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08

금리 인상과 주택 버블 붕괴

경제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과 더불어 벌어지게 될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비록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호의 Economic Focus에서(이 코너 정말 최고다. '경제학적 사고'가 뭔지 알고 싶다면 이걸 꼭 읽어야 한다) "Home Truths"라는 기사를 통해 '주택 가격의 하락이 반드시 전체 경제에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쳤지만, 한국의 경우는 문제가 조금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금리를 인상하면 당연히 매달 붙는 이자가 높아진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중산층, 1주택 소유하고 있고 그 주택을 담보삼아 대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자 부담이 가속화되면 가속화될수록 소비를 줄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은 곧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 이 상황에서 주택 가격의 거품이 빠지면, 그나마 그 중산층들의 유일한 자산인 주택의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재산은 줄었는데 빚은 늘어나버린 이중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주택 가격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에서 나온, '지금까지 집을 사지 못하고 있던 젊은이들이 이익을 보고' 같은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 집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나는 집을 못 산다. 이건 대부분의 20대에게 공통되는 현상이며, 30대로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현재 한국의 젊은 층은 불안정한 고용의 첫번째 피해자가 될 사람들이다. 학자금 대출 금리가 말도 못하게 올랐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주택 가격 버블이 빠진 후의 한국 경제는, 현재의 금리 인상과 맞물려, 정말 우려된다.

2008-08-07

대화와 소통과 자치공간



오늘자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 "겁먹은 20대와 '쇼크 독트린'"은 기본적으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에서 출발하고 있다. '쇼크 독트린'은 비단 20대에 대해서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컨테이너 박스로 장벽을 쳐버리는 그것 또한, 일종의 '충격 요법'인 셈이다. 방패로 땅을 찍고 구호를 외치면서 달려드는 전경들 또한 시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한 기제이다.

20대들이 '정보'와 '소통'으로 '쇼크 독트린'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대화와 사색을 위한 공간과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이 세워주는 으리으리한 건물에는 자치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의 대학생과 현재의 대학생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자치공간이 있었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몸을 누이고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이 없다. 예전에는 세미나실에 모여서 그냥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스타벅스에서 4800원짜리 까페라떼를 주문하거나 토즈 등 공간을 빌려주는 업체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또 돈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 "겁먹은 20대와 '쇼크 독트린'"(경향신문, 2008년 8월 7일)에 대한 코멘트를 이 게시물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대화와 소통과 자치공간



오늘자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 "겁먹은 20대와 '쇼크 독트린'"은 기본적으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에서 출발하고 있다. '쇼크 독트린'은 비단 20대에 대해서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컨테이너 박스로 장벽을 쳐버리는 그것 또한, 일종의 '충격 요법'인 셈이다. 방패로 땅을 찍고 구호를 외치면서 달려드는 전경들 또한 시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한 기제이다.

20대들이 '정보'와 '소통'으로 '쇼크 독트린'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대화와 사색을 위한 공간과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이 세워주는 으리으리한 건물에는 자치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의 대학생과 현재의 대학생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자치공간이 있었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몸을 누이고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이 없다. 예전에는 세미나실에 모여서 그냥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스타벅스에서 4800원짜리 까페라떼를 주문하거나 토즈 등 공간을 빌려주는 업체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또 돈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 "겁먹은 20대와 '쇼크 독트린'"에 대한 코멘트를 이 게시물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2008-08-04

2008 펜타포트 후기

7월 26, 27일 이틀에 걸쳐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약 한 달 넘도록 주말이 되면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가 반복되고 있다. 지난 주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와 동행인은 약수역에서 오후 3시 경에 출발하여, 저녁 7시가 넘어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장 바깥에는 이미 장화와 비옷과 암표를 파는 상인들이 군데군데 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펜타포트 1회 당시 얼마나 공연장 상황이 좋지 않았는지를 이미 들은 터라, 낚시의자와 슬리퍼로 대비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려가 앞섰다.

