 보게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희망을 버리지 맙시다.

2022-04-29

자기 투사: 미국은 러시아가 제대로 군사 개혁을 했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현재까지 드러낸 온갖 난맥상의 원인이야 분명. 부패했고, 사기가 낮고, 실전 경험도 부족하고 등등.

그런데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대가 이지경일 줄은 몰랐음. 왜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을 실제보다 높게 보고 있었을까?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aka 그루지아) 침공 당시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못 보여줌. 군사적 치욕을 경험. 그 후로 국방 예산도 엄청 늘림.

미국은 그걸 이렇게 해석했음. 러시아 군대가 진짜 강해졌겠다.

그런 판단의 기저에는 '사람은 남을 평가하면서 결국 스스로를 바라본다'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했음.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굴욕을 맛본 후 철저한 분석과 개혁을 단행. 그래서 1차 걸프전에서는 한 해중 가장 짧은 2월 한 달이 다 지나기도 전에 나라 하나를 쓰러뜨리는 괴력을 과시.

미국은, 자기들이 그러니까, 러시아도 제대로 군사 개혁을 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는 소리.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교훈'이 있음. 

문재인 정권이 5년 내내 했던 반일 선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일본을 상대로 했던 손가락질, 결국 문재인과 민주당의 멘탈리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던 것임. 

같은 비판을 스스로에게도 해볼 수 있어야 성숙한 어른이겠지요. 길지만 재미있는 기사입니다. 

"This belief was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Russia had undertaken the same sort of root-and-branch military reform that America underwent in the 18-year period between its defeat in Vietnam and its victory in the first Gulf war. In 2008 a war with Georgia, a country of fewer than 4m people, though successful in the end, had exposed the Russian army’s shortcomings. Russia fielded obsolete equipment, struggled to find Georgian artillery and botched its command and control. At one stage, Russia’s general staff allegedly could not reach the defence minister for ten hours. “It is impossible to not notice a certain gap between theory and practice,” acknowledged Russia’s army chief at the time. To close that gap, the armed forces were slashed in size and spruced up."

https://www.economist.com/briefing/how-deep-does-the-rot-in-the-russian-army-go/21808989

2022-03-26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정신이 물질을 이기지 못할 때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슬픈 전시다. 푸틴이 전쟁을 시작한 후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면서 4월 중순으로 예정된 전시를 앞당겨 종료하네 마네 하는 맥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닌 내부 맥락만 놓고 보더라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서글퍼지는 전시다. 물질적 영역, 다시 말해 현실에서의 공허와 빈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극복하고자 하던 이들의 발버둥은, 결국 초라한 물질적 형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 유명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보자. 도판이나 화면상의 이미지로 접할 때와 달리, 실물을 보면 인상이 완전히 다르다. 보존 상태가 너무 나쁘기도 하고, 이전에 '물질'적 측면에서 너무 작품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미술 작품은 실물을 볼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좋은 의미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유화가 그렇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그 역사적 의의나 화면상의 이미지에 익숙한 채로 들어가 실물을 보면 실망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물감, 캔버스, 기타 여러 측면에서, 작품을 통해 '초라함'을 느끼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질적 에너지와 풍요의 과잉이 낳은 정신주의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가 빈곤하고 빈약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변방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택하지만 본인은 내가 정말 이걸 원해서 택하고 있다고 자기 기만을 거듭하는, 그런 정신주의랄까.

우리 현대 한국인, 특히 20세기 출생자들은 그 변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변방인이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개인적인 행복을 달성하고자 할 때, 변방적 특질과 줄타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그래서 최근 1960-1970년대생들이 '눈떠보니 선진국 이얏호' 꼴값을 떠는 게 우려스러웠으나, 그들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자이며, 정권을 뺏겼으니 이제 그들은 다시 헬조선 타령을 할 것이다. 이런 정치 과몰입 또한 변방성의 특징 중 하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변방의 인간들이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는데,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라는 것은 러시아 문학과 마찬가지인, 그런 맥락을 놓고 보면 잘 이해된다는 뜻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좋은 전시라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러시아'에 방점을 찍고 보면 분명히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법칙 중 가장 슬픈 법칙인 '원판 불변의 법칙'을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왜 사회주의라는 서구 사상의 뉘앙스 대신 뭔가 토속적이고 구린 느낌 일색인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1부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을 보던 나는 왠지 그 뿌리가 결국은 러시아적 향토성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걸 떨쳐내고 좀 어케어케 해보려던 머리 좋고 예민한 자들은 소련이 된 러시아에서 살지 못해 망명하거나(칸딘스키), 소련에서 두 번이나 간첩죄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일찍 죽었다(말레비치).


