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30

외신 기자들은 무슨 신문을 볼까

주말 내내 집회에 참석해서 체력이 바닥난 상태다. 요즘 정신적으로도 소모가 심해서 길고 차분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냥 아주 간단하게, 사실 하나만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CNN에서 촛불시위에 대해 보도한 기사를 보고 적지 않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조중동 못지 않다'는 식의 불만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CNN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미국 매체여서가 아니다(뉴스코프 사장 루퍼트 머독은 호주 출신이다).

외신에서 다루는 한국 소식이 '조중동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은, 한국에 상주하는 외신 특파원들이 매일같이 중앙일보를 보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논리적 필연에 가까울 정도로 확실하다. 외신 기자가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을 구독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거기에 매일같이 Joongang Daily, 즉 영문판 중앙일보가 딸려온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렇다. 외신기자들의 아침은 중앙일보로 시작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그 내용을 지적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만큼, 같은 내용을 번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문판 중앙일보의 내용은 한국어판보다 훨씬 더 '쩐다'. 영어를 잘 못해서 그렇게 번역을 하는 건지, 아니면 너무 잘 해서 미묘한 뉘앙스를 이상한 방향으로 살려내고야 마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렇다. 한국에 상주하는 외신 기자들은, 한국어판 중앙일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은 Joongang Daily의 정기구독자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외신 보도에 대해 십중팔구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에서 영문판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파급력은 아무래도 Joongang Daily에 미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공정 보도'가 외신을 통해 나오는 것은 사실상 거의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외신 기자가 맞았다더라', '외국인이 맞았다더라' 같은 유언비어에 휩쓸려, 타자의 시선을 힐끗거리는 일은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2008-06-27

고립과 연대

1.

6월 25일, 경복궁역 1번 출구 패밀리마트 앞. 애초에 경복궁역에 모이는 것부터가 잘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경복궁역을 가로지르는 차도가 시위대를 양쪽으로 분산시켰다. 오후 8시경 도착한 나는, 패밀리마트가 있는 1번 출구에서 친구와 만났고 상황을 주시했다. 정말 좋지 않았다. 전경들은 인도까지 올라와있었다. '불법집회를 당장 해산하라'고 말은 하는데, 해산한 다음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청와대 방면에서 전경 중대 하나가 내려왔다. 스크럼 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쪽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버텼다. 50여분 정도 그럭저럭 잘 해나간 것 같은데, 뒤쪽에서도 진압이 들어왔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사기가 떨어졌고 체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내 왼쪽에서 스크럼이 깨졌고, 전경들이 밀고 들어와 바로 내 옆에 있던 사람까지 연행해갔다. 손을 잡았지만 미끄러졌고, 나는 지하철역으로 돌아와 친구를 다시 만난 후 숨을 골랐다. 광화문으로 옮겨간 후 그날 3시까지 집회에 참여했다.

내가 대책회의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자기들이 '집행부' 노릇하고 싶어서 방송 틀고 노래에 춤에 덩실덩실 노는 것도 다 좋다. 하지만 앞장서서 나서고 있는 사람들이 고립되도록 방치하는 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고립으로 인한 공포심이야말로 시위대를 해산하고자 하는 경찰이 노리는 바로 그것이다.

경복궁에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러 가자는 목소리를, 교묘한 방식으로 묵살했다는 제보가 한 둘이 아니다.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칼라TV 중계를 통해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그 광경을 지켜봤다. 게다가 새벽 무렵, 서대문에서 전경들이 밀려들어오던 순간에도 그렇다. 투썸플레이스 방향으로 차를 몰고 왔으면 계속 거기서 버티거나, 방송을 끄고 조용히 광화문으로 도망갈 것이지, 계속 방송을 하면서 차를 빼니 시위대가 그것을 따라가게 되는 것 아닌가.

분통이 터져서 항의를 하러 동행인이 달려갔다. 그러자 방송차량 주변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던 '일반 시민'들이, 누구에게도 답변을 할 수 없도록 돌려가면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더라. 하나같이 말로는 '나는 대책위는 아니지만' 이라고 단서를 붙이는데, 대책위의 입장을 너무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방송차량에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살수에 맞으면 안 된다나? 누가 당신들더러 앞장서서 방송 해달랬나? 후퇴를 하더라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 이거다. 꺼질거면 닥치고 꺼지라고. '님을 위한 행진곡' 틀면서 도망가면 후퇴가 전진으로 바뀌더냐?


