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3

[북리뷰]‘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

[북리뷰]‘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

불멸화 위원회
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이후·1만6500원

그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다윈과 동시에 진화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 선택 이론을 발견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심령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의 심령주의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죽은 이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심령주의를 “전적으로 사실에 근거한 과학”이라고 옹호했다.

19세기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자력 같은 전혀 모르던 에너지가 발견되거나, 플루토늄 같은 원소의 존재가 확인되거나, 전화처럼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 모든 것들이 과학의 산물이었다. 과학은 인류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원동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과학의 힘이 한계를 모르고 뻗쳐나간다면, 그것은 마땅히 죽음마저 정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으로 죽음의 벽을 넘겠다는 발상은 이토록 자연스러웠다. 과학 그 자체는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 과학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심령주의는 심령주의를 주도하던 지식인 계층이 와해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과학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0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재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다. 모든 것에 과학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사적 유물론은 인류 역사의 과학적 전개 원리를 밝히고 그에 따라 혁명의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소련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을 떠올린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영국의 부르주아들과 죽음에의 접근방식이 달랐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이미 죽은 자와의 대화 및 접촉을 시도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20세기의 소련인들은 인간의 육체 그 자체가 죽음을 극복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레닌의 시신은 지금껏 이런 저런 방식을 동원하여 보존되고 있는데, 그것은 언젠가 그 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 존 그레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과 평화를 논하며 이 책을 마무리짓는다. 그의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 만한 지점도 있는 반면, 어떤 면에서는 다소 싱겁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가이아 이론 등을 받아들여 지구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주창하는 모습을 보면 일종의 배신감이 들기까지 한다. 대단히 유려하면서도 신랄한 문체로 구시대의 오류를 해체하던 본문과 달리, 결론이 너무도 ‘온건’하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이후, 그의 상태에 대한 뉴스가 연일 신문 지면을 뒤덮었다. ‘심장 스텐스’니 ‘저체온 요법’이니 하는 생소한 의학용어들을 접하노라면 바로 이 책, <불멸화 위원회>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멀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과거를 반추하며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6.03ㅣ주간경향 1078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261745001&code=116

2014-05-20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민음사·2만원

많은 이들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고, 동시에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 채 오해하고 있다면, 그 책은 고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나와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오늘 이야기할 <희생양> 역시 바로 그러한 고전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책이다.

르네 지라르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신화를 검토하여 그 속에서 한 가지의 공통 요소를 추출해낸다. 하나의 희생물을 폭력과 죽음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다른 잠재적인 희생양들의 안위를 일시적으로나마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신화 속에 이러한 희생 제의의 과정이 녹아들어 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신화가 집단이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박해를 품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 소수자의 범주는 매우 넓으면서 동시에 극단적이다. 신체 및 정신 장애인뿐 아니라 너무도 아름답거나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 한 사회 내의 지배집단에 속하지 않는 소수파의 누군가, 외국인 혹은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 등이 모두 쉽사리 희생양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앞서 제시된 예시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시피, 하나의 희생물을 바침으로써 모두의 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제의 구도는 아주 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르네 지라르의 시선 역시 역사 속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종횡무진으로 훑어나간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등장인물들부터 프랑스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기에 흥분한 군중 앞에 손쉽게 희생양으로 바쳐질 수 있었던 18세기의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그 목록은 하염없이 길게 이어진다.

비교적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 희생양을 만드는 신화적 구조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종종 반복된다고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결코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실은 인류가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강변한다. 예수가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군중 앞에 내밀어 ‘스캔들’을 벌이던 그 때 이후로 인류는 기존의 신화적 집단폭력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지라르의 핵심 주장이다.

