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28

개인글: 인터넷 시대에 ‘내면’은 가능한가

무언가를 읽을 때 소리내어 읽지 않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다. 고대 중세까지는 책을 소리내어 읽고, 입으로 떠들면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명한 이야기이니 특별히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금 사람들은 시끌벅쩍하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나만 해도 그렇다. 혼자 생각하고 몰래 적어놓으면 될 이야기들을 왜 굳이 블로그에 적어놓을까? 혹자는 쉽사리 노출증 따위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태는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에서 읽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공유하거나 코멘트를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얻을 수 없는 곳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흔적을 남기지조차 않는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논란이 불거지면 바로 그 글에 리플이 달렸다. 지금은 그 글을 단축 URL로 뭉쳐놓은 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근대적 자아, 묵독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근대적 자아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별반 새로울 게 없는 뻔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떠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스스로가 그러한 경향성 하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써도 충분하다. 지금 나는 사회를 향해 그리 많은 의견을 던질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였고 결국 덜컥 블로그를 열었다.

2011-02-11

여성 문학은 남성 문학의 여집합인가 -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불러온 논란에 대하여

어떤 발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되는 맥락과 설명들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때가 있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트위터에서 내놓은 한 발언을 둘러싼 소동이 바로 그 예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영일에 따르면 이 발언에 대해 불과 수십분 사이 4-50개의 멘션이 달렸고, 그 중 상당수는 노골적인 비아냥 혹은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그 시점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영일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하여 내놓는 트윗들, 그리고 그가 '맥락'으로 제시하는 별도의 비평문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대단히 전형적인,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굳이 지적될 필요가 있는 여성혐오의 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트위터에 올린 위 발언이 크게 세 가지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첫째, 소설가 김영하와의 논쟁. 둘째, 시나리오 작가 故 최고은 씨의 죽음. 셋째, 자신이 2010년 10월 12일에 쓴 "요즘 비평에 대한 오해 하나"라는 비평문에서 논하는 바.

논쟁을 통해 첫째 맥락에서는 '소설가는 낭만주의적 감수성에 의해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글을 써서 돈을 버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하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평적 관점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테제가 도출되었다. 한편 두번째 맥락에서는, 그와 같은 당위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의 작가들(여기서 '작가'라는 단어는 대단히 넓은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이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벅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의 세 번째 글로 들어가봐야 한다.

"요즘 비평에 대한 오해 하나"는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한 칼럼에 대한 비판의 형식을 띄고 있다. 두 사람은 공통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두 사람 모두 현재 문학의 생산이 문예창작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인식한다. 하지만 남진우는 그것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벌어지고 있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반면, 조영일은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더 큰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현대문학은 80년대 '민중문학' → 90년대 '여성문학' → 2000년대 '문창과문학'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조영일이 보기에 "문창과문학이 완성된 것은 2000년대지만, 그것이 시작된 것은 90년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문창과문학이 여성문학의 완성된, 혹은 발전된 형태인지에 대한 설명을 그 글에서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단지 "오늘날은 90년대보다 더 많은 여성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90년대에 나타난 특징들은 오로지 자신의 시대만 규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반발을 할 것이다. 바로 밑에서 조영일이 충분히 설명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즉, "우리는 그 이유를 이론적 관점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한국문학의 위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으로 인해 문학은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총체성을 담지하는 텍스트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전까지 소설과 비평과 시를 읽으며 세상을 알아가고자 했던 영특한 10대들과 30대 중반 이후 엘리트 독자층이 와해되고, 그리하여 한국문학이 위축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축소된 시장 규모로 인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남성 작가들은 더 이상 소설 쓰기 따위에 매진할 수 없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은 여성작가들이 문창과에서 수업 듣고 소설 쓰면서 일군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통찰' 내지는 모두가 알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실에 대한 용감한 폭로처럼 보인다. 하나의 중대한 논리적 비약을 눈감아줄 수 있다면 그렇다. 이 설명은 아무리 에누리해준다 하더라도 왜 남성 작가들이 줄어들었는가에 대한 설명일 뿐, 왜 여성 작가들이 늘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남성 작가들이 줄어든다는 것과 여성 작가들이 늘어난다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상관 관계가 성립하고 있지 않다. 일본의 GDP가 줄어든다고 해서 한국의 GDP가 늘어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가 있다. 조영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문학계에 여성작가들이 갑자기 힘을 발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거꾸로 질문을 던져보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왜 한국문학계에서 남성들의 영향력이 점점 사라져간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이른바 '여성문학'을 '남성문학'의 여집합으로 보는 시각을 전제한다. 여성 작가들이 늘어난 것은 남성 작가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문학계라는 것을 하나의 제로섬 게임으로 파악한다면 이와 같은 접근법이 타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문학의 독자층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따라서 글쓰기를 통해 돈 버는 일이 이전 시대에 비해 더욱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부류"[sic]들은 전망 없는 문창과에 입학하고 글을 쓰는가?