이 전시에서 가장 큰 감명을 준 작품은 따로 있다. 알렉산드르 티실레르가 그린 <장애인들의 시위>다. 야만적인 나라에 사는 이가 그 야만성을 직시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각별하게 느껴진 건, 물론 어제 오늘 내가 경험한 어떤 맥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월 17일까지 예정되어 있으나 언제 휙 돌아가버릴지 모르는 전시.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입장료 2만원, 전시기간중 휴무.

2022-03-22

인수위에 여성가족부 포함시켜야

2017년 대선 당시의 일. 홍준표 후보의 자서전에서 '돼지발정제' 운운했던 대목의 논란이 커지자, 다른 후보들이 일제히 비난했다.

그 중 가장 수위가 셌던 사람은 안철수. '나는 홍준표 후보와 대화하지 않겠소'라고 TV 토론에서 선언했다.

수세에 몰려 있던 홍준표는 안철수의 그런 대응에서 활로를 찾았다. '안 후보님? 정말 나랑 이야기 안 할 거에요? 응?' 이러면서 어린아이 놀리듯 가지고 놀았고, 오히려 안철수가 외통수에 몰렸다.

여성가족부를 대하는 인수위의 모습을 보며 문득 그 무렵 생각이 든다.

여성가족부는 신뢰를 잃었다. '피해호소인' 운운하는 모습을 보며 등을 돌린 여성들도 많다.

하지만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던 사업 중에는 여성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많다. '여성부'가 아닌 '가족부'로서 집행하던 예산도 상당하다.

그런 것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 재편성해야 한다. 또 어제 오늘 거론되고 있는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예산 등 석연찮은 대목을 확인하고 교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인수위 테이블에는 여성가족부 자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가족부를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여성가족부를 불러야 하지 않나?

'여성가족부 해체'라고 썼으니 인수위 단계에서 아예 포함도 안 시킨다! 이런 태도가, '나는 홍준표 너님과는 토론 안해!' 해버리던 2017년 안철수의 미숙한 태도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이런 태도를 취하면 대외적으로 '안티페미 행정부'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게 될까? '석유 대신 반도체가 나오는 사우디' 정도로 취급당할 것이다. 나라망신이다.

윤석열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 그 외 관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2022-03-21

'광화문 시대'와 작별을 고하고 싶다

"결국 미 대사관은 이 논란이 본격화되기 전에 마련해 뒸던 정동 옛 경기여고 자리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미국은 90년 을지로에 있던 미 문화원과 1만5117㎡에 이르는 경기여고 땅을 맞바꾸기로 서울시와 합의한 상태였다. 이 부지는 미 대사관저와 바로 맞닿아 있어 대사관과 함께 직원 숙소까지 지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로 유명한 마이클 그레이브스에게 의뢰해 지하 2층, 지상 15층짜리 대사관 설계까지 마친다.

하지만 만사 쉬운 일은 없는 법.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순조로워 보였던 대사관 이전 계획은 돌연 암초를 만났다. 대사관을 지으려던 경기여고 자리가 역사적 유적지로 밝혀진 까닭이다. 조사 결과 문제의 땅에는 1933년까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모셨던 선원전(璿源殿)과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흥덕전(興德殿) 등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단체들은 “조선시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 위에 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미 대사관은 “한국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경기여고 이전 계획을 포기한다”고 2003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741863

경기여고는 순종이 어명으로 만든 학교임. 조선 왕실에서 '야 너네 이 땅 써라'해서 그 땅 위에 지었음. (사진 속 빨간 동그라미)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경기여고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또 유의미한 '조선시대의 유산'이었는데, 경기여고는 그 땅 버리고 강남으로 훌훌 갔음.

그런데 그 자리에 미국이 대사관 좀 지으려고 하니까 뭔 일이 벌어지냐? 위에 인용된 칼럼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죠.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바 아니었던 유물 나왔다고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남.

