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10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죽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많았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담론들의 구체적 형태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문학은 늘 위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의 경우로 한정짓고 이야기해본다면, 플라톤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것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왔다. 그리고 그들은 늘 실패해왔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지금도 위기에 빠져 있다. 전통적인 철학의 연구 주제였던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은, '인간 무리'의 행동에 대한 경제학적 관측, 혹은 '뇌-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관측에 밀려난지 오래다. 훗설의 책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핵심 내용은 결국 심리학에 대항하여 어떻게 인식론적 지평을 확보할 수 있을까인데, 나는 내가 그 책을 올바로 이해했거나, 그 책이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제시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 이유가 전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철학의 위기는 외부적으로도 진행중이다. 전후 자본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급증했던 대학들, 그 대학에서의 인력 수요에 맞춰 생산된 고학력자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철학과 자체가 줄어들고 있고, 그 경향은 세계적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철학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과로, 기존의 철학이 다루던 진지한 주제들은 온갖 학제간 연구 혹은 심리학과로 이양해가고 있다. '철학과'는 사라지고 있다. 다른 인문학 분야들의 경우도, 학과 자체가 소멸하거나 대폭 예산이 줄어드는 경향이 관찰된다.

인문학은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 인류가 원시적인 형태로 세계를 관찰하고 기술하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입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다. 특히 '인문학은 이제 대중들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거나, '여태까지는 상아탑 안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었지만 이제 인문학도 무한경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본디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제 새벽 뒤늦게 접한 부고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7월 4일, 대표적인 하이데거 연구자인 신상희 건국대 연구교수가 만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사인은 심장마비였고,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오랜 세월동안 안정된 자리를 얻지 못하는 과정에서 쌓인 심적 고통이 발병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는 외대 이기상 교수와 더불어 하이데거의 주저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지금 내 책꽂이에도 그가 옮긴 책이 두 권 있다.

신상희 교수는 '교수'라고 불리웠지만 교수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강사 생활은 그를 소진시켰고, 그나마도 2007년 느닷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이후 그는 건국대에서 명저번역 사업의 학술연구교수로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후기 하이데거의 핵심 저서를 번역한 사람에게, 대학들은 정교수 자리를 끝내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인문학, 철학은 그 출발부터 위기였고 늘 위기 상황 속에서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이 '인문학자의 죽음'은 구체적이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처한 객관적인 삶의 현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헌신하면, 당신은 대학의 문턱의 바깥에서 떠돌다가 지쳐 쓰러져버릴 것이다. 이 죽음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대중들과 함께하는 인문학'을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대체 그 '대중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속에서, 신상희 교수와 같은 연구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철학을 소비하는 한국의 대중들 중 스스로를 좌파라고 여기는 이들은 New Left Review 같은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핫'한 이론가들을 따라가는데 바쁘다. 별 생각 없이 철학 오오 철학자 오오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철학자가 하버드 명강의를 하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나치에 부역한 하이데거, 혁명과도 아무 상관 없는 포스트모던의 '기원'일 분인 하이데거를 묵묵히 연구하고 번역하는 사람은, 대체 이 '새로운 인문학'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연암 박지원은 노마드였지, 킬킬! 니체는 너무도 불온해! 이렇게 철학자들의 이름을 '쿨'하고 '핫'한 것으로 포장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인문학의 소임인가? 대중들의 그러한 욕망, 즉 뭔가 으리으리하고 굉장한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반성적 고찰도 요구하지 않는 책을 읽음으로써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것은, 굳이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고야 말겠다는 이건희의 허영심에 부응한 고려대학교의 행태와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돈 안 되는 연구, 그 책이나 논문을 읽을 연구자가 열 명도 안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연구는, 대체 이 '새로운 인문학' 속에서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자야 한단 말인가?