이게 바로 나와 같은 문학의 문외한이 '문학평론가'로부터 해답을 듣고 싶어하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다. 요즘 여성 작가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도 궁금하다. 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읽고 쓰는지, 무엇을 욕망하고 표현하고자 하는지, 물론 직접 작품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좋겠다.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에 여성 작가가 많다는 조영일 식의 설명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섬세함과 반대라는 의미에서 폭력적이다.

조영일이 세 번째 맥락으로 제시한 글이 '한국출판시장현황 - 남성 작가의 감소를 중심으로'라면 이와 같은 시각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즉 그는 단지 사실적이고 경제적인 상황의 기술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비평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 작가의 감소를 통해 여성 작가의 증가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 작가들을 타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비판 역시 가능할 것이다.

조영일의 글은 여성 작가들의 양적 증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닌 어떤 현상의 '결과물'로서 취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도 과히 긍정적인 뉘앙스로 다루어지지는 않는 그런 결과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맥락, 혹은 2012년 10월 12일에 쓴 글에서는 조영일이 여성 작가들, 혹은 여성문학을 진지하게 대상화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 작가들의 증가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남성 작가의 감소에 수반된 일종의 부수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 글의 논조가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배제한 체 그들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맥락이 추가되었다. '작가는 글을 써서 돈을 버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한다'는 당위와 '남는 밥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젊은 여성 작가에 대한 애도'가 뒤섞인 가운데, 故 최고은 씨는 소설가가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이므로 '근대문학의 종언' 같은 논의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적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깨끗이 잊혀지고, 대신 너무도 익숙하고 상투적인 하나의 개념적 대립쌍이 출현하는 것이다. 성녀 대 창녀, 여성 노동자 동지 대 노는 년, 남편이나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예술한다는 년' 대 남는 밥을 얻어먹지 못해 굶어죽는 "생계형 여성작가".



나는 이 지점에서 어떤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 사건을 말이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가 아닌 진정한 여성해방운동가는 존경한다'고 말하던 김규항의 목소리와 조영일의 시각은 이 지점에서 근본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본인들이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근본적인 지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형 작가'나 '생계형 여성작가', 혹은 두 가지 모두, 담론적 분할통치를 위해 동원되는 가상의 범주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략은 끝없이 시도되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특히, 스스로가 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 당혹스러움과 분노 앞에서 정련되지 못한 언어가 튀어나올 때 돌아오는 대답은 백이면 백 다음과 같다. "몰랐어? 이게 현실이잖아. 왜 아닌 척 하니?"

이런 식의 논의가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포장되어 유통되면 유통될수록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체는 더욱 심화될 뿐이다. 특히 "예술형 작가"라는 말에 담긴 비하와 질시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싯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손이 밉더라.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박정희와 조영일의 차이를 명시해보자. 박정희는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를 비판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손놀림을 찬양했다. 반면 조영일은 "예술형 작가"들을 비판하면서 "생계형 여성작가"들을 "옹호대상"으로 삼았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적었는데, 적고 보니 더욱, 두 사람의 논의 구조가 갖는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 물론 여공과 "생계형 여성작가"는 같지 않다. 그러나 양자 모두 '예술한다는 년'들의 대립쌍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지닌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이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은 그리 큰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3D업종에 종사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경제적 사실을 진술할 때조차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하기 위해, 그 문장 안에 사실관계나 논리의 오류는 없는지에 대해 노심초사한다. 그렇다면 비평의 언어가 그만큼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솔까말 가부장제가 엄존하고' 같은 결론을 제시해버리는 광경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조영일이 이 글을 읽는다 해도 내가 지적하는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성주의적 감수성'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적의 적은 친구', '반대의 반대는 참'과 같은 단순한 논리적 오류에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성 작가들이 왜 늘어났는지 알기 위해 남성 작가들이 왜 줄어들었는지를 알아보는' 그의 성향이 꽤 일관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영일은 말한다. "내가 공격당한 배경에는 최고은씨의 죽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참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나만큼 문화계(문학계)의 불공정함을 문제삼은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링크)

설령 조영일 자신이 문학계의 '모든' 불공정함을 문제삼아왔다 해도, 그가 자신이 지적하고 있었던 문제점 중 하나를 범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 경우 비판받지 않을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중학생용 논술 교재에도 안 나올법한, 너무도 당연한 오류의 예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미 그는 '예술가형 여성 작가'와 '생계형 여성 작가'를 구분함으로써 문화계와 문학계를 넘어 인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불공정함에 반기를 들기는 커녕 참여해버렸다. 이건 이명박을 싫어하는 나를 왜 진보 진영에서 욕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썼을까?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서로 멘션을 주고받아본 적도 없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평의 언어가 오히려 그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 그에 대해 직감하고 반발하는 이들 앞에서 당당해야 할 글의 주인이 희생자 놀이를 해버리는 것, 그 광경을 보고 젠체하며 이성적인 사람 행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등을 나는 참을 수 없다.

