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6

[북리뷰] '알파고 쇼크', 인류의 미래를 묻는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만2천원.

'인공지능'(AI). 최근 우리 사회를 새삼스레 달구고 있는 화두다.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 대국에서 알파고가 첫 승을 거두기 시작한 후 사람들은 AI와 제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사라질 일자리 등에 대해 분분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구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던 '스푸트니크 쇼크'처럼, '알파고 쇼크'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대체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 대해, 혹은 '지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에 대해 축적되어 있는 선행 논의가 없다보니,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보도 혹은 '인문학적 통찰'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 다른가? 무엇이 우리를 유인원의 한 갈래에서 '인공지능의 창조주'까지 도달하게 한 것일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대담한 질문과 그에 답하는 서술로 인류 역사를 관통한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19쪽)

유발 하라리는 모든 논의에 앞서 '인간'이라는 범주를 탈신비화한다. 그 어떤 '인문적' 관점도 배제한 채, 오직 '호모 사피엔스'라는 유인원의 한 종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또 다른 유인원인 네안데르탈인과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을 통해 복잡하고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더욱 효율적이며 날카로운 무기와 발달된 사냥 체계를 얻었다.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로 자리매김한다.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낳았고, 잉여생산물은 그 생산물을 독점하는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이 이 시점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적 부족의 최대 규모인 150여 명을 넘어서는 사회를 구성하려면 윤리, 도덕, 법, 계급 등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원리가 필요하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질서라고 늘 주장해야"(169쪽)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되어 오던 인간의 역사는 과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었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357쪽) 과학혁명은 신, 과거의 현자, 기타 전승되는 문헌의 저자들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수천년 동안의 가정을 폐기했다. 그 결과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의 영역에까지 과학 기술의 힘으로 침범해 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농업혁명 그 자체가 장기간에 걸친 유전자 조작이었다. 알파고 등 다양한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여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는 것 또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파고 쇼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만들어왔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2016.03.29ㅣ주간경향 116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3-13

[별별시선]박근혜 vs 알파고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인공지능 알파고와 박근혜 대통령이 바둑 대결을 한다면? 당연히 알파고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세돌 9단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는 알파고인 만큼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판을 키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 전체를 무대로 삼아보는 것이다. 박근혜 대신 알파고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릇을 한다면 과연 누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나갈 것인가.

알파고가 화제라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이세돌 9단이 첫 고배를 마셨던 그 날부터 인터넷을 후끈 달군 주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이제 컴퓨터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인가?

여기서 잠시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논문의 해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알파고는 기존의 게임용 AI와 마찬가지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에 의존한다. 혁신적인 자기학습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의 바둑 기보를 연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례를 놓고 볼 때 좋은 수’를 추려낸다. 그리고 남은 선택지를 두고 계산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은 게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창의와 직관이 어떠한 종류의 계산 과정이다. 다만 사람은 그 계산을 “승부수, 감, 두터움” 같은 식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그에 대해 서봉수 9단은 이렇게 말한다. “수 자체를 모르니까 그냥 감각에 의존해서 이런 정도면 무난하지 않으냐, 이런 식의 표현을 하죠.”

이번 대국에서 확인된 것은 바둑 역시 하나의 게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 포커, 화투, 체커, 체스, 오델로, 지뢰 찾기까지, 모든 게임은 규칙을 지닌 계산 과정에 의해 진행되므로,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룰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컴퓨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년층과 ‘여론 주도 세력’인 중장년층의 반응이 갈라진다. 컴퓨터가 인간의 고유 영역인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었다고 주류 언론은 연일 호들갑이다. ‘알파고 쇼크’에 우울증에 빠졌다는 시민의 목소리,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우려 등이 이어진다.

반면 청년들은 비교적 덤덤하다. 바둑은 게임이고, 언젠가는 컴퓨터가 최고의 프로 기사를 이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호들갑스러운 우려에 대해서도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천연지능’보다는 우리를 합리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우리 사장도 알파고로 바뀌면 좋겠는데?

