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6

말이 씨가 되고

말이 씨가 되고


말이 씨가 되고
씨가 싹이 되고
싹은 잎으로 자라
줄기가 뻗고 굵어지고
굵은 뿌리 옆으로
실뿌리가 뒤엉키겠지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이 되겠지.



(2008. 12. 06.)

2008-12-05

헌법재판소의 최근 두 판결

종합부동산세의 세대별 합산에 대해 부분위헌을 선언한 것 외에도, 헌법재판소는 최근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를 전담하도록 한 방송법 제73조 5항과 그 시행령 제59조 3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두 판결 모두, 해당 법률에 위헌 소지가 매우 다분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름의 공익적 차원에 기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사실 상식적으로 조세 부과의 단위가 개인이 아닌 '가구'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코바코나 코바코가 출자한 회사가 아니면 방송광고 판매업을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본주의적인 상식선을 이미 어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코바코는 출발 자체가 위헌적, 아니 차라리 초헌법적이었다. 1981년 전두환 시절에 만들어진, 신문과 방송을 옥죄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통폐합한 후, 한국방송광고공사를 통해 방송사의 돈줄을 정부가 움켜쥐어버렸다. 이게 코바코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작이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코바코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수많은 지역방송, 종교방송 등의 군소방송업체가 영세한 살림을 근근히 꾸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코바코는 태생적으로 헌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그것이 현재 '공공의 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미디어 시장 자체가 좁고, 미디어 수용자들의 쏠림 현상이 심한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언론의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시장 경쟁보다 높게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읽어보면, 그러한 정책적인 방향성은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지 않다. 종부세에 대한 판결문에서는 최소한 '비례의 원칙'에 대한 판단이 있었고, 세대별 합산이 왜 만들어진 규정인지는 알지만 그래도 헌법불합치이다, 이런 논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나는 헌법재판소가, 이 두 건의 판결에 있어서, 해당 법의 입법 취지와 정책적 지향성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가급적 존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사법소극주의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그 판결로 인해 모종의 지향성이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는 사법적극주의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것은 여담인데, 특히 대한민국처럼 정치적 균형이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요동치는 국가의 경우, 사법소극주의와 사법적극주의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 사법적극주의는 입법부 내지는 행정부와의 관계에서는 "헌법, 법률 자구의 문어적(文語的)인 의미에 얽매이지 않고 선거에 의해 뽑힌 공무원들의 정책 결정을 대체하는 정책 결정을 판결을 통해 감행하는 진보적인 사법부의 태도"로 이해되는 반면, 판결을 통한 적극적인 가치 실현에 방점을 두고 사법적극주의를 "판사들이 선판례에 엄격히 얽매이지 않고 상급 법원의 판사들이 싫어할지도 모르는 진보적이고 새로운 사회 정책을 선호하는 사법부의 철학"으로 이해하는 입장 또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21쪽. 임지봉, 《사법적극주의와 사법권 독립》, (철학과현실사, 2004)]

만약 헌법재판소가 종부세의 세대별 합산을 합헌으로 처리했다면, 그것은 입법부와의 관계에서는 사법소극주의가 되겠지만, 행정부와의 관계에서는 사법적극주의가 된다. 그러므로 가령,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경향신문, 2008년 11월 20일)를 놓고 '사법소극주의적 입장'이라 말하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최종적으로 남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헌법재판소가 우리의 정치 지형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역할에 걸맞는 책임을 어떻게 부과할 것인가? 원칙적으로는 헌법재판소가 그저 '재판소'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최종심까지 판결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법감정과, 정치적인 문제를 모두 헌재에 떠넘기는 정치권의 '관습'이 맞물려, 헌재는 현재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헌법 기관이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 헌법재판소 판사 개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평가가 높아질 필요가 있다. 사법부, 특히 헌재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그에 걸맞는 윤리적 평가가 판사에게 돌아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것이 'XXX판사, 지켜보겠어!'라는 수준에서 멈추어서는 곤란하다.

헌재가 'Watchmen'으로 더더욱 큰 활약을 보이고 있는 지금, 'Who watches the watchmen(누가 감시가를 감시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천진난만할 뿐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는 발상이다. 사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과 감시가 더욱 절실하다.

2008-12-02

장기하와 얼굴들, Blog Killed the Video Star?

장기하와 얼굴들, Blog Killed the Video Star?

. . . 하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이 '블로그 스타'를 넘어설 수 있을까? 여러 게시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노래 좋고 재미있는데 인터넷 안 하는 사람들은 모른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그렇다는 거다. 분명 그들의 노래는 심심찮게 라디오 전파를 탔고, TV에도 두 번이나 출연했고, 온갖 신문 잡지 등에서 인터뷰가 쇄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영상'을 본 사람이 아니면 장기하와 얼굴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이 아니면 안 된다.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사람을 인터넷 안 하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두 문화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


내 마이스페이스 블로그에 올라온 글입니다. 격주로 쓰는 고정 칼럼이에요. 음악이나 그 외 영상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덧붙이는 형식이 될 예정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길.