결국 미국 대사관은 대사관저와 딱 붙여서 멋들어지게 지어보려던 건물 계획 다 포기하고, 용산 미군기지 옆으로 가려고 했는데, 미군기지 이전에 차질이 생기면서 광화문 한복판에 뒈지게 낡은 건물에서 영원히 살고 있음.

그래서 그 경기여고 땅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그냥 허허벌판임(2030년대까지 '선원전터 복원'을 한다는데 그게 문화재로서 유의미함? 그렇게 믿을 사람은 유홍준 말고 아무도 없음).

이게 뭐야? 뭐하는 짓이야? 아무도 모름. 문화재를 지키자! 하면서 그 땅 기꺼이 쓸 유일한 소비자를 쫓아내놓고, 그냥 비워두고 있음. 이런 비합리적인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 미국이 싫어서. 혹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청와대에서 벗어나 용산으로 간다는 결정의 문화사적 의의를 짚어보기 위함.

대통령이 청와대를 버린다? 이건 청와대만의 문제가 아님. '광화문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도 됨.

'광화문 시대'란 무엇인가? 김영삼이 중앙청을 박살내면서 시작된 시대. 민족주의적 감성이 모든 합리와 이성과 계획의 상위 개념으로 날뛰고, 그 누구도 그것을 감히 말리지 못했던 시대. 문화재청 같은 일개 '청'이 민족의 제사장 행세를 하며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시대.

일본과 전쟁을 해서 독립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목 하에 역사 왜곡을 하는 게 옳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민족정기'를 세우고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억지 부리고 악다구니 쓰는 게 뭐 좋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이제 좀 새로운 세상에 살아보고 싶다는 소리. 그 뭐 광화문의 함성이니 종로의 정취니 피맛골의 그리운 풍경이니, 다 그냥 '즐기는 문화'의 범위로 넘기고, 우리는 갑시다 미래로.

2022-03-13

'20대 남자 성비 문제'의 진짜 희생자

2020년 현재 연령별 성비

20대 남자들은 여자보다 1.2배 많고, 그래서 짝을 구하기 어렵고, 일자리도 예전처럼 쉽게 구할 수 없고, 그래서 피해자다.

이런 소리를 이제 남초 커뮤니티가 아니라 나름 양식과 식견이 있는 기성세대 중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옳은 말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성비 박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희생자 집단을 가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여성주의적 맥락에서 낙태권은 곧 여성의 선택권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 낙태에 반대하는 서구 기독교 계열이 스스로를 '프로 라이프'라 할 때, 여성주의는 '프로 초이스'라 하여 여성의 선택권으로서의 낙태권을 옹호하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1세계 문제다. 한국, 인도, 기타등등 남아선호 및 여아살해가 흔한 제3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게 전개됐다. '시댁과 사회의 강요로 인한 여아 낙태'를 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낙태시술이 성행한 것이 여성 인권의 억압과 맞닿은 현상이었던 것이다.

<사이언스>의 기자였던 마라 비슨달은 <남성 과잉 사회>에서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와 서구를 비교해보면 아시아에서의 낙태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와 서유럽에서 낙태 합법화는 보통 낙태 건수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것은 보기만큼 역설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태법을 완화할 때는 피임도 함께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와 아울러 애당초 임신하지 않을 권리가 대두된다. 하지만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연구원 변화순은 "가족계획정책에는 성 인지적 관점(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중심으로 개념과 정책을 검토하는 관점--옮긴이)이 빠져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208쪽]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

'너무 많이 태어나서 짝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그렇게 남자들을 '과잉생산' 하기까지, 낙태를 강요당했던, 이대남들의 어머니 세대는 안 불쌍한가?

나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택도 없이 이대남에게'만' 감정이입하며 엉엉흑흑 불쌍불쌍 둥기둥기 해주는지 이해를 전혀 못하겠다.

(아니, 실은 잘 알겠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2022-03-08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답: 불가능하다. 돈도 결국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나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해외 금융자산 동결. 아무리 많은 '외환보유고'를 쌓아도, 그게 자기 땅 자기 곳간에 물리적으로 들어 있지 않은 한, 이토록 쉽게 빼앗기고 마는 현실을 전 세계인이 깨닫고 있다.

링크한 WSJ 기사도 그런 것. 아예 첫 줄부터 이렇게 묻는다. "What is money?" If Russian Currency Reserves Aren’t Really Money, the World Is in for a Shock"

실로 그렇다.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그토록 열심히 축적해온 '외환보유고'라는 게, 이런 식이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국과 전쟁하려고 하면 싹 동결될 싸이버 머니 아닌가?