이 논쟁에서 조영일이 보여준 것과 같은 언어적 구조는 최대한 지양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발언권을 빼앗아버리는 것, 대상화하고 분할하여 통치하고자 하는 담론적 움직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역할을 조영일을 비판하는 것으로 한정짓도록 하겠다. 소수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소수자가 아닌 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은 침묵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침묵으로 지금까지 표현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다.

2011-01-22

무엇이 정의인가

저는 입대 직전까지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2010년 10월 11일 입대하였는데, 그날 자정까지 원고를 다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혼자 쓴 책은 아니고, 장정일, 서동진, 이택광, 박홍규 등 쟁쟁한 필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무엇이 정의인가?』이며, 제목이 말해주는 바 그대로, 2010년 하나의 '사건'이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지성계의 맞대응을 총집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무엇이 정의인가?』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인문학 주간 2위에 올라있습니다. 부동의 종합 1위인 『정의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원고를 써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께 자신있게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칸트의 '순수 이성 개념 연역'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으로서, 샌델이 비판하는 칸트의 입장에서 역습을 시도하였습니다. 저는 샌델이 말하는 '정의'와 '도덕'의 개념이, 그 개념 자체의 의미에 부합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책의 본문을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필자들의 글도 나름의 입장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 한 권의 책에 포함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1년이 밝았습니다. 제가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없는 시간동안, 한국의 지성계가 좀 더 나은 담론과 논의의 구조를 획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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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6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자대에 온지 나흘째 되는 금요일이다. 화요일부터 겪었던 일들을 통해 나는,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현재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권위 혹은 권력관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뜻한다.

579일 남은 군 복무기간이 한없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설령 나의 신병기간이 끝나고 내가 상당한 고참이 되어 지금처럼 불편하게 살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군생활 자체가 편안한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입대 순서에 따라 경례해야 하는 것 만큼이나, 같은 순서로 경례를 받는 것 역시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이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남아있어야 한다는 당위적 지향성,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벗어난 고립된 상태의 개인의 존재 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개인들 사이에서의 경제적 정의의 실현에 관심이 많고, 계층간의 갈등과 불화가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에 의해 해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본질적 측면, 혹은 '개인성'의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고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

많은 경우 개인의 자유란 궁극적으로 '선택의 자유'라고 간주된다. 나를 가스실에 처넣겠다는 나치를 향해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경우에도 박탈될 수 없는 선택의 자유.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은, 그러한 종류의 자유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군대라는 것이다. KTA 3주차 월요일, 카투사 플래너 사용방법을 교육받을 때의 일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대한 감상적인 요약과 함께, 어떤 경우에도 모든 일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통속적 불교의 메시지로 그 내용은 쪼그라들어 버렸다. 비약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것을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으로 놓고 일방의 손을 들어주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군대에서 가르친다니.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떠한 경우에도 양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 상황에 처한 개인이 아닌 그 개인을 통제하는 시스템에 의해 발화되는 순간, 그것은 그 궁극적 자유를 제외한 수많은 것들을 시스템이 임의로 제한하는 행동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작동하게 된다. 군대 오니까 좆같지? 그래도 네게는 이 상황 속에서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자기개발서적을 읽는 군인들. 자신의 꼬리를 물어뜯고 있는 자유주의. 가장 휴머니즘적으로 표현된 자유주의의 한 모습이 군대 내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으로 이야기되는 광경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개인들의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체제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외부로부터의 구체적인 억압과는 별개로 나는 그 억압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은 그와 상당히 다른 결을 띈다. 그것 역시 근본적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오직 내면 속에서 시작되고 결정되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 선언은 나의 외면에 있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 그 대상과의 구체적인 관계,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 등.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명제를 발화하는 주체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다. 적어도 '나는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주체보다는 그렇다. 물론 4성 장군도 전자와 같은 말을 할 수야 있지만 그것은 상당히 넌센스처럼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우, 자유주의는 내면적 자유를 향해 침잠해가는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본래적 의도와 상반된다.

두 명제의 차이는 왜 자유주의가 끝까지 부정적인 서술에 더 가깝게 머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가진 힘과 그것을 제약하는 외부적인 권력의 대립관계를 전제한다. 그런데 만약 개인의 힘을 긍정적으로 서술한다면, 그러한 전개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권력은 그 긍정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약한다. 군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네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을 제공할 수도 있는 권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텅 빈 서술은 그와 정 반대다. 그것은 화자에게는 긍정적인 서술이 아니나, 청자 즉 권력에게는 분명 어떠한 행위를 하겠다는 예고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그와 같은 표현을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는 대단히 양면적이고 역설적인 사상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권력론과 인식론을 함유하며, 동시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론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나는 바로 그런 것들을 연구하고 싶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는 자유 속에서.