2.

현재 가장 두려운 것은,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고립되고 있다는 불안감에 잠식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안전한 곳에 앉아서,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노래 틀면서 지휘부 행세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대책위로부터도, 고립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에 빠져들면 진다. 비단 이 시위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국민들이 무기력에 빠져들어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있으면, 선거에서 거의 다 이기고도 정권 탈환을 못 하는 수도 있다. 짐바브웨가 바로 지금 그렇다.

짐바브웨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뉴스위크 인터넷판이 24일 대선 결선투표를 앞두고 야당 후보가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는 짐바브웨의 현지 르포를 실었다. 뉴스위크 기자의 눈에 비친 모습은 기이한 ‘평온함’이었다.

로드 노드랜드 기자가 지하 조직을 통해 어렵사리 잠입한 곳은 짐바브웨 제2의 도시 블라와요. 실업률이 85%에 이른다는데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이나 거지가 없었다. 교통체증도 없고 거리도 깨끗했다.
"짐바브웨, 빵 한덩어리 사는데 3시간 ‘줄서기’"(경향신문, 2008년 6월 24일)


1차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인 무가베를 앞섰지만 50%를 넘기지 못해 결선투표로 가게 된 짐바브웨에서, 무가베는 무자비하게 야당 지지자 및 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야당 후보가 네덜란드 대사관을 통해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민들은 의외로 대단히 평온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드랜드가 본 짐바브웨 사람들의 주된 활동은 ‘줄서기’였다. 시내 빵집마다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쥐새끼를 때려잡자'는 사람들이, 아파트 값이 올라가는 것을 기대하며 주택청약 줄서기를 하고 있는 한국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여기나 거기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자기 손으로 벌어서 삶을 꾸리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오직 '줄서기'에 매달려있는 동안 정부는 제멋대로 정책을 펼쳐나간다. 그래놓고서는 다들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라고 항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줄서기'를 그만 둬야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들 스스로가 한 사람의 노동자라는 것을 절실하게 자각하는 의식적 전환이 필요하다.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역설적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노드랜드 기자는 “무가베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보도가 6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무가베는 ‘짐바브웨는 붕괴되지 않는다’고 교만하게 말하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무가베 말이 옳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5년째 10% 이하"라는 보도가 5년째 이어졌지만, 아무튼 대운하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싶지 않다면, 아프리카 플레이어를 끄고 아고라 띄워놓은 웹브라우저 창을 닫자. 광화문의 시민들은 현재, '일반 시민'들 속에 고립되어 있다.


3.

오늘은 경찰이 매우 이른 시각부터 진압에 나섰다고 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한 방편일 가능성이 크다. 숫자가 적지 않아서 당장 집단 연행을 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시위가 어떤 방향으로 튈지에 대해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결국 우리는 다시 '연대'라는 해묵은 가치를 꺼내들 수밖에 없다. 금토일 사흘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더 강하게 연대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두 거리에서 만납시다.

2008-06-24

크루그먼 칼럼 번역, 그 외 여러 가지

Bad Cow Disease


"메리는 작은 양을 길렀고/ 그 양이 아프다는 것을 봤을 때/ 그것을 패킹타운(Packingtown)으로 보냈고/ 그 위에는 닭고기 라벨이 붙었답니다."

이 짧은 동요는 업튼 싱클래어(Upton Sinclair)가 1906년 미국의 육류 포장업계의 실상을 폭로한 "정글(The Jungle)"의 내용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다. 싱클래어의 고발은 테오도어 루즈벨트가 청정 음식 및 약물법(Pure Food and Drug Act)과 고기 검사법(Meat Inspection Act)을 통과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리하여 다음 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미국인들은 그들의 식품의 안전을 검사하는 정부를 믿었다.

최근, 그러나, 언제나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식품 안전 문제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상한 시금치, 독성을 띈 땅콩 버터, 그리고, 근래에는 살인 토마토의 공격까지 있었다. 미국 식품 규제의 신뢰도 감소는 심지어 대외 정책의 위기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친 미국적인 수상(NYT의 실수. 6월 20일 내용을 수정하였음)이 2003년 광우병이 발견된 이후 금지했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겠다고 결정하자 그에 대한 대규모의 반발이 일어났다.