그런데, 원래 돈이 그런 것이다. 돈을 돈으로 만드는 건 화폐 구성 물질의 재화로서의 가치나 유용성이 아니다. 신용을 보증해줄 권력, 힘, 폭력, 그런 것들이 돈을, 특히 기축통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노정태라는 훌륭한 필자가, 신동아라는 역사와 전통의 근본 시사 정론지에 쓴, 이 칼럼을 참고해볼 수 있다.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을 한 단계 더 이어가 보자. 민주당의 통일정책이란 결국 '평화를 돈으로 사자'로 요약된다. 북한에 유화책을 펴서 돈을 주고, 돈을 더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면, 우리 말을 잘 들을 거라는 논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평화란 힘이 충분히 강해 상대방이 나를 넘보지 못할 때 구현되는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돈을 적에게 주는 식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악당에게 돈을 줘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란 힘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악당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은 평화의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짓이다.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그것은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전쟁을 이겨 세계를 정복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워낙 막대한 힘으로 평화가 강요되었기에 돈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드디어 '장기 20세기'가 완전히 끝났다. 지정학과 네셔널리즘의 시대가 돌아왔다. 우리 국민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2022-03-04

바가바드 기타(1)

얼마 전 반야심경의 현대어 번역 어쩌구 하는 글을 썼는데, 그 주제가 머릿속에 남아서, 이것저것 틈틈이 좀 더 찾아보다가, 며칠 전 거리에서 '샨티'라는 이름의 인도 식당을 보았고, 엘리엇의 '황무지'의 마지막 줄인 '샨티 샨티 샨티'를 중얼거리다가, 최초의 핵실험이 터져나올 때 오펜하이머가 주절거렸던 '나는 이제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도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대목을 연상했으며, 그리하여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 니체를 굳이 읽을 필요조차 없다. 니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문학적으로도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및 여타 인도 철학을 애호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강렬한 텍스트가 결국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며, '너희 크샤트리아들은 우리 브라만이 시키는대로 가서 쌈박질이나 해라'는 취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을 애호하는 자들과도 마찬가지다(니체 철학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애매하고 또 우스꽝스러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러셀이 <서양철학사>에서 신랄하게 비웃은 바 있다).

하지만 실로 강렬한 텍스트인 관계로, 머리에서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 내지는 '보다 나은 계급'의 일원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기는 서구의 리버럴 계층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더욱,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을 테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필립 글래스의 사티야그라하 무대 영상을 세 번째 돌려보다가, 이제 한 번쯤 글로 털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타자를 쳤다.


 

2022-02-27

우크라이나 전쟁: 젊깨문과 늙깨문

목수정을 비롯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발언. 이들은 러시아 선전선동을 거의 그대로 주워섬긴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 더 나아가 미국이 유인, 조장, 방조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가 '군사행위'를 하는 건 맞지만 '적대행위'는 미국과 젤렌스키 내지는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 세력이 먼저 했다는 논리다.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듣고 많은 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특히, 유시민이 쓴 이러저러한 책들을 무슨 대단한 지혜의 교과서인 양 달달 외우고 큰,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 중 상대적으로 젊은 30대 말-40대 초반 세대가 그렇다.

편의상 그 세대를 '젊깨문', 그보다 나이 많은 40대 중반-50대까지를 '늙깨문'이라고 해보자. 젊깨문들은 나름 서구적 가치에 친숙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는 젊고 쿨하지만 저들은 늙고 촌스럽다'는 전제를 깔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을 비토한다.

젊깨문들은 늙깨문(목수정을 비롯 대놓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과 나토 욕하는 바로 그 세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지는 않다. 후진국 세대인 늙깨문과 달리 나름 중진국 세대이기도 하고, 그들이 금과옥조로 섬기는 정치적 올바름과 글로벌한 가치 등을 놓고 볼 때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현재 자아분열에 빠진 상태다. 늙깨문들이 속속들이 친러주의, 친푸틴, 침략전쟁 옹호 발언을 이 시점에, 어떻게든 자신의 세계관과 기존의 인식을 통합해야 하는 난관에 처해 있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젊깨문들 역시 깨문버스 특유의 '선한 우리편과 악한 저들의 대결' 같은 원시적 대립 구도를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아무리 비상식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을 벌여도, 젊깨문들은 그 러시아를 옹호하는 늙깨문을 '우리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의 온갖 망언을 못 본 척 하고 지나가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바로 그 젊깨문 세대의 일원으로서 깊은 탄식을 담아서 하는 소리다.

