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13

1968년 5월에 대한 회고들

그 많던 '신좌파'들은 다들 어디 갔을까? 한국의 '좌파'들은 놀라울 정도로 잠잠하기만 하다. 광우병 정국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나보다. 아무튼 올해는 68혁명 40주년이다. 그에 따라 다양한 기사들이 외신에 올라왔는데, 기록을 남기는 겸 해서 적어놓을까 한다.

뉴욕타임즈에서는 폴 오스터가 68년 5월 1일에 발생했던 대학가 점령을 회고한 기사가 올라왔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반발 혹은 호응이 이어졌다. 폴 오스터는 다소 후일담 소설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그 당시 '우리는 미쳐 있었다'고 읊조리지만, 독자 중 일부는 '우리'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까지 한다. 두 기사 모두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The Accidental Rebel", Paul Auster, The New York Times, 2008년 4월 23일.
""In '68, Our Protest Made a Difference", LETTERS, The New York Times, 2008년 4월 30일.

이번주 New Stateman의 주제 또한 1968년이다. 노암 촘스키, 에릭 홉스봄 등의 기고문과 함께 노동당의 노장 정치인 토니 벤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기사 목록을 보고 싶으면 여기로.

BBC World Service에서는 지젝과 바디우 등을 불러놓고 당시 부흥한 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지젝의 지독한 동유럽식 영어 발음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면서 귀에 꽂아놓고 있어서 별로 집중하지 않았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참여자들은 대체로 68 혁명과 정치, 철학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마땅한 논거를 충실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러한 해석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다. 직접 들을 수도 있고, mp3 파일을 다운받을 수도 있으니 꼭 한 번씩 방문해보는 것을 권한다.
"Philosophy in the Streets", BBC World Service, 2008년 5월 13일.

목숨 걸고 먹는 음식

아까 GQ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기사 한 편을 보냈다. "미친 소와 감기 걸린 닭에 대한 전 지구적 고찰"이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편집부에서 더 좋은 것을 붙여준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GQ 6월호에 실릴 예정인데, 그 기사에서 다소 논의가 미흡했던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 포스트를 쓴다.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과 관련해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지점 중 하나는, '우리가 100만 분의 1 확률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의 전제가 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가정인데, 안타깝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일본에서 설날마다 먹는 끈적끈적한 떡국 오죠니(お雑煮)를 예로 들어보자.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는 매년 몇 분의 어르신들이 이것을 드시다가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이미 2006년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이는 총 인구중 65세 이상인 사람이 20% 이상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일본의 노년 인구수는 전체 인구를 1억 4000만으로 잡았을 때 대략 2800만 정도가 될 것이다.

이들 중 계산의 편의를 위해, 매년 7명 정도가 매년 설날에 오죠니를 드시다가 돌아가신다고 해보자. 그러면 사망률은 0.5/100만이 되므로, 200만 분의 1이다. 전체적인 사망 원인과의 비교 등을 하지 않고 그냥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더라도, 일본의 노인 200만명 중 한 사람은 오죠니를 먹다가 목에 걸려 죽는다. 이것은, 정부에서 말하는 바를 네티즌들이 요약하는대로, 미국산 쇠고기를 먹다 사망할 확률이 100만분의 1이라고 할 때, 그것의 절반 정도 되는 수치이다. 결코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각심을 잃을 수도 없는 숫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이런 살인적인 풍습을 대체 왜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걸까?

이 풍습이 살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들 알 수 있다시피 넌센스이다. 떡을 먹다가 목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 음식이 살인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인간 광우병으로 사망한 환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미국산 쇠고기의 위생 상태를 붙잡고 논란을 벌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위험'한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광우병 논란의 쟁점은 광우병 자체가 아니다. 그런 논점을 잡고 있을 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측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정부가 국민을 기망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다. 거리로 뛰쳐나온 10대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간만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젊은 새댁들의 지속적인 호응을 얻기 위해 대중적 패닉을 계속 이용하려 드는 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나도 불쾌하다. 하지만 그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리고 현재 촛불집회 등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바로 그 지점을 혼동하고 있다.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는 진작에 설날에 오죠니 먹는 것을 금지했어야 한다.

광우병 정국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미국산 쇠고기가 악마의 음식이어서가 아니다. 설날에 떡국을 먹으려고 하는데, 모든 국민들이 일본산 오죠니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대중적인 반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의 인식은 이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호도된 진실에 편승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며, 그에 기반하여 정치적인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뿐 아니라, 찾아보면 목숨 걸고 음식을 먹는 사례는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고기 한 점을 먹기 위해 극미한 위험을 감소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했던 적이 없다. 바로 그것이 쟁점이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는 순간 한국이 좀비의 왕국이 된다는 식의 선동을 함부로 구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2008-05-09