대체 어떻게 해서 미국은 "정글"로 돌아가게 되었을까?

그 문제는 이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미국의 하드 코어 보수주의자들은 미국 도금시대(Gilded Age)를 오래도록 이상화하면서, 동시에 그 뒤를 이은 모든 시대를, 뉴딜 뿐 아니라 진보시대(Progress Era-대공황 극복기)마저도 진정한 자본주의의 길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여, 세금 반대론자인 그로버 노퀴스트(Grover Norquist)에게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미국이 "테디 루즈벨트, 그 사회주의자가 가져온 소득세, 사망세, 규제, 그 모든 것들"로부터 미국을 되돌려놓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고 밀턴 프리드먼(Milton Freidman)은 식품의약청을 없애자는 요청에 동의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불필요하다. 사기업들은 그들의 명성을 위협하는 공공 안전의 위험 유발을 회피할 것이며, 치명적인 집단 소송을 회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다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프리드먼은 변호사를 자유 시장 경제의 수호자로 보았다.)

이러한 하드 코어 규제 반대론자들은 정치적 극단주의자들 중 일부일 뿐이었지만, 보수주의의 현대적 부흥 운동과 함께 그들은 권력의 통로로 들어왔다. 그들이 FDA를 없애거나 육류 검사 제도를 제거하는데 충분한 표를 얻은 적은 없지만, 그들은 식품 안전 보장을 무력하게 만드는 로비 집단을 만들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그 로비 단체에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을만한 자원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그 작업 중 일부분이었다. 예컨대 과학의 발전과 세계화로 인해 FDA의 업무는 그 전에 비해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1994년에 비한다면, 그 로비 집단은 실질적으로 적은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고 있는 구조일 것이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되었던 2003년, 농림부 장관은 앤 M. 비네만(Ann M. Veneman)이었는데, 그는 전직 식품 산업 로비스트였다. 그리고 위협을 체계적으로 축소하고 추가적인 검사 요청을 거부한 농림부의 대응은, 축산업계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2004년 놀라운 결정이 나왔다. 켄사스의 한 축산업자가 자신이 기르는 소를 검사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일본으로의 수출을 재개할 수 있도록 말이다. 부시 정권이 이러한 자율 규제 사례를 쌍수 들어 환영했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허가는 나지 않았다. 같은 요구를 소비자들이 하게 된다면 그 규제를 따라야 할 다른 육류 생산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압력이 높아지던 그 때, 패거리 자본주의 놀음은 자유 시장에 대한 신앙 고백의 가르침을 훈계하듯 설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과적으로, 농림부는 검사를 확장했고, 그 시점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금지했던 나라들은 다시 시장을 개방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쇠고기 문제가 덜떨어진 외교관에 의해 상처받은 한국인들의 국가적 자존심과도 연결되어버린 만큼, 그 불신 중 일부는 비이성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비난하기란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축산업계에 대한 농림부의 엄호사격은 아군을 쏘는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잠재적인 외국 구매자들이 우리의 안전 기준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쇠고기 생산자들은 가장 중요한 대외 시장에 수 년간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부시 정부가 효율적인 규제를 위해 벌인 다른 행동들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에서 비판이 가능하다. 가장 도드라지는 것이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에 대한 일체의 규제를 제거해버린 정책이다. 이것은 과잉 대출보다 더 큰 부담을 금융업계에 전가시킴으로써 서브프라임 위기의 토대를 마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렇다. 효율적인 규제에 실패하는 것은 소비자뿐 아니라 기업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식품의 사례로 돌아와보면,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해외 시장을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테디 루즈벨트, 그 사회주의자 이후에 우리가 걸었던 길을 회복하는 것이다. 미국의 식품이 안전하다는 보증을 업계에 돌려줘야 할 때이다.
(폴 크루그먼, "Bad Cow Disease", The New York Times, 2008년 6월 13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에 갔다가 돌아온 지금, 우리가 6월 13일에 올라온 이 칼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자율규제'는 이미 한 번 실패한 바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켄사스의 한 축산업자가 자신이 기르는 소를 검사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일본으로의 수출을 재개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허가는 나지 않았다. 같은 요구를 소비자들이 하게 된다면 그 규제를 따라야 할 다른 육류 생산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국의 경우에 적용해보자. 한국에 수출되는 쇠고기를 위한 QSM은 모든 축산업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 도장을 찍어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저런 짓을 하면 분명히 추가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특히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음식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미비하므로, 소비자들은 가급적이면 자신이 먹는 식품이 안전하다고 보증되어 있기를 원하지, 그 반대를 바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QSM같은 새로운 '자율 규제'가 도입되면, 한국에 곱창을 수출하고자하는 축산업자들은 그러한 자율 규제를 따르고자 하겠지만, 위 경우처럼 다른 업자들의 반대와 맞닥뜨릴 공산이 크다. 정부의 추가협상안은 결국, 이미 한 번 실패한 사례를 반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문제는 이 칼럼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 부분을 인용하여 정부의 추가협상안을 비판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수많은 한국인들의 관심은 오직 "한국인들을 비난하기는 어렵다"라는 한 구절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영어로 된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을 거면 대체 뭐하러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나는 이러한 '한 줄 인용'이 대단히 불편하다.