지라르는 성경 속에도 희생양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바와 달리, 단지 그 사실만을 연거푸 확인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거듭되는 희생양 구조를 적극적으로 돌파해낸 이가 바로 예수이며, 예수의 희생 이후로는 동일한 폭력의 구조가 온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적인 해석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한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구조적 폭력, 반복되는 모순들을 바라보며 르네 지라르라는 인문학자는 어떻게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말이다. 인문학의 역할이란 구조적 폭력을 개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어떻게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2014.05.20ㅣ주간경향 1076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121551431&code=116

2014-05-14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세월호 참사는 언론 참사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 시점부터 그렇다.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구조의 손길이 좀 더 빨리 현장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오보의 책임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2014년 4월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기울었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도 함께 뒤집혀버렸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참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버렸다. 이것은 이른바 ‘기성세대’들이 포진하고 있는 언론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언론을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언론 참사의 진행 추이를 되짚어보도록 하자.

언론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오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구조된 단원고 학생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학생의 친구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거나, 희대의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검색어 노출을 노린 보험사 간접광고 기사를 내보내는 등의 일들 말이다. 막장 보도, 패륜 보도, 무슨 말을 붙여도 개운치 않다.

그 뒤를 따른 것은 희망 고문이었다. 어쩌면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몰 후 본격적인 구조가 시작되었을 시점부터 언론은 ‘에어포켓’과 ‘희망’만을 하염없이 반복했다. 60시간 동안 에어포켓 속에서 탄산음료를 마시며 버틴 누군가의 사례가 꾸준히 언론에 등장했다. 그가 몸을 담고 있던 나이지리아 인근의 해수 온도가 높았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에어포켓만 있으면 72시간까지 생존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만이 이명(耳鳴)처럼 울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에어포켓에라도 한줌의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가족들의 심정을 도외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국민 전체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객관적 상황을 인식하도록 도와야 할 언론이, 근거도 논리도 없이 막연한 ‘희망’만을 사흘 넘도록 떠들어대는 그 광경의 초현실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으며 생존자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이미 침몰 당일 ‘JTBC 뉴스 9’에서 보도된 바 있다.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백점기 교수는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격실이 폐쇄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배의 구조상 공기 주입을 하더라도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언론계의 백전노장 손석희마저도 그 말에 충격을 받고 10여초간 할 말을 잊었다.

물론 그 전문가의 의견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희망과 희망사항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언론은 희망사항을 보도해서는 안된다. 희망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입각한 현실 인식과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에어포켓’이니 ‘골든타임’이니 하는 네 글자짜리 단어 퍼뜨리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다 한들 뒤집힌 배 속에서 생존자를 무사히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역시 많은 전문가들이 일찌감치 의견을 모았지만, 그것은 언론이 보도하고자 하는 ‘희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다이빙 벨’과 관련한 일부 언론들의 보도를 짚어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종인 알파잠수 대표는 세월호 침몰 사흘째인 4월18일부터 다이빙 벨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16일 침몰 당일에는 에어포켓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던 손석희의 JTBC가, 이틀 후에는 이종인 대표를 인터뷰해 “다이빙 벨은 조류와 상관 없이 20시간 연속 작업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 5월11일 이종인 대표가 현장에서 자진 철수할 때까지 다이빙 벨을 둘러싼 논란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 모두가 초반의 구조 실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해경의 출동은 늦었거나, 적어도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 및 선박직 승무원들은 제 목숨을 건지는 일에 급급했다. 청와대는 스스로 ‘컨트롤타워’ 역할을 자임해 떠맡지 않았고, 그래서 부처 간 혼선이 더욱 가중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 더한다 해도, 다이빙 벨이 ‘해결사’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전원 구조’ 오보, 막장 인터뷰, 에어포켓 희망 고문 등의 사안을 검토해보면, 진보 언론이라고 분류되는 곳들은 그렇지 않은 언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의 품위와 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듯하다. 그러나 다이빙 벨 논란으로 접어들자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갔다. 구조 활동을 벌이는 언딘이라는 민간업체와 해경에 대한 불신이 다이빙 벨에 담겨 여론의 바닷속에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이빙 벨 파동은 헛소동으로 마무리됐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0년대 초, 나는 당시 대학에 입학한 수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안티조선 운동과 그 중심에 서 있던 논객들의 세례를 받았다. 감히 이런 주어를 써도 된다면, 우리는, 언론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가 가라앉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시민적 언론운동이 발흥하고 꽃피었던 그 시절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극히 부정적이다. 언론 소비자 운동, 언론을 바라보는 시민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른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언론 내부의 구조를 바꾸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특정 언론사들에 대한 배타적 적대와 지지의 진영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현장에서 ‘기레기’라고 욕을 먹는 KBS와 MBC의 일선 기자들이 집단 항명에 나서고 있지만 시민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언론을 통해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이끄는 이 사회 속에서 희망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렵다는 공포에 질려가고 있다. 그들은 모든 신문과 방송을 불신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구조받을 수 있다고 가짜 희망을 떠들어대던, 세월호 선내 방송 취급을 하고 있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한국 언론은, 지금부터 스스로를 구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입력 : 2014-05-14 21:25:45ㅣ수정 : 2014-05-16 17:52: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142125455&code=990100&s_code=ao189

