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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6

[서평] 로널드 드위킨, <신이 사라진 세상>

신이 없더라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늙은 법철학자의 마지막 질문] 로널드 드워킨의 <신이 사라진 세상>
프레시안Books, 2014년 4월 25일.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6656 

1.

법대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수능 성적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노닥거린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참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수능 점수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학교 중 제일 '좋은' 곳에 원서를 냈다.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입수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봤는데, 제목이 기억나는 것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밖에 없다. 일찌감치 백수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생활을 반복했고,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 공부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민법총칙 교과서에는 스위스가 '瑞西(서서)'로, 오스트리아가 '墺地利(오지리)로 표기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책을 덮어버리고, 당시만 해도 여기저기 퍼져 있던 교내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귀동냥을 하고 술을 마시다가, 그마저도 시들해질 때쯤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그래도 법대에 왔는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법학에 대한 흥미를 북돋워줄 주변 서적들을 찾아 읽겠다는 발상이 깔려 있었다.

'단지 법학자를 넘어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몇몇 있다. 가령 독일의 형법학자이며 법철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부르흐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잠언집을 읽어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이 담긴 에스프리들이 묶여 있었는데 적어도 당시의 내게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일종의 '진입 장벽'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라드부르흐의 법철학, 특히 "극도로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라드부르흐 공식' 등은, 나치 시대에 대한 독일 법학계의 평가와 반성이라는 맥락이 있어야 이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가 '합법적'으로 '불법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따라서 그들이 만든 법이 문제였지 법조계는 비교적 결백하다는 항변이 그 이면에 깔려있기도 하다. 아무튼 당시에는 그의 말과 법철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른 법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법은 그 법이 통용되는 한 사회 내에서는 보편적인 규범력을 지니고, 따라서 그 법을 해설하거나 법에 기반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법학 역시, 대체로 특정 사회의 맥락 속에서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허버트 L. A. 하트의 <법의 개념>(오병선 옮김, 아카넷 펴냄) 같은 책을 읽어서 곧장 이해할 수 있는 한국 법학도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오늘날의 나는 당시의 나를 변호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의 법철학은 영미법 체계를 해석하면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흘러흘러 로널드 드워킨이라는 이름을 만났지만, 역시 학부생이던 그 당시에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유일한 책이었던 <법의 제국>(로널드 드워킨 지음, 장영민 옮김, 아카넷 펴냄)은 그저 두껍고 어려웠을 뿐이다.

2.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고 전공 대상은 칸트로 선정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다. 책을 그냥 쓱 읽어봤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혹은 이해했다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칸트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데, 게다가 여러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드워킨의 마지막 책 <신이 사라진 세상>(김성훈 옮김, 블루엘리펀트 펴냄)도 그렇다. 법학적으로 응용되어 있는 부분을 빼고 나면, 이 책의 논의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백종현 옮김, 아카넷 펴냄), 이른바 '그룬트레궁'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 칸트의 핵심적 논지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1) 윤리 법칙은 상대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렇게 파악된 윤리 법칙은 이른바 '정언 명령'으로,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정언 명령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고,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3) 신의 존재는 이러한 윤리형이상학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정언 명령의 최종 담지자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할 따름이다.

<신의 사라진 세상>의 논리 전개도 이와 유사하다. "종교적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종교의 과학 영역 그리고 의식을 통한 숭배 의무와 같은 신에 대한 책무를 거부한다"(43쪽)고 할 때, 드워킨은 칸트가 말한 (1)의 논지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어떤 인생을 사는가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잘살아야 할, 빼앗을 수 없는 윤리적 책임감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같은 곳)는 말은, 칸트가 말한 (2)의 논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종교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워킨의 주장 가운데 '철학적'인 부분은, 사실상 일종의 탄탄대로 위에 놓여있는 셈이다. "우리는 처벌을 내리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판이 필요하다고 가정해왔다. 하지만 오히려 신이 존재해야만 심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183쪽)고 말할 때, 드워킨은 '신의 요청'에 대한 칸트의 주장, 앞서 우리가 정리한 (3)번 논지를 되풀이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직전까지 영미 법철학계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던 그는 굳이 왜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칸트가 이야기한 윤리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이른바 '전투적 무신론자'들(및 그들을 따르는 지식인들)과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대중들 혹은 그러한 성향의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이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가능하다면, 또한 무엇이 윤리적인 삶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때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면,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그렇게까지 전투적이어야 할 필요는 사실 딱히 없다. 반대로, '전투적 무신론자'들 또한 실은 일종의 종교적인 경외감과 진지함으로 삶을 바라보고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면, 유신론자들 역시 그들을 특별히 적개시해야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드워킨은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렇다. 그는 철학자이며 동시에 법학자이기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신 없는 종교'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현실 속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능을 동일하게 구현한다면, 그 또한 종교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드워킨은 자신이 1992년에 쓴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종교를 정의한다. "종교는 인간 개인의 삶을 초월적인 객관적 가치와 연결함으로써 더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148쪽) 얼핏 듣기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종교를 정의할 경우,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가령 낙태와 같이 기존 종교의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 역시, 일종의 '종교적'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 보호되는 권리가 과연 무엇을 보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드워킨은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고, 또 답변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사람들의 윤리적 독립성을 지켜주는 것인지, 드워킨은 묻는다.

가령 내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마치 고대 이집트인처럼) 신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나의 종교의 자유 중 첫 번째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내가 종교적 환각 상태를 넘나들기 위해 국가에서 금지한 약물을 복용하고자 한다면, 그럴 때 나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위한 종교의 자유가 아닌, 나의 윤리적 독립성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해야만 한다.

첫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는 종교적 광신 등으로 향할 우려가 있다. 또한 국가가 두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를 종교의 자유로 보호한다면, 종종 '자신만의 윤리'를 세워나가며 기존의 법과 질서를 어기는 자들을 법으로 지켜줘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섣불리 해답을 내리는 대신, 드워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은 모두 좀 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지만, 서로 독립적이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은 깊은 종교적 포부의 영역에서는 유신론자들을 완전한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가 자신들과 똑같은 도덕적,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도저히 메울 수 없을 듯 보이는 간극이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도덕적,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은 과학적 의견의 불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도 너무 큰 욕심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174쪽)

4.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낙태와 성에 대한 문제들이 그렇다. 낙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의료 기관은 환자에게 필요한, 환자가 요구하는 의학적 처치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의료 기관의 의무다. 하지만 일부 종교적 성향을 지니는 병원들은 가령 낙태처럼 종교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시술을 거부하고, 그럴 때 자신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종교 단체들이 자신들의 로비력을 발휘해, 동성애 행위(이것은 좀 오래 전 이야기이겠으나), 동성결혼, 조기 낙태 등을 불법화하는 법을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종종 성공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연방대법원은 대체로 위헌 판결을 내리는데, "대법원은 그 판결의 근거를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종교의 자유 보장 조항이 아니라 미국 헌법의 평등한 보호와 적법한 절차의 조항에서 찾아냈다."(171쪽)

대법원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신의 의지를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문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에서 자신의 욕구가 종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 헌법의 상태와는 별개로,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윤리적 독립성의 일부로 대한다면, 진보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172쪽)

그러니까 한 쪽은 타인의 생명 및 삶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고 침해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종교의 자유를 들이밀고,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저 '평등'과 '적법절차'라는, 다소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헌법 원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종교와, 종교가 담지하는 진지하고 신실한 삶이라는 가치 자체를 장기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로널드 드워킨의 유작이 된 것은, 계산한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아름다운 결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평생토록 진보적(인 입장에 가까운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법학자의 눈으로, 또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왔다. 단지 해석에서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인 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답게, 논의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제 ‘Religion Without God’을 <신이 사라진 세상>으로 옮긴 것은 좋은 판단인 것 같다. 신이 사라진 세상도 아름답고 윤리적일 것이라는 그의 낙관적 믿음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5.

철학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딴 후 군대에 갔다. 다행히도 카투사가 되었고,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다. 특히 훈련을 나가면, 나는 통신병이었으므로, 대기 시간이 길었다. 경기도 북부의 어딘가에 있는 탁 트인 벌판에서, 사령부에 인공위성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해놓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드워킨의 《Life's Dominion》이었는데, 내가 한창 읽어내고 난 후에야 <생명의 지배영역>(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내가 읽었지만, 혹은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대가의 문장과 논증을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워킨은 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더욱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안이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논지가 등장했을 때, 그는 특히 《New York Review of Books》 지면을 통해 치열한 반박에 나섰다. 이른바 '오바마 케어'가 통과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것에 그가 얼마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실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싸우는 지식인의 한 표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킨들에 넣어둔 그의 책을 언제 다 읽나 하고 있을 때쯤, 드워킨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설령 그가 더 오래 살았다 한들 내가 그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아쉬웠고, 어떤 면에서는 슬프기도 했다.

법학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 근거가 대단히 부실한 학문이기도 하다.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와 권위가, 한국 같은 성문법 국가의 경우 결국은 법조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미법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법은 왜 법인가? 법이 왜 정당한가? 같은 질문에 대해 통상적인 법학의 범위 내에서는 답하기 어렵다. 법의 정당성과 지엄함은 법 바깥의 세계로부터 출발하고 있고, 종종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끝내 모른척하고 오직 실정법에서 출발하는 법학만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드워킨 같은 사람의 책을 읽는다. 철학적인 원칙과 논리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법한 논증을 만들고, 그것이 현실의 법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혹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지 유려하게 기술한다.

지적인 기반도 없고, 토대도 약하고, 심지어 판사마저도 걸핏하면 '국민의 법 감정'을 운운하며, 검찰은 국정원과 손을 잡고 무리한 기소를 벌이다가 그들 말에 따르면 '간첩임에 분명한' 유우성 씨를 놓아주는 일이 벌어지는 이 한국의 법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과 이상, 시궁창과 별이 빛나는 밤, 그런 차이가 또렷하다.

칸트의 잘 알려진 문구로 이 서평을 끝내도록 하자.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드워킨과 나와 당신은, 그런 면에서 모두 같은 별과 같은 도덕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명복과, 우리 모두의 좋은 삶을 빌어본다.

2020-11-20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 일러두기: 이 글은 『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마티, 2011)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마이클 샌델의 새 책이 나오는 시점이므로, 블로그에 공개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외에 박홍규, 장정일, 이권우, 김도균, 이양수, 최원, 박원익, 이택광, 서동진, 이현우 등 훌륭한 필자분들이 참여한 책입니다. 다른 필자들의 논의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1.

학자나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상인들과 부인들이 동석해 있는 사교 모임들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주의해 보면, 거기에는 이야기와 농담뿐만 아니라 또한 환담, 곧 수다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새로운 내용과 함께 흥미 있게 이끌어가려 하면 이내 소재가 고갈되고, 농담은 쉽게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모든 수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이런 저런 행위의 윤리적 가치 에 관한 수다보다도 더 그 밖의 머리 쓰는 일에서는 이내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발하고 모임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O273/V153

임마누엘 칸트는 사교계의 총아였다. 그는 키도 작고 얼굴도 과히 잘생긴 편이 아니었지만, 특유의 영민함과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밖으로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런던, 제노바, 베니스 등 세계의 주요 도시에 대한 '구라'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많은 경우 그의 이야기는 실제로 해외를 다녀온 사람의 것보다 정확하고 세밀했다. 칸트는 당구를 매우 잘 쳤고, 학창시절에는 내기당구를 통해 학비를 벌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쾨니히스부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 이후로 사교계에서 발을 끊고 이른바 '비판철학'의 구상과 완성에 돌입한다. 그 작업을 끝냈을 때, 이전까지 사람들이 알던 사교적이고 유쾌한 칸트 씨는 사라지고, 대신 우리가 아는 철학자 칸트가 탄생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지난 시절을 잊지 않았고, 도덕철학을 다루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위 인용구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한다고. 저 말은 칸트 자신의 사교계 경험에서 우러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누군가가 진정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만큼은 그 누구라도 즐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것은 근본적인 '인간적 현상'이며,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4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내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하버드 명강의'라는 단어가 수많은 이들을 솔깃하게 했고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이 탁월한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섬세한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이 보수주의적 입장, 즉 공동체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책의 도입부에서 던져놓는 딜레마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공동체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맞닿아있기도 하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설령 그 책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도입부에서 제시하는 딜레마가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열차가 있고, 브레이크는 고장났다. 당신은 그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이 철로를 쭉 달리다보면 공사중인 인부 다섯 명이 치여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편 선로를 바꾼다면 한 사람의 인부만 치여 죽는 것으로 사고를 마무리지을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딜레마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첫 번째와 유사한 듯 하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역시 폭주하는 기관차를 타고 달리고 있고, 다섯 명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데 철로 위의 어딘가에, 열차를 멈출 수 있을만큼 뚱뚱한 사람을 선로 위로 떨어뜨리면 그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 당신이라면 그 뚱뚱한 사람의 등을 밀어서 그를 철로 위로 떨어뜨릴 것인가?