크루그먼의 이 칼럼은 기본적으로 '미국은 시장 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한국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크루그먼, "한국인들 비난하기 어려워""라고 기사 제목을 따는 식의 저널리즘을 대체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미국 쇠고기 그 자체의 안전성이 아니라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신뢰도'가 문제라는 논점을 제대로 잡아, 이쪽에서 먼저 의견을 펼쳐나갈 수 있는 그런 저널리즘은 눈 씻고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경향신문과 프레시안 정도가 쇠고기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보도를 펼치고 있지만, '모든 규제는 악이다'라는 주문에 휩싸여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것이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크루그먼과 같은 논지는 진작에 이쪽에서 먼저 나왔어야 한다.

미국 내에서 과도하게 규제를 풀어버림으로써 도리어 수출이 막히고 있는 것은 비단 한국 시장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특히 EU에 수출하고자 하는 미국 업자들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마이에미 대학교의 경제학과 조교수인 Bill C의 설명이다. "The EU Is Watching Out for You"(Twenty-Cent Paradigms, 2008년 6월 14일)라는 포스트를 통해 그는 규제와 수출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정부의 효율적인 간섭이 없다면, 소비자들은 잠재적인 위험 수준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구매하는 물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완전하게 알고 있다면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EU의 소비자들이 뭐가 들어있는지 알 턱이 없는 미국 물건, 특히 화학 생산물을 구입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그 시장을 노리기 위해 미국인들은 '자율적으로' 품질 보증 등의 제도를 택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규모의 경제'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할 경우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규제에 맞추기 위해 온 산업이 안전 기준을 맞출 때보다 개별 생산자가 감당해야 하는 생산비가 높아진다는 데 있다. 즉, 품질은 똑같고 가격은 더 비싼 물건을 미국은 EU에 수출하게 되는 것이다. 팔릴 턱이 없다.

물론 한국의 쇠고기 가격은, 미국 내에서 생산비가 다소 높아진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하지만 '자율 규제'로 인한 비용은 결국 한국 소비자들에게 전가된다.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는 그로 인해 '값은 어중간하게 비싸지만 질이 좋은지는 딱히 알 수 없는' 이상한 물건이 되고 만다. 그럼 대체 왜, 한국의 영세 축산농가를 괴멸로 몰아가는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신이 없어서 번역은 엉망이고 글도 횡설수설인데, 그래도 내용을 정리해보자. 첫째, 크루그먼 교수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이미 자율 규제를 시험해봤지만, 시장 논리에 의해 실패했다. 둘째, 이런 중요한 정보를 한국 언론들은 거의 다루지도 않고 있다. 그저 "한국인들은 나쁘지 않아요"라는 말에만 주목하고 있을 따름이다. 셋째, 과도한 규제 완화로 인하여 발생하는 경제적 문제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문제이며 미국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대체 왜 한국 정부가 나서서 미국의 짐을 대신 떠맡아주는 것일까? '이면합의가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이쯤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이 문제는 단지 광우병과 식품 안전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시 행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다이 하드 규제 완화가 논점이 되듯, 한국인들은 여기서 고기 타령 외의 논점을 더 끌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수준 문제가 일단 걸린다. 미국 내에서 이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전혀 추적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하나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자율 규제'의 실패 사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법이라고 들고 온 협상단에도 문제가 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찾고, 미국산 쇠고기에서 출발한 이 문제의 끈을 다방면으로 이어갔으면 한다.