한철 특수를 노리는 숙박업소에 다소 비싼 값을 주고 짐을 내려놓은 다음, 역시 비싼 가격으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한 후, 공연장에 들어갔다. 물빠짐이 좋지 않고, 주차장에 쓰는 자갈을 뿌려놓긴 했지만 본디 흙바닥인지라, 폭우가 쏟아지고 난 후의 모습은 갯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메인 공연이 열리는 큰 무대까지 가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펜타포트에는 '좌석' 따위가 없다. 기본적으로 스탠딩 공연인지라, 서서 볼 사람들은 계속 서서 보고, 앉고 싶은 사람은 알아서 뭐라도 깔고 앉거나 해야 하는 방식이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내 동행인은 공연 시작 이틀 전 대형 낚시의자를 주문했고, 덕분에 우리는 엉덩이를 적시지 않고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Next Stage 자우림'이라는 전광판 문구를 보는 순간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언제적 자우림인데 아직도 이런 큰 무대에 불러준단 말인지, 한국 음악계의 세대 교체, 혹은 중견 밴드들의 자기 혁신이 이렇게 모자란 것인지, 등등을 고뇌하고 있는 동안 자우림이 무대 세팅을 마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fan이거든요!'(f 발음을 강조하며)라고 외친 후 '팬이야'를 불렀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관중들에게 소리를 질러달라고 한 후 오른손을 두 바퀴 돌려서 귀에 대고 왼손을 옆구리에 갖다붙일 때, 나는 내가 왜 김윤아를 싫어하는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분명 김윤아는 재능 있고 비주얼도 어느 정도 갖춘 드문 여가수이지만, 예쁜척하느라 인생을 너무 낭비하고 있다.

자우림의 나머지 세 명에 대해서도 그날 대대적인 평가절하가 이루어졌다. 리더,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안녕하세요, 퍼킹 자우림입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신곡 소개한다고 자꾸 모르는 노래만 하죠, 씨팔 존나 재미없게'라고 쿨한 척 하는 모습이 유독 눈에 거슬렸다. 고등학교 밴드부가 여고 가서 할 때나 써먹을법한 멘트를, 내가 왜 이 진창 속에서 인천 송도까지 와서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앵콜로 '헤이 헤이 헤이'와 '일탈'을 부르는 것도 나름 안습이라면 안습이다. 자우림의 전성기는 자우림 1집, 이 잔인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소녀 감수성은 제발 좀 버려라.

트래비스가 나올 때까지 나와 동행인은 정신을 놓고 있었다. 원거리 여행의 피로와, 그 엄청난 습기, 더위, 벌레는 별로 없었지만 저 멀리 화장실에서 느껴지는 향기, 등등을 전부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래비스만이 희망이었고, 그 희망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세 번째 노래 'Writing to Reach You'가 나올때부터 관객들의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트래비스 특유의 기타 사운드가 갖는 서정성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라이브 무대에서, CD를 들을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락킹(Rocking)했다.

흔히들 '떼창'이라 부르는 노래 따라부르기 속에 내 목소리도 한 줄기 들어간다는 사실이 이토록 뿌듯할 수가 없었다. 'Closer'를 부를 때가 절정이었고, 앵콜곡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가 나올 때 나와 친구와 모든 관객들은 모든 것을 잊고 깡총거리며 하나가 되어 있었다. 트래비스 공연에 대해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당시 현황을 담은 영상으로 그리움을 달래본다.


Closer, Travis, at Pentaport 2008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Travis, at Pentaport 2008


숙소에서 나와 친구는 다음날 메인 무대를 장식할 언더월드의 노래 몇 개, 카사비안의 곡 몇 개를 예습하며 내일을 기약했다. 2박 3일 공연의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절반을 포기한 만큼, 마지막 날은 최선을 다해서 축제에 참여해야 했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 작정하고 나와 점심을 비싸고 맛있게 먹은 다음 공연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밤새 비가 더 오지 않았고,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어 땅이 적당히 굳어가고 있던 차였다.



송도의 꽃게탕



낚시의자에 앉아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


순서도에 따라 여러 밴드가 무대를 장식했는데, 그 중 '오브라더스'가 인상적이었다. 그 밴드의 본명은 '오르가즘 브라더스'지만, 대외적으로 볼 때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 하에 '오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낸다. 물론 스스로를 소개할 때에는 자신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본명을 쓰는 그들은, 이름에 걸맞게 대놓고 엉큼하고 음탕한 가사의 로큰롤을 딱 50년대 필로 풀어내고 있었다.