2014-05-06

[북리뷰]초대형 참사는 작은 사고로부터

 [북리뷰]초대형 참사는 작은 사고로부터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
찰스 페로 지음·김태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2만5000원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모든 것이 멈추고 있다.

물론 이 비극 앞에서 예전과 같은 삶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재난이 없었더라면 유지되었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켜야 할 소중한 삶을 모두 포기해버린다면 구태여 안전을 추구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픔을 딛고, 책을 읽는 것이다.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를 꺼내들었다. ‘Normal Accidents’라는 원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1984년 첫 출간된 이래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대형사고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뒤흔든 오늘날의 고전이다.

원자력발전소, 화학공장, 비행기, 배 등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자. 이것들은 모두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은 대단히 중층적인 하위 체계들을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하위 요소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만약 그 하위 요소들 가운데 몇 개가 동시에 오작동하거나 실수하거나 운이 나쁘게도 고장난다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엄청난 재앙이 터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이렇듯 “상호작용성 복잡성과 긴밀한 연계성이라는 시스템의 속성에 따라 발생하는 사고를 ‘정상 사고’ 혹은 ‘시스템 사고’라고 한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 밝혀진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되짚어 보자. 심지어 인천항에 짙은 안개가 껴 출항이 2시간 늦어진 것마저도, 그래서 항로를 변경하여 평소에는 가지 않는 다도해 해역을 통과한 것마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상적’인 행위였다. 세월호에는 다른 것들이 무사하다는 전제 하에 한 발짝씩 ‘유도리’ 있게 허용된 부실 안전 요소들이 넘쳐났다. 컨테이너 박스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고, 실려 있던 자동차 역시 그러하였으며, 20년 된 배를 마구잡이로 증축한 탓에 무게중심은 한껏 높아진 채 균형을 잃은 상태였다.

여객선이라는 기계적 시스템뿐 아니라, 해상 재난 구조라는 제도적 시스템마저도 ‘정상 사고’를 불러오기에 최적화된 상황이었다. 해난 구조 창구는 일원화되어 있지 않았고, 항해하는 선박들은 사고 시 진도 VTS가 아닌 제주 VTS로 무전을 보내는 관행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1차 구조 의무자인 선장 및 고급 선원들은 재난 구조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승객을 구조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소한 ‘정상적’ 부실과 관행이 뒤엉켜, 초대형 참사를 일으키고 만 것이다.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는 직접적으로 미국의 스리마일 섬 핵발전소 사고에서 영향을 받아 태어난 책이다. 스리마일 발전소 사건도 그랬다. 평소에 늘 발생하던 그런 작은 사건들이 몇 개 동시에 발생하고, 그것들이 서로 뒤엉켜 다른 요소들을 마비시키면서, 초대형 참사가 발생할 뻔했다. 이 책은 그 사건에 대한 미국 지성계의 고찰이 낳은 것이다.