2008-06-23

7/30, The Desperate People's Vote

이명박이 '실용주의자'이긴 한가보다. 촛불시위가 50일이 넘어가도 묵묵부답이다.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유전을 파도 반응이 없긴 마찬가지이다. 그런 이명박이라 하더라도 재보선 결과에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명박은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실용주의자'인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닌 한,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그의 '실용주의'는 자본주의의 법칙과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것도 실용주의이긴 실용주의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대규모 파업이 뛰따라야 한다고 줄곧 말해왔다. 기업들에게 타격이 가지 않는 한 이명박은 절대 국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광고 압박 운동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지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대중운동화된 안티조선'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뿐이지만, 국민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절망적인 현 상황에서 그것은 나름대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현 사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영어 단어를 차용해야 한다. 'desperate'가 바로 그것이다. 'desperate'가 가지는 첫번째 뜻은 '절망적'이다. 전경들과 수십일 넘도록 대립하고 있는 것이, 극도로 제한된 효과밖에 가져올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 밤, 시민들은 모래주머니를 쌓고 전경 버스 위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어 보았다. 밧줄 걸린 닭장차가 쑥 하고 딸려나올 때에는, 말 그대로 앓던 이가 빠지는 듯 속이 후련했다. 일요일 밤에는 진보신당측의 변호사 한 명이 전경들의 체포가 불법임을 밝혀내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에게는 씨도 안 먹힌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명박은 뒤틀린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실질적인 타격을 입히지 않는 한 촛불시위를 통해 표출되는 국민들의 열망이 정치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노동조합에 속해있지 않은 노동자들, 혹은 스스로에게 '일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7월 총파업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 영 마땅찮게 느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표로 심판하고 싶지만, 선거가 너무 멀다.' 하지만 서울시민들을 위한, 아주 중요한 선거가 눈 앞에 있다. 7월 30일은 사상 최초로 서울시교육감 직선투표가 열리는 날이다.

서울시교육감은 서울시의 모든 초등, 중등교육을 책임지는 직책이다. '교육 대통령'이라고 보면 된다. 서울시교육감이 집행하는 예산만 해도 총 6조원에 달하는데, 이것은 부산시 전체의 예산에 육박한다. 5만 5천여명의 교직원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정독도서관, 남산도서관 등 서울 시내 17개 시립도서관까지도 직속기관으로 두고 있다. 또한 교육감은 외국어 고등학교를 추가 설치할지 여부를 실질적으로 결정한다.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교육감에게 0교시 수업을 철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실질적인 권한은 개별적인 학교장들이 가지고 있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감은 학교장 인사권을 지니고 있다. 일부 소신있는 학교장이라면 교육감이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않고 0교시 수업을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공직사회의 특성을 염두에 둘 때 교육감이 바뀌면 적어도 서울시에서는 0교시 수업이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 청소년들에게 아침잠을 돌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이 모든 교육감의 법률적 권한은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제20조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20조 (관장사무) 교육감은 교육·학예에 관한 다음 각 호의 사항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1. 조례안의 작성 및 제출에 관한 사항
2. 예산안의 편성 및 제출에 관한 사항
3. 결산서의 작성 및 제출에 관한 사항
4. 교육규칙의 제정에 관한 사항
5. 학교, 그 밖의 교육기관의 설치·이전 및 폐지에 관한 사항
6. 교육과정의 운영에 관한 사항
7.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에 관한 사항
8. 평생교육, 그 밖의 교육·학예진흥에 관한 사항
9. 학교체육·보건 및 학교환경정화에 관한 사항
10. 학생통학구역에 관한 사항
11. 교육·학예의 시설·설비 및 교구(敎具)에 관한 사항
12. 재산의 취득·처분에 관한 사항
13. 특별부과금·사용료·수수료·분담금 및 가입금에 관한 사항
14. 기채(起債)·차입금 또는 예산 외의 의무부담에 관한 사항
15. 기금의 설치·운용에 관한 사항
16. 소속 국가공무원 및 지방공무원의 인사관리에 관한 사항
17. 그 밖에 당해 시·도의 교육·학예에 관한 사항과 위임된 사항