무대 인사를 하는 방식도 눈여겨볼만 했다. '오르가즘 브라더스입니다. 오르가즘 브라더스는 로큰롤 밴드입니다'가 첫 인사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커져버린, 갑자기 커져버린, 갑자기 커져버린 좆" 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노래를 부르기 전이었나 부른 다음이었나, 관중들을 바라보며 '로큰롤 별거 없습니다, 그저 좆!'이라는 맨트를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선서하는 듯한 말투로 내뱉었다. 관객석은 쏟아지는 햇볕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하드 파이가 나왔는데, 그냥 내 감상으로는 명성에 비해 좀 약하다는 느낌이었다. 오브라더스의 해괴망측한 흥겨움을 지워버리기에는 약했다는 뜻이다. 내가 그들에게서 너무 큰 감명을 받아서일 수도 있으니, 이건 그냥 취향 문제일 듯하다. 다음 스테이지는 델리 스파이스. 아주 오래간만에 무대에 섰던 델리 스파이스는 녹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고백'을 오래간만에 그것도 라이브로 들으니 정말 짠한 기분이 들었고, 앵콜송 '차우차우'도 부르고 다 좋았는데, 갑자기 기타를 부수겠다고 나선 것도 그렇거니와 잘 부수지도 못해 몇 번씩 땅바닥에 내리치는 모습은 보기 딱할 지경이었다.

이제 해가 많이 기울어 땅거미가 기웃기웃해지는 시간. 아직 무대 위로 떠있는 태양이 눈부시긴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으면 카사비안이 나온다. 카사비안이 나왔다. 이건 정말이지, 맥주 마시면서 축구 보다가 주먹질하는 청년들을 위한 락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무대 실황을 편집한 영상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이 영상을 보면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위의 것을 먼저 보고 아래 영상을 보면 충분히 상상이 간다.


Shoot the Runner, Kasabian, at T in the Park 2007



LSF, Kasabina, at T in the Park 2007



Shoot the Runner, Kasabian, at Pentaport 2008



문제는 이들이 공연하는 가운데 사운드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 보컬과 드러머가 몇 번씩 제스춰를 취했는데 문제가 원활하게 해결되지 않아, 급기야 드러머가 스틱을 뒤로 던져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다행히도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 속에 복귀하여 앵콜 송을 불렀지만, 다소 개운치 못한 기분이 든 것이 사실이다.

최종적인 무대는 이례적으로 테크노 그룹인 언더월드의 것이었는데, 정말이지 짜릿하면서도 동시에 신선한 자극이 되는 그런 공연이었다. 그들은 음악을 하면서 동시에 비디오아트를 선사하고, 심지어는 설치미술까지 동원하는 그런 총체적 예술의 한 형태를 제시했다. 눈과 귀와 몸이 이토록 동시에 즐겁고 짜릿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공연 중간에 무대에 설치한 초대형 형광봉. 치킨집 개업할 때 쓰는 대형 비닐 풍선 속에 전구를 설치하여 다양한 색깔을 낼 수 있도록 했다. 중간에 모양도 한 번 바꿔가며 완벽한 무대를 연출해냈다.


숙박업체에 바가지 요금을 내는 것보다, 차라리 택시를 콜로 불러서 타고 장거리를 뛰는 편이 더 싸다는 판단에 다다른 우리는, 미리 계획했던대로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먼 길에 올랐다.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게 분출할 수 있었던 이틀이었지만, 그것이 방금 끝났다는 사실은 더욱 강하게 그와 나를 엄습해왔다. 온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머리는 아직도 강렬한 사운드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 웅웅거렸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촛불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었다. 어젯밤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다. 40여명이 연행되었고 경찰은 더욱 매몰차게 시위대를 몰아붙이고 있으며, 선거전은 '근소한 우세' 속에 일부 신문 매체의 집중 포화 속에 힘겹게 치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진짜 축제의 장에서, 민주주의가 어쩌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다 아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던, 대책회의가 주관하던 어설픈 '축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잊기 위해 더욱 미친듯이 뛰고 소리지르고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축제는 어디까지나 축제일 뿐이며, 현실은 엄연히 우리가 떠나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 검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때는 교육감 선거에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고 있었고, 체포전담조가 구성되어 투입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다음주 토요일인 8월 2일, 비옷을 뚫을 듯 쏟아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나는 '집회를 축제의 장으로' 라고 함부로 떠들던 그런 이들에 대한 새삼스러운 분노를 느꼈다. 그들은 진짜 축제가 뭔지도 모르고, 진짜 축제에서는 놀 줄도 모르는 주제에, 집회의 힘을 소진시키기만 했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화가 났다. 내가 청계천의 구멍가게에서 노란 비옷을 사서 입고 있는 동안, 친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또한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그래 씨발, 놀 때 놀고 할 때 해야지 뭐.

2008 펜타포트 후기

7월 26, 27일 이틀에 걸쳐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약 한 달 넘도록 주말이 되면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가 반복되고 있다. 지난 주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와 동행인은 약수역에서 오후 3시 경에 출발하여, 저녁 7시가 넘어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장 바깥에는 이미 장화와 비옷과 암표를 파는 상인들이 군데군데 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펜타포트 1회 당시 얼마나 공연장 상황이 좋지 않았는지를 이미 들은 터라, 낚시의자와 슬리퍼로 대비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려가 앞섰다.