샌델은 말한다.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 사조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 특히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오직 목적으로 예우하라'는 정언명법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자는 그와 같은 추상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나'의 삶의 맥락과 공동체의 가치 기준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샌델은 앞서 제시한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놓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척후병. 그들은 중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만났다. 미군들은 이 민간인들이 탈레반 협력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한다. 만약 그들이 협력자라면, 척후병 뿐 아니라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미군들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들은 민간인들을 풀어주었고, 몇 시간 후 미군 전체가 탈레반에게 포위되었다.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린 댓가로 총 열아홉명의 미군이 죽어야 했다. 민간인들을 그냥 보내주겠다는 결정을 내린 미군은, 그 역시 전투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자신이 내린 판단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입부를 제시한 후 샌델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을 제시한다. 각각 3장씩, 그 내용들이 이 책의 나머지 9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서평들을 살펴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듯 하다. 쉽고 재미있게 정의와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주의가 결국 보수주의적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폭주하는 열차를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2.

사례들이 판단력을 예리하게 해준다는 것은 사례들이 가진 유일하고도 큰 효용이다. 지성의 통찰력의 정확성과 정밀성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사례들은 보통 그런 것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말이다. 왜냐하면 사례들이 규칙의 조건들을 (限界의 境遇로서) 충전하게 만족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고, 게다가 규칙들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경험의 특수한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충분하게 통찰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흔히 약화시키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규칙들을 원칙이라기보다는 공식처럼 사용하는 버릇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로서,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판단력 일반에 관하여'에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이며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칸트 자신을 포함하여 위대한 철학자들 역시 까다로운 도덕적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끝없이 가설적 사례를 만들고 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칸트의 비판처럼 "규칙의 조건들을 충전하게 만족"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필요하지만 유의미한 어떤 '맥락'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답을 시도한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대한 작품은 플라톤의 『국가』일 것이다.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한 소크라테스는 먼저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따르는 것',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과 같은, 당대에 통용되고 있던 규정들을 하나씩 논파한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찾아내기 위해 개인의 삶이 아닌 공동체의 구성과 그 속에서의 삶으로 논의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의 도입부와 그 나머지를 가르는 기준선이다.

바로 그 도입부에서, 등장인물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당대의 통념에 맞서 한 가지 딜레마를 제시한다. 당신에게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성정을 이기지 못해 난폭한 행위를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일 때 당신에게 자신의 무기를 맡겨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상태가 안 좋아진 그가 나타나 자신의 무기를 돌려라고 한다. 당신은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순간 그가 그것을 들고 가서 어딘가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올바름이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개념에 따르자면 당신은 그 무기를 돌려줘야 한다. 무기의 주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 그게 바로 '올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러한 행동이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몇 개 더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통념적인 정의관에 도전하고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펼쳐나갈 토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플라톤이 만들어낸 사례의 맥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이라는 것은,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맡겨놓은 무기'라는 말은 바로 그런 맥락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는, 우발적인 경우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은 있을지언정, 본격적인 '무기' 따위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곧 군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무장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내가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맡기는 것과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내가 이 도시국가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가 가진 창과 방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의 무장을 맡아놓고 있다가 돌려주지 않는 행위가 지니는 맥락 역시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 친구에게 빌린 청바지를 돌려주지 않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플라톤이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모두가 시민이고 전우이기도 한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서로가 서로를 시민으로서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혹은 어떤 경우에 우리는 누군가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것인가. 명시적으로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플라톤이 만들어낸 딜레마는 이와 같은 맥락을 추가적으로 머금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칸트 자신이 '사례'를 통한 접근을 '판단력의 부족을 매꾸기 위한 것'이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상적인 사례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살인자에게 쫓기는 누군가를 집에 숨겨주고 있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찾아와 당신에게 묻는다. '그 사람이 여기 있는가?' 칸트 자신이 말하는 정언명법에 따르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므로 '그렇다'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저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샌델 본인이 곧장 그 예시를 현실 속의 것으로 치환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듯, 칸트가 말하는 저 '살인자'는 사실상 공권력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에 가깝다. "우리는 나치 돌격대원에게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말해줄 도덕적 의무는 분명 없다."(185쪽) 칸트가 말하는 '살인자'는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르게 될 한 사람의 개인이라기보다는,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처형'하겠다고 나선 어떤 공권력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적어도 문맥상으로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사례의 맥락은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에 의한 출판물의 검열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유를 논하면서도 계몽군주의 자비와 관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칸트는 동료 지식인들에게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네가 사상 검열을 당하고 국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 때, 네가 나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일까?

즉 칸트가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하여 '시민'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윤리적일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플라톤의 경우와 달리 칸트는 국가 권력이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 속에서 윤리적 행위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했다. 반면 플라톤은 언제라도 다른 도시국가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정치 상황을 전제한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철학자 모두 어디까지나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고안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또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을 만들어 적과 싸워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 혹은 왕의 검열을 피해 계몽주의를 설파하고 만들어나가야 할 18세기 프러시아의 시민. 이 딜레마를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듣고 고민한 사람들 모두, 시민의 눈높이에서 윤리를 고민했다.

샌델이 제시한 철도 기관사의 딜레마와 그것의 현실적 적용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그것이 왜 문제적인지 그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쏘아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들의 그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때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고민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일지 아닐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3.

공법적 협약하에서의 비밀 조항은 객관적으로는—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는—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즉 비밀 조항을 명령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자질에 따라 판단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확실히 비밀은 성립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비밀 조항의 초안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인격적 존엄성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밀은 성립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조항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 포함되어 있다. 공적인 평화의 실현 가능한 조건에 대한 철학자들의 준칙을 전쟁을 위해 무장한 여러 국가들은 충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서울: 서광사, 2008), 개정판, 58쪽.

시민의 딜레마와 점령군의 딜레마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시민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딜레마를 통해 윤리적 문제를 숙고하는 것과, 점령군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딜레마를 검토하는 것 역시 완전히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전자를 고민할 때 우리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동료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진실을 말하는 누군가, 혹은 전쟁에서 동고동락한 전우의 명예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그가 벌일 수 있는 위험한 사태를 막아내고자 하는 누군가가 된다. 반면 후자의 상황을 가정하며 토론할 때, 우리는 그저 '이 사람들이 탈레반 협력자일지도 모르니까 죽이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미군이 되어버릴 뿐이다. 전자에는 윤리와 가치가 이미 딜레마 속에 내재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그것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한다.

샌델이 제시한 딜레마에서 행위의 주체는 곧 '초법적 주권자'이다. 재판 없이, 그 어떤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주체 말이다. 샌델은 독자로 하여금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그저 서류에 사인을 했을 뿐인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될 것을 권유한다. 구체적인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목숨을 직접 빼앗는 게 아니라 그냥 '결정'을 내릴 뿐인 상황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구경꾼인 당신은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직접 밀지 않고도 철로 아래로 떨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맨홀처럼 아래로 통하고, 당신은 핸들을 돌려 뚜껑을 열 수 있다고"(39쪽)까지 상상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기계적인 살인을 상상하는 행위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사고실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순간, 우리는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열차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비곗덩어리'를 죄책감 없이 철로에 처박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그것을 어떤 더 큰 뜻, 대의에 따라 행사하는 초월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찾아 헤매이는 미군, 혹은 그 미국의 패권적 지배에 맞선다는 명분 하에 온 몸에 폭탄을 칭칭 감고 뛰어드는 자살 테러범. 양자의 논리는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보자. 나 한 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미군들이 미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 있듯, 자살테러범은 이슬람 공동체를 위해 미국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살테러범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목숨을 바쳐 미국인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하버드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지 토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반대편에서 같은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안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죄책감을 덜어주는 복잡한 장치를 이용해 열차를 막기 위해 뚱뚱한 사람을 철로에 떨어뜨리는 사람과 자살테러범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일 뿐이다. 전자의 경우 무슨 요절복통 기계처럼 생긴 장치 덕분에 살인의 주체가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한다면, 후자는 아예 폭탄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날려버림으로써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각자의 정의(正義)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대체 그들은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 서로를 설득하여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각자의 이익과 도덕과 관습이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영원한 평화를 획득하기 위한 이성적인 방안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썼다. 그리고 그는 본문의 부록에 위 인용구와 같은 단서 조항을 덧붙여 놓았다.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바로 그렇게,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에의 추구가 결여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한 한국인 독자가 대단히 자의적으로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놓고 보면 상황은 훨씬 비관적인 것 같다.

2020-01-31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외, 2019.

<반일 종족주의>는 실증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 혹은 그와 뜻을 함께하여 <반일 종족주의>라는 단행본 및 그 단행본의 토대가 된 연속강연에 참여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책은 대단히 이념적이다.

여기서 나는 '이념적'을 '나쁘다'의 동의어로, '실증적'을 '좋다'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반일 종족주의>가 이념적인 책이라는 내 주장은, 말 그대로 이 책이 사실관계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이념적 차원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이영훈 본인 스스로가 경제적 사료를 통해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인물이다. 책에 참여한 다른 학자들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쟁쟁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반일 민족주의>는 오직 사실만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온갖 '거짓말'과 싸우는 책일 뿐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대표 저자인 이영훈은 조선왕조의 몰락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종의 거대 서사를 기획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그 거대 서사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음험한 적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공들여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영훈의 이러한 기획이 드러나는 것은 1부를 지나 2부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20장에 이르러서이다. 그곳에서 그는 서구의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되짚으며, 따라서 서구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달리 개인주의의 자양분일 수 있다는 논변을 편다.

이영훈의 구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과 '심성'을 경유하여, 한반도 거주민은 단 한 번도 철저히 뿌리뽑히지 않은 '장기지속의 심성'인 샤머니즘에 사로잡혀 있다는 아주 강한 주장을 펼친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은 그러한 샤머니즘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 샤머니즘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서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上段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로서 샤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특질을 강하게 띱니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와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신학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권위이자 폭력입니다. 종족주의 세계는 외부에 비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입니다.[251쪽]

물론 이정도의 주장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건 좌우를 넘어서는 문제다. 우파 버전이 '반일 종족주의'라면, 좌파 버전은 '한국은 아직 탈근대를 거론할 수 있을만큼 근대화하지 못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주장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이영훈이 그 '반일 종족주의'의 사례로 위안부와 징용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갔기에 논란이 커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친숙한 주장을 편다 해서 친숙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어찌됐건, '한반도의 전근대성'에 대해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인상비평을 내놓은 후 그냥 까먹어버린다. 반면 이영훈은 나름의 (실증적?) 근거와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빅 네임을 경유한)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 논의 전개를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으고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내는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 특히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지금까지의 정치적 과정의 전개에 있어서 일본을 적개시하는 민족주의가 정부에 의해 증폭되는 과정은 크게 우려스럽다. 이영훈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중 국군위안부는 완전히 잊혀지고 오직 일본군 위안부만 거론되는 상황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비 NL 계열의 여성운동가들도 자주 해왔던 것으로서 유의미하다. 즉, 구체적인 사실관계만 놓고 볼 때 <반일 종족주의>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차원에서 나름 유의미한 점이 없지 않다.

문제는 <반일 종족주의>가 다소, 혹은 상당히, 정직하지 못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이영훈은 자신이 오직 사료에 입각해 사료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특정한, 그리고 저자가 좀 뚝딱 만들어낸 듯한 인상을 주는 역사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철학은 일종의 뒤틀린 자학사관이며, 전도된 탈식민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은 한국에 근대성을 이식한 일본의 영향, 미국의 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견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며 독립국가를 만들어내신 이승만 대통령의 찬란한 능력을 예찬하고자, 그 반대편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 거주민들의 토속성을 물신화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물신화인가? 왜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보더라도, 모든 인간 사회는 이영훈이 지적하는 정도의 야만성, 원시성, 주술성, 토속성을 두루 가지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는 배울만큼 배운 고학력 리버럴들이 자식들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고, 스위스에서는 모스크를 폐쇄하는 '민주적 주민투표'를 거행한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모범국가의 사례로 꼽는 북유럽 국가들 또한 그 내막을 보면 비슷하다.