2011-01-09

2010년 독서 목록

  1. 20100106 - 수디르 벤카테시, 김영선 옮김, 『괴짜 사회학』(서울: 김영사, 2009).

  2. 20100113 - 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옮김, 『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서울: 이후, 2008).

  3. 20100113 - 도모노 노리오, 이명희 옮김, 『행동경제학』(서울: 지형, 2007).

  4. 20100115 - 로버트 레브나스코니, 변광배 옮김, 『How to Read 사르트르』(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8).

  5. 20100123 - 강양구, 강이현, 『밥상혁명』(서울: 살림터, 2009).

  6. 20100124 - 비외른 롬보르, 김기응 옮김, 『쿨잇』(경기도 파주: 살림, 2008).

  7. 20100128 - 카토 요시코, 강현정 옮김, 『내 고양이 오래 살게 하는 50가지 방법』(서울: 해든아침, 2009).

  8. 20100202 - 트와일라 타프, 노진선 옮김,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서울: 문예출판사, 2006).

  9. 20100214 - 로빈 킨로스, 최성민 옮김, 『현대 타이포그라피 - 비판적 역사 에세이』(경기도 용인: 스펙터프레스, 2009).

  10. 20100216 - 강영안,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11. 20100217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문화와 가치』(서울: 책세상, 2006).

  12. 20100227 - 마크 에론손, 장석봉 옮김, 『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서울: 이후, 2002).

  13.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7).

  14.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6).

  15.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 기초편』(서울: 교우사, 2009).

  16.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I) 활용편』(서울: 교우사, 2009).

  17. 20100328 - Debra Cameron, James Elliott, et al., Learning Gnu Emacs (3rd. ed.), (Sebastopol, CA, USA: O'Reilly, 2005).

  18. 20100417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서울: 나남출판, 1994).

  19. 20100517 - 클레어 베상, 박슬라 옮김, 『캣 위스퍼러』(서울: 보누스, 2006).

  20. 20100530 - 캐스 선스타인, 이기동 옮김, 『루머』(서울: 프리뷰, 2009).

  21. 20100610 -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서울: 한겨레신문사, 2003).

  22. 20100702 - 헌터 S. 톰슨, 장호연 옮김,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서울: 마티, 2010).

  23. 20100702 - 플라톤, 이정호 옮김, 『메넥세노스』(서울: 이제이북스, 2008).

  24. 20100706 -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7).

  25. 20100708 - 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2』(서울: 개마고원, 2009).

  26. 20100713 - 아우구스띠누스, 성염 역주, 『자유의지론』(대구: 분도출판사, 1998).

  27. 20100713 - 살바토레 세티스, 김운찬 옮김, 『고전의 미래』(서울: 길, 2009).

  28. 20100715 - 그레고어 쉘겐, 김현성 옮김, 『빌리 브란트』(서울: 빗살무늬, 2003).

  29. 20100720 - Terry Eagleton, Reason, Faith, and Revolution —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30. 20100722 - 조지 오웰, 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서울: 민음사, 2001).

  31. 20100725 - 김혜나, 『제리』(서울: 민음사, 2010).

  32. 20100810 - 프란츠 파농,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서울: 인간사랑, 1998).

  33. 20100811 -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서울: 에코의서재, 2009).

  34. 20100828 - 버락 오바마, 이경식 옮김,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35. 20100829 - 로버트 미지크, 서경홍 옮김, 『좌파들의 반항 - 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경기도 파주: 들녘, 2010).

  36. 20100905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서울: 바오, 2009).

  37. 20100910 - 로버트 라이시, 형선호 옮김, 『슈퍼자본주의』(서울: 김영사, 2008).

  38. 20100913 - 알레시오 레오나르디, 얀 미덴도르프, 윤선일 옮김, 『한 줄의 활자』(서울: 안그라픽스, 2010).

  39. 20100920 - 얼 쇼리스, 고병헌·이병곤·임정아 옮김, 『희망의 인문학』(서울: 이매진, 2009), 개정판.

  40. 20100921 -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10).

  41. 20100929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실천이성비판』(서울: 아카넷, 2002).

  42. 20101225 - Malcolm Gladwell, What The Dog Saw(New York: Little Brown, 2009).

  43. 20101227 - 제임스 트레필, 정주연 옮김, 『산꼭대기의 과학자들』(서울: 지호, 2003).

  44. 20101227 - 장 자크 루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서울: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