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7

독거청년을 위한 난방 가이드

혼자 사는 외로운 청년들은 추운 겨울이 오면 더 힘들다. 심리적인 이유도 있고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번듯한 신축 원룸 따위에 살지 않는 한, 집에 있을 때보다 정말 더 춥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자취방은 가정집보다 난방 효율이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불을 때도 때는 것 같지 않고, 방에 앉아있으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에 손가락이 얼기 시작한다.

적지 않은 수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내용의 하소연을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놀라운 현상이다. 집이라는 것이 본디 사람이 따뜻하게 살자고 짓는 거지, 그 반대는 아닌 까닭이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도 겨울에 가정 내 추위를 느끼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독거청년들이 유독 심하게 느끼는 '집 안에서의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팁을 제시하는 것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1. 문풍지를 바르자.

난방 효율성 재고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결국 '외풍 단속'이다. 지금 앉아있는 방이 너무 춥게 느껴진다면, 당장 라이터를 들고 창가로 가볼 것을 권한다. 창문 틈새에 대고 라이터를 켜라. 불꽃이 춤을 춘다면 바람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추워지고 있다. 가까운 철물점, 슈퍼, 잡화점 등으로 달려가 문풍지를 구입해 바르도록 하자.

외풍이 새느냐 안 새느냐의 차이는 실로 막대하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내 경험을 말해볼까 한다. 재작년 겨울 무렵 무척 추웠다. 나는 당시 드라마틱 객원 에디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 주된 업무는 드라마를 시청한 후 리뷰를 쓰는 것이었다. 어둠의 경로로 다운받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방송사 사이트에서 다시보기 결제를 했다. 그렇게 몰아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분명히 집인데,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로 추웠다. 당시 내 방의 데스크탑 컴퓨터는 창문과 바로 붙어 있었고, 그 창문에서 바람이 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문의 틈 사이를 전부 노란색 문풍지로 처바르고, 인터넷선을 연결하느라 드릴로 구멍을 뚫은 창틀에 고무찰흙을 이겨넣으니 한결 나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지독한 외풍이었다. 신형 샷시로 된 창문이었지만 애초에 건물 자체가 약간 삐뚤어져 있어서 창틀이 찌그러져 있었고 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문풍지를 이중 삼중으로 발라서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방이 남산 끄트머리에 있어서 바람이 세게 부는 것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좋았는데 겨울이 되자 단점으로 돌변했다. 고무찰흙으로 창틀의 구멍을 다 막아놨더니,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나갈 구멍도 없어졌고, 그 물이 고여서 얼어붙은 결과 아침에 창문이 안 열린 날도 적지 않았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와 얼음을 우선 조심스럽게 녹인 후, 고무찰흙을 제거하고 물을 빼서 해결했다.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사료되니 이쯤 하도록 하자.

아무튼 요점은, 방 안에서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말고, 일단 외풍이 드는 곳이 어디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터 등을 이용해 외풍을 확인하면, 악의 세력을 섬멸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틀어막아야 한다. 그 작업만 완료해도 한결 낫다.


2. 커튼을 쳐라.

문풍지를 다 발라도 창가에 가면 추울 수 있다. 그 이유는 딴게 아니라, 창가이기 때문이다. 특히 창틀이 플라스틱 샤시가 아니라 철제로 되어 있을 경우, 지금 내 방 창문이 그런데, 쉽사리 물방울이 맺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벽을 이루는 벽돌보다 창문을 이루는 유리와 철의 열 전도율이 높기 때문인데, 길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고 짧게 말하자면 '자연의 섭리'이므로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찬바람은 창가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감기를 유발할 수 있을 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다. 독거노인과 마찬가지로 독거청년 또한 질병에 취약한 존재들이다. 아프면 서럽고, 서러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풍지를 바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창가에는 커텐을 쳐야 한다.

알량한 한 장의 헝겊이 창문과 당신 사이에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불러온다. 미처 잡지 못한 외풍이 불어닥치는 속도를 낮춰줄 뿐만 아니라, 창문 자체의 서늘함도 어느 정도 감소시켜주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두꺼운 커튼은 햇빛을 전부 차단하는 부작용을 낳지만, 적어도 저녁에 집에 돌아온 다음에는 커튼을 쳐놓는 것이 여러 모로 이득이다.


3. 보일러를 확인하라.

이태원으로 이사오기 전 살던 약수동 방에 처음 들어갔던 날. 삭풍이 몰아치던 1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살기 괜찮을 거라는 아주머니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삿짐을 다 정리하지도 못한 방에서 박스들을 한 켠으로 밀어두고, 가을이와 함께 잠을 청했다. 가스비가 걱정되긴 했지만 보일러를 높게 틀어 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붙이고 있어도 방이 하나도 안 따뜻해지는 것 아닌가. 보일러는 폐병 걸린 미소년이 밭은기침을 하듯 쿨럭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몇십분이 지났는데도 방바닥에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희망온도'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20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춥나, 내가 뭘 잘못했길래,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덜덜 떨면서 억지로 눈을 붙였다.