이 역사적인 선거가 벌어지는 날이 바로 7월 30일이다. 수요일이고, 임시공휴일이 아니며, 따라서 투표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10%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2월 부산시교육청 교육감 선거 투표율은 15.3%에 불과했다고 한다. 즉 한나라당에서 밀어주는 후보의 조직표가 활약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교육감은 행정직이기 때문에 정당의 추천을 받거나 해서 나오는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공정택 현 교육감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촛불 집회의 배후는 전교조"라는 발언을 한 바로 그 사람이다. 서울시의 교육 정책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던 것은 오직 이명박 때문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 공정택 현 교육감은 이미 3월부터 "서울지역 전체 초·중·고교 학부모에게 ‘교육감 서한문’을 발송"하는 등, 사전선거운동으로 의심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공정택이 아닌, 진보진영의 유일후보인 주경복 건국대학교 교수를 서울시교육감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실 나는 주경복 교수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믿음직한 사람들이 그를 최초의 민선 서울시교육감으로 만들기 위해 발벗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촛불의 방향에 대한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하기도 했지만 사전선거운동의 험의를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에 발언을 자제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도 주경복 교수이다. 물론 전교조도 함께하고 있다(참고기사). 나는 그를 지지한다.

7월 30일 투표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부재자투표 등록을 한 후, 24일에서 25일까지 이틀간 부재자투표를 할 수 있다고 한다(교육감 선거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여기). 부재자투표는 군인 뿐 아니라, 선거일에 투표를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이니만큼, 출근하였다가 잠시 투표하러 집에 다녀올 수 없는 직장인들에게 특히 요긴한 제도가 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미친 행보를 실질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7월 30일에 투표를 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부재자투표라도 하도록 하자.

'desperate'의 첫번째 뜻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필사적'이라는 의미도 숨어있다. 한국어로 1:1 번역이 되지 않는 이 단어는, 이명박 정부와 맞서고 있는 시민들의 현 국면을 너무도 잘 드러내준다. 우리는 절망적인만큼 필사적이다. 전경버스로 막히면 돌아갔고, 명박산성으로 막히면 그 위에 올라갔으며, 물대포에 맞아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신문지를 모아 불을 붙였다.

또한 이 시위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라. '아이들이 무슨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짜증나는 구호에, 그들은 '어른들이 무슨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고 맞받아친다. 그들이 꾸준히 출석하며 촛불시위의 동력이 되고 있다. 만 19세 넘은 성인들은 모두 그 청소년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이다. 그것은 동시에 이명박의 미친 교육정책에 결정적인 태클을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절망적이지만, 동시에 필사적이다. 7월 30일에 이기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절망적인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고, 그 위에 필사적인 노력을 덧붙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희망을 쟁취해낼 수 있다.

2008-06-21

이것 저것

1. 대책회의의 행동 중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긴 하다. 하지만 '48시간 국민행동'을 제안해놓고는, 10시 30분에 시청 광장에서 "우리 내일 만나요"라며 해산해버리는 건 대체 무슨 발상인지 지금까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아주머니가 커다란 쇼핑백에 싸들고 온 은박 돗자리가 민망해보일 지경이었다.

2. 최장집 교수의 고별강의에 다녀왔다. 한국의 현실정치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인식적 탁월함과, 그것을 담론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실천적 한계가 동시에 잘 드러난 강연이었다고 생각한다. 필기한 내용을 정리해야겠다.

3. 이문열이 내놓는 정치적 발언들은 결국 책 팔아먹으려고 벌이는 노이즈 마케팅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택광 선배의 지적은 상당히 적절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문열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효용 있는 일이 되지 못한다. 2008년의 촛불 혁명이 어디로 향할지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나는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새물결, 2006)를 읽었다. 이것만으로도 내가 어떤 서평을 쓸지, 그것을 통해 이문열을 어떻게 비판할지에 대해 상당히 큰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현재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헌 논의가 매우 위험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기사를 레디앙에서 발견하였다. "개헌? 초가삼간 태운다!"(윤현식, 레디앙, 2008년 6월 20일)의 논의 중 특히 중후반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어떻게 소화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문제의식 또한 나는 필자와 공유하고 있다.

5. 잠시 광고 말씀. 7월호 GQ가 나왔다. 최근 나온 GQ중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오래된 아파트에 대한 특집은 정말이지 눈이 번쩍 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자료 삼아 한 권 사야 한다. 박상륭 인터뷰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나이 많은 문학인을 이토록 멋지게 다루어준 사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GQ 7월호에 실린 박상륭은 흡사 변희봉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사진과 인터뷰가 실려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