세월호가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던 그 시점, 정부는 이미 수명을 넘긴 고리 원전을 재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정상 사고’의 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막아야 한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2014.05.06ㅣ주간경향 1074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4281747071&code=116

2014-05-01

[GQ]지금 누가 누굴 가르치나?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치나?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계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계몽이 과도해서 문제인 시대로 보인다. 다들 똑똑하고 이것저것 잘도 알고 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Sapere aude!” 칸트는 또한 1784년을 사는 독일 대중에게 외쳤다. 사이버 세계를 호령하는 오늘날 한국의 대중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말이다. 종로 3가 맛집 리스트부터 곽정은 에디터의 성형수술 전 얼굴, 김연아 선수 남자친구 부모님의 재산 현황까지 모든 것을 과감히 알고자 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네티즌 탐정단을 꾸려 특정인의 ‘신상을 털어’ 진실 여부까지 검증하고 나서니 말이다.

유명인의 가십 차원이 아니더라도 사정은 내내 엇비슷하다. 정치의 영역에서, 더 이상 지식과 정보에 기반한 설득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국민의 소득은 양극화되고, 노령화로 인해 경제 인구는 대폭 줄어드는데, 소외된 노인의 자살률은 극단적으로 높다. 아기는 태어나지 않고 노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니, 더 끔찍한 것은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나도 잘 알아. 근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계몽 과잉의 시대. 그리하여 계몽이 불가능한 시대. 어쩌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됐을까?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면 좀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이렇게. 계몽이 가능했던 시대가 있었다면, 그때는 왜 그것이 가능했거나, 가능한 것처럼 보였을까? 가령 한국에서는 수많은 대학생이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이라는 것을 읽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길로 나선 1980년대가 있었다. 또한 영화가 됐건 음악이 됐건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취향을 건설하고자 애썼고, 그랬기에 어찌어찌 구입한 음반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마르고 닳도록 돌리며 작가의 정수를 흡수하고자 노력하던 1990년대도 있었다. 21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스스로를 계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80년대건 90년대건,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장님 코끼리 더듬듯 어렵게 수입된 해외 선진 문물을 가까스로, 목마른 사슴이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듯 향유해야 했다. 불문학자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를 펼쳐보자. 가장 먼저 나오는 글 ‘과거도 착취당한다’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1970년 대, 당시 외국 책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저자는 회고한다. 외국의 서적상에게 우편으로 주문을 하고, 외환사용허가신청서를 작성해 우편환으로 송금을 하고, 짧게는 석 달, 길게는 반 년가량 기다리면 한국에 책이 도착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어렵게 한국땅을 밟은 책은, 최종적으로 서대문 국제우체국 창구에 앉아있는 ‘미스 아무개’의 허락이 없는 한 독자의 손에 도착하지 못한다. 그냥 주면 될 것을 미스 아무개는 청년 황현산을 굳이 다음 주에 다시 오라며 돌려보내고, 심지어 내용을 잘 알면서 책은 왜 사냐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해 가로대를 뛰어넘어 창구로 난입해 손에 책을 넣는다. 저자 황현산은 이 일화를 곱씹으며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고 회고한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유신시대의 식자층은, 황현산이 분노로 기억하는 바로 그런 검열과 통제 기구 때문에, 또한 당시만 해도 정보통신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쉽게 지식인일 수 있었다. 1970년대의 황현산이라면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었을 문서를, 지금 우리들은 ‘마르크시스트 인터넷 아카이브 www.marxists.org’ 에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열람하고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오늘날 누가 그렇게 열심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겠냐만은, ‘그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국가의 탄압과 감시를 받는 동시에 대중의 존경어린 시선까지 받을 수 있던 시절은 애저녁에 끝났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90년대 ‘삐짜’ 테이프로 그렇게 돌려봤던 전설의 명작들을 이제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각자의 모니터를 통해 손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한탄은 오래된 것이기에 이 지면에서 또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계 어디에나 DVD를 배송해주는 아마존이 영화 마니아의 아우라를 벗겼다는 볼멘소리도 벌써 10년 전 일이다. 한때 모든 이의 스승처럼 보였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지금 대중으로부터 어떤 대우 혹은 취급을 받고 있나. 음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록의 역사와 혁명 정신을 대중에게 설파했던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현재 <음담패설>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변기요정’ 캐릭터로 출연한다. 음악에 대한 그의 설명이 길고 지지부진하다 싶으면, 김구라가 이내 변기를 작동시켜 물을 내려버린다.