(마이스페이스 로그인이 필요한 것 같군요. 하지만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이니 전문을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월요일자 경향신문 사설, 만평

월요일자 경향신문 사설

[사설]한국 온난화 문제 근본 발상 바꿀 때다
입력: 2008년 12월 01일 00:51:34

한국의 기온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늘어나면서 기후변화가 매우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왔다.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와 고려대 생명과학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조용성 교수팀이 개발한 ‘기후위기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100점 만점에 70점을 기록해 ‘매우 위험’한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기후위기지표는 자연·사회·경제적 요인과 기후 관련 재해, 온실가스 배출 등을 종합해 위기 정도를 측정한 것으로 한국에서 이런 계량화된 수치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한국 외에 일본(64점), 중국(61점), 독일(56점), 영국(55점) 등 4개국이 분석 대상이었다.

이것 말고도 한국 온난화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다.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10위권이다. 게다가 1990년 이후 연평균 4.7% 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증가율 1위다. 지난 100년간 세계 평균기온은 0.74도 올랐으나 한국은 1.5도 상승해 온난화가 훨씬 빨리 진행되고 있다.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정부가 저탄소 녹색성장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지난달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의 ‘녹색경쟁력 지수’를 산출한 결과 15개국 가운데 11위에 그쳤다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얼마 전 영국의 온난화 대책에 관한 기사에 “내게 순결과 금욕을 주십시오, 하지만 나중에…”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소개했다.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면서도 화석연료 사용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행동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의 심리를 빗댄 것이다. 작금의 경제 위기는 이런 심리를 더욱 부추긴다. 그럼에도 영국 의회는 지난달 하순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80% 감축하도록 의무화하는, 구속력 있는 법안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 그것도 당초 60% 감축을 80%로 강화한 내용이다.

한국은 아직도 온실가스 문제를 경제성장 측면에서만 바라보며 감축의무 면제에 신경을 쏟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 교토협약 체제가 시작되는 2013년 이후는 감축의무가 가시화할 것이다. 온난화 문제에 대한 근본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링크는 인용자).

그렇다. 정말 필요하다.


그리고 만평



지하철에서 보고 미친듯이 웃었음.

2008-11-30

그리고 세 번째 리플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밖에서 돌다 오니 블로그가 엉망이 되어 있군요. 주로 두 분이 '비판적'인 리플을 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이 논의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지난 두 글에 추가적인 코멘트가 붙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했습니다.

그 공지 이후 달린 토마님의 리플이 안타깝게도 삭제되었습니다. 일단 여기서 그 내용을 복원해본 후, '논점'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을 하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토마님의 양해를 다시 한 번 구합니다. 발표한 원칙은 지켜야 하는 거니까요.

토마 :

이제야 님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_-; 바이오매스가 온난화를 줄인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 단순히 이산화탄소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네요. 바이오매스로 온난화를 줄일 수 있다는 건, 석유대신 이왕 배출되는 메탄을 에너지로 사용해서 오히려 온실효과가 20배 더 강한 메탄 대신 이산화탄소를 늘려버리는 개념이군요. 어쨌거나 소를 지금처럼 키우는 한에서는 온난화의 진행을 바이오매스로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을 여전히 할 수 있지만, 노정태님의 그 부분의 설명은 정황상 잘못됐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다요. 노정태님이 확실히 말해주시겠죠.
2008년 11월 30일 (일) 오전 1:22


바이오매스를 통해 온난화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의 핵심은, 더 이상 지하에서 화석연료를 추출하지 않는다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대기권 내에 본디 존재하던 것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면, '탄소'의 총량은 변화하지 않으므로, 지금처럼 급격하게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논점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해보도록 하죠.


1. 메탄가스를 태워도 이산화탄소는 발생한다.

제가 '닫힌 계'라는 용어를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탄소가 발생하면 그것은 '닫힌 계'가 아니게 되긴 하겠지만, "이산화탄소의 총량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표현은 엄밀하다고 볼 수 없죠.

하지만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탄소의 양이 0이라면, 이산화탄소의 발생과 광합성을 통한 그것의 재분해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용이한 일이 되겠지요. 바이오매스의 활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그림판으로 그린 것도 바로 이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거고요.

그러므로 첫 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네, 가축으로부터 추출한 메탄을 연료로 사용해도 이산화탄소는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 제가 말하는 취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화석 연료를 대기 중에 존재하던 것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 인류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게 되는 모든 연소 과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를 비판하고자 할 때는, 제가 말한 내용을 통해 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2. 소가 배출하는 메탄 가스가 바로 온난화 물질이다.