모든 국가는 각자 물려받은 '장기지속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SNS를 통해 포퓰리스트들이 활개치는 시절이 오면 그것은 다양한 외양을 띠고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더욱 심각한 모습을 종종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영훈은 그러한 '장기지속의 심성'을, 마치 환빠들이 단군의 후예를 몰아낸 중국 한족 묘사하듯 바라본다. 이는 그다지 학문적으로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역사철학으로 수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토론해야 할 여지는 바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훈과 그의 동료들이 지적하는 내용 중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전반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관, 특히 이승만이 저지른 공과 중 과오를 굳이 덮어놓거나 축소하려 하는 경향 등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이영훈이 말하는 '반일 종족주의' 내지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올바르면서도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2019-09-06

희망의 인문학, 절망하는 인문학자들

    • 이 글은 2010년 10월 18일 〈프레시안북스〉에 실린 "'죽은 철학자의 사회'…'희망의 인문학'은 없다!"의 원고입니다. 편집부에서 수정, 교열을 한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앞서 제시된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원고들을 읽어나가던 중, 9년 전에 쓴 글이지만, 아직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여 블로그에 올리고 공유합니다.



  • 1.

    자신이 대단한 아이디어 뱅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있다. 그는 선출직 공직에 당선된 직후부터 본인의 '끼'를 마음껏 발산해왔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날이 갈수록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고, 그래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선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대번 대답했다. "쌀로 국수를 만들어서 먹으면 되지!"

    이 선출직 공무원이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일 것이다. 쌀 생산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는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통용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이익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으로 갈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는 '아이디어'만을 내놓는 그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찼다. 2008년 초, 이 대통령이 아직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논리 구조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에서도 사실상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쌀 농사가 힘들면 쌀국수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처럼, 인문학이 위기라면 '희망의 인문학'을 하면 되지, 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논리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한 위기 앞에서 '시장성'의 재고를 강조하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 담론들의 모습이 더욱 문제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그 위기에 대한 이 반응만큼은 분명히 한국적이며, 그 자체가 사실상 더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좀 더 풀어놓기 위해서는 『희망의 인문학』을 펼쳐들 필요가 있다.

    2.

    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사는가? 이 해결되지 않는 질문 앞에서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인 얼 쇼리스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라고 정의내린 후, 그는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층의 삶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55쪽)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참석한 향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리스토데모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길 위에서 만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액자 형식의 작품인 『향연』에서, 정작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여사제 디오티마였듯이, 얼 쇼리스 역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어떤 여성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그는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제소자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어,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그 핵심적인 부분을 펼쳐보자.

    비니스는 대화의 주제가 실제로 자녀 문제로 넘어갈 수 있도록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빠르지만 리듬감 없는 어투로 입을 얼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moral life of downtown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중략)… "그렇게만 하면, 그 애들은 더는 가난하지 않게 된다니까요!" …(중략)… "길거리에 방치된 그 애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168쪽)

    일반적으로 볼 때, 가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노동이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혹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적·도덕적 고양. 클레멘트 역시 그와 같은 긍정적 효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무력(force)'에 의해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하면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하는 노동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으며, "그런 식의 노동은 또 다른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점점 더 심해져 가"(117쪽)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해법은 노동 혹은 노동운동을 통한 단결이 아니다. 중산층과 같은 정서적·도덕적(moral) 힘을 기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부유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결론을 정당화한다. "내가 만났던 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모두 무력의 포위망에 대해 일종의 창조적 대항, 적극적 대응을 했으며, 이것은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보다는 운명에 대항하는 자유의 성장과 더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161쪽, 강조는 인용자. 이 지점에서 얼 쇼리스가 드러내는 반 노동적인 서술에 대하여 논의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겠으나 이 지면에서는 일단 논점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사상적 기반 하에서 출발한 클레멘트 코스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졸업 뒤 6개월이 지났을 때 정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두 가지 다 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는 "뉴욕 라디오 방송국에 비정기적으로 원고를 쓰면서 바드대학에 다시 한 번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269쪽)었다. 말하자면 클레멘트 코스를 이수한 모든 사람들은 정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정규직이 되었다. 예외는 단 한 명 뿐인데, 그나마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발적 실업'에 속한다.

    빈민들이 개인적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이 책 『희망의 인문학』에 등장하는 사례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고 모범적이다.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일군의 사회운동가 및 학자들이 한국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성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글쓰기 교수인 최준영에 따르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인 성프란시스 대학의 1기와 2기 졸업생 20여명 중 대부분은 노숙생활을 청산했으며 "앞으로 최소한 자기 자신만큼은 책임지는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참고링크: http://www.ggcf.or.kr/books/iframewebzineview.asp?ino=2076 )고 한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자립은 한낱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다. 얼 쇼리스의 책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빈민들이 합법적 권력의 범주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러고 나서 게임의 잔혹성과 맞선다면, 그들은 기존에 확립된 사회 질서에 진정한 위협이 될 것"(428쪽)이라고 확신한다. 자존감을 회복한 빈민들이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위험'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얼 쇼리스가 주창하는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에 맞서 현재진행중이다.

    3.

    얼 쇼리스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로서, 주로 고대 그리스 고전을 해석하여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 그리스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스승이 한 그대로 고전을 읽고 번역하는 것을 자신들의 주된 과업으로 삼았다. 그 제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앨런 블룸(Allen Bloom)이며 그와 얼 쇼리스는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 줄여서 '스트라우시안'(Straussian)들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말했듯 그리스 고전에 대해 대단히 큰 경외심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플라톤을 열심히 읽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비의적(秘儀的)인 방식으로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사상을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한들,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내용이 플라톤의 텍스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을 그렇게 해석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얼 쇼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스트라우시안들이 가지고 있는 인문학, 혹은 철학에 대한 입장에 부정적이지만, 그것은 완전히 비교가 불가능한 위치에 서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스트라우시안이나 얼 쇼리스나 모두 고대 그리스를 이상적인 삶이 구현될 수 있었던 공간으로 간주한다. 그 속에서 살았던 한 사람, 즉 소크라테스를 어떤 전인(全人)적 삶의 원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후대에 기록으로 남긴 플라톤에 대한 입장 정도일 것이다. 스트라우시안들이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비의적으로 숨겨진 엘리트주의를 찾아내려 할 때, 얼 쇼리스는 '순수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찾아내고 엘리트주의자였던 플라톤의 흔적은 애써 무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호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의) 플라톤주의자인 앨런 블룸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변명Apology』, 『크리톤Crito』의 일부분, 『파이돈』에서 몇 쪽, 아마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을 것입니다."(234쪽) 전통적으로 '에우티프톤', '변명',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한묶음으로 취급되어왔다. 동시에 플라톤을 읽을 때에도, 초기작(에우티프톤)부터 중후기의 걸작(파이돈)까지 고루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플라톤의 텍스트가 널리 읽히기 시작한 이래 위 네 대화편을 한꺼번에 읽는 일은 언제나 장려되어온 철학적 학습법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몇 쪽, 일부분'만 읽고 넘어가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얼 쇼리스는, "우리는 플라톤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행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읽겠다는 목적이 너무도 잘 드러나고 있다. 플라톤에서 시작한다면서 이렇게 플라톤을 안 읽기도 쉽지가 않다. 보다 못한 디오티마, 아니 비니스가 한 마디 첨언한다. ""뭔가 빠뜨린 게 있는데요." …(중략)… "'동굴의 비유'요. 그걸 빼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철학을 가르치려고 하죠? 동굴이 바로 빈민지역이고, 빛이 교육인 거죠. 가난한 사람들은 분명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234-235쪽)

    쇼리스가 플라톤의 핵심 저작인 『국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인 '동굴의 비유'를 빼놓았던 동기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중기 대화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는 전적으로 플라톤의 작품일 뿐 소크라테스의 실제 행적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니스가 올바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대가 가난한 사람들이건 아이비리그의 귀공자들이건) 플라톤 철학을 가르치면서 동굴의 비유를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얼 쇼리스가 플라톤, 혹은 플라톤을 비의적으로 해석하고 숭배하는 앨런 블룸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희망의 인문학』중 12장 '급진적 인문학'은 통째로 앨런 블룸의 인문학에 대한 입장을 비판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인간이 공적인 삶, 정치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문학이 갖는 역할을 서술하고, 그것을 부정한 앨런 블룸을 비판하는 것이다. 플라톤을 읽으면서도 플라톤의 생각이 아닌 오직 소크라테스의 행적만을 추적하려 하는 쇼리스의 행동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블룸은 플라톤의 『국가』를 교육에 관한 위대한 저작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플라톤의 사상 가운데 반 민주주의 부분만을 편식했고, 그것에 기초해서 사회와 대학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다"(187쪽)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비판은 앨런 블룸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중 하나로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다. 하지만 "소피스트가 시에 관한 토론이 인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지만 근본주의자 블룸은 그 말을 들으려 조차 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 버렸기 때문"(189쪽)이라고 고발할 때, 그는 뭔가 잘못 짚고 있다. 그가 비판하는 앨런 블룸이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을 쓴 그 앨런 블룸이 맞다면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은 처음부터 시와 정치의 관계를 고찰하는 챕터로 시작한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령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단지 일종의 엄숙주의로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플라톤이 고대의 서사시 전통과 벌였던 진지한 지적 투쟁은 모두 망각한 채 그저 '착한 소크라테스와 그것을 왜곡한 플라톤'이라는, 19세기에 이미 충분히 논박된 도식적인 철학 이해에 발목을 잡혀버린다.

    책 자체의 내용과 크게 상관 없어 보이는 이런 서술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얼 쇼리스의 활동, 그의 헌신, 그가 철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뜨거운 애정과는 무관하게, 상아탑에 안주하는 철학과 세속에서 활동하는 철학을 구분하고 후자의 가치를 전자에 비해 높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특정한 맥락 속에서 도출된 '하나의 입장'이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얼 쇼리스의 활동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우리는 '인문학'적으로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한 편향된 강조, 그 속에서 도드라지는 플라톤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 칸트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며 "두 철학자 모두 진리와 도덕, 아름다움의 문제에 관심을 뒀지만, 칸트는 세상과 떨어져서 살 수 있었고,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 세속적인, 즉 '세상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29쪽)다고 내리는 평가 등은 결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을 자신의 논적으로 삼고 있으며 스트라우스에게 배운 그리스 철학의 맥락을 채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얼 쇼리스의 인문학에 대한 입장이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광야의 지식인이고 칸트는 상아탑의 노예라는 발상, 그것 역시 하나의 '입장'일 뿐이다.

    4.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의 내면적 주체성을 북돋워줌으로써 그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인문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하고 있을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왜 '희망의 인문학'이 승리하고 있는 가운데, 인문학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여 목숨을 끊고 병에 걸리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클레멘트 코스를 수강하는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에 푹 빠져 산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마찬가지이다. 매우 기초적인 삼단논법에 따라 생각해보자. 대전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힘'을 가진다. 소전제: 인문학자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결론: 인문학자는 '힘'을 갖는 사람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 반대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솟아오르는 동안, 정작 인문학의 근간이 되는 연구를 수행하는 소장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문자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7월 4일 세상을 뜬, 대표적인 하이데거 전문가 신상희 연구교수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하이데거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번역해온 사람으로, 후기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숲길』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들을 우리 말로 옮겼다. 하지만 대학들은 인문학 교수의 정원을 줄여나가기만 할 뿐이었고, 그는 늘 교수 임용에서 고배를 마셨다. 오랜 절망 끝에 헤매던 그는 50세의 이른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고 신상희 교수의 "아내는 남편의 깊은 사색 저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오랫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 대신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 대학들이 인문학과의 정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문학 연구자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문학 교수들의 철밥통이 깨지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지금까지 인문학자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잃었고, 그 결과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 혹은 훈수도 빠지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을 그와 같이 파악한다면, 클레멘트 코스와 같은 대중적인 인문학 강연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사실이 그러할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클레멘트 코스에서 전제하고 있는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도록, 그와 같은 목적으로 편집된 인문학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인문학적 관점이겠지만 그것이 전체 인문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희망의 인문학'을 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갈 때, 고 신상희 교수와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해 인문학을 교육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을 때, 과연 나치에 협력한 혐의를 안고 있는 하이데거만을 연구해온 사람과 그의 작업들은 어떻게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얼 쇼리스의 입장과 같은 '하나의 인문학'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문학이 통째로 사라진 세상만큼이나 끔찍할 수 있다.

    애초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의의 프레임 자체가 잘못되었다. 인문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기초학문의 연구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되는 학문, 돈이 되는 학과로만 정부 및 대학들의 지원이 쏠린다. 해당 분야 내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연구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해외의 연구지에 등재되지 않으면 성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협박이 횡횡한다.