자, 그러므로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박근혜 대 알파고. 과연 누가 더 대한민국을 잘 다스릴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확인한바, 알파고는 기존의 선례를 충실히 검토하고, 그중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던 사례를 따른다. 그 속에서 최선의 미시적 판단을 내린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훌륭한 의사결정권자의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합리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사람이 ‘인간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무서운가? 만약 당신이 의사결정권자에 가깝다면 인공지능이 두려울 것이다. 반대로 남의 의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계’가 나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시간과 데이터가 제공된다면, 알파고가 박근혜보다 더 나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심각하다며 기업들이 신입사원 초임을 삭감하도록 한다거나, ‘증세 없는 복지’를 운운하는 것 등은, 알파고의 눈으로 볼 때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난센스다.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국정 운영을 기대한다.


입력 : 2016.03.13 21:01:11 수정 : 2016.03.13 21:1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132101115&code=990100#csidxb0730909049cf82913583dcda5ddbf8

2016-03-03

[북리뷰] 정치의 계절, 지식인의 역할을 묻는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이학사, 8천원


내가 그에게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식인이라니, 그런 구닥다리같은 용어를 사용하냐'며 되려 핀잔을 했다. 나는 그 대화를 나눈 후 문득 궁금해졌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진정 오늘날 효용을 다한 것일까. 20세기의 중후반부, 21세기의 초반부와 달리, 2010년대에는 그 단어가 그저 오작동할 뿐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르트르 뿐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사르트르가 일본의 도쿄와 교토에서 1965년 9월과 10월에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정리하여 묶은 책이다. 물론 사르트르 특유의 실존주의적, 다시 말해 휴머니즘적 관점을 투영하여 재해석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들이 제시되어 있긴 하지만, 애초부터 강연을 염두에 둔 원고였던 탓에 집중해서 읽으면 전제 지식이 없어도 어렵잖게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

첫째 날 하이데거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식인에 대해 사람들이 쏟아붓는 불만과 비판을 종합하여, 사르트르는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12쪽)이라는 가설적 정의를 끌어낸다. 가령 드레퓌스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레퓌스라는 한 군인과 군 참모부의 갈등이다.

그러나 자칭 타칭 지식인들은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 그 중 군인은 없었다. 소설을 잘 쓰는 사람, 시를 잘 짓는 사람,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과학자 등이 '참견'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얻은 명망을 바탕으로, 그러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분야의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개입하는 사람들이다.

강연은 다음날로 이어진다. "지식인의 기능"에서 사르트르는 어떻게 특정 분야의 지식만을 쌓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선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도전한다. 만약 그 지식인이 '기능적 지식인'의 위치에 머무르려고만 한다면 그는 부르주아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일 뿐 진정 보편적인 지식인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영역 속에서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입니다."(64쪽)

사르트르는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으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이러한 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보편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지 않더라도, 보편성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그의 말은 여전한 울림을 지닌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호남 사람, 이주민 등 다양한 이름 하에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해석'은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의 존재를 놓고 볼 때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사르트르는 오직 글을 쓸 뿐인 작가를 다른 분야의 지식인과 다르게 여긴다. 작가의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보편성을 창조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작가와 갖는 진정한 관계는 비-지식으로 남는 것"(139쪽)이라는 말은, 작가의 작품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식인에게 그 어떤 '보편성'도 기대하지 않는다. 화끈하게 '정치적 스탠스'를 밝히고 편을 드는 것이 더욱 정당하다는 인식 탓이다. 한때는 그게 옳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인은 '보편성'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의 편에 서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한 풍토가 되살아나기를 희망한다.


2016-02-29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정보수사기관을 만든다."