자고 일어나서 보일러를 확인해보니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희망온도'와 '난방온수온도'가 별도로 조작 가능하게 되어 있었고, '난방온수온도'가 40도였나, 아무튼 가장 낮은 수치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날 밤 내 방의 바닥에는 내 체온보다 고작 3~4도 정도 높은 알량한 온수, 그 미적지근한 물이 왔다갔다하면서 난방을 하겠답시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내 기억에 그 보일러는 귀뚜라미 제품이었다. 난방온수온도의 비밀을 안 이후로는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잘 썼다는 점을 괜히 적어본다).

옛날에 했던 바보짓을 굳이 공개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보일러 조작 같은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우선 따져봐야지, '전기담요가 얼마쯤 할까' 같은 다음 단계의 고민을 먼저 하면서 괜히 세입자의 서러움 같은 것을 느끼거나 하면 곤란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특히 실내가 실외보다 춥다면, 집이 완전히 잘못 지어지지 않은 바에야, 보일러가 안 돌아가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보일러를 확인해야 한다. 계기판을 꼼꼼히 살펴보고, 본체에 써있는 주의사항도 읽어보도록 하자.


내가 방금 말한 세 가지 사항은, 사실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기본적이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것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를 경우 그로 인해 한없는 고통을 겪으며 괜한 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괜히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같은 시를 읊으며 타향살이의 설움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거나, 이성친구도 없으면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따위 싯귀를 웅얼거리거나, '청계천 8가' 같은 노래를 부르거나, 뭐 이런 짓을 하고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감상에 빠지기 전에 실질적인 요소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특히 요즘 독거청년들은 집에서 너무 곱게 자란 탓에, 가정 설비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채 험난한 겨울을 맞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어려서부터 이런 저런 가사노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 또한 막상 나와 살고 보니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겪으면서 겨우 배웠다.

혹시라도 이런 단편적인 지식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말 새벽에 일하다가 잠시 적어 보았다.

2008-12-06

말이 씨가 되고

말이 씨가 되고


말이 씨가 되고
씨가 싹이 되고
싹은 잎으로 자라
줄기가 뻗고 굵어지고
굵은 뿌리 옆으로
실뿌리가 뒤엉키겠지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이 되겠지.



(2008. 12. 06.)

2008-12-05

헌법재판소의 최근 두 판결

종합부동산세의 세대별 합산에 대해 부분위헌을 선언한 것 외에도, 헌법재판소는 최근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를 전담하도록 한 방송법 제73조 5항과 그 시행령 제59조 3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두 판결 모두, 해당 법률에 위헌 소지가 매우 다분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름의 공익적 차원에 기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사실 상식적으로 조세 부과의 단위가 개인이 아닌 '가구'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코바코나 코바코가 출자한 회사가 아니면 방송광고 판매업을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본주의적인 상식선을 이미 어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코바코는 출발 자체가 위헌적, 아니 차라리 초헌법적이었다. 1981년 전두환 시절에 만들어진, 신문과 방송을 옥죄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통폐합한 후, 한국방송광고공사를 통해 방송사의 돈줄을 정부가 움켜쥐어버렸다. 이게 코바코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작이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코바코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수많은 지역방송, 종교방송 등의 군소방송업체가 영세한 살림을 근근히 꾸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코바코는 태생적으로 헌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그것이 현재 '공공의 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미디어 시장 자체가 좁고, 미디어 수용자들의 쏠림 현상이 심한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언론의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시장 경쟁보다 높게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읽어보면, 그러한 정책적인 방향성은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지 않다. 종부세에 대한 판결문에서는 최소한 '비례의 원칙'에 대한 판단이 있었고, 세대별 합산이 왜 만들어진 규정인지는 알지만 그래도 헌법불합치이다, 이런 논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나는 헌법재판소가, 이 두 건의 판결에 있어서, 해당 법의 입법 취지와 정책적 지향성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가급적 존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사법소극주의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그 판결로 인해 모종의 지향성이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는 사법적극주의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것은 여담인데, 특히 대한민국처럼 정치적 균형이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요동치는 국가의 경우, 사법소극주의와 사법적극주의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 사법적극주의는 입법부 내지는 행정부와의 관계에서는 "헌법, 법률 자구의 문어적(文語的)인 의미에 얽매이지 않고 선거에 의해 뽑힌 공무원들의 정책 결정을 대체하는 정책 결정을 판결을 통해 감행하는 진보적인 사법부의 태도"로 이해되는 반면, 판결을 통한 적극적인 가치 실현에 방점을 두고 사법적극주의를 "판사들이 선판례에 엄격히 얽매이지 않고 상급 법원의 판사들이 싫어할지도 모르는 진보적이고 새로운 사회 정책을 선호하는 사법부의 철학"으로 이해하는 입장 또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21쪽. 임지봉, 《사법적극주의와 사법권 독립》, (철학과현실사, 2004)]