    이것은 인문학의 위기지만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다. 기초학문 전체의 위기를 놓고 연대의 범위를 넓혀나갈 때 비로소, 한국 사회 내에서 대학이 갖는 위상과 그 대학 속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우선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가 너무도 '핫'하게 떠올라버렸다. 그리고는 그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어떤 하나의 인문학적 해석 및 방법론이 마치 모든 문제의 해법인 것처럼 논의되고 주창되고 도덕적 우월성을 지니는 명제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이여, 고매한 상아탑에서 벗어나 대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 얼마나 쉽게 대중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인가. 그리하여 인문학의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 연구실에서 파고들어야만 하는 철학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은 쓸쓸히 잊혀지고 생계를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5.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 자체가 지니는 가치는 쉽사리 폄하될 수 없는 것이다. 학문과 세상이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고, 그것을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책갈피마다 끼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린 '인문학의 위기'는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사태이며, 『희망의 인문학』은 그 문제 중 일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체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문제는 오직 이 책만을 혹은 이 책에 대한 소개만을 읽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내뱉는 목소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희망의 인문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촉발된 국내의 담론들은 한층 더 문제적이다. 고매한 상아탑의 학자들이 대중들과 지식을 나누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중, 그 연구자들이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식 나눔', '배움의 공유' 같은 그럴싸한 단어들이 횡횡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과 노력을 들여 얻은 지식을 무료로 배포하라는 목소리만 높을 뿐이다.

    얼 쇼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자들에게 무턱대고 지적 자원봉사를 요구할 때,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얼 쇼리스는 못을 박는다. "…(중략)… 자원봉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름지기 대학 수준의 강의는 자원봉사자가 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 교수들은 일류 대학의 조교수들이 받는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23쪽)

    인문학 하는 너희들이 지금까지는 너희들끼리만 통하는 소리 하고 시시덕거렸으니 좀 굶어도 싸다, 굶기 싫으면 '소통'해라, 이런 식의 폭력적인 요구가 적어도 『희망의 인문학』에는 담겨있지 않다. 국내에서 시행되는 '좋은 활동'들 중 상당수가 참여자들의 인내와 고통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도 '상아탑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얼 쇼리스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국내에서 통용되는 '희망의 인문학'에 대한 논의에 이와 같은 현실적 고려가 담겨있긴 한가?

    필자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쌀농사에 대해 내놓은 '아이디어'를 비판하면서 이 서평을 시작했다. 쌀이 잘 안 팔리면 쌀로 국수를 만들면 되지. 이 발상은 현실성이 없다. 쌀로 국수를 먹은 사람이 또 밥을 먹는 게 아니니까, 전체적으로 쌀 소비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쌀국수를 만드는 쌀과 우리가 밥을 해먹는 쌀은 종(種)이 다르다.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설익은 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바쳐 어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너 고매한 상아탑에서 머물지 말고 '희망의 인문학' 해봐 라고 말하는 것은 농민들에게 벼 뽑고 안남미 심으라고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킬 뿐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에 대한 국내의 담론에서 한 이정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성공과 그 파장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하는 것 자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미약한 빛이 비춰지고 오직 그것만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처럼 이해될 때, 누군가는 굶고 절망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윤리가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 잊지 않고 거짓 해법에 열광하지 않는 것. 인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기억하고 되새기는 학문이니까. 다양한 논의와 해법이 오가는 가운데 진정한 '희망의 인문학'이 도래할 날을 희망한다.

    2019-04-15

    저신뢰사회의 문학: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작가가 트위터를 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는 책을 소개하면서 5점 만점의 '일독 권유지수'를 매기고 있었다. 매사 불만이 많은 나는 그 '일독 권유지수'에 대해서도 불만을 느꼈다. 차라리 그냥 '별점'이라고 하던가, '일독 권유지수'라니 그 명칭은 무엇인가. 그는 이미 그 시점에 여러 문학상을 두루 휩쓴 폭풍같은 신예 작가였는데, 그런 분께서 책에 별점을, 아니 '일독 권유지수'를 매기고 있다니. 나는 불평했었다.

    제법 오래 전 일을 떠올린 이유는 그의 책 『당선, 합격, 계급』을 읽었기 때문이다. 별 생각 없이 집어들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문학을 넘어 사회 전반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짚었으며,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당선, 합격, 계급』은 문학'만'에 대한 책이 아니다. 물론 문학상과 공채, 그리고 '등단'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인 '입시'(入試)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책을 펼치면 곧 나오는 핵심 문단 두 개를 인용해보자.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入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극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17쪽]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장강명은 이러한 '입시'의 성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나름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법고시를 폐지하고 로스쿨로 대체하는 것 같은, 말하자면 '동쪽 문을 닫고 서쪽 문을 여는' 것은 진정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 현재 변호사시험의 난이도와 합격률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을 떠올려보자. 변호사시험을 통과한 '로변'들은, 마치 사법시험 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문을 최대한 조금만 열어두고 싶어한다. 자신들이 받았던 차별은 지난 일이고, 이제는 성에 들어왔으니 성문을 걸어닫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폐쇄적인 성벽이 생겨나는 이유는 정보의 격차 때문이다. 성 안 사람들은 성 밖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지 않는다. 가령 '문단'은 정부로부터 내려오는 온갖 지원금과 해외 연수 등의 정보를 독점하며, 문인들의 추천권을 행사한다. 그러니 젊은 작가들은 문단의 눈치를 본다. 또한 한국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 그런 독자들에게 소설을 소개해야 하는 기자들은, 책값보다 귀한 시간을 허공에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창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등으로 대변되는 주요 출판사의 책에 관심을 기울인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입시의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 르포 작가 장강명의 분석이다.

    간판의 본질적인 힘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간판의 중요성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낮아진다. 간판의 힘은 정보 부족에서 나온다. 독자나 출판사가 등단 작가를, 구직자가 대기업을, 기업이 명문대 졸업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게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다. 글 잘 쓰는 미등단 작가, 연봉도 높고 복지 혜택도 다양한 중소기업, 일 잘하는 비명문대 졸업생이 분명히 있지만, 찾기가 너무 어렵다. 잘못된 선택을 내렸을 때 져야 할 부담도 너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억지로 모험을 강요할 수는 없다.

    모험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그려 제공하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 지금 한국의 독서 생태계나 노동시장은 너무 깜깜하다. '무슨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는 간판들만 빛나는 어두운 거리 같다. 안내소에 있는 지도는 부정확하거나 누락된 정보가 많다. 얼마간은 그런 지도를 그리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다. 부분적으로는 간판으로 득을 보는 이들이 정확한 지도 제작과 보급을 반대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429쪽]

    나는 이 분석에 동의한다. 그냥 동의하는 차원을 넘어, 장강명의 '일독 권유지수'도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사는 돈보다 책을 읽느라 들어간 시간을 더 아까워하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상대적으로 책 많이 읽고 작가로서의 권위도 가지고 있는 장강명이 책을 소개하고 읽을지 말지 미리 판단해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꼭 그렇게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는지, 몇 년 전의 나를 꾸짖었다. 『당선, 합격, 계급』은 이렇게 문단이라는 느슨한 '취향의 공동체'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내놓는, 최근 보기 드문 훌륭한 논픽션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열렬하지 않았다. 아니, 독자들의 외면을 받거나 했다는 말은 아니다. 많이 팔렸고, 지금도 꾸준히 좋은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한국 문단이 발칵 뒤집혔다거나, 장강명이 한국 문학의 '젊은 신예'를 넘어 어떤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 때문이다.

    누구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선, 합격, 계급』은 기자가 쓴 책이다. 어떤 입장을 가진 사람을 취재했다면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말도 들어보는 훈련이 확실히 되어 있는 저자가, 바로 그런 식으로 사안에 접근해가는 책이라는 말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간판과 정보 격차'에 대한 문단만 봐도 그렇다. 간판으로 득을 보는 이들이 지도 제작을 가로막고 있는 현황을 실컷 지적했지만, 장강명은 비분강개하지 않는다. '물론 지도 제작이 어려울 수도 있다'며 다른쪽의 입장에서도 한 마디 덧붙여준다.

    바로 이런 균형감각이 『당선, 합격, 계급』을 좋은 책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균형감각으로 인해, '이 썩어빠진 문단'에 침을 뱉고 싶거나, 반대로 '문단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게 아니다 우리의 한국 문학 화이팅'을 외치고 싶은 사람들 중 그 누구로부터도 열화와 같은 성원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어떤 이들은 문학상을 휩쓴 장강명이 불현듯 개심하여 '문단권력과 맞서는 레지스탕스'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을 테고, 다른 이들은 문학상을 휩쓴 장강명이 아주 세심하고 꼼꼼하게 '꿀팁 대방출'을 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장강명은 아주 공들여서 양쪽 모두를 적당히 실망시켰다. 반대로 나처럼 한국 문학에 큰 관심이 없는, 비소설 분야를 주로 읽는 독자를 만족시켰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완벽하지는 않다. 특히 '객관식 시험'에 대한 한국인의 사랑이 왜 생겨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저자가 알면서도 다소 박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시험 성적을 믿는 것은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력직 중심의 채용 구조가 돌아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채용 담당자가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뽑는 대신, '본인이 꽂아넣고 싶은 사람'을 뽑을 거라 생각한다. 대학의 입시 과정을 각 대학에 자율로 맡기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한국은 '모든 정보를 최대한 공개하여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사회에 속한 각 개인의 복리를 최대한 증진하는 방법이다'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나라다. 그래서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면 '라인'을 만들고, 학연 지연 혈연 흡연으로 패를 갈라 똘똘 뭉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뒤쳐지고 만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경제 수준은 세계 10위권이지만 대단히 낮은 수준의 저신뢰사회이기에, 사람들은 '좋은 전문가'를 찾기 이전에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직에 앉아있는 전문가'를 피해야 한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말이다.

    나는 어떤 선생님이 아무리 학생들과 소통을 잘 하고 훌륭한 교수법과 교육 철학을 갖췄다 하더라도 토익 점수가 400점대라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걸러내지 못하는 게 지금 한국의 교육 현실이다. 대한민국 교육행정은 교단에 그런 교사가 얼마나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318쪽, 강조는 인용자]

    입시를 통해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말고, 성 밖에 있는 사람들도 왜 입시에 찬성하는가? 숫자로 환원되는 객관식 시험의 결과는 누군가가 '최고, 최선'의 인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장강명 스스로가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다시피, 객관식 시험은 어떤 이가 완전히 부적격한 존재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할 수도 있다. 한국이 저신뢰사회라는 점을 인식하고, 얼마나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은지 파악하여 대응하지 않는 한, 입시라는 체제에 대한 한국인 전반의 선호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장강명의 프로젝트성 전자책 출판물인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접했다. 그가 『댓글부대』를 통해 얻은 두 번째 상금을 출원하여, 책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한국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원고를 청탁하고 취합하여 내놓은 서평 모음집이다. 앞서 말했듯 한국 소설에 큰 관심이 없는 독자인 나도 퍽 재미있게 읽고 있다. 이건 찾아봐야지 싶은 책도 몇 권 건졌다. 저신뢰사회는 바로 이런 식으로 극복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장강명이 작가로서 꾸준히 활동하는 것만큼이나,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계속, 가급적이면 한 해에 한 번이라도 정기적으로 내주면 좋겠다. 종이책을 내면 제작비와 재고 부담이 크니, 뜻이 맞는 출판사를 통해 전자책 전용으로라도, 이번에는 단돈 삼천원이라도 받고 팔면서 똔똔이라도 맞추면 좋겠다. 나는 사서 볼 생각이 있다. 그러다보면 더 많은 독자들이 한국 문학을 읽을 것이고, 문단이라는 입시의 성 바깥에서 자생력 있는 취향의 공동체가 싹틀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8-09-22

    '맛 칼럼니스트'인가, '재료 근본주의자'인가

    전체는 부분의 합과 동일할까, 아니면 그보다 더 클까?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인쇄 매체와 방송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중인 황교익에 대해 조사와 고민을 계속할수록, 내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저 철학적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 앞에 첫 선을 보인 다큐멘터리 〈트루맛쇼〉는 당시 급속히 번져나가던 '맛집'이라는 트렌드에 반기를 드는 영화였다. 당시 MBC의 PD였던 김재환이 일산의 한 쇼핑몰에 직접 점포를 낸 후, 극단적으로 매운 맛을 낸 '죽거나 말거나 돈까스'를 주 메뉴로 선정했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일부러 맛을 느끼기가 힘들만큼 맵게 만든 음식을 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게는 방송에 '맛집'으로 소개되었다. 어떻게? 김재환 감독이 대범하게 폭로한 동종업계의 공공연한 비밀 때문이다. 식당 측은 방송 외주 제작자에게 돈을 주고, 외주 제작자는 그 돈을 방송국과 공유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소비자들은 음식 같지 않은 음식을 먹게 된다. 'TV에 소개된 맛집'이라는 가짜 정보에 속아가면서.