"아파트, 젖소, 정치적 상상력"에 달린 리플에서 링크된 두 개의 기사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축의 분비물에서 발생하는 메탄 가스를 연료로 사용할 필요성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두번째익명'이라는 이름으로 리플을 달고 계신 방문자의 코멘트에서 일부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이오매스가 되었건 화석연료가 되었건, 연료를 태워서 에너지를 얻는 대부분의 활동은 필연적으로 CO2 방출을 야기합니다. (수소연료전지 같은 예외도 있지만 별론으로 합니다.) 메탄가스를 연소시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메탄가스의 화학식은 CH4입니다. 연소시키면 역시 그 부산물로 CO2가 나오게 됩니다. (게다가 CH4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CO2의 약 스무배에 달하는 온실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라? 만약 메탄 가스가 이산화탄소에 비해 약 스무배에 달하는 온실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그 메탄을 대기중에 그대로 내보내는 것보다 '연소'시켜서 이산화탄소로 바꿔서 내보내는 것이 온난화 방지에 더욱 효과적인 일 아닐까요?

'두번째익명'님, 제 논지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인데, 우리는 이로써 메탄가스를 더욱 적극적으로 채집하고 연소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메탄 분자 하나를 태우면, 스무 개의 이산화탄소를 분해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거군요. 이건 예상치 못한 희소식이네요.

아까 언급한 리플에 달린 한겨레 기사를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히는 20배가 아니라 23배군요.

축산은 세계 온실가스 방출량의 18%를 차지한다. 특히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23배 큰 메탄가스 발생량의 37%를 가축이 내보낸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산림을 없애고 목장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가축의 배설물과 소화과정에서 나오는 메탄이 주성분인 트림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1주에 하루 고기 뚝 하면 차 500만대 스톱 효과"(한겨레, 2008년 11월 4일)


자 그렇다면, 전후좌우가 뻥 뚫린 외양간에서 마구 방귀를 뀌고 트름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아파트'를 개조해서 만든 축사+열병합발전소에서 소를 키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공상'을 좀 더 해서, 젖소 아파트에서 키우는 소의 메탄을 전부 채집할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처럼 소에게 맞지 않는 사료를 먹여 트름을 유발시킨다고 전제하더라도, 모든 소가 배출하는 메탄가스를 채집하여 '발전'을 통해 이산화탄소로 바꾸면, 그 요소로 인한 온난화 효과는 23분의 1로 줄어들겠네요.

소가 메탄 가스를 배출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저는 소를 키우되, 소가 배출하는 메탄가스를 이용해 발전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용된 기사와 '두번째익명'님이 설명하신 내용을 통해 우리는 더더욱 바이오매스를 이용한 발전에 박차를 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3. 육식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

뭔가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익명'이라는 이름의 방문자께서 이런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제 주장이 '축산업을 육성하자'는 내용입니까? 저는 그 반대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축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소의 방귀는 유독 가스이면서, 메탄을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건강에도 해롭고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응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제거하거나, 폐기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거나. 즉, 소를 덜 키우거나, 키우더라도 현명하게 키우거나.

채식주의의 입장에 서서 제 주장을 반박한다는 것은 어이가 없는 논변입니다. 제가 언제 채식 하지 말자고 했습니까? 다른 방식의 목축과 에너지 산업을 구상하자는 말을 듣고, '채식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근본주의적인 발상이지요. 제 글에 리플을 달아주신 분께서 그런 레디컬한 환경주의자라면, 저는 그 입장을 존중하겠습니다. 하지만 단지 반론을 위한 반론을 펼쳤을 뿐이라면, 반성하세요.

두번째익명이라는 방문자께서는 '도시 내에서 목축을 하더라도, 그 사료를 운송해오는 과정에서 더 많은 화석 연료가 소비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마치 지금 목축업이, 모든 나라가 호주나 뉴질랜드처럼 '그 땅에서 나오는 풀'을 먹이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 같군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사료는 충분히 먼 거리를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기가 이동하는 거리만이라도 줄여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제 이 주장은, 지금처럼 '석유를 밭에 뿌려서' 옥수수를 키우고, 그 옥수수를 소에게 먹여서 고기를 얻어내는 현재의 축산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축산업을 바꾸자는 말을, '현재의 축산업'을 유지하자는 말과 같다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오독의 의지가 필요하겠지요.


4. 권위에의 호소가 아닌 상식에의 호소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대강 논점은 마무리지어진 것 같습니다. '화석 연료를 쓰지 않는다면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일치한다'는 제 주장은, 일부 디테일을 뭉뚱그린 측면이 있습니다. 화석 연료를 쓰지 않아도 이산화탄소의 양은 증가할 수 있죠. 하지만 '메탄가스'가 배출되는 것을 이산화탄소로 바꾸는 것은, 온난화의 방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더욱 바람직한 일입니다(물론 '이산화탄소'의 양은 '증가'하겠죠. 하지만 메탄가스가 그대로 방출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좋은 일이겠죠).