한철 특수를 노리는 숙박업소에 다소 비싼 값을 주고 짐을 내려놓은 다음, 역시 비싼 가격으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한 후, 공연장에 들어갔다. 물빠짐이 좋지 않고, 주차장에 쓰는 자갈을 뿌려놓긴 했지만 본디 흙바닥인지라, 폭우가 쏟아지고 난 후의 모습은 갯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메인 공연이 열리는 큰 무대까지 가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펜타포트에는 '좌석' 따위가 없다. 기본적으로 스탠딩 공연인지라, 서서 볼 사람들은 계속 서서 보고, 앉고 싶은 사람은 알아서 뭐라도 깔고 앉거나 해야 하는 방식이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내 동행인은 공연 시작 이틀 전 대형 낚시의자를 주문했고, 덕분에 우리는 엉덩이를 적시지 않고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Next Stage 자우림'이라는 전광판 문구를 보는 순간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언제적 자우림인데 아직도 이런 큰 무대에 불러준단 말인지, 한국 음악계의 세대 교체, 혹은 중견 밴드들의 자기 혁신이 이렇게 모자란 것인지, 등등을 고뇌하고 있는 동안 자우림이 무대 세팅을 마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fan이거든요!'(f 발음을 강조하며)라고 외친 후 팬이야를 불렀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관중들에게 소리를 질러달라고 한 후 오른손을 두 바퀴 돌려서 귀에 대고 왼손을 옆구리에 갖다붙일 때, 나는 내가 왜 김윤아를 싫어하는지 새삼스래 깨닫게 되었다. 분명 김윤아는 재능 있고 비주얼도 어느 정도 갖춘 드문 여가수이지만, 예쁜척하느라 인생을 너무 낭비하고 있다.

자우림의 나머지 세 명에 대해서도 그날 대대적인 평가절하가 이루어졌다. 리더,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안녕하세요, 퍼킹 자우림입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신곡 소개한다고 자꾸 모르는 노래만 하죠, 씨팔 존나 재미없게'라고 쿨한 척 하는 모습이 유독 눈에 거슬렸다. 고등학교 밴드부가 여고 가서 할 때나 써먹을법한 멘트를, 내가 왜 이 진창 속에서 인천 송도까지 와서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앵콜로 헤이 헤이 헤이와 일탈을 부르는 것도 나름 안습이라면 안습이다. 자우림의 전성기는 자우림 1집, 이 잔인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소녀 감수성은 제발 좀 버려라.

트래비스가 나올 때까지 나와 동행인은 정신을 놓고 있었다. 원거리 여행의 피로와, 그 엄청난 습기, 더위, 벌레는 별로 없었지만 저 멀리 화장실에서 느껴지는 향기, 등등을 전부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래비스만이 희망이었고, 그 희망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세 번째 노래 Writing to Reach You가 나올때부터 관객들의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트래비스 특유의 기타 사운드가 갖는 서정성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라이브 무대에서, CD를 들을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락킹(Rocking)했다.

흔히들 '떼창'이라 부르는 노래 따라부르기 속에 내 목소리도 한 줄기 들어간다는 사실이 이토록 뿌듯할 수가 없었다. Closer를 부를 때가 절정이었고, 앵콜곡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가 나올 때 나와 친구와 모든 관객들은 모든 것을 잊고 깡총거리며 하나가 되어 있었다. 트래비스 공연에 대해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당시 현황을 담은 영상으로 그리움을 달래본다.


Closer, Travis, at Pentaport 2008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Travis, at Pentaport 2008


숙소에서 나와 친구는 다음날 메인 무대를 장식할 언더월드의 노래 몇 개, 카사비안의 곡 몇 개를 예습하며 내일을 기약했다. 2박 3일 공연의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절반을 포기한 만큼, 마지막 날은 최선을 다해서 축제에 참여해야 했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 작정하고 나와 점심을 비싸고 맛있게 먹은 다음 공연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밤새 비가 더 오지 않았고,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어 땅이 적당히 굳어가고 있던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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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도에 따라 여러 밴드가 무대를 장식했는데, 그 중 오브라더스가 인상적이었다. 그 밴드의 본명은 '오르가즘 브라더스'지만, 대외적으로 볼 때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 하에 '오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낸다. 물론 스스로를 소개할 때에는 자신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본명을 쓰는 그들은, 이름에 걸맞게 대놓고 엉큼하고 음탕한 가사의 로큰롤을 딱 50년대 필로 풀어내고 있었다.