인문학의 위기 그 자체는 인문학적으로 돌파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그러하였듯이, 철학의 위기는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과 결과물의 제시로 해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헌대 그 하이데거 역시 대학교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였고, 안정된 신분을 얻는 순간 크게 안도하여 스승인 훗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그보다 더 가혹하다. 자신들이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이제는 철학자들이 아카데미 속에서 연구하는 것을 고깝게 여긴다. 더 쉽게, 더 쉽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진정한 인문학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는 내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은 다르다. 인문학을 연구한다는 명찰을 달고 살아남고 싶다면, 바로 그 인문학을 얄팍하게 만드는 일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협박이 들려오는 것 같다. '빙고, 당신은 지금 헤겔의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물론 그 헤겔도, 또 칸트도 사강사 생활을 하며 삶을 부지해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학생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은? 대중들은 '칸트'라는 이름의 고색창연한 무게감만을 쏙 빼간 채, 그의 문제의식과 이론에 대한 진지한 접근 따위 앞에서는 귀를 닫아버린다. 귀를 막고 소리지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첨언: 나는 바로 이와 같은 시각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2010-08-19

통일세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이명박의 대통령으로서의 단점 중 하나는 본인이 대단한 아이디어 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생각나는대로 저지르고, 아랫사람들 혹은 국민들에게 그 뒷수습을 떠맡긴다. 그런데 이명박이 가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장점 중 하나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는 뭐가 됐건 본인이 스스로 의제를 생산한다. 좋게 말하면 의제 선점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실수인데, 어쨌건 그 결과 국정의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통일세’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개념이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의 여론을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 4천만 국민의 소원이 통일이던 시절은 지나간지 오래다. 지금 대부분의 국민들은 통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그 통일 대비를 위해 세금을 내라고?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기존 정부에서 쌓아왔던 대북관계를 모두 망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이명박이, 그게 할 소리인가? 이른바 ‘진보 개혁 진영’의 반응을 요약하면 대략 이와 같은 형태가 될 듯하다.

그런데 어딘가 맥이 빠져 있다. 미디어오늘의 이정환 기자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재의 부가가치세 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낮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은 역시 OECD 평균과 비교했을 때 전체 세수 중 직접세 비율이 밑에서부터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멕시코와 터키, 한국인들이 평소에는 결코 자존심 때문에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그 나라들 말이다. 그 외의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소득세나 법인세 등을 더 내면 더 냈지 덜 내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보면 대응법은 간단하다. 어차피 통일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 정권의 붕괴, 혹은 그에 준하는 대격변은 대한민국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 준비라는 것은 결국 재원을 확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최소한의 현실주의만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결국 통일세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북한의 격변에 대비한 재원 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현실을 어설프게 부인하는 순간 발화자는 책임 있는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요점은 그 재원을 간접세로 충당하느냐 직접세로 충당하느냐에 달려 있다. 직접세 비율을 더 끌어올려서 통일에 대비하는 것은 결국 부자들의 돈으로 통일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고, 어차피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경제적 강자들에게 부담시키는 것이므로, 큰 틀에서 볼 때 부의 재분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간접세로 통일 비용을 댄다면 그것은 밑돌 빼어 윗돌 괴는 형국밖에 되지 않는다. 책임 있는 진보 정치세력을 자청하는 집단이라면 ‘이명박이 하니까 헛소리다, 표리부동하다’는 식의 단편적 비판을 넘어, ‘부자들이 통일 비용을 내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이런 ‘적극적 반MB’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경제 정책의 큰 틀에서는 전반적으로 합의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합의의 내용 중 하나가 법인세 인하, 소득세 인하이며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종합부동산세법 개정안을 내고 통과시키는 일을 사실상 수수방관했다. 민주당이 직접세 비율을 높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김정일이 핵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비단 이번 통일세 논란 뿐 아니라 적잖은 사회·경제적 사안에서 민주당의 ‘반MB’가 공허한 수사에 머무는 이유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북한 정권은 언젠가 변할 것이고, 그 변화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에 다가올 것이다. 정부 뿐 아니라 시민사회와 야당 역시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반MB’에 묶여서 적극적인 통일 담론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쓰라린 정치적 손실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틀 안에서는 안 된다. 일각에서 종북주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민주노동당과, 그 민주노동당을 의식하는 가운데 북한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할 뿐인 진보신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민들은 바로 이런 사안에서 책임감 있게,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을 공정하게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정치 세력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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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http://hook.hani.co.kr)에 올린 글입니다. 8월 17일에 게재되었으며,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글루스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가 등장하였기에 전문을 게재합니다.

