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2

약자에게 솔직하고 강자에게 비굴하기

그놈의 '소녀시대 만화'가 도화선이 되었지만, 웹툰 작가 윤서인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비단 그 지점에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워낙 다방면으로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고 그 각각에서 용납되기 힘든 어떤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나는 그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를 말해보고자 한다.

디씨뉴스의 기사로 뜬 "소녀시대 성희롱 논란 작가, 과거 만화까지 논란"을 보자. 이 만화에서 윤서인은 '다니엘'이라는 단어가 과거에는 '다니엘의 집' 등에 모여 있는 장애인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많이 쓰였는데, 지금은 다니엘 헤니의 등장으로 인해 미남을 더 빨리 연상시킨다는 내용을 뻔뻔스럽게 그려놓고 있다. 캡처된 리플을 보면 그는 항의하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다니엘 학교는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이었지요.
당연히 정신지체아 이미지를 그려놓은거구요.
정신지체아는 입가에 침흘리게 그려야지 눈부라리고 똑똑하게 그릴순 없죠.

장애는 장애일뿐 그게 비웃을일이라고도 나쁜거라고도 한적없습니다.
스스로 편견에 가두지 마세요. 누구나 오늘부터라도 장애인이 될수있습니다.
장애인은 어디서 장애라는 단어만 보여도 발끈발끈해야하나요?

왜 입가에 침흘리는 다니엘 이미지를 보면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지???


윤서인의 다른 불쾌한 만화들이 가지는 사고 방식이 다 이런 식이다. '그거 사실이잖아, 나는 그냥 만화로 그렸을 뿐이야'라는 편리한 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다해가 성형 많이 했으니까 "여러분 이거 다 성형인 거 아시죠?"라고 썼을 뿐인데 리플에서 남들이 난리를 치니까 대사를 바꾸는 거고, 한국 제품들이 일본거 베낀 거 많으니까 그렇다고 말했을 뿐인데 괜히 열등감에 쩔어있는 한국인들이 지들도 어차피 일본거 좋아하는 주제에 지랄을 하는 거다. 윤서인의 세계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며 불쾌감을 느낄까? 윤서인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어떤 가치에 기반한 행동 체계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서인은 약자들에게 언제나 '솔직'하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침흘리니까 침흘리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다. 와, 솔직하다. 하지만 이런 솔직함이 과연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윤서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디씨뉴스의 아래 달린 리플들 중에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도덕 체계는 우리에게 사회적, 육체적, 정신적 약자들을 향해 '솔직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하며 부족한 지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불운한 요소로 인해, 혹은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강자들이 지니고 있는 편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탄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점이 오면 약자, 혹은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시선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 문제시될 수 있고, 그래서 그냥 완전히 평등하게 대우해달라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기도 한다. 동성애자나 성적 소수자들이 사회적 입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 특수한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적극적이고 치열한 '보호'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도 그렇다. '장애우'라는 단어가 오버스럽다고, 남사스럽다고 불평들이 많지만 그런 억지스러운 노력이 있기 전에는 장애인들이 장애인이라고 불리지도 못했다. 그냥 '병신들'이었을 뿐이다.

윤서인과 같은 저런 식의 '솔직함'은, 세상이 반 발자국 나아졌다는 것을 빌미삼아 자신들의 원초적인 폭력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버린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반동적이고 부도덕하다. 소녀시대에 대한 만화의 내용도 결국 그것 아닌가. 솔직하게 드러나버린 아저씨의 성욕. 아, 나도 소녀시대와 떡치고 싶구나. 그는 왜 자신의 솔직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를 까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자신들이 왜 화를 내고 왜 까는지 모르는 것 같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약자에 대한 솔직함은 강자에 대한 비굴함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윤서인의 경우에는 본인이 강자에게 비굴하다 못해 강자에게 비굴하게 굴었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치닫고("내가 일제시대에 살았더라면 친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본인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강자들의 무리에 끼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으며("일본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짱'에게 노골적인 찬사를 바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삼성 최고에요"). 인간의 본래적인 도덕심은 이런 식의 비굴함을 보며 분노하고 짜증을 내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행태, 약자에게 솔직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이런 모습이 과연 윤서인만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굳이 이 떡밥을 물어버린 이유는 디씨뉴스에 달려있는 리플들을 보고 우려의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이라고 하는게 왜 안 되냐고? 그런 식의 솔직함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그런 식이라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지칭해서, '검다'의 어근인 '검-'과 귀엽고 작은 누군가를 뜻할때 쓰는 어미인 '-둥이'를 합쳐서 '검둥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로니 콜먼에게 가서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툭 터놓고 전달할 용의가 있는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자.