    황교익은 바로 그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사람이었다. 한국의 요식업계가 매운 맛, 단 맛, 짠 맛으로 범벅이 된 메뉴를 내놓으며 사람들의 입맛을 망치고 있다는 그의 평소 취지와 영화의 내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트루맛쇼〉가 개봉한 것은 2011년, 맛집을 찾아 다니는 새로운 유행이 꿈틀대는 가운데, 사람들은 '내가 먹는 이 음식이 과연 맛있는 음식인가'를 궁금해하며 누군가가 명확한 답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김재환 감독은 'TV 맛집은 맛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폭로를 했고, 그 이면에는 황교익이 『미각의 제국』에서 제시한 주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미각의 제국』의 취지는 단순명쾌하다. 우리는 매운 맛, 단 맛, 짠 맛 투성이인 양념에 가려져 온갖 재료들의 진정한 맛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맛, 양념에 가려지지 않은 재료의 맛에 대해 따로 신경을 쓰고 공부를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황교익은 단언한다. "단맛의 음식을 두고 맛있다 찬사를 보내는 것은 미식가로서 자질이 없다는 증거이다."(『미각의 제국』 35쪽), "고추에는 캡사이신이라는 매운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입 안에 들어가 통각을 자극하면 몸에서 이 통증을 잊기 위해 엔돌핀이라는 '생리적 마약'을 분비하게 되고, 따라서 기분이 좋아지게 되니, ...(중략)... 그러니까 매운 고추를 즐기는 우리 민족은 엔돌핀, 즉 '생리적 마약' 중독자들이라 할 수 있다."(같은 책, 28쪽)

    단 맛과 매운 맛 외에도 '악당'은 더 있다. 다들 좋아하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역시 황교익의 비판 대상이다. 이렇듯 우리가 좋아하는 맵고 달고 짜고 참기름 냄새 고소한 양념들은 결국 "고기나 낙지, 배추, 생선, 떡 같은 주요 재료의 맛이 어떤지 파악할 감각의 여유"(같은 책, 28쪽)를 빼앗는다. 특히 "대박 음식점 주인들"은 바로 그 점을 악용해, "미성숙한 미각의 소유자"인 젊은이들로부터 "단맛에 대한 이런 '무뇌아적 반응'"(같은 책, 34쪽)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황교익의 비판이다. 〈트루맛쇼〉는 바로 이와 같은 미각 이론 위에 방송국과 외주제작사, 그리고 '방송에 소개된 맛집'의 공공연한 비밀을 다루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제 소위 '맛집'들이 다 맛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너무 달거나 맵거나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으며 즐거운 식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제는 상식의 영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중적 인식의 개선에 황교익과 김재환이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는 꾸준히 대중과 불화하고 있다. 숱한 논쟁을 피하지 않았을 뿐더러 스스로 불러오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사실 〈트루맛쇼〉에 출연하여 "우리나라의 맛집 방송이 왜 이러느냐?"는 질문에 "방송이 천박한 건 시청자가 천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때부터 이미 그 숱한 논란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는 직설적으로, 대단히 강한 표현을 써가며, 확신을 갖고 본인의 입장을 피력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황교익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논란들을 몇 개만 추려보자. 2012년부터 2013년 무렵까지 그는 생선회를 활어회가 아니라 선어회로 먹는 것이 "과학적"으로 합당하다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2015년에는 천일염이 비위생적인 소금이며 정제소금을 먹는 것이 옳고, 관광상품으로 팔리는 게랑드 소금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식탁 위에 천일염을 올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2017년 7월에는 방송인 김어준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자폐적인 행동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사회적으로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2018년 현재까지 페이스북에서 떡볶이가 왜 맛없는 음식인지, 왜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지 등에 대해 잊을만하면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

    이 가운데 '사회적 자폐' 논란을 제외하고 나면,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논리는 동일하다. 떡볶이는 맛이 없다. 왜? 쌀로 만든 떡의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하는 고추장과 설탕 등의 양념 범벅 때문에. 활어회는 맛이 없다. 왜? 갓 잡아 사후경직이 온 단단한 생선살을 씹을 뿐이며, 그것을 씹어넘기기 위해 초고추장이나 묵은 김치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천일염은 맛이 없다. 왜? 천일염에 포함되어 있는 마그네슘이 만들어내는 쓴맛이 음식의 맛을 모두 망가뜨리기 때문에. 이 모든 논의는, 황교익이 동원하는 과격한 수사법을 제외하고 나면, 〈미각의 제국〉에서 제시된 그것과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재료 본연의 맛이라는 절대선이 있고, 그 길을 가로막는 양념이라는 방해물이 있는데, 한국의 많은 음식들은 심지어 제대로 된 양념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교익의 주된 논지는 그것이 특정한 재료에 국한되어 있을 때에는, 적어도 내게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소나 돼지의 고기와 마찬가지로 생선 역시 어느 정도 숙성해야 맛이 살아난다. 우리가 소금을 먹을 때 느끼는 짠맛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염화나트륨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국내산 천일염은 균질한 맛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김장을 담그기 전에 소금 자루를 매달아놓고 오랜 시간을 들여 간수를 빼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대체로 옳은 말이며, 누군가는 황교익처럼 다소 거친 표현을 써서라도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황교익이 그쯤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식재료를 지나 요리를 거론하면서 인류학, 사회학의 초보적인 논의들을 자의적으로 동원한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사회적 자폐' 발언이다. 인간은 모여서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사회적 동물인데, 일부러 오랜 시간에 걸쳐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뇌에 손상을 주는 행위라고까지 그는 표현의 수위를 높였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황교익은 갑자기 박근혜 전 대통령을 거론하며 무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박근혜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편'이라는 제스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음식의 사회성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신경한 것은 황교익 본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가 공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비판의 예봉을 꺾지 않고 있는 대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떡볶이다. 우리가 '떡볶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는, 새빨간 국물에 떡과 라면과 오뎅과 약간의 야채를 넣어 끓인 바로 그 음식 말이다.

    문제는 떡볶이야말로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사교 음식'이라는 점이다. 떡볶이는 등하교길에 친구에게 사주고 얻어먹는 음식이며, 중고등학생들이 일부러 찾아다니는 최초의 맛집 메뉴이기도 하다. 워낙 재료가 간단하고 다들 좋아하기 때문에 손수 만들어서 집에 놀러 온 친구와 나눠먹기도 좋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출출할 때면 여지없이 떡볶이와 순대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의 '소셜 푸드'인 것이다. 떡볶이를 맛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황교익의 개인적 취향이지만, 다들 모여 즐기는 떡볶이 타임에 인상을 쓰고 앉아 있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사회적 자폐'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황교익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확인한 것만 해도 2018년 5월, 7월, 8월에 연이어 떡볶이에 대한, 혹은 떡볶이를 맛있는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혹은 비아냥을 페이스북에 게재하며 여전히 그는 전쟁중이다. 그런데 그 전쟁이란 대체 무엇과의 전쟁인가? 황교익 스스로는 '한국인이라면 으레 떡볶이를 좋아하리라고 여기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저항의 뜻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그 누구도 황교익에게 세상의 모든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라고 강요하고 있지 않다. 황교익보다 떡볶이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야말로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맛없는 떡볶이집이 훨씬 많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크게 다를 바 없는 공장제 떡에 시판 고추장을 쓰는 떡볶이집의 순위를 매기며 최고의 떡볶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미세한 차이 속에,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은 재료의 맛에 기반을 두지만 단순히 재료의 맛을 다 합친 것을 넘어선다. 프랑스의 바게뜨와 이탈리아의 치아바타는 모두 밀가루와 소금, 물과 이스트만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게뜨를 치아바타와 같은 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바게뜨에 비해 치아바타는 밀가루 본연의 맛을 잘 살리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재료는 같지만 다른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 제시했던 철학적 화두를 떠올려보자.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특히 요리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떡볶이는 재료도 고만고만하고 값도 거기서 거기인데 왜 어떤 떡볶이집은 성공하고 다른 곳은 폐업할까? 황교익은 재료의 맛에만 집착하면서 식중(食衆)이 무엇을 먹고 즐기는지에 대해 놓치고 있는 듯하다. 맛이란 차이에서 나온다는 단순한 진리 말이다.

    황교익이 2008년작 『소문난 옛날 맛집』에서 스스로 밝힌 바, 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의 집에서는 인스턴트 라면이 금지된 음식인데, 자식들은 먹자고 조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입맛이 제각각이어서 그의 부인은 세 명의 자식들이 먹을 라면을 각각 따로 끓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다소 길게 인용해볼 가치가 있다.

    "어째 그리 입이 제각각이냐. 라면에 달걀 푸는 법이 다 달라요. 첫째는 라면 다 끓고 난 다음 달걀을 넣되 노른자 깨뜨리면 안 되고, 둘째는 라면 끓을 때 다른 그릇에다 푼 달걀을 부으면서 휘휘 저어야 하고, 셋째는 다 끓고 난 다음에 달걀 넣고 젓가락으로 깨뜨려 저어줘야 해."

    인스턴트 라면에 달걀만으로도 그렇게 맛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인터넷에 라면 요리법을 검색해보면 인스턴트 라면 하나로 얼마나 다양한 '장난'을 치는지. 인스턴트 음식이 아이들에게 획일화된 입맛을 강제한다고, 이를 먹이지 말아야 한다고 내내 주장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맛의 세계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소문난 옛날 맛집』, 189쪽)

    그렇다. 황교익이 모르는 또 다른, 더 넓고 풍요로운 맛의 세계가 있다. 2008년쯤에는 얼핏 그 사실을 인정할 듯도 하더니만, 『미각의 제국』을 출간하고 〈트루맛쇼〉에 출연한 후 날이 갈수록 그는 더욱 강경한 '재료 근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누가 우리의 음식 문화에 있어서 "우리의 미각 기준을 그들의 것과 같아지게끔 조작을 하고 있"(『미각의 제국』, 45쪽)는 '제국주의자'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황교익은 문화권력으로 자리매김해갔고, 그러던 중 2018년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북한의 평양냉면이 메밀의 고유한 향을 즐기기는 커녕 땅콩버터를 집어넣은 중국식 냉면처럼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달라지고, 차이가 생기며, 맛이 펼쳐진다. 인류 음식 문화의 진정한 수수께끼란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황교익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 《기획회의》 471호(2018년 9월 5일)에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입니다. 편집부에서 수정하지 않은 판본이니 정확한 인용을 원한다면 《기획회의》를 구입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입(알라딘).

    2017-10-17

    [북리뷰] 독일 통일, '그 후'도 연구해야 한다

    독일 통일 25년 후
    이기식 저·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1만4000원

    9월 24일 치러진 독일 총선의 결과는 예상대로 충격적이었다. 예상대로 메르켈 총리는 4선 연임에 성공했지만,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2.6%를 득표하며 기독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의 뒤를 이어 3위에 등극한 것이다. 나치의 패망 이후 최초로 극우 정당이 연방의회의석을, 전체 709석중 무려 94석이나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알리는 한국 언론 중 상당수가 거론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독일대안당의 세력권이 구 동독과 포개진다는 것 말이다. 특히 작센 주에서는 독일대안당이 기민련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득표율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독 출신 메르켈의 든든한 텃밭이었던 그곳이 극우 세력의 토양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해체되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필자는 유학생 신분으로서 독일의 통일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대단한 행운이었다."(194쪽) 그 유학생 이기식은 귀국하여 교편을 잡은 후, 자료 연구 및 현지 조사 등을 통해 『독일 통일 15년의 작은 백서』, 『독일 통일 20년』, 『독일 통일 25년 후』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오늘 살펴볼 책은 2016년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세 번째 책이다.