2010-08-17

2010년 8월 17일

대학원 졸업과 함께, 공식적으로 철학 석사 학위 소지자가 되었다.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출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위해 학교에 가야만 했다. 지난주 만나뵌 자리에서 지도교수님이 읽어보라고 권해주신 책은 1970년대에 나온 것으로 아마존에서 구할 수 없었다. 텅 빈 가방에 제본된 책 한 권을 넣고 걸어 내려오면서 인문관 고양이를 만나 쓰다듬어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2010-08-11

진보와 콧대

개인적 편견일 수 있겠지만, 품성 좋은 놈 치고 알맹이가 꽉 찬 놈을 본 적이 없다. 여기서 품성 좋다 함은 오옹 님이 "친서민정당 진보신당이라..." 에서 말한 것과 같은 바로 그런 덕목이다. 괜히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인사 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말 절대 하지 않고, 친목질에 능하고,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뚜렷한 자기 주관이 없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세를 잘 따른다.

알맹이가 꽉 찬 놈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방금 다 말했다. 자기 주관과 신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재오도 김문수도 민중당 할 때에는 콧대 높았다. 그들의 콧대가 낮아진 것은 그들이 한나라당에 투신한 다음부터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접어둔 채, 그저 권력을 얻겠다는 목적 의식이 그들의 삶을 지배할 때, 비로소 그들의 콧대는 낮아졌다.

즉 콧대와 권력 의지는 반비례하는 것이다. 정치집단이 권력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권력욕만 남은 정치집단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진보신당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전자가 문제겠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 전체를 놓고 본다면 후자가 더 문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과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대부분의 보수정당들은, 오옹 님 같은 영세상인들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뒷구멍으로는 그들의 생존권을 말려죽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일종의 '소비자'라는 의식 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한 소비자로서의 요구가 과연 바람직한 결과를 낳고 있느냐이다. 가령 한국 소비자들은 '손님은 왕'이기 때문에 왕처럼 대접받고 싶어한다. 대형 마트에 가보면 그렇다. 1+1 행사가 난무하고, 마트 입구부터 출구까지 굽신거리는 점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저렴하고 안전한, 믿을 수 있는 쇼핑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들을 왕처럼 대접하는 그 비용은 결국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게 앞에서 데모 같은 것은 안 하고, 대신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부주 팍팍 꽂아넣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오겠는가? 당신이 낸 세금, 당신이 누려야 할 복지가 정치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대접' 받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하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따위 대접 받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한 사람들이 '유권자=소비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소비자를 우롱하듯 한국의 정치판은 유권자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 자체만 놓고 본다면 좀 더 정치적으로 변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판이 더 '정치적'으로 닳고 닳아야 할 필요는 없다. 즉, 진보신당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방식 역시, 오옹 님이 갈구하는 그런 방향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국민과 정치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정직하게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방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서로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욕하는, 그런 '친서민'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010-08-02

2010 지산 락 페스티벌 회고(1)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서는 '나는 내가 루저라고 생각해'이다. 일종의 '루저-되기'인데,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음악의 생산자 및 수요자가 사전적 의미에서의 루저, 즉 사회적 낙오자는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장기하의 중얼거림과 칭얼거림의 경계는 한없이 좁아진다. 중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락 페스티벌에서 꼭 빠른 템포로만 노래 부르라는 법 있나요 어쩌구 저쩌구 칭얼거리는 멘트를 날리고, 숨이 턱까지 받쳐 헉헉거리며 돌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의 대변인. 하지만 정작 관객들은 '미미 안 나왔어? 미미 안 나와? 그 춤 안 춰?'라고 투덜거리고 있었으며, 그걸 짐작한 장기하도 '스페셜 게스트는 없습니다'라고 못을 박았지. 장기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모니터로 본 동영상 속의 그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은 밥 딜런이 일렉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이런 음악'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 '저런 음악'을 들려주는 것과 '이런 동영상'을 '직관'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그냥 내 음악입니다'를 들려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일 수밖에 없다. 해상도도 다르고 화질도 다르고 음색도 다른 각자의 스크린을 머리 속에 넣고, 그 원본과 비교하여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관람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워 죽을 것 같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