젊깨문은 '머리'로는 늙깨문에게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가슴'으로는 그들을 따라가고 만다. 최근 돋보이는 한 사람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2019년 2월, 나는 이런 글을 썼었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에 낯익은 얼굴이 한 분 보인다. 안희정의 부인 민주원 씨가 '내 남편은 미투가 아니다 불륜이다'라고 하자 그것을 열심히 SNS로 옹호하시던 최민희 전 의원. 현재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장,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현). http://pcpp.go.kr/info/informati

저 최민희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최민희다. <황금빛 똥을 싸는 아이>의 저자인, 말하자면 출세한 안아키. '극문 똥파리' 빼면 다 뭉치는 분위기라고 말한 이재명 선대위 미디어특보단장.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구한말 무능부패한 왕과 조정이 일제침략을 못막았듯 준비안된 우크라이나대통령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이 희생되고 있다"고 말한 바로 그 최민희.

젊깨문들은 이럴 때 혼란에 빠진다. 최민희가 입으로 황금빛 똥을 싸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최민희는 이재명 캠프에 있고, 이재명은 젊깨문들의 머릿속에 '절대 타도해야 할 악'으로 설정된 국민의힘과 그 후보인 윤석열과 맞서고 있다. 일종의 시스템 오류다.

그래서 젊깨문들은 어떻게 할까? 몇 가지 현실도피 기제가 있다. 갑자기 뭐 먹는 사진이나 음악 감상문 같은 걸 올린다거나, 다짜고자 맥락없이 #PrayForUkraina 같은 해시태그를 띡 붙인다거나, 김어준 따위가 생산해 퍼뜨리는 윤석열 관련 흑색선전들을 열심히 퍼다나르며 '그래도 민주당은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고 자기세뇌를 강화한다거나...

그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며 따른다는 가치를 민주당이 모두 배신하고 있지만, 젊깨문들은 늙깨문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못한다. 가스라이팅의 희생자여서일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에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위탁하고, 알량한 소비 문화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세대의 일원이며,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2022-02-15

갑질사회, 캅질사회

일행이 통으로 전세 내어 쓰는 기차에서 앞자리에 발 올린 게 그렇게까지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일인가? 시트가 좀 더러워졌다 한들 적당히 털고 가면 될 일 아닌가?

또 마찬가지로, 어떤 술집을 전세 내듯이 해서 온 단체 손님들이, 술 마시다가 담배를 피운 게 그렇게까지 욕 먹을 일인가? 그것도 불판에 고기 굽는 집이라면 어차피 계속 환기해야 하는데 담배연기가 그렇게 대수인가?

물론 현행법상 실내 흡연은 과태로 부과 대상이다. 하지만 그게 검사를 사칭하고, 음주운전하고, 자신의 친족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고, 시장 권한으로 특정 업체에 아파트 개발 이익을 몰아준 것과 같은 급은 아니지 않은가?

윤석열이 기차에 발 올린 사진을 보자마자 '빨리 사과하고 털고 지나가자'고 하는 것은 타당한 판단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냐 권위의식 쩐다'는 식으로까지 나가는 것은 좀 이상해보인다. 좁은 기찻간에서, 주변인들이 익스큐즈 한다면, 그 정도 발 뻗는 것도 안 되는 일인가.

나는 만성 비염 환자다. 가급적이면 마스크를 안 쓰는 게 내 건강에 유익하다. 그래서 나는 실외에서 근처에 사람이 없으면, 특히 밤이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밤 산책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상당수 혹은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에서. 이건 코로나 예방이라는 목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세하게나마 본인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다.

사람들이 왜들 이러는 걸까? 윤석열의 기찻간 발 올리기 논란, 그에 맞불이라고 제시된 이재명 담배 짤방 등을 놓고 보니, 이해가 간다.