    "동서독이 어떻게 해서 통일이 되었는지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분단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관심이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 독일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남녀가 만나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보여 주는 우리의 드라마와 마찬가지다."(8쪽)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여전히 깊은 감정의 골이 패여 있고, 두 지역 출신은 서로 교류하지 않으며, 특히 동독 출신들은 서독에 대해 끝없이 열등감을 느낀다. 생필품 공급, 영양 상태 등 기초적인 삶의 질은 분명히 나아졌다. "하지만 동독인들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서독인들과 비교한다. 자신의 여건이 좀 나아지면 또다시 서독인과 비교하는 것이다."(64쪽) 이렇게 상대적 박탈감에 젖은 동독인들의 불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외국인, 특히 유색인종에게 향한다.

    "'디 차이트'와 '타게스 슈피겔'지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1990년 통독부터 2012년까지 적어도 152명이 극우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136쪽)다. 그런데 "2012년에 발생한 인종주의적 사건은 모두 130건"이며 "이중 47%인 61건이 동독 지역에서 벌어졌"다. 문제는 "동독 인구는 독일에서 겨우 17%에 불과"(109쪽)하다는 것이다. 물론 서독에도 지지자들이 있지만, 페기다(PEGIDA) 운동과 독일대안당 극우 세력은 동독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독일의 언론조차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 의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탈리아는 통일 왕국을 건설하고 민주정을 수립한지 150여년이 지나도록 남북간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예멘이나 베트남 역시 내부의 골이 깊다. 최근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 시사하고 있다시피 미국 역시 내전까지 치러가며 통일되었지만 아직도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같은 민족인데 남북의 이데올로기 차이든, 체제 차이든 쉽게 극복할 수 있다"(7쪽)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공부해야 할 시점이다.

    2017.10.17ㅣ주간경향 1247호

    2017-09-26

    [북리뷰] 북핵 위기, 케인스를 공부할 시간

    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저 정명진 역 부글·1만5000원

    그 영국 재무부 관료는 1차 세계대전의 뒷수습을 위한 파리평화회의가 자기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전범국들이 끝도 없는 가난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 가운데, 전승국들은 원초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경제학자인 그가 볼 때 턱도 없는 배상을 요구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한 미국마저도 그 복수의 굿판을 방관하고 있는 상황. 그는 공직을 내려놓고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명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그렇게 태어난 책이다. 머리말에서 케인스는 스스로를 3인칭으로 두고 이 상황을 기술한다. "그는 평화조약의 조건을 적은 초안을 수정할 수 있는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아니 유럽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파리평화회의의 전반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근거들이 이 책의 여러 장을 통해 설명될 것이다."(9쪽)

    케인스의 주장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보자. 독일은 석탄과 철로 산업을 일으켜 해외 무역으로 돈을 버는 나라다. 그런데 승전국들은 독일에게 석탄을 현물로 내놓고 모든 식민지와 무역용 상선까지 포기하면서 동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갚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능할 때마다 통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가설의 늪에 빠져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독일은 여러 해에 걸쳐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려 외환 보유를 확대할 수 있어야만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176쪽)

    독일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므로 수출 산업의 부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경우, 유일한 천연자원이라 할 수 있는 석탄을 판매하거나 현물로 제공하는 것 외에는 배상을 할 방도가 없다. 결국 승전국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합리적 수준의 배상을 위해 독일의 경제 부활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독일 경제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계속 배상을 요구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케인스는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를 예상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으깨버리는 길을 택했고, 독일은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리하게 화폐 발행을 일삼다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버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틈을 타 독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권력을 잡았고, 연합국을 비난하기 위해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자주 거론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성찰하는 이들에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법.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승전국들은 비로소 케인스의 처방을 받아들였다.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벌인 독일을 향해 마셜 플랜을 펼침으로써 경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다. 그렇게 부유하고 평화로운 민주국가로 거듭난 서독은 결국 동독과 다시 하나가 되었다.

    독일은 히틀러의 집권 이전부터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한을 향한 경제적 지원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운 반면, 독일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비교적 고르게 분배한 모범적인 복지국가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우리의 현실, 특히 북한을 향한 경제 봉쇄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읽고 공부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국제 정세와 경제적 현실을 아우르며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그려내면서 현실을 과감히 비판하는 지식인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2017.09.26ㅣ주간경향 1245호

    2017-09-12

    [북리뷰] 현대 문명에 흐르는 검은 피

    황금의 샘 1, 2
    다니엘 예긴 저·김태유 허은녕 역·라의눈 각권 2만4800원

    1911년 여름,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에 임명되었다. 영국은 하루가 다르게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키워가는 빌헬름 황제의 독일에 대응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처칠은 선택을 해야 했다. 해군 함정의 연료를 계속 석탄으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석유로 전환할 것인가?

    "그 시절, 영국 군함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석유로의 전환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웨일즈산 석탄 대신,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페르시아산 석유에 의존해야 되기 때문이다. 처칠은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유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풍랑이 심한 바다에 무기를 맡겨놓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연료를 석유로 바꾸면 함정의 속력을 높이고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점이 크다는 점은 명확했다. 결국 처칠은 함정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진했다."(1권 17쪽)

    처칠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였지만, 그런 위험을 먼저 무릅쓰고 우수한 해군 함정을 건설하여 영국 해군을 굴복시킨다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산산조각나버릴 테니 말이다. 더 효율적이고 막강한 에너지원이 발견되어버린 이상 영국 뿐 아니라 석유가 나오지 않는 모든 나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처칠은 그의 회고록에 '지배력이란 모험을 무릅쓴 데 대한 상(賞, prize)이다'라고 썼다."(1권 17쪽)

    석유 산업 및 국제 정치 경제의 권위자인 다니엘 예긴의 책 『황금의 샘』은 석유가 만들어낸 20세기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내는 대작이다. "석유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20세기를 지배했고, 이 책은 바로 석유의 지배가 일어나게 된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1권, 18쪽)

    『황금의 샘』의 원제인 The Prize는 바로 그런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주로 자동차, 비행기, 선박의 연료로 사용되며,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석유화학제품의 원료이기도 하고, 투기의 대상이기도 하며, 수많은 국제 분쟁을 야기하고, 그 가격의 오르내림에 따라 전 세계의 경제가 울고 웃는 단 하나의 상품. 그리고 그것을 확보하는 나라만이 세계의 패권국이 될 수 있는 상급. 그것이 바로 석유이며, 따라서 석유의 역사는 곧 20세기 인류의 역사와도 같다.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존 D. 록펠러는 '수직 계열화'라는 경영의 일대 혁신을 이루어냈다. 석탄을 연료로 쓰는 해군력으로 패권국이 되었던 영국은 석유를 갖지 못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위축되고, 반대로 자국 내에서 석유를 펑펑 뽑아내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편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진주만을 폭격하고 전쟁을 벌여 예정된 패배의 늪으로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지난 7월, 중국은 동아프리카의 요충지인 지부티에 사상 최초의 해외 군사 기지를 가동했다. 석유 수송로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과 일본 입장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중국이 계속 원유를 공급하는 한 북한 봉쇄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세상을 읽으려면 여전히 석유의 흐름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 석유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2017.09.12ㅣ주간경향 1243호

    2017-08-29

    [북리뷰] 일본의 발전, 그 뿌리를 찾아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 저·뿌리와이파리·1만5000원

    '조선은 임진왜란때 망했어야 마땅한 나라다.' 조선의 패망과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 등을 논할 때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망할만한 나라'였다면, 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 일본은 '성공할만한 나라'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는 일본이 오랜 전란 끝에 통일되었던 그 시기, 즉 에도시대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공직을 박차고 나와 우동집 '기리야마 본진'을 차린 것으로 유명한 전직 외교관 신상목의 책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화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로서의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17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내막은 훨씬 복잡하고 의미심장하다. 도쿠가와 가문의 당시 본거지는 슨푸(시즈오카)였지만, 도요토미는 도쿠가와가 교통의 요지에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에도(도쿄)로 쫓아냈던 것이다.

    오늘날의 도쿄를 보면 '에도로 쫓아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신들과 함께 자리잡았던 그 무렵, 에도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강 하구 습지에 불과했다. 에도 성이 있었지만 낡아빠진 상태였다. 우물을 파면 소금물이 나오는 그런 척박한 땅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괴롭힘에 굴하는 대신 가신들과 철저히 단결하여 에도를 발전시켰다. 치수(治水) 사업을 통해 "1)인공의 물길을 뚫고, 2) 자연 물길의 흐름을 바꾸고, 3) 수면을 메워버리는 대토목공사"(36쪽)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렇게 척박한 에도를 교통과 상업의 허브이며 옥토로 바꾸는동안, 부질없는 전쟁에 몰두한 도요토미는 몰락하고, 버려졌던 땅 에도를 기반으로 삼아 발전시킨 도쿠가와 가문이 패자가 되었다. 에도시대는 계획도시 에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출현 과정을 조선왕조의 건국 이야기와 비교해보자. 이성계는 풍수지리에 능한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쩔 수 없이 자리잡은 터를 본인과 신하들의 힘으로 '개척'해내고 기반으로 삼았다. 건국 영웅담의 이면에 작동하는 사고의 체계부터 이미 확연히 다르다.

    한층 더 대담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이른바 '자생적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조가 청계천 준설 공사를 벌인 것을 '조선판 뉴딜 정책'이라고 칭하곤 한다.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일본의 '자생적 근대화'는 에도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다시 말해 우리보다 약 170여년 빨랐다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에도 개척의 역사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가장 앞부분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낯설지만 우리의 한반도 중심 세계관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막연한 거부감과 우월감만 앞세우던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합병당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면, 우리가 잊지 말고 배워야 할 역사는 '우리'의 역사만이 아닐 것이다.

    2017.08.29ㅣ주간경향 1241호

    2017-08-15

    [북리뷰] 현해탄의 군함도, 오호츠크해의 게공선

    게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저·양희진 역·문파랑·1만원

    『게공선』은 1929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될 때부터 화제를 불러모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걸작이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부터 새삼스레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책의 말미에 붙은 번역자의 말에 따르면 게공선의 새로운 바람은 "일본 매스컴이 일본 사회의 빈곤 현상을, 워킹 푸어(Working Poor)와 〈게 공선〉의 작품 세계를 연결해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196쪽)다고 한다. 그 열풍은 『88만원 세대』의 출간을 계기로 청년들의 빈곤 문제에 대해 논의가 한창이었던 한국으로도 이어졌다. 나는 그때 이 책을 한 번 읽었고, <군함도> 논란이 뜨거운 지금 다시 펼쳐들었다.

    책으로 들어가보자. 1920년대 일본, 홋카이도의 도시 하코다테(函館)에서 게잡이 공선 하쓰코호가 출항하는 장면에서 작품은 시작된다. 공선(工船)이란 수산물 가공 설비를 갖추고 있는 어선이다. 가령 참치캔 같은 어류 가공품의 상당수가 공선에서 만들어진다. 공선에서 곧장 어류를 가공하면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고 제품을 보관하기에도 용이하다. 하지만 『게공선』에서 말하는 바, 당시 공선을 운용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 공선은 '공장선'으로 '선박'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는다."(41쪽) 그 결과 하쓰코호는 선장이 아니라 노동자를 관리하는 감독이 지배한다. 하지만 바다에 떠 있기에, 혹은 작품 내에서 설명하지 않는 다른 이유로, 게 공선은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은 달리 없었다."(42쪽)

    어선이면서 공장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어선이 받아야 할 규제도 공장이 받아야 할 규제도 받지 않는 치외법권. 그것이 게 공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 착취는 일본 제국의 경제적 성장과 궤도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 "내지에서는, 노동자들의 힘이 커져서 무리하게 일을 시킬 수 없게 되었고, 시장도 대부분 개척해버리자, 자본가들은 '홋카이도, 사할린으로' 갈고리 같은 손톱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와 똑같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노동자를 '혹사'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자본가들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83쪽)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름이 아니라 특징으로 기술되는 익명의 노동자들은, 스스로 연대하고 투쟁하는 법을 배워나가 동맹파업에 이른다. 자신들의 편일 줄 알았던 해군이 오히려 파업을 진압하는 광경을 목도하며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같은 편이 없어. 이제야 알았다"(180쪽)고 절규한다. 그리고 또 다른 투쟁을 결의하면서 작품이 끝난다.

    식민지 뿐 아니라 자국의 하층민들 역시 일본의 자본주의는 철저히 착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저항은 제국주의적 무력으로 억눌렀다. 『게공선』은 단 한 줄의 '이론적' 서술도 없이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는 자본의 원시축적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그려낸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덧붙이는 말>에서 "이 한 편의 글은 '식민지에 있어서 자본주의 침입사'의 한 페이지이다"(185쪽)라고 말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은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횡포와 뒤엉켜있다는 사실을 1929년의 그는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보다 섬세하게 입체적으로 심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군함도>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게공선』을 다시 거론하게 되는 이유다.