정보부법은 헌법보다 세다

5월 18일 김종필이 서정순(행정개혁위원장 지냄), 이영근(7, 9, 10대 의원), 김병학(중정 국장 지냄) 세 중령을 불렀다. 모두 8기였고 정보계통 출신이었다.
JP와 서정순은 6·25 직전 육군정보국에서 함께 박정희 문관을 모셨다. 이영근도 같은 인연이었다. 그는 특히 CIC(방첩대)로 가서도 정보를 다루었다. 김병학은 HID(첩보부대) 출신이었다.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정보수사기관을 만든다. 셋이서 법을 만들어라.”
정보만 다루는 것이 아니고 수사권, 즉 사람을 잡아 가둘 수 있는 힘을 가지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원형(原型)은 이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는 박정희-JP가 합의한 구상이었다.
서, 이, 김 세 중령은 이화여고 앞 정동호텔에 방을 잡아 자료를 모으고 머리를 쥐어짰다. 윤일균(70년대 후반 중정 차장보 차장 지냄)의 기억에 의하면 이 법을 만드는 데 자신이 56년도에 작성한 논문 <국가정보와 중앙통제>가 참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중 법을 공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무지 법을 조문화하여 만들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JP에게 부탁해 박 장군의 법무참모였던 신직수(7대 정보부장)를 불러왔다.” (이영근 증언)
JP는 역시 용의주도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서-이 팀도 모르게 10기생 문무상(미국이민)에게 또 다른 정보부법 시안을 하청해 놓고 있었다. 나중에 문의 시안은 버려졌다.
JP는 “6월이 오기 전에 정보부법을 만들어야 한다, 정보부가 서야 혁명 과업을 시작한다”며 독촉했다. 서-이 팀은 5월 말 신직수가 다듬은 시안을 중심으로 JP에게 브리핑했다.
6월10일 중앙정보부법이 공포되었다.
실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만든 것이었지만 그 후의 이 나라 역사에 헌법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이었다.
5·16 쿠데타 주체들이 최초로 낸 법은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군인들이 3권을 장악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었다. 한강다리를 건넌 지 20일만인 6월6일 공포했다. 군정이 문서화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6월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중앙정보부법을 공포했으니까 정보부법의 중요성은 자명해진다. 이 6월10일은 지금도 국정원 설립기념일로 기려지고 있다.
최고회의법엔 이렇게 씌여졌다.
‘중앙정보부=공산세력의 간접침략과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최고회의에 정보부를 둔다.’(18조)

김충식 지음, 『남산의 부장들』(서울: 폴리티쿠스, 2012), 개정증보판. 61-63쪽.

2016-02-28

[북리뷰] 지금 당장 전국 고등학교에 보내야 할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창비, 9천8백원.


우리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마치 욕설이나 비하의 표현처럼 사용되기도 하는 그런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범위는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만큼 넓어진다. 여성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개그맨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뿐 아니라, 엠마 왓슨이 유년기를 보낸 영국에서도, 그리고 그러한 서구 제국에 의해 식민 지배를 당했던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도, 여전히 페미니즘은 '불편한 단어'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열네살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오콜로마의 집에서 무언가에 대해 언쟁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책에서 배운 설익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지요. 논쟁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한참 주장하고 또 주장했더니 오콜로마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기억납니다. "있잖아, 너 꼭 페미니스트 같아."

그것은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말투에서 알 수 있었지요. "너 꼭 테러 지지자 같아"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거든요.(12쪽)

'페미니스트'라는 비난을 듣는 것, 이것은 지구 어디에서나, 인류의 절반을 구성하는 여성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 겪게 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페미니스트라는 멸칭은 때로, 페미니즘을 제외한 다른 논의의 지점에서 스스로의 진보성을 주장하는 남자들에 의해 발화되는데, 이 또한 마치 동전의 뒷면처럼 세계 어느 곳에서나 관찰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 전혀 반대하지 않을 사람들이, '우리는 이 사회에 현존하는 여성차별에 대해 맞서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나이지리아의 소설가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TED 강연 대본과, 그 외 두 편의 에세이를 합쳐 묶은 작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필요에 의해 한 번 읽고, 이 서평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었다. 두 번째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 소감이 같다. 표제작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오늘날 우리가 페미니즘에 대해 공유할 수 있고, 공유해야 하는 보편적 인식의 최소한이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능란하게 꿰어내는 본문을 지나 곧장 결론으로 향해보자. "그리고 오래전 그날 내가 사전을 찾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아무리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부정적 함의를 덧씌운다 한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변할 수는 없다. 스스로가 차별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자신이 억압의 주체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현대 사회의 기본적 공리인 '모든 사람의 평등'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의 스웨덴어판은 2015년 12월 출간되었다. '스웨덴 여성 로비'라는 단체는 직후 이 책을 스웨덴의 모든 16세 학생들에게 선물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과 달리 스웨덴은 국정교과서를 채택하는 나라가 아닌 만큼, 이 책은 스웨덴의 고등학생들이 가장 널리 읽는 단 한 권의 책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바로 이 책이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 역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주변에 권하기를, 특히 중고등학교에서 활발한 독서와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016.03.01ㅣ주간경향 116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