또한 우리는, 진정으로 온난화와 맞서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를 분해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해야 하고, 동시에 '옥수수를 먹여 키우는 소'로 대변되는 현재의 축산 구조와 육식에 대한 문제 의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언제 나무 심지 말자고 했나요?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아파트에서 젖소를' 키우자고 했나요? 둘 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있는 문제는 단 하나 뿐인 것 같군요. 폴 크루그먼의 칼럼을 인용해서 '온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라고 논하는 것은, 경제학자의 권위를 빌어 환경학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권위에의 호소가 아닌가 하는 것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저는 '학자'의 견해가 아니라 '칼럼니스트'로서의 입장 때문에 폴 크루그먼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운운은 다소 치사하다고 보실 수 있겠습니다. 그건 인정하도록 하죠. 하지만 저는 '경제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인 폴 크루그먼 또한 깊이 존경하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번에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폴 크루그먼은 환경 문제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시 정부의 경제에 대한 거짓말을 폭로해온 것이 바로 그것이죠. 부시 정부 또한 온갖 도표와 수식을 동원해 '세금을 낮추면 경제가 덩실덩실' 같은 거짓말을 해왔고, 폴 크루그먼은 오랜 세월을 '꿩 잡는 매'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크루그먼의 글을 지면에 실어주는 NYT의 에디터십을 신뢰합니다. 그들의 치열한 지적 노력이 결집되어 '상식'이라 부를만한 무언가가 태어나는 거겠지요. 제가 말하는 '상식'은 바로 그런 상식입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상식 말이죠.


5. 그리고 세 번째 리플

논의되는 맥락을 잘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본래 글의 취지와는 무관한 내용의 리플이 잔뜩 달리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은, 제 글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분들을 위해 귀한 지면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환경 문제에 대해 충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언어를 입 밖으로 꺼낼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지금 논의되는 정치적 구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밖의 무언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 가령 이런 독자 말이죠. 경향신문에 달린 세 번째 리플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노무현'과 관련된 사건도 아닌데, 혹은 촛불시위 현장중계도 아닌데 경향닷컴의 일개 오피니언 코너에서 리플이 세 개나 달렸다는 것은, 어쨌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prs1216님 의견
제목 :꿩팔고 알팔고 둥지뜯어 불 팔고

진짜로 유쾌하네요 그런데 한가지 빠트렸네요
돼지, 소, 닭, 축분을 바이오매스로 발전만하고 최종 부산물은
어떻게 하지요. 내가 해답을 제시 할까요?
축폐수와 슬러지는 유기농 비료로 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화학비료도 안쓰고 토지개량하고 완전히 친환경 유기농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아파트 단지가 집약농장이 되면 주차장도 여유공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공간에 채소도 가꾸면 더 환상적이겠죠.
따라서 꿩팔고 알팔고 둥지 뜯어 불팔고 속담이 바뀔 것 같네요.
인간의 비판과 상상력은 진화의 산물입니다.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댓글은 이명박 소망교회의 창조론의 어거지 입니다.
11월 대한민국 모든 언론의 칼럼 중 '미분양 아파트에 젖소를'은
우리가 봤을 때 최고의 유쾌한 칼럼입니다.
2008.11.27 23:05:30


자, 보세요. 이 독자는 자연스럽게 '유기농 비료'라는 개념까지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좀 더 많아진다면, 소똥이 화학처리를 요하는 폐기물이 되지 않도록, 소의 사료에 약품 처리를 줄이고 소에게도 투약량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훨씬 쉬워질 겁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렵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겁니다. 그 '현실적'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알기 위해서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지점으로부터 슬쩍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럼 영원히 대한민국의 소들은 화학 약품 범벅이 되어 있어야 하고, 아파트 주민들의 '집값 떨어져' 원성에 공공의 선과 이익이 언제나 양보해야 하며, 우리는 영원히 석유를 수입하고 LPG로 난방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겁니까?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왜 이리 고답적인지 정말 모르겠네요.

제 문제 제기를 통해, 나름의 환경적 대안을 꿈꾸시던 분들도 자신의 상상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루거니안님, justis님, 어덴덤님 등이 링크를 걸어주신 내용들은, 하나같이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뛰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혼자 보면서, 남들과 나누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바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저널리스트 조지 몬비오의 블로그의 머릿말로 사용되는 문구가 있지요. 저는 그것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걸 인용하면서 이 논의에 대한 제 입장 정리를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Tell people something they know already and they will thank you for it. / Tell them something new and they will hate you for it.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에게 감사하리라. /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를 미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