지식의 독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두 번째 현상을 야기한다. 같은 세대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1980년대로 돌아가 보자. 당시 운동권은 이른바 NL과 PD로 분화되어 있었다. NL 중에서도 주사파의 이론적 대부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이었고, PD는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바이블이었다.

김영환이 <강철서신>을 완성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 이진경이 이른바 ‘사사방’을 펴낸 것은 대학원에 다니던 24세 때의 일이다. 80년대에는, 20대가 쓴 책을 본 20대가 자발적으로 뭉쳐서 막강한 권력과 맞섰다. 청년 세대의 문제를 따로 끄집어내 논의하고 하소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청년이 온 세상의 문제를 자신의 어깨 위에 대뜸 짊어졌기 때문이다. 권력과 맞선다는 사명감, 제한된 정보를 독점적으로 입수하고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 거기에 대학 졸업 후의 삶을 근심할 필요가 없었던 고도성장기의 풍요가 맞물려, 청년들은 계몽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일 수 있었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황현산의 말이다. 가슴은 의기 혹은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꽉 차 있었고, 머리에는 새로운 지식을 채워넣을 공간이 남아 있었다. 당시 청년 세대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스스로를 계몽했다.

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문화의 열풍이 가라앉고 나니, 서점가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의 눅눅한 바람이 불고 있다. 굳이 ‘눅눅하다’는 수식어를 쓰는 이유는, 이 인문학 바람이 띠는 복고적인, 적어도 현재적이지 않은 분위기 때문이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이 문학 담론을 이끌었던 1970년대에는, 같은 세대의 젊은 작가들이 소설을 쓰고 비평을 하며 서로를 견인해 나갔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앞서 언급한대로 또래의 ‘젊은’ 지적 기반 위에서 수행되었다. 1990년대 영화비평을 이끈 정성일은 1959년생으로, 영화 잡지 <키노>를 창간할 당시 만으로 36세였다.

반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계몽의 객체에 머문다. 그러면서 멘토를 구하고 스승을 찾으며,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의 존재를 희구한다. 앞서 언급한 황현산이나, 최근 두 권의 칼럼집을 낸 문학평론가 도정일 같은 원로들이 새삼 각광을 받는 이유를 그렇게 해석해볼 수 있다. 그들의 책은 모두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쌓인 원고를 묶은 것이다. 바로 지난달의 정치적 이슈를 두고 책을 쓰고 논쟁하던 논객의 시대가 끝나니, 원로 인문학자들이 오래 묵은 원고의 먼지를 털어 책으로 엮고 있다.

청년들이 서로를 계몽해가며 정권을 뒤엎겠노라, 영화판을 발칵 뒤집겠노라 날뛰던 시절은 끝났다. 계몽과 운동의 시대는 실은 하나였다. 순차적으로 같이 시작해서, 동시에 따로 끝났다. 이런 세상에서 계몽이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냐고, 강연을 나가면 종종 질문 섞인 눈빛과 마주친다.

칸트가 살던 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위대한 철학자에게 계몽이란 대체 무엇인지, 대중은 스스로 미성년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는데도 과연 계몽이 가능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다. 당시에는 대통령을 선거로 뽑지도 않았고, 귀족과 평민의 계급이 엄연히 법적으로 나뉜 시대였다. 계몽주의를 공부하던 귀족에게 찾아가 ‘재미삼아’ 평등한 대우를 요구한 뒤, 곧장 뺨을 맞은 것은 루소였던가, 볼테르였던가. 그리고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쓴 지 5년이 지난 1789년에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다.

어쩌면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이치와 같을까? 칸트는 “우리는 지금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계몽의 시대는 현재 진행형이다.

201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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