한국에 만연한 것은 '갑(甲)질'만이 아닌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눈을 홉뜨고 감시하는 '캅(cop)질'도 일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범죄, 특히 권력 가진 자의 권력형 범죄는 '우리편'이라고 잘도 봐주면서, 막상 기껏해야 경범죄에 지나지 않을 무언가는 아주 죽어라고 잡아 족치는 이상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기찻간에 발 올린 적 없다. 고속버스에서도 그런 짓 하지 않는다. 의자도 뒤로 젖히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서 가는 성격이다. 담배는 애초에 피우지도 않는다. 그런 짓을 옹호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또한 이 글을 이재명 쉴드 치는 것으로 읽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오독하고 화내는 리플을 솔직히 보고 싶지 않고, 지겹다. 지우던가 가리던가 해버릴 예정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우리가 진정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원한다면, 중범죄와 경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중범죄는 확실히 잡고, 경범죄는 시민들끼리 서로 가볍게 훈계 계도하거나 그냥 봐주기도 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갑질'과 '캅질'이 횡횡해서야 '사람 사는 세상'은 커녕 '법치국가'도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

2022-01-29

신비주의의 해로움, '무'를 바라보되 '유'에서 살아가기

1. 신비주의의 해로움

조선일보에 실린 최승자 인터뷰(2010)를 읽었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시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요? 오늘 찾아온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그건 틀린 말입니다. 자기 삶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요. 괜히 '우리 시대가 저 친구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데, 이는 내가 선택한 삶이었어요. 나 혼자 겉돌았고 그런 공부를 했고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

―가장 궁금한 대목은 시를 쓰던 당신이 폐인(廢人)처럼 됐다는 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이유로 망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신비주의(로 통칭될 수 있는 것 모두)가 이렇게 해롭다. 적당히 세속적이고 상스러워서 자기 몸에 득 될 만큼만 먹어도 유해한데, 최승자처럼 모 아니면 도, 이런 강단 있는 사람이 탐닉하면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음.

있는 그대로 보이는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너머의 초월을 사유하는 방법. 로마 몰락과 기독교의 홀로서기 당시 교부들이 목숨 걸고 연구한 주제.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철학은 미사여구 음풍농월이 아님. 잘못된 철학은 사람, 사회, 국가, 문명을 망가뜨린다.


2. '무'를 바라보되 '유'에서 살아가기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한 글이 있다. 제목은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

반야심경_현대어_번역.jpg

반야심경의 내용을 일본 애니메이션의 독백체로 옮긴 것이다. 아마 일본 웹에서 일본어로 작성된 텍스트를 한국어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는 주지하다시피 '무' 혹은 '공'을 직시하는 종교다. 없으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에서 유로 왔고, 유에서 무로 돌아간다. 피안과 내세와 안녕을 비는 그 모든 행위는 거짓이다. 우리의 삶과 존재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거기서 생각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시인 최승자가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를 향한 끝없는 공부에만 빨려든다면?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으로 돌아가보자. 반야심경을 원래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갸웃할만한 대목이 있다. 원문의 내용을 굉장히 길게 풀어서 번역한 나머지, 원문의 어느 대목의 번역인지 짚어내기도 어려운 그런 부분이 있다.

착각은 하지 마.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소리는 아니야. 꿈이나 공상이나 자비심을 잊지 마. 그걸 할 수 있다면 열반은 어디에나 있어. 사는 방법은 어느것 하나 변하지 않아. 단지 받아들이는 방법이 변하는 것 뿐이지.

딱 봐도 불경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혹은, 이런 내용이 정말 이렇게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 이건 '번역'이 아니라, 주관이 많이 개입한 해석이다. 일종의 재창작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의 번역이니 말이다.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여기에 저 내용이 있다고? 음... 없지 않다. '무고집멸도'. 그것이 저 내용이다. 고집멸도 중 '멸'에 속하는 것에 집착하고 탐닉하면, 수행자는 '무정한 사람'이 되거나, 꿈이나 공상이나 자비심을 잊은 수행 광인이 된다.

그것을 반야심경은 단 5자로 적어놓았고,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은 구구절절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저 내용의 압축을 저렇게 풀어서 전달하는 게 과연 '옳은' 번역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을 오역이라 매도할 수는 없다. 그 '오역'은 어디까지나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아예 필요하지 않다. 우리 가족 돈 잘 벌게 해달라고 교회 가고 절 가고 점집도 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다. 그들에게는 과도한 수행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끔, '무'를 바라보다가 정말 그 '무'에 잡아먹히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심연을 바라보다가 진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반야심경의 원문에는 '무고집멸도 무지'가 적혀 있고,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이라는 걸 쓴 (아마도) 일본인은 그 내용을 참 길고 자세하게도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무'를 굳이 바라보고야 마는 모든 이들의 평온을 빈다.