만약 헌법재판소가 종부세의 세대별 합산을 합헌으로 처리했다면, 그것은 입법부와의 관계에서는 사법소극주의가 되겠지만, 행정부와의 관계에서는 사법적극주의가 된다. 그러므로 가령,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경향신문, 2008년 11월 20일)를 놓고 '사법소극주의적 입장'이라 말하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최종적으로 남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헌법재판소가 우리의 정치 지형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역할에 걸맞는 책임을 어떻게 부과할 것인가? 원칙적으로는 헌법재판소가 그저 '재판소'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최종심까지 판결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법감정과, 정치적인 문제를 모두 헌재에 떠넘기는 정치권의 '관습'이 맞물려, 헌재는 현재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헌법 기관이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 헌법재판소 판사 개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평가가 높아질 필요가 있다. 사법부, 특히 헌재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그에 걸맞는 윤리적 평가가 판사에게 돌아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것이 'XXX판사, 지켜보겠어!'라는 수준에서 멈추어서는 곤란하다.

헌재가 'Watchmen'으로 더더욱 큰 활약을 보이고 있는 지금, 'Who watches the watchmen(누가 감시가를 감시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천진난만할 뿐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는 발상이다. 사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과 감시가 더욱 절실하다.

2008-12-02

장기하와 얼굴들, Blog Killed the Video Star?

장기하와 얼굴들, Blog Killed the Video Star?

. . . 하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이 '블로그 스타'를 넘어설 수 있을까? 여러 게시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노래 좋고 재미있는데 인터넷 안 하는 사람들은 모른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그렇다는 거다. 분명 그들의 노래는 심심찮게 라디오 전파를 탔고, TV에도 두 번이나 출연했고, 온갖 신문 잡지 등에서 인터뷰가 쇄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영상'을 본 사람이 아니면 장기하와 얼굴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이 아니면 안 된다.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사람을 인터넷 안 하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두 문화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


내 마이스페이스 블로그에 올라온 글입니다. 격주로 쓰는 고정 칼럼이에요. 음악이나 그 외 영상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덧붙이는 형식이 될 예정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길.

(마이스페이스 로그인이 필요한 것 같군요. 하지만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이니 전문을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월요일자 경향신문 사설, 만평

월요일자 경향신문 사설

[사설]한국 온난화 문제 근본 발상 바꿀 때다
입력: 2008년 12월 01일 00:51:34

한국의 기온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늘어나면서 기후변화가 매우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왔다.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와 고려대 생명과학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조용성 교수팀이 개발한 ‘기후위기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100점 만점에 70점을 기록해 ‘매우 위험’한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기후위기지표는 자연·사회·경제적 요인과 기후 관련 재해, 온실가스 배출 등을 종합해 위기 정도를 측정한 것으로 한국에서 이런 계량화된 수치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한국 외에 일본(64점), 중국(61점), 독일(56점), 영국(55점) 등 4개국이 분석 대상이었다.

이것 말고도 한국 온난화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다.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10위권이다. 게다가 1990년 이후 연평균 4.7% 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증가율 1위다. 지난 100년간 세계 평균기온은 0.74도 올랐으나 한국은 1.5도 상승해 온난화가 훨씬 빨리 진행되고 있다.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정부가 저탄소 녹색성장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지난달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의 ‘녹색경쟁력 지수’를 산출한 결과 15개국 가운데 11위에 그쳤다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얼마 전 영국의 온난화 대책에 관한 기사에 “내게 순결과 금욕을 주십시오, 하지만 나중에…”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소개했다.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면서도 화석연료 사용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행동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의 심리를 빗댄 것이다. 작금의 경제 위기는 이런 심리를 더욱 부추긴다. 그럼에도 영국 의회는 지난달 하순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80% 감축하도록 의무화하는, 구속력 있는 법안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 그것도 당초 60% 감축을 80%로 강화한 내용이다.

한국은 아직도 온실가스 문제를 경제성장 측면에서만 바라보며 감축의무 면제에 신경을 쏟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 교토협약 체제가 시작되는 2013년 이후는 감축의무가 가시화할 것이다. 온난화 문제에 대한 근본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링크는 인용자).

그렇다. 정말 필요하다.


그리고 만평



지하철에서 보고 미친듯이 웃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