    2017.08.15ㅣ주간경향 1239호

    2017-08-01

    [북리뷰] 중국의 양심, 그의 목소리를 듣다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
    류샤오보 저·김지은 역·지식갤러리·1만8000원

    지난 7월 20일, 류샤오보(劉曉波)가 사망했다. 향년 61세. 사인은 간암. 그를 기리는 뜻에서 국내에 출간된 류샤오보의 책을 펼쳐들었다. 아내를 위해 쓴 시집 『내 사랑 샤에게』, 아내 류샤(刘霞)가 남편을 위해 쓴 『그리운 샤오보』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책은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 뿐이다.

    이 책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만하임에 소재한 S. 피셔 출판사에서 출간된 선집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독립 중국 펜 센터의 대표인 톈치 마틴 랴오와 류샤가 옥중에 갇힌 류샤오보 대신 원고를 편집해서 2011년 내놓은 책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존재 자체가 투쟁이며 비극인 셈이다.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정치, 2장은 사회와 문화, 3장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 혹은 중국인으로서 바라보는 세계의 문제들, 4장은 그가 중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내놓았던 선언, 08 헌장, 법정에 제출했던 최후진술서 등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5장은 자작시 모음을 지나 법원이 내린 판결문으로 마무리된다. 정치적 행위로서의 텍스트가 담긴 4장을 논외로 한다면, 가장 빛나는 글은 제일 처음 등장하는 "포스트 전체주의 의식에 대한 조망"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의식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포스트 전체주의 사회인 중국은 '냉소화(犬儒, cynicos)' 시대 속에서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과 목적을 잃은 채 이율배반과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17쪽) 중국인들은, 심지어 공산당원들도, 모두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체제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푸념한다. 이렇게 둘러대면서 말이다. ""나는 녹을 받고 당신은 재야에 있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같다. 단지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다. 당신은 밖으로 외치고 나는 내부적으로 와해시키고 있다.""(18쪽)

    어떠한 저항 운동이 성공하려면 '체제 내의 동조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체제 내의 동조자'만 하려고 든다면 그 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 중국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체제의 변화와 민주화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다들 '언젠가 올 그날'만을 기다리며 냉소적 태도를 보일 뿐이라고 말이다.

    류샤오보가 말하는 중국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경제 성장으로 세계적인 부호가 여럿 등장하였지만 "부호를 손보는 수단으로 정부에서 '국유자산유실'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가 평생을 모아온 어마어마한 재산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릴 수 있다."(95쪽) 농민의 힘으로 공산당은 혁명에 성공한 후 권력을 잡았다. 그런데 "농민이 중국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민대표회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농민은 전체 인구의 20%도 안 되는 도시주민 대표의 사분의 일에 불과할 정도로 극소수"(110쪽)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만한 여유를 지닌 이들은 '포스트 전체주의'에 걸맞는 냉소적 태도로 자아를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언론의 자유를 요구한 댓가로, 중국 정부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의 시신을 화장하여 바다에 뿌렸다. 마치 미국이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을 처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류샤는 행방이 묘연한 채 '강제 여행'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류샤오보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제 갚아나가기 시작해야 할 때다.

    2017.08.01ㅣ주간경향 1237호

    2017-07-18

    [북리뷰] 읽고 쓰는 여자들, 스스로를 변호하다

    문학소녀
    김용언 저·반비·1만5000원

    '문학소녀'는 멸칭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아도취적이며, 자기 자신과 소설 속의 주인공을 구분하지 못하고, 흔히 경제적으로 무책임하며, 그나마 문학적 취향도 사실 좋지 않은 여성들을 향한 조롱의 표현이 바로 '문학소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전혜린은 바로 그 '문학소녀'의 대명사와도 같다.

    그러므로 전혜린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전혜린의 책을 감명깊게 읽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칼럼니스트 고종석 등의 냉소어린 평가는 전혜린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완전히 고착시켰다. "이들의 선고에 힘입어, 이제 전혜린은 특정한 독서의 출발점의 공통 대명사가 아니라, 부잣집 철부지 문학소녀의 대명사로 더욱 자주 호명되는 것 같다."(16쪽)

    『문학소녀』는 바로 그러한 경향성과 맞서 싸우는 책이다. 애초에 '문학소녀'라는 멸칭을 제목으로 전유하고 있는 것부터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미스터리 소설 잡지 <미스테리아>의 편집장인 저자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전혜린과 '문학소녀'들에 대한 폄하의 근간에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내 말은, 전혜린이 그렇게 비웃음과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17쪽) 그에게 이 책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를 추적하면서 나의 '문화적 기억'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한, 내 어린 시절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전혜린을 이해하기 위한,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문학소녀는 왜 안전하게 놀려댈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그리고 전혜린을 쉽게 비웃는 이들에게 변호를 자청하기 위한 기나긴 '수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20쪽)

    이 책을 읽고 환호할 독자들은 이 서평이 나가기 전부터 『문학소녀』의 출간 소식을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들에게는 앞서 인용된 것 이상의 책 소개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남자들, 그 중에서도 여성 차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비장하게 전혜린을 '변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여기서 잠깐 내 이야기를 해보자.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일이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대부분 시험과 무관한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그 무렵에 읽었다. 『태백산맥』의 1부 제목은 '恨의 모닥불'이다. 그걸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자율학습 감독을 하던 담임선생님이 내가 읽던 책을 힐끗 보더니, '성(性)의 모닥불?' 하면서 빼앗아가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읽던 소설이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려주었다. 혼나지도 않고, 조롱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머쓱해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좋은 책 읽는다고.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거나,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등, 우리 사회에 통용되던 책읽기에 대한 그 모든 관대한 시선들을 문득 떠올려본다. 내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였던 그것은 남자들에게만 허용된 특권 아니었을까? 전혜린을 읽지 않은, 전혜린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도 이 고민에 동참해야 한다. 지금까지 상식인 양 통용되어온 여성의 독서를 향한 폄하의 시선에 『문학소녀』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한국의 문학계는 좀 더 진지하게 응답할 의무가 있다.

    2017.07.18ㅣ주간경향 1235호

    2017-07-04

    [북리뷰] 통일의 길, 헬무트 콜에게 묻는다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 저·김주일 역·해냄·1만5000원

    지난 6월 16일,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한 권 꺼냈다.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 총리가 1991년 독일 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달성한지 5년만인 1996년에 펴낸 회고록이다.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진 독일 재통일,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 필연, 그 아무것도 아니었을까?"(11쪽) 콜은 포퍼의 역사관을 인용하며 독일 통일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성과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익명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이리저리 발길질만 당하는 단순한 놀이공이 아니라, 책임을 갖고 역사 발전에 적극 참여할 능력과 사명감이 있"(11쪽)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통일'이라는 개념을 '외세 배격'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헬무트 콜 총리 자신부터가 철저한 친 나토(NATO)주의자였고, 1983년 서독 영토 내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미국의 전략 무기 퍼싱 미사일 배치에 찬성했다. 녹색당과 사민당의 반발이 엄청났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내 주장이지만, 만약 1983년 우리가 퍼싱 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서독과 미국과의 관계는 큰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른다."(27쪽)

    그렇게 쌓아올린 미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전범국가인 독일의 통일이 기존 전승국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통일된 독일은 세계를 뒤흔들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존재이기에 위협이 된다는 이른바 '독일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국제 사회가 독일의 통일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콜은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기존의 우방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을 설득하는 어려운 과업에 임했다. 운도 좋았다. 정의감에 불타는 복음주의자 조지 H. W.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이었고, 협상이 가능한 지적인 개혁 개방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였으니 말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충격 속에서 헬무트 콜은 이른바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해 통일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 중 제3항은 "서독 정부는 독립적, 비사회주의 정당들의 참여하에 자유, 평등, 비밀선거를 원하는 동독 주민들의 요구를 지지한다"(125쪽)고 밝히고 있으며, 제5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 국가와 비민주 국가 사이의 국가연합적 구조는 한마디로 난센스다. 그것은 동독에 민주화된 정부가 들어섰을 때만이 가능한 것"(126쪽)이라며 기존의 정권과 선을 긋는 것이었다. 대내외적 압력에 굴복한 여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은 조기 총선에 임했지만 참패했고, 기민당과 연합한 동독의 군소 3정당의 연합체 '독일동맹'이 압승한다. 요컨대 서독은 동독에 민주적 절차를 강요했다. 그렇게 확보된 정당성이 있었기에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 소개된 것은 1998년의 일이다. 약 20여년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독일의 통일 과정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되었는가? '통일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 외에 다른 논의가 전무한 상태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헬무트 콜 총리는 독일의 통일을 원했고, 진지하게 현실에 대응했다. 2017년 현재, 한반도와 대한민국의 현황은 어떠한가?

    2017.07.04ㅣ주간경향 1233호

    2017-06-20

    [북리뷰] 뜨거운 반미주의를 바라보던 냉철한 시각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저·김수빈 역 박태균 해제·산처럼·2만원

    1976년부터 미국 국무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주 활동 무대는 한국과 일본, 특히 한국이었다. 1979년 한국에 부임한 그는 서울 출신의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그리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국무부 한국과에서 일했다. 마지막으로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과장직을 역임했다. 이른바 '한국통'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2015년 첫 책을 썼다. 그런데 그 주제가 다름아닌 '반미주의'다. 그 어떤 미국인보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국통 외교관의 눈으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반미주의의 열풍을 되짚어본 것이다.

    일차적으로 미국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지만, 저자는 "특히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 관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내부 정보'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당시 미국의 생각을 알게 되면 십중팔구 깜짝 놀랄 것"이라고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예고한다. 왜냐하면 "한국 언론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거의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쪽)

    기억을 더듬어보자. 그 시절 한국인들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월드컵 16강 진출을 넘어 '4강 신화'를 달성했다는 자부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승리의 서사는 "한국인들이 자국의 역사를 특히 근대사를 열강들의 손아귀에서 희생양이 되어온 역사로 인식"(277쪽)하는, 말하자면 '희생양 내러티브'를 대체하지 못했다. 오히려 희생양 내러티브는 더욱 강화되었다. 스트라우브의 회고에 따르면 "1999~2002년에 미국은 한국의 모든 역사적 가해자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31쪽)

    진보 진영에서 익숙한 세계관에 따르면 실로 그러하다. 미국은 '에치슨 라인'을 설정하여 북한의 침략을 유발했다. 실제로는 '한반도 포기 선언'을 한 적 없지만 대체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미국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의 학살을 수수방관했다. 미국 대사관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희생양 내러티브는 언론의 경쟁적인 보도를 타고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한국인에게 미국이란 노근리에서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한강에 포름알데히드를 버려서 서울 시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며, 쇼트트랙 금메달을 빼앗아가고, 두 명의 여중생을 군용 장갑차로 치여 죽인 후 사과하지 않는 오만방자한 폭력의 제국이었다. 저자는 이 모든 사안이 왜곡되었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단정지을 수 없다고 충실한 레퍼런스를 제시하며 반박한다.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는 미국인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는 "미국 또는 미국 시민이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상당 부분 기반으로 한, 미국 전체에 대한 적의의 표출"(294쪽)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반미주의는 언제라도 되살아날 수 있다.

    이 책은 '참여정부 1기' 출범 무렵의 한국을 바라보던 미국의 시각을 제공해준다. 청와대가 앞장서 사드 배치와 관련된 논란을 키우는 지금, 우리 모두 진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물론 "미국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의 관점을 아는 것이 유용하리라 생각한다."(7쪽)

    2017.06.20ㅣ주간경향 1231호

    2017-06-06

    [북리뷰] '비국민'을 배제하고 '국민'을 앞세우는 그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얀 베르너 뮐러 저·노시내 역·마티·1만4000원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정치적 으르렁말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소위 '퍼주기 공약'을 일삼는다는 비난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뿐 아니라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얀 베르네 뮐러는 바로 그 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포퓰리즘에 대한 짧은 분량의 개론서를 썼다. 『누가 표퓰리스트인가』를 펼쳐보자.

    "이렇게 포퓰리즘 거론이 흔한 요즘--현대 민주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불가리아의 정치학자 이반 카르사테프는 심지어 현대를 "포퓰리즘의 시대"라고 부른다--혹시 우리가 포퓰리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건 아닌가 하는 관찰에서 이 책은 비롯되었다."(10쪽)

    우리가 20세기 말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수많은 '이론가'들과 달리, 저자는 길고 현란한 문장으로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최고의 이상("국민이 직접 통치하게 하자!")를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다."(16쪽) 여기서 핵심은 '타락한 민주주의'이다. 포퓰리즘은 예컨대 왕정이나 귀족정 등과 달리 어쨌건 민주주의의 한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타락한 민주주의이며, 역설적이게도 그 타락은 국민주권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벌어진다는 것이다.