저항적 지식인이 체제에 복무하(게 하)는 방법

옌롄커의 대표작은 '레닌의 키스' 이후 나왔다. 하지만 이 책들은 중국에서 금서가 됐다. 작가 옌롄커는 '가장 문제적 작가'가 됐다. 작가도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자기검열은 한창 강화됐고, 정부에다가는 해외 출판이라고 허락해줘 고맙다고 해야 한다. 나랏돈 받아 글 쓰는 중국작가협회 소속 전업작가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케 한다. (링크)

1) 국가가 월급을 줘서 먹고 살게 해준다.
2) 책을 내는 족족 금서로 만든다.
3) 단, 해외 출판을 허용한다. 해외에서 인터뷰도 하게 해준다.

옌롄커는 책을 쓰고, 내고, 생계를 보장받는다. 중국은 '우리에게도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게 있다'는 알리바이를 얻는다.

나는 그의 입장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온전히 상상하지 못한다. 옌롄커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 충분히 강력한 독재 체제는 '비판적 지식인'마저도 이렇게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이건 '대중적 지식인'이건 마찬가지다. 작가 역시 다른 직군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평가받아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옌롄커의 '저항'이 따옴표 치지 않아도 되는 저항이 될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2022-01-17

미군 부대에서 눈 치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미군은 눈 안 치운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미군도 눈 치운다. 내가 해봐서 안다. 여차하면 소대장 중대장도 삽 들고 나와서, 커다란 제설차가 다니지 못하는 구석구석 다 치운다.

나는 '미군은 사람 고용해서 치우는데~' 같은 소리에 담겨 있는 발상이 싫다.

'내가 군대에 가서 눈이나 치울 사람이 아닌데 개고생했다'는 식의 억울한 자의식이 싫다.

미군이건 한국군이건 중공군이건, 아니 군인이 아니어도, 눈이 오면 치워야 한다. 눈을 치워야 길이 뚫리고, 길이 뚫려야 전쟁을 하건 일을 하러 가건 할 거 아닌가.

'나는 군대에서 눈을 치워서 억울했다'는 소리,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다. 나는 그런 못난 소리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남자들에게 조용히 속으로 -1점을 부여한다.

나는 뒷짐지고 에헴 할테니 너희가 다 해라, 이런 식의 종놈 부리고픈 양반 근성이 드러나는 못난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세상에 '누군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내가 하거나, 명확한 보상을 제공하며 남에게 정확하게 지시해야 한다. 떼떼거리는 못난 소리 그만들 하자.

2022-01-14

왜 한국인들은 군인을 싫어할까

한국 사회 전반의 군인 멸시는 굉장히 뿌리 깊은 것이고 여자들 탓만 하는 게 이상하거든요. 제가 카투사 있을 때 미군 중에도 저한테 물어본 놈이 있었습니다. 왜 너희 나라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 군인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고.
 
일단 군사 쿠데타를 경험했던 나라라서 실은 군대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라 겁내는 거다. 그리고 온 남자들이 다 군대에 갔다 오면서 각자의 나쁜 기억을 갖고 오고 그걸 다 떠들다보니 전반적 인식이 더욱 안 좋다, 뭐 이정도 설명을 했는데 그래도 잘 납득하지는 못하더군요.

사실 우리가 미국식 군인 땡큐 문화를 당연한 표준처럼 여기는 게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뭐가 됐건 겉으로는 예쁜말 고운말로 포장하는 문화적 풍토가 있죠.
 
반면 우리는 뭐든 일단 까고 냉소하는 게 디폴트. 군필자들이 군대에 대해 좋은 이야기 안 하는데 군대 안 갔고 갈 일도 없는 사람들이 군인을 존중하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닐까요.
 
미국인들처럼 땡큐 해피 원더풀 알러뷰 같은 소리 입에 달고 살지도 않는 한국인들이 군인에게만 땡큐 할 리가 없잖아요 상식적으로다가...
 
저도 한 사람의 군필자고,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천은 '나의 군 생활을 욕하지 않기', '내가 군대에서 배웠던 것을 좋은 의미로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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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에서 어떤 분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