무대 인사를 하는 방식도 눈여겨볼만 했다. '오르가즘 브라더스입니다. 오르가즘 브라더스는 로큰롤 밴드입니다'가 첫 인사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커져버린, 갑자기 커져버린, 갑자기 커져버린 좆" 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노래를 부르기 전이었나 부른 다음이었나, 관중들을 바라보며 '로큰롤 별거 없습니다, 그저 좆!'이라는 맨트를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선서하는 듯한 말투로 내뱉었다. 밴드는 시큰둥한 듯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관객석은 쏟아지는 햇볕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하드 파이가 나왔는데, 그냥 내 감상으로는 명성에 비해 좀 약하다는 느낌이었다. 오브라더스의 해괴망측한 흥겨움을 지워버리기에는 약했다는 뜻이다. 내가 그들에게서 너무 큰 감명을 받아서일 수도 있으니, 이건 그냥 취향 문제일 듯하다. 다음 스테이지는 델리 스파이스. 아주 오래간만에 무대에 섰던 델리 스파이스는 녹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고백을 오래간만에 그것도 라이브로 들으니 정말 짠한 기분이 들었고, 앵콜송 차우차우도 부르고 다 좋았는데, 갑자기 기타를 부수겠다고 나선 것도 그렇거니와 잘 부수지도 못해 몇 번씩 땅바닥에 내리치는 모습은 보기 딱할 지경이었다.

이제 해가 많이 기울어 땅거미가 기웃기웃해지는 시간. 아직 무대 위로 떠있는 태양이 눈부시긴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으면 카사비안이 나온다. 카사비안이 나왔다. 이건 정말이지, 맥주 마시면서 축구 보다가 주먹질하는 청년들을 위한 락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무대 실황을 편집한 영상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이 영상을 보면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위의 것을 먼저 보고 아래 영상을 보면 충분히 상상이 간다.


Shoot the Runner, Kasabian, at T in the Park 2007


LSF, Kasabina, at T in the Park 2007


Shoot the Runner, Kasabian, at Pentaport 2008


문제는 이들이 공연하는 가운데 사운드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 보컬과 드러머가 몇 번씩 제스춰를 취했는데 문제가 원활하게 해결되지 않아, 급기야 드러머가 스틱을 뒤로 던져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다행히도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 속에 복귀하여 앵콜 송을 불렀지만, 다소 개운치 못한 기분이 든 것이 사실이다.

최종적인 무대는 이례적으로 테크노 그룹인 언더월드의 것이었는데, 정말이지 짜릿하면서도 동시에 신선한 자극이 되는 그런 공연이었다. 그들은 음악을 하면서 동시에 비디오아트를 선사하고, 심지어는 설치미술까지 동원하는 그런 총체적 예술의 한 형태를 제시했다. 눈과 귀와 몸이 이토록 동시에 즐겁고 짜릿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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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업체에 바가지 요금을 내는 것보다, 차라리 택시를 콜로 불러서 타고 장거리를 뛰는 편이 더 싸다는 판단에 다다른 우리는, 미리 계획했던대로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먼 길에 올랐다.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게 분출할 수 있었던 이틀이었지만, 그것이 방금 끝났다는 사실은 더욱 강하게 그와 나를 엄습해왔다. 온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머리는 아직도 강렬한 사운드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 웅웅거렸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촛불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었다. 어젯밤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다. 40여명이 연행되었고 경찰은 더욱 매몰차게 시위대를 몰아붙이고 있으며, 선거전은 '근소한 우세' 속에 일부 신문 매체의 집중 포화 속에 힘겹게 치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진짜 축제의 장에서, 민주주의가 어쩌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다 아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던, 대책회의가 주관하던 어설픈 '축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잊기 위해 더욱 미친듯이 뛰고 소리지르고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축제는 어디까지나 축제일 뿐이며, 현실은 엄연히 우리가 떠나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 검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때는 교육감 선거에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고 있었고, 체포전담조가 구성되어 투입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다음주 토요일인 8월 2일, 비옷을 뚫을 듯 쏟아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나는 '집회를 축제의 장으로' 라고 함부로 떠들던 그런 주둥이들에 대한 새삼스러운 분노를 느꼈다. 그들은 진짜 축제가 뭔지도 모르고, 진짜 축제에서는 놀 줄도 모르는 주제에, 집회의 힘을 소진시키기만 했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화가 났다. 내가 청계천의 구멍가게에서 노란 비옷을 사서 입고 있는 동안, 친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또한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그래 씨발, 놀 때 놀고 할 때 해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