도덕은 위선이 아니다. 하지만 일체의 위선을 파괴하고 나면 도덕이 갈 곳이 없다. 우리는 약자에게 겸허하고 강자에게 솔직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함'이라는 칼날이 오직 만만한 자들만을 향하고, '겸허함'이라는 미덕이 오직 자기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만을 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시대인 것 같다. 윤서인을 비판할 때 스스로의 모습도 좀 돌아보자는 말이다. 나의 솔직함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덧) 갑자기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The Importance of Being HonestEarnest가 생각나지만, 억지로 본문에 끼워넣자니 내용이 망가질 것 같고, 떠오른 것을 안 적자니 뭔가 서운한 듯하여 괜히 덧붙여 놓는다.

2010-01-17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헤겔은 인간의 본질을 얼굴의 생김새나 두개골의 모양에서 찾는 일체의 행동을 배격한다. 길고 난삽한 문장으로 유명하지만 이 대목들만큼은 한달음에 써내려갔으리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관상술에 대하여.

관상술이 행위라는 현실적 존재를 갖가지 의도나 그밖에 자질구레한 면으로까지 분해하고는 인간의 현실을 나타내는 그의 행위의 결과를 다시금 상정된 존재로 환원하여 당사자로 하여금 현실의 행위를 둘러싼 특별한 의도 따위를 꾸며내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사념을 일삼는 부질없는 노릇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좋겠다. 행위는 저버린 채 머리로 짜낸 지혜에만 의지하여 행동에 수반되는 이성적인 성격을 거부하며 행위보다도 오히려 용모나 표정이 행위자의 실상을 표현한다는 투의 억지 주장을 되풀이한다면 응당 그런 부질없는 인간에게도 앞에서와 같이 뺨을 후려치는 편이 나을 듯싶다. 봉변을 당하고 나면 그 부질없는 인간은 얼굴이라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런 매서운 맛을 봐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될 테니까 말이다. (346쪽, 강조는 인용자)


허영만 화백의 뺨을 후려친 헤겔은 골상학자들을 향해 달려간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에게 "너의 두개골은 이렇게 생겼으므로 너라는 인간(너의 내면)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곧 두개골이 너라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관상학에서 그런 판단을 하게 되면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관상학이 떨치는 위세나 지위를 허물기 위하여 단지 부드러운 안면에 가격을 했을 뿐이고, 그렇게 내려친 안면이 정신의 본체도 그리고 정신의 실상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방식으로 응수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뇌를 박살낼 정도의 타격을 가함으로써 뼈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하물며 그것이 인간의 실상을 진실로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그 당사자의 지능에 어울릴 정도로나마 받아들이게 하는 길밖에 없다. (360쪽, 강조는 인용자)


내가 굳이 이 부분을 따로 정리해둔 이유는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 안심하세요. 저는 칸트를 전공할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두개골은 안전합니다. 저는 님들을 해치지 않아요.


참고문헌

정신현상학 1 - 8점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한길사

2010-01-15

나머지 2000쪽

"특공대 공명심 때문에 이런 문제 생겼다"(프레시안, 2010년 1월 15일)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경찰 수뇌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경찰 특공대에게 떠넘기는 진술 내용이 담겨 있을 뿐이다.

김형태 변호사의 말대로, 순수하게 법리대로만 따졌더라면 이미 1심에서 무죄가 나왔어야 한다. 검찰은 공소사실을 입증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은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화염병 투척으로 인해 망루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재판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화재 원인이 화염병이라고 단정지었지만, 그것을 법적 판단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공대에게 모든 책임을 몰아가는 이 기록의 내용은 명백한 꼬리 자르기에 불과하다. 대체 이따위 뻔한 소리를 왜 공개하지 않고 버틴 것일까? 어차피 1심 재판부는 법리를 무시하고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 기록이 공개되었다 한들 결과는 유죄로 나왔을 것이다. 현재 검찰은 재판기피를 신청하며 시간 끌기에 나섰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둑맞은 편지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취향을 위한 투쟁 - 단상들

* 자유라는 것이 결국은 아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부권으로 응축될 수 있다면, 취향은 전적으로 자유의 문제이며 그것은 투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그 무언가가 된다. 왜냐하면 취향은 수묵화의 달처럼,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내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대중적인 취향'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취향은 그러므로 투쟁을 통해 지켜져야 할 그 무언가가 된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입고 먹을 수 있는지를 강제함으로써 자신이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몰취향한 자들로부터, 그들이 '당신과 나는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있군요'라고 선뜻 내미는 미소에 대하여.