식량 위기의 정치적 효과

이코노미스트의 뉴스 해설에 따르면, 식량 위기는 예상보다 심각한 정치적 효과를 불러오지 못했다고 한다. 30여개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고작 아이티 수상 한 명이 사임했다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물론 그 대가는 비싸다. 현재 식량 수입국들이 대처하는 방식은 이집트나 파키스탄처럼 배급표를 발급하거나, 자국의 식량 수출을 제한하는 것 등인데, 후자는 태국과 같은 대규모 수출국이 카르텔을 형성하게끔 하는 유인 동기가 된다. 식량 수입국이건 식량 수출국이건 상관 없이, 누군가 자유무역 원칙을 깨기 시작한다면 그 파급 효과는 모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추세가 이어질 때 더 많은 정치적 저항이 다수의 국가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예측한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나서서 '52개 생필품'의 가격을 통제하겠다고 나섰다. 동시에 미국산 쇠고기를, 거의 무조건적이라고 봐도 되는 조건으로 수입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기껏 꺼내든 항변이 '싸고 맛좋은 미국산 쇠고기'였기 때문에 현재의 정치적 저항이 더욱 거세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식량 생산량을 증대할 수 없다면 수출국과의 자유무역을 통해 시장 가격을 낮추는 것은 하나의 유용한 전략이 될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규모의 정치적 저항은 국제적인 식량 위기로 인하여 촉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총체적인 불신이 광우병에 대한 대중적 패닉과 맞물려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더욱 가깝다. 하지만 식량 위기라는 '조용한 쓰나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미리 수립하고 있지 않다면 앞으로 닥쳐올 정치적 위기는 더욱 거센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식량 가격이 예전에 비해 너무도 오르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수요나 바이오디젤에 대한 선호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론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결론을 국민들에게 들이미는 한국 정부의 ('정치 과학'이라는 단어를 상정하자) 비과학적인 자세를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008-05-08

최근 찍힌 사진 한 장


2008 앰네스티 한국지부 정기총회에서 부지부장에 출마한 후, 경쟁 후보 임태훈씨와 함께 질문에 응답하고 있는 모습. 2008년 4월 26일. 안타깝게도 실제 선거에서는 제3의 후보에게 둘 다 패배하고 말았지만, 총회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아냈다는 것에서 의의를 찾기로 했다. 1:1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비하면, 다수를 앞에 놓고 연설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의사소통과 설득의 논법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

광우병 논란과 한국의 농업

광우병 논란을 가만히 짚어보면 가장 중요한 논점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국내 축산 농가가 망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 차이를 보이지만, 축산 농가를 살리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있는 듯하다. 여론의 관심은 주로 광우병의 공포로 인해 거리에 선 10대들에 맞춰져 있다. 요컨대 문제는 국민 건강과 식품 안전이며, 그 다음은 이명박 정부의 통상 주권과 협상력의 부재라는 식이다.

이러한 종류의 찬성과 반대는 모두,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면, 지금처럼 농가의 붕괴 현상에 대한 대책 없이 수입 장벽을 열어도 좋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인식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적인 흐름을 거스르고 있으며, 국가 경제를 놓고 볼 때에도 타당하지 않고, 결국 국가 경쟁력 재고에도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이 진정 21세기형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핸드폰을 팔기 위해 농촌을 죽이는' 박정희식 개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난해 국제 곡물 시장에서 밀의 가격은 287퍼센트, 옥수수는 149퍼센트 상승하였고, 그 외 커피, 완두콩, 콩, 쌀 등 기본적인 곡물들 또한 그러한 추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식량 가격이 이처럼 천정부지로 오르는 이유에는, 확실한 것 하나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 하나가 있다. 중국 내 육류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가축을 기르기 위한 사료 소비가 대규모로 늘어났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서구 선진국에서 바이오디젤용으로 옥수수를 대량 소비함으로써 식량 가격 폭등에 일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현재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중이다. 아무튼 식량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덕분에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인 태국은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다. 더구나 WSJ에서 운영하는 Marketwatch의 보도에 따르면 태국은 OPEC과 유사한 형태의 농업 카르텔을 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라오스, 버마,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이 그 구성원인데, 태국과 베트남은 세계 1, 2위의 쌀 수출국인 만큼 실제로 구성된다면 그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한국에서 먹는 자포니카와 동남아에서 기르는 안남미가 다르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식량 가격이 오른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미국에서 최근 가장 큰 주가 상승률을 보여주는 기업들이 농업 기업이라는 사실 또한 많은 것을 시사한다. theStar.com의 보도에 따르면, 모사익은 319퍼센트, 포타쉬는 140퍼센트, 몬산토는 105퍼센트씩 지난해 주가 상승을 기록하며 전례 없는 호황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원인이 뭐가 되었든지간에, 세계 경제의 기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애플의 상품과 마케팅이 방증하는 바와 같이, IT는 첨단 산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 산업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2008년을 넘어서는 이 시점에서 세계 각국이 가장 주목하는 산업은 다름아닌 농업인 것이다.

광우병과 관련한 사회적 논란이 '미국 소의 안전성'과 '통상 주권'에만 머물러있는 현실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안타깝다. 현재 돌아가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농촌을 이런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먹고 싶다면 한국의 축산 유통 구조를 개편해야지, 무턱대고 미국산 쇠고기의 문호를 열어젖힐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국제적으로 사료값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의 값 또한 앞으로는 결코 싸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농업 정책, 더 나아가 경제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백하지 않은가.

광우병 논란의 양쪽 방향을 두루 살펴봐도, 우리의 '국민 감정'은 어디까지나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도 '소수가 희생해서 온 국민이 값싸게 먹을 수 있다면'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볼 때, 이미 공업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닥쳐올 농업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농촌을 죽이고 도시를 살리는' 박정희식 근대화의 2000년대 버전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작고 강한 농업'이 필요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내의 실정과 지역적 상황에 최적화된 무언가일 수밖에 없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느냐 마느냐 여부를 떠나서, 한국의 농업을 이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