    국민이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그 개념 정의상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하다. 모든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선호에 차이가 있으며, 사회에는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 어떤 사안에서 이득을 보는 자와 손해를 입는 자의 간극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포퓰리스트들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부정한다.

    포퓰리스트가 말하는 '국민'은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33쪽) 존재다. 그리고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기들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33쪽)한다. 그 결과, 첫째, 포퓰리스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진짜 국민'이 된다. 둘째, 포퓰리스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짜 국민'에서 배제된다. 즉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의 존재를 위해, 누군가가 '비국민'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지금까지 '빨갱이'나 '호남'을 타자화하는 극우 세력의 그것과 유사해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군사 독재 세력은 '주권자인 국민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도덕적 우월성 대신 박정희 신화, 경제발전의 성과를 앞세워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해왔기 때문이다.

    얀 베르너 뮐러가 말하는 포퓰리즘적 정치는 오히려 '촛불 시민의 함성'에서 모든 정치적 선택과 행동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는 오늘날의 풍경과 더욱 잘 맞아떨어진다. 행정부만 바뀌었을 뿐 '기득권 세력'이 존속하고 있으며 그들이 대통령을 '왕따'로 만들고 있다는 식의 피해자 서사가 득세하는 모습 또한 그러한 우려를 증폭시킨다.

    포퓰리즘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일면이다. '포퓰리즘을 추방하자'는 주장은 그러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조율해나가며 공존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의 이행만이 정답일 것이다. 이 작고 가벼운 책은 그 무거운 고민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7.06.06ㅣ주간경향 1229호

    2017-05-23

    [북리뷰] 해방 전후사의 진보적 재인식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주대환·1만7000원·나무나무

    진보진영의 이론가 주대환. 상주 주씨인 그는 종친회 모임을 따라가서 집성촌의 묘역에 있는 한 비문을 읽었다. 부부가 함께 묻힌 묘의 비문은 그들의 삶을 "당당하고 정직하고 근면 성실하게 자식을 위해서라면 뼈가 부서지고 살가죽이 갈라져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바"(16쪽)쳤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깨달음을 얻었다.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며 살아온 이들의 평범한 삶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이분들은 건국과 동시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을 갖게 된 자영농 부부는 이렇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은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역사를 만들어온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분들의 입장에서 대한민국 역사를 한번 봐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뉴레프트(new left) 대한민국 사관(史觀)입니다."(18쪽)

    2008년 『대한민국을 사색하다』를 출간한 이후 주대환이 붙들고 있는 문제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좌파의 세계관을 재구성하는 것. 그 세계관의 핵심인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갱신하는 것. 대한민국의 현재를 뒤덮고 있는 불평등을 이겨내기 위한 지적 무기를, 우리의 역사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아닌 사랑과 긍정으로부터 뽑아내는 것.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만든 프레임에 여전히 갇혀 있는 1964년생들이 아직 50대 초반밖에 되지 않"(7쪽)은 현실 속에서 새로운 진보적 사유를 개척하는 것.

    주대환은 해방 정국부터 출발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를 일주했다. 그렇게 공부한 내용을 2014년 가을부터 2015년 겨울까지 광주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강연했고, 책으로 엮었다. 그렇기에 이 책,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는 읽고 이해하기 쉬운 말투로 차분하게 흘러간다. '진보적 세계관'에 친숙한 이들이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 있지만 말이다.

    진보의 세계관 속에서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서 민족 분단을 부추긴 악당이다. 하지만 1946년 6월 이승만이 '정읍 발언'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기 전,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토지개혁을 단행"(333쪽)했다.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것은 북한이지 남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북한식 토지개혁은 사실상 온 농민을 국가 소작농으로 전락시킨 반면, 진보 진영이 그토록 비난해온 유상몰수 유상분배야말로 국민의 85%를 자영농으로 만들어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 역사학계에서는 상식에 가깝지만 진보 내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진보적 세계관에 갇힌 그들, 전대협 세대에게는, 현실 정치를 주무르는 힘이 있다. 주대환의 말을 들어보자. "문재인 씨 같은 사람들이 대표를 하고 있지만, 모두 얼굴마담일 뿐이지요. 정치 안 하려고 하는 문재인을 "다 알아서 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하면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주당 내 486, 전대협 세대의 힘입니다. 말하자면 택군(擇君)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집단입니다."(231쪽) 정권 교체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수많은 것들을 되짚어볼 기회를 얻었다. 이 책은 그 비판적 고찰의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2017.05.23ㅣ주간경향 1227호

    2017-05-09

    [북리뷰] 음모론자의 거짓말이 역사를 뒤튼다

    프라하의 묘지
    움베르토 에코 저·이세욱 역·열린책들·각권 1만3800원

    책날개에 적혀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에 따르면,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 시모네 시모니니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이다. 1905년 출간된 후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폭발시킨 괴문서,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한 사상 최악의 위조문서인 '시온 의정서'를 써낸 장본인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이 책에서 '시온 의정서'의 제목은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으로 번역되었다).

    실제로 '시온 의정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저자를 가상의 인물로 그려내는 이 소설이 성립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움베르토 에코는 음모론, 거짓 문서, 가짜 지식을 수집하며 즐기는 '음모론 매니아'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만년의 지식과 에너지를 총집결하여 만들어낸 소설이 바로 『프라하의 묘지』인 것이다.

    에코가 작품 속에서 지적하는 바, 음모론자는 음모론의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음모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내는 음모론에 스스로 현혹되어 증오심을 키워나간다. 작품 속 주인공 시모니니가 겪은 일이 바로 그와 같다. 그는 유대인을 목표로 한 음모론을 써내려가면서 유대인을 혐오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유대인들의 음모를 아주 그럴싸하게 엮어 낸 그 경험은 내 인생의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소년기와 청년기에 내가 유대인에 대해서 품었던 그 혐오감은 (뭐랄까?) 한낱 관념과 같은 것이었고 할아버지가 주입하신 교리문답의 판에 박은 말들처럼 그저 머리로만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마녀 집회를 닮은 그 심야 회동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나자 비로소 내 관념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았으며, 유대인의 신의 없음에 대한 나의 원한, 나의 앙심은 추상적인 관념에서 억누르길 없는 격렬한 감정으로 변했다."(372쪽)

    역사상 가장 문제적인 텍스트를 써낸 인물을 제시하면서 그의 내면을 서술하는 것은, 반유대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혐오를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쏟아내는 일일 수도 있다. 그 점을 고려한 것인지, 에코는 달라 피콜라 신부라는 또 다른 인물을 등장시킨다. 시모네 시모니니와 달라 피콜라는 일종의 교환 일기를 쓰며 어떤 한 사건의 실체로 다가간다. 소설은 그 두 사람이 남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해주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모든 등장인물에게 거리를 두고 읽을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설계된 플롯 속에서, 주세페 가리발디부터 드레퓌스와 에밀 졸라까지 유럽 근현대사의 중요 인물과 사건들이 얽히고 설켜드는 것이다.

    '시온 의정서'는 1921년에 위조문서임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돈벌이를 위해, 혹은 재미삼아 음모론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그런 거짓들이 때로는 진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다. 음모론은 역겨운 조작이고 조롱당해야 한다. 에코가 "작가 후기 또는 학술적 사족"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경고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시모네 시모니니는 콜라주 기법의 산물이고, 따라서 소설 속에서 그가 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일들은 실제로 여러 사람에 의해서 행해진 것들이다. 하지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시모네 시모니니조차 어떤 점에서는 실제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내친김에 마저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있다."(760쪽)

    2017.05.09ㅣ주간경향 1225호

    2017-04-25

    [북리뷰] 기다린다,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 엘릭시르, 1만3천8백원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스웨덴이란 인근의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다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범죄소설들을 통칭하여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 하는데, 최근 독서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재나』는 바로 그 '스칸디나비아 느와르'의 출발점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스웨덴 남부를 가로지르는 예타운하에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고 교살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중년의 수사관 마르틴 베크가 이 사건을 떠안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경찰은, 마르틴 베크는, 그럴 수 없다.

    여자의 신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신문들은 더 이상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고, 함마르는 더이상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새로 접수되는 실종자 신고 중에 여자의 인상착의에 조금이라도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런 여자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르틴 베크와 알베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던 것조차 잊은 듯했다.(82쪽)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로재나』가 출간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작품은 196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던 '현재'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지 않은 세상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헨닝 만켈이 쓴 서문을 펼쳐보자.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휴대전화는 없었다. 다들 공중전화를 썼다. 다들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자그마한 녹음기를 주머니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며, 컴퓨터란 걸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때의 스웨덴은 미래보다 과거와 밀접한 사회였다."(12쪽)

    그러므로 모든 수사는 기다림과 뛰어다님의 반복이다. 가령 피해자의 모습이 찍혀있을지 모를 사진 한 장을 찾으려면 배에 탔던 승객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일일이 탐문 수사를 벌여야 한다. 숨막히는 긴장과 스릴이 아니라, 두텁게 깔린 짙은 안개속을 더듬어나가는 듯한 암담함이 소설 전체를 뒤덮는다. 명탐정의 천재적 시각이 아니라 평범한 경찰들이 '개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사건의 조각을 하나씩 찾아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가깝게는 헤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부터 멀게는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수사반장'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경찰추리극은 『로재나』와 그 뒤를 이은 총 열 권짜리 연작의 후예들인 것이다.

    현재 발행된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모두 이른바 '스포일링'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모가 어떠한지, 독자도 모르고 경찰도 모른다. 마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독자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단서들을 하나씩 모으며 끈질기게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이 중요하다. 끝내 어떤 자는 법의 칼날을 미꾸라지처럼 피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1960년대 스웨덴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현실을 마주보면서 참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짧고 강렬한 현실 도피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7.04.25ㅣ주간경향 1223호

    2017-04-11

    [북리뷰] 갈등의 시대, 통합의 리더십을 고민한다

    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21세기북스, 3만5천원

    미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 국가다. 정치의 기본 단위가 주(州)인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에는 각각의 주마다, 그리고 연방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준주마다, 노예제에 대한 개별적인 입장이 존재했다. 그 차이는 남부의 이탈과 연방의 붕괴로 이어질 참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두막집에서 성장한 일리노이의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이 처한 정치적 조건이 그랬다.

    링컨은 포부가 매우 큰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랬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 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 동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외에 더 큰 야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야망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88쪽) 대학은 고사하고 남에게 책을 빌려 스스로 법학을 공부했던 가난한 젊은이가 있다. 그런데 그의 나라는 지금 건국 이후 전례 없는 갈등으로 인해 분단되거나 내전을 겪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모든 미국인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했다. 링컨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후 꾸렸던 '팀'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권력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링컨의 성공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 심지어는 자신을 뒤에서 헐뜯고 비방했던 이까지 포용해서 하나의 팀으로 결속시키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던 단단한 포용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링컨은 종이에 원하는 일곱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목록에는 대통령 후보 공천 당시 그의 경쟁 상대였던 슈어드, 체이스, 그리고 베이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 옛 민주당원인 몽고메리 블레어, 기디언 웰스, 노먼 저드와 옛 휘그당원인 뉴저지 주의 윌리엄 데이턴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각 구성이 완료되기 전 몇 달간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했지만, 링컨은 그날 새로운 공화당의 모든 파벌, 즉 옛 휘그당과 자유토지당, 노예제를 반대하는 민주당 출신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뽑기로 결심했다.(299쪽)

    한국어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링컨을 중심으로 그가 꾸린 '경쟁자들의 팀'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지 숨돌릴 틈 없이 서술해나가는 비평적 전기(傳記)의 걸작이다. 정치권의 소수파, 아니 단독자였던 링컨은 지켜야 할 공통의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준수해나가며 자신의 편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복수가 아닌 포용의 힘으로 미국을 통합해나갔다. 남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악대에게 남부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딕시'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한국어판에는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 등이 생략되어 있을 뿐 아니라, 책과 각 장의 제목이 일종의 처세술 책처럼 옮겨져 있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가 헌정 문란 세력만의 것인양 오용되는 이 갈등 속에서 이 책은 보다 진지하게 읽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죄와 '우리'의 통합을 함께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링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함께 생각해보자.

    2017.04.11ㅣ주간경향 12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