* 아퀴나스의 체계 속에서 진리는 곧 선한 것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진리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집착을 보인 자들은 당대에 의해 선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으며, 아름다움을 위해 벌여지는 온갖 시도들은 오늘날까지도 마녀사냥을 당한다.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을 취향으로 유지해야 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나는 동성애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는 자들을 혐오한다. 이것도 취향이라면, 내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가장 저질스러운 교만에 속할 것이다. 당연한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당연한 것을 취향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어깨 위에 여우목도리처럼 걸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인터넷의 군중들이 느끼는 생래적인 반감은, 옳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어떤 심리 테스트가 있다고 해보자. 일본풍의 일러스트를 클릭하고, 심리학적으로 볼 때 다수의 여성에게 포위되는 공포에서 쾌락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를 선택하며, 정서적으로 고등학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남성인 피시험자에게 '당신이 좋아할만한 게임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결과가 나왔다. 두근두근 메모리얼, 동급생, 투하트.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외치는 것이 습관화된 자들이 과연 이 조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을 다 해봤고 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취향을 추출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 취향은 대체 무슨 취향인가? 대체 어떻게 존중해줘야 하는가?

* '나 취향 좀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요'라는 뉘앙스로 말하는 사람들의 뻔한 취향. 미국 대중문화의 몇몇 코드, 심슨, 스타워즈, 뱀파이어(드라큘라가 아니다), etc. 특히 영국식 블랙 유모어가 좋아요. 미쉘 공드리는 좀 아닌 것 같지만, 영상은 훌륭하죠.

*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그래픽 노블이 훌륭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출판도 비즈니스고, 팔릴만 한 것을 떼와서 파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작품들이 만들어낸 풍성한 대중문화적 결실을 바라보면서 원작을 음미한다. 그런 것들을 보는 스스로의 취향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7년근 인삼은 몸에 좋다는 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 알랭 드 보통과 보르헤스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딱 하나다. 읽으면서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기 좋다는 것. 지금 내가 지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고 남들이 생각할 것이라는 가상의 서사 속에 스스로를 배치할 수 있게 해주는 작가라는 것. 움베르토 에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수자 취향이라고 생각하건 말건, 한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심지어 이탈리아보다 먼저, 에코 전집이 출간되었다. 전집을 사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출판계의 소수자들. 그들의 지름에 영광 있을지어다.

* 나는 내게 어떤 취향다운 취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을만큼 나는 충분히 무언가를 음미하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와 서로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취향을 가진 우리'에 속하는 일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당신은 나의 취향을 위해 투쟁할 수 없고, 나도 당신의 취향을 위해 대신 싸워줄 수 없다. 취향을 갖는다는 것은 취향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취향은 자유의 문제다.

2010-01-07

인터넷과 짤방

인터넷 공간에서 논의와 논증이 사라지고, 대신 '짤방'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짤방이 들어선 자리에는 진지한 사고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생적인 유머와 농담이 설 자리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그를 어떻게 조롱할지 생각하는 대신, '내 그림' 폴더를 뒤져 앵그리 비디오 게임 너드가 욕하는 사진 따위를 찾아내어 블로그에 붙여놓고는 자신이 그 상대를 조롱하는데 성공하였노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상대를 풍자하고 조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상대방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짤방은 그렇지 않다.

그 짤방들 중 상당수는 TV에서 나온다. 인터넷은 결코 TV로부터 자유로운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영상 중 일부만을 캡쳐하여 공허한 분노를 뿜어내는, 철저히 종속적인 공간이다. 짤방 문화와 함께 만화 또한 같은 운명에 처했다. 맥락으로부터 납치당한 캐릭터들은 '절망이다'라고 외치고 '죽어버려'라고 눈을 부라리지만, 정말 절망스러운 것은 언어의 자리를 짤방이 대체하고 있